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길] 날마다 더 작아 지고 싶다

어릴땐 더 크고 싶었다. 나보다 좀 더 크다고 뽐내는 이들의 머리를 주어 박고 싶어 서였다. 좀더 커지니, 그것 보다 더 크고 싶었던 것이 나보다 더 큰 이들이 있어서 였다. 

1984년 겨울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어릴때 처럼 몸이 더 크고 싶어 서가 아니 였다. 사회적으로 크고 싶었고,
영향력의 힘을 키우고 싶어서 였다. 그래서 학교 선정할때도 내게 능력의 키를 더해 줄, 영향력의 힘을 더해 줄 그런 학교를
찾았다. 지도 교수도 그렇게 힘있고 능력의 키가 큰 자를 선택하려고 했다. 
대학 교수가 되어 서도 마찬가지 였다. 처음에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로 가게
되었다. 별로 알려 지지 않은곳이였다. 하바드 대학이나 MIT, UCLA, 예일 등 좋은 브랜드 네임의 학교가 아니여서 어느
학교 교수냐고 누가 물으면 플로리다의 조그만 주립대학이라고 말을 했다. 어느 후배가 내가 근무하던 학교 이름을 물어서 알려 주자
“선배님, 그것은 서울에 있는 국제대학* 같은 학교 아니예요?” 라는 질문에 내가 있는 대학이 모국의 서울대, 연세대, 및
고려대학 같이 유명세가 없어서 “서울에만 국제 대학이 있냐? 플로리다에도 있다!”고 대답하며 내심 시큰둥 했다 (* 나는
국제대학의 가치를 폄하하는것이 아니고, 나의 잘못된 가치관에 대한 고백을 하는것이다). Ohio University에서
교수할때도 모국의 선.후배들이 학교 이름 물을때 마다 꼭 토를 다는것이 있었다. Ohio State University”는 들어
보았지만 Ohio University는 어디에???? 더 크고, 잘 알려 지고, 더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학교에 있다는 것으로
나의 교수 직분을 그냥 그렇게 가격을 싸게 정해 버린것이다.
이후 인디애나 대학에 왔다. 내깐에는 더 이상 올라갈곳이 없다고 여기던 그런 학교였다. 그러나 그 대학 역시 모국에서
잘 알려진 대학이 아닌지라 나의 어머니 조차도 별 입맛이 없는듯 아들이 일하는 대학에 대해 더 알려 하지 않았다. 공대출신의
어느 친구는 Purdue University는 들어 보았지만 Indiana University라는 대학은 있는지 조차 몰랐다고
반응하기도 했다. 나는 남들이 붙여 주는 브랜드 네임으로 나를 저울질 하려 했다. 어디 까지가야 만족이 있을까? 얼마 만큼 더
올라 가야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있을까?
이제 칼빈 대학에 왔다. Calvin Klein이라는 브랜드는 알아도 Calvin College를 모르는 이들에게
이것은 아주 보잘것 없는 학교로 보인다. 길에서 지나가다가도 학교 건물조차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담한 학교이다. 우리어머니
표현을 잠시 빌려 표현해 보면 “학교도 작고 건물도 작아 보여서 손을 조금만 올리면 지붕을 만질 만한 조그만 학교”에 지금 와
있다.

그런데 달라 진게 있다. 전에는 더 크고, 더 잘 알려 지고, 더 영향력 있는 대학을 동경하여 “상향지향적” 사고를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 같은 가치를 화장실에 flush시켜 버린지라 남의 반응에 관심이 없어 졌다. 하나님 부르신곳에 내가
서 있으면 그곳이 황량한 사막일지라도 그곳이 내게 제일 가치 있는 곳이다. 내가 더 올라 가려고 하기 보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
보다 그리스도가 더 높아질 일이 무엇일까를 순간 순간 생각하며 바라는 일은 나를 기쁘게 한다. 나를 부르신이가 너무 크기에 그
분이 가라고 하는 그곳은 내가 어떤 이름을 붙이며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그런곳임을 안다. 그래서 그곳이 내게 가장 적합하고
귀한 곳임을 은혜로 알게 되었다.

