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하는 크리스천’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 해봄직한 질문이 있다.’내가 개발하는 기술 혹은 발견하는 자연 원리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인가?’하는 것.이 질문은 순수 과학을 연구한다 하여 비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며,주가 지으신 대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기본적인 목적과도 결부되어 있는 ‘기저 질문’ 이다.세상의 모든 것이 주께서 정하신 목적이 있듯, 우리가 자연을 탐구하는 일도 마땅한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은 일관되게 우리 주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수행하는 과학은…그 기본적 목적에 합하는가?혹시 너무 한쪽 – 부자 – 만을 위한 것은 아닌가?하나님의 관심사와 얼마나 유사한가?세상을 대신 맡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적합한 방향을 취하고 있는가?이러한 고민들을 부족하나마 함께 나누고자 한다.
GTM 900 정치학 분야 : 이인엽
국가주의와 그리스도인: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 한미 FTA 체결, ‘경제 살리기’를 내세웠던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등, 최근 몇 년간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이슈들의 뒤에는, 국익을 최 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문제가 있으나 국익이라는 현실을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다’는 이런 논리는, 극우나 극좌의 논리보다도 더 큰 파급력으로 우리의 현실을 규정해 온 것이 사실이며, 크게 볼 때,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 등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내부적으로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내부 비판세력을 억압하며, 권력의 비민주성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일방적인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며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 하고, 우리의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역사적으로 일제시대와 6.25,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일방적인 친미, 반공, 보수적 사고를 내재화 하고, 정치 권력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 혹은 그에 대한 헤게모니적 장악과 같은, 성경적 근거가 빈약한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율법서에 나타난 계약사상, 선지자들의 권력과 불의에 대한 비판, 예수님의 비폭력주의, 성령강림의 해방적 함의, 초대기독교인들과 로마제국과의 관계,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간략히 살펴보고, 성경은 물질적 축복과 세속적 성공인 ‘잘 살아 보세’가 아닌, ‘올바로, 정의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아보세’를 외치고 있으며, 화해와 평화를 추구 하고 있다는 것에 기반해,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습니다.
GTM 1000 경제학 분야 : 신자은
Capitalism in Christian Perspective: Theory and Practice
공산주의라는 역사적인 실험이 실패로 드러난 이후, 전세계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의 틀 아래에서 빠르게 진화해나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극대화 추구와 시장의 기능을 통해서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있다는 neo-classical economics의 이념은 이러한 초자본주의의 흐름에 부응하여 Academia와 실물경제 모두에서 주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편, 국가간, 사회계층간, 지역간의 빈부격차 문제, 식량문제, 그리고 environmental injustice 는 더욱 심각해져만 갑니다.
경제 영역에서, 연구자로, 경영자로, 정책결정자로써 활약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치의 conflict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우리의 선택과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우리가 경제영역의 주도적 세력으로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소명을 온전히 이루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본 세미나는, 성경적 경제관을 바탕으로 현 경제구조와 흐름을 진단해보고, 성경적 경제관을 직업과 학문에서 구체화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나의 삶 가운데서 구현가능한 형태로 발견해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GTM 1100 행정학 분야 : 최유진
성경적 정책결정 (Bible-based decision making): 인간의 결정 vs. 하나님의 생각
행정 및 정책 연구자들의 연구 범위는 그 어느 학문보다 넓은 것 같습니다. 사람(labor force)을 연구하기도 하며 때론 사람들의 집합체인 조직(organization)을 연구하기도 하고 그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물질(finance)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의사결정, 환경, 복지, 도시 등 정말 연구의 대상은 무궁무진합니다.
행정 및 정책 연구의 본질은 “공공의 가치” 혹은 “공공의 이익 추구”라고 할수 있습니다. 나 자신 만이 아닌 이웃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성경적 세계관과 닮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배제된 공공에의 관심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정책 수예자만 잘 살게 만드는 것이 정책의 본질이 되어 인간의 배를 불리우지만 영혼은 매마르게 합니다. 과연 공공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이 다른 인본주의의 막장 시대에 행정 및 정책연구자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 딜레마에 대한 본질적 해답은 어쩌면 불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민까지 멈출순 없습니다. 광역 단위의 정책결정이 미치는 삶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찾지 못해도 같이 고민하는 동역자를 찾고 싶습니다. 서로의 연구주제 속에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계신지 나누고 싶습니다.
GTM 1200: 음악분야 : 배윤영
음악부문 tm kosta 에서는, Christian음악인으로 살아가면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지 함께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보다 등수와 점수, 스타성이 인정받는 이 경쟁의 현장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가며, 복음을 나누는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음악계의 모습, 나의 모습은 무엇인지 함께 토의하고자 합니다. 비교의식, 열등감, 자만심, 완벽주의 속에 개인주의가 자리잡은 이 음악계의 현실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역류하며 살아가야 하는 Christian Musician들이 tm kosta를 통해서 혼자만 또는 각 학교만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전 미주지역에 퍼져있는 지체들을 만나게 될 것 입니다. Competition, audition 등의 제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승리는 무엇인지,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영역에서 무엇을 주님이 창출해내길 원하시는지 진지하게 토의하고자 합니다. 현재 미국전역의11 곳의 음악학교의 캠퍼스 사역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음악이라는 tool을 가지고 앞서서 선교사로 살아가시는 분들의 이야기도 나누려 합니다.
GTM 1300 지구/환경/해양 분야 : 유상준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새천년의 막이 오른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인류는 기후변화와 자원고갈, 그리고 환경오염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에너지를 포함한 자원은 그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며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종이 인류에 앞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빙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북극권에 사는 북극곰은 먹이사냥을 위해 조오련이 횡단했던 대한해협보다도 먼거리를 매일 헤엄쳐 다닌다고 한다. 토양은 필터기능을 상실했고 바다는 쓰레기국이 되어가고 있다. 유기농이란 농약 이외의 오염물질에 노출된 농수산물로 정의가 바뀌어야 할 판이다. 모두가 우리의 무절제와 탐욕에 의한 결과물들이다. 결국 지구환경문제가 가장 먼저 세계화를 달성한 분야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문제해결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토의주제를 다룰 것이다. (1) 지구환경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2) 현존하는 지구환경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3)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세계관은 무엇인가?
