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장로의 ‘자녀교육’

이코스타 2007년 1월호

이 글은 2001 KOSTA/USA에서, 고 김인수 교수님의 세미나를 녹취한 것입니다. 영원한 코스탄 고 김인수 교수님!! 그 분의 살아있는 자녀 교육에 대한 강의에 귀 기울여 봅니다.


김인수 교수
1938년 일본 동경 생으로 국제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로 일하는 한편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 실행위원, OMF 이사장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일찍부터 가정 사역에 관심을 보여서 기독교가정사역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거시조직이론’, ‘치우침 없는 걸음으로’ 등의 책을 펴냈다.


첫번째, 두번째 시간에는 부부가 어떻게 화목하게 가정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부부가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네 사람이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와 내 속에 있는 유치한 어린 아이, 내 배우자와 그 속에 있는 유치한 어린 아이, 네 사람이 결혼생활을 합니다.


제가 코스타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정신없이 상담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여러 가지 상담제목이 있지만, 제일 많은 것이 부부간의 갈등의 문제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두가지 경우 예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부부가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갈등을 합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의 차이가 보완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나하고 다른 상대방에 대해서 계속해서 인간적으로 요구하고 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돕는 배필로 살라고 했죠. 바라는 배필로 사는 한 그 결혼생활은 깨지게 마련입니다.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볼때마다 내가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준비해서 감사하고 기쁨을 누리면 가정은 멋있게 달라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두 사람을 붙여서 가정을 만들도록 설계하신 데에는 돕는 배필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식으로 살면 망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실 때 실수 안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아내를 보면 어쩌면 저런 여자를 만나서 사냐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지만, 가장 좋은 여자를 제게 주신 겁니다. 제 아내에게도 가장 좋은 남자를 주신 겁니다. 문제는 누구를 잘못 만나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잘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가정생활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상식대로 하면 안됩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도 설명서를 읽어보고 그대로 조립을 하고 작동을 시켜야 제대로 소리가 나는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의 삶을 살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설명서를 읽어보고 그대로 작동을 시켜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상식대로 제멋대로 작동시키면 거기서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두번째 시간에는 부부가 아름답게 살기위한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자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남자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자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감성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평생동안 계속해서 사랑을 확실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어제는 자녀교육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기업입니다. 이것은 부모로서 절대 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다른 것은 전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지만, 자녀양육은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보다도 더 중요하고 우선순위가 가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적인 양육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양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부모가 실패하는 것이 정서적 양육에서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그 아이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정신적인 양육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그 전에 정서적인 양육과 관련해서 한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성격을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보면 두 변수를 가지고 사람을 분류하면 백가지가 넘습니다. 외향적/내성적, 적극적/소극적 등등 100가지 넘게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A타입 성격/B타입 성격입니다. A타입은 빈틈없고 뭐든지 열심히 하지만 안절부절하는 성격입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기특한 성격입니다. B타입은 반대의 성격입니다. 성격좋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부모가 다루기 힘든 성격이기도 하지요. 예를 들면 아침에 깨워서 학교 보내기도 힘들고, 방도 잘 치우지 않구요.


