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희] 스스로 만든 상처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있게 하신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상처이다.  상처는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랑 거부의 행위’를 타당화 시키며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내가 생각하는 그 상처가 상처라고 표현하기에 타당한 상처이냐 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에 대해 본인이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으면 다 상처인 것이지, 그것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타인이 상처를 주었다기보다는 스스로 상처를 만든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상처가 아니다.

  상처를 스스로 만든 상처와 상처라고 불리기에 타당한 상처로 나눈다면 후자는 십계명에 근거한다.  이것은 어느 누가 보아도 큰
아픔이며 억울함이고 위로받아야 할 상처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의사의 실수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되었거나, 음주
운전자로부터 사고를 당하여 다리를 잃은 사람, 혹은 잘못한 일도 없이 폭행을 당한 사람, 남편의 외도 혹은 아내의 외도, 아껴
모은 돈을 사기 당하거나 보증을 잘못 선 대가로 집을 날리는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고통을 겪는 사람… 

  이뿐 아니다.  방어능력이 없는 어렸을 때 경험한 부모로 부터의 방임이나 학대도 큰 상처이다.  부모의 무관심으로 반드시 필요한
돌봄이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평생 한이 맺힌 사람도 있다.  아버지로부터 주먹이나 흉기 등으로 구타를 당하고 어머니로부터
언어폭력이나 정서적 위협을 받는 것도 큰 상처이다.  어렸을 때의 이런 경험은 어른이 된 후에도 그 후유증이 나타나고 많은 일의
걸림돌로 작용하여 삶에 통증을 안겨다 준다.

  위에 기술한 고통과 아픔은 모두 상처라고 불리기에 타당한 상처들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토로할 수 있으며,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 상처를 만지시고 위로해 주실 뿐 아니라 치유해 주신다.  그리고 그 아픈
과거를 재료로 하여 너무나 복된 상황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  마치 상처가 없었으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생길 수
있었겠는가 의심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주신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능력이다.

  그러나 스스로 만든 상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몰입하여 마치 자신이 희생자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의 좁은 마음 때문에 생기는 상처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마음의 용량이 부족하여, 별 것 아닌 말 한마디나 작은
실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정죄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이다.  사람이란 완전한 존재가 아니어서 실수를 자주하고 미숙한 면이
많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연약함을 서로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야 한다.  마음이 좁아 이런 너그러움이 없는 사람들은 작은
잘못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스스로 상처받았다며 상대방을 탓하는 습관이 있다.  반면 자신이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회피하면서도, 그것을 요구받을 때에는 상대방을 까다롭다거나 혹은 지나치다 비난하며 자기에게 상처 주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생기는 상처이다.  때론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행동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확대해석 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때는
상대방의 의미 없는 행동이나 작은 실수조차 자기를 겨냥한 것으로 오해하여 스스로 상처를 만든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위협을 느끼거나 두려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열등감이 있는 경우는 의외로 질투심이 많은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여러 면으로 비교하여 샘을 내며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스스로 상처받는다.

  마지막으로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대방이 자신이 기대하는 만큼 따라오지 못하면 그들에게 분노하고 정죄하며 싫어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로 인해 자기가 손해 보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이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단정한다.  상대방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거나 비현실적인 기대를 해 놓고 그 기준에 못 미치면 스스로 상처받는 경우이다.

  솔직히 위의 세 가지 상황 모두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상처라고 표현할 만한 것은 못된다.  이때는 차라리 ‘내가
속이 상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상처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남용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리하여 점점 더 자기중심적인 생각만 키워가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회피 하고 있다.

  기독교가 사회적인 책임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유익만 구하는 이기적인 단체라 비난받고 있는 이 시점, 내가 생각하는 나의
상처가 혹 스스로 만든 상처는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건강한 자아로 욕심을 버리며 사랑의 용량을 키워 나갈
때이다.

2009년 코스타 주제 –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Shalom of Jesus, Courage against the World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길을 걷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아무리 그 길이 가치 있고 소중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 길을 가는 일은 우리를 쉽게 절망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 밝은 결과가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더욱이 그 밝은 미래를 현재의 삶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면, 지금 가는 그 길이 아무리 어둡고 험해도 우리는 그 두려움과 싸울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 사는 일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기는커녕 바로 그 로마의 손에 잡혀 매 맞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일,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가서 친구가 되는 일,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일, 한 사람의 가치를 효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일, 원수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보다 그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일 등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모델이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가 선뜻 들어서기에 두렵고 좁은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두렵고 좁은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셨고, 우리에게도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가신 그 길에 담대하게 들어서라고 초청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 끝에 밝은 미래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 어둡고 험한 길을 가며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길이 승리의 길이라는 것,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명백한 증거는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바로 그 육체를 입고 다시 이 땅에서 부활하셨다. 생명이 사망을 이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만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 땅 위에 사셨다. 동시에, 예수를 왕으로 모신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을 입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할 모든 육체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그 길의 끝에 있는 밝은 결과, 그때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Shalom)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시던, 하나님, 인간, 모든 만물 간에 창조질서가 완성된 모습이다. 평화(Shalom)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미래에 있지만,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진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그 완성된 하나님의 평화(Shalom)를 경험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속에서 어그러진 질서와 그릇된 세계관에 대항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절대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혹시 있을 수 있는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이 끝이 아님을 알기에, 또 우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의도하셨던 완성된 평화’(Shalom)에 거할 것을 믿기에,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는 삶을 사는 가운데, 완성된 평화(Shalom)를 경험해 갈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그를 통한 ‘ 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KOSTA-2009 운동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를 알기 원한다. 세상이 비웃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이 땅을 사신, 또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한다. 결국에는 이 땅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평화(Shalom)를 이루실 것이며,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그 완성된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를 경험하기 원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용기를 다시 추스르고자 한다.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 큰 불안으로,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잃어버릴 것에 대한 또 다른 불안감으로 사람들을 노예 삼는 어그러진 풍조를 향해 진정하고도 유일한 대안을 우리가 삶으로 보여주기 원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꿈을 잃어버린 세대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Shalom)안에서 우리는 다시 꿈과 이상과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을 선포하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