GTM 1400 종교/신학 분야 : 김상권
청년 크리스천의 교회론 깔끔하게 다지기
교회가 만든 청년들을 다 어디로 갔나? 전통적인 교회론에 입각한 한민족 공동체의 100년 역사는 청년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리고 다가올 미국교회, 유럽 교회의 ‘급속한 쇠퇴’라는 우려를 짐작하는 기성세대만을 남긴 채… 이제 그리스도께 헌신한 청년들이 만들 교회는 다음 세대들인 또 다른 청년들을 교회 안으로 다시 초대할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왜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는가? 다음 세대를 대변하며, 다음 세대 교회를 책임질 청년들에게 교회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현재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변종 바이러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교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주께서 피값으로 사신 그래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교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전통적인 교회론의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보고, 오늘 날의 교회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들을 나누며, 꿈에 그리는 그 교회와 다음 세대 교회관을 정립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교회에 대한 그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GTM 1500 Tent-making : 박나영
Tent-making
기독교 선교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선교방법론과 전략에 있어서 더욱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형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적 흐름아래 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기독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선교 핵심 국가로 자리잡았습니다. Tent-making은 현 시대에 효과적인 하나의 선교전략으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타문화 권에서(Cross-cultural countries/settings) 선교사적 사명과 부르심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 나누는 선교 형태입니다. Tent-making이란 무엇인가 성경적인 (Biblical) 관점과 선교적인(Missiological)관점에서 조명하고, 왜 Tent-making 사역이 현 기독교 선교에 효과적인지- 이 선교 전략의 효과적인 특징들과, 실제적인 Tent-making사역의 예 들을 살펴보고, 또한 Tent-making선교 전략에 대한 토의점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자신의 Career와 직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고자 하시는 분들, 또 타문화 지역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자신의 직업과 삶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을 환영하고 함께 이 주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GTM 1600 의료분야 : 채영광/김용정
Healthcare as a Mission
Healthcare 분야의 최전선에서 사역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넘어야 할 내적 외적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환자의 모든 요구를 제한적으로밖에 충족시킬 수 없는 사회적 제도적 한계에 좌절하는 순간들이 있는가 하면 내적으로는 매일 매일 일상에 함몰되어 환자 한명 한명에 대한 compassion을 상실하게 되는 정신적 영적 권태감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본 세미나에서는 Healthcare 분야에서 필연적인 이 내적 외적 ‘환난’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용기’를 가지고 Healthcare를 주님 주신 ‘Mission’으로서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현재 healthcare 분야에 계신 분이나 healthcare 및 의료선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모두 함께 Healthcare 사역자가 어떻게 ‘예수의 평화’를 전하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GTM 1700 생물학분야 : 김성중/김병재/이성일/이지혜/한상진
the second calling
문제의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훈련하신 것은 이방 민족들의 침노 받은 땅을 정복하고 거룩의 땅을 회복하시고자 함이었다. 우리의 학업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으로 나아가기 위한 광야 훈련이라고 할 때, 우리를 통해 되찾고자 하시는 거룩의 땅은 어디이며, 어떻게 되찾을 수 있겠는가?
초 록: 주님께 부름 받은 우리는 성도로 제자로 하나님의 가족이란 동일한 아이덴티티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각각 다른 땅과 영역이 주어졌듯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기 위해 삶으로 섬기고 감당해야 할 영역들은 다양하다. 본 TM에서는 먼저 이 시대에 생물학 영역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떤 소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그 소명이 하나님 나라에서 갖는 의미와 비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자 한다. 아울러 진화론과 같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과학계의 이슈들에 대한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의견과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나눌 내용들:
1)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소명
2) 진화론에 대한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견해
3) 성경적 관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researches
GTM 1800 경영분야 : 조성문
크리스천 기업 경영과 롤 모델
1. Discussion
* Job and Mission: What does it mean to find ‘vocation’? 하나님의 사역과 내 job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 MBA란? Business School과 Christian Life를 연결하기
* 성경적 기업 경영이란 무엇일까? 성경에서 배우는 성공적 사업 전략? 예)욥기 22:21-30,요한복음 4:13~15,고린도전서 10:31-33
2. Sharing
* 주변 사람, 또는 유명인 중 진실된 Christian인 동시에 성공한 business person 의 이야기 공유하기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는 크리스천):
o 예) John Wanamaker (세계 최초 백화점 창시자),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 강영우 박사 (3C 혁명 저자), 황성주 목사 (이롬생식 창업자), 김성오 (메가스터디 대표, ‘육일약국 갑시다’ 저자)
GTM 1900 예술분야 : 임채석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크리스천 예술인들의 가져야할 바람직한 Art Management 이야기
음악, 미술, 공연 등 수 많은 예술관련 크리스천들은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 지를… 이 세미나는 특별히 예술과 관련한 공부를 하는 젊은 청년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귀한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경영 Flow를 통해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술의 필요성과 전문성을 요구하고, 그에 맞는 경영기법을 연구,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곳. 예술 세계에서 우리가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고민해야 할 지를 각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혹은 공부하는 우리들이 그 방법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 청년들이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를 같이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습니다. 폭 넓은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민하는 부분을 놓고, 현재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경영 과정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며 살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그나라는시간개념으로는미래의것이지만, 현재의역사속으로역행해서들어왔습니다. 놀라운일이죠. 원래는구약시대에는그것이인류역사가진행되는가운데, 여호와께서전격적으로임재하셔서유태인이갖고있는 the Lord day 개념인데 (주의진노의 날의개념).
Here and now 의개념으로현재역사속에역행하여침투해서들어왔습니다. 겹치는부분의초기그리고끝 already but not yet, 곁치는첫부분에십자가가있습니다. 십자가는역사의중심입니다. B.C. 와 A.D.의중심이되는것입니다. 이세계역사, 예수믿지않는사람들도쓰는용어를봐도예수그리스도가중심에있음이보이시죠. 오직십자가의빛만이이전의세상을해석해주고, 십자가이후의날을해석해줄수있습니다.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둘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2강(수요일)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c)
오늘 주제강의 두번째 시간에서는 이번
KOSTA의 주제말씀중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을 살펴본다.
고통의시대
우리가 살아오면서 특히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악, 고통, 재난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의 연대성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이러한 아픔과 눈물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된다.
또한, 문화, 역사, 뉴스, 책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이 고통스러운 곳임을 발견한다. 물론, 이 세상에는 아직도 아름다움과 선함, 참됨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들어와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악, 반창조 혹은 반생명의 증상이 발생하여 우리가 고통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속에서 구원역사를 이루어나가야 하므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비밀스런 은총을 부어주심으로 이 창조세계를 보존하신다.
그러나, 이 세상의 악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쁜 사건, 내가 지은 나쁜 죄가 아니라, 엄청난 세력, 즉 유사인격 혹은 하위 인격처럼 거대한 사람과 같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창조세계와 인간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악은 더욱 거대하고 강력해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오늘날 악이 훨씬 강하고 많다. 활로 했던 과거의 전쟁과 단추 하나로 수십만명을 죽이는 현대의 전쟁을 비교해보라. 또한, 인간성의 황폐, 물질주의의 기승으로 사람의 가치가 그가 가진 물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는 과거에 별로 없었다.
세상, 곧죽음을이기신예수님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실 때, 세상이란 무엇이고 이겼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하자.
‘세상을 이겼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혹은 복음 전파로 이교도에 대한 승리 혹은 개종? 질병과 굶주림의 정복?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무엇을 이겼다는 것인가? 한 마디로, 죽음, 곧사망을이기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것은 단순히 그 분이 죽은 몸에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fact이기는 하지만.