자식은 A타입도 있고, B타입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B타입이고 아이가 B타입인 경우에는 부모가 자식을 야단치면서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B타입이고 아이가 A타입인 경우에는 어떻게 저런 아이가 태어났느냐면서 감탄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A타입이고 자식이 A타입인 경우 역시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A타입이고 자식이 B타입인 경우가 가장 문제인데, 부모가 자식을 견디지 못합니다. 저는 전형적인 A타입인데 우리 아이 중에서도 전형적인 B타입이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비틀었는지 모릅니다. 20년을 비튼 후에 제가 내린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제가 그 사실을 알았으면 그렇게 비틀지 않았을텐데, 그냥 B타입으로 자랄 수 있게 해주었을텐데 말입니다. 20여년간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정리한 것입니다. B타입 자녀를 보거든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36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를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A타입이 좋을까요, B타입이 좋을까요? 일견에는 열심이고 자기 일 잘 하는 A타입이 좋아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B타입은 사람을 끌어안는 재주가 있습니다. A타입은 자기만큼 해내지 못하는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는 반면에, B타입은 못난 사람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A타입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수련을 통해 B타입처럼 부드럽게 바뀌지 않는 한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여담이지만 A타입은 B타입에 비해서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도 4배가 높고, 발병 후 치사율도 2배가 더 높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B타입 아이를 마냥 놓아두어야 할 것입니까? 조금은 훈련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은사가 참 많지만, 음악의 은사는 없습니다. 만약 제 부모가 음악가여서 저 역시 음악가로 만드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천부적인 소질 없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훈련받았더라면 성가대원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슷한 원리로 어떻게 버릇을 고쳐갈지 이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막내 아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이불을 개고 나가는 적이 없었습니다. 훈련은 아버지의 책임이기 때문에, 제가 이불을 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눈깜짝할새에 도망을 나가버립니다. 그러면 아내가 이불을 개서 올려놓습니다. 타이르다가 안되어서 규칙을 정했습니다. 한번 이불을 개지 않으면 다섯번 이불개고 펴는 것을 반복하도록 하는 규칙이었습니다. 결국은 35번까지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불 개지 않는 습관을 고쳤습니다. 청소를 잘 못하는 습관도 청소하는 날을 정하고 검사받는 식으로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훈련 이외에는 자녀의 천부적 성격을 인정해주고 바꾸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각각의 자녀들은 모두 다른 인격체이기 때문에, 각각의 아이에게 주어진 은사를 인정하고 각각 다르게 키워야 합니다. 첫째 아이에게 적용했던 방법을 둘째, 셋째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아이가 가진 가장 좋은 점을 살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적이 일률적인 기준이 된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정신적인 훈련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조금 전에 중년의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코스타에 처음 오신 분인데 어떻게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갈라질 수 있느냐면서 깜짝 놀라셨습니다. 조별모임에서도 남녀문제가 심각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날 신세대의 문제는 인내심의 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부모로서 자녀를 강하게 키우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언제 자녀가 강해지는가? 고생을 해야 강해집니다. 자녀를 고생시키세요. 저는 가난 때문에 고생하면서 자랐는데, 지금은 그것을 감사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두렵기보다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심할 것이 있다면 고생을 하면서 성격이 굽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사랑으로 편하게 키우면, 성격이 곧기는 하지만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고생을 시키되, 사랑을 베푸십시오. 사랑을 많이 주면서 고생을 시키십시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나중에 독립된 개체로서 어른의 역할을 할 때에,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 책임질 수 있는 체질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체격만 좋아졌지, 정신력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계속 부모에게 의존하는 어린아이 말입니다. 인내심의 부족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저는 하교 때에 승용차에서 기다리면서 아이들을 데려가는 부모는 정신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압구정동에 사는 어머니의 아들이 해병대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진해훈련소에 면회가서 아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밤새도록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 부모들이 한국 부모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징병제도가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오늘날 같이 먹고 살기 쉬운 사회에서 자식 고생시키기가 쉽지 않은데, 군대만큼 고생시킬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이상의 환경을 만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자식을 참으로 사랑하거든, 훈련시키십시오.


