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11, 2009 | 삶과 신앙/이영길의 기독유학생의 삶
오래전
이야기이다. 어느날 사랑하는 어떤 형제가 나의 사무실에 들렸다. 너무 반가웠다. 반가움과 동시에 또 놀라버렸다. 형제의 머리털이
보이지 않아서 였다. 머리털 다 어디에 두고 왔냐고 물었다. 형제는 머리털 없는 머리를 극적거리며 “지난밤 삭발배
버렸어요!”하고 대답했다. 삭발을 해야할 어떤 큰 결심이 있냐고 물었다.
형제가
삭발은 한것은 영어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어가 자기때문에 고생하고, 자기도 영어때문에 고생한다는 이야기다. 맞는 말이다.
미국온지 6개월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유창하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특히 대학원 수업은 토론위주인데 강의 들어갔다가 기침한번 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듣고 나와야 하는 아픔은 너무 크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 미국유학 첫학기 수업에서 강의실이 다음부터는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교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같은 방에서
한시간정도 기다리다가 화가 나서 교수에게 달려간적이 있었다. 휴강을 하려면 칠판이나 강의실 문에 휴강사인을 붙이기라도 할것이지
남의 귀한 시간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 (나는 그렇게 말한다고 머리속으로 생각했지만, 실제 나온 말은 어떻게 나왔는지 모른다)
뭐 그렇게 안하무인격으로 화가나서 항의한적도 있었다. 교수가 웃으면서 결석을 하려면 미리 교수에게 통지하는것이 예의 인데 왜
무단결석을 하느냐라고 되물었다. 물론 나의 논리로 나의 질문에 대답했지만, 친절하게 앞으로의 강의가 다른 빌딩 103호에서
있을것이라고 하며 쪽지에 적어주며 나를 돌려 보냈다.
다시 삭발한
형제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형제는 영어를 잘할때 까지 삭발은 물론 앞으로 시리얼 (cereal)만 먹고 지낼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리얼 (cereal)만 먹다가 유학와서 객사할것 같아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얼른 자리에 앉아서 나와 이야기하며
진정하자고 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밥하고 김치먹고 힘을 내라고 권유했다. 왜냐면 영어가 잘되려면 몇년이 걸려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유학생들, 특히 대학원생들은 강의실 아니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외에는 외로우니 한국학생들끼리 모여서 식사도 하고
테니스도 치면 놀기도 한다. 금요일 저녁에는 한인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를 가고, 일요일은 한인교회에서 우리말로 예배를 드린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영어를 사용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강의실 벙어리에다가, 도서관에서 책빌릴때 2-3분 사서와
대화하는것, 식당에서 무엇을 주문할때 몇마디 하는것을 제외하면 영어를 향상시킬 기회가 전혀 없다.
삭발한
형제뿐 아니라 이렇게 영어로 고생하는 유학생들에게 내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양로원이나 장애인들이 있는곳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라고 권유한다. 자신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곳에 가서 잘 하던지 못하던지 떠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져야 한다.
양로원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죽을 입에 넣어 드리면서 한국이야기도 하고, 전공이야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외로운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무도 감사히 서툰영어를 들어 준다. 짜증내지도 않는다. 워낙 외로운 분들이 많다보니 자신과 있어주는것 만도
감사해 한다.
양로원에
있는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다. 유학생때 만난 어떤 할아버지는 교육학과에서 연구방법론과 통계를 가르친
은퇴교수였다. 책도 몇권 썻다고 한다. 통계로 고생하던 나는 할아버지께 기본 개념을 배워 아주 잘 사용한적이 있다.
나는 미국에
온지 2년 반만에 전공필수과목을 가르친적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열심히 강의도 준비했지만 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들의 눈동자를 보았을때 도무지 잘 알아들은것 같지 않고 불쌍해서
강의를 들어주는것 같은 생각만 지배했었다. 그러나 다음학기에 또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을 받고는 매우 기뻐한적이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찾지 못한탓이 더 컷을 게다. 지금생각해 보면 그나마 헤메면서 영어로 강의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자원봉사경력이 큰
도움을 주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나는 일주일에 10시간정도 장애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어떤날은 그들과 2박 3일 캠핑을 떠나기도
했다. 물론 장애인들의 레크리에이션을 담당하는 기관에서 가는 것이기에 교통편의, 음식, 침낭 등 모든것을 그곳에서 준비시켜
주었다. 나는 자원봉사를 통해 미국의 문화도 배웠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그때 사귄 미국친구 (장애담당 디렉터)의 소개로 그
아이의 부모집에서 약 2년을 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줄때 기쁨과 보람을 찾는다. 영어도 배우고 기쁨과 보람을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삭발보다는 더 기가 막힌 영어
공부 방법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장애인들의 발과 손을 씻으며 사랑을 나누는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이다. 사회에서 그 가족 조차도 찾지 않은 소외된 많은 이들이 있다. 집이 없는 Homeless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자원봉사도 있고, 집없는 사람 집을 지어주는 Habitat of Humanity (http://www.habitat.org/)도 아주 좋은 기관이다.