죽음이란 생물학적으로는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저주가 끝까지 계속되었을 때 일어나는 사람과 피조세계의 궁극적인 운명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그것이 저주임은 어제 살펴보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우리들을 말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바로 저주
– curse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 이다. 이것은 마치 태중의 아기가 탯줄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과 같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된 상태에서 영생의 복을 항상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탯줄을 스스로 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이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죽어가고 또 죽는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저주이다. 이로부터 모든 악의 증상들
– 미움, 증오, 시기, 질투, 폭력, 파괴와 같은
– 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 그로 인한 극심한
– 죽을 것 같은
– 고통, 가난과 질병, 공해, 자원고갈, 환경오염 이 모두가 죽음의 증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인격적인 죄로 말미암은 것들, 이것을 사주, 확대 재생산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사탄이다. 그래서, 지구상의 악의 세력은, 모든 인간이 지은 죄를 합한 것보다 훨씬 크다. 사탄이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의 작은 죄로 시작된 모든 죽음의 증상은 사탄을 통해서 증폭되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 그러하다.
악, 곧 모든 죽음의 증상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살후
1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안식, 곧 완벽한 샬롬’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자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 돌이켜 회개하면 샬롬을 회복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가 다시는 없다. 또한, 하나님과의 거리는 불가역적으로 무한히 멀어진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죽음의 증상에 고통스럽게 시달리다가 창조물로서의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소멸되는 죽음을 맞는다.
죽음, 샬롬, 부활, 구원과 같은 성경의 위대한 언어를 이해할 때, 도덕적 죄의 회개와 죄사함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꿈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로 파괴되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악을 다 몰아내시고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샬롬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꿈. 그 꿈의 한 부분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한 꿈이 이루어진 상태를 샬롬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제 나 혼자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과연 이 우주에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졌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의미는, 부정적인 세력의 극치, 악의 극치, 악의 세력의 궁극, 즉 죽음을 이기셨다는 의미이다.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 귀신을 쫓으심, 바다를 잠잠케 하심은 모두 예수님의 악의 세력을 잠재우는 능력을 보여준다.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하자. 내가 만지면 옮는데, 예수님께서 만지시면 병이 낫는다. 즉, 악의 결과, 죽음을 정복하는 힘을 미리 십자가 이전 부터 과시하셨다.
그리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결정적이로 최종적으로 그 세력을 없애셨다. 십자가의 사건은 실제적,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사건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며 악을 없애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선포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가? 로마정부의 하수인 빌라도, 식민통치 정부 헤롯왕의 하수인, 대제사장 무리들과 같은 권력자들이 모여있었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모든 세대의 권력자들, 힘, 악한 정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강한 힘들을 상징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주위를 포위했다.
그리고 유대인 군중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하나님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인본주의라는 말이 선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모든 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을 지칭한다. 왜냐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있음, 내가 나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유대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들이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왕,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 자녀, 아들이 된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선포를 수도 없이 들어왔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요한복음19:15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로마 황제 가이사외에는 왕이 없다”고 소리쳤다. 창조해주시고 선택해주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는 바로 오늘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혹 있다고 하여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타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또한, 마태복음27:40에서,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로 도전하였다. 이것은 사탄이 마태복음
4:6에서 광야에서 예수님께 던졌던 도전이었다. 즉 사탄의 강력한 세력이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를 애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악의 세력들, 인류 역사 이래 그리고 십자가 이전 모든 세대,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모든 악들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자기 존재와 인격의 안에 고스란히 다 받아서 죽음으로써 그 악의 무섭고 가공할 힘을 소진시켜 버리신 것이다.
십자가와가시관
십자가위에 가시관을 쓰시고 달려계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사형방법중 가장 잔인한 것이어서, 로마시민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국가반역죄인, 로마 황제에게 반란을 꾀한 자에게만 가했졌던 로마의 극형이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여러 날을 매달아 두면 서서히 피를 흘리며 팔레스타인 땅의 낮 태양의 뜨거움과 밤의 무서운 추위가운데 죽어가게 하는 무서운 형벌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독특하게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다.
‘가시’는 에덴동산에서
“이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다. 곧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악의 상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관은, 세상의 모든 악이 예수의 인격과 존재위에 얹혔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마태복음27:51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소과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졌다. 이 휘장은 소 두 마리가 당겨야 찢을 수 있을 정도로 두껍고 튼튼한 장막이었고, 금색실로 그룹, 즉 하나님의 천사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룹은 창세기3:25에, 하나님의 샬롬에서 인간을 추방하실 때 죄인은 샬롬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지킨 문지기, 하나님의 천사이다. 성소의 휘장이 찟김으로 이제 그 문이 열린 것이다.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샬롬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
3:13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라고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고 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이 죄목에 해당하는 형은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로 맞아 죽으시게 되면, 핍박받는 선지자로 인식되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이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어 알고보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네’라고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 죽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로마 반역죄, 즉 유대인의 왕을 자처한다는 거짓죄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이 간교한 생각을 완벽하게 역이용하셔서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께 부어서, 우리를 그 저주에서 속량하시는 섭리의 도구로 활용하셨다.
부활로성취된샬롬의시대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선포한 모든 메시지가 모호해진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항상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부활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죽으셨고, 장례까지 치루어져서
3일이 되셨다. 육체가 썩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셨다
(로마서1:3-4).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역사, 즉 구속사의 두 단계를 보여준다. 처음 창조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의 첫 창조의 시대, 즉 육의 시대와, 부활 후의 시대, 새 시대, 즉 영의 시대, 성령님의 시대인데, 이 영의 시대는 첫 창조의 시대와 비슷한 점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시대,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이 영의 시대를 준비하셨고 여셨다. 그리고 들어가셔서 첫번째 주민이 되시고 우리를 초청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아직 실존은 들어가지 않았으나 주민등록이 옮겨진다. 우리의 실존도 언젠가 이 새 시대, 샬롬으로 충만한 나라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새 시대, 영의 시대는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불완전하고 다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 속으로, 미래에 있을 영의 시대가 부분적으로 침투해 들어온 이것이 바로 샬롬의 나라의 이중구조이다.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릴 것이나, 그 중간, 재림 전까지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것도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만 샬롬을 누릴 수 있다. 즉 “Already,
But not yet”.
그래서 이 시대에는 예수님의 샬롬의 나라와, 살기등등한 이 세상나라가 겹쳐있어서 우리는 크리스챤이면서도 부득불 고통과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궁극적인 힘이 없다.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결정적으로 소진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 조상들의 죄로 인한 증상, 질병, 장애, 실패, 두려움, 자연재해, 사고등을 인류의 연대성가운데 우리도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그러한 악의 최종적인 결과인 죽음이 완전히 소진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2:14-15 은 인간의 실존을 정말 정확하게 묘사해준다.