저도 미국에서 공부한 아들이 있지만, 영어를 잘해도 카투사 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선에서 죽을 고생하되, 죽거나 많이 다치지는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 아이들의 불평이 있다면, 오히려 힘든 일을 겪고 와도 집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좋아하고 동정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아들은 눈이 나빠서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고 실망하는 부모는 우리 집밖에 없을 거라고 불평했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보충역 중에서 가장 고생하는 송추 방위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일선의 정규부대가 무너졌을 때 서울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는 부대입니다. 저는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 5시반에 일어나서 버스 두번 갈아타고 송추까지 가야 겨우 8시에 들어갑니다. 11시까지 자던 아이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첫날 다녀오더니 아빠가 좋아할 일이 생겼다고 이야기해서 무슨 일인가 물어봤더니, 대포에는 트럭이 끄는 대포와 사람이 끄는 대포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람이 끄는 대포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자기에게 걸렸다고 했습니다. 매일 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이겨내면 강한 사람이 됩니다. 동시에 격려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 고생만 시키면 외강내강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많이 먹으면서 고생하면 외유내강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왜 들어쓰셨을까요? 40년간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40년동안 광야에서 죽을 고생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육과 고생의 의지력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자식 사랑한다면 일부러 고생 시키십시오. 저는 아이가 서너살만 되면 한겨울의 추운날에 가게 심부름을 보냅니다. 안 나가려고 하면 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보내면 어쩔 수 없이 갔다 옵니다. 다녀오면 그때부터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일석이조 아닙니까? 하나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또하나는 아이에게 고생을 주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어느 학부모께서 제게 긴 편지를 쓰신 일이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딸의 이야기입니다. 엄마가 공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을 대신했습니다. 처음에는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는데, 결국 아이가 모든 일에 온갖 투정을 다 부려서 제게 배운 것을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대신에 아무것도 안하는 날은 밥을 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설겆이와 청소를 시켰습니다. 아이가 울면서 설겆이와 청소를 했는데, 엄마가 시키니까 하는데 친구들한테는 이런 거 한다는 이야기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가 엄마를 실망시켰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한 일이 아이가 보기에는 하찮고 창피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고생을 시켰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가 학원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청소하고 설겆이 끝나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더니, 다 끝내고 학원 버스 타고 학원을 갔다왔습니다. 그리고나서 옛날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자기에게는 공부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고마움을 그때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은 아이를 망치는 길입니다. 그것은 자기 멋대로 살게 내버려두는 것인데,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에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내심을 심어주십시오. 그래야만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바람직한 균형을 잡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이먼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회과학자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의사결정(decision-making), 즉 선택에 의해서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의사결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프로그램된 (programmed) 의사결정, 또 하나는 프로그램되지 않은 (non-programmed) 의사결정입니다. 프로그램된 의사결정은 너무 자주 해서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오는 결정입니다. 양치질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가는 것이라든지, 아이가 아침에 학교가는 것도 프로그램된 결정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왜 삶에서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가? 말씀이 내 속에 프로그램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 프로그램되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바람직한 행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간구하는 것보다 말씀이 프로그램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프로그램되면 엎어지든 넘어지든 제대로 행동하게 되어있습니다. 반면에 프로그램되지 않은 의사결정은 한번도 안했거나 별로 안해보았기 때문에 프로그램되지 않은 결정입니다. 어느 학교에 갈까, 누구하고 결혼할까, 어떤 직장을 택할까, 또는 코스타에 갈까 말까와 같은 것이 프로그램되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의사결정이 두 가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실(fact)과 가치관(value)이 그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규범을 넣어주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가치관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선봤다고 합시다. 용모가 준수한 여자, 순하게 생긴 여자, 부유한 장인의 무남독녀, 지성적인 여자, 착하게 생긴 여자. 이것은 여자를 보고 알게 된 사실(fact)입니다. 어떤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는 가치관(value)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제가 왜 코스타에 강사로 왔을까요? 코스타에 이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가치 때문입니다. 우리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원칙 중에 하나가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절약해서 열심히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것인데, 어려서부터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규범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서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가?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들어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의 가치가 나를 지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갖 능력을 다 한다고 해도 별볼일 없습니다. 빼어난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는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일일이 찾지 않고 어떻게 살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마련입니다.


사실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이기적인 합리주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더 당하기 때문에, 더 당하지 않기 위해 합리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통규칙을 어기거나 음주운전을 하다가 잡히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통규칙을 지키고 마시고 싶은 술도 안 마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행동을 하면 칭찬해 주고, 잘못을 하면 댓가를 치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 처벌이 무서워서 잘못된 행동을 피하다 보면, 그것이 버릇이 되고, 성품을 형성시킵니다. 프로그램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 집의 원칙이라면, 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 그에 대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현대의 부모들은 그런 체벌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었지요. 사실 이렇게까지 아이들을 내버려 두게 된 것은 최근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세대만 해도 부모님께 많이 야단 맞고 지냈으니까요.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얼마나 악동으로 놀았었나요. 그것이 악한 줄도 모르고 잘못을 했으니까요. 그런 것을 부모가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바로 잡아줄 수 있을까요?


첫째, 잔소리는 훈계가 아닙니다. 왜 부모들이 잔소리를 할까요? 자신이 자랄 때 부모들이 자기에게 잔소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잔소리를 하는 부모를 보면, 아이는 가만히 있는데 부모는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 댑니다.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잔소리는 훈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잔소리는 훈육성이 없는 충동적인 행동이면,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부모의 판단과 생각이 중심이 된 것이지,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잔소리는 아픔이 없습니다. 부모가 고민해 보지 않았으니까요. 잔소리는 희생이 없습니다. 부모가 인내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고민해 보지 않았으니까요. 잔소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아이를 좌절하게만 만드니까요. 잔소리는 희망이 없어요. 아이에게 길을 제시해 주지 않으니까요. 잔소리는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아이를 불안하게 만드니까요. 잔소리는 훈계가 아니라, 아이들의 열등감만 늘어가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을 보면,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도둑질을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야단을 치면, 아이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왜 재수없게 걸렸지? 다음에는 더 교묘하게 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 훈육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훈계의 목적은 ‘선한 양심’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충동적으로 야단을 치게 되어서 고함을 지르거나 주먹이 먼저 나가게 되면, 선한 양심을 가지게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훈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합니다.


