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속도보다 방향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거룩한 갈망을 잃었다. 김남준 목사가 말한 것처럼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들의 마음이 불붙는 진리의 선포를 상실한 강단과 공모하여 민방위 교육 같은 예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예배가 살아 있다면 기독교 인구 천만의 한국사회가 이럴 수가 없다. 크리스천의 삶이 이렇게 무능력할 수가 없다. 물론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복음 전하는 삶은 원래 미움 받는 것이다.

예수는 신자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눅 21:17)이라 말씀하셨고, 바울은 더 나아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고 도전했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그 도를 넘는다. 사회로부터 듣는 개독교 운운은 그 자정능력을 잃은 부패한 교회에 대한 일종의 경고장이다.
 
지금도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회중 예배의 거룩한 경외감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매주 몇 번씩 만나면서 어떻게 그분의 정신과 뜻을 사회에 실천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생으로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신 예수님을 매주 만나는데 어떻게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감화 감동하시는 성령 앞에 어떻게 순종하지 않고 내 기분, 내 감정, 내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존재로 살수 있단 말인가?

신앙의 진정한 힘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서 출발한다. 오늘 교회가 이 예배의 능력을 상실했다. 예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한 번 만나면 해결될 것을 각종 훈련과 세미나, 교육과 학교에서 해결하려니 힘들고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신도 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봉사와 훈련의 짐이 너무 과하다. 
 
그 많은 예배 외에도 서너 가지는 기본인 봉사에 각종 위원회 회의, 행사 준비, 리더 훈련까지 받으니 매 주일마다 초죽음 아닌가? 그러니 막상 세상에 나가서 희생하고, 핍박을 견디고, 원수를 사랑하고, 사단과 싸워야 할 에너지는 바닥이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세상과 동화되는 무능력한 신자로 전락하고 만다. 
왜 오늘 교회가 이처럼 바빠졌는가? 왜 교인들은 목사들이 바빠야 안심하는가? 예수님 시대에는 수천 명, 수만 명씩 모이는 컨퍼런스도 없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12명이면 충분했다. 문제는 균형이 무너졌다. 하나님과의 만남보다 인간의 소통에 무게중심이 옮겨졌다는 뜻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물었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마 22:37~39, 표준새번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다. 십자가에는 두 축이 있다. 수직축은 하나님과의 만남, 수평축은 신자, 비신자, 세상과의 소통을 상징한다. 이 두 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복음 안에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우선순위priority는 예수께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사랑’이다. 
 
이 우선순위에 예배의 본질이 있다. 이를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무너질 때 다른 것도 다 무너진다. 하나님사랑 없이 이웃사랑도 없다. 하나님께 사랑의 힘을 공급 받지 않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위인은 없다. 예배가 죽었을 때 그 외의 봉사와 교육, 훈련과 교제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지엽적인 문제 몇 가지 해결하기 위해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본질과 핵심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삶이 변화되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바쁜 것, 비본질적인 것, 지엽적인 것을 내려놓자.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잠시 미루자. 
 
“빨리 빨리”를 추구하는 한국병을 거절하고 여백의 미에서 흘러나오는 창조적 감수성을 살리자. 속도보다 방향에 목숨 걸자. 교회의 체질을 이벤트, 일 중심에서 예배 중심으로 바꾸자. 예배가 살아나면 모든 것이 살아난다


[안상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서…

eKOSTA로 부터 정기적으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도 한참이 지났다. 이제는 마감의 기한도 한참 넘어버린, 그래서 eKOSTA도 포기한 지금에야 글을 올리면 좀 긍휼히 여김을 받으려나 하는 심정으로 부탁받은 캠퍼스 사역을 글로 옮겨보려 한다. 워낙 글재주도 없고, 사역도 특별한 것이 없는지라 그냥 내가 사역을 시작한 때부터 있었던 일들을 기억나는대로 적어보려 한다. 그래서 혹여나 캠퍼스 사역의 현장에 있는, 아니면 캠퍼스 사역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조금이나마 서로 공감하고 격려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은 내가 국민학교(그때는 그렇게 불렀다. ^^) 6학년때 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6학년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던 겨울 방학에 다니기 시작한 교회는 내게 특별한 경험이었고 그 특별한 경험을 더욱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처음 간 교회 수련회였다. 그 당시 가장 컸던, 그리고 유명했던 금식 기도원에서의 수련회는 내게 충격이었고 늘 선하게만 보이던 교회 여자 선생님의 울부짖던 통곡과 회개의 기도는 내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으며 나로 하여금 두려움 반, 기대반의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했다.

