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닿은 사다리] 하나님의 뜻 (3)

올 봄에 내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과 소명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고민하며 여러 책들을 읽던 중에 <하나님의 뜻: 오늘 여기서 그분을 위해> 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소명에 대한 책을 더 구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10년 전에 씌여진 책인데, 왜 이제서야 내 손에 들어왔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문제에 대해 속시원하게 답해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좀 찬찬히,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했지만, 구체적인 답을 주시지 않아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저자는 책의 2부에서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른 책들에 비해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한 내용들이 많아서 구체적으로 와 닿는 점이 좋았다. 저자는 소명이라는 화두를 꺼내면서 가장 먼저 직업과 소명을 구분하고 있다. 




첫째, 소명은 직업을 초월한다. …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차적 소명은 능력과 지위와 기회와 배경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모든 존재와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그분을 섬기는 삶이며 특별한 헌신과 에너지와 방향으로 투자되는 것이다.”…
둘째, 소명이 결코 직업으로 격하돼서는 안되지만 종종 소명에는 직업이 사용된다. 인근 의대 레지던트 프로그램에서 병리학을 가르치는 친구가 있다. 그는 직업 의사지만 그의 소명은 직업보다 크다. 의사라는 직업을 사용해 그는 세상 의사들이 대부분 간과하는 목표들을 이루고 있다. …

셋째, 소명은 전통적 직업이 가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를 보낼 수 있다. 최근 나는 친자녀 여섯에 입양 자녀 열 네명, 도합 스무 명의 자녀를 둔 분을 만났다. 집안이 난장판이 돼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기는 커녕 그녀의 말에는 침착함과 기쁨과 활력이 배어있다. 무대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무희처럼 말이다. 스무 자녀의 어머니 노릇은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그녀에겐 전통적 의미의 직업은 없었음에도 자신의 소명을 이루고 있었다.

끝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소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그 단어의 사용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의 소명은 단일 직무인 경우가 드물다. 그 직무가 수사의 직분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의 소명-경우에 따라 단수든 복수든-을 발견하는 길과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이루는 길은 깔끔하고 질서정연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 여정이 시작부터 끝까지 일직선으로 쭉 뻗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pp. 90-92)


그리고나서도 부족함이 느껴졌던지, 저자는 다시 독자들이 소명과 직업을 분명히 구분하도록 돕기 위해 직업에 대해서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모든 소명이 다 구체적 직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자신의 가장 깊은 관심이나 동기와 별 상관없는데도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일하는 경우가 있다. … 보람이나 소명의식을 별로 못 느끼는 일을 평생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먹여 살릴 가족들과 다달이 갚아야 할 돈이 있기 때문이다. …

둘째, 때로는 직업이 오히려 소명의 발견이나 추구를 방해할 수 있다. … 직업은 협력보다는 경쟁을, 나눔보다는 부를, 봉사보다는 권력을, 진실보다는 이념을 강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직업은 사리사욕의 수단이 될 수 있다. …

셋째, 어떤 소명은 결코 공식적 직업이 될 수 없다. 여기에 해당되는 이들은 때로 자신이 ‘한지로 밀려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현대 사회가 직업 특히 그 직업이 가져다주는 권력과 지위와 수입에 집착하다 보니 무직을 택하는 이들은 그만 주변으로 밀려나고 만다. (pp.98-101)


저자는 소명이 직업 이상이며 우리의 존재와 세계관과 인생 목표의 연장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명과 직업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인간은 직업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소명도 직업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을 규정하고 그 인간에게 소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럴 때 인간은 자유로이 직업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룰 수 있다. (p. 104)

저자가 말하는 소명은 이런 것이다.

