[조경호]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또 다른 전쟁 (엡 6:10-24)

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또 다른 전쟁 (엡 6:10-24)


최근 미국 갤럽기관에서 조사한 결과 미국인의 68%가 사단의 존재를 믿는다고 대답했다. 사단에 대한 인식여부는 종교적 성향에 대한 객관적 평가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나머지 20%만이 사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으며, 응답자 중 85.5%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미국 내에서 기독교의 종교적 권위는 많이 상실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바울은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6:10,11)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보이지않는 영적 전쟁터다. 사단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그리고 공동체적인 이중적 성숙이 요구된다. 교회는 연합의 공동체를 유지해야 한다. 연합이 깨어질 때 사단의 모든 공격과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 시대의 교회가 연약한 이유는 개인의 성숙이 더디고, 교회의 연합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단은 성숙하지 못하도록, 연합을 깨뜨리기 위해 힘을 다한다.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 아시아센터 소장 프랑수아 고드망은 이라크 전쟁에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사담 후세인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바그다드 국경 수비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운 국제 무질서가 도래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했다. 이라크가 허무하게 굴복한 이유도 수비대가 힘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단의 존재성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12). 사단은 정사와 권세, 세상 주관자로 묘사되고 있다. 세상을 둘러 싼


모든 정치, 경제. 문화,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사단의 권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악의 영들은 악의


본부에서 파송된 대리자들로 그리스도인 들을 실족 시키고 믿음을 무너뜨린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3).


        ‘하나님을 향한 열광이라는 책에서 크리스토퍼 에드워즈는 이단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벗어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1975년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위해 버클리 대학에


등록한 후 주말에 한 농장에서 열리는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참석하고 나서 확인해보니 통일교 문선명이


주관하는 행사였다. 그는 7개월동안 광적인 세뇌교육을 받았고 새로운 메시야 문선명에게 완전히


순종하는 제자로 변화되었다. 문선명의 절대 통치 아래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고자


맹세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문가와 함께 아들을 만나고 거의 1년이 넘는 치료와 상담과 교육 후 광기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사단은 오늘도 비진리와 거짓된 교리, 이단종파의 유혹으로 그리스도인 들을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만든다.


        존 번연은 사단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다고 가르쳤다. 하나는 핍박과 환란


통해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유혹하여 범죄 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마귀가 그리스도인


들을 집중 공격하여 쓰러뜨리는 기본적인 5가지 영역이 있다.


의심.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 멀어질 때 갑자기 의심이 반복된다. 자신이 받은 사명과 구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멈추지 않는다. 의심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믿음으로 모든


의심을 일일이 거절해야 한다. 새가 머리 위로 떠다니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낙심. 낙심한 그리스도인은 쓸모가 없다. 낙심은 영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악의 영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심을 주시는 일이 없다. 사단의 가장 오래된 무기인 낙심은 가장 정확한 공격능력을


발휘한다. 낙심은 거의 실패율이 없다. 낙심에 빠진 그리스도인 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바쁜 생활. 바쁜 생활로 인해 우리의 관심을 영적인 것에서 다른 것에 몰두하게 한다. 모임도 많아지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지며,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면 깨어 경계해야 한다. 너무 바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다. 바쁜 생활은 마치 닻이 끊어져버린 배와 같아서 조금씩 떠밀려가 버린다.


열등감. “넌 할 수 없어 사단은 우리의 무능의식을 자극한다. 하나님께서 너 같은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쉼 없이 우리 안에서 속삭인다.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라는


여인들의 노랫소리에 무너져버렸다. 블레셋 골리앗 장군은 결국 사울을 처형한 결과를 가져왔다.


게으름. 게으름도 사단의 오래된 공격무기 중 하나로 구형무기이지만 강력하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권면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나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리스도인 들과 교회는 완벽한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바울은 두 가지 명령을 하고 있다.


        ꊱ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 하라(10절).


        ꊲ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11,13절).


모든 일상생활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행동해야 한다. 잠시라도 전신갑주를 벗으면 공격 당하기 쉽다.


완전 무장한 채로 식사하고 잠을 자고, 샤워를 해야 한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 들어갈 때


전신갑주를 현관 입구에 벗어두기 때문에 가정에 많은 문제들이 일어난다.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두 가지 목적이 있다.


        11절: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13절: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구약의 열왕기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던 왕들은 거의 모두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만 한다. 6장11-14절에서 대적하라서라는 말이 각각 두 번씩 반복해서 기록되고 있다. 두 번씩


반복해서 권면 하는 것은 영적 전쟁의 중요성 때문이다.


마귀는 공휴일이 없다. 그는 결코 쉬지 않는다. 얻어맞고도 다시 일어난다. 앞으로 들어갈 수 없으면 뒤로


들어간다. 뒤로 들어갈 수 없으면, 지붕이나 바닥에 터널을 뚫고 들어간다. 그는 들어갈 때까지 결코


수고를 멈추지 않는다. 마귀는 교활하며 많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가 실패하면 또 다른 방법으로 그는


이길 때까지 계속해서 공격한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들이 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한다.


        캠브리지의 시므온은 어디로 이사를 가든지 항상 H. 마틴의 초상화를 제일 먼저 새집에 거는 것


잊지 않았다. 그는 매일 마틴의 초상화를 보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 진지하라. 결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파멸의 구덩이로 몰려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결코 너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영적인 깊은 진지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없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진리의 허리띠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14절) 허리띠는 갑옷이 아니라 속옷의 가운데를 묶는 끈이다.