그렇게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3개의 다른 교회를 다녔다. 처음 다녔던 교회에서 두번째 교회로는 어떤 이유였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고 두번째 교회에서 세번째 교회로는 아시는 친척이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을 하시는 바람에 가까이 사는 친척된 도리를 하느라 옮겼었다.

세 교회 모두 소위 동네 교회들이었기에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적응의 과정들을 거칠 수 있었고 또 친척이 담임 목사로 계시던 교회에서는 개척교회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중고등부 회장도 하면서 마치 신앙이 탄탄한 아이처럼 그렇게 착각하며 교회 생활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목사님의 큰 딸이던 누나는 당시 대학 4학년으로 CCC 멤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누나 덕분에 CCC의 행사에도 참석하며(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나름 신앙을 ‘키워’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나 아주 이원론적인 삶을 살았는데(물론 그때는 그런 용어조차도 몰랐지만) 신앙생활이란 주일에만 해당되는 것이고 그 당시 많은 고등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담배를 피워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소한 일탈행위를 일삼으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전기에서 믿었던 대학에 떨어지고 후기를 가야하나, 재수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부모님이 제안하신 신학대학은 정말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에(물론 지금은 아내를 만나게 하시고 내 인생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지만..^^) 입학을 하고야 말았다.

내키지 않은 공부를 하려니 결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당시에는 당구장과 술집이 학교보다도 더 친숙한 곳이었고 신앙이 자라기는 커녕 요즘 용어로 Silent Exodus(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에 빗대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녀들이 졸업과 동시에 교회/신앙도 조용히 떠난다는 것을 표현한 용어)의 무리에 끼고 말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학대학생이라는 내 겉모습은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 주일학교 총무, 성가대원이라는 자리에서 놓아주지 않았고 나 역시 부모님의 입장,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교회를 다녔다.

왜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참을 쓰느냐 하면 당시에 내가 다녔던 교회들, 혹은 나와 같은 신앙의 여정을 겪은 사람들을 찾아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신앙적으로 많이 아프고 고민되고 혼란스러운 것들이 많았는데, 아니 신앙을 넘어서서 인생이란 것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이 많았는데 그 질문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가이드해 줄 사람을 찾질 못했다. 내가 그렇게 아파하는데도, 그래서 방황하면서 대학부 모임에 거의 나가질 않았는데도 중학교때부터 알아오던 교회 선배들, 대학부 전도사님들/목사님들은 왜 내게 대학부 모임에 나오지 않는지, 혹은 따로 만나 어떤 고민이 있는지를 물어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캠퍼스 사역을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분명 캠퍼스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원래 길을 잃은 사람은 스스로 찾기가 힘든 법이다. 길을 잃고 헤매일 때 누군가 ‘내가 그 쪽으로 이미 가봤는데 아니더라. 이 쪽으로 한번 가봐’라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경험한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신앙적으로 그리 뛰어나지도 않고, 몇 마디 어줍잖게 알고 있었던 신앙지식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대학생때의 나처럼 답답해서 미치겠는데, 그래서 누군가에게 내 속이라도 털어놓으면 그걸로 시원하겠는데 그 얘기할 사람이 없어서 조용히 울고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작은 바램을 가지고 캠퍼스 사역을 시작하였다.