소명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뭔가 긍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그분을 높인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구원하려 일하고 계시고, 언젠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에 그 나라를 세우실 때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 소명이란 유독 종교적 직업을 가진 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 이 원리는 그리스도인, 불신자 할 것 없이 의, 진, 선, 미를 창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분은 세상을 위해 세상 속에서 유익한 일을 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심으로써 그 사랑을 표현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일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 – 미를 창출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의미있는 일을 제공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깨어진 세상을 고치는 것-을 이루어 가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는 소명의 자리는 독특하다. 소명이 있는 이들은 더 높은 목표 의식을 갖고 더 큰 그림을 본다. (pp.102-103)

저자가 제안하는 대로 직업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세상의 필요를 보는 내 마음의 눈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갈 때 나의 소명이 발견되어지리라 기대한다. 소명에 이르는 여정 자체가 소명의 필수 부분이라고 강조한 저자 덕분에 나는 용기와 위로를 많이 얻었다.



5장에서 소명을 직업으로부터 구별해내는 데 애썼던 저자는 6장에서 소명을 발견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소명을 발견하는 것을 여정에 비유한다.

길가며 만나는 경험들의 효과가 누적되어 우리를 장래 일에 준비시켜 준다. .. 우리가 삶의 소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경험 자체를 통해서다. … 시도와 실험과 실행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 경험은 우리를 가르치고 준비시키고 단련시켜 다가올 미래를 잘 맞이하게 해준다. 이 현 순간에 하나님께 귀기울일 때 그 영광스런 발견의 과정은 시작된다. 우리는 여정 중에 배워서 미래를 맞을 준비가 되어 간다. 성품과 신앙이 자라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며, 전체적으로 성숙해진다. 그러다 때가 되면 소명의식이 싹튼다. (p. 110)


…우리는 10년 전에 미리 인생을 계획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순간 당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소명을 발견해 간다. 산길을 오르는 등산객에게 점차 경치가 펼쳐지듯, 시간이 가면서 우리의 소명의식은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앞에 뻗은 등산로를 단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로는 다음 발을 내딛을 만큼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 틀림없이 도중에 아리송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런 상황에 부딪칠 것이다. 그러나 계속 가야한다. 계속 가면서 계속 찾아야 한다. (pp.114-117)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 중에 많은 시도와 숱한 실험들을 해보면서 실패도 하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상황에도 처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런 소명찾기의 일부이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라고, 소명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해주는 저자의 격려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저자는 그 다음엔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소명을 분별함에 있어 우리가 귀기울여할 하나님의 음성이 내면의 동기, 재능, 삶의 경험, 기회, 공동체, 마음의 기쁨을 통해 들려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종의 신호들이지 공식처럼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요히 앉아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길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소명에 대해 또 다른 별개의 장을 할애하여 우리 인생에 단 하나의 소명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명이 있기 때문에 그 소명들 간의 충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얘기해주고 있다. 저자는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이 장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단 하나뿐이고, 그것은 그의 직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아이를 돌보는 책임은 아내에게 있다고 여겼고 아내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세 아이와 함께 남겨진 그는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야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야심이 많았던 자신이 차츰 변하여 이젠 하루종일 아이들과 가정을 마음에 품고 다니며 아이들 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아버지가 되기까지 그 바탕에는 실패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했던 기도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발견하면서 그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그는 현재 교수이면서 작가이기 때문에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정주부의 소명까지 감당하는 것이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분주함과 압박 속에서도 소명의 복수성에 잘 대처하기 위해 단순성, 균형, 유연성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래서, 그는 첫째 것을 첫째로 삼고 인생에 하나의 최고의 관심사-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를 잃지 말고 그 하나의 초점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면서 내면의 단순성을 연습하고 실천할 것을 권하고 있다. 또,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느껴질 때, 가장 중요한 일을 구분해내고 자신이 가장 전념하는 것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는 연습에 힘씀으로써 선한 우선순위에 바탕을 둔 삶의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균형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끝으로, 자신의 통제권 밖의 상황에 대해 유연하고 홀가분한 자세로 임할 것을 충고하고 있다. 인생이 우리가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 실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바라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이다.

