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아] 치유의 길(용서) (4) – “기억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았는지입니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핵심으로 들어가서 여태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리를  가르쳐 드렸는데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상대편이 나에게 상처준 것을 생각하면 절대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용서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았는지입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를 보면 예수님의 아픈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offend한 거 아십니까? 우리가 모든  죄를 졌을 때 그 모든 offend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용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기억한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은 자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기억 안하고 용서하려고 한다면 참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김철수 선교사님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얼마나 큰 대가을 치르셨나요? ‘Passion of Christ’에서 그려진 하나님의 모습은 그 육체의 고통을 잘 표현해 줍니다. 육체의 고통도 너무 아프지만 제가 더 가슴이 아픈 것은 하나님이 외로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한번도 외로운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지만 항상 예수님이 여러분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둘째치고 하나님께서는 유아독존으로 유일하게 혼자가 되어보신 분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완전하게 separation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보신 분은 어떤 기분인지 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게 일시적이라도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독생자를 완벽하게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내 상처가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에 절대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용서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대가를 치르시고 여러분을 용서하셨는지 먼저 묵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용서의 첫번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계가 없으면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할 수 있듯이 용서를 받아본 것이 머리에만 있고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 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사랑과 용서를 기억하시면서 용서의 단계를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안되면 용서가 여러분에게 너무 큰 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지,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괴로움을 주었던 존재였는 지 기억하시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단계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달은 후 해야할 것은 상대편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cool’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적으십시오. 상대방이 나에게 얼마나 망신을 주었는지, 자매 같은 경우에는 사랑한다고 해서 순결을 주었는데 어떻게 날 버릴  수 있는지. 그 모든 것을 다 적으세요. 그렇게 아픈 것까지 종이로 다 적어서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상처가 다 빛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상처가 치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픈 감정들을 다 적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raw feeling’을 전부 다 적으시고, 그것을 잘 소각하고 버리시길 바랍니다. 정말로 여러분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 지를 정확하게 드러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하면 많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모든 쓴 뿌리들을 하나님 앞에 다 적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죄를 짓는 것이 무서운 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에게 상처를 주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raw feeling’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이 일이 정말 힘들지만 우리가 용서의 원어에 담긴 의미처럼, 탕감해주고, 던져주고,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만큼 아팠으니 나에게 보복의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이 더 좋은 ‘just maker’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게 상대편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저지른 행동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알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 모습을 따르기 위해서 용서를 실천하시는 것입니다. 상대편의 죄를 탕감해주고 복수할 권한을 포기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수할 권한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나에게 빚을 진 형제가 나에게 ‘백만 불’을 주어야 되는데 그 백만 불을 찢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시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이 용서했을 때 여러분을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교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만큼 중요한 것이 나에게 잘못한 상대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복수할 권한이 있는데 그것을 내려 놓았고, 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상처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서 담대하게 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는 이 일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다시 첫 번째 단계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날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용서를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자녀라 하고 싶지만 그래도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머뭇거릴 것입니다. 정상입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그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죄할 권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권리만 주셨지 정죄할 권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정죄는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다보면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blind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죄권을 안주시는 것은 즐거운 복수를 혼자 하려고 하시게 아니라 복수의 과정에서 상처받는 게 우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당신에게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결과적으로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내가 복수할 권한이 있는데 하나님이 더 나은 ‘just maker’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공평하게 할 수 있도록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용서했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 용서했으니 봐 주세요’하더라도 그 사람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just maker’로서 일을 하십니다. 물론 상대편을 사랑하셔서 그 사람이 잘 되는 방향으로 하시겠지만요. 모든 죄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하십니다. 우리가 용서했기에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도 그렇고 예수님도 저희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용서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처음 용서를 시작할 때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이 좀 더 자라면서 좀더 성숙한 이유로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한 분이십니다. 