“죽기를 두려워 일생에 종노릇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증상들인 고통을 경험할 때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고 두려워한다. 그것이 죽음의 증상이기 때문이다. 미움과 증오를 받을 때, 모든 악의 현상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의 본질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의 가장 자명한 증거는, 바로 먹고 사는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확실히 소진시켰음을 믿게 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나로 하여금 죽기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들이 나타나면 이제 힘은 들지라도 두렵지 않다. 자유롭고 용기 있게 살게 된다. 즉, 부분적인 제한적이나마 샬롬을 누리는 것이다. 영의 시대, 새 시대의 완전하게 누리게 될 샬롬의 첫 열매, 맛배기를 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크기 때문에, 샬롬의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 영혼에 오게되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충분히 살아지고 나누어 줄 수 있게 까지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므로 너희는 담대하라 용기를 내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혹 못 가질 지라도 우리는 노심초사하면서 자기중심적으로 끌어당기면서 살기를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 빼앗아 먹기 위한 작은 탐욕으로 인한 다툼과 전쟁이라는 매임에서 우리는 해방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가진 자유함과 샬롬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의 복지, 즉 샬롬을 위해서 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샬롬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샬롬이 없는데 내가 죄용서 받았고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식의 구원의 개념은 일그러진 것이다. 나와 모든 사람이 전체성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다.
어떻게 이 구원을 구체적으로 누릴 수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타적으로 누리게 되는지는 내일 다루기로 한다.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첫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1강(화요일):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요 16:33 b)
같이 기도 드립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송축합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기뻐하며,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더욱 합당하신지
계시의 말씀을 통해 배우게 하시되, 비록 인간의 메신저를
통해 말하는 것일 지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슴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3일
동안 이번 코스타 수양회 중심 성구인,
요한 복음 16장 33절 말씀을 같이 강해하고
살피게 됐습니다. 이 말씀 짧은 말씀이지만
세 부분으로
나눠서 중간 부분을 오늘 살피고, 그 다음에 마지막
부분을 내일 살피고, 오히려 첫번째 부분을 글피에
살피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헬라어 본문으로는 우리
한국 번역과 순서가 같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논리
순서를 조금 바꿔 봤습니다. 우리 본문의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시작,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멘.
제가 어떤 신문 칼럼을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누구도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모두가 귀 막고 타협 없이
자기 말이 옳다고 막무가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우리
정치가 그 꼴이다. 이쯤 되면 이 세상은 막가자는 것이나
다름 없다. 대통령부터 그렇다. 자기만이 옳다며 자기를
따라주지 않는 세상에 혀를 찬다. 여당도 지리멸렬이다. 할 일도 많고 갈 길도 바쁜데, 집안 싸움에서 못 벗어
난다. 야당 역시 가관이다. 법치를 무시하고 거리에서
방황하며 죽은 전직대통령에게 기숙하는 수준이다.
교수 사회, 시민 단체, 각종 이익 단체들도 오로지 자기
주장에만 매달린다. 만인이 만인의 적이다. 모두가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야단이고, 조금만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체면불구 하며 으르렁 된다. 여기
저기서 적개심이 난무하고, 촛불이 횡행하며 서로의 생명 줄을
끊으려고 광적으로 돌진한다. 북한을 놓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다 싶히 하고, 거기다가 남과 북은 이제 바야흐로
마주 보고 달리는 괘도에 올라 탔다. 안에도 적이고
밖에도 적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통합과 소통, 이해와
타협, 법치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다. 이것은 정치
권력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이 무너진
상태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회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가 무너진 상태이다. 우리에게는 제 삼의
길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리더십의 부재, 삼지 사방으로 흩어진
민심,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는 지도층의 욕심, 오직
반항과 파괴로만 일관하는 저소득측의 비 타협이 난무
하는 사회로는 바람직한 21세기로의 진입이 어렵다.
우리는 우리를 만인대 만인의 싸움에서 구해줄 진정한
개도론자가 필요하다. (여러분이 이런 개도론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모의 공포증 없이, 마이크의
소음 없이, 욕설 섞인 저주 댓글이 없이, 매일의 안정된
생활에 매진하는 화목한 사회에 살고 싶다.
여러분 이게 뭐 한겨레 신문의 칼럼인지,
또 조선일보 칼럼인지 머리를 굴리지 마시고 그대로
잘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간 역사가 항상
그랬지만, 지금 이 시대는 너무 너무 각박하고 살기가
팍팍한 시대 입니다. 자본주의 한계가 막 드러났고, 그렇다고 공산주의 실험을 다시 해볼 수 없는, 아주 어려운 그런 상태 이죠. 여러분이 노인이 되는
40년쯤 후가 되면은 국민의
5명중의 한명이 노인이 됩니다. 그리고 국민
4사람이 한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되는 그런 어려운 처지에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출산율이
1.1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 그리고 어쩌면 이 시대를 책임지고 살아가야 될 여러분들이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읽고 계시는지. 여러분이 지금 공부를 하고 계시지만 이제 졸업을 하면 금방 조국 현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또 세계 현실에 우리가 눈을 떠야 합니다. 늘어가는 지구촌의 인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며 우리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어떠한지 인류가 역사 시작 이래 항상 추구해 왔던 샬롬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또 우리가 이 타락한 피조 세계 속에서 악에 지쳐 있는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세상을 이길 힘을 우리 스스로가 갖고 그런 용기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 주제가 샬롬 입니다. 샬롬은 평화 혹은 평강으로 성경에 번역이 되어 있고, 신약 성경에 주로 나오는 평화의 원어는 에이르네라는 헬라 말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피스죠. 평화, 평화라고 말을 하면 즉각적인 우리의 인식이 전쟁이 없슴, 편한 사이, 다툼과 갈등이 없는 상태, 혹은 어제도 우리가 배웠지마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피조세계와의 원만한 삼중구조의
관계를 우리가 평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샬롬이라는
말은, 샬롬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이에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샬롬은 조금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알아야만 이번 수양회 주제를 소화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샬롬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성경 언어를 먼저 조금 공부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마음속과 머릿속을 싹 지우고
백지 상태로 만들고, 여기에 여러분의 개념을 한번
잘 써 보세요. 성경에는 초장부터 복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 22절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많은 생물들과 공중의새들을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들을 바닷물에 그리고 땅에 충만해라’
이렇게 말합니다. 물고기와 새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시고 창세기
1장
26절에서
28절, 그 유명한 인간을 창조하신 구절에 들어가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물론 뒷날 신학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께서 같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라고 말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랬어요.