엉어는 말을
배우기위함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기 위함이다. 언어는 사랑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질때 바른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다. 칼빈대학의 동료인 바바라 카빌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Foreign
language education prepares students for two related callings: to be a
blessing as strangers in a foreign land, and to be hospitable to
strangers in their own homeland.”
Aug 11, 2009 | 삶과 신앙/이영길의 기독유학생의 삶
예로 부터
지금까지 시간이라는 주제는 많은이들로 부터 뜨거운 관심을 가져 왔다. 시간과 관련된 주제로 출판된 수없이 많은 책들과 논문들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은 산업혁명이후부터 계속적으로 효율성, 생산성 및 속도에 대한 개념과 그
틀을 같이 하고 있어서 많은 이들로 부터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생산해내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더 많이,
더 빨리 할 수 있다고 하는것은 한 인간에게는 남다른 능력이고 성공을 가늠해주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한다. 누구누구는 박사학위를
3년 만에 했다더라. 그런데 누구 누구는 9년이 지나도 마치지 못하고 있다. 분명 3년내에 마친 박사는 능력이 있는자이며 성공한
자로 얼른 구별 될 수 있다. 반면 9년동안 학위가 마쳐지지 않은 학생은 무능한자로 보여질 수 있다. 사실 게을음으나 자포자기로
미루어지는 공부가 있기도 하다. 주변을 바라 보았을때 늦게 마친자가 빨리 마친자보다 더 탄탄한 지식체계를 쌓아가고 또 자신의
학문분야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경우를 자주 보았다.
개인을 떠나
집단의 차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교회는 개척한지 2년 밖에 안되었는데 교인수가 벌써 1만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어느 어느
교회는 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교인수가 약 500여명 밖에 안된다. 2년에 1만명 가진 교회는 분명 성공한 교회이고 많은
교회가 닮아 가고 싶어하는 모델이 될 수 있을것이다. 반면 10년간 500명의 교인을 갖춘 교회는 얼핏 다른 교회가 닮고 싶지
않은 모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교회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칭찬 받고 책망 받는 교회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계시록에서 칭찬 받은 교회는 그 크기와 빠른 성장 때문에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뭏든
시간에대한 관점은 어떤 잣대 (Yard Stick)을 가지고 인생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을 많이 살면 70-80년 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속도와 생산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살아서 숨쉬는 제한된 시간내에 더 많은것 보아야 하고,
해야하고, 경험해야 하고, 소유해야 하며, 또 맛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자기몰입적인 달음질을
하는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허무를 위한 달음질”이 될 수 있다. “조금 더”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더 이루었지만, 나 보다
조금 더 이룬 삶 앞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충분히 이해가 되어 질 수 있는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생의 주기가 영원이라는 차원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시간의 속도와 생산량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니다. 중생한 (born-again)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의 방향성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나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느냐가, 방향과 관계없이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 보다 더 중요 하다. 그리고
불필요한것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빨리 (How much and how fast) 생산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무엇” (What)을 “어떻게” (How) 생산하는냐를
더 중요시 여긴다. 이들은 자신을 위한 확장보다, 천국의 확장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천국확장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한다. 이들은 또한 자신을 평가해줄 절대평가자가 누군지를 확실히 안다. 현세에서 사람들로 부터 받은
찬사 대신, 그리스도의 재림시 주님앞에 섰을때 주님의 평가에 더 관심있다.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Formular를 제안해 본다:
1. 삶 = 생산량 (업적) ÷ 속도 (속도가 빠를 수록 삶의 숫자가 많고 그것이 삶을 결정한다)
2. 삶 = 방향 x 믿음 (삶의 올바른 방향과 믿음의 충돌이 삶을 결정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공식은 무엇인가? 살아가면서 중요시 여기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후회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이두가지 공식을 놓고 생각해볼
일이다. 첫번째 공식으로 살때 나의 삶과, 가정, 이웃은 어떤 모습일까? 더 많이, 그리고 빨리 돈 벌어 더 많이 빨리 쓰고,
더 빨리 인생을 마칠것인가? 더 빨리 인생을 마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같은 삶이 사회에 기여하는것은 무엇일까? 더 많은 그리고
빠른 생산을 통해 더 빠른 그리고 많은 소비를 조장하지 않는가?