속옷은 겉에서 보이지 않는다. 허리 띠는 힘의 상징이다. 허리 띠는 속 사람을 매는 경건의 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주님과의 오랜 교제를 통해 내면의 경건함을 성숙시켜야 한다. 또한 진리의


허리띠는 성령으로 계시된 복음의 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


에베소서에서 간략하게 복음을 다시 설명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도덕적 부패가 심했다. 그 당시 런던으로 상경한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런던의 뒷골목 전당포에 취지하고,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지난 밤에 일어난 거리의 광란의 현장을 목격했다. 타락한 도시를 바라보며 소년은 절망했다. ‘이 도시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처럼 비참하게 살고싶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읽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3).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인생을 사용하셨다.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기도했던 소년이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쓰였다. 매일 아침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그의 인생의 새로운 허리띠를 매게 해 주셨다.


        의의 흉배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8).


흉배는 가슴과 등을 보호하는 군사장비다. 사단은 매일 우리 마음에 죄책감과 불안과 염려를 쌓아놓는다.


매일 부지런히 치우지 않는다면, 마당은 쓰레기로 넘쳐 날 수 밖에 없다. 죄책감과 염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① 죄책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롬8:33-34). 그리스도의 피가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으며, 한 번 용서를 받은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매일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죄책감에서 자유 해야


한다(요일1:9).


② 염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3). 염려는 곧 믿음이 실종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물이다.


캔자스 주립대학 교수 팀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든다라는 사실에 대해 연구한 결과


뇌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결정


메커니즘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두 개의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신중한 시스템이고 하나


는 감성적인 시스템이다. 계산영역의 신중한 시스템은 수학과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반면, 감성적


시스템은 뇌의 원시적 부분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 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두 가지 시스템이


동시에 작동한다. 염려는 뇌의 원시적 부분이다. 염려는 해결방법이 아니다. 해결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기도해야 한다.


③ 질투.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의의 흉배가 떨어져나간 그리스도인 들의 가슴이 질투심과 열등감의 늪에 빠진다.


심리학 교수 살로비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20%가 질투때문이라고 보고했다. 질투의 임상 학


저자 화이트 박사는 이혼하는 부부의 30%도 질투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질투는 열등감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결함을 질투로 바꾸는 사람은 불행하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든 질투심에서


해방되고, 겸손의 갑옷을 입을 수 있으며, 용서와 평화의 사람으로 공동체의 화목을 추구할 수 있다.


 


        복음의 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15절). 신자들에겐 두 가지 신발이 필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신발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미국 주도의 이라크전쟁이 세계의 종교적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인간의


비극이 종교적 재앙이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발표했다. 이라크 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광범위한 충돌을 가져올 경우 종교가 분열될 위험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함으로 기독교 보수주의단체에서는 중동선교의 새로운 역사의 문이 열렸다고 전제하고 더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남 침례교단엔 이미 2만5천 여명의 전도자들이 중동선교를


위해 떠날 준비를 마쳤다.


        주님께서는 “내가 전도하러 세상에 왔노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 들과 교회는 매일


복음의 신발을 신고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따라 주님을 섬겨야 한다. 해외선교센터에서 세계기독교인구를


발표했다. 20억7662만 명으로 연평균성장률 1.27%가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해외선교사는 43만4천 여명


이며,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매년 1900억 여 시간을 전도에 힘쓰지만 미전도 인구는 0.5% 증가했다.


한 신학생이 선교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고 필리핀에 있는 선교훈련원에 입학하고 언어훈련을


받았으나 한 학기를 마치고 곧 좌절감을 느끼고 말았다. 그는 훈련을 중단하고, 여름방학 동안 필리핀


여행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학기가 끝나고 거리전도 요청을 받고 필리핀 오지로 거리전도를


다니다가 그는 선교에 대한 확실한 소명을 받게 되었다. 좌절감에 빠져있다가 그는 전도여행을 통해


다시 부르심을 받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 전도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에게 생명을 더한다.


 


        믿음의 방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16절). 로마군인의


방패는 몸 전체를 가리는 방패로 길이가 1.2m 너비가 77cm로 두 겹의 나무판자로 만들었다. 전신을


가리는 방패가 필요했던 이유는 당시 고대전쟁의 가장 무서운 무기는 불화살이었다. 두 겹의 방패는


가운데가 비어있어 불화살을 맞으면 즉시 꺼지도록 만들어졌다. 사단의 모든 불화살의 공격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야 한다.


        테레사 수녀께서 유명한 변호사 에드워드 윌리엄즈를 면담하기로 했다. 변호사는 AIDS환자


치료수용소 재정후원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문구를 조수와 함께 작성한 뒤 테레사 수녀의 요청을 듣고,


이미 준비한대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수녀께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기도한 뒤 다시 후원을


요청했다. 변호사가 거절하자, 수녀께서는 다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변호사는 두 번째 기도에서


자신이 이 게임에서 졌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해야 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앞으로 한달간이라도


계속 기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도가 끝나자 변호사는 즉시 사업후원을 약속했다.


정채봉의 간장 종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꾸물거린다는


사실이다. 누가 불러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 나오는 일이 없다. 망설이고 꾸물거리다 끝난다. 마귀 군대는


매일 충격과 공포 작전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방패 없이 전쟁터로


나간 군사와 같다. 꾸물거리고 살다간 죽음뿐이다. 비참한 패배를 반복해야 한다. 방패 없는 군인이


생존할 가능성이 있을까?


 


        구원의 투구.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고 계급을 나타내는


장식이 있어 군대 내의 질서 유지와 군인의 생명을 보호했다.


        ① 구원의 투구는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가치관을 의미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모든 일에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철저한 삶의 목표의식을 가져야 한다.


웬디스 햄버거 창업자인 David Thomas는 “나는 10억 배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책에서 그가 성공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래 사생아 출신으로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일당 6천원을


받던 간이식당 종업원이었으나 근면과 정직과 헌신이라는 삼대정신으로 햄버거 장사를 시작하여


6조원 규모의 기업가가 되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 들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분명한 삶의 정신을 보여야 한다.