훈육에 대한 제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충동적으로 야단을 친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게 훈계를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잘못을 한 경우에는 제 아내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직접 야단치지 않고, 메모를 해 놓고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집에 들어와서 잘못한 아이에게 ‘애야 안방으로 들어와’합니다. 야단은 반드시 단 둘이 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자존심이 많이 상하게 되니까요. 안방에 들어오게 하고는 묻습니다. ‘네가 이렇게 잘못했니?’라고 묻습니다. ‘네’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이런 이유 때문에 잘못되었고, 그것이 이렇게 큰 잘못이란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기준은, 우리 집의 원칙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 타이르고 보냅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그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 프로그램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또 다시 잘못을 하게 되면, 다시 안방으로 불러 잘못을 지적하고 타일러 돌려 보냅니다. 세번째 잘못을 저지를 때도 말로 타일러 보내는데, 그 때는 새로운 약속을 하나 합니다. ‘네가 세번째 똑같은 잘못을 했다. 너는 말로 해서는 못 알아 듣는 것 같으니, 다음에 또 잘못을 하면 회초리는 세대 맞는 것으로 하자. 괜찮겠니?’. 그래도 그 아이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되지요. 이제는 다시 방으로 불러서 ‘네가 지난 번에 다시 잘못하면 매를 맞겠다고 약속했지?’라고 하고 회초리를 때립니다. 그리고는 꼭 안아주고는 ‘네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너를 잘 양육해야 할 필요가 있단다. 그래서 때리는 거야. 너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도록 하렴’하면서 달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가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고, 그 이후에도 아이를 꼭 안고는 그 아이의 얼굴이 완전히 밝아질 때까지 사랑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아이를 때리려면, 평소에 아버지가 아이에게 충분히 사랑을 확인 시켜주었어야만 합니다. 평소에 시간적으로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사랑을 확인시키지 못한 부모는 아이를 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는 가능하면 때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큰 아이는 별로 때리지 않았지만, 막내는 조금 때렸던 것 같습니다. 대신 막내에게 얼마나 사랑을 확인 시켜 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확인 시켜 주기 위해,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저의 예를 들어보면, 제가 유학할 때 – 정말 바쁜 시기였는데 – 저녁 때면 아이들과 야구나 축구를 함께 하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매일같이 반복했습니다. 그리고는 7시면 잠자리에 들게 했죠. 여름 같은 경우는 7시면 아직 밖이 환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기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원칙으로 지켜왔습니다. 엄마 아빠가 바쁜 중에도 아이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 아직도 우리 아이들은 그 때를 이야기합니다. 아이들과 오래 있는 것도 좋지만, 있는 동안에 무엇을 함께 해 줄 것인가도 무척 중요합니다.


또 한가지 이야기를 해 보죠. 제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막내 아이가 3학년 때었던 것 같습니다. 한창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막내가 갑자기 ‘아빠 공기 해’ 그러더라고요. 한참 논문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공기 놀이라니요. 하지만, 그 10 20분이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잠깐만 기다려. 컴퓨터 세이브해 놓고’라고 하고는 아이와 공기놀이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지나서는 ‘아빠 공기 재미없다. 고무줄 놀이하자’ 하더라고요. 고무줄을 한쪽 끝은 책상에 묶고, 한쪽 끝은 내 발에 묶고 껑충 껑충 뛰더니만, ‘아빠 밖에 나가서 하자’ 그러더라고요. 낮에 집에서 일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는 판에 밖에서 아이와 고무줄 놀이하는 아빠라니요. 그래도 밖에 나가서 열심히 함께 뛰어 놀았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막내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빠 고마와요. 공기 놀이 해 주고, 고무줄 놀이 해주고…’. 그런 추억은 평생 갑니다. 이렇게 평소에 아이에게 사랑한 사람만이 아이를 야단칠 수 있습니다. 그저 잔소리만하고 고함만 치는 것은 너무 좋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간디가 쓴 우리를 파괴하는 7가지 죄라는 글이 있습니다. 간디가 쓴 인간이 저지르는 아주 잘못된 죄의 목록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2. 양심이 결여된 쾌락
  3. 성품이 결여된 지식
  4. 도덕이 결여된 사업
  5.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6. 희생이 없는 종교
  7. 원칙이 없는 정치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여러분이 아이들을 양육하실 때, 자녀가 어디를 가더라도 이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참석자 질문: 형제들이 자주 싸웁니다.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요?
김인수 답변: 형제 간에 싸웠다는 것 만으로 양쪽을 모두 야단치는 것이 좋습니다. 한쪽이 분명히 잘못한 경우에라도, 형제 간에 싸웠다는 것만으로 야단을 치고, 그 이후에 억울한 아이를 따로 불러 ‘내가 억울한 것을 안다’고 설명해 주는 편이 좋습니다.