가야할길이 분명하고 그 길을 믿음으로 걷는자에게는 샬롬의 삶이 있다.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을 망하리로다” (시편 1편)
Jan 21, 2009 | 기독교적 세계관/신선묵의 Christian Leadership
기록의 힘은 참 크다. 한번은 학생 한 분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였다. 3년전 쯤에 단기 선교를 함께 갔다가 왔는데 그 날짜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혹시 아는가 하고 물었다. 내일 학교에 가서 서류를 살펴서 알려 주겠다고 하였더니 내일 아침 이른 시간에 관공서에 그 기록을 가지고 가야한다고 급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던 중에 갑자기 나의 소식통이 생각이 났다. 한 달에 한 두번씩 지도력에 관한 글을 적고 나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과 기도 제목을 적어서 사람들에게 이 메일로 보낸 것이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3년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그때 갔던 단기 선교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었다. 이런 기능으로 사용할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였는데 기록해 둔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였다.
클린톤 교수는 성경 속에서 느혜미아를 관찰하면서 느혜미아서가 “하가랴의 아들 느혜미아의 말이라”라고 시작되는 데에서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일반적으로 다른 성경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예언자에게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라는 식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느혜미아는 선지자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적어놓고 있는데 그것들이 성경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클린톤 교수는 저널링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삶에 발생하는 일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또 하나님의 관점 속에서 모든 일들을 기록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클린톤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저널링의 중요성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저널링을 날짜를 기록해두면 하나의 벤치 마크가 될 수가 있다. 삶에서의 중요한 성장 혹은 쇠퇴 등을 볼 수 있다. 둘째는 기록을 해두면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것들을 기억할 수가 있다. 저널을 가끔 되돌아 보는 것도 중요한데 하나님을 새로이 찬양할 수 있게도 하고 그가 이전에 하신 것들을 되돌아서 기억할 수도 있게 해 준다. 세째는 저널링을 하다 보면 우리의 생각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우리가 배운 것들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네째는 저널링은 우리로 하여금 갱신하고 회복하게 도움을 준다. 우리 신앙 생활이 점점 더 나태해질 수 있는데 그럴 때에 저널링이 우리를 일 깨운다. 우리가 자라나는 젊은 지도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수가 있다. 다양한 종류의 저널링은 다른 이들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우연한 기회부터 저널링을 시작하여 지난 5-6년에 걸쳐서 저널링을 하고 있다. 나는 저널링의 여러가지 형태 중에서 주로 개인적인 묵상과 기도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적는 편이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운동, 아내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그 외의 식구들과의 관계, 강의, 멘터링, 행정, 배움, 글쓰기, 그리고 사람들에게 지도력에 관하여 글을 보내는 소식통 등의 저널을 하고 있다. 이런 저널링을 통하여 내가 배운 또 하나의 진리는 저널링을 하면서 관찰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수영을 배우면서 저널링을 하고 있는데 매일 몇 가지씩 깨달은 점을 적는다. 그런데 저널링을 하면서 그 날의 배운 것을 되돌아보고 복습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배울 때에도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개념화 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냥 놓쳐버릴 수 있는 것들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소식통을 적으면서 지도력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 주제에 대하여 끊임없이 글을 쓰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모아진 글들이 지도력에 관한 나의 글의 많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글도 그런 관찰들이 모아져서 된 글이다.
내가 하는 저널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저널링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쌓아 나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을 드린다는 것과 저널링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하나님께 드린 구별된 시간 만큼 쌓인다면 동시에 기록해 둔만큼 쌓이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글로 적으면서 생각이 많이 정리되는 스타일이다. 기도하다가도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할 수 없을 때에도 글로 나의 마음을 쏟아내다 보면은 어느샌가 하나님의 임재가 분명하게 느껴지고 또 하나님의 뜻이 하나씩 실타래 플리듯 구별되는 경험을 하고는 한다. 또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도 나의 확신이 흔들릴 때가 많이 있는데 물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분별하였으면 얼른 바꾸어야겠지만 그렇지 않고 나의 내면의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확신을 흔들릴 때에는 이전에 기록한 기도를 보면서 재확신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마 나에게 있어서 영적 훈련 중에서 가장 중요한 틀 중에 하나는 저널링이 아닌가 싶다. 저널링을 통하여 나는 더욱 나 자신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지난 학기에 학생들에게 교수법을 가르키면서 이론적으로 공부한 뒤에 학습 토론을 위하여 “Freedom Writor” 라는 영화를 함께 보았다. 한 백인 젊은 교사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Inner city 에 있는 학교에 부임하여 아이들을 교육하는 이야기이다. 폭력과 인종간의 갈등으로 물들고 교육가들조차 포기해 보린 아이들 속에서 학생 자신들의 이야기를 찾게해주고 서로의 이야기를 말하게 하고 듣게 해줌으로써 소망이 없던 아이들에게 그들의 버려진 삶을 회복하고 서로간에 참을성을 배우고 세상을 변화해 가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 속에서 교사 Erin Gruwell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게 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저널을 쓰게 한다. 교사가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아무런 부담없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 나아가면서 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영성 생활 속에서도 때로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기 쉬운 때가 많다. 그러나 저널링을 통하여 나 자신의 참 소리, 갈등, 내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친밀감이 깊어지는 경험을 한다. http://lead2serve.tistory.com/
Jan 19, 2009 | 삶과 신앙/최주희의 사랑이야기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어떤 직업 혹은 어떤 위치의 사람이건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년 전만 해도 어려운 사람 두 부류가 있었다. 한 부류는 택시 기사 분들이고 다른 부류는 의사선생님이었다.