2지역 시카고 조장, 코스타 후기 모임

2010 코스타 집회 후 일주일이 지난 7
17일 토요일 오후, 2지역의 시카고 조장, 코디
그리고 멘토 여러분께서 스탠포드 캠퍼스에 모여서 첫 번째 후기 모임을 가졌습니다
. 조장 코스타,
전체 집회 및 세미나를 통해 선포된 말씀을 통해 받은 도전, 조장으로 섬기면서 받은
은혜의 간증
, 그리고 복음, 민족, 땅끝의 주제에 있어 깨달은 바를 풍성히 나누었습니다

두 번째로 코스타에 참석한 이소영 자매님은 조모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조원들 한 명 한 명이 처음부터 맡은 역할이 있었던 것처럼 알맞은 자리를 지켜주었고, 이들과 하나 됨을 통해 조장이었지만 오히려 섬김을 받는 귀한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코스타에 두 번째 참석하지만 처음 조장으로 섬기신 김기은 자매님은 조장들의 사전 온라인 묵상
훈련
, 그리고 이를 통해 부어주셨던 은혜가 힘이 되어 더 의미 있는 코스타였다고 합니다. 조원 중에는 모태신앙을 가지신 지체들이 많았는데, 한 강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생각하게 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조원들이 공감한 큰 도전이었다고 전했습니다
.

함미니 자매님은 코스타 전까지 막연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지만 삶 속에서 일과 교회와 신앙
등의 일면들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고 나눠주었습니다
. 특히 조장 코스타 말씀 중에 받은 구원의 가치를 아느냐라는 질문에 도전되어서 이러한 고민을 풀어가 보고자 하는 갈급함으로
집회를 보내게 되었다며 은혜의 말씀을 회상했습니다
.

기혼자이시지만 집회에는 혼자 참석하신 자매님들의 조를 섬기신 백진영 자매님은, 조원들이 혼자 자녀를 챙기다 보니 모이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임을 소망했던
자매님들
, 그렇게 모였을 때 경험한 풍성한 나눔, 그리고 조원들이 작은
것에 감사했던 마음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습니다
. 또한, 여러 강사님들의 헌신 된 섬김을 보는 것이 은혜가
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

강보미 자매님과 함께 2지역의 코디로 섬기신 허란옥
자매님은 매일 아침 조원들과 함께한
QT 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나누었는데, 마치 그곳에서 천국을 누린 것과 같은 느낌이 전달되었습니다. 특별히 정진호 교수님의 세미나를
통해 복음
, 민족, 땅끝의 주제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큰 그림 속에서
그려볼 수 있었던 것이 아주 유익했다고 합니다
.

이용훈 형제님은 많은 분이, 특히 강사님들께서 매년
반복해서 코스타에 오시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 몇몇 분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코스타를 통해 같은 것을 꿈꾸는 동역자들과의 만남, 함께 섬김이 좋다라는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 은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코스탄으로서
자신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돌아보았습니다
.

기혼조 조장으로 섬기신 이수연 자매님, 박중성 형제님 부부는
처음에 다소 무겁게 안고 갔던 부담이 있었지만, 조원들을 이해하고 섬기고자 하는 소망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심을 느끼게 되어서
, 시간이 갈수록 주님의 인도 하심 안에서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년에 미혼으로
참가한 경험이 있었던 이수연 자매님은
, 기혼 참석자들이 마음에 품고 오시는 기도 제목들은 미혼 참석자들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 조원들이 모두 공감하는 나눔을 통해 말씀 안에서 깊은 대화를 나눈 것이
감사하다고 나눠주었습니다
.

끝으로 95년도 유학 시절에 처음 코스타에 참석하셨던 문상호 멘토님께서는
한국에 있지만 코스타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영광이고 축복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또한, 코스타
25주년의 주제를 생각하며, 90년대에는 민족적인 복음을 정립하고 전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였다면
,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더욱 세계화된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제는 민족을 넘어선,
세계 속의 디아스포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도전을 던지며 마무리하셨습니다.

