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상]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찬양에 관하여

이코스타 2005년 1월


예배 인도자로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가끔 메일을 통해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오래 전에는 어떤 곡을 어디서 났느냐, 아니면 새로운 곡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웹 상에서 원하는 자료들은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기에 그러한 질문들은 많이 사라졌다. 그 다음에 많았던 질문이 찬양 안에 있는 기름 부으심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 기름 부으심이라는 성경적인 단어는 사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아무래도 인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기에 자주 질문을 해오는 것이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름 부으심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진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 있는 기름부음의 목적은 사물이나 사람을 구별해서 하나님이나, 왕에게 받으실 만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서는 131번 이상과 신약에서는 18번을 기름 부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결국 기름 부으심의 최종 목적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흉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기름 부으시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기름 부으심은 하나님의 깊은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한 부속물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통한 부산물인 것이다.


우 리가 찬양을 들으면서 구별할 수 있는 영적인 기준은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찬양을 듣고 그러한 집회에 참석하게 될 때에는 여러분도 모르게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우리의 찬양은 너무나도 익숙한 하나의 ‘립싱크’가 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찬양을 드리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찬양에 기름 부으심이 없는 이유이다. 온전하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불순물과 함께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인도하는 인도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태도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한 국에 있는 동안 예배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서 간 적이 있었다. 내가 강의해야 할 제목은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였는데, 그 날 오셨던 분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예배 사역이나 찬양 사역을 하고 계신 분들이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눈빛은 모두가 이미 강의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결국 강의 노트를 덮고 나는 세미나에 참석한 분들에게 조용히 눈을 감으라고 말하고 지금 이 시간에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 보자고 나누었다. 그리고는 한 몇 분쯤 지나서였다. 갑자기 한 분의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외침은 너무나도 처절하게 들리는 듯 했다. 그렇게 시작한 외침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과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바라보는 몇 분이었다. 그 후에 같이 찬양을 나누었다. 그것은 단순하게 불려지는 한 코드의 반복되는 진행이었는데, 곡의 내용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서 부르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새 노래였던 것이다. 이 날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세미나에 참석한 거의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찬양을 멈출 수 없었고, 기도가 끊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한 시간을 2시간 이상을 드렸다. 모두가 탈진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 날 세미나를 드리면서 깨달은 새로운 사실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초점을 맞춘다면 하나님께서 간구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허락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정답 같은 이야기지만 이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대충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날 식사 준비를 했던 몇몇 분들은 모임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끝내 경험하지 못하였다. 즉,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얼굴을 구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일들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얼굴을 전심으로 구하여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면 당신의 찬양과 기도와 예배에는 탁월함이 드러날 것이다. 인도자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 이미 기름부음 받은 삶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윤택해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흉내내지 말아야 한다. 마치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처럼 쇼를 해서는 기름 부으심이 흘러갈 수 없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해서는 되지 않는다.


대 신에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찬양 안에 기름 부으심을 더하는 길이다. 듣기 좋게 음악을 만들 수 있다. 세련된 편곡을 할 수도 있다. 엄청난 악기를 동원해서 사람들의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는 찬양은 하나님께로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을 하늘의 보좌 위에서 일어나게 하고 춤추게 하는 것이다.

[김재석] 유학기간: 성경적 가치관 형성 기간

이코스타 2005년 1월호

성경적 가치관에 관한 문제는 KOSTA나 eKOSTA에서 여러 강사님들이 많이 다루는 내용이라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나 역시 이 문제를 한번은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이 문제로 직장생활 중 심각한 고민을 했던 사람이고, 유학기간중 중요한 핵심을 파악하고 나서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던 이슈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학시절이 공부에 많은 시간을 쏟느라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다양한(?)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오히려 simple한 생활 패턴으로 인해 자신의 삶과 가치관의 문제를 생각하고 새로운 시각의 변화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기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대학시절 예수님을 영접한 후 철저한 제자훈련 과정을 받고, 또한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니, 늘 나의 주업은 복음 전도이고 직장 생활은 생계 유지를 위한 부업으로 여기고 있었다. 졸업후 나의 첫 직장이 경북 구미에 있던 정부 연구소였는데, 나름대로 주어진 일은 성실히 하였지만 늘 내 마음은 복음 전도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과 관계에서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복음 전도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일하는 것은 최소한의 의무 수행 정도가 되었고, 문제가 생기지 않는 정도까지가 한계선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내 직장이 점점 복음화되어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직장과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 내 직장은 점점 발전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일하는 사람들만 많아져서 점점 퇴보할 것이고, 종국에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해 직장 문을 닫는 경우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모습일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해 가야 할 방향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중에도 직장생활과 유학 준비중이라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다룰 시간은 없었다.