        ② 구원의 투구는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의미한다.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나 바울 이라는 표현을 즐겨 말했다. 세속적 관점에서의 자기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


에서 자신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이 아름답다.


에이즈로 죽어가던 한 여인을 심방한 목사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거절하는 냉담한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했다. 난 버림받은 영혼입니다. 내 자신의 일생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망쳐놓은


사람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겐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목사는


그녀의 옷장에 걸려있는 사진을 발견하곤 물었다. 저 귀여운 여자아이 사진은 누구입니까 제 딸입니다.


제겐 소중한 보물입니다. 만일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신은 도울 건가요? 실수해도 여전히


사랑하고 용서할 건가요? 물론이죠. 뭐든지 그 아이를 위해서 라면 할겁니다..그런데 왜 물으시죠?


하나님의 옷장에 당신의 사진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기억하는 투구를 써야


한다.


        ③ 그리고 구원의 투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또 다른 삶의 기대를 의미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무디는 나는 수년동안 설교할 때마다, 설교가 끝나기 전,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설교했다.고 말했다. 캠벨 몰간은 나는 매일밤, 내일이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잠이 들었다


고 고백했다. 재림의 진리는 성경의 진리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이다. 중국 선교사로 평생을 섬겼던


허드슨 테일러도 이렇게 말했다.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 내 사역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성령의 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에 모든 마귀의


시험을 기록하였으되 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우리도 매일의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모든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야 한다.


        한 청년이 한평생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살았던 무디의 성경책을 보고싶다고 했다. 무디가


성경책을 보여주자 청년은 놀랬다. 성경 전체가 빽빽하게 색연필로 칠해져 있었고, 성경 곳곳에 T.P


표시가 되어있었다. 무슨 뜻입니까? 묻자 무디는 실험해보고 입증되었다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말씀이 곧 그의 삶이었다.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결론: 세가지 헌신(6:18-24)


바울은 마지막으로 세 가지 헌신을 에베소 교회에 요청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세 가지 헌신으로 연합된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23-24절)들로 구분될 것이다.


        1. 기도의 헌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18절). 기도는 쉴 수 없는 헌신이다. 무시로 판티 카이로 모든 시간에, 항상, 늘


기도에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세계적인 골프 선수명단엔 항상 게리 플레이어 이름이 남겨있다. 그는 남아프리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과 역경 가운데 성장했다. 8살에 어머니를 사별하고, 탄광 광부인 아버지 손에서


자라났다. 신발을 아끼려 신발을 신기보다 들고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로 가난했다. 1953년 그는


프로 골퍼로 전향하여, 150여 개 대회를 우승했다. 우승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없이 무릎 꿇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왜냐하면 골프의 재능은 하나님께서 빌려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기도에 헌신하지 않고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을 풍성하게 받을 수 없다


(23절). 기도는 기도로 배운다. 운동선수가 오랜 연습을 필요로 하듯이 기도도 많은 시간의 기도가


필요하다. 스펄전은 기도는 성령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는 기술이다라고 가르쳤다. 성령께


우리에게 마땅히 기도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주신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성령님과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2. 동역의 헌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9-20절).


에베소 교회는 기도로 바울과 동역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기도로 수술실 의사의 동역자가 되고,


오지의 선교사들과 동역자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주를 섬겼다.


복음 전도를 위해 그의 생애 전부를 주님께 쏟아 부었다. 로마의 감옥은 바울에게 그의 설교단과 전도


센터가 되어주었다.


        조지 포먼은 45세의 나이에 권투를 다시 시작했다. 그가 권투를 다시 시작한 이유는 휴스턴에


세운 청소년 회관과 교회 때문이었다. 청년시절, 포악한 삶을 살았던 그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난


후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포먼은 마약과 범죄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돈으로


교회와 회관을 세우고 복음 사업을 추진했다.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게 되자 그는 다시 권투 글러브를


끼고 다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오늘도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 기도로 동역하는 진정한 동역자들이 세계 복음화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 우리는 세계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시카고 무디 성경학교에서 매주


토요일 밤 9시에 세계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여러 달 기도한 뒤 한 사람이 물었다. 부흥이


왔습니까? 아직 오지않았습니다. 다만 부흥이 올 때까지 우리는 기도할 것입니다. 복음 전도와 부흥을


위한 기도의 동역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이끌어낼 수 있다.


 


        3. 교제의 헌신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21-22절).


김명혁 목사께서 인생에 필요한 것은 참된 만남이다.라고 정의하셨다. 복음적인 삶이 되기 위해 만남의


확장이 요구된다. 누군가가 구원 받고, 헌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도 만남에 있다. 목회도 선교도


만남이다. 김명혁 목사께서도 미국 유학시절 도서관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전부였으나, 어느날 만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셨다. 그는 외국 학생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주말에 학생들을 초청하여 식사와 교제를


가졌으며, 피크닉과 운동회를 열기도 하셨다. 그 모임들이 나중에 한인 회와 한인교회를 세우는 동기가


되었다고 하셨다.


        바울은 마지막까지 알게 하여 서로의 교제를 위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로마의 감옥도


바울을 가두어 두지 못했다. 바울에겐 언제나 그의 친구들과 동역자들이 함께 있었다.


 


        ‘회복되는 하나님나라, 치유되는 자아 2002년 코스타 주제를 따라 10번에 걸쳐 에베소서 요약


강해를 함께 나누었다.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지성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진정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다. 우리에게 계시의 영을 주소서 기도하며, 복음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는 이 시대의


젊은 지성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복음을 깨달은 참된 지식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께 헌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윌리엄 부쓰에게 그의 성공 비결을 물었을 때 부쓰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물어린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보다 훌륭한 두뇌와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러나 저는 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이제 우리 시대는 이미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 고백하며 하나님나라를 회복해가는 암흑의 시대를 밝히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바란다.