전에는 속아서 나의 성취를 위해 목숨걸고 애썼다. 많은 노력을 통해 나를 크게 하려고 애썼고, 그럼에도 커 보이지
않아서 나보다 더 큰 대학의 이름을 나와 동일시 시킴으로 나의 성공을 표현해 보려 애쓰기도 했다. 내 분야에서도 나의 이름을 돋
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명칭들을 추구 했다. 유명 학술지의 편집장, 연구소의 디렉터… 그같은 것으로 영향역의 범위가 큼을
표현하고 또 성공이라는 잘못된 가치를 달콤하게 즐겼던 것이다. 

내가 작아 지면 작아 질 수록 그리스도의 이름이 더 커지고 위대해 지는 그 비밀을 이제는 기쁘게 여기며 살게 된다.
그리스도는 가난과 낮은 지위로 일생을 보내신 후에 거기서도 더 낮은 곳인 골고다로 가셨고, 너무나도 잔인한 곳에서 누워서
돌아가시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세워지신채 돌아 가셨다. 전에는 내 입에서 얕은 입술로 부르짖던것을 이제는 내 마음속에서 아멘하며
받아 들이는 진리가 있다. 다음의 말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 5-8).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그곳, 비단 그곳이 남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런 곳이라도,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더 커지지 않으려 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더 높아 지는 삶을 산다면 그것 역시 매일 작아 지는 삶일 것이다. 칼빈대학은 내가 몸
담고 있기에도 과분한 곳이다. 그러나 나를 믿고 이곳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오늘도 찬양한다. 그리고 그분만이 높아 지도록 오늘도
더 작아 지고 싶다. 나의 섬김의 목적은 내가 작아 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높아지게 하는데 있다. 그리고 섬김의 능력은 내가
아니라 내가 작아 질때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를 통해 나타나는데 있음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다.

내 눈과 마음이 죄로 인해 이그러진 세상의 왜곡된 진리로 더 이상 속지 아니하고 매일 매일 더 작아 짐으로 그리스도가 삶속에서 더 커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하루 하루가 기쁘고 감사가 넘친다.

[이유정] 예배와 격리된 회중

최근에 출간된 책 한권을 소개한다. CCM 아티스트인 마이클 카드의 ‘애가’(A Sacred Sorrow)이다. 번역은 ‘많은물소리’ 편집자인 황병구씨이다. 다음은 그 책의 일부이다. 

“주일 아침 나는 회중 가운데 서 있다. 방금 시작된 예배는 곧 ‘무르익는다.’ 내 곁에선 내가 알고 또 신뢰하는 사람들이 경배의 경험 속으로 ‘들어간다.’ 몇몇은 손을 든다. 모든 회중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니기에 모두가 그러지는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눈을 감는다. 나를 둘러싼 이 사람들은 모두 내 친구이자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이다. 이들은 내가 도달해 보지 못했고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깊은 곳까지 달 수 있는 이들이다. 20분쯤 지나면 경배의 시간은 마무리된다. 내가 느낀 것은 너무 오래 서 있어서 생긴 다리 통증뿐이다. 우리는 모두 앉아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들을 준비를 한다. 

지금 이런 사실을 독자들 앞에 시인하는 것이 내겐 참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주일 아침마다 역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비로소 자리에 앉을 때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아무에게도, 특히 하나님께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반갑게도 이제야 끝났군!’ 여전히 다리에 통증을 느끼며 좌석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사막에서 혼자 한참을 헤맨 느낌이다. 군중 한가운데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예민한 외로움이다. 그 사막은 역설적으로 파릇파릇하다. 다른 이들의 예배로 인해 새순이 돋아났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동일하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치밀한 교제를 함께 나누었던 이들 한가운데서 나는 혼자 격리된 느낌이다. 그들은 내 주위에서 기뻐하며 생수를 마시지만 나는 암당하고 좌절스러운 갈증 속에 남겨진다.”