그가 소명의 복수성으로 인한 어느 정도의 긴장과 충돌이 오히려 건강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인상깊었다. 그때 야기되는 불안이 우리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겸손한 종과 청지기의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끝)

[하늘에 닿은 사다리] 하나님의 뜻 (1)

[하늘에 닿은 사다리] 하나님의 뜻 (2)

[이유정] 개독교를 위한 변명

브라질에서 음악으로 복음을 전하는 김민주 선교사가 최근 내 페이스북(facebook.com/moreahead) 남긴 글을 소개한다.

“한국에 사역 갔을 때 느꼈던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비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존중과 섬김, 그들의 얘기를 듣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그들이 앉을만한 의자는 없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에 열심인 한국 교회. ‘우리 안에 들어오고 싶어? 그러면 우리가 주는 옷을 입고, 우리가 하는 말을 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면서 들어와’ 이런 식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정말 전도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자신들의 “문화(복음이 아닌)”를 지키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도는 강조하지만 실재로 비교인들이 앉을만한 의자를 마련하지 않는 자만… 부끄럽지만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실체가 아닐까? 불과 90년 전 한국 사회는 인구의 5%도 안 되는 기독교인들이 존경받는 리더십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인구 25%가 넘는 사회에서 오히려 그 리더십이 땅에 떨어졌다. 기독교도서 베스트셀러는 당연히 크리스천들끼리만 이해하고, 크리스천 저자들도 천만 크리스천을 타깃으로 책을 쓰는 것이 당연한 문화이다.

우리끼리 만든 게토 속에서 영적 슈퍼맨을 세워놓고 우리끼리 존경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끼리 축적한 재산으로 거대한 교회 건축물들을 구축하고 있다.

건강한 대형교회들을 무조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중산층이 무너진 한국사회의 기저인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종교적인 부, 그 안에서 간간이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결과물들은 세상의 도덕기준보다 못하며, 차마 코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위선의 악취가 진동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결국 세상은 우리들만의 언어와 우리 끼리만의 은혜로 만들어진 교회라는 도그마를 점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어하는 경향이 짙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일이 아니다. 가장 최근 종교기관의 여론조사에서 미국 성인의 3분의 2가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가지 않는 미국 성인들의 72%가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답변한 반면, “교회는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답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참 모습이 결코 아니다. 그저 일그러진 교회의 일면일 뿐이다.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고, 창피스럽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직면하려고 한다. 왜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고 ‘이곳이 좋사오니’(누가복음 9:33) 의식 속에 게토 화 되었다. 기독교의 본질인 희생적인 사랑이 그 게토 안에 갇혀 썩어 문드러져 고름이 흐르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가 트렌드가 되면서 한 사람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배출하기보다 처치고어(church goer)만 양산하고 있다.

《개독교를 위한 변명》이란 책을 쓴 숭실대 기독교학과 동문들은 말한다. “한국교회는 세상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습니다. 교단끼리도 서로 귀를 막고 삽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사랑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꼬집기 위해 개독교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개독교를 열린 개(開)독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오늘 한국의 수많은 석학들도 감히 다루지 못하는 교회의 치부에 대해 저 변방의 이름 없는 젊은이들이 솔직한 고백을 토해냈다. 세속화, 대형화, 물량주의, 권력욕, 파벌, 고속성장, 성 스캔들의 유혹에 무릎 꿇은 한국교회는 다음세대의 주역인 이 젊은이들의 정직한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개(開)독교가 되기 위해 자성하고 사회의 질타소리를 겸허하게 들어야 한다.