함께했던 지체들이 공통으로 생각한 것은, 코스타를 통해 얻은 깨달음과 말씀의 도전, 그리고 이 집회에 담겨 있는 복음주의의 정신은
일회성 집회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 앞으로의 삶에서 더욱 충실하게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충성된 종으로서의 삶을 서로에게 격려하는 기도로, 또 다음 달의 모임을
기약하며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인엽]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성경은 ‘혈연’이 아닌 ‘언약의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인지의 여부를 결정했으며, 언약의 땅에서의 생존과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결정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시하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고 그분은 이스라엘이 어떠한 사회가 되길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율법과 언약을 통해 자신이 원하시는 사회의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의 영역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뜻 공평과 정의와 자비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2:3]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예레미야 33:15] 그 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모세오경에 나타난 구약의 율법은 제사법, 십일조법 등 종교적인 법 뿐 아니라, 정결법, 도덕법, 희년법 등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공평과 정의의 원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기25:8-10]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칠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 땅을 쉬게 해야 했고, 칠년이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의 다음해인 오십년 째 해가 종이 해방되고 팔려간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희년입니다. 가나안 입성 시 땅은 지파와 가족 별로 공정히 분배되었는데, 이스라엘은 이방과 달리 땅을 영구히 팔 수 없었고, 팔았더라도 오십년 째 해는 원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습니다. 땅은 인간이 생산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주신 것이며, 그 땅의 분배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희년법은 미국의 경제학자였던 헨리 조지에 의해 토지경제학으로 연구되었는데,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가 발전함에도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는 현상과 이 레위기 말씀을 연구하면서, 땅값의 상승이 이자나 임금의 상승보다 언제나 빠르고, 경제발전으로 창출되는 부가 대부분 지주에게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강화함으로서, 과거 레위기에 나타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고, 경제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고 대천덕 신부님이나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등의 활동으로 많이 알려진 바 있는데,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음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대천덕,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홍성사; 성경적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www.landliberty.org)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언약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엄성과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기 원하셨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산수단, 생존의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그것이 바로 땅이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정치적 자유나 인간의 존엄성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정의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영구히 잃어버리거나, 땅이 일부 부유층에 독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의 빈부격차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서, 생산수단과 생존의 기반을 영구히 잃어버린 백성의 일부는 경제적, 정치적 노예가 되고,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된 소수의 부유층은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는 비극적 상황을 방지하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이러한 희년의 정신은 신약에 들어와, 흔히 예수님의 취임사로 불리는 누가복음 4:18-19에서 ‘은혜의 해’로 언급되고 있고, 예수님 승천 후 성령의 강림을 통한 자원의 희년을 통해 계승됩니다(이 부분은 다음에 올릴 글들을 통해 더 자세히 다뤄질 예정입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이러한 희년의 원리가 실천 될 때 나타나는 평화와 축복을 보여줍니다.


 


[열왕기상4:24-25]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 이쪽에 있는 모든 지역, 곧 딥사에서부터 가사에 이르기까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모든 왕을 다스리며, 주위의 모든 민족과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의 일생 동안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


[미가 4:4]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전도서 9:7-9]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성경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산다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외적의 침략이 없는 것뿐 아니라, 사회 내에서도 경제적 정의와 공평이 이루어져, 구성원들이 자기의 생산 기반을 가지고 안정적 생활과 만족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희년의 정신이 구현된 사회입니다. 극도의 빈곤을 방지하고, 또한 극도의 탐욕을 방지하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필요가 채워지고 그분이 재어주신 구역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상태, 인간답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강력한 설계도를 우리는 율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실패합니다.


 


 [신명기 27:17] ‘이웃의 땅 경계석을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하면, 모든 백성은아멘하여라.


