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종]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언어의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시적이고 표피적인 외형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이고 개인적인 내포적 의미이다. 가령 ‘개’라고 말할 때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개는 네 다리가 달린 짐승을 말하지만 개인에게 새겨지는 의미는 ‘냠냠’에서부터 ‘자식’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경험이나 이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하여 앞의 의미를 객관적인 의미, 뒤의 것을 주관적인 의미라고 한다. 뉴스나 영화를 보면서도 여러 사람이 각자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비추어 의미를 달리 새기게 되는 것은 바로 언어가 지닌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언어의 의미를 따져보게 되는 까닭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는데 있다. 신문에 난 기사도 믿을 수 없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다 보니 정말로 나의 사고나 판단조차도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헤아려 보게 된다. 언론사 세무조사 발표가 있고 난 뒤, 조선일보 같은 신문은 아예 정부에 대한 저항을 선언하고, 언론탄압 음모에 맞서 의연히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가 얼마나 계획적으로 이번 일을 저질렀으며 조선일보는 얼마나 억울한 지를 여러 기사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반면 언론개혁에 초지일관 앞장 서 온 한겨레신문은 이러한 조선의 행위를 부끄러움도 잊은 후안무치적 행위라고 비난한다. 한 사건을 두고도 이토록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은 언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 대로 편집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자기 식으로 세상을 조립하는 방법은 대개 뉴스 거리의 선택, 축소 또는 확대, 그리고 재구성을 통해서이다. 즉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선택하거나, 확대하고, 불리한 정보는 축소함으로써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조선과 한겨레 두 개 신문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어느 것이 왜곡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지루한 싸움이 언제 어떻게 끝을 맺을지도 궁금해진다. 언론사 세무조사에 정부의 의도와 계획이 없었을 리 없고, 반대로 언론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제멋대로 행사한 것도 사실이고 보면 언론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데 정부의 조처가 합당했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요즘 언론의 자사 이기주의는 해도 너무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어찌 국민을 담보로 신문을 사유화하고 지면을 제 멋대로 자사의 이해를 위해서 함부로 도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론이 보여주는 폭력적 행태를 보면 권력의 전횡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의 주제는 언론의 전횡이 아니다. 요점은 이러한 전쟁이 어떻게 결론을 내릴 것인가 이다. 내년이면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정부는 언론의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쨌든 여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길목에서 언론의 역할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적인 이유로 나는 언론개혁이 정말 순수하게 언론개혁으로 마무리될 것이냐는 의문을 갖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 정말로 순수한 개혁이 있었으며 그것이 성실하게 매듭 지어졌는지, 이에 대한 기억 조차 없다는 것도 나의 생각을 뒷받침 한다. 짐작컨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론과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손을 잡게 될 지 모른다. 서로의 이해를 위해서 지금도 어는 곳에선가 물밑 회동이 이루어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고. 화가 나는 것은 내가 이러한 기만 행위에 속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신문기사 한 토막에 흥분하고 분노하며 안위하는 내 스스로가 웃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모르면서 흥분하고 모르면서 분노하고 모르면서 절규한 일이 얼마나 되었을까. 정치도, 사회도, 학교도, 교회도 고개 들어 어느 곳 하나 기댈 데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케 한다.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도 언론이 궁극적으로 개혁되는 데까지 이르지 못 할 것이라는 점에 더 답답함이 있고 절망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도 우리의 눈을 가린 채 권력의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야합과 담합과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을까. 언론은 민중의 편이며 검찰은 과연 중립이며, 판사는 과연 법의 공정한 심판자일까. 의사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답게 아픈 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키는 인류의 선행자일까. 교수는 정말로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치며 헌신할까.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 대로 바로 서 있으며 목사는 과연 그 삶이 우리의 생각 만큼 투명하고 맑을까. 혹 교회에도 내가 모르는 일이 목사님들이나, 교회 간이나, 총회 간에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담합이 판을 만들고, 자신의 이해를 위해 모든 것이 조작되는 한, 오늘 세상을 사는 일은 정신 차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알 수 있게 되어있지 않다. 정보는 흐르는 길이 따로 있고, 그것에 소외되면 끝 없이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어떤 일에도 수 많은 루머와 가십과 뒷 이야기가 많은 걸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 있고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근거로 그토록 용감하며 그토록 자신이 있을까.

불신이 싹트는 사회에서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교사의 말에 신빙성이 없으면 교육이 불가능하다. 목사님이 불신을 받으면 말씀에도 신뢰성이 떨어진다. 신뢰를 잃으면 결국은 인간 관계도 깨어지게 되어있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말의 번지르르 함에 하나를 보태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이라도 상대방이 믿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작은 말부터 행동하고 믿게 하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바라건대 나는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의 말을 다시 한 번 곰씹어 보고 뒤집어 보고 상상력을 동원하고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 싶지 않다. 분명한 건 사람은 각자가 영민해서 누군가 자기를 속이려 하면 자신도 머리를 쓰게 된다는 점이다. 머리 쓰지 말고 말하고 머리 쓰지 말고 믿어 보자. 지금 우리가 이 사회를, 이러한 인간 관계를 치유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최원영]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

살며 생각하며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


야베스의 기도(Prayer of Jabez) 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지난 해부터 미국의 기독교 서점 베스트셀러로 올라선 뒤, 올해에는 USA Today나 Wall Street Journal과 같은 일반 매체의 베스트셀러가 되더니만,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이미 한국 기독 서점의 No.1 베스트셀러(7월 28일 현재 kbook.com No.1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Bruce Willkinson은 그가 신학교 시절, 교목인 Richard Seume 박사의 설교를 통해 역대상에 등장하는 야베스를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이 ‘야베스의 기도’를 시작하게 된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야베스의 기도는 계속 되고 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이 책은 축복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그가 해온 30년 간의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그가 받은 축복(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경을 넓혀야 할 사역자가 받아 누려야 할 축복)과 깨달음을 간결한 필치로, 하지만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나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책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다. Amazon.com에 가보면 이 책에 관한 평을 볼 수 있는데 (7월 28일 현재 268개의 서평이 올라와 있다), 이 책에 대한 평가만큼 호평과 혹평으로 극하게 갈라진 경우를 나는 본적이 없다. 잠시 여기서 이 책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시선을 보도록 하자.