[정진호] 사랑, 부르다가 죽을 그 이름이여..

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사랑, 부르다가 죽을 그 이름이여..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타락한 인간의 에로스 사랑에 대한 완전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선포와 그에 따른 영적 전쟁으로 이루어져 왔다.


(1)


청춘 예찬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장 애틋하게 남아있는 감정이 있다면 아마 젊은 날의 뜨거웠던 첫 사랑의 열정이 아닐까? 오직 젊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그 이름 만큼이나 순수하고 설레는 말… 첫 사랑!! 인간만이 지닌 보석같이 빛나는 그 사랑의 감정을 통해 얼마나 많은 시와 노래들이 탄생했을까? 그러나, 섣부른 첫 사랑의 함정에 발을 헛디뎌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상처와 수렁에 빠져버린 연인들이 또 얼마나 많았을까? 채 피어보지도 못한 인생의 젊은 꽃봉오리들이 실연의 구덩이 속에서 눈물과 고통으로 몸부림 치다가 지쳐서 쓰러져버리기도 한다.


 


첫 눈에 홀딱(?) 반하는 그런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랑을 못 해본 것이 정말 아쉽다고도 한다. 물론 상상 속에서는 멋있고 좋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랑은 가급적 말리고 싶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경험상(?) 그런 사랑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너무나 크고 깊게 마련이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표피적인 감정에서 바로 파국으로 흐를 가능성이 더 높다. 더구나 첫 사랑이 그렇게 다가온다면 대개 실패할 확률이 크고 상처도 깊게 남는다. 예방 접종이 안 된 어린이가 급성 바이러스에 걸리듯, 인생의 경험도 예비지식도 없는 순수한 젊은 남녀가 그런 사랑에 노출되면 그들은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며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감정의 혼수상태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 같이 잘못 내딛은 어설픈 첫 사랑의 후유증으로 청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학 생활을 완전히 날려버린 대표적인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같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는 인생 후배들과 언젠가 청춘의 열병을 앓아야 할 사랑하는 나의 두 아들을 위해서…)


 


나의 어린 시절을 회고해 볼 때, 나는 책벌레로 지내어 몽상에 쉽사리 빠져들고 더러 이상주의적 성향을 지닌 것을 제외하면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더욱이 사회적 관행을 따라 인생의 모든 척도를 좌지우지하는 대학 입시에 목매달며 오직 학교와 집 밖에 모르던 모범생이었다. 마침내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 후, 그 당시 풍습을 따라 자랑스러운 S대학 배지를 달고 첫 등교를 하던 그 시절의 설렘은 아직도 추억 속에서 생생히 다가온다. 마치 온 세상을 내 손안에 얻은 것 같이 느껴지던 나날들이었다. 장미 빛 꿈과 희망이 내 인생의 앞길에 거침없이 펼쳐질 것만 같았던 그 무렵에 나는 친구의 소개로 신촌의 한 여대생을 소개 받았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서 첫 사랑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눈앞이 혼미해지며 아마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그 날 이후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오직 그녀를 보고 싶은 한 가지 생각으로 내 머리 속은 진공 상태가 되고 말았다. 호젓한 찻집에서 두근거리며 그녀가 나타나기를 애태워 기다릴 때는 온 우주의 시계가 잠시 멈추어 선 것만 같았다. 만나서 신나게 거리를 활보하며 다닐 때면 세상에 아무 부러울 것 없이 마냥 그렇게 좋았다. 무작정 행복했고 잠시라도 헤어지기가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마치 소꿉장난하는 어린아이들처럼 자신의 작은 세계에 폭 빠져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연애 경험이 전혀 없었던 나는 여자가 항상 남자보다 현실적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녀의 어느 정도 계산된(?) 순진한 표정과 춤추듯 하는 감정 변화에, 그리고 혼을 빼앗아가듯 하는 그 웃음소리에 내 온 마음과 정신이 홀려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웃음 뒤에 조금씩 다가오는 감춰진 불안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동성동본이니, 집안이 전혀 맞지가 않는다든지 하는… 점차 현실적인 문제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그녀가 먼저 헤어짐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첫 해 크리스마스의 아련한 추억을 마지막으로 이별의 편지를 한 장 남기고 그녀는 모질게 사라져버렸다. 그 편지에는 그 동안 자신이 내게 고백했던 모든 말들은 거짓이니 이제 자신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고 깨끗이 잊으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대처승이라고 하던 그녀는 마치 속세를 떠나버린 비구니처럼 내 시야에서 갑자기 종적을 감춘 것이었다.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문제의 본질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왜 내 안에는 손에 잡히지 않는 깊은 허무와 갈증이 심연처럼 출렁이고 있었던지,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한 내 몸짓과 몸부림이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 그것을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나는 술과 담배로 자신을 자학하며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시절 세상 사람들을 향해 실연당한 사람의 표본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수염을 거칠게 기르며 장발의 히피처럼 살았다. 전공과 대학 생활의 의미는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인생의 목적도 모르고 도로를 질주하던 어린아이가 막다른 골목을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세상의 온갖 우수와 슬픔을 머금은 채 끝없는 허무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점차 시인이 되어가고 있었고, 주변에는 술 취한 아마추어 철학자의 취중 담론을 즐기는 더 많은 술친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후에 나는 몇 번인가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녀를 만나게 되는 날은 항상 마음을 고쳐먹고 무엇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결심한 날이었다. 마치 그녀가 풀어내는 불가(佛家)의 끈질긴 인연의 실 타래가 누에고치처럼 나를 칭칭 휘감고 있는 듯, 그런 날이면 영락없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나곤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다시금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원점으로 떨어지는 감정의 혼돈을 겪곤 했다. 대학가의 데모로 어지러웠던 80년의 봄, 그녀를 잊기 위해 나는 다시 다른 여인을 사귀고 있었다. 두 번째 여자는 아무 소망도 없어 보이던 나에게 미안할 만큼 헌신적인 사랑을 표현했다. 그 여인을 통해 어느 정도 삶의 안정을 되찾고 있었던 대학 졸업반의 어느 날, 첫 사랑의 그녀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자신이 내게 보였던 지난날의 설명하기 힘든 행동 방식에 대한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일 지금 이 순간 그녀를 끊지 못한다면 내 인생은 이제 회복될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떠밀려 갈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잡고 그녀를 냉정히 돌려보냈다. 그리고 나는 두 번째 여인과도 헤어진 후 졸업을 맞았다.