[이사야 5:8]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열왕기상21:17-19] 주께서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 곳으로 내려갔다. 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빼앗기까지 하였느냐? 또 나 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위의 말씀들에서 보듯이
, 이스라엘의 극심한 타락기에는, 사회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장치 없이 노예로 팔리게 되는 악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양극화, 백성의 노예화, 성의 상품화는 토지제도의 문란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예나 오늘이나 기득권층들과 부유층은, 더 많은 부를 갈망했고, 욕심으로 인하여 희년을 지키기 싫어했으며, 오십년이 되어도 점차 땅을 돌려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부의 증대를 통해 정치적 사법적 권력까지 갖게된 이들은 더 큰 욕망을 위해 자신들의 힘으로 공평과 정의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너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는 부의 집중과, 권력의 부패와 타락,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을 보면, 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끊임 없이 반복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가 단순히 돌에 절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상을 통해 제시되는 이방의 사회, 경제적 문화와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바알 숭배 사상은 대토지소유와 부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그리고 아세라 숭배는 끝없는 성적 욕망을 합리화 해주는 것이었습니다(참고도서: 하웃즈바르트,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 IVP).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줄로 재어주신 구역에서 살기 원하셨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통해 만족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와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에 만족치 않고, 더 많은 소유와 토지, 쾌락을 원하였기에 지속적으로 우상숭배와 이방의 시스템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이방의 공주로 시집온 이세벨에 의해 나봇의 포도원이 강탈당하는 사건은, 이스라엘 사회의 타락과 율법의 파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법과 공평을 집행해야 할 정치권력이,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해 하나님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희년의 정신, 공평과 정의를 구현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할 뿐 아니라, 이방을 본받아 극도로 양극화 되어 백성의 일부가 노예화 되고 인권이 무시되며, 개인윤리, 경제적 정의, 사법적 정의, 정치적 정의가 모두 무너지는 타락한 사회로 전락했습니다.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땅에서 뽑아내시며, 땅은 그들을 토하여 냅니다.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이라는 것으로 언약의 땅에서 그들의 생존이 보장 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지 못했습니다. 언약을 무시하고 공평과 정의를 짓밟은 이스라엘이 땅에서 뽑히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였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9:6-7]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사야 1:21-23]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네가 만든 은은 불순물의 찌꺼기뿐이고, 네가 만든 가장 좋은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 있구나. 너의 지도자들은 주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그러므로 주, 곧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


 


     하나님은 망국이 임박한 상태에서도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지 않고 종 된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는 권력층과 가진자들의 악을 질타하십니다(예레미야 34).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 이스라엘에게 처절한 심판이 임합니다. 이스라엘이 벌인 강포와 패역이 심판으로 그치게 되고 그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자, 비로서 그들이 지키지 않았던 희년과 땅의 안식이 이루어 집니다 (역대하 36: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로기 칠십년 이후 그 땅을 회복 시키시고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을,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행위를 통해 계시 하십니다. (32)


 


