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16, 2010 | 삶과 신앙/최주희의 사랑이야기
많은 경우 결혼을 위한 준비는 결혼할 대상이 있고 결혼날짜를 잡으면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결혼준비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에는 많은 돈을 들이고 계획을 세우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정작 진짜 해야 할 결혼준비에는 너무나 소홀 한 것을 본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가정들이 깨어지고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결혼준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안정감 있고, 책임감이 있으며, 진실한 사람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안정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안정감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며 외부환경의 변화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다. 반대로 안정감이 없는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대안이 없는 충동적인 일을 벌이며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기 쉽다. 또한 상황과 기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만약 남편이 안정감이 없어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쉽게 옮겨 다니거나 혹은 이 일 저 일을 마구 벌이고 수습하지 못한다면 가정은 매우 불안할 것이다. 또한 아내가 불안정하여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할 경우 이는 교육전문가들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가장 좋지 않은 교육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깊이 있고 신중하게 사고하며 감정과 행동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여야 할 것이다.
책임감도 결혼준비를 위해 중요하다. 혼자 독신으로 산다면 부담 없이 자신이 원하고 즐기는 일만 선택하여도 크게 문제되지 않겠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하기 싫어도 힘이 들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만약 그것이 버겁고 억울하게 생각된다면 결혼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여러 책임감 중에서도 돈에 대한 책임 있는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혼하는 부부들의 실제 이혼 사유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외도와 경제 문제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만약 남편이나 아내 중 어느 한쪽이라도 돈을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규모 없이 함부로 쓰거나 원하는 것은 일단 카드로 긁고 보는 것이 습관이라면 결혼 후 얼마가지 못하여 가정경제의 뿌리가 크게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수입과 분수에 맞는 씀씀이와 부족할 경우 일을 통한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수입원으로 하는 책임 있는 재정관리가 연습되어져야 할 것이다. 나 자신도 결혼을 앞두고 가계부를 기록하며 돈을 아껴 쓰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그 당시 나는 급하면 택시 타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을 절제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었다. 결혼 후에도 가계부를 기록하며 수입 범위 안에서 각 항목 별 예산을 세워 그에 맞게 지출하였는데 20년 동안 그렇게 하였고 지금은 몸에 밴 습관으로 가계부 없이 생활한다.
마지막으로 진실성이다. 진실성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신뢰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 모두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거짓이 없이 투명하게 서로를 대하며, 돈이나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 속이지 아니하고, 이성과의 만남에 있어서 오해가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진실성을 믿지 못하게 될 때 몰래 반려자의 핸드폰을 확인하거나 주머니를 뒤지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거짓말과 대화단절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두 가지가 부부갈등의 주요 원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므로 정직한 언어와 마음으로 하는 진실한 커뮤니케이션은 결혼을 위해 평소에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안정감, 책임감, 진실함 외에 특별히 자매들에게 몇 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상냥함과 이해심, 그리고 희생정신이다. 가정의 분위기는 아내가 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밝은 모습으로 현관문을 들어서는 가족들을 환영하며 그들이 가정에서 쉬고 에너지를 충전하도록 기본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또한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눈치 없고 둔한 남성들의 행동에 만족하기가 어렵다. 뭔가 부족하고 섭섭하며 아쉽고 속이 상하는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잘난 우리 여자들이 너그럽게 이해하고 참읍시다!” 희생정신에 있어서도 그렇다. 아무리 남성들이 도와준다고 하여도 여전히 가사 일은 여성의 부담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지런하고 희생할 줄 알며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면 결혼생활을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반려자가 없어도 결혼 준비는 가능하다. 오히려 행복한 결혼을 위해 더 든든한 기초를 다지는 좋은 준비 기간이 될 것이다. 안정감, 책임감, 진실함, 상냥함, 이해심, 그리고 희생정신… 이러한 것들이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위한 진정한 결혼준비 내용들이다.
Apr 15, 2010 | 삶과 신앙/양승혜의 무지개우산
신앙을 지켜나갈 때 가장 많은 필요를 느끼는 것은 좋은 멘토를 만나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멘토가 좋은 멘토인지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될 수 있으면 가족이나 나를 잘 아는 사람보다는 제 3자가 좋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다. 지금까지는 가족이면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우리 엄마가 나의 멘토이다.