무릎 꿇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운동을 시작하자.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운동을 시작하자. 무너진 교회성벽을 다시 일으키는 재건운동을 시작하자. 훼파된 예배를 살리는 예배회복운동을 일으키자. 한국교계는 물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십자가 정신으로 희생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진정한 부흥운동을 시작할 때이다.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최주희] 성 관리와 돈 관리

이혼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이혼 사유로는 많은 사람들이 ‘성격 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 이유는 따로 있다. 배우자의 부정행위, 경제적인 문제, 성격차이로 표현되는 대화단절 및 거짓말 등 이다. 사실 우리 주변을 돌아다보면 이혼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외도, 낭비벽, 너무나 많은 부채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이 많이 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다. 믿는 가정이나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성가대원 끼리 눈이 맞아서, 혹은 목사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시중들다시피 하는 여성도와 목회자가, 대학부 담당 장로와 대학생이 불륜관계에 있기도 하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규모가 없이 새로 나온 기계는 일단 사고 보고, 타고 다니는 차가 고장 나지 않았음에도 몇 년 되면 다른 차로 바꾼다. 자녀 사교육비 과다 지출, 분수에 넘는 비싼 옷, 습관적인 외식도 사소한 것 같지만 가정 경제를 뒤흔드는 요인들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사랑과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행복을 깨뜨리는 요인들을 살펴보고 그러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남편과 아내가 아닌 다른 이성과 불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도덕성을 지키며 오해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성(性) 관리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성과 단 둘이 있는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직장에서 야근 한다며 이성과 단 둘이 있거나, ride 를 준다고 이성끼리 차 안에 단 둘이 있지 않는다.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 가 반문할지 모르나 이는 회색지대여서, 종이 한 장 차이로 ‘죄’가운데 빠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빌미가 된다. 실제로 이성끼리 단 둘이 있는 환경에 자주 접하게 되면 정들게 되어 있다. 실례로, B 집사님이 새벽에 교통사고 났는데 그 옆에 여직원이 타고 있음이 발견되었고 불륜이 들통 나 회사를 사직하였다. 반면 미국에서 훌륭하게 목회하고 계시는 A 목사님은 “혹 비가 올 때 내가 빈차로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우리 교회 여자 성도를 만나도 태워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단에서 선포하셨다고 한다.

둘째, 이성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 성도의 교제 혹은 친밀감이라는 명분하에 이루어지는 도에 넘는 개인적인 친절이나 관심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위에 언급된 교회 안에서의 다양한 불륜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여성들이 과다한 노출패션을 삼가야 한다. 패션은 자신의 취향과 유행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 특히 남성들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성충동을 느끼게 하여 어려움을 준다면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몸가짐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가슴이 많이 드러나도록 패인 옷, 엉덩이가 보일 듯 말 듯 한 짧은 치마, 진한 향수, 야한 눈짓과 몸짓은 남성들이 유혹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 아동성폭력은 범죄자들에게 전자 팔찌와 발찌를 채움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동성범죄를 일으키는 사회적 요인 중 중요한 것이 바로 여성들의 노출패션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다. 과다 노출 패션으로 인해 받은 성적 자극을 해소할 길이 없을 때 연약하고 힘없는 아이들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장과 거리 그리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취향과 만족만 생각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여성으로 인해 유혹을 느끼는 남성들이 불륜행각을 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편과 아내는 반려자의 성적 필요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적극적인 태도로 아름답고 즐거운 성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기 기분에 따라서, 반려자가 잘해줄 때만 상 주듯이, 귀찮지만 할 수 없이 해야 하니까 반응해서는 안 된다. 부부 안에서야 말로 최대한 야하고 매력적으로 꾸며야 한다. 은은한 향수와 sexy한 속옷, 다양한 방법, 구체적이고도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은 부부간의 사랑과 성의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도울 것이다.