이 글은 경배와 찬양에 대한 마이클 카드의 예배 경험담이다. 동감이 되기도 하지만, 게 중에는 “마이클 카드 같은 훌륭한 CCM 찬양사역자에게 어떻게 경배와 찬양 시간이 지루할 수가 있지?”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종종 백발이 성성한 어른들이 오히려 젊은이들 보다 더 신나게 찬양한다. 그런가 하면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모던 워십보다 전통 예배의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이나 조용한 찬송가를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마이클 카드는 나중에 자신의 실수를 고백했다. 

“나는 속으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꾸며내고 있다고 정죄했다. 내가 도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그런 친밀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것은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던 것이 죄라는 것은 물론이고, 내 판단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많은 이들이 깊고 진정한 예배에 들어가고 있었다.”

인간은 진실, 가치와 같은 본질의 문제에는 의외로 관대하면서 외형, 스타일과 같은 비본질의 문제에 목숨을 거는 경향이 있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의 진정성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가의 이슈가 아니다. 형식과 스타일의 문제도 아니다. 흑백 논리로 따질 수 없는 본질의 문제이다. 스타일과 형식, 음악과 문화를 뛰어넘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예배의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에 타 없어져도 끝까지 남는 것, 아무런 예배도구가 없고, 아무런 형식, 심지어는 음악이 없어도 붙잡아야 할 마지막 한 가지 본질,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장엄하고 거룩한 형식의 전통예배라 할지라도, 첨단 멀티미디어와 완벽한 음향, 미디어 시스템을 갖춘 현대예배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었다면 헛것이다. 예배 후 그날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 싶은 아무런 열망이 없다면 죽은 예배다. 기독교 최고 가치인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한지 10분도 안 되서 식당에서 먼저 좋은 자리 잡으려고 다툰다면 영적 분열 증세이다. 하나님보다 찬양팀의 화장, 옷맵시, 설교자의 억양, 머리 스타일, 성가대의 곡 스타일, 재미있는 광고만 더 머리에 남는다면 장례의식에 불과하다. 그날 회개한 죄 문제에 대해 결연한 의지로 돌아서겠다는 열망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가짜 예배이다. 예배 때 열정적으로 부른 찬양 가사와 6일간의 생활이 전혀 다르다면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는 결단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아니다.

[최주희]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하고 논하려고 한다면 아마 밤을 새워도 다 정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성도에서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관점은 다양하고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역사와 문화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찬송가 가사처럼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의 한계를 넘는 깊음과 넓음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한국기독교를 바라볼 때 한 가지 염려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한 면으로만 치우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용납과 용서, 필요를 채우시고 보호해 주심, 장래를 인도하시고 축복해 주심 등에 대해서는 많이 강조한다.
이로 인한 결과로 사람들은 큰 부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유익에만 마음을 두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고의 말씀도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임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심판 날에는 다시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과 성령을 통해 부지런히 죄 짓지 않는 거룩한 삶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에 대해 강조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한국교회 안에서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절제와 희생을 요구하는 설교는 교인들이 듣기 싫어하고 목회자들은 이런
교인들에게 부담 주는 것이 싫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라(고후7:1), 죄와 싸우기를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히12:4),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마10:26),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될 것이다(눅 12:3),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다(고후5:9-10),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고 각자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0-12), 마지막 심판
날에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의 필요를 채워준 사람들은 영생에 들어가지만 그들의 필요를 외면한 사람들은 영벌에 들어갈
것이다(마25:31-46)…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구절들이 성경 곳곳에서 마지막 심판 날에 대비하여 우리들의 거룩과
사랑의 삶을 위해 경고하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사랑에 대해서는 슬며시 눈감아 버렸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는 사람들로부터 ‘도덕성 상실과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이기적
집단’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2008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의하면 가톨릭과 불교에 대한 신뢰도
35.2%, 31.1% 인 것에 반해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18%로 나타났다. 더욱이 종교가 없다는 응답자들 중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답변은 7.6%에 그쳤는데 이는 가톨릭 37.9%, 불교 29%에 비하면 너무나 낮은 수치이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등을 돌리고 있다.