그럴 때 우리를 복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 버리고 성경적인 개념의 복이 뭔가 blessing, 우리는 복 하면
금방 가지고 있는 기존 개념을 버리고, 복이라는 것은
새나 물고기를 비롯한 생명체, 모든 인간을 비롯한
인간과 동물과 같은 생명체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생명의 힘을 복이라 그래요. 사람을 중심으로 얘기하면
인간이 가장 인간 답게, 가장 행복하게, 정말 땅속에서
물을 함뿍 빨아 들인 장미가 활짝 피어나서 그 아름다움을
백 퍼센트
들어내기에 충분한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지금처럼
타락하고 망가진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래 창조
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많은 뜻이 있지만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한가지는 동상 같은 것입니다. 독재자들이,
왕들이 자신의 통치권을 들어내기 위해서 자기 나라
곳곳에 자기 왕의 상을 둬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마다 ‘아 이 나라를 저 왕이 다스리는 곳이구나‘ 이렇게 깨닫도록 한 것이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할 때, 그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 하신 후에, 다 물론 하나님이 다스리시지만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리자로 세우셔서 다스리도록 작정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많은 생물을 창조 하셨지만, 그 중에
인간을 창조 하실 때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대권자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걸어 다닐 때 다른 많은 피조물들이 볼 때, 우리를 보고
생각하기를 ‘아 이 땅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구나’
깨닫도록 지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뜻이에요.
또 한가지는 우리가 그렇게 지음 받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세분이굳이 셋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완전한 연합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그렇게 존재하고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살려면 뭐가 필요해? 그냥은 안돼. 그냥은 안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생명력을 주셔야 되요.
그 생명력이 하나님이 부으시는 복이라는 신비롭고 거대한 것으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복은 모든 생명체가 가장 복되고 가장 충만하게 가장 깊고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모든 생명력이 그 복이라는 것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이라는 생명력을 부으실 때, 우리들은 그로부터 많은 것을 produce 해요. 창출해요. 뭐냐 하면,
뭐 아주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육체적인 생명, 또 자손의
번성함, 또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 올 수 있는 능력들,
또 육체적인 힘, 성실함, 지구력, 창의력, 집중력, 용기, 지혜, 모험심, 인내심, 희생정신, 용서하는 마음, 상상력, 심미적 능력, 열정, 동기, 의욕, 관대함, 지적 능력, 감성적 깊이, 의지력, 예술 감각, 뛰어난 운동 능력, 몸과 마음이 아름다움, 또 사랑과 인정 받음과 자존감과 존귀함과 원만한 인간관계, 그리고 초월적인 존재를 열망하고 나도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들, 이게 뭡니까?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가장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필요한 삶의 자원들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이 부으시는 복이라는
‘부라카‘ 라는 히브리말 ‘부라카’ 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복중의 복, 복의 핵심은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복의 DNA에요. 세포가 있으면 세포의 생명을
DNA가 주장하듯이, 복의
DNA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들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함과
복을 받았다는 것을 같이 생각했어요. 창세기 26장 28,9절에 보면은 이삭,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블레셋에 그랄 땅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블레셋 민족들과 좀 갈들이 있게 되요.
그러나 오랜 갈들에 있다가, 그 나라의 왕,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우리 이제 앞으로 사이 좋게 지냅시다.’왜? ‘내가 당신의 삶을 본즉,
당신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보았소. 당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라는 말과
복을 받음이라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자 복은 그런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 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은 처음에 복과 그 다음에
의로움과, 세 번째는 하나님의 언약인데요. 의라는
말, 의는 한자말로 찾아 보면 ‘옳을 의’자, justice, 옳음,
옳고 그른 일이 있는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선하고 틀리지 않은, 악하지 않은 어떤 것을 우리가 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죠. 로마서
3장
23절4절에 보면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해요.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을 때, 구원을 여러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중에 한가지 용어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 의롭다 하심이라는
헬라말은 원래가 법정 용어에요. 그리스, 로마 시대에 사용하던 법정 용어로써, 어떤 사람을 취조해본 즉 죄가 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조치를 취한 다음에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무죄 선언 하는 것을 의롭다 함이라고 말해요. 그런 이제 전통 때문에 우리들이 로마서에 특히 나오는,
특히 로마서 5장 1절에도 보면 ‘그런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 우리가 원래 의롭지
않았어요.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불의, 죄를 많이 졌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를 대신 벌
받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죄 없는 것으로 최종 판결을
하고 무죄 석방 됐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은 사실은 그것을 포함하고 훨씬 더 깊은 뜻이에요. 그것에만 머무르면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나서 내가 또 죄를 지으면 나는 죄인이 다시 됐다가 의롭게 됐다가, 왔다 갔다가 하느냐 그것이 아니고, 이것도 이제는 포기라는 개념에서 했던 것처럼, 싹 여러분의 노트를 다 지운 다음에 새로 정리해 보세요. 의라는 말은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올바른 관계.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의롭다는 말은 내가 관계가 갖고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부를 충실하게 감당할 때 의롭다라고 말해요. 예를 들면, 아빠 엄마는 자식을 잘 돌보고 양육할 때, 의로워요. 그러면 자식은 어떠한게
의로운가 하면은 아빠 엄마를 잘 의지하고 아빠 엄마
말을 잘 듣고, 그 혜택을 받아서 무럭 무럭 잘 자랄 때, 의롭다 그래요. 그래서 이 성경에서 ‘의롭다’
라를 말은 철저하게 관계적인 말이지 객관적인 어떤
기준 이것은 옳은 것이다. 이것을 지키면 의롭고 그것을 못 지켜 죄를 지으면 불의 하다. 그런
개념도 물론 있지만, 훨씬 더 깊어요. 관계적인 개념이에요.