성 관리 뿐 아니라 돈 관리도 부부의 사랑과 가정을 지키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돈 관리를 위해서는 다음의 원칙을 가지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자족과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딤전6:6-10). 안타깝게도 수입이 적은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주어진 재정에 대해 감사하고 자족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좀 더’라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끝도 없는 욕심 때문이 아닐까? 자족과 감사의 마음은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

둘째, 분수에 맞는 생활 규모를 가진다. 수입이 적으면 우선순위에 따라 알뜰하게 절약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원하는 것을 구입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필요하지만 덜 좋은 것을 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중고차면 어떻고, 냉장고가 좀 적은 용량의 크기면 어떤가? 비싼 옷이 아니어도 내 스타일에 맞는 깔끔한 것이면 어떤가?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셋째, 만약 지금의 수입이 생활하는데 어려울 만큼 부족하면 일을 더 해야 한다. 계속 불평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속상해 하는 것보다는 일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고 생산적이다. 시간 당 액수가 적다고 우습게 봐서도 안 된다. 적은 액수라도 노력하고 땀 흘려 번 돈은 가장 신성하고 보람 있는 일이다.

넷째, 한 단계 낮추는 삶을 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자신들만 돈 문제 안 일으키고 잘 살면 되는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우리는 물질을 사람들과 나누며 사랑의 섬김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십일조만 했다고 우리의 몫을 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구약에 나타난 여러 종류의 십일조를 합치면 결국 십의 3조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다. 가난하고 어려움을 겪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려면 돈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수준대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 단계 낮추는 삶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 우리 부부는 한심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바로 우리가 가장 잘 살게 될 때의 상한선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 상한선은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수준으로 볼 때 충분히 그렇게 살아도 되는 수준에서 한 단계 낮추는 것으로 했다. 결론은 30여 평의 아파트, 중고차로 소형, 수입의 30%는 헌금을 비롯해 선교 및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에 온지 18년째 되었다. 집은 32평 아파트, 차는 중고 소형차이었는데 3년 전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서 대전에서 고속도로를 오가는 기회가 많아 중고 중형차를 사용한다. 수입의 30%는 아직은 지켜지고 있으나 아들이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학비와 생활 및 주거비가 만만치 않아 힘이 든다. 용돈은 아들이 아르바이트하며 스스로 번다고 해도 버겁다. 어쩌면 아들이 공부하는 동안에는 잘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삶의 절제를 가져다주는 돈에 대한 우리의 원칙이고, 그 원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대로 순종하며 살고픈 우리의 마음이다. 어떤 분들은 ‘당신들은 돈을 잘 버니까?’라고 하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연습을 가난할 때부터 해왔다. 2만원 있을 때 만원을 어려운 형제 성경책에 몰래 넣기도 하고, 유학 시 한 달에 식생활비로 120$ 지출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위해 매달 60$을 지출했다. 돈이 없을 때, 가난할 때가 나눔의 연습을 할 절호의 기회이다.

마지막으로 재산 증식을 위해 불법이나 무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주변을 보면 남들 다 하기에, 아니면 법을 지키다가는 너무 세금이 많아서 편법과 불법을 자행한다고들 말한다. 또한 욕심을 내어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 오히려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이 본다. 특별히 부동산이나 주식거래가 그렇다. 이것은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가정 경제의 뿌리를 크게 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본능과 욕구를 철저히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이는 가정을 지키기 어렵다. 그래서 성 관리와 돈 관리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의 성 관리와 돈 관리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백은실] 소그룹의 힘 2: 학습효과

지금부터 30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사춘기를 보낸 탓일까. 그 시절 나는 학교에 가고 싶은 날보다 가기 싫은 날이 더 많았다.

모든 과목이 힘들었지만, 체육시간이 내게는 가장 끔찍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미국 학교에서는 체육시간이 실기와 필기로 나뉘어 있었다. 한 운동종목의 규칙과 경기방법을 강의하고 시험을 본 후, 남은 시간에 실기를 하는 것이다. 체육시간에 A학점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기억하지만, 필기시험만은 항상 100점을 받았다. 규칙과 방법을 잘 이해해 시험은 잘 봤지만, 실제로 경기를 할 때는 늘 실수를 해 사고를 치곤 했다. 농구시간에 공을 잡아서 패스를 해야 하는데, 공을 뺏기지 않으려고 계속 들고 뛰다가 제일 키 큰 남학생을 골대로 잘못 보고 점프해서 공을 그 남학생 코에다 박아 코피가 터지게 만드는가 하면, 미식축구 시간에는 공을 받아서 눈을 질끈 감고 뛰어야 할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뛰어서 모든 아이가 배를 잡고 구르게 하기도 했다. 수영시간에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한참 잘 가다가 물 속에서 기절해 선생님들을 다 물 속에 뛰어들게 만들기도 했다. 이론을 아는 것은 실제로 경험하여 알 때까지 배움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부터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듯하다.