얼마나 정확한 분이신지는 물리적인 법칙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으셨을텐데 지구의  상태가 약간만 달라져도 지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리적인 세상도 굉장히 섬세하게, 정교하게 만드셨는데 여러분이 받은 상처를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여러분도 용서받고 싶은 것처럼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보다 죄를 더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만약 사람들이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셨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죄가 아니라고 할 만큼 정신이 이상한 분도 아니었고, 다른 길도 있었는데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실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어리다면 하나님이 복수해 주시는 것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숙하게 될수록  내가 받은 용서때문에 남을 용서하게 되고 내가 감사해서 용서를 하게 됩니다. 내가 일억의 빚을 졌는데 그게 탕감되었다면 누가 나에게 일 불을 탕감해 달라고 한다면 안 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감사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되었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용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better ‘just maker’라는 믿음에서 하셨으면 좋겠고, 그 사랑에 의해서 여러분이 용서하시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도 용서를 해야 됩니다. 용서는 믿음의  행위이고, 선택하는 것이며, 복수할 나의 권한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이며, 여러분을 위한 일입니다. 용서의 유익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당신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으시길 원하십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백만 달란트,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백 일과 천 오백 년의 노동의 차이와  같습니다. 용서를 안하겠다는 것은 일억 갚음을 받은 사람이 일 불을 안 주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제삼자와 가해자에게도 할 일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아픈데 주위에서 부채질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넌 크리스천인데 왜 용서 못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이 그 상황에 있으면 펄펄 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조심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제 삼자로서 도와야하고 곁에 있어주어야 한다면 기억하세요. 절대 쉽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정말 당한 사람에게는 큰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제 삼자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도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픔을 다 받으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대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시고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쉽게 해결점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상대편이 해결점을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들어주시고 아픔을 공감하고 기억해 주시는 것이 너무 필요합니다. 가해자로서 중요한 일은 사과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과를 받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사과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주고 회복을 시작시켜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실수로 상처를 주었고 사과를  하면 상대편의 상처의 치유가 굉장히 빨라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해자일 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하고 넘어가지 마시고 그 사람의 상처치유를 위해서 사과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일은 아름다운 일이고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사과를 안 하는 것은 내가 상처를 주어도 나는 상관없다는 냉정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사과할 때 기억할  것은, 상대편에게 아픔을 준 것이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많이 싸우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이 의도를 하지 않았는데 당한 나만 바보가 되었다는 생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의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의도하였던 그렇지 않던 상처를 받았다는 게 아픈 것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표현하고 정확하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하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나쁜 예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상대가 무엇이든지 잘못한 것 같으면 용서해 주세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잘못 안 했다는 말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상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집어주지 않으면 상대는 잘못한 것도 모르면서 ‘왜 용서를 해?’ 하는 식으로 나와서 여러분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모든 것은 실수다’라고 넘어가면 안됩니다. 고의건 아니건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상처를 주었다면 막연하게 화해를 청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저도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에요.’하는식으로 변명을 합니다.  하지만 상처는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서라기 보다는  그 행동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기에 이 말은 올바른 사과가 아닙니다.  고백은 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부분에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잘못을  했더라도 사과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훨씬 축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고, 그것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묵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 안에서 용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내려 놓으시고, 모든 일을 종이에 자세히 다 적으십시오. 그리고 내 안에 용서의 마음이 없는 것조차 고백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십니다. 용서할 힘도 구하십시오. 용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 마음과 힘도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감정과 분노를 생각나게 하세요. 상처가 곪으면 정말 아프기 때문에, 그것을 터트려야 합니다. 이 일은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정과 아픈 고통들을 다 적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에서만 맴돌다가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정들을 성령님께 드러내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다  드러나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릴, 던져버릴, 그리고 뒤돌아갈 힘을 구하십시오.  
이 일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진정으로 믿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이 어려움과 아픔을 통해서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하기 힘듭니다. 한 번 용서하면 끝난다고 생각하는데, 한 번 받은 상처는 오래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이 과정을 반복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끝없이 축복하십시오. 그것이 진짜 여러분이 용서를  한 증거입니다. 축복을  하라고 하니, 정말 화가 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람을 용서할 때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 때에는 축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끝)