참석자 질문: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 언제까지 도와주는 것이 좋을까요?
김인수 답변: 아이들에게 너무 늦게까지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아이들이 빨리 경제적으로 도와 줄 필요가 있지요. 만일 커서도 아이들이 경제적 도움이 필요하다면, 받을 생각하지 말고, 돈을 꾸어주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어째든 갚아야 할 돈이라고 생각할테니까요.


참석자 질문: 아이가 두세 살이라서 아직 어립니다. 이런 경우에 아이들은 훈계는 어떻게 하나요?
김인수 답변: 어리더라도 원칙에 따라서 훈계를 시작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 버리면, 그 패턴을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예들 들어, 아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다른 아이를 부르고 할 경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회초리를 들 필요가 있겠지요.


참석자 질문: 아이가 잘못은 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야단을 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야단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중에 야단을 쳐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인수 답변: 야단을 치는 경우는, 잘못을 한 상황과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이가 잘못한 일과 야단 맞는 것의 연결을 잘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참석자 질문: 아이들이 서로 싸웠을 때, 원인을 알기 위해 다른 집 아이에게 ‘왜 싸웠느냐’고 물었더니, 그 집 부모가 당혹해 하더라고요.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김인수 답변: 아이들에게 왜 싸웠는지 이유를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에 대한 답변을 이미 다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왜 싸웠는지를 다그치는 것은 아이에게 거짓말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싸운 이유를 묻기 보다는 싸웠다는 것 자체로 야단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참석자 질문: 낮에 엄마하고 있을 때 잘못한 일을, 저녁에 아빠에게 이야기 해야 하나요? 때로는 아이가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할께요. 아빠에게 말씀하지 마세요’라고 그럴 때가 있거든요.
김인수 답변: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는 너에 관해서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엄마가 아빠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고자질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 모두가 너에 대해 다 알고 더 사랑하기 위한 것임을 잘 설명해 주면 됩니다.


참석자 질문: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말썽을 부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냥 야단을 치자니, 아이들의 기가 죽을 것 같은데요.
김인수 답변: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원칙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기 죽을까 봐 중요한 것을 놓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한상] 2006년 12월에 읽은 다섯 권


2007/1


지난 달 (2006년 12월)에는 5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모두가 조금은 오래된 책들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늘 이렇게 고전만을 선호한다고 생각지는 마라.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인터넷 서점의 신간 코너를 찾으며 사니까.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스탠리 하우어워스, 복있는사람


스 탠리 하우어워스 (Stanley Hauerwas) – 이 책의 뒷면에는 그를 ‘<타임>이 선정한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나는 그를 존 하워드 요더 (John H. Yoder)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신학자로 알고 있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이름을 아무리 검색해도 한 권도 찾을 수 없어 늘 아쉽던 차에,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는 책 제목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추천인이 김회권 목사, 김기현 목사, 신원하 교수였으니, 책을 구입하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부산 수영로 교회 김기현 목사의 간결한 서평이 실려져 있다. 김기현 목사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책이 한국에 거의 소개가 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 개인의 판단으로는, 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심장부에서 자라나 재세례파인 존 요던 (John, H. Yoder)의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자(pacifist)인 점, 그에 더하여 미국과 자유주의 양자에 대해 전투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실천적 성향, 거기다 자연신학?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칼 바르트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수주의를 닮은 데가 있는지라, 진보/보수 양 진영 모두에게 두루두루 통하는 것이 도리어 약점이 됨으로써 딱히 절대 지지층이라 할 만한 이들이 없는 것이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더 없이 절실하지만, 동시에 삼키기에는 쓰디 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 탠리 하우어워스는 우리가 늘상 쉽게만 해 오던 주기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심도있게 다루면서, 주기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기도한다면, ‘기도함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되고, 이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다’고 한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또 그 기도를 살아낸다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를 도전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 자체가 상당한 도전이었슴에도 불구하고,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를 고려할 때, 찐한 아쉬움이 남는 것 왜일까. 그의 교회관이나 윤리관이 명확히 드러났다고 하기 어려울 뿐더러, 그의 색깔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 책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첫 번째 번역판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좋았지만, 그만큼 아쉬움이 더했던 책. 이제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다른 책들을 기대해 본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Howard Snyder, 생명의 말씀사


참 된 복음은 어떤 경우에도 식상한 것이 될 수 없다. 복음 그 자체로 늘 새 포도주이고, 우리는 그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한다. 1981년에 초판이 나온 책이니까, 벌써 25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책을 구입한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25주년을 기념해서 개정판이 나왔다. 내가 구입한 것은 정말 예스러운 필체와 대단히 어색하게 번역된 사람 이름이 눈에 많이 거슬리는 책이었다.) 하워드 스나이더 – 최근 나의 관심을 온통 빼앗아 가 버린 메노나이트 계열의 신학자 존 하워드 요더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고, 이미 ‘참으로 해방된 교회’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꽤나 친숙한 저자이다. 더구나 최근 신간 목록에는 IVP에서 나온 ‘교회 DNA’라는 책으로 계속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어 전혀 낯설지 않은 저자이다.