[예레미야 34:13-17]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 곧 그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며,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온 지 칠 년째가 되거든, 그를 풀어 주어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기면, 그 다음 해에는 네가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서, 너에게서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너희 조상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너희가 비로소 마음을 돌이켜서, 각자 동족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줌으로써,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그것도 나를 섬기는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서 언약까지 맺으며 한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또 돌아서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다. 너희가 각자의 남종과 여종들을 풀어 주어, 그들이 마음대로 자유인이 되게 하였으나, 너희는 다시 그들을 데려다가, 너희의 남종과 여종으로 부리고 있다. 그러므로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두 너희의 친척, 너희의 동포에게 자유를 선언하라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나도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이니, 세상의 모든 민족이 이것을 보고 무서워 떨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예레미야32:14-15]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증서들, 곧 봉인된 매매계약서와 봉인되지 않은 계약서를 받아서, 옹기그릇에 담아 여러 날 동안 보관하여라.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예로 부터 새로운 왕조나 정부는 언제나 토지개혁을 가장 먼저 실시했고, 정권이 망할 때에 이르면, 토지제도가 지극히 문란해져, 소수 귀족층이 땅을 독식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소작인, 노예, 유랑민으로 전락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양극화와 백성의 노예화가 극단화 되면, 민란, 혁명, 전쟁등이 일어나 정권의 교체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타락한 사회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자, 하나님의 심판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힘과 재물이 그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룰 때 찾아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많은 경우 사회의 붕괴와 외적의 침입은, 그 사회 내부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데 실패한 결과입니다. 안보의 문제에 대해, 세상의 권력은 그것이 오직 힘과 재물로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하고, 안보를 위한 안보를 추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회의 안정과 생존은 언약의 순종 , 공평과 정의가 구현된 사회를 만드는가에 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나라를 생각한다면 외부의 위협을 부풀리고, 안보와 번영를 위해 공평과 정의를 희생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여,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를 만들고,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가 우리 사회 속에 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22:3-5]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너희가 이 명령을 철저히 실천하면, 다윗의 보좌에 앉는 왕들이 병거와 군마를 타고, 신하와 백성을 거느리고, 이 왕궁의 대문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맹세하지만, 너희가 이 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바로 이 왕궁은 폐허가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토지정의, 경제정의의 문제는 우리 삶과 신앙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헨리조지가 관찰했듯이 지대가 오르는 속도는 언제나 임금이나 이자의 상승 속도보다 빠르기에,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번 사람들 상당수가 부동산을 통해 불로소득을 쌓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IMF 이후 이러한 경제적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있는데, 2006년 행정 자치부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상위 1% 인구가 전체 토지 57%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2009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이 33.4%에 이르고 실제 비율은 더 높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한 최근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약 54만가구가 월 20만원도 못 벌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의 편중과 중산층의 몰락,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견제장치를 약화시켜 부의 양극화를 가속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소위 카지노 캐피탈리즘이라고 하는 투기형 자본주의가 판을 치면 정당한 방법으로 일해서 돈 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지고 경제활동 전반이 투기화 되어 돈이 돈을 벌고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 됩니다. 현대에는 노예제가 없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양극화가 진행되면, 하위계층은 낮은 임금으로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과 빚을 벗어날 수 없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사채업자나 포주들이 피해자를 빚으로 얽어매어 노예처럼 부리는 것처럼, 개인의 기본적 생존수단이 보장되지 않으면 정치적 자유나 인권이 껍데기만 남아 무의미 해 집니다
     2009년의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사태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약자의 경제권과 인권이 얼마나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임대인이나 피고용인의 권리 뿐 아니라, 토지소유자, 고용인의 권리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의 입장을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법과 공권력은 언제나 가진자의 편이 되기 쉽고, 갈등이 있을 경우 강자에게는 그것이 ‘이익과 손실’의 문제인 반면, 약자에게는 그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는 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공권력으로 무참히 진압하는 사회는 이미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사회도 희년의 정신에 나타난 기본적 경제권이 무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관심있는 분은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를 한번 보시길 추천합니다). 미국 의료보험 시스템의 심각성은 잘 알려져 있어서 메디케어나 메디케이드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중하위 계층에서 의료비용으로 고통받거나 파산하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나고, 최근의 경제위기로 집을 차압 당하고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단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비극을 합리화하기 전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라는 차원에서 현실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영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에서 루즈벨트의 ‘제2권리장전’을 언급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꼽히는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4년 연두교서 연설에서 제2 권리장전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미국 헌법과 권리장전에 명시된 ‘정치적 권리’가 모든 국민의 평등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아래에서 언급되고 있는 ‘경제적 권리’의 이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특정한 경제적 진실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2 권리장전 아래 새로운 안전과 번영의 토대가 신분과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마련될 것입니다그것은 합당한 임금의 일자리를 가질 권리, 적절한 음식과 의복과 즐거움을 누릴 권리, 모든 농민이 작물을 기르고 팔아 그와 가족이 걸맞게 생활을 영위할 권리, 모든 기업인이 사업을 함에 있어 불공정 경쟁과 국내외 독점체제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모든 가정이  적절한 주거를 누릴 권리, 적절한 의료보호와 좋은 건강을 누릴 권리, 노령, 질병, 사고, 실업 등의 경제적 공포로부터 적절히 보호받을 권리, 훌륭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권리, 이 모든 권리들이 말하는 건 사회보장입니다. 우리는 이들 권리의 이행을 통하여 인류 행복의 새로운 목표에 정진해야 합니다.. 자국에서 사회보장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세계 평화도 지속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루즈벨트는 경제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는 정치적 권리가 무의미해지기 쉽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희년의 정신에 상당히 부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네 번째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차대전의 종전을 앞둔채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경제적 권리를 법제화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이후 특히 레이건 대통령 시기를 거치며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미국 사회의 경제권과 약자에 대한 보호는 더욱 더 약화되고, 감세정책으로 대변되는 가진자의 이익에 대한 철저한 옹호가 미국의 정책과 법률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미국이나 한국의 보수 기독교회가 공평과 정의의 원칙 보다는, 현대의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로 복음을 개인적 내세적 의미로 축소하고, 하나님 나라를 오늘 이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닌 죽은 후 가게될 천국으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안에 자본주의 정신과 반공주의(엄밀히 말해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정의에 대한 주장을 무조건 좌파로 매도하는 매카시즘)가 복음보다도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공평과 정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강자의 횡포로 인한 약자의 고통을 향한 하나님의 애통함과 분노를 듣지 못하고 있는 사실 때문입니다.   