유학을 와서 2년 정도 지나면서 내 생활이 simple life 상태에서 틀이 잡혀가자 이 문제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는 중에 “Your work matters to God (D. Sherman & W. Hendricks)”, Why work?”이란 책들을 접하면서, 내 마음에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점을 찾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직업과 소명”, “세상의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비젼“ 등의 국내서적들과 또한 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당시 KOSTA 강사 목사님들을 통해 새로운 성경적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실제로 그 이후에 있어서의 나의 직장의 생활과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내가 갖게된 성경적 가치관의 핵심요소를 정리하면 다음 3가지 정도라 하겠다.


첫째, 인생의 방향과 삶의 자세에서 성경적 비젼과 성공관을 갖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인생에 대한 꿈을 계획한다. 목표가 늘 내가 최고가 되어 섬김 받는 것이고, 내가 남에게 드러나는 것이고, 나의 만족과 영광을 좇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이라 생각하다보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가 중요한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에서 발동하여, 주님의 인생 목표(막10:45), 즉 섬기는 것을 자신의 인생 목표로 삼는 사람이다. 즉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삶을 인생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평가하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온전하고 의로운 방법으로 모든 일을 수행하고자 해야 한다. “못가도 좋으니 바로 가자”가 삶의 모토이어야 한다. 성공의 잣대는 남에게 드러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얼마나 섬기는 삶으로 살아왔는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성경적 노동관/직업관을 갖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노동이나 직업을 생계 유지의 수단이나 자아 실현의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일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이요(창1:26-28, 엡2:10),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방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6일동안 하셨던 천지창조도 일(노동)이였고, 이것은 기쁨이였다. 인간 삶에서 노동은 삶의 핵심 요소이고, 이웃을 섬기는 방법이며, 기쁨의 근원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노동이 힘든 고통으로 바뀌게 되었을 뿐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노동은 다시 새로운 사명으로 회복되었다. 우리의 모든 일상 업무를 주님의 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골3:22-24절에 보면, 당시의 종(노예)들에게 상전을 섬기는 일상의 하찮고 허드레 같은 일들을 성심껏 수행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 말씀하셨고, 이에 대해 유업의 상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가 매일의 일상 업무와 직장의 일들을 주께하듯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직장을 나갈 때 예배드리러 가는 것도 동일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매일의 삶의 현장이 곧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신령한 산 예배의 장소인 것이다.


로마시대 노예들이 주인에게 예수의 복음을 말로 전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모든 일상 일에서 주를 섬기듯 주인을 섬기는 노예들의 삶의 모습이 결국에는 주인들을 감동시켰고,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공인되는 핵심 요인이 되었다. 지금 이 시대는 온갖 말들로만 전달되는 복음보다는 우리들 삶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향기가 전달되어야 하는 시기라고 본다.


셋째로, 부와 보상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갖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의 노력의 결과로 또는 행운으로 얻어진 보상에 대해 당연히 자신이 누리고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을 최상으로 여긴다. 부를 자신만의 만족과 축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성공의 결과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부를 이루는 과정이 중요하며, 또한 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다. 재물은 자신의 필요와 더불어 이웃의 필요를 함께 채우는데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삶의 원리라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삶의 모습에 대해, 주님은 유업의 상을 주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보상과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며, 바울도 이러한 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임을 밝히고 있다.


유학기간은 시간적으로 매우 바쁜 일정이면서도, 자기 인생의 방향과 삶의 원칙/가치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연구하고 결단할 수 있는 좋은 기간이다. 우리 코스탄들이 이 세상 가치관과 풍조에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가치관 정립을 통해 새로운 풍성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정진호] 제 12 떡 – 최후의 만찬 – 천국 쿠데타

 

(1)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만찬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로써 18년간 지속되던 박정희 군사 정권과 유신 독재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 총성은 한국 정치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알리는 대단히 중요한 순간이었고 한국은 걷잡을 수 없는 정치폭풍 회오리에 다시 한번 휘말리면서 민주화라는 새로운 파도를 타고 1980년대의 격동기를 맞이하게 된다.