여론조사 뿐 아니라 좀 더 정직하고 적나라하게 개개 그리스도인의 삶을 깊이 있게
살펴보자. 우리의 눈은 그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우리 교회에만 머무르고 있고, 기도제목은 돈과 성공과 건강에 갇혀있다. 도덕적인
측면을 보자면 더 놀랍다. 굳이 통계수치를 내밀지 않더라도 혼전 성관계(이것은 간음이다. 간음은 혼인 관계에 있지 않은 모든
성관계를 의미한다.)를 즐기고 있는 교회 다니는 젊은이들, 외도와 폭력으로 멍들고 있는 교인 가정, 절제를 모르고 원하는 대로
충동적으로 돈을 사용하다 채무관계에 놓인 성도들을 우리 주변에서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하나님의 사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경고’이다. 이제는 이 말씀에 귀 기울이자. 그러면 우리를 향해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큰 외침’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이제 가던 길을 빨리 멈추고, 좁지만 진리의 길로 돌이키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다.

[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상담실] 진로 및 직장생활

코스타 상담실에서는 많은 코스탄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가상의 코스탄과 멘토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실린 의견은 멘토님 개인의 의견이며 코스타와 소식기관의 의견은 아닙니다.

진로 및 직장생활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너무 제 적성과 맞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그렇다고 갑작스레 그만둘 수도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기 전에 제대로된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같은데,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신앙적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진로에 대해서 상담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 그런 선택이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같습니다. 일을 시작한 이후 너무 적성에 안 맞아서 괴롭지만 그렇다고 다른 일을 찾는데는 한계가 있는 것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인으로 지혜롭게 행동하는게 뭘 의미할까요. 직장을 적성에 맞추어 찾는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적성에 맞는 직장을 찾을 여유가 없는 냉혹한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낭만적인 관념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일(노동)은 하나님이 창조세계가운데 저희에게 주신 축복이지만, 죄로 인해 왜곡된 세상속에서는 저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실제적으로 고민하고 갈등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더구나 노동이 생존에 위협을 주는 현장이 되어버릴 때 저희는 당황하고 불안하게 되며 또 세상에 편승하는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노동 그 자체가 신성하고 또 소명이라는 말을 들어왔는데 노동의 현장에는 정작 저희 영혼을 병들게 하고 가치관을 비트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거대한 힘이 또아리를 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성에 맞는다 안 맞는다하는 조금은 개인적인 고민과 갈등을 조금 더 거시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직장은 왜곡된 이 세상에서 여전히 신음하는 인생들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직장은 또한  예수님을 닮아 새로 태어난 저희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함께 탄식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그루터기 씨가 그런 탄식 가운데서 자라나는 곳이 되기를 도모하는 신실함으로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거룩한 땅입니다. 여기에는 직장에서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용기가 필요한데요, 이 용기, 세상을 살아가는 용기는 세상권세를 세상권세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거스리고 이기신 예수님의 방법과 능력, 즉 샬롬에서 온다고 봅니다. 이 예수님의 방법과 능력, 샬롬이 저희에게 이 세상을 이기는 용기를 줄 것을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평화, 세상을 이기신 용기의 가시적인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평화, 세상을 이기는 힘, 여기에 신앙인의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개인적인 적성때문에 하는 고민이 심각하실 때, 또는 직장에서 여러가지 옳지 않아 보이는 일들을 인해 어려우실때, 그 고민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한 일군으로 소망가운데 살아가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으시기를 빕니다.