관계적인 개념.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의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못할 짓을 해도, 하나님 한번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끊임 없이 우리를 우리에게 다가 오세요. 여러분이 인생에 많은 순간에 여러분의 인생을 계속 추적하시는 하나님을 계속 뿌리쳤지만 그러나 끝내 따라와서 여러분을 잡고 항복 시키시는 하나님의 그 의로우심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 받으신 것이에요. 그 의롭다는 말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셨잖아요.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고 사랑하여 주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로써의 모든 사랑과 복락을 배푸시는 관계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의로워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느냐, 그분을 신뢰 하는 거에요. 우리가 착하게 살고 죄를 안 짓고
하는 것은 그것은 두 번째 문제고, 훨씬 더 먼저, 그 하나님을 받아 들이고,
내 하나님, 내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의롭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은 여전히 많은 허물이 있고, 많은 죄를 지었고, 여전히 예수 믿고 나서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죄를 다 멈추지는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고 아무리 노력해도 선과 악의 변증법적인 이분론 속에서 뱅뱅 돌다가 죽게 됩니다. 살아 숨시는 동안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 관계 속으로 집어 넣으셨어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어서 새로운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었어요. 우리는 새로운 분을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떠났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관계가 있었어요. 그 관계를 아담 이후에 인간이 박차고 튀어 나와서 관계가 깨트려 졌는데, 그 관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justify’,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 말할 수 없는 신실하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 속으로 일단 들어갔어요. 들어가면, 설혹 여러분이 살아 생전에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그 관계가 다시 어그러져서 튀어나오는 법이 없어요. 왜?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무나 큰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시는 너무나 큰 댓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시금 돌아가 앉아 있는 하나님과 의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관계를 조금 어려운 말로 성경에서 언약적관계다 이렇게 말해요 언약적 관계. 언약이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옛날부터 우리나라말 번역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말을 많이 썼고,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약성경,구약성경은 옛날 약속, 새로운 약속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책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신약 구약을 갖고 계시죠. 그런데 언약이라는 말은 또 굉장히 기가 막힌 얘기에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으로 꽉 차 있어요. 그 언약의 선포는 이것입니다. 언약은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표현은 간단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 말은 출애굽기 19장, 레위기
26장 쭉 나오고 또 예레미야 31장, 요한 계시록까지 계속
나오는데, 계속 나오는 말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원래 그러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인간이, 아담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옛날에 한번 일어났던 유일한 사건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그러한 성향이 있으며 모든 인간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슴을 나타내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스스로 박차고 나왔어요.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언약을 지키시는데 인간이 박차고 나왔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인류에게 기회를 주시는데, 역사 속에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택하시고
그에게 다시금 스스로가 거부했던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회복해 나가십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하시고
아브라함의 가족들에게 하시고, 그의 국가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이제 그 혜택을 펼쳐 나가시는데, 항상 그 내용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에요. 그 말이 뭐냐?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 왜 그런 말이 필요하냐? 아담이, 우리들이 하나님 나 필요 없어 라고 말했거든요. 아담도 그랬고,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하나님께 대한 가장 죄송하고 가장 큰 죄가 뭐였냐.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라는 것이에요. 죄라는 것은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나 자라오면서 뭐 누구 나쁜 짓하고, 누구 미워하고,
누구 때리고 죽이고, 뭐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이런
것이 죄다. 이렇게 늘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라는 말은 사회학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내포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신학적으로 정의해야 해요. 뭐냐,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없다 그러고, 없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믿기 싫다. 하나님 싫어, 그런 것들을 죄라 그럽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내 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은 하나님이 주시는 뭡니까. 복, 생명력을 못 받게 되요. 그런 상태를 성경에서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 읽다 보면은 이상하다 내가 예수 믿지 않던 상태를 죽었다 표현하는구나. 물론 그때 내가 예수를 안 믿었지만 살아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죠.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지만
하나님이 계속해서 부어주시는 그 생명력 그로부터 복으로부터 계속해서 만들어 지는 생명의 자원들을 더 이상 못 받게 된 상태를 성경에서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그때까지 받았던 복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살게
되는데, 우리 인간들은 태어날 때 아담이 마치 아담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이미 받았으나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 복을 가지고 한 세상을 살았듯이,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 그런 상태로 태어나요. 말하면 죽은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물학적인 생명은 가지고 태어났지마는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에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너희들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를 살리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적인 관계 속으로 복귀해서 원래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고 또 인간은 그것을 받지 않으면 결코 인간답게
살수 없는
복과 생명력을 다시 받게 됐을 때 그것을 살았다라고 도
말하고 혹은 영생을 얻었다라고 도 말합니다. 같은 뜻을 구약에서는
주로 복이라고 말하고 신약에서는 주로 영생이라고 말해요. 영생이라는 말은 그냥 시간적으로 길고 긴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말은 원래 문자적으로는 오는 시대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 오는 시대라는 것은 우리 지금 타임 테이블로 말하면은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그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지금 이 인간의 역사는 마감되고 새로운 시대를 여실 텐데, 그때 누릴 인간들의 삶 원래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때 그 풍성한 삶을
계속 누리게 될 텐데, 그 시대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지금 땡겨서 누리고 있어요. 그것을 이제 내일
우리가 다루게 될 텐데.
자, 그럼 이제 샬롬이 뭐냐 서론이 너무 길죠. 샬롬, 샬롬이라는 말은 우리 안녕하십니까, 굿모닝 하는 것과 같이 유태인들은 아침 저녁 만날 때 마다 샬롬
이렇게 말하죠. 아주 단순하고, 평화로은 좋은 관계 이런 느낌도 있지만 그 깊은 영적 의미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샬롬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은 그런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삶으로써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복과 영생을 받아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늘 의로운 관계 속에 있어야 하고 언약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인간은 살아 있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놀라운 직분을 감당하기에 가능한
RESOURCE를 늘 받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아요. 창세기 2장 3장에 벌써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반드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 하셨어요. 그런데 샬롬이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그 복과 생명력을 공유하면서 그게 같이 뿌리를 내고 같이 발을 담그고 살고 있는 그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래요. 이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영생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나만 받아서 누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받은 그것을 서로 나누면서 공유 하면서 같이, 같이 그 복을 누리고 사는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 단어 중에서는
가장 잘 맞는 말이 CONVIVIALITY 는 말은 원래 대잔치 마을 전체 사람이 같이
참여하는 잔치를 말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아까 말씀드릴
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생명력을 받고
그분과 의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들은 소위 말해서
전인. 여러분 전인 교육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전인교육,
전인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INTEGRITY가 있는 매사에 봐서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학과 공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음악도, 미술도 체육도 리더십도 가르쳐서 아주 근사한 사람을
만드는 것을 우리가 전인교육 이렇게 말하는데, 원래 그 전인이라는 말은
개별적으로는 완전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뜻은 타인과 더불어서 잘 살아가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을 전인이라고 그래요.. INTEGRITY가 있는 사람. 그 전인들끼리
모여서 사는 삶을 샬롬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영어
단어로는 또 한가지 TOTALITY 전체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해요. 제가 여러분의 핸드북에 작은 글을 실어놨어요. 리코스 카잔차스키가 쓴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을 써서 아주 불경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아주 진지한 구도자였어요. 이런 글을 좀 읽어
드릴께요. 이 사람이 밤에 꿈을 꿨어요. 크레타 사람인데 원래, 크레타 민요를 부르면서 산을 오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동굴에서 노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소매를 걷어 붙힌
그의 손은 진흙투성이였다.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을 대더니 그는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노래는 그만해요 내가 일하는 게 보이지 않나요.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내 보였다. 뭘 빚으시나요? 내가 물었다. 보면 몰라요, 동굴에서 나는 구원 받은 자들을 빚어 낸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외치는데 내 가슴속에 옛 상처들이 다시 터져 나왔다. 이 리코스 카잔차스키는 그리스 정교가 국교인 크레타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영적으로 방황을 했습니다. 진정한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 니체도 추종해보고 마르크스 공산주의도 추종해 보고 나중에는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에 한이 맺힌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동굴의 노인이 내가 진흙으로 구원 받은 사람을 빚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놀라는 거에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노인이
전체성을 파악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이렇게 말합니다. 전체성을 파악하고, 내가 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반드시 모여 살수 밖에 없는 그 그룹에 한 사람임을 깨닫는
전체성, 이것을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의로운 관계, 그리고 동료 인간들 관계에도 의로운 관계,에 머물러 사는 것이 이 샬롬인데, 이 샬롬은 그야말로 너무 너무 좋은 상태, 너무 좋은 상태여서 제가 여러분에게 다 설명을 못하겠어요.