우리 집은 딸만 셋인데 가장 먼저 결혼한 막내가 선교사로 M국에 가있다.
사람들은 ‘오지’라고 말하는 곳이지만 동생말로는 그곳도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교회에서 하는 선교에 열심히 동참하시고,
선교의 중요성도 잘 알지만 막상 자식들이 선교사가 된다고 하면
반대부터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조금 다르시다.
두 분 모두 평범한 평신도이지만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을 기뻐하시고,
부르심에 따라 사는 삶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신다.
특히 엄마의 신앙은 말과 행동의 일치로 이어지면서 우리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오랫동안 옷가게를 하신 엄마는 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신다.
경제가 어려워 모든 상권이 주춤하고 있는 상태지만 항상 밝게 웃는 엄마를 보고
장사가 잘 된다고 생각하신 어떤 분이 ‘아줌마는 교회다니셔서 이렇게 잘 되시나봐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평소에 안면이 있는 그 분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러게요. 참 감사한 일이지요’ 하셨단다.
그래서 내가 왜 교회에 나가보라고 권유하지 않았냐고 묻자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그 귀한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있겠니?
무조건 교회만 나가라고 하는 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기회와 상황을 열어주실 때가 있어. 그 때를 잘 알아야지.” 라고 말씀하셨다.
며칠 전에는 교회말고 다른 곳에 선교헌금을 하고 싶다는 어떤 할머니가 소개를 받고
찾아오셨는데 동생 내외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더란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보니 그 할머니가 평생 교회를 다니셨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선교헌금을 했다는 것을 알리고만 싶어하는 것 같아서
엄마는 과감하고 직선적으로 할머니께 복음을 전하셨다고 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이렇게 교회만 다니시면 아무 소용없다며
일침을 가하셨다고…그리고 선교헌금은 반드시 교회에 하시라고 권면하셨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놀라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는데…
내가 그 할머니가 이상한 교회 다니신거 아니냐고 묻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큰 교회라고 하셨다. ㅡ.ㅡ;
평생 교회를 다녔지만 복음을 모르는 사람.
교회가 뭔지, 복음이 뭔지, 들을 기회조차 없는 사람.
교회를 다닐 여건이 되지만 도대체 귀를 막고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어찌됐건 이 세상에는 아직도 복음이 전해져야 할 곳이 많으니
예수님이 오실 날은 점점 미뤄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빛을 발하는 나의 복음은 어떤 것일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능력을 알기에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러나 값싸지 않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복음의 능력은 잘먹고 잘사는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분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엄마의 일상은 늘 활기차고,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기대하는 소망함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Apr 7, 2010 | 삶과 신앙/이영길의 기독유학생의 삶
John은 [가명] 칼빈대학 학생이다. 칼빈대학에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있어서 학교에서 나에게 학생하나를 멘토하면 어떻겠냐고 권유하여 최소한 한해 한명은 기도하면서 성실히 섬길 수 있을것 같기도 하다고 허락하여 만난 학생이 John이다. 나와 John은 격주에 한번씩 만난다. 보통 두시간, 어떨땐 조금 넘을때도 있고 또 모자랄때도 있지만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난다.
지난 가을 학기 부터 시작하여 이번 봄 학기 까지 꾸준히 만났다. 만남 초기의 대화는 삶의 문제를 꺼내 놓고 그 해결을 위한 상담이었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과 지혜가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이다. 주로 만남이 있기전 우리의 만남 앞두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또 우리의 만남을 의탁드린다. 이렇게 우리들은 만난다.
