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2009 집회를 기대하며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동민이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저 군대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군대 이야기를 처음 해 주었던 동네 아저씨에게서 들은 군대는 사람이 지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낄만한 고된 훈련, 아주 열악한 생활환경, 끊임없는 구타 등이 군 생활의 일상이었다. 그 허풍쟁이 아저씨가 해준 무용담은, 높은 절벽에서 병사들을 무작위로 떨어뜨려 살아남은 사람만 제대하게 했다든가, 정기적으로 산에 가서 곰이나 호랑이와 같은 야생짐승을 맨손으로 잡은 사람들이 진급하게 된다든가, 맨손으로 독사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날로 먹도록 훈련을 받는 다든가 하는 살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아저씨는 큰 악의 없이 8살짜리 꼬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꽤 나이가 들어서까지 군 복무에 대한 비합리적인 두려움은 동민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라는 현재 상황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당장 매우 급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두려움이 그저 8살짜리 꼬마의, 군 복무에 대하여 잘못된 두려움과 같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8살 꼬마의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은 없을까. 그 아이가 가진 두려움이 ‘실체’ 혹은 ‘진실’을 잘못 파악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을까.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영적 실체’에 대한 바른 지식이 그들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할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만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지한 질문들을 우리 자신에게 묻게 된다.


“우리에게 과연 안정(security)을 가져다주는 궁극적 실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질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얼마나 다를까? 


KOSTA-2009의 주제문의 일부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그를 통한 ‘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과 두려움이, 허풍에 속은 8살짜리 꼬마가 가지는 수준의, 가벼운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이 갖지 못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없는 소망이 외부로부터 (extra nos) 주어져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늘과 땅이 만났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Shalom)를 주셨고, 그 평화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2,000여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가 바로 그 평화와 용기로 세상에 대하여 승리를 선포하지 않았던가. 


이런 맥락에서, 이번 KOSTA/USA-2009 집회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소망한다. 


첫째, 참된 평화(Shalom)을 만들어낼 근거가 우리 안에 없음을 가슴 시리도록 깨닫게 되기 원한다. 우리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어떤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이 우리가 노력해서 세상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없음을 발견하기 원한다. 우리 안에 소망의 근거가 없다는 간절한 목마름 속에서, 그 평화의 근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오게 되기 원한다. 


둘째, 예수의 평화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이 세상이 잃어버렸던, 그러나 예수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 우리가 그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 원한다. 마치 참된 보석 앞에서 모조품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참된 예수의 평화를 보게 될 때, 우리가 의지하고자 했던 거짓 평안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 평화의 감격에 흠뻑 적시길 원한다. 세상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평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평화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함께 모여 우리 모든 힘을 다해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그 큰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감사하길 원한다. 우리가 흘리는 감사의 눈물과 함께, 우리가 기대고자 했던 거짓된 안정에 대한 환상도 함께 씻겨져 나가게 될 것이다. 


넷째, 내 삶, 내 가정, 내 결혼, 내 진로, 내 꿈, 내 소유, 내 직업 등에 매달려 자기중심적 삶을 살고 있던 천박한 모습에서 벗어나, 세상에 주신 예수의 평화라는 거대담론(Meta-Narrative)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게 되길 원한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의 이야기에 생명력이 없음을 발견하고, 이제는 예수의 평화라는 새로운 이야기전개(Storyline)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길 원한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에야 비로소 세상을 향한 참된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한 놀라운 용기를 가질 근거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음을 발견하고 그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로 헌신하게 되기 원한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수준의 삶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도 목말라하는 평화와 용기가 바로 예수 안에 있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밝히 드러내겠노라고 함께 목청 높여 선언하는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지난 24년간 KOSTA/USA를 통해서 일하셨던 주님의 신실하심에 기대어,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가 선포되고 선언될 천국 잔치를 기대해본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이유정] ‘주의 성소로 가는 길’ 작곡 배경

최근에 어노인팅 대표 박철순 간사가 안식월을 맞아서 저희 집에서 1주일 정도 머물
습니다. 덕분에 한국에 있을 때도 갖지 못한 진한 교제를 10년 만에 누렸습니다.
지난 20년간 예배사역의 현장 밑바닥부터 오직 예배 하나로 달려온 그의 삶이 오늘의
어노인팅을 있게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한국의 예배찬양 운동이 지역교회 현장보다는 패러 처치 중심인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늘 있었니다. 예배신학은 지역교회 예배의 특징을 공동체적 영성으로 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예세미나, 컨퍼런스 주제들이 예배자의 개인적인 삶이나 예배의 본질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7년간 언투유 예배사역은 공동체적 영성과 사역의 체질을 회복하는데 주력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박철순 간사와의 만남을 통해 개인, 공동체를 포괄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예배 언어에 눈을 떴습니다. 그 이후 제가 쓴 예배 곡의 가사들은 예배의 본질에 다가선 언어들로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곡이 오늘 소개하는 ‘주의 성로 가는 길’입니다.
 
최근 우연히 2005년 1월에 쓴 ‘기쁨’이라는 시를 찾았습니다. 주일 찬양 프로그램 디자인을 하면서 쓴 시였습니다.
 