하 워드 스나이더는, 책에서 현대 교회가 담을 새로운 부대로 소그룹을 제안한다. 이미 소그룹에 대한 논의가 지나칠 정도로 활발하게 진행된 지금에 이 책을 볼 때, 그 제안에 대한 감동이 조금 덜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성 세가지, 다시 말해, 무언가 거룩한 성전을 세우려고 하고, 신에게 제물을 드리려고 하며, 또 신 앞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이기에 중간에 매개인을 세우려하는 단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성전되셨고, 스스로 제물되셨으며, 또 스스로 제사장 되심으로 이 세가지를 모두 만족 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성이 자꾸만 이런 종교적 성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런 문제의 해결책으로, 소그룹을 통해 구성원의 은사를 잘 활용할 수 있게 하여 진정한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아이디어는 성전이 아닌 성막으로 유동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므로, 기존의 건물을 능가하는 유연한 공동체를 만들라고 한다. 모두 14개의 장을 통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교회에 대한 주장은 현대 교회가 여전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귀한 이야기들이다.


 “C.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 루이스 마르코스, 복있는사람


이 책을 구입한 것은 2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C.S. 루이스의 책들을 읽으면서 동시에, C.S. 루이스에 관한 책들 또한 재밌게 읽고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루이스 vs 프로이트’나 ‘반항적인 회심자 C.S. 루이스’같은 책들을 통해, 제 삼자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루이스를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던 시점에서 ‘C. 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이 출판된 것을 보고 바로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읽지 않았을까. 그냥 그렇게 상당기간을 서재에 꽂혀있었다.


내 가 섬기는 두개의 성경공부 모임 중, 토요일 오전에 모이는 모임에는 유난히도 무신론자가 많이 있다. 그 중 한 형제의 경우는 모태신앙으로 평생을 교회를 다니다가 갑잡스레 회의가 들어, 무신론자를 자처하며 지낸 지 어언 몇 년이 흘러 버렸다. 무신론자로 돌아선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 한가지가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시는 것 같은데, 자신은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렇게 열심히 찾았는데도 만날 수 없었던 하나님이라면, 다른 사람이 만난 하나님도 모두 착각일 가능성이 높을테니까. 그렇게, 그 형제가 우리 모임에 참석한지 8개월정도 지났다. 그리고, 몇 주 전의 일이다. 조금씩 마음을 열던 그 형제가 신의 존재를 고백하게 되었다. 짧은 휴가 기간 동안 C.S. Lewis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때마침, 오랫동안 공부하던 창세기를 마치게 되었고, 다음에 공부하기로 한 히브리서를 시작하기 전에 얼마간의 시간을 그 형제가 깨닫고 경험한 C.S. Lewis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 공부를 준비하는 가운데, 전에 읽지 않았던 ‘C.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고, 다음 모임을 기대하며 읽어 내려갔다.


저 자가 서문에서 언급하듯이, 이 책은 C.S. 루이스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삶과 정신 그 자체를 다루었다기 보다는, 루이스의 사상을 기초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는 C.S. 루이스의 생각들을 일반화 시키기 위해, 그가 살았던 시기의 특징과 그의 삶을 짧게 돌이켜 본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근대주의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다윈,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등의 영향으로, 물질적인 것으로써 영적인 것을 설명하려는 세대에 살고 있었다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모더니즘의 도전을 극복해 가기 위해 루이스는 어떻게 투쟁했고, 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들이 묻어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뜨끔했던 부분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소 딱딱한 필체의 글들을 선호한다. 시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조금은 철학적인 접근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근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우리들은 언어를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 언어가 지닌 형이상학적인 위상에 대해 비 우호적이기 쉬워지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계몽주의의 견해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다고 한다. – 그럼 내가 지닌 지금의 글읽기 성향이 계몽주의의 영향 때문은 아닐지… 최근에는 계속 이런 도전을 주는 글들을 접하게 되니, 더 부담이 된다.