John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과의 상담에서도 나는 비슷한 방법을 취한다. 그냥 기도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좀 세련된 방법은 아니고, 좀 무식해 보일 수도 있는 방법이지만 나는 이같은 접근을 아주 좋아한다. 그동안 여러 학생들과 교제하고 상담하는 과정 속에서 얻는 귀한 통찰이 하나 있었다. 엄청나게 멋있게 들려지는 그런 통찰이 아니고 이미 성경에 수없이 많이 제시된 보편적이며 단순한 진리이다. 즉,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을 떠남, 혹은 하나님 보다 나와 사람을 더 의지함에 있다는 것, 그러기에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께 돌아감 혹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함에 기인한다는 성경적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기도하며 John을 만났다. John은 교회도 다니고 있었고, 또 칼빈대학 같은 크리스쳔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에 나는 그가 하나님을 잠시 떠난 상태이거나 자기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들의 두번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은 John의 문제가 하나님을 떠남에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것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도와 주셨다. 즉 기도중 그같은 의심이 생겨 났고, 구원에 대한 확인이 있어야 한다는 강열한 생각이 솟아난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 우리의 대화는 복음제시로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 John은 좀 놀라는듯 했지만, 자신의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매우 솔직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내게 분명히 대답하는 매사 분명한 아이였다. 나는 대화식으로 구약과 신약을 이야기 하며 교제 하였다. 그렇게 몇번을 만나다가, 학기말 시험이후 John과 그의 여자친구를 함께 우리집으로 점심 초대 하였다. John의 신앙상태를 알기 시작하면서, 또 집으로 초대해 놓고 나와 우리 가족은 매일 저녁 John의 구원문제를 위해 기도하였다. John에게 나의 가족도 소개하고, 또 점심을 함께 먹으며 많은 이야기 하다가 기회를 내어 사영리를 가지고 복음을 제시하였다. 놀랍게도 John은 여자친구가 지켜 보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그날 처음 만났던 John의 여자친구였지만, 그녀는 내게 이 순간을 위해 제법 끈질기게 기도하였다고 귀뜸해주었다. 그래서 나도 이 순간을 위해 눈물을 뿌리며 끈질기게 기도하였다고 귀뜸해 주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을 함께 고백하며 주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된 이후 봄학기에 가진 우리의 첫 만남에서 John은 삶의 여러 문제를 더 이상 가져 오지 않고 신앙성숙과 관련된 질문들을 하였다. 어떤 질문에는 스스로가 묻고 대답하기도 하는데 그 대답들은 John의 신앙 고백으로 들려 졌다. 전에 나누었던 삶의 혼돈 및 장래에 일어날 염려에 대한 질문은 우리들의 대화에 조금도 끼어들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 없는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고, 예수님 있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임을 다시 실감한 복음전도 였고, 또 멘토링이였던 것이다.
크리스쳔 교수의 참 맛은 학생이 좋은 직장으로 좋은 보수를 받고 일하게 되어서가 아니다. 또 한학기를 잘 가르쳤다고 학생들이 감사로 스타벅스 카드나 책을 선물로 가져다 주어서도 아니다. 학기말에 주로 행해지는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좋아서 또한 아니다. 크리스쳔 교수로서 가장 신나는 일은 강의실과 강의실 밖에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그리스도를 모르는 학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게되는 일이다. 영원이라는 차원의 엄청난 사역을 보잘것 없는 나에게 맡긴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 하시다. 나는 그같은 하나님이 너무 좋아 오늘도 혹 내게 맡기신 영혼이 없는지 호시탐탐 기회를 옅보게 된다. 할렐루야!
Apr 2, 2010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다1)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
여행가 한비야가 그의 책《그건 사랑이었네》2)에서 고교시절 미국인 선교사에게 받은 시를 소개했다.
천길 벼랑 끝 100미터 전,
하나님이 나를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나?
10미터 전,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두시겠지.
1미터 전, 더 나아갈 때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을 거야.
벼랑 끝, 아니야 하나님이 나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리가 없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너무나 잘 아실 테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벼랑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내셨다.
…
그때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3)
나도 짧은 인생이지만 여러 번 낭떠러지를 경험했다. 17년 교회 생활의 끝에 나는 자살을 생각하는 대학 2년생 젊은이로 무너지고 있었다. 인생의 도피처로 들어간 군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그 직후에 하나님은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셨다. 군 생활 2년 동안 기타하나 메고 3사단 전역을 돌아다니며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는 찬양 군종조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미국에 건너올 때도 10여년의 기독교대중음악(CCM) 사역의 끝에서 영적 침체를 경험하며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예배회복’의 부르심으로 날개를 달아 미국으로 건너왔다.