택시 기사 분들이 어려운 이유는 교통법규와 상관없이 속력을 내거나 빨간 불에도 마구 지나가는 담대함 때문이었다. 놀란 가슴으로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백미러로 보이는 기사님의 무섭고 짜증나는 눈빛이 나의 입을 막고 숨을 죽이게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이 계시다. 의사선생님들도 어려웠다. 흰 가운을 입은 최고의 전문가를 코앞에서 일대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주눅
들었다. 또한 과묵한 얼굴과 많은 사람들을 대하느라 지쳐있는 표정을 보는 것은 마치 질병을 가진 내가 죄인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어도, 그것이 무식한 질문이 되어 의사선생님의 피곤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닌지
머뭇거리며 눈치 봐야 했다. 물론 의사선생님들 역시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작은 병원이라도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영마인드와 서비스 정신이 필수이고, 행여 병원에 대한 입소문이 부정적으로 나기라도 한다면 하루아침에 환자가 급격히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택시 기사 분들도 의사선생님들도 어렵지는 않다. 오히려 의사선생님에 대해 깊은 감사와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거기에 영향을 미친 병원이 바로 성 내과이다. 성 내과는 내가 살고 있는 대전 유성구에 위치하고 있다. 성 내과에서 진료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두 시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대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매우 지루하다. 하지만 진료를
받고 나올 때는 기다림의 불편함은 간곳없고 만족과 감사의 표정이 사람들 얼굴에 역력하다. 바쁜 일상에서 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이 병원으로 굳이 사람들이 오는 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자그마한 체구에 겸손과 따뜻함이 배어 있는 여의사 성원장님에 대한 표현을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늘 환자를 환한 웃음으로
맞는다.’ ‘진료하시는 동안 환자들은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음을 느끼며 감격한다.’ ‘한 사람을
진료하는 시간이 길다. 그리고 절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진료하신다.’ ‘궁금한 것 마음 편히 물어봐도 되고, 의사선생님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상하게 설명하신다.’ ‘질병에 대한 다방면의 질문과 접근으로 큰 병을 미리 예방케 하는 명의(名醫)
이시다.’ ‘환자로 하여금 염려보다는 소망을 가지게 한다.’…
성
원장님은 특별히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들이며 따뜻하게 대하신다. 연세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
근처 과기대(KAIST)에 다니는 외국인 학생 가족, 외국인 근로자, 선교사, 그리고 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의지할
바위이기도 하다. 그들을 진료하시는 동안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 때문에 대기실에 앉은 사람들 마음에 조바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느껴지는 훈훈함은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기에 충분하다.
얼마 전에 들었던 일화이다. 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김 집사는 직장 일로 인해 아내와 어린 자녀보다 조금 일찍 한국에
귀국하였다. 아내는 집과 여러 짐 정리를 하고 귀국하려 하였는데, 그 사이 갑자기 어린 자녀가 많이 아팠다고 한다. 한국에
있던 김 집사는 놀란 가슴으로 성 내과에 가서 상담을 하였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그 증상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며 처방한
약을 먹이면 괜찮을 것이라 안심시켜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며 혹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시간에 상관없이 전화 걸라고 하셨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 마음 헤아려 주시고
함께 염려해 주시는 의사선생님께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했다며 김 집사가 자랑하였다. 성원장님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사랑과 섬김을
다 하신다. 희귀병을 앓는 어린 아이 위해 좋은 약을 찾아 먼 나라 마다 않고 친히 방문하시기도 한다. 그래서 성 내과를
찾는 사람들은 그분을 ‘유성의 슈바이처’라 부른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것은 평범한 하루 가운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일상생활이다. 이것이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가장 쉬운 ‘하나님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Jan 16, 2009 | 코스타 사역/eKOSTA 갤러리

아침에 뜨는 해를 위해
하늘은 또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다.
[PiafotoStory by Eunah Oh with Canon 400D, 17-55mm IS f2.8]
*사진을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