[시편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


[예레미야 5:26-29]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미가3:1-3] 그 때에 내가 말하였다.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의 지도자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너희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 너희는 내 백성을 잡아 먹는다.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 살려 달라고 주께 부르짖을 날이 그들에게 온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그렇듯 악을 저질렀으니, 주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아모스 2:6-8]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

[에스겔 22:29-31]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결국 이 시대의 지배적인 우상은 맘몬으로 상징되는 물신주의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우상을 분별하고 비판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맘몬의 포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이 사회에 구현하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우리 사회의 약자들)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물신주의 숭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거짓된 복음을 이야기 하고, 교회가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혈연이 아닌 언약의 준수가 이스라엘 백성의 여부를 결정했듯이, 오늘날도, 기독인의 숫자나 교회의 숫자가 이 사회를 기독교 사회라고 보장해 주지 못하며,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방지해 주지 못합니다. 기독인과 교회의 숫자가 많다고 기독교 국가가 된다거나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를 축복하신다는 생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또 하나의 ‘선민의식’에 불과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가 억압과 고통을 받을 때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 줄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기독인들과 교회는 바른 사회 윤리를 외치고, 불의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희년의 원리를 살펴볼 때에, 우리에게는 ‘자선과 구제’를 통해 약자를 도와야 할 책임과 더불어,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도록 해야할 책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룻기는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자발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구조적인 ‘희년제도와 기업무름제도’가 어떻게 남편을 잃은 과부라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구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음의 말씀들은 먼저 자선과 구제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대변합니다.


레위기19:9-10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신명기24:19-22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말아라. 그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갈 몫이다. 그래야만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너희는 올리브 나무 열매를 딴 뒤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아라.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다. 너희는 포도를 딸 때에도 따고 난 뒤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아라.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이다.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이런 명령을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명기23:24-25 너희가 이웃 사람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지만, 그릇에 담아가면 안 된다. 너희가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


신명기14:28-29 너희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출애굽기23:10-11 “너희는 여섯 해 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서,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 너희의 포도밭과 올리브 밭도 그렇게 해야 한다


    