Tell me and I will forget, show me and I will remember. Involve me and I will learn.
(말해주는 건 잊게 되고, 보여주는 것은 기억하지만, 직접 참여하면 배우게 된다.)

미국에 살면서 자주 만나는 말인데 생각할수록 만고의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에드거 데일(Edgar Dale)의 『효과적인 배움』이라는 연구 조사서에 따르면, 배우는 방법에 따라 그 내용을 얼마나 잘 기억하는지가 달라진다고 한다. 강의를 들었을 때는 5%를 기억하고, 혼자 읽었을 때는 10%를 기억한다. 그리고 시청각 교육을 통해서는 20%를 기억하고, 누군가 시범을 보여주었을 때는 30%를 기억한다고 한다. 그런데 토론에 참여했을 때는 50% 이상을 기억하고, 실제로 배운 것을 자신에게 적용했을 때는 75% 이상을 기억하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나누었을 때, 그러니까 배움의 적용을 바로 실생활에 응용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었을 때는 90% 이상을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나눔이 살아 있는 소그룹에서의 배움은 확실하고 효율적인 교육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소그룹에서 확실한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정확한 목적과 건강한 나눔을 인도할 수 있는 훈련된 인도자와 확실한 교육자료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소그룹 모임은 중요한 두 가지가 갖추어진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그룹 사역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인도자가 잘 준비되지 않았을 때이다. 소그룹 사역은 인도자에 그 사역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준비되고 훈련된 인도자는 배움이 있는 살아 있는 소그룹을 위해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교회마다 소그룹 사역을 시작하면서 많은 목사님이 평신도들을 소그룹 리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다. 여러 교회에서 소그룹 인도자 훈련을 진행하면서 평신도 리더들의 고충을 들어보면, 거의 비슷한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사역을 향한 열정은 있지만, 구체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막상 실제 소그룹 상황에서 인도자로서 알아야 할 방법들을 모르다 보니 점점 지치게 되어 기쁨으로 시작한 사역이 부담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교회들을 방문해 보면 너무 많은 사역을 맡기지도 않을 뿐 아니라, 꼭 필요한 몇 가지 사역만 하더라도 그 사역을 잘할 수 있도록 평신도 사역자들을 위한 정기적이고 구체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평신도 사역자를 자신이 하는 일에 기쁨과 의미를 느끼는 전문적인 사역자로 양성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열정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소그룹 사역자들도 나눔을 잘 인도하여 은혜로운 나눔을 통한 배움이 살아 있는 소그룹으로 인도할 수 있는 기술(SKILL)이 부족한 것을 가장 힘들어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소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어떤 기술이든 기술은 개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래되고 익숙한 방법들을 내려놓고 새롭고 더욱 효과적인 방법을 향해 늘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방법들을 익히기 위해 스스로 도전하고 노력하면, 어느 방면에서든 전문가적인 기술을 가질 수 있다.