 


두 번째 여인은 큰 부잣집(?) 딸이었다. 처음엔 그런 사실에 관심도 없었던 나는, 그 일이 가져 다 줄 또 한번의 상처를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딸을 가난하고 힘없는 불량(?) 소년으로부터 강제로 격리시키기 위해 국외로 출국 시키는 그녀의 집안으로부터 또 다른 형태의 수모와 소외를 당하는 동안, 나는 세상에 대한 심한 염증을 느꼈다. 그리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나는 그 분노를 삭일 도피처가 필요했다. 군대를 마치고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첫 번째 여인은 종종 내 시야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TV의 뉴스 앵커가 되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절 나는 순수했던 나에게 무자비한 상처를 입힌 그녀들의 세상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며 오직 인생의 성공을 위한 질주에 매진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All A+의 성적을 받아보기도 했다. 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나를 무시하던 세상에게 과시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장래에 대한 성공 야망으로 불타 올랐다. 그 가운데에서도 내 생활은 술이 없으면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알코올 중독 초기 증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손이 떨려서 커피 잔을 들기 힘든 상황까지 되었다. 나는 심신의 깊은 상처에 허덕이며 극심한 편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 이상 내 자신을 견딜 수 없는 절망감으로 깊은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간 무렵…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녀는 내가 만난 여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시절 만나기만 하면 술만 마시고 아무 말도 없이 음산한 정물화의 실루엣처럼 앉아 있던 나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받아주었다. 그녀와의 짧은 만남 끝에 프로포즈도 한번 안 한 상태에서, 무작정 그녀의 집으로 쳐들어가 부모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버렸다. 그녀의 의사를 무시한 일종의 폭력이었다. 그 같은 나를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가 받아들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야말로 나는 수렁에서 건진 남자가 되었다. 그리고 영적 치유와 회복을 위한 첫 걸음을 떼게 되었다.


 


요즈음은 첫 사랑이 TV에 등장해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내가 참 신기하다. 얼마 전 어느 정치 신당의 대변인이 되어서 그녀가 또 다시 화면에 나타났을 때 왠지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옆에서 장난스럽게 저렇게 매력 없는 여자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었냐고 눈을 흘겼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정말 저 여자가 옛날에 내가 그토록 사랑(?)하여 미칠 것만 같았던 그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렇구나… 참 사랑의 본질을 알지 못할 진데, 인생이란 까딱 잘못하면 실상도 아닌 신기루에 속아서 허겁지겁 달려가다가 지쳐서 쓰러지고 마는 사막의 목마른 나그네에 불과하구나. 참 생수가 솟아나는 그 샘물을 발견하기 전에는 말이다.


(2)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미와 사랑과 풍요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의 탄생을 이렇게 묘사한다. 천공(天空)의 신 우라노스와 그의 아들 크로노스와의 싸움에서, 크로노스는 대지(大地)의 여신인 어머니 가이아의 음부 속에 숨어 있다가 아버지의 성기를 낫으로 잘라 바다에 던진다. 이렇게 하여 바다를 떠다니는 성기 주위에 하얀 거품(아프로스)이 모이고, 그 거품 속에서 아름다운 처녀 아프로디테가 생겨났다. 징그럽고 불쾌하기까지 한 이야기 속에서 미와 사랑의 화신이 탄생하는 이 설화가 담고 있는 의미의 이중성이 있다. 친부(親父) 살해를 통해서라도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음모와 욕망… 그리고 바다를 떠다니는 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지는 아름다움…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적 사랑의 정수인 에로스(Eros)의 개념이다. 권력과 욕망의 부산물로서 나타난 아프로디테는 남편인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 몰래 군신(軍神) 아레스와 통정하여 아들 에로스(큐피드)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사랑의 화살을 쏘아 연인들을 사랑에 빠뜨리던 큐피드는 자신의 화살에 거꾸로 맞아 공주 프시케(Psyche)를 사랑하게 된다. 인간 정신과 혼(魂)을 상징하기도 하는 프시케는 지금도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정신을 잃게 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 사랑에 빠지게 하곤 한다. 