<군주론>에서 부하를 다스리는 냉혹한 권력 세계의 법칙과 기술을 군주에게 가르쳤던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평론>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은 목숨이 위태로우면 먼저 군주를 타도하도록 쿠데타를 종용한다.(1) 군주는 승리한 장군을 두려워하여 세력이 커지기 전에 종종 제거하기 때문이다. 죽느냐 죽이느냐? 그것이 바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피의 역사였다.


쿠데타(Coup d’etat)는 정권 찬탈을 위해 부하가 무력으로 집권자를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하극상(下剋上)의 반란을 의미한다. 수많은 독재자가 만찬석상에서 하극상 쿠데타를 당해 그의 측근인 부하에 의해 갑작스런 배반과 살해를 당함으로써 역사의 뒷문으로 사라져갔다. 타락한 인간이 지닌 집요한 권력에의 의지는 모든 친밀했던 관계를 깨뜨린다. 절친한 친구 사이나 주인과 종, 아버지와 아들, 주군과 신하 등 충성과 복종으로 이루어진 어떤 밀월 관계도 권력을 향한 야심이 들어가는 순간 배반과 살인의 피흘림의 현장으로 돌변하게 된다. 시저와 부르투스가 그랬고 고려 우왕과 이성계가 그랬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살해하고 권좌를 찬탈하지만 결국 그의 아들 제우스에게 또 그 자리를 빼앗긴다. 친부(親父) 살해를 통해서라도 권좌를 빼앗고자 하는 권력 세계의 비정함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동양 신화도 마찬가지다. 신농(神農)이라 불리던 농업의 신 염제(炎帝)를 남방으로 몰아내고 중국의 중원을 차지한 황제(黃帝)와 그에게 다시 도전하였다가 죽임을 당한 동방의 신 치우(蚩尤)사이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동양 신화 속에 감추어진 이런 이야기들은 고대 동아시아의 각 민족 간에 패권 쟁탈을 위한 수많은 피흘림의 역사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2)


그 쿠데타의 현장마다… 감추어진 살의(殺意)와 음모, 위장된 거짓 웃음을 띤 최후의 협상안들이 오간다. 만찬의 풍성한 음식과 화려한 가무(歌舞) 뒤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감춰져 있고 배반자는 시시탐탐 칼을 뽑을 결정적인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마침내 협상은 결렬되고 배반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권력자에게 다가가 최후의 키스를 던진다. 추종자의 충성의 눈길에 만족하며 권력자가 돌아설 때 배반자는 소리 없이 등 뒤에서 칼을 뽑아드는 것이다. 가장 부드럽게 웃으며 그러나 가장 잔인하게 칼을 꼽는 것, 그것이 배반의 미학이다. 그 같은 배반의 총칼에 맞아 쓰러질 때, 배신자를 확인한 후 놀라고 당황하여 그리고 분노에 치를 떨고 이를 갈며 죽어간 수많은 권력자들이 있었다. 그것이 쿠데타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 역사상 가장 이상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 쿠데타가 있었다. 그 쿠데타에 의해 역사상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당한 한 사람, 그 분을 소개한다.


온 천하의 권세를 한 몸에 지닌 지상 최대의 권력자로 세상에 나타나실 수도 있었던 분, 그러나 그 권세를 스스로 버리고 가장 낮고 비천한 구유에서 태어나셨던 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며 순종으로 가족을 섬기셨던 분, 겸손히 무릎 꿇어 세례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리며 축복받으셨던 분, 광야에서 시험받으며 사탄의 떡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던 분, 성전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었던 명예욕을 뿌리치셨던 분,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제압하신 분, 그러나 그 말씀의 권세로 세상의 수많은 권력자들을 놀라게 하셨던 분, 사랑의 권능으로 기적을 일으키며 가난한 자들을 배불리 먹이신 분, 소경된 자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신 분, 성전을 청소하시며 불의한 장사치들을 쫓아내신 분, 세상의 권력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셨던 분, 그러나 세상의 불의와 위선에 대해 추상같이 질타하며 꾸짖으신 분, 수많은 무리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자신을 높이지 않으신 분…….