[김정아] 치유의 길(용서) (3) – 용서는 “하나님께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용서라는 말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어원을 보면 ‘나사’, ‘아피에미’ 즉, ’보내는 것’, ‘던져 버리는 것’이고 , ‘살락’, ‘카리조마이’ 즉, ‘자비를 베푸는 것’,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을때 그 상처를 안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것을 던져 버려서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용서의 어원입니다. ‘던져버리는 것’, 그 어원을 기억하세요. ‘자비를 베푸는 것’은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상처를 주었는데 용서하는 것은 불쌍한 내가 당하고, 착한 내가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받으면 세상의 눈으로는 여러분이 복수할 권리를 갖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굉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보내 버리고 던져 버리는 것이고, 그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믿음가운데 그 담대하게 자신감을 가질 만한 일인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moving on’하는 것입니다. 뒤돌아서서 잊어버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처와 배신 이런 것들을 밑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저도 상처를 받고 용서하는데 일 년 반이 걸렸습니다. 지금도 자다가 그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일 년 반이 걸렸던 게 지금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아니까 5분이 걸립니다. 원칙을 생각하며, 날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니 5분 안에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부터 용서가 쉽지는 않지만 점점 더 좋아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일기장에 써 놓고 계속 묵상을 하게 되는데 그러지 마시고 던져버리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자꾸 생각을 끄집어 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생각을 끊어버리는 게 필요한대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수 있지만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혹이 어디로 들어오느냐면 생각으로 들어옵니다. 과거가 자꾸 묵상의 주제로 올라오면 생각의 주제를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삼 분만 “초콜렛 초콜렛” 해보십시오. 초콜렛에 알레지가 있는 사람이 아닌 한 생각나는 건 초콜렛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처를 ‘잊어야지 잊어야지’하면 상처밖에 생각나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러분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속죄양이라고 해서 양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광야로 보내 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과거의 상처들을 버리고 속죄하는 것처럼 양에게 그 상처들을 묶어서 다시 오지 못하게 보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여러분이 진, 큰 빚을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당하고 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진 빚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보내주고 과거를 잊어주고 잘못을 잊어주고 상대편을 자유케 해주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보내주는 것입니다.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 주고, 빚을 없는 것으로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용서하지 않을 일을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내가 혼자 조금 ‘오버’한 것인데 무조건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면 안 되지만, 용서했을 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만 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처를 받은 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이유는 ‘은혜’, 또 다른 표현으로는 ’용서’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용서가 다른 게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그 악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용서 안에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just maker’이기 때문에 하나님꼐서 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용서해야 할 때 너무 힘들지 않나요? 만약 상처를 준 사람이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여러분은 괜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할 때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당신이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용서는 선택입니다. 감정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감정은 한참  뒤에 오기에 용서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가 짚고 넘어갈 것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 중에 하나인데 용서와 화해입니다. 용서는 그 사람의 input과 상관없이 던져주고, 버려주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해는 박수를 치는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한 사람이 용서를 하고 싶어도 상대편이 계속 상처를 주면 그 관계는 정상적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편이 죄를 인정하지 않아도 해 주어야 하지만, 화해는 상대편이 죄를 인정하고 돌아와야만 가능합니다. 남편이 부인을 때리면 부인은 남편을 용서해야 하지만 abuse하는 관계로 들어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를 인정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화해는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때 관계를 끊으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나를 보여주고 상처를 주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예수님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 번을 확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사랑하느냐?” 본인이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가르쳐 주어야 상대방이 돌아설 수 있습니다. 화해에는 공평과 정의가 바탕이 되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강한자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하면 무언가 져준 것 같지만 강하지 않은 자는 결코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자만이 가능합니다. 용서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의가 없는데 무조건 친한 척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가 먼저 나와 있습니다. 진정한 화해는 의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김정아] 치유의 길(용서) (2) – 용서가 힘든 이유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용서를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둔한 분이면 잘 못 느끼실 수 있지만 민감한 분일수록 상처받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다니면서 훈련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교회에 다녀오면 머리를 뜯고 싶은 적이 있지 않으세요? ‘왜 그 사람은 나에게 그 말을 했을까? 정말 싫다.’한 적이 참 많습니다. 못 느끼시는 분이면 다행인데 여러분이 생각이 많은 사람이면 인간관계에 있는 한 그런 상처들을 받게 되실 겁니다.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게 되면, 한 번 찔리는 것도 아픈데 계속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성격 나쁜 사람으로 찍히고 싶지도 않고 여러분 모두 사랑 받고 싶지요? 모든 인간에게는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삶이 풍성해지고 인간관계 안에서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용서의 원칙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것은 꼭 성경의 말씀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용서의 개념이 기독교의 개념이지만 대기업에서도 기업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중요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은  그것의 실효성이 있기에 맞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합니다. 세상 학문도 용서가 얼마나 인간관계와 건강에 영향을 주는 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의 암발병률이 정말 높습니다. 암환자들이 성격이 나빠서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서,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참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코스타에 오시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오시는 것 일텐데, 여러분이 용서를 하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서 힘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을 따르지 못한 우리들의 말을 사람들이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능력있는 일 중 하나가 용서입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데 용서를 하면 내가 큰 일을 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용서가 정말 힘들 때 용서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정말 힘든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일을 하셨을 때 스스로 칭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상처 한 번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용서 받아서 행복하다면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아파하면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서하는 것이 나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며, 세상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사명감을 가질만한  일인데 왜 용서하기가 어려울까요? 