 


첫 사랑도 그 본질을 살펴보면 대부분 자기 성취와 만족을 위한 에로스적 욕망의 산물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생겨나는 실연의 고통과 분노, 그리고 세상을 향한 야망과 질주 그 모든 것이 자기만족이라는 바위덩어리를 더 높은 욕망의 언덕 위로 끌어올리고자 하다가 끊임없이 실패하는 시지프스의 신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통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다. 그가 가르치는 사랑은 우리가 도무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사랑이란 자기 본위가 아니라 철저히 사랑을 받는 대상이 본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 아가페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 사랑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간음한 여인을 붙들어와 고소하며 예수를 시험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질문 공세를 받으며, 허리를 굽히고 앉아 묵묵히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적고 있었던 예수… 그가 그 순간 적었던 글이 바로 ‘아가페’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불의는 끝없이 감추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용납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완악함에 예수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을 위해 자신이 져야 할 아가페의 십자가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한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예수는 고개를 들어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한 마디로 성난 군중을 모두 물리친다. 그리고 일어나 죄로 인해 죽어 가는 그들을 구원키 위해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아가페 사랑, 그 절정의 현장이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우리가 정말 부르다가 죽을 사랑이란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에로스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고 말지만, 아가페의 죽음은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자기 성취를 위해 주변에 상처들을 남기지만, 아가페는 자신이 홀로 상처 받는 그 희생으로 주변의 상처 받은 영혼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고향 땅을 떠나 먼 타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통해 쓰인 사랑 이야기들이 지금도 세상 어디엔 가 보석처럼 빛나며 남아있을 것이다.


 


아무리 퍼부어도 사랑을 받을 줄 모르는 닫힌 영혼들… 겨우 그 마음 문 열어 놓으면, 받고 또 받기만 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려고 끝없이 욕심만 부리는 사람들… 겨우 한 사람 변화시켜 놓으면, 이리 저리 눈치를 보다가 곧 실속을 챙겨 달아나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애태우며 기도하다가 속상하고 힘이 들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그 서러움…


그 마음을 체험한 사람만이 그 사랑을 배운다


 


1995년 겨울 티베트의 수도 라싸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어느 선교사 부부가 생각난다. 고산지대의 겨울은 음산하고 황량하여 길거리마다 모래바람이 죽음의 그림자를 몰고 이리 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비좁고 을씨년스러운 집으로 들어가며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하고 기가 막힌 심정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미국에서 살다가 왔다는 그녀의 얼굴은 매서운 고산 바람에 온통 갈라지고 거칠게 터져 있었다. 양 볼은 자외선에 오래 노출되어 현지의 티베트 여인들같이 마치 설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그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냥 이유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밤, 그 부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티베트에서의 첫 크리스천을 얻기 위해 그들이 쏟았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서장의 대학생 하나를 섬기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붓기 몇 년만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욕하며 따돌리는 그 집 앞에서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들고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며 몇 시간을 떨고 서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그 학생이 나오더니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하며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결국 품에 안겼다는 것이다.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던 제자가 어느 날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이 받은 사랑을 고백할 때 나 역시 함께 눈물지며 그 사랑을 느낀다. 중국 남방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또는 여러 나라에 유학을 떠난 제자들이 틈틈이 보내오는 편지들을 통해 그 사랑의 감격을 느낄 때도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유학중인 어느 제자가 보내온 편지 한 통….


정진호 교수님께,


 


안녕하세요?


교수님의 학생 M 입니다.


 


지금 저는 코스타 사이트에 방문하여, 교수님이 쓰신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우리들이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적다고 푸념까지 했던, 우리들이었군요…


그리고 교수님과 사모님, 그리고 다니엘의 고난에 가까운 삶을…


 


어린 다니엘을 배워줄 때, 좀 더 열심히 가르치지 못한 것이 후회 되는군요. 걔가 저보고  “형, 저 힘들어요.”라고 했던 말의 뜻도 이제야 많이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그냥 막연하게 이국 땅에서 생활하는 게 힘들겠지 라고 만 생각했었어요…


 


행운스럽게도 몇 년 동안 교수님의 지도학생으로 가르침을 많이 받아왔지만, 교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에야 제가 아주 행운스러운 놈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끔씩 내가 만약 교수님과 같은 처지라면, 이렇게 중국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생각도 해봅니다.


 


아직은 교수님의 제자라고 하기는 참 부끄럽군요.


교수님, 기다려주세요. 꼭요.


교수님이 원하는 제자로 클 때까지요.


언젠가는 교수님이 중국 땅을 밟으신 것처럼, 저도 북한 땅을 밟고 싶습니다.


그분이 이끄심과 함께


 


한밭, 계룡산 기슭에서, 제자 M 올림.


2002년 겨울 토론토를 방문했다가, 1888년 조선 땅을 밟았던 캐나다 선교사 게일의 생가를 찾아간 적이 있다. 어느 목사님께서 나이아가라 폭포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아침 일찍 찾아오셨다. 폭포를 향해 가던 중 게일 선교사 이야기가 나와 가던 차의 방향을 중도에 북쪽으로 틀었다. 그러나 그날 따라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차 앞의 시야를 가렸다. 여기 저기 길목에서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더 이상 올라가면 위험하다고 가로막았다. 그러나 모처럼 찾아온 나에게 게일의 생가를 꼭 보여주길 원하셨던 그 목사님은 끈질긴 집념으로 가시거리(可視距離)가 전혀 없는 위험한 눈길을 이리저리 헤매며 몇 시간 만에 마침내 그 집을 찾아내었다. 차에서 내려서 약 100m 정도의 길을 걸어가는데, 얼마나 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는지 몸이 번쩍번쩍 들리는 것만 같았고 안경은 곧 성애로 얼어붙었다. 게일의 생가 앞에서 겨우 사진을 몇 장 찍고 황급히 돌아서서 다시 차 안에 앉았다. 차 안은 따뜻하고 조용하여 바깥의 눈보라를 전혀 의식치 못하는 딴 세상 같았다. 묵묵히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바로 그 먼 옛날 이 곳에서 어두움에 갇힌 조선 땅을 밟기 위해 소명의 길을 떠났을 스물 다섯의 젊은 청년 게일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의 헌신과 사랑의 수고를 통해 조선 땅에 빛이 들어오고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사무실과 집의 벽에 붙여놓고 한번씩 읽어보는 시가 있다.