자신을 따르던 추종자들의 손을 피해 스스로 왕위를 뿌리친 분,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제자들에게 먹이신 분, 제자들을 사랑하여 종의 모습으로 낮아져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 분,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알고도 끝까지 사랑하여 모른 체하신 분, 자신이 배반당하여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으신 분, 사랑하는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미리 알고 알려주신 분, 자신의 몸이 찢기고 피가 흐를 것을 알고 두려웠지만 그 잔을 피하지 않으신 분, 배반의 현장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고 반항하지 않으신 분, 대항하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어 칼을 버리도록 명하신 분, 붙잡혀 갈 때도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온순하게 끌려가신 분, 법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입을 열어 변명치 않으신 분, 온갖 모욕과 치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인내와 순종으로 참으신 분,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받을 때도 자신을 못 박은 원수들을 위해 사랑하며 기도하신 분,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와 떨어지기 싫어하셨던 분,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완수하고 숨을 거두신 분, 예수.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을 눈앞에 앞두고, 쿠데타를 기다리던 그 만찬석상에서 떡을 떼어 손에 쥐고 축사한 후 제자들에게 주며 말한다.
“받아먹어라.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다시 잔을 들고 하늘에 감사한 후 제자들에게 주며 말한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2)


권력,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과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다. 지식은 힘을 낳고 권력을 창출하는 화약과도 같다. 이성은 그 권력을 운반하는 총신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 가운데 담겨 있었던 이성을 우리의 영혼 속에 심어 놓으시고 그 속에 지식과 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연을 다스리고 타인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배토록 하는 일에 사용하기를 원하셨다. 그 지식은 창조적이며 생산적이며 이타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었던 도구였다. 다시 말해 힘을 사용하는 총구의 방향이 제한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스스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을 먹어버린 타락한 인간에게 더 이상 지식은 안전한 도구가 될 수 없었다. 지식은 힘을 창출하며 곧바로 이기적인 총부리를 타인을 향해 겨냥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억압하고 배척하며 위협하고 이용하고 갈취하고 유린하고 감금하고 때리고 고문하고 그리고 죽였다. 아주 잔인하게.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역사였다.