Too good to explain.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근접한 단어로는 창세기에 나오는 좋았더라 라는 단어 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일장을 보면은 하나님이 빛을 창조 하시고 난 다음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이 바다와 뭍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그것을 보고 좋았더라,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는 심히 좋았더라. 이렇게 하시죠. 좋았더라는 히브리말로 ‘토우브’ 라는 단어가 그런 뜻이에요. ‘토우브’라는 단어, ‘좋았더라’가 이런 뜻입니다. 즐거운, 유쾌한, 좋은, 선한, 귀한,
탁월한, 적적한, 올바른, 탐스러운, 준수한, 충실한, 후한, 선대, 총명함, 보배로운, 길한, 아리따운, 번영, 복지, 은총, 은혜 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이것이 샬롬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퀄리티에요. 단순히 뭐 전쟁이 없고, 뭐 좀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창조 하실 때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라는 위대한 역할을 감당하고 살도록 지어진 인간들이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더 할 나위 없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치밀함 같이 완전히 연합되어 사는 그런 퀄리티의 삶을 샬롬이라고 그렇게 하고 원래 우리 인간은 그렇게 지어졌어요. 우리가 너무나 망가졌기 때문에 도저히 옛날 일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됐지만, 그러나 우리들을 그렇게 창조 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제 언어 정리가 끝났고.
너희가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들어가겠어요. 이건 짧게 끝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너희가 세상에서, 세상이라는 단어와
고난, 환란이라는 단어 이 두 가지를
잘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실 때에
너희가 세상에서 라고 말하실 때에는 굉장히 슬픔을 담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앞에 두시고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굉장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그 속에 있는 것이에요. 왜? 이 세상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실 때 그 모습이 아니거든. 너무나 깨지고,
너무나 망가지고, 너무나 왜곡되어서 샬롬은 커녕 샬롬의
정 반대인 죽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세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뉘앙스로 사용 되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말할 때
우리들은 그 세상이라는 말은 썩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죠. 그러나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 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할거 없다. 너희를 미워하기 전에 벌써 나를 미워했던 것을 기억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자라면은 너희가 같은 부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겠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나에게 선택을 받아서 빠져 나왔기 때문에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이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상당히 부정적이에요. 하나님이 너무나 아름답게 샬롬으로 창조하셨는데 그것을 인간의 범죄로 다 깨어버리고 살벌한 고통과 죽음이 드리워져 있는 고통스러운 장소라는 뜻이에요. 동시에 그 세상은 하나님을 적대시 하고 하나님을 몰라라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있어요. 제가 사실은 이번 수양회 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뭐 그렇다 치고라도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을 모르는 인본주의자들이 외치는 사회개혁을 부화내공 따라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제가 굉장히 격분하고 있는 상태에요. 여러분 여기에 아마, 우리나라 용어로 좌파들도 꽤 있을 거에요.
그 좌파들 제가 좀 구박을 할 것입니다. 물론 우파도
구박해요.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양파에요. 저는 민주당도 아니고 한나라당도 아니고 교회당입니다. 예배당이에요. 이 세상의 현실을 보는 해석은 비슷해요. 아 이세상이 악과 고난이 가득한 곳이구나.
이것을 우리가 회복하자. 우리가 탈피하자.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세상이 원래 낙원이었던
때를 기억해요.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 paradise 낙원.
그래서 낙원이 있었다가 상실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기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본주의자라는 말이 무어냐 하면, 아담이 인본주의자였어요 처음에.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 믿기 전에 우리들은 좋아하나 싫어하나 인본주의자에요. 그 말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태어나서 하나님 없이 살수도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나 인간 이외에
초월적인 존재가 없슴’을 선포하는 존재를 우리는 모두다 인본주의자라 부를 수 있습니다. 휴머니즘, 인간이 궁극적인 존재이고 인간이 시작이고 끝이고 인간이 창조하는 가치가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들이에요. 인간 인본주의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냐 하면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은 비슷한데, 그 낙원 개념이 없어요. 그 대신에 이상향이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인간과 세상은 원래 굉장히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점점점 진보하고 인간은 점점 진화해서 점점 좋아져서 마침내 지상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라는 개념이에요. 현실을 보는 시각은 비슷한데, 그것의 해법이 달라요. 예수 믿는 사람은 원래 하나님이 주셨던 낙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인본주의자들은 원래는 없었고 인간과 세상은 원래 굉장히 무지하고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점 좋아져서 역사의 진보의 원리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으로 인간은 지상천국, 유토피아에 이르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투쟁하고 우리의 삶을 받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굉장히 비슷하지만 철저히 다른 것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크리스천
청년들이 후자를, 인본주의적인 사회개혁 개념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숭고한 뜻을 품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던지고자 하는 열정이 있더라도 그것은 틀린 것이에요. 왜 그러냐, 우리 인간이 낙원을 잃어 버리게 된 것이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에요.
인간이 미개 했기 때문에,인간이 원시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저주하셨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창세기
3장
17절 이후에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저주 하십니다. 사탄, 뱀을, 사탄으로 상징되는 뱀,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과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각각 저주를 선포 하십니다. 너는 나의 명령을 어겼슴으로 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래 대단히 위대한 존재에요. 인간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백배 천 배, 위대한 존재, 영광스런 존재로
창조됐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버금가는 그런 존재로 창조 됐는데, 그래서 창세기 2장 초반부터 보면은 소위 에덴동산의 모습들, 너무나 풍성한 삶의 조건들, 그리고 거기에는 큰 강이 흐르고
그 강에서 흐르는 4개의 강들이 온 지구를 덮었다고 말해요. 고대 세계의 세계관에는 강을 떠난 인간의 삶이란 상상 할 수 없었어요.
근데 그것도 무려 4개씩이나 있으니까 얼마나 완전한 삶인가. 또 거기에 보면 아주 좋은 질의 금이 생산되고, 여러 가지
보석이 생산되더라. 이런 얘기들이 창세기
2장 초반에 나오는데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엄청난 직분에 걸맞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허락하셨슴’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좋은데, 그러나 너와 나와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한 개의 선이 있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모든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그 자유는 나에게 종속되어져야 한다. 라는 것이 선악과의 의미에요. 그 선악과를 안 먹으면 그 의로운 관계 속에 머무는 것이고, 그것을 violate할 때,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No Thank you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관계 없슴 선포, 이것이 선악과 먹음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이 저주를 선포 하십니다.