 “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인가”, James Sire, 이레서원


‘How to read slowly?’ – 몇 년 전 기독교 세계관 책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더구나 개혁주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James Sire의 책인지라,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꼭 봐야지’하고 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에 폭풍이 불어 몇일 동안 도시의 대부분이 정전이 된 적이 있었다. 이틀을 전기 없는 집에서 보내고는, 결국 삼일째는 친한 선배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때, 그 집의 책꽂이에 있는 이 책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리고 ‘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이가’를 참으로 빨리도 읽어 버렸다. 이 책이 왜 ‘세계관’ 분야에서 추천되는지는 명확하다. 어떤 책을 읽던 간에 그 책의 문자적 정보만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읽어가면서 저자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를 발견해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신을 믿는지??? 이런 세계관 탐색적 독서가 논픽션 뿐 아니라, 시나 단편/장편 소설을 통해서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다. 그리고는 작품에 삽입되고 영향을 미치는 전기적, 문학적, 역사적, 지식적인 문맥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책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도 간략히 설명한다.


책 을 많이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식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논픽션만을 선호하는 나와 같은 경우는, 시와 소설을 통해 세계관을 탐색한다는 사실이 좀 부럽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했다. 이제 소설도 좀 읽어야 할텐데…


James Sire가 이 책에서 권하는 ‘세계관 탐색적 독서법’을 들어보자.



  1. 빨리 읽으려고 하지 말라. 평소에 읽던 속도대로 읽으라. 아니면 더 천천히 읽으라. 속독은 유용할 수도 있지만, 세계관 탐색적 독서에는 쓸모없을 공산이 크다.
  2. 필기 도구를 가지고 읽으라. 저자가 중점을 두고 있는 단락이나 개념, 비유에 밑줄을 그으라. 주제문이나 논증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편리하다.
  3. 기사나 에세이가 아니라 단행본을 읽고 있다면, 서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소개 글들을 먼저 읽으라. 그런 류의 글들은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알려 줄 것이며, 저자의 가설들, 그가 선택한 방법들을 알아보는 통찰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
  4. 이해가 가지 않는 단어와 개념을 찾아볼 수 있도록 백과사전이나 여러가지 사전을 활용하라. 단어 위에다 용례를 적어 두는 것도 어휘력을 배가시키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5. 첫째, 둘째 등 중요한 편제를 말해 주는 단어에 밑줄을 그으라. 논증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논의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중요한 매듭이 있을 때마다 여백에 번호를 매겨 두고 싶을 수도 있다. 글쓰기의 스타일은 각양각색이게 마련이어서 글 하나하나마다 거기에 맞는 여백 활용법을 찾아야 한다.
  6. 책 전체나 하나의 장을 읽은 뒤에는, 곧바로 내용을 다시 검토하고 제목을 붙여 두라. 논제가 들어 있는 대목은 전체 내용을 단순 명료하게 요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책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핵심을 짚어 준다. 그런 대목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논제를 적어 보라.
  7. 여백에 책이 말하는 개요를 거칠게나마 구성하여 적어 두라. 이것은 필자가 주장을 펴나가는 방식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필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필자가 왜 타당하다고 믿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단행본의 경우, 목차의 순서를 조금이라도 유념해 본다면 책의 일반적인 유형을 구별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8. 읽고 있는 글의 장르를 판단하라. 물론 수필을 읽고 있는지 시나 소설, 희곡을 읽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1인칭으로 쓰여진 시만 하더라도 자전적인 작품인지 아니면 등장인물을 앞세우고 쓴 글인지 알아봐야 한다. 아울러 필자의 진술 태도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9. 필자가 어떤 가정 아래서 어떤 방식으로 목표에 도달하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라. 필자는 무슨 증거를 끌어대고 있는가? 인용된 내용은 믿을 만한가? 비판할 만한 점은 없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가 예상하고 있는 반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도 논박하고 있는가? 어떻게 논박하는가?
  10. 필자가 최고의 실재, 즉 참으로 진실한 존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파악하라.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신과 비슷한 것은 무엇인가? 신은 인격적인가, 비인격적인가? 무한한가, 유한한가? 신은 하나인가, 아니면 여럿인가? 신은 우주, 인간사(人間事), 사람들, 그리고 저자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11. 필자는 외부 세계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물질뿐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영혼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도 아니면 물질과 영혼의 결합이라고 생각하는가? 근본적으로 질서 정연한 것, 아니면 혼돈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무엇이며, 사건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12. 필자가 말하는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인간은 인격적인가, 아니면 비인격적인가? 사람은 기계인가, 유기체인가? 그게 무엇이든, 인간과 동물(또는 다른 동물들)을 구별짓는 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가, 아니면 사람의 모든 행동은 이미 결정되어 있거나 프로그래밍되어 있는가? 하나님과 우주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가정이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오늘날 어떤 곤경에 빠져 있는가?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한 인간에게, 사회적으로는 인류 전체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가? 인류가 처한 곤경에는 해결책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그 해결책이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13. 필자는 인간의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는가? 인간은 완전히 소멸되는가, 아니면 변형되는가? 변형된다면 무엇으로 변형되는가? 사람은 언제 태어나는가?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의 끝은 죽음인가? 아니면 다시 육체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가? 어떤 상황 아래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14. 필자에 따르면,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가치를 지지하는가?”라고 묻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도덕성은 모든 가치의 뿌리다. 개인의 도덕성만이 가치 있는가? 사회 전체의 윤리가 중요한가? 아니면 초월적인 하나님의 도덕률인가? 절대선은 존재하는가? 가치가 서로 충돌할 때, 갈등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15. 필자는 역사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역사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계획인가? 역사의 의미는 어느 한 개인이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와 같은가? 아니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여하는 의미의 총계인가? 역사는 직선적인 궤적을 따라 뻗어나가는가, 또는 순환하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겪는 사건들은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는, 또는 영원히 재발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것인가? 시간이란 정말 의미 있는 단위인가? 아니면 실제 사건들은 초(超)시간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는가?
<본문 74-79쪽에서>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Ronald Sider, IVP