현대사회가 지닌 특징은 지식-권력의 연계성이다. 근대 사회에서 지식의 폭발을 야기하며 본격적인 권력의 사회구조화를 일으킨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6, 17세기 서구에서 발생하였던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케플러-갈릴레이-뉴턴으로 이어진 이 혁명은 단순한 과학적 발견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사상혁명이었다. 뉴턴 역학에 의해 밝혀진 거대한 지식체계가 땅과 하늘의 모든 운동을 뭉뚱그려 합리적인 과학적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서구인들은 경이를 너머서 신세계를 향한 허황된 꿈을 꾸게 되었다. 과학 혁명에 의해 형성된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게 되었다. 인간의 머리로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손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자만심이 서구 지성인들을 사로잡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대사조를 등에 없고 19세기 중엽 찰스 다윈에 의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던 진화론은 전 세계를 뒤덮는 혁명적 풍조가 되었고 진화 사상이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전 인류가 과학기술의 무한 발전에 의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환상에 빠지게 된 것이다.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 식민지 영역으로 패권 쟁탈을 하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전 세계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첨예하게 나뉘는 과정 속에서도, 양 진영 모두 마침내 인류는 20세기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되리라는 신념만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과학기술은 이상사회를 꿈꾸는 자들에게 지식의 권력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도구였다. 그와 같은 신념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그 꿈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이룩해낸 과학기술의 열매가 핵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로 등장하면서 온 인류를 핵전쟁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한국 전쟁과 월남전의 참상, 끝없이 이어지는 냉전 상황 속에서 서구의 지성은 자신들이 가졌던 진보 이데올로기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적 질문이 제기되자 그와 함께 소위 탈현대, 즉 포스트모던 논쟁이 시작되었다. 뒤엉키기 시작한 20세기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 속에서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시도했던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철학자 중에서 푸코와 하버마스가 있다.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이 불가분적 관계에 놓여있음에 천착한 사회철학자이다. 그는 인간이 이성과 비이성을 분리함으로써 얻어진 지식을 타인을 억압하고 배척하는 도구적 권력으로 사용하여 왔음을 지적한다. <지식의 고고학>, <광기와 문명>, <성의 역사>, <감시와 처벌>과 같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을 통해 병, 범죄, 광기, 성, 정치 등의 역사성을 고고학적 방법론으로 파헤친다. 권력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과 규율과 감시 기능을 통해 사회의 비합리적 요소를 통제하고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지식체계임을 분석한다. 그 속에서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과 난제를 인정하고 해명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엉망으로 뒤엉키게 한 주범으로서 근대적 이성에 주목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인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대한 신뢰가 교조적으로 유포된 것에 반발하며 이성과 합리성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것이 그의 작업의 본질이다. 그러나 자신의 해체적 분석에 의해 재구성된 지식-권력의 신 계보학이 인간의 권력을 창조적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또 다른 규범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점에 있어서 여전히 그는 인본주의적 이성주의자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하버마스는 문제 해결 방식을 인식론에 기초한 비판적 해석학을 통해 접근한다. 합리적 이성에 장애를 일으킨 요인을 의사소통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의사소통의 규범화를 통해 합리적 이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낙관론에 기초하고 있다. 언어의 혼란을 통해 바벨탑의 역사가 중단되었으니 이제 그 언어를 합리적으로 통일시켜서 다시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다. 흉측하게 얽히고설킨 거대한 퍼즐을 맞추고 있는 현대인들을 바라보며 푸코가 잘못된 퍼즐을 모두 해체하여 다시 시작하자고 주장한다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만 잘 할 수 있다면 헝클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퍼즐 맞추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성은 타락한 이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성을 담는 그릇인 언어 역시 타락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나의 세 치 혀조차도 제어하기 힘들어 온전한 관계형성에 실패하고 있는 타락한 존재일 뿐이다. 권력을 창출하는 지식의 통로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져 있을 때만이 온전한 권력이 배출된다. 결국 권력이란 관계성의 산물이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것이 단절되는 순간 인간은 깨어진 존재가 된다. 불완전한 관계는 불완전한 권력을 창출한다. 또한 불완전하고 악한 권력은 다시금 인간사회의 관계성을 깨뜨린다. 악의 확대 재생산을 일으키는 이 같은 파괴적 연쇄반응에 의해 사회는 급격히 타락한다. 그것이 역사다. 인간의 힘으로 그 폭발적인 악의 연쇄반응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푸코와 하버마스……. 한 마디로 하마가 코푸는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악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 그 사실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그것을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표현하며 열거하고 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그리고 국가 간에도 악한 권세는 영향은 치밀하고도 포괄적으로 퍼져있다. 끔찍한 가정 폭력과 직장에서의 수탈과 억압,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소외 및 범죄 행위들, 국가 공권력에 의한 감금과 압제, 더러는 독재자의 횡포에 의한 정치적 탄압과 고문을 통한 비인간화, 나아가서는 전쟁터와 수용소 군도, 아우슈비츠 같은 곳에서 벌어진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탈인간적 만행에 이르기까지…….


독일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괴테의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미망(迷妄)에서 빠져나와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독일 계몽주의 정신을 화려한 문학적 언어로 구현한 거짓 복음에 불과하다. 이 시대에 교묘하게 위장하여 다가오며 영적인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이 악의 권세에 대하여 리차드 포스터는 특별히 일곱 가지를 경계하고 있다. 돈, 성, 종교와 율법, 기술문명, 자기도취, 군국주의, 절대적 회의주의가 그것이다. 변신의 명수인 사단은 우리를 영적으로 현혹하며 끊임없이 속이고 미혹하는 거짓의 아비이다. 어떻게든 하나님 위에 올라설 수 있는 거짓 우상을 만들어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우리를 지극히 높은 산 위로 데려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하며 유혹한다. 세상의 권세에 대한 그 유혹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것이어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 박사의 전철을 밟고 마는 것이다. <파우스트>를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꽃피운 독일 정신의 극치라고 표현하며 자만심에 가득했던 독일인들……. 그 파우스트 박사의 말로는 아우슈비츠로 끝을 맺는다.



(3)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못 박힌 순간,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흐르는 강물처럼 쉼 없이 흘러가던 죄의 역사는 잠시 숨죽이고 멈추어 섰다. 도도히 흐르는 오만한 역사(chronos)의 물줄기 속에서 온갖 피비린내를 부르며 약탈하고 빼앗고 억누르고 때리고 죽이던 그 권력의 횡포는 하나님이 정하신 역사(kairos)의 정점에서 마침내 삼라만상의 주인이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그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인류가 과거 역사 속에서 범했던 모든 무자비한 권력의 잔혹성과, 진리를 향해 침 뱉고 뺨을 때리며 모욕하던 로마 군병의 포악함과, 장차 수많은 독재자의 횡포 속에서 극악한 고문으로 비참하게 죽어가야 할 수많은 정치범 수용소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그 순간 십자가 세 개의 못 자국 소리를 향해 모두 빨려 들어갔다.