 


 


<뵈지 않는 조선의 마음>


                                                                언더우드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우리 앞에 가신 믿음의 선진들… 그들이 남긴 사랑의 발걸음들, 그 발자국 위에 우리가 서 있다. 양화진에는 국적을 초월하여 죽기까지 조선 백성을 사랑했던 외국인들의 아름다운 아가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들의 믿음대로 이루어진 오늘날 한국의 실상을 확인하며, 중국과 북한 땅을 향한 새로운 사랑의 역사를 믿음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부르다가 죽을 그 사랑의 이름은 십자가에 새겨진 아가페이다.


 


 

[최영기] 공개하여 마귀를 물리치자

행복한 교회생활


공개하여 마귀를 물리치자


한인 교회에 분열이 잦습니다. 분열로 인한 상처로 교회를 외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 분열의 원인을 사람에게 두고 있습니다. 목회자와 지도자간의 갈등을 원인으로 생각합니다.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악한 영의 역사 때문에 교회가 분열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한 영들에 대함이라고 말했습니다(엡 6:12).


마귀의 주무기는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44). 악령은 거짓말을 통하여 교인들의 마음에 목회자에 대한 오해가 생기게 만들고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관계에 쐐기를 박습니다.


악한 영이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에 이를 물리치는 방법은 공개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음성적으로, 속삭임으로, 어두움 가운데에서 불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령의 궤계를 깨기 위하여서는 노출시켜야 합니다. 빛이 비추면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진리와 사실이 밝혀질 때에 거짓말은 힘을 잃습니다.


개인의 삶에서 악령의 역사를 물리치려면 공개해야 합니다. 중독증의 예를 들어도 그렇습니다. 중독증이 깊어지면 악령이 개입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중독의 사실을 노출시켜야 합니다. 남부끄럽다고 감추어서는 안 됩니다. 감추면 감출수록 악령이 점점 더 역사하여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숨기기 말고 공개하여 악령이 역사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앤 후에 주위 분들의 기도와 도움을 청하여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악령이 거짓말로 인하여 오해가 생겨서 관계가 깨지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피하거나, 뒤에서 불평하지 말고 얼굴을 맞대고 오해가 있으면 풀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악령이 역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저는 담임 목사로서 가능하면 투명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회자 코너라는 칼럼을 매주일 주보에 실어서 제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성도님들에게 노출시킵니다. 설교 시에도 제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합니다. 교회예산도 누구나 원하면 열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담임 목사의 목회 방침에 의문이 있을 때에는 직접 물을 수 있는 통로도 열어놓고 있습니다. 공개된 곳에 악령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철훈] 죽은 바다를 살리고 계시는 하나님

eKOSTA gallery


죽은 바다를 살리고 계시는 하나님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며
사슴의 목마름을 알게 된 엔게디 산 뒤로 해가 지자






염해의 하늘과 바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엔게디의 맑은 물이








죽은 바다를 살리시겠다는






그 언약을 오늘도 붙잡고 있습니다.






[유영진]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유학생의 삶 (9)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 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라는 제목으로 유학생의 삶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시작할 때, 일년을 계획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마감을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매달 마감일에 쫓겨서 편집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원고를 보냈는데, 이번 달에는 유난히 늦어졌다. 한국으로 여행을 한 이유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글을 마지막으로 쓴다는 생각이 정말로 나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부담으로 작용했던 탓이다. 수도 없이 글을 썼다가 지우곤 하면서 이 글을 적는다. 정말로 나의 마음속에 나의 생각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아내와 함께 이민가방 7개에 짐을 싣고 매릴랜드에 와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것이 1992년 여름, 벌써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나와 아내는 학위를 받고, 직장을 구하였고, 두 아들을 낳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얼마 전에 부교수로 승진을 하면서 Chaired Professor의 자리를 받기도 하였다. 유학 와서 온 첫 주, 이곳으로 오기 일주일 전에 이태원 가게에서 산 신발을 신고, 학생 아파트로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지름길로 가려고 하다가 시궁창에 빠져서 새 신발이 엉망진창이 되었던 기억, 학생 아파트의 열쇠를 받아서 들어간 첫 날, 아내하고 둘이서 집안에 있는 유일한 등이었던 부엌의 등 밑에서 담요 두 장과 수건을 둘둘 말아서 잠을 청하였던 그 장소, 그곳에 도착한 이틀 째에 만난 지도교수가 만나자 마자 엄청난 양의 일을 넘겨줄 때 가졌던 황당한 부담감, 그렇게 열심히 도왔던 지도교수가 박사과정 일년차가 지날 무렵에 나를 쫓아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던 때, 일주일에 50불을 가지고 생활을 하기 위해서 먹어본 과일은 세일을 하는 사과와 바나나 외에는 없었던 박사과정 시절, 첫 째를 가진 아내가 좋아하는 사과를 잔뜩 담았다가, 가지고 갔던 돈이 모자라서 몽땅 그곳에 놓고 떠나야 했던 때의 아픔–그 아픔을 차마 나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공부를 모두 마치고 직장을 구한 다음에야 말을 해야 했던 아내의 고생, 난 지 이제 한 달이 된 아이를 한 손에 안고, 다른 한 손에 첼로를 들고 다니면서 공부를 해야 했던 아내의 모습 등등…


이런 삶의 과정 속에서 나의 마음을 지켜준 한 성경구절이 있다면, 바로 에베소서 1장 17-19절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를 유학생으로 이곳에 부르셨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 대하여 소망을 품고 계시다. 그 소망 속에는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모든 일에 엄청난 능력으로 나를 공급하신다는 바로 그 말씀이었다.