26년간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해 왔지만 15여 년 전, 성경발견학습법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만나기 전에는 소그룹 인도를 강의식으로만 해왔고,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사님이신 아버지의 서재에는 많은 주석서가 있었고, 매주일 주제별 성경교재를 가지고 여러 주석들을 동원에서 좋은 강의 하나씩을 준비해 가면 그룹원들로부터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고, 그 칭찬이 좋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강의하는 것이 좋아서였는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미리 공부해서 전달하는 소그룹 인도자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 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리더십 개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을 때이다. 나와 오랫동안 함께 소그룹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소그룹의 인원이 너무 많아져서 그룹을 나누어 인도자를 세우려고 하면 아무도 인도자로 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처럼 주석이나 참고자료가 풍성하지도 않았고, 또 나처럼 아는 것을 쉽게 전달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데만 익숙했던 그들은 스스로 먹고 또 다른 사람들을 먹여주는 일 앞에서 도무지 자신이 없어했고 쥐어주는 숟가락을 자꾸만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커피브레이크 인도자 훈련 워크숍에서 성경발견학습(Discover Bible Method)이라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 방법은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보이지 않던 세계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눈과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는 새로운 귀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주입해 주는 강의를 편하게 들어왔던 소그룹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왜냐면 성경발견학습은 강의식으로 인도하는, 소그룹원들이 인도자 혼자 뛰는 운동경기를 관람자로 앉아서 구경만 하는 방법이 아니라, 소그룹원들이 모두 함께 직접 경기에 참여하여 뛰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성경발견학습이란 소그룹의 성격에 맞는 열린 질문(개방형 질문)으로 인도하는 귀납적 학습법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도입과 관찰, 해석과 적용의 점진적 질문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학습법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는 질문이다. 성경 본문을 위한 귀납적 질문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한국에서 여러 기관이 이미 사용하고 있지만, 성경발견학습과 기존의 귀납적 공부와의 차이는 맞춤형 질문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미 교재에 다 나와 있는 질문이 아니라, 뼈대가 되는 질문이 어느 정도 나와 있는 교재를 가지고 그룹의 신앙 정도와 성격에 맞는 보충질문을 인도자가 만들어 쉽고 마음에 와닿는 진행으로 인도하는 것이 성경발견학습이다. 보충질문들은 도입질문과 관찰질문, 해석질문과 적용질문들로 본문 속에서 만들어 내고, 인도자는 강의를 하지 않고 그 질문들을 통해서 소그룹원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 그 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이 소그룹의 학습효과를 극대화하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일 수 있는 까닭은 질문을 받고 스스로 고민하고 애써서 발견한 진리는 강요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강의식 인도를 하면서도 가끔 질문을 던지곤 했지만, 질문 만들기를 배우고 나서 뒤돌아보니 나의 질문들은 대부분 주입식 질문이었고 폐쇄형 질문이었다. 좋은 질문 만들기 강의를 통해 확실한 답을 얻은 나는 새로 배운 발견학습방법을 소그룹에게 바로 적용해 보았다. 열심히 강의 준비를 하던 시간에 머리를 싸매고 질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 질문들을 소그룹에 던져 보았다. 그 후 내가 인도하고 있던 소그룹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맛보기 시작했다. 소그룹원들이 말씀을 그들의 삶에 적용하고 주중에도 전화를 걸어 말씀이 자신들에게 준 놀라운 발견들을 나누는 것을 보면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를 해결한 듯한 기쁨이 찾아왔다. 모일 때마다 풍성한 나눔의 장이 열렸고, 말씀과의 깊은 만남은 사람들을 실의와 절망에서 일으키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자 새로운 리더들이 기쁨으로 헌신했고, 많은 소그룹이 교회 안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교회에 어려운 상황이 닥쳐서 담임목사님이 6개월도 넘게 공석일 때가 있었다. 이민 교회 현실에서 상당히 이동이 많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한 명의 교인도 요동하지 않고 교회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후원해 주며 말씀을 깊이 배우고 나눌 수 있었던 소그룹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소그룹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십수 년을 구체적인 교육 없이 강의식 인도자로 살아왔던 나는, 성경발견학습으로 인도하면서 건강한 나눔이 얼마나 엄청난 학습효과를 주는지 현장에서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다. 힘든 노력과 의지가 뒤따라야 했지만 성경발견학습법을 열심히 익히며 맞춤형 질문으로 인도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하던 중, 전혀 기대하지 못한 때에 미국 교단의 부름으로 소그룹 사역자들을 훈련하는 강사로 서게 되었다.