직업/진로의 선택에 적성을 고려하는 것은 상식적이긴 하지만 (그래서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난 왜 적성이 맞지 않는 직장을 택해서 이고생일까 라는 고민은 어떻게 보면 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성과 무관한 직장에서 견뎌내며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인간적인 능력부족의 문제는 정말 고민이 됩니다. 우리는 전 인생을 걸쳐 능력을 극대화 하고 탁월해야만 성공이라는 인생관을 주입받아 왔거든요. 성경에 ‘크게 되어라’ ‘큰 꿈을 꾸어라’라는 명령이 없는데도 청년들을 위한 많은 조언들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청년들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쓰여진 ‘크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약속이지 명령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무슨 약속인가 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사는 삶에 대한 약속입니다.  직업/진로/배우자 선택이 저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A냐 B 냐 하는 것보다는 A 나 B 를 선택하는 나 자신의 가치관을 보시는 하나님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직업/진로 선택 (심지어 배우자 선택까지도 포함해서)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성경적 가치관이거든요. 마치 아이가 성숙한 성인이 되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게 되면 그 선택을 하도록 허락해 주시며 기뻐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읽은 책에 공감이 되는 이런 말이 있더군요 “믿음이 모든 문제를 분명하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믿음은 확실성이 아닌 신뢰의 문제이다.” 세상적인 능력의 탁월함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부산물로 보아야 능력과 그 결과만 원하는 무리함으로 인한 인생의 어려움과 갈등되는 마음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동록 박사, 2지역 멘토

[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세미나] 김수지 총장

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김수지 총장 – Christian Professional Woman

1. 김수지 교수님, 안녕하세요, 미주 코스타에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을 위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수지 교수입니다. 연세대간호대학/이화여대간호대학 교수, 학장 여러 보직을 거쳐 원래 전공인 정신과환자의 재활간호를 위해 서울사이버대학에 편입하여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것이 인연이 되어 현재 서울사이버대 총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2. 기독교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개인적인 신앙간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믿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순전한 어렸을 아이들 노랫소리가 나는데 가보니 교회더라구요. 당시 놀이할 공간이 없었는데, 그럴때 교회 노래 배우고, 성경 배우고, 교회가 신앙 아니라 삶의 제공터였습니다. 교회에서 자라다가 2 거듭났습니다. 이전에는 착하게 살면 하늘 나라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요한 복음 3 니고데모에 관한 말씀을 듣고 굉장히 도전을 받았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가르쳐주신대로 매일 하나님과 대화. “good morning” 하고 말씀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도하고 적고, 저녁에 뒤돌아 보며 대화하고 기도했는데. 좋았습니다. 남편도내가 만난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았는데, 당신은 그렇까?’  하는 궁금증으로 말씀을 보다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없이 없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방황하는 사람은 기독교가 진리다라는 것을 한번 가정하고,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이 초등학문임을, 인간은 부족하고 죄인이라는 ,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자녀로 누리는 감사와 기쁨, 어떤 일을 하라고 알려주시고, 사람을 붙여주시고, 보내주시고.. 그렇게 삶의 현장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3. 이번 코스타에서 여성 리더십에 대해서 강의를 맡으셨습니다.강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더십이라는게 조직원들로 하여금 목적을 달성하도록 이끄는 지도력 또는 통솔력, 성과를 창출하는데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여성이 영향력을 행사할 있는 위치/직위에 있어야 하며, 현재 여성들이 확실한 소명감과 뚜렷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의 가치가 점점 증가하는 21세기 지식기반사회의 급속한 변화 (유비쿼터스, 전문가시대, 새로운 교육패러다임의 확산) 가운데서 크리스천으로, 여성으로서 그리고 전문직업인(전문가)으로 주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어떻게 있는가를 소개하고 토론합니다.

4. 여성들이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기독교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 특별히 계발해야 점들이 어떤 것이 있다고 보십니까?

섬김, 사랑, 멘토링, 제자화 등을 기독교 리더십이라고 여성 특유의 감성을 살려 자신의 은사를 발휘할 있는 전문성을 계발해야 한다고 봅니다인간사이의 친화력, 선천적인 돌봄 능력을 키우면 시대에 맞는 리더십을 발휘할 있을 것입니다.

5. 코스타를 포함해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 여성이 지도적인 역할을 맡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어느 모임이든 의사결정 하는 역할에서 여성이 적은 것이 사실인 같습니다.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해결할 있을까요?