나의 고통에 의미가 있고 나의 연단에 소망이 있다는 그 약속이 나에게 힘이 되었다. 지금도 힘이 된다. 나를 내 보내려고 생각하는 지도교수에게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지도교수를 넘어서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사과정 2년차는 정말로 힘들었다. 지도교수가 나를 내 보냈기 때문에 학과에서는 나를 4명의 교수들에게 나누어서 시간을 배정했다. 모든 교수는 나를 full-time으로 이용하기를 원했다. 결국, 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4배의 시간을 들여서 조교의 일을 해야 했었다. 그 중의 한 중국교수는 매주 수업시간에 강의를 하려고 학교에 올 때면, 나에게 학장실에 가서 임시 주차 증을 받아서 자기를 주차장에서 기다리도록 하였다. 날이 좋을 적은 상관이 없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서서 그 교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 때도 나의 연단에 소망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2년차 말에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나는 5년 동안 보장 되어있는 줄로 알았던 장학금이 2년 말로 없어지고, 그 이후는 지도교수가 알아서 해결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막막했다. 나를 돌봐줘야 하는 지도교수는 나를 쫓아내었던 바로 그 사람인데, 나에게는 어떤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나에게 힘을 준 말씀이 바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는 말씀이다. 그 힘은 바로 죽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그 힘이라고 사도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그 힘은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보다 뛰어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었다. 그 힘이 내 속에 있는 힘이라는 것을 기도할 때 깨닫게 되었다. 내 속에서 역사하는 힘이 나의 지도교수보다 더 뛰어나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 믿음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하나님은 그 믿음에 한번도 실망을 시키신 적이 없었다. 나를 내 보려던 지도교수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나를 다시 받아들였고, 그 프로젝트로 인해서 그야말로 스타교수가 되었다. 곧 그는 학과 장이 되었고, 그는 나의 배후에서 나를 돕는 최고의 동역자가 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하나 하나 세심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유학생활 내내 나의 삶을 주장해 온 한 생각이 있다면, 바로 나를 부르신 그 하나님의 소망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 부르심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 그것이 나의 직장을 구하는 일에, 그 이후의 삶에, 그리고 각종 사역에 참여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1995년 가을 나는 박사과정 4년차였다. 논문은 거의 마감이 되었고,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지도교수는 나에게 학교에 일년 더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다. 일년동안 프로젝트를 더해서 논문을 몇 개 더 실으면 외국인으로서 미국대학에서 직장을 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둘째를 곧 낳게 되는 데, 그러면 도저히 박사과정 월급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자신이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면서 학장과 약속을 내 앞에서 하였다.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잘 안되면, 4년차 말에 job market으로 나가서 아무 학교나 직장을 잡겠다고 말하였다. 10월 31일이 그 날이었다. 내 생일이었기에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오후 3시에 학장실로 내려간 지도교수가 오후 5시 30분이 되어야 나타났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고는 “일년동안 Visiting Professor로 너를 쓰기로 했다. 월급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는 두 배 이상 되겠지” 하면서 “Happy birthday to you!”라고 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이미 학교의 예산이 다 정해진 상태에서 학장이 자신의 비상예산에서 나를 고용했다고 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visiting faculty가 필요한 상태도 아니었고, 설상 필요했다고 해도 나를 그 자리에서 쓸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는 듯했다. 일년동안 내가 그곳에 더 머무르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6년은 40일 연속 새벽기도와 아침 금식으로 시작하였다.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기드온의 이야기가 강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기드온 당시의 추수할 곡식이 바로 미국의 이민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한국 교회와 우리들의 1.5세 2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하나님이 쓰실 만 하니까, 사단이 그들을 빼앗아 간다는 말씀으로 기드온 시대의 이야기가 나에게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 해 여름 JAMA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셋째 날인가, Sammy Tippit이 인도하는 저녁 기도회였다. 미국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미국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입 속에서 나도 모르게 “주님, 저 지도 속에 있는 캠퍼스로 나를 보내소서. 저곳에 있는 한국계 학생들에게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나왔다. 그 날 이후, 그 기도가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1997년 이곳 클리브랜드에 오자마자, 한국에서 모교를 비롯해서 많은 학교에서 귀국하라는 초청이 있었다. 어떤 때에는 정말로 한국에 귀국하고 싶었다. 기회도 무척 좋았고, 그때가 마지막 기회처럼 보이던 적도 있었다. 내가 지원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경우도 있었다. 나이가 드신 부모님들에게 귀국해서 하나뿐인 아들로 떳떳하게 아들노릇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모교의 강단에 서서 후배들에게 강의를 하는 그런 꿈을 쉽게 버릴 수 도 없었다. 하나님께 사정도 해봤다. 그리고, 내가 귀국을 하면, 그 캠퍼스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교수가 되겠다고 기도도 해봤다. 그때 마다 하나님은 1996년 JAMA에서 기도하는 나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시곤 했다. 아무 말씀 없이, 그 모습이 비디오처럼 나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 한번도 한국에서의 초청에 응답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아무런 미련 없이 모교의 자리에 지원하는 친구를 위해서 정말로 축복하면서 추천서를 써 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그 자리에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 아마도 앞으로 또 좋은 기회가 한국에서 생기면 마음이 싱숭생숭해 질 듯하다. 이번에도 한국에 짧게 방문하면서, 내가 한국에 가면 참 할 수 있는 일이 많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 일로 다시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아마도 또 똑같은 비디오를 내 마음속에 틀어보이실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무슨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대답하여 보라. 유학생활을 향한 당신의 비전은 무엇인가? 아니, 당신을 유학생의 자리 (아니면 유학생 배우자의 자리)로 부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서 당신은 궁금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부르심 의 소망을 붙잡고 고민해 봤는가? 그 부르심의 소망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묵상해 보았는가?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그 소망에 붙잡히라. 그 소망이 당신의 삶을 주관케 하라. 하나님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게 하라. 유학생의 자리가 바로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깨닫는 그 자리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