“주의 성소로 가는 길, 주께 예배하는 시간, 주께 다가가는 시간, 주의 말씀 듣는 시간,
주를 묵상하는 시간, 주가 베푸신 잔치에 참여하는 시간, 그 날개 그늘아래 거하는 시간…
(중략) 이 모두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저의 기쁨입니다.”
 
지나간 시를 묵상하며 문득 지난 10여 예배사역의 현장에서 경험한 예배의 기쁨들이 하나 피어올랐습니다. 보통 곡을 쓸 때 제 영혼을 뒤흔든 말씀 또는 경험에 의해 영감이 떠오릅니다. 이번에는 시의 첫 줄인 ‘주의 성소로 가는 길’ 한 문장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기쁨이 새로운 예배언어로 물 흐르듯 흘러 나왔습니다.
 

최근 미국 경기침체가 갈수록 심화되면서, 한인들의 재정적 압박감은 어느 때보다 무거워졌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실물경제는 교우들의 삶의 현장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교회도 함께 힘겨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이 주는 무거운 짐과 개인적인 고뇌의 마음을 모두 모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곡이 이틀 만에 탄생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이나 사역 현장에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의 사귐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예배 언어들이 풍성하게 개발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유정

[최주희] 진실을 보려는 눈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고 생명주시기
까지 사랑하시는 대상임을 기억하며, 이웃을 귀하게 대하는 것은 사랑의 출발점 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필요와 기대를 채우고
만족시켜주는 것도 중요한 사랑의 표현이다. 때로는 생각과 의견이 나와 다르더라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역시
사랑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준 사람이라 할 찌라도 주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용서한다면 어쩌면 사랑의
극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담겨져 있는 ‘진실을 보려는
눈’도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을 부정적으로 혹은
자기에게 피해가 되는 방법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캠퍼스를 걸어가는데 멀리서 아는 자매가 오고 있다고 하자.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는데 그냥 지나가 버렸다. 순간 “어? 왜 나를 못 본 척 하지? 나에게 불편한 일이 있나?
나를 무시하나?”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 친구가 나를 못 보았을 수도 있고 바쁜 일이 있어 급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부정적으로 해석할 뿐이다. 또 다른 예로 자신을 동생처럼 가깝게
생각하여 반말을 하는 형제에게 무례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런 해석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습관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긍정적인
인간관계 맺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가능하면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넉넉하고 풍요로운 관계를 즐긴다.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이웃들도 편안하다. 그런데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때로 누군가가 명백하게 부정적인 행동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 내면에 있는 진실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무지해서 혹은 연약해서
저지르는 실수까지 받아주고 품어주는 큰 그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 있어서 내가 스승으로 삼고 있는 제자가 있다. 그는 내가 특수학교 교사로 있을
때 가르치던 우리 반 학생 재복이다. 어느 월요일 아침 조회를 하기 위해 교실에 들어서는데,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책상을 치고
웃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재복이를 향하여 “네가 어떻게 보였기에 거지인줄 알고 그러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궁금하여 나도
함께 웃자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내용인즉 전날 주일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재복이가 교회 정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재복이에게 “저런 쯧쯧… 얼마나 힘드냐?”하시면서 천 원짜리 지폐를 주시더란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도 당황하여 어떻게 재복이 마음을 위로해야 할 지 몰라 “세상에… 재복아! 너무 기분 나쁘고 속상했겠다. 그 아주머니
참 이상한 사람이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재복이의 대답은 나의 수준을 넘어선 놀라운 것이었다. “선생님, 그분이 몰라서
그랬을 거예요. 아마 제가 몸이 불편하다고 돈도 없는 줄 알았나 봐요.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분들의 마음은 따뜻해요. 몰라서
그렇지 남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그렇게 하셨을 거예요.” 장애를 가진 중학교 1학년 재복이의 이 말은
두고두고 내 평생 교훈이 되었다. 만약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도대체 저를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장애를 가졌다고 나를 무시하는 겁니까? 저는 거지가 아니라고요! 아줌마도 평생 장애를 입지 않으리라는 보장 못하실 걸요? 그러면
아줌마도 거지가 되나요?”라며 분노와 협박 아닌 협박으로 소리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재복이는 달랐다. 겉으로 표현되는 부정적인
행동보다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런 눈을 가지고 가족과 공동체와 이웃을 대한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평화롭고 여유 있을 것인가!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Every day we are given stones.
But what do we build? Is it a wall or is it a bridge?” 우리는 매일 돌 맞는다.
억울한 돌, 부당한 돌, 거부의 돌… 그런데 이 돌들로 무엇을 만들까? ‘인간은 이기적이고 악하고 무서운 존재야! 좋은
관계란 있을 수 없어! 사랑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상에 불과 해! 결국 인간은 혼자야!’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 돌들로 아성을
쌓을까? 아니면 그 돌들로 사람들을 이해하는 다리를 만들고 그들에게 다가갈까?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나이가 들고 인생을 겪어가면서 어떤 때는 나 자신이 바다 같이 넓은 마음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너무나 속이 좁은 사람처럼 여겨져 스스로 실망스러울 때도 많다. 그때마다 재복이를 기억한다. 그리고 나도
재복이처럼 사람들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과 숨겨진 진실을 볼 줄 아는 눈을 달라고 주님 앞에 엎드려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