소그룹 인도자 워크숍에서는 성경발견학습과 소그룹의 원리, 상황 대처법, 소그룹을 통한 전도와 실습 등을 훈련하게 되는데, 참석자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바로 성경발견학습이다. 이 학습법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 만들기’를 학습하고 직접 질문 만들기를 해보게 하고, 만든 질문들을 수정해 드리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어문화가 질문보다는 주입식이기 때문에 질문 만들기를 힘들어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다. 소그룹 모임을 시작할 때는 어색함과 침묵을 날리기 위한 도입질문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적인 질문보다는 일반적인 질문, 심오한 질문보다는 재미있는 질문, 성경적인 지식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질문이면서도 오늘 나눌 말씀과 연관될 수 있는 질문이 좋은 도입질문이다. 도입질문으로 나눔을 시작하고 본문을 합독한 후, 관찰질문과 해석질문으로 들어간다. 관찰질문은 본문 속에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이고, 해석질문은 답이 본문에 그대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본문을 근거로 관찰한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는 성경발견학습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적용질문으로 하는데, 적용질문을 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를 질문하여 다른 사람이나 교회를 비판하는 적용보다는 스스로에게 주시는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과 과거 상황에서의 적용이 아니라 미래에 다가오는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지를 질문하여 미래지향적인 답을 나눌 수 있도록 한다.

이 학습법은 그 후 15여 년이 넘게 맡아 인도해 온 모든 소그룹 사역을 더욱 풍성하게 했고, 귀한 분들과 나눈 아름다운 시간들과 말씀들은 내게 생명과 같은 배움과 축복을 주었다. 수없는 감동의 나눔들이 기억 속에 있지만, 여호수아서를 공부할 때 소그룹에서 나눈 것들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 싶다.

 “좋은 리더가 떠나고 새 리더가 섰을 때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라는 도입질문으로 시작했더니 진지하고 재미있게 한국에 살 때 대통령이 바뀌던 때의 심정부터 교회에서 목사님이 바뀔 때의 느낌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함께 여호수아를 합독하며 관찰질문과 해석질문들을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모두에게 생명의 말씀을 남겨 준 발견질문이 있었다.

“3절 말씀에서 어떤 땅을 다 주신다고 하셨나요? ”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주신다고 하시네요.”

해석질문으로 “그때 당시 누가 땅을 발바닥으로 밟고 다녔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을까요?”라고 질문하자, 모든 소그룹원이 아마 노예들, 종들이었을 거라고 대답하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 왕과 같은 자세로 그 땅을 정복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수고하고 섬기고 순종하며 그 땅에 나아가기를 원하셔서 그렇게 명하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나요?”라는 적용질문이 던져지자 많은 소그룹원이 편하게 어떤 일을 이루어 보려고 기도하고 있던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이제는 자신들이 맡은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갈 때, 왕같이 군림하고 편안히 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수고하고 더 노력하며 섬기는 자세로 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신다고 나누어 주셨다. 그 다음주에 세미나 인도를 위해 한국을 나왔을 때 짧은 기간 안에 여러 도시와 교회를 다니며 긴 일정을 소화해야 했을 때, 좀 쉽고 편하게 사역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올 때마다 그 때 주신 말씀이 생명의 말씀으로 나의 심령을 바로잡아 주었다.

소그룹은 학습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많은 여건을 갖춘 곳이다. 후원과 소속감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말씀을 앞에 두고 깊이 경청하며, 또 좋은 질문들을 서로에게 던져서 고민하고 생각하면, 그 시간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각자에게 꼭 필요한 적용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신다. 소그룹은 참석자들로 하여금 대화의 기술과 발표력, 관계 형성의 중요한 윈리들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원리들은 삶의 모든 분야에서 유용하게 활용되는 중요한 기술이다. 특히 질문 대화법은 일상 생활에서 우리에게 풍성한 대화의 삶을 여는 소중한 재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