‘그 리스도인의 양심선언’과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요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로날드 사이더의 1996년도 책이다. 이 책은 로날드 사이더의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이 드러나게 마련이며, 사회 참여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핵심이 아닐까 싶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1장 이었다. 현대 기독교의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할 뿐,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고, 우리를 귀히 여기셨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상태가 오죽했으면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것은 반쪽만의 기독교일 뿐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한상] 시작하며


2007/1


2003년 9월 어느 날 저녁을 잊을 수가 없다. 뉴욕의 어느 집에서 6명의 형제들과 둘러 앉아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 세계관’, ‘성경적 물질관’, ‘교회론’ 등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런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한가지는 ‘내가 참으로 아는 것이 없구나’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미 성경공부 리더로 섬긴지 10년이 훌쩍 넘어선 시점이었고, 그것도 성경을 귀납법적으로 연구하고 연구 문제를 직접 만들며 지내온 10여년 이었다. 더구나, 나름대로는 책도 ‘꽤’ 읽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그 만남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 만남 후 1년간, 10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정말 닥치는 대로 읽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그 100여권이 책 중에 꼭 읽었어야 했던 책은 사실 몇 권 없었던 터였다. 그렇게 독서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된 나는, 그 후 일주일에 한 권 정도의 정당량의 책을 소화하고 있다. ‘읽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하고 생각하는 책의 선택도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이젠 책을 선택하는 일에 대해 조금의 요령이 생겼다고나 할까.


나 는 한국의 한 대형교회 대학부 출신이다. 그 곳에서 귀한 선후배를 만났고, 아내를 만났다. 나를 키워준 리더들 중 한 명은 본 회퍼의 책을 가장 좋아했고, 또 다른 한 명은 대천덕 신부의 책을 선호했다. 두 분은 좋아했던 저자들만큼이나 색깔이 분명하게 달랐지만, 지금까지도 귀한 동역자로 서로를 섬기고 계시다. 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나는, 일요일 성경공부를 마치고는 선배들을 좇아 서점에 가서 책을 소개 받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시기를 지나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독교 출판이 그렇게까지 활발하게 진행된 것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큰 행운을 누리며 지내왔는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였고, 예배학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기 시작한 때였다. 당시의 기독서적의 교과서로 여겨지던 리차드 포스터, 송인규의 책들을 소개 받았고, 기도에 관한 고전인 오 할레스비의 ‘기도’와, 여전히 성경공부 가이드로써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고든 디 피의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가’를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읽었다. 그렇게 큰 흐름을 좇아 지내오던 시기가 지나고, 미국으로 유학을 나오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한국과는 달리 다양한 책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서점이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책을 소개 시켜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 환경이 놓이게 된 것이다. 인터넷의 베스트셀러를 기웃하며 책을 구입하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계속해서 비어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런 문제는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여겨진다. 책을 읽기를 원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모르는 후배들을 쉽게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나 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현재 작은 회사를 다니는 지극히 평범한 크리스천이며, 개구쟁이 두 아들의 아빠이기도 하다. 기독교 책 읽기에 관한 내공도 정말 보잘 것 없다. 이런 평범한 사람의 책 읽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깊이 있는 서평이 되지도 못할 것이고, 감동적인 독후감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지난 달에 읽었던 책들을 선택하게 된 동기와, 책을 읽은 느낌들을 솔직하게 나누고자 한다. 투박한 나눔 가운데서도, 서로 주고 받는 도전과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글을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