     위의 레위기19:9-10과 신명기24:19-22에 따르면, 추수할 때 지나치게 철저히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의도적으로 조금씩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는 어느때나 가난하고 굶주린 자가 도둑으로 정죄당하지 않으면서 당장의 허기를 채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신명기 14:28에 따르면, 매 삼년 째에는 십일조를 모아 사회적 약자들다른 직업이 없는 성직자, 외국인, 과부, 고아들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출애굽기23:10-11에 따르면 7년마다 휴경하는 것에는,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들이 거기서 자라난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룻기 2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한 자들에게 남은 곡식을 줍게함으로서, 이러한 자선과 구제의 원리를 삶에서 실천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또한 4장을 보면 희년의 원칙에 따라 기업무름(가난한게 된 사람의 땅이나 자식없이 죽은 사람의 아내를 가까운 친척이 취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유업이 끊어지지 않고 가족들이 빈곤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제도)을 실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와 롯은, 자신의 게으름이 아닌, 자연재해와 남편의 죽음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자칫하면 빈민이나 노예로 전락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이자 여성, 그리고 과부로서, 다중적 약자였던 롯이라는 한 여성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실천되고 있었던 자발적이고 개인적인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적, 제도적인 희년제도에 의해서, 보호받고 구제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 사회속에서도, 기독인들이 개인적으로는 적극적인 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적으로 복지제도와 경제정의, 토지공개념 등의 확립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형성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정의롭고 공평하며 인애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 것을 촉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실천된다면, 보다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고, 우리 사회의 고통과 악이 상당부분 덜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이러한 원칙들을 명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며, 정의와 공평과 인애가 넘치시는 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부디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을 성경에서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유정] 나르시즘 콤플렉스 극복하기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그리스 전설 가운데 자신의 미모에 너무 반한 나머지 매일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결국 못에 빠져 익사하고 마는 나르키소스 여신 이야기가 나온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Alchemist는 나르키소스보다 더 한 강적을 보여준다.

오스카 와일드의 나르키소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숲의 여신들이 호숫가에 왔다. 그들은 호수가 쓰디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대는 왜 울고 있나요?” 여신들이 물었다.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어요.” 호수가 답했다.

“하긴 그렇겠네요. 우리는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에 반해 숲에서 그를 쫓아다녔지만, 사실 그대야말로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호수가 물었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놀란 여신들은 호수의 반문을 의아해 했다.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물결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잖아요!”

호수는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서 울고 있는 거예요.”

우리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세속화의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나르시즘이 주는 마취제에 도취되어 상처 입은 미소를 짓고 있다. 추구하는 가치도 이웃과 함께 하는 삶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가꾸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자기밖에 모르는 어른의 특징을 한 마디로 ‘자기중심성egocentrism이라고 한다. 자기중심성은 아동심리학 용어로서 아이들이 무슨 일이든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향을 일컫는다. 삶의 책임을 지고 인생을 주도적으로 영위해야 할 성인이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 같은 어른으로 사는 모습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 4월, 타이거 우즈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사과하는 장면을 애틀랜타 공항의 TV 스크린에서 보았다. 깜짝 놀랄 섹스 스캔들로 때문에 세상을 실망시켰던 그가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자리였다. 그는 부적절하고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고백했다.

그때 내 귀를 사로잡은 한마디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준 사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그 대신 나 자신만을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 충분히 헌신했고, 이루었으며, 그래서 그 만큼 내가 즐길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의 위험성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인기로 인해 얻은 돈과 명예로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의 육체적인 향락에 쏟아 부은 것이다. 자기가 돌보아야 할 아내와 가족, 후원자, 주니어 하이 골프 학교, 친구들, 업계 종사자들을 생각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이기적인 삶인가? 이것이 바로 세상문화가 “자신을 기쁘게 하라”고 가르치는 삶의 결과 아닌가? 현대인은 언뜻 보면 정상인 것 같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온통 자기 관심사에 빠져있다. 이것이 바로 ‘나르시즘’Narcissism 콤플렉스에 절어있는 21세기 문화의 단면이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였던 프리츠 쿵켈은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병든 4가지 비극적 자아중 하나를 ‘스타형 이상성격’이라 했다. 이들은 어떠한 대화나 만남이든지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관심을 받고 찬사를 끌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예배는 이처럼 세속화에 물든 이기적인 본성, 메뚜기 신드롬, 나르시즘, 자아도취, 자기중심적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고 있거나, 무력하게 무릎 꿇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력 있고, 매력적이며 패기에 찬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도전하는 현장이다. 그 결과 자기중심성에 물든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 나라의 건강하고 강인한 영적 존재로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돈 많이 벌어 성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역전은 바로 자기중심적 자아가 이타적인 희생적 자아로 변화되는 것이다.

– 이유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