우리가 자꾸 이 성경에서 보면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 하셔야 되기 때문에 인간세상에서 사용하는
language를 사용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많은 언어들이 우리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언어로 복구해야 됩니다. 여기서 저주라는 말은 우리끼리 하는 저주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우리는 그냥 확
FFFFFXX 하는 말이 저주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저는 누구보다 욕을 잘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 거룩한 장소에서 할 수가 없어서 여러분의 풍성한 상상력에 맡기기로 하겠어요. 저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막 따가운 말을 퍼 붙고 이런 것이 아니에요. 그래? 그럼 잘해봐라. 이거에요. Let him go, 그럼 한번 알아서 해봐라. 너가 나 없이 살 수 있다고? 너는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복과 영성을 끊임없이 받아야 되는 존재인데, ‘나를 떠나서 살 수 있다고? 너가 너 스스로에게 하나님으로 살 수 있다고? 한번 해봐라’
이것이 저주에요. 하나님과 멀어짐, 하나님과 멀어짐, 그래서 저주는 정확하게 보호의 반대말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함이 뭐라 그랬어요? 보호 하나님과 멀어짐을 저주.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학자인 김세윤 교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조그만 책자, 구원이란 무엇인가? 혹시 안본
분 계시면 꼭 보세요. 구원이란 무엇인가 최근에 두란노에서 개정됐어요.
제가 왜 두란노 책을 팔아줘야 되나? 거기에 보면 저주에 빠진 인간을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로 표현했어요. 큰 나무가 있는데, 큰 폭풍이 불어서 뿌리가 확 뽑혀 버렸어요. 그러면 그 나무는 금방 죽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큰 나무는 몇 개월
살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누렇게 되고 메마르게 되고, 잎이 시들고, 마침내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적으로 봤을 때는, 그 대지에서 뿌리가
뽑힌 순간 죽었다고 해도 되요. 그러나 아직은 살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죽을병에 걸려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거기는 고난과 결핍들이 있습니다. 자 이세상에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와 그 결과들이 바로 고난과
결핍, 죽음의 증상들이에요. 하나님의 저주에 빠진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복을 상실한 인간의 모든 결핍과 고난들의 증상들을 악이라고 그래요 악.
Evil 그런 것이 이런 것입니다. 제가 또 열거할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불의, 탐욕, 시기, 질투, 증오, 살인, 다툼, 사기, 악독, 험담, 비방, 모함, 음란, 교만, 악을 도모함, 불효, 신의 없슴, 몰인정함, 무자비함,
또 이제 그것이 때를 지어서 그룹을 형성해서 서로 다투고 당파 짓고,
소외시키고 집단 이기주의, 공직자의 권력 남용,뇌물수수,
인신매매, 고문, 인권유린, 전쟁, 인종청소, 인종 차별, 대규모의 기아, 전염병,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정신적인 물리적인 현상들, 개인과 집단의 이 부정적인 현상들이 전부다 악이라고 말해요 악. 뿐만 아닙니다. 이것이 이제 크게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막 다가오는 것들이 있어요.
아마 20세기에 가장 엽기적인 사건, 지금 동유럽에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일어났던 것일 거에요.
세르비아에는 정교도, 그리스 정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크로아티아에는 침례교가 있었어요. 크로아티아의 침례교들을 다 죽이기 위해, 없애기 위해서 남자들은 다 죽이고 크로아티아의 침례교 여자들을 강제로 임신을 시켰어요. 그래서 한 종족을 말살하려고 시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 또 르완다의 후토와 투치족의 그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완전히 한 명도 없이 하겠다고 나선 것들이에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의 600만 명 유태인들 학살 이라던지 또 레닌과 스탈린의 공산주의
실험은 약 1억 명 정도를 죽였어요. 1억 명
정도가 죽거나 유형을 당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약 1500만 명
정도의 아메리칸 인디언을 죽였죠. 흑인의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요. 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와 독일 국경의 베르뎅과
솜이라는 두 곳에서 1주일 동안 전쟁이 벌어졌는데,
독일군 50만 명과 프랑스군 45만 명이 죽었어요. 하루에 어떨 때는 4-5만 명이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 따라서
그 기관총 한 자루에 어이 없이 목숨을 잃는 그런
일이 발생했어요. 상상할 수 없어요. 역사책에서 읽으면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는 그 백만 명
가량의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수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에
한과 눈물이 어려 있는 곳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라이프라는 이 사진 잡지에서 1차 대전의 이 장면들을 search 한 것을
봤어요. 거기 한 바윗돌에 기념관에 바윗돌에 전사한 청년의 어머니의 말이 불어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저는 불어를 모르니까 밑에 영어 번역을 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My son, 내 아들아, since your eyes were
closed, mine, 내 눈은, 내 눈이 감겨진 후로부터 내 눈은
한시도 눈물을 그쳐 본적이 없다. 역사책에서 보면 솜과 베르뎅 전투에서 45만 50만 명이
죽었다. 이렇지만, 그 깊이 들어가 보면은 수백만 명의
눈과 한이 어려 있는 이것이 인류의 역사에요. 악. 샬롬이
깨어진, 샬롬이 상실되고 샬롬이 해체 되어 버린, 인류의 현상이 그런 것이고 현재 여러분과
제가 목도하고 있는 모든 개인적과 공동체적인 삶의 부정적이고 팍팍한 모습들은 바로 샬롬이 실종된 상태입니다. 나의 힘과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행과 비극이 굉장히 많죠. 태어날 때부터 몸과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질병으로 지체를 잃거나 상해서 연약함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음주운전 때문에 다친 사람들, 너무나 가난하게
태어나서 한번도 유복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임신되었으나 태어나 보기도 전에 성인들에 의해서 중지된 생명들, 또 공해 때문에 담배 한번 피워 보지 않고도 폐암을 걸린 사람들. 수백년전에 내가 가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갖다 버린 산업폐기물 때문에 오늘날 내가 그 오염된 음식을
먹고 암에 걸리는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의 불행들이에요.
츠나미, 2004년에
2007년에 중국 스촨성의 지진, 이런 것들을 보면 한꺼번에 수십만 명이
죽어버려. 1755년 11월 1일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일어난 지진, 그날은 주일이었어요. 그 지진 때문에 평화롭게
교회당에서 예배 드리던 그 도시 인구 30만 명중
삼분의 일이 즉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유럽에서부터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인간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이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저주 때문이다. 나의 혹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인류 역사 내내 있었던 인간의 죄의 결과이기도 하고
또 그것을 부추기는 사탄의 힘. 또 우리가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연계를 맡겨 주셨는데, 이 자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서
반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자연 재해,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악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그래요, 예수 믿어도 우리는 꼭 같이, 혹은 어떤 면에서는 예수 믿지 않는 자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병에서 났기도 하고 어려움에서 헤어나기도 해요.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개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세상의 고난에서 다 벗어 난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여전히 환란을 당할 것이다. 물론 그 해법이 이제 내일과 글피에 나오게 되요.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