그 이유는 참  많이 있습니다. 용서만큼 부자연스러운 게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받은 만큼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후에는, 용서라는 것이 내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갚아줄)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되었습니다. 용서가 자연스럽다는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진짜 상처 받은 사람들 중에서 용서가 힘들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죄된 성품과  우리가 받은 교육 때문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원하지 않습니다. 받은만큼 갚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포도원지기’ 예화에서,  한 시에 간 사람, 두 시에 간 사람, 세 시에 간 사람, 여섯 시에 간 사람이 똑같이 일당을 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세요? 여섯 시에 간 사람은 한 시간 일하고 돈을 받고, 또 일찍 온 사람은 더위에 오랜 시간 일했기에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화를 보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스스로를 아침부터 일하러 온 사람과 동일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리가 여섯 시에 온 사람이라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 오셨지 의인을 위해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 말이 싫었는데, 죄인을 위해서 오신 건 좋은데 “나 같은 의인은 어떡하라고?”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요지는 너희에게 조건없이 선물을 주려는 것인데 우리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하면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포도원지기가 여섯 시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일당을 준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인데, 우리는 아침 7시부터 온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잘못된 개념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에 용서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대충 무마시켜주고, 무조건 변명해주고 나쁜 사람이 아니야 하고 넘어가고 당한 사람만 불쌍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편이 때리면 맞아주고, 맨 마지막으로는 모든 것을 참고 절대 화내지 않기도 합니다. 용서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이런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씩 여러분과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용서에 대한 잘못된 개념 중 하나가 우리 가슴이 터지고 속이 뒤집히는데도 용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위장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좋아하신 사람은 ‘good person’이 아니라 ‘real person’입니다. 속은 그런 게 아닌데 기뻐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정말, 용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아프게 보시는데 공평함이나 정의가 없는 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못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아닌 척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가 싫다고 합니다. 분명히 잘못 됐는데 자기가 잘못하면 대충 넘어가고 남이 잘못하면 그렇지 않은 모습도 싫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우리 아빤 술을 조금 하셔” 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하되 그것을  용서하는 것을 원하시지 죄를 죄라고 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많이 혼동하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것과 죄를 죄라고 하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가 아닌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것은 공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악을 선하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악을 선하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죄를 죄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죄는 그 사람의 성품에 관해 뭐라고하는 것이지 죄를 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용서는 상대편을  위해 변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데도 불구하고 용서해주는 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화가 났을 때 솔직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다루겠지만 여러분의 감정을 마구 표현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진실한 감정에 대해서 창피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 악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빠가 알콜 중독자인데 “아빠 기분이  조금 안 좋으신가봐”,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여자친구가 성격이 좋아서 그런 거야”라고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잘못된 일이 일어나서 그런 일을 지적하면 정죄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거짓 평화를 참 좋아합니다.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숨기는 것은 언젠가 다 터지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싸움을 일으키면 안 되지만, 감정에 솔직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문제가 있는데 없다고 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침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회사업에서도 그렇지만 문제를 모르면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인식하면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문제를 인식하지 않으면 정말 고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흡연이나 마약 중 어느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보통은 마약이라고 합니다. 마약이 미디어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통계를 보면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흡연 문제를 더 강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약 문제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으면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전혀 나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를 죄라고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절대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상처를 받고 부정한 일을 당해도 절대 화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이면 항상 순한 양 같아야 한다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엡 4:26-27 말씀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목하실 것은 하나님께서 분을 내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어원을 보면 “화내라, 하지만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말은 permissive imperative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분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에 선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정당한 분노를 허락하셨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노하심과 우리의 노함과 차이가 있을 때가 많지만, 우리가 노할 상황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악한 상황을 봤을 때 노하셨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진노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진노는 분노보다 훨씬 더 intensive한 감정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일을 당할 때 분노하는 것은 옳은 일이며 여러분이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된 일을 당하고 화를 낼 때 ’나는 크리스천이 아닌가봐”하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정당한 분노는 잘못된 일에 대해서 한계를 정하는 것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노예를 만드는 것에 분노해서 평화적이지만 싸움을 해야 되는데, 정당한 분노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당한 분노는 다른 사람이 더 이상 죄를 짓게 않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의 문제 중 하나가 가해자도 문제가 있지만 맞아주는 부인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분노하면서 그 사람이 나를 계속 때리면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시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봐가면서 괴롭히거든요. 그게 여러분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 있을 때 stand up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노라는 감정을 주셨지만 우리가 죄된 인간이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낼 때 성경적인 화냄인지 아닐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 안에서 해야 됩니다.  상황에 따라 화냄의 정도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화를 적게 내야 할 때도 있고 화를 크게 내야 할 때도 있는 것이지 무제한 화를 내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뜻 안에서 분노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정당한 분노는 죄가 아닌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냥 “쟤 생긴 게 맘에 안 들어 뭐.”와 같은 식의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분노가 아닙니다. 그래서 화가 날 때 한 번 기도해 보세요. 이런 감정 느끼실 때 이 감정이 과연 하나님께 받은 감정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용서를 힘들게 하는 잘못된 개념 중에 하나가 ’그 일만 아니면,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내 성격을 망가트리지 않았다면 인생이 괜찮을텐데’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듭니다. 내 삶의 행복을 빼앗은 사람 때문에, 억울함 때문에, 상실감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심장을 주시고 사신 분들이기에 여러분의 고통을 절대 허비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그것을 체험하실텐데 제가 성경의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분도 있겠지만, 요셉도 만만치 않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형제들이 그를 팔았고, 종으로 열심히 살고 있을 때 보디발이 강간범으로 감옥에 보냈고,  감옥에서는 열심히 살았지만 무시당하고. 억울한 것, 속상한 걸로 따지면 요셉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행해진 일은 악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을 좋게 바꿔주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힘을 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의 고통을 통해서 그것을 선하게 바꾸시지 절대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용서를 안 할 때 ‘내가 싸움에서 이겼다’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너를 용서 안하고 너를 꽉 쥐면서 너를 나쁜 놈으로 보고 있을거야’ 라는, 약간은 masochistic한 즐거움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 안 한 것이 웬지 싸움에서 이긴 것이라는 생각에서 용서를 안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를 안 하면 ‘내가 희생자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즐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상처 받았기 때문에 나는 불쌍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용서를 안 하는 경우도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안 하게 되는데 문제는 용서를 안 할 때 오는 불이익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에 들어갈 수 없기에 성령충만하지 못하고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용서 못하고 미워해 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기뻐하기가 힘듭니다. 교회 안에서 그 사람 얼굴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어떻게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상처를 받은 것도 힘든데 하나님이 주신 기쁨까지 놓치는 것은 두 번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 위해서 용서를 생활화하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용서하지 않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않습니다. 