쾅 쾅 쾅 


제 3 시의 적막이 이어졌다.


온 우주가 그 순간 경악하였다. 하늘의 해와 별과 달이 파랗게 질렸고 창백하게 빛을 잃었다. 땅의 산천초목이 몸을 떨었고 강과 바다가 놀라 흔들리고 갈라졌다. 시공간을 창조하셨던 최초의 그 말씀이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시간과 공간이 휘청거리며 일순간 흔들렸다. 죽었던 자들이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났으며 성전 휘장이 갈라졌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던 사단의 그 야욕이 마침내 성취된 것만 같았다. 세상 풍속을 휘어잡고 사람들을 미혹하던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잔인하게 웃으며 그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도원 주인이 보낸 상속자 아들을 죽이고 무자비한 폭도들이 포도원의 경영권을 찬탈한 것이었다. 천국 쿠데타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많은 생각들은 무엇이었을까?


제 3 시의 침묵,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에 예수는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저항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 그의 온 몸을 제압하고 있었다. 간간히 나지막한 신음 소리만 배어나왔다. 십자가 주변에 몰려든 군중들이 조롱하며 내뱉는 말들이 들려왔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더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어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느냐? 서기관과 장로들이 대꾸한다. 저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구원치 못하는구나. 어서 내려와 보아라. 네가 진정 이스라엘의 왕이냐? 예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본다. 자신에게 헌화하며 환호하던 군중들이 어느새 권력자의 편에 서서 이제는 자신을 손가락질 하고 조롱하며 고개를 흔드는 그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못 박은 후 옷을 빼앗으려고 서로 싸우는 포악한 로마 군병들도 눈에 띈다. 피에 물든 그 옷을 차지하려고 제비뽑기를 하며 다투는 탐욕스런 저들에게도 과연 구원이 임할 수 있을까? 아버지……. 정말 약속하신대로 이 십자가가 저들마저 구원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지금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못 박힌 상처에서 전율하는 고통이 온 몸을 쥐어짜고 전파된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 때에 옆에 매달린 한 강도가 고통 중에 쥐어짜며 예수에게 욕을 퍼부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더냐? 너와 우리를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 그러자 두 강도들이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 하나가 욕하는 다른 강도를 꾸짖어 나무라기 시작했다. 네가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거늘, 이 죄 없고 의로운 사람에게 네가 어찌 욕을 하느냐? 그가 갑자기 간절한 목소리로 예수를 불렀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고개를 비틀어 간신히 그를 바라보았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간절함이 뒤섞인 그의 눈길이 들어왔다. 갑자기 그가 가련하고 불쌍했다. 작은 미소를 그에게 보내며 말했다. 그래, 걱정마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 그의 얼굴에서도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서서히 번지더니 마침내 얼굴이 환해졌다.


태양이 눈부시다. 덥다. 유다는 지금 어디 있을까? 사랑하던 제자 유다의 배신을 생각하자 고통이 가중되었다. 발을 씻겨줄 때 당혹감에 젖어 눈길을 피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겟세마네에서 겁에 질려 자신에게 키스하던 유다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아버지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고통의 순간에 괴로움을 함께 지고 있을 그 소외된 영혼을 예수는 찾아 나서고 싶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던 목자처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던 여인처럼……. 유다에게 쏟아질 역사의 손가락질을 생각하며……. 너무 불쌍해서 예수는 눈물지었다. 베드로가 떠올랐다. 열심이 있는 만큼이나 실수투성이였던 제자 베드로. 대제사장의 집안 뜰에서 멀찌감치 겁에 질려 따라오던 베드로, 자신을 부인한 후 돌이켜 눈이 마주치자 뒷걸음질 쳐 도망가던 그가 생각났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는 베드로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예수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였다. 주여 사단이 저를 삼키지 못하게 하소서. 아끼던 제자 요한과 그를 따르던 많은 여인들의 슬픔어린 모습을 굽어다 보았다. 긍휼한 마음이 솟아났다.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 글로바의 아내……. 그 속에 섞여 오열하는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다. 마리아는 거의 실신한 듯 부축을 받아 기대어 있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행복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아픔만을 안겨주었던 장남……. 동생들을 앞세우고 자신을 찾아 나섰던 어머니를 내치며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여자여……. 이후로 요한을 아들로 여기소서. 사랑하는 요한아, 이제 네 어머니로 모셔다오.