다른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문명 이전에는 모성사회에서 부성사회로, 그리고 부성사회에서 여성사회로 변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권력 이양이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여성 목사나 장로와 같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직위가 여성에게 주어지기도 하지만 극히 일부이며, 실제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교회에 리더십을 가진 분들이 사회의 변화에 대한 민감성이 부족한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여성리더십을 주셨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조화를 이뤄나갈 있도록 해주셨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지금 시간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시는지를 살펴야 하는데 여전히 전통적인 것에 얾매이고 있습니다. 물론 여성에게 유치부 교사 같은 자리는 주어지고 있지만 여성의 리더십이 최대한 발휘될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경직되고, 어려운 것도 남성중심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여성에게 주어진 은사를 계발하여 리더십을 발휘할 있는 위치에 있으면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평화롭게 해결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은 다른데 크리스천 여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여성이라는 ,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직업인의 세가지 역할을 있도록 환경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그리스도인인 남편과 함께 살더라도 남편과 동등한 자유와 시간을 누리지 않습니다. 너무 일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역할이 분담되고, 남편이 아내를 많이 도와 주고 사회 생활에서도 여성과 조화를 맞추어 있도록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노사 문제에도 너무나 남성의 강함이 문제입니다. 이는 감정의 문제인데, 이런것들은 여성이 리더십을 가지면 좋아질 있을 것입니다. 남성이나 여성,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조화되어야 합니다. 현재는 리더십이 너무나 남성 중심적인데, 권력을 이양하고 나누고, 서로 도와주고 역할을 분담하여야 합니다.

6. 코스타에 참석하는 많은 기혼부부들에게 건강한 가정을 세워나가는데 필요한 점에 대해서 조언 말씀 해주시죠.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결혼은 부족한 배우자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든 제도라는 . 결혼생활은 세상의 어떤 (부모형제, 직장, 교회, 국가…) 보다. 우선적인 관계적 삶의 근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 따라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누구도 대신할 없는 중요한 역할이고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역할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봅니다. 둘째, 우리 부부는 죽음 외에 어떠한 경우에서도 헤어질 없는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일심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셋째아내와 남편의 기둥이 서야 아이들이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 편하다. 서야 한다. 특히 한국 남자는 .. 아내는 남편이 세워진 만큼 선다. 기둥이 같이 서야지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적이라는 점입니다.

7. 지금 서울 사이버대학교 총장으로 일하고 계신데요, 어떤 비젼을 갖고 일하고 계신지, 그리고 진로를 위해 고민하는 코스탄들이 어떤 비젼을 갖고 결정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바람직할 조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1세기를 유비쿼터스, 전문가 시대입니다흩어져 있는 선교사나 선교사가 아니라도 시공간을 초월한 재교육이 필요합니다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지식을 업데이트 하지 않으면 변화하는 지식 사회를 따라갈 없습니다인터넷으로 수업할 있기에 지식을 언제나, 어디서나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있습니다. 사이버 교육은 글로벌 시대의 로운 교육방법입니다. 우리의 집회도 오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들을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수요자의 필요를 채우고, 선교자들, 크리스천 사업가, 전문인에게 지식을 공급하는 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진로로 고민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선 전공 분야에서 하나님의 부름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의 조건에 따라 맞지 않는 전공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분야를 본인이 좋아해야 하고, competent해야 하고, 하나님이 특정 직장에서 나를 부르시는가, 직장이 나의 기독교 세계관과 맞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물론 맞지 않아도 선교사적인 사명으로 있지만, 그런데 만큼 강하지 못하면 중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리고 곳에서 구체적인 미션이 무었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은 월급으로 정하는데, 월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다.

한편, 하나님은 전문직을 통해서 전도하기를 원하시는데, 전문직도 해야 합니다. 엉망으로하고 전도 없다. 학교에 그런 분이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는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전도를 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띕니다. 학교가 offilne이라 국내에 방문하는 외국에 있는 분이 오시는데, 이분을 찾고 싶다고 합니다. 너무 성실하게 도움을 주시고, 분은 틀림없이 기독교인인구나 생각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얼마나 기쁘시겠습니다. 코스탄 여러분들도 그렇게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