네 번째로, 다시 상처 받지 않으려고 용서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사람의 관계 안에 들어가지 않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용서를 안 하는 것인데,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예전에 받은 상처와 같은 상처를  연속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예전의 기억이 계속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게 내버려 두는 것과 같습니다. 지속적인 갈등과 괴로움에 힘들고 고민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를 감정적으로 지치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실제적인 이유 때문만이라도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quote중에 하나인데 ‘사람이 주는 고통에서부터 완벽하게 보호 받을 수 있는 곳은 지옥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 사랑하게 되고 관계 속에 있으면 상처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 한다면 사랑 밖에 있어야 합니다. 지옥에 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옥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라 무섭습니다. 여러분 싫어하는 사람과 있어본 적 있으십니까? 거기가 지옥이지 않습니까? 지옥은 하나님이 인간을 정말 존중하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니까 보내 주는 곳. 하지만 정말 무서운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완벽한 선인데, 하나님이 빠지시니까 모든 선이 빠지고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아픔이 따르지만 그것을 안 할 때 더 큰 문제가 오기에 우리가 용서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시 상처 받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많은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정리를 하겠습니다. 용서에 관한 잘못된 생각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는 괜찮은  척 하는 것 아니고, 무조건 자제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망쳤다는 것도 아니고, 용서를 안 한 것이 이긴 것이 아니고,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신 말의 의미를 같이 찾아보면  좋겠어요.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채영광] Healthcare as a Mission – 4