한바탕 아픔이 몰려가자 다시금 몽롱한 기억의 조각들이 고개를 쳐든다. 간신히 얼굴을 들어 주변을 바라보니 드문드문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칼을 찬 백부장의 모습과 밤중에 자신을 몰래 찾아왔던 니고데모와 부자 관원 아리마대 요셉의 모습이 눈에 뜨인다. 악의 권세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나서지 못하는 자신들에 대한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는 흔적이 엿보인다. 공포의 십자가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에 떨며 기이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들……. 아버지 저들에게 믿음을 주소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겁에 질린 얼굴도 얼핏 보였다.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을 다른 제자들의 얼굴도 하나씩 떠올랐다. 마지막 만찬을 하며 떡을 떼어주던 그들, 두려움에 휩싸여 근심어린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 제자들. 아버지 저들의 인생을 축복하소서. 저들이 장차 떡의 인생을 살아가며 자신을 내어줄 때 다시는 근심과 두려움에 싸이지 않게 하시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사 저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소서.


해가 중천에 떴다. 온 몸에서 피와 물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극도의 갈증이 그의 혓바닥을 늘어뜨리며 식도를 강제로 잡아 빼는 듯한 고통을 가져왔다. 숨이 가빠왔다. 아버지 어째서 이 고통을 제게 주십니까?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저를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어째서 이 고통을…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어찌되는 거지? 갑자기 공포가 몰려왔다. 내가 이 모든 이들의 죄 짐을 지고 이제 죽어버린다면? 지옥으로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야. 이 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래 이것이 아버지가 내게 맡긴 사명이었지. 그런데 왜 이렇게 두려운 거지? 인간들이 만들어낸 온갖 가증스런 죄의 굴레가 그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으로 씌워진 것만 같았다. 아버지를 떠나서 한시도 존재해 본 일이 없는데……. 이 죄의 삯을 내가 혼자 다 질 수 있을까? 아버지의 사랑에서 영원히 멀어지는 것인가? 더 이상 아버지가 나를 돌아보지 않으실까? 아니야. 그럴 순 없어. 아버지 정말 나를 버리실 겁니까? 무섭다. 내가 그토록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도록 간구했건만……. 아버지 원망스럽습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갑자기 해가 빛을 잃으며 어두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정오 육시에서 구시에 이르는 사이에 어두움이 임하여 십자가 주변을 감쌌다. 예수는 고개를 숙이고 마치 죽은 것처럼 가만히 늘어져 있었다. 십자가 주변에 몰려 있던 군중들도 이제 구경거리가 끝난 듯 하나씩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였다. 로마 군병은 십자가 밑에 창을 세워놓고 자기들끼리 둘러 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다. 가족들과 여자들만이 여전히 흐느끼며 간간이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루한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죽은 듯이 잠잠하던 예수가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의 처절한 고통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목마르다. 그 소리를 듣자 병정 중 하나가 서서히 일어나 옆에 있던 해융을 포도주 그릇에 담그더니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가로 가져갔다. 예수는 그것을 맛보고 고개를 돌려 피하였다. 그리고 안간힘을 쓰듯 고개를 들어 앞을 향해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그의 피멍 들린 입술이 떨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이루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그리곤 고개를 떨어뜨려 숨을 거두었다. 그때 천둥소리와 함께 사나운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마지막 남은 피와 물을 다 쏟아내었다. 그 빗물에 젖어 십자가의 피가 땅으로 스며들었다. 아벨의 피를 받았던 그 저주받은 땅에 예수의 피가 촉촉이 스며들어 흐르기 시작했다.


쿠데타는 끝났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그의 피는 강을 따라 바다를 건너 오대양 육대주를 감싸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억압에서 자유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굶주림에서 배부름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죽음의 떡에서 생명의 떡으로.





(1) 마키아벨리, <군주론>, <로마사 평론>을 참조하라.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치우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동이(東夷)계 민족이 숭배하던 신이었던 점과 치우가 거느리던 풍백(風伯) 우사(雨師)와 같은 장수가 단군 신화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치우를 섬기던 한민족의 조상이 황제와의 패권쟁탈전에 져서 중원에서 한반도로 밀려났을 가능성도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