유학 와서 1년 지나니 한국에서 가져온 재정이 바닥났다. 빈털터리 일보직전, 4시간 반 떨어진 이민교회에서 주말 사역 요청이 들어왔다. 분쟁의 어려움을 찬양으로 극복하려는 염원이 있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한국에서 찬양사역 전문가로써 10년 넘게 사역했던 내 마음이 밑바닥까지 무너져 내리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광야 같은 시간을 통해 나의 내면을 다루셨다. 한국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사역하면서 나도 모르게 높아져 있던 마음을 겸손케 하시는 은혜를 누렸다.
미국생활 10년의 마지막 3년 간 나는 다시 한 번 낭떠러지로 나를 밀어내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왜 영광스런 주의 몸 된 교회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 불평도 많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광야 같은 기간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는 욥의 고백처럼, 오히려 우리를 정금처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광야 학교 레슨 기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광야의 헬라어 ‘에레모스’의 의미는 적막하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 물과 식물이 없어 살 수 없는 ’황무지’, 황폐하여 주민이 떠나버린 유기된 땅이다. 한홍은 《거인들의 발자국》에서 이 광야를 자신의 자아가 부서지는 곳, 교만과 독선이 녹아내리는 곳,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한 공격을 당하는 곳, 끝없는 방황 속에 탈진되는 곳,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곳,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의 생각이 전혀 먹히지 않는 곳, 한없이 외롭고 한없이 서러운 곳, 서글픈 마음이 드는 힘든 곳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엘리트는 고급 시설을 갖춘 명문 학교에서 나올지 몰라도 리더는 반드시 광야라는 학교를 통해서 빚어진다고 했다.
사무치게 동감이 되는 말이다. 성경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그 광야학교를 통과했다. 40년 동안 광야에 도피해 있던 모세, 10년 넘게 엔게디 광야를 도망 다닌 다윗, 애굽의 밑바닥을 죄다 경험한 요셉이 그랬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30세까지는 야전경험을 하시지 않았는가?
이 광야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정금같이 단련하셨다. 겸손하게 만드셨다. 전경일은 그의 책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에서 한 산악인 친구가 한 말을 소개했다. “넘어져 봐,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정상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말 그대로 나는 낭떠러지를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새로운 빛을 발견했다. 광야 같은 10년의 끝자락에 허락된 안식월 4달 동안, 나에게 새로운 날개가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깨달음의 산물이 바로 곧 출간될 책 《존재를 살리는 예배의 힘》(가제)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떨어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고통에는 뜻이 있다.” 옥한흠 목사는 《고통에는 뜻이 있다》에서 이를 ‘변장된 축복’이라 말했다. 고난 자체의 문제를 보지 말고 고난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핵심이다. 때때로 우리를 낭떠러지로 몰아가시지만, 결국에는 창공을 날도록 날개를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한다.
– 이유정 목사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좋은씨앗
<주>
1) 오스트리아 여류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은 그의 시 ‘유희는 끝났다’(Das Spiel ist aus)에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표현을 썼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추락하는 사람은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미 그에게 날개가 있었다는 의미로 본다. 이문열은 동명의 제목으로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썼는데 젊은 날의 광기어린 사랑을 그린다. 이 책에서는 ‘추락하는 것에 있는 날개’를 끝 모를 추락, 즉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풀었다. 나는 바하만의 의미로 이 제목을 붙였다.
2) 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푸른숲, 2009) p. 89. 한비야는 그녀의 나이 35세에 배낭하나 달랑 메고 7년간 세계여행을 한 여행가이자 작가이고, 월드비전 긴급 구호팀장으로 뛰기도 한 독특한 분이다.
3) 한비야가 이십대 초반, 자신에게만 모든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았던 시절이 있었단다. 아무리 몸부림치며 노력해도 세상이 합심해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힘들어 하던 시절이 있었단다. 여고시절 영어성경반을 가르치던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격려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던 글, 일기장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맨 앞장에 써 놓았던 시. 이 순간 정신없이 담금질을 당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나누고 싶다고 소개한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