KOSTA/USA-2010 Chicago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tmKOSTA 세미나 중 의료분야 리포트 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영혼구원과 제자양육 (Discipleship)

마지막으로, 진정한 의료선교사이기 위해서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끝까지 증인이 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며,
당신의 양을 쳐야 한다.
물론 착한 행실로,
실력과 정성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게 해야 한다.
하지만 함께 직접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실로 막연히 크리스천들에게 무언가 있나 보다 그치게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해주는 기쁨 선사할
의무가 우리 의료선교사들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내성적인 성격상 의무가 우리의 목사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훈련을 받아서 그냥 우리의 의료실력으로 우리의 신앙을 대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령께서 분명  말씀하신다.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는데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구원 사역은 우리 주님이
친히 하신다.
우리는 다만 기회가 오든지 오지 않든지 씨를 뿌리거나,
거두기만 하면 된단다.
기회는 기도만 하면 언제든지 주신다.

나의 경우, 병원에서 환자를 보면서, 환자를
위해 기도를 했을 주님께서 씨를 뿌리거나 거둘 있는 기회를 종종 주셨다.
다발성 골수암
(multiple myeloma) 환자가 심정맥 혈전증 (deep vein
thrombosis) 의심되어 초음파 검사실에 내려가야 일이 있었다.
간호사의 일손이 부족해 당시 인턴이었던 내가 심장 모니터를 환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서 검사실 앞에서 한참 같이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나는 주님께서 내가 환자를 위해 기도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을 느꼈다.  환자에게 기도에 대해 승낙을
얻은 오랜 시간 처음에는 영어로,
나중에는 한국어로도 환자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환자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던 색다른 경험이었다. 

한번은 위에서 언급한
심내막염 환자가 호스피스로 퇴원해야 하는데,
거의 일주일이 지나도록 호스피스 자리가 나지 않아서 계속 병실에 있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병동 스케쥴이 끝나는 바로 그날까지 환자를 내가 돌보게 되었고,
내가 휴가를 떠난 다음날 환자는 호스피스로 퇴원하였다.
내가 병동을 떠나기 마지막 환자와 나는,
환자에서 MRSA라는 균이 검출되었기에 배정된 격리 핼액 투석실에서,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간호사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인턴은 호출을 받고 사라졌다.
순간,
나는 하나님이 환자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통해서라도 기도를 받기를 원하심을 느낄 있었다.  환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지금 정말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이 내가 병동에서 환자를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말씀 드렸다.  환자도 괜찮다고 했다. 하나님이 환자 분을 너무 사랑하신다고 말했고,
환자분을 알게 되고 환자 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할 있게 되어 내가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지금은 주께서 허락하신 육체의 고난으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평강으로 승리하길 소원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같이 일시적인 육체를 벗고 육체로 천국에서 함께 예수님 안에서 함께 멋지게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기도를 드리면서 나도 울고 환자도 울었다.
불평도 많고 힘들어했던 환자였는데,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님의 마음이 내게 부어졌다.
내가 오늘 너의 기도를,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기다렸다고.

어떤 날은 환자도
아니었는데,
자기 남편을 수술장에 보내고 남편이 없는 병실에서 혼자 어쩔 몰라하고 있는 한국 할머니를 만난 적도 있다.
할머니가 영어를 못하니까 간호사가 지나가는 나를 알아보고 할머니께 할아버지가 지금 수술장에 내려갔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사실 그냥 할머니께 위로라도 해드리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너무 불안해 하셔서 내뱉은 말이 할머니 기도해드릴까요?”였다. 할머니께서 고맙죠 하시길래,
할머니 손을 붙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면서,
우리 하나님하는데
때부터 목이 메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강하게 임했다.
동안 목이 메어서 말을 못했다.
사실 처음 보는 할머니 앞에서 우는 모습에 내가 많이 당황했다.
할머니도 같이 우셨는데,
내가 기도하면서 나온 말이,
우리 하나님이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지나가던 나를 불러 쓰셔서 당신의 기도를 드리게 하십니까
였다. 할머니께 주님의 사랑과 위로,
그리고 평강이 임하길,
할아버지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간절히 구했다.  기도란 언제나 나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환자뿐 만이 아니라 동료 의료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마음 역시 소중하다.
의료 현장은 언제나 사역이다.
팀원 끼리 같은 영적인 호흡을 맞출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며느리 마음은 며느리가 안다고,
의사 마음은 의사가 알고,
간호사 마음은 간호사가 안다.
같은 의료인들끼리 현장에서 삶으로,  섬김으로 복음을 공유하는 축복을 유통시켜보자.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동료들을 마음으로 품고 꾸준히 기도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열정을 부어주시고 기회도 만들어 주신다.  나의 경우 선배의사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던 와중 신기한 체험을 적이 있다.
선배와 전화 통화를 마치자 마자,
내가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흐느껴 울기 시작한 것이다.
안에 성령님이 선배의사의 영혼을 향해 깊이 애통하시는 같았다.
후로도 분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도와 대만에서 동료 의사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하나님 이야기를 기회들을  여러 만들어주셨다.

결론

결론은 이것이다. 
의료인으로서 실력과 윤리의식은 기본이다.
환자를 대할 주께 하듯 하는 섬김을 소명으로,
사명으로 인식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비로소 진정한 크리스천 의료인이라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서는 된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복음으로 거듭나고 기도와 섬김으로 주님의 손과 발이 되며 의료 현장에서도 제자 만들기에 힘쓰는 복음의 군사로 白衣從軍할  , 우리는 참된 의료선교사 있다. 비로소
글의 주제처럼
Healthcare
Mission 된다.
의료가 우리의 사명이 되고,
의료현장이 우리의 선교지가 된다.


하나님이 때를 위해 나를 쓰심 (God-given opportunity)

에스더 4
14절에서 모르드개가 딸처럼 기른 자신의 사촌 에스더 왕후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네가 왕후의 位를 얻은 것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에 에스더는
16절에서 죽으면 죽으리로다 답한다. 사람이
죽다가 살아난 경우만이 기적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음 역시 기적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의료인이 것은 하나님의 정말 특정한 때를 위함일 수도 있지만,
우리 일터의 작은 만남 하나 하나를 위함일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두신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환자에게 나를 생애 마지막 문턱에서 만나는 크리스천 의료인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어야 한다.

한번은 응급실에서 명의 환자를
내과로 입원시키고 있는데,
환자 모두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었고,
환자와 보호자 모두 영어를 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나님이 분들을 사랑하시는구나.’
나에게 미국의사고시 시험을 보게 하시고 어쩌면 미국 필라델피아로 부르셔서 분들을 모국어로 돌볼 있게끔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나는 내가 되기 원하는 의사상을 그리며 정진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우리 주님이 나를 들어 쓰심은 때를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오히려 생각이 단순해졌다.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도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오직 바라옵기는 오직 한가지 우리 주님께 쓰임 받는 것뿐입니다.’

매일매일을 주께서 나를 때를 위해 쓰심이
아닐까
하는 설레는 기대감으로 산다면,
크리스천 의료인에서 의료 선교사 거듭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멋진 순간들이,
섬김과 전도의 기회들(God-given
opportunity) 우리들 삶에 넘쳐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김현회]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2)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2) – 김현회



[2] 성령 세례
중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점은 무엇이냐면 그 결과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점을 강조하냐면, 다음 주제가 성령 세례인데, 성령 세례와 중생을 다르게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믿고 중생했지만 아직 성령을 못 받을 수 있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오류입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모두 성령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도 하고 예수님의 영이시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는 것은, 즉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로 믿고 주로 시인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가능한 것이고, 내가 영적으로 거듭나서 내 안에 성령님을 모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 ‘다’, ‘우리가’가 반복되는데 이 말은 성령 세례를 말하는데, 바울이 이 성령 세례를 말할 때 바울의 의도, 요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하나임을 강조하는 일이 오히려 교회를 둘로 나누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고, 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뉩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을 하였어도,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중생과 또 다른 사건으로 보는데, 어떤 신비적인 체험, 대표적으로 방언을 염두에 둡니다. 성령의 뜨거운 진동이 왔고 방언을 받았고 이런 체험을 받으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이렇게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분을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중생을 했지만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 거듭났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지체가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마셨다는 말은 내가 성령을 소유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믿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이지, 일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접근할 수 있겠습니다. 신약에 세례에 대한 본문이 7군데 있습니다.  모두 종합해 보면 세례에는 4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주는 자, 세례받는 자,  세례의 매개체, 그리고 세례의 목적. 이것을 요한의 물 세례에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의 물 세례에 있어서 주는 자는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받는 자는 요한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 세례의 매개체는 물, 세례의 목적은 죄사함.  그래서 죄사함을 받기위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령 세례입니다. 종종 우리는 성령 세례를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배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에서 주시는 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받는 이는 믿는 우리 모두이며, 세례의 매개체는 성령, 그리고 세례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이며 성령 세례와 중생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적어도 동시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은 성삼위 하나님이 다 함께하시는 일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어떤 측면에선 예수님이, 어떤 측면에서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부르심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 함께하시는 일인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일하거나 동시적 사건이고  같은 사건을 다르게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마치 성령세례가 중생과 별개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로 오순절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분명히 이 제자들은 성령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 제자이기에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오순절까지는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중생과 성령 세계가 두 단계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후에 성령을 받았다는 오순절 성령사건은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한 번만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성령이 아직까지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강림이 있자 술취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합니다. ‘때가 제 삼 시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선지자 요엘로 약속한 것을 성취한 것이다 – 말일에 내가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다.’  남종과 여종이란 말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란 뜻입니다. 남녀 차별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그 예언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앉으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너희가 보는대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이것이 너희가 보는 현상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성령을 보내주신 사건입니다. 그전에는 성령이 임재하셔서 사역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에는 모든 믿는 자는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을 하자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는 어찌할꼬’하며 마음에 찔림을 느낍니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에 대한 찔림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날 오순절날 3000명이 예수를 믿고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인 것을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즉 예수를 영접하면 성령을 받으리라”고 선포합니다.  그 중간에 어떤 다른 것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날 3000명이 세례를 받고 나서 오전에 있었던 사도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을 받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성경엔 그 기록이 없습니다. 그 3000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join을 합니다 – 오순절이 교회의 출발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증거는 무엇이냐면 기쁨의 충만이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다 함께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떡을 떼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 받은 그룹은 2그룹입니다. 첫째로 사도들, 그리고 3000명. 그런데 두 그룹의 모습은 다릅니다. 하지만 똑같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님이 오셨으니깐 우리는 3000명에 해당되면 생각하면 됩니다.

성령강림과 중생이 다르게 보이는 듯한 다른 본문은 사도행전 8장, 10장, 그리고 19장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고 많은 사람이 믿자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거기에 세례를 받았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그들이 정말 예수 믿은 것을 확인 하고 나서 사도들이 안수하매 성령이 저들에게 임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도 분명히 오순절과 비슷하게 두 단계죠.  빌립이 전하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사도들이 안수했을때 성령이 임하고 방언도 하고 그런 여러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보는것이 옳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는 같습니다, 다 유대인들이기에. 이 유대를 넘어서 제일 먼저 복음이 전파된 곳이 사마리아입니다. 먼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다는 원수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사마리아까지 전파되면 사마리아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받아드려야 하는데, 그러면 어떤 현상이 있어야 하면, 오순절이 한번 반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행 8장에서 나오는 사마리아판 오순절입니다. 그런 현상이 똑같이 일어나야만 ‘이들도 똑같이 성령을 받았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비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경건한 자’라고 했습니다.특별한 용어로써 Godly man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받지 않고 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넬료가 기도하는 가운데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불러 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어 그곳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가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엔 부정한 짐승이 잔뜩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그랬더니 베드로는 그럴수 없다고 대답하였고, 하나님께서 ‘내가 정케한 짐승을 네가 부정타 하지 말라’ 라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을 하여, 그들을 따라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듣는 중에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임하는데 오순절 사건과 같은 형태로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과 이들도 똑같이 받았으니 누가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도 오순절의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이 유대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사마리아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이방인에게 넘어갈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유대인들이 너무나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민족적인 장벽, 유대인과 사마리아 관계에 장벽을 무너뜨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때 거기 몇 명의 제자들을 만나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에 제자들의 반응이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몰랐다’였습니다. 바울이 조금 의아해하여 ‘그러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물세례만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하고 예언도 합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인데 아직 성령을 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잘 보면 2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1. 믿을 때 성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2.믿을 때 당연히 성령을 받는다.  저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볼 때 이상했던 건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지 않았던 제자들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이전 18장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 있는 아볼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볼로는 열심히 말씀을 전했지만 요한의 물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 하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 주의 도를 자세히 일러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냐면, 오실 메시아를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요한이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있는데 그가 메시아며 구세주라고 해던 것까지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이 오셨던 것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고 세례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이 문제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성령의 인치심.

(엡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주시는데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실때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나님의 소유라고 도장을 찍으신 것이며,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앞으로 우리가 장차 얻을 기업 – 상속 –하나님의 상속자, 얻을 기업의 보증이 되셨다라는 뜻입니다. Deposit/보증금으로 성령님을 모셨다는 뜻입니다. 인치심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인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예수 믿는 자 안에 불꽃이 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자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거듭난 사람, 성령 세례를 받은사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령님이 무슨 의미냐면, 마치 자동차를 살때 downpay를 하고 사는 것처럼 앞으로 나머지 것을 주겠다는 약속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그 새로운 세상을 상속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속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증하기 위해 우리안에 세로운 세대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성령이 지배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3가지 – 중생, 성령 세례, 인치심– 모두는 예수를 믿는 출발점에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출발점 사건의 공통점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사신다, 곧 내주하신다고 말, 즉 In dwelling Holy Spirit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요즘 성령세례에 관하여 그릇됨들이 있어서 자꾸 예수를 믿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고 second class Christian인것처럼 그렇게 구분하는 건강하지 못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때 체험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맛보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모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장차 올 세상을 미리 맛볼 수 있는것입니다. (계속)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