“Dangerous little book” (one star out of five) by Albert Cerussi
….However, the author goes way too far. He seems to indicate that if you pray this prayer then God will bless you. This sort of cosmic santa claus stuff is one step ahead of the infamous “name-it-and-claim-it” gospel. The author places way too much emphasis on this prayer and the words inside of it. The “Prayer of Jabez” is a classic case of over-reading into the Scriptures. Believers in Jesus who read this book should view it with caution…..


“A powerful book” (five stars out of five) by Doug Keating
…..One concern I had about the book was the issue of praying for abundance. Luckily, the author “hit the nail on the head” with this topic by focusing on what God wants to bless us with instead of what we want from God. After all, if we put our faith in God, shouldn’t we trust his judgement when it comes to his blessing our lives. I think that prosperity is one of the most misunderstood topics in the Christian community today, and hopefully this book will help solve that problem……


두 사람은 동일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볼 수 있다. Albert는 ‘위험한 책'(dangerous little book)으로, Doug은 ‘위력적인 책'(powerful book)으로 묘사한다 – 나는 Doug의 의견을 지지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 축복을 받아 들이는 입장은 Doug과 Albert의 경우처럼 천차만별이다.


미국에서 “name it and claim it” gospel이 성행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한때 기복 신앙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다. 기복 신앙의 눈에 보이는 해악은 하나님을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사다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해악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퍼져 있는 일종의 “하나님의 축복(또는 성공)에 대한 거부감”이다 – 이는 위의 Albert의 글 행간에서도 언뜻 언뜻 비친다. 잘못된 기복 신앙으로 인해 생겨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거부감이야말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약화시키는 해악이 아닐까 한다.


아니 축복에 왠 거부감? 이렇게 반문할 수 있겠다. 이것을 만일 기도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나에게 세상적인 축복을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평생 하나님 붙들고 살겠습니다.” 참 훌륭한 신앙 고백이지만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신앙 고백에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 지혜가 필요합니다, 물질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보내 주세요, 내 앞길을 열어 주세요.” 우리가 간구해야 할 이유는 우리 각자에게 맏겨진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참 안타까운 것은 이 축복(또는 성공)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간구의 내용을 막는다는 사실이다.


축복에 대한 거부감에 관한 한 이것은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여기서 한참을 헤매었다. 일단 무슨 설교를 듣던지, 아니면 책을 읽던지, ‘축복’이나 ‘성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내 마음에는 Alarm이 울린다. ‘이거 뭐 또 기복신앙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귀를 쫑긋이 세우거나, 눈을 부릅뜨게 되었다.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전적으로 내면적인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의 세상적인 필요를 아뢰는 기도를 드릴때는 좀 창피한 생각도 들기도 하고 묵상 기도나 다른 기도가 수준 높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이런 일종의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생각의 중요성’을 깨닫고 난 뒤다. 강준민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간구하는 법칙은 우리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또한 간구하는 법칙은 우리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우리의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간구도 우리가 소원하는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입니다.” (꿈꾸는 자가 알아야 할 21가지 믿음의 법칙, 78쪽)


우리의 간구가 씨앗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확을 거두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뿌려야 할 것이다.

[황지성] post KOSTA 신드롬 극복하는 법

post KOSTA

post KOSTA 신드롬 극복하는 법

1. post-KOSTA syndromes

2001년 7월 9일 월요일 아침, 창밖이 환하게 밝아있다. 아직도 코스타에서의 열띤 찬양과 기도소리는 귓가에 쟁쟁한데, 희미하고 몽롱한 정신으로 감지되는 햇빛, 그 햇빛이 창으로 들어오는 각도와 강도를 보아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앗! 시간은 아홉 시 삼십 오 분, 여섯 시로 맞추어 놓은 알람 시계의 snooze 단추가 눌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늘 아침에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 큐티를 하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늦었다! 코스타에 가려고 지도 교수님에게 눈치밥 먹으며 겨우 휴가를 받아 냈었는데… 오늘은 월요일, 지도 교수님이 실험실에 나오시기 전에 먼저 갔어야 했는데… 후다닥! 일어나 옷은 주섬 주섬, 아침 식사는 대충 건너 뛰고, 자동차 시동을 걸고 학교 실험실을 향해 마구 밟아댄다…. 어느덧 하루의 일과가 정신 없이 대충대충 지나가고… 저녁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피곤함으로 초죽음이 되어 있다.

왜 이렇게 공부와 연구는 재미 없는 것일까? 코스타의 열기는 내 마음 속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매일 코스타 같은 집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공부 다 때려치고 신학교에나 갈까? 그러면 매일 성경보고 찬양하고 전도하고 할 수 있을텐데… 아님, 이번 가을에 확 선교사로 나가서 일생을 선교지에서 살다 그렇게 그냥 죽어 버려? 왜 이렇게 공부가 재미 없지? 논문을 쓰려면 아직도 2년은 더 실험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학위 마치고 나서 나는 어디로 가지? 한국에 Job 사정도 어렵다는데… 그리고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과 나의 인생에서 내가 가야 할 길들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자, 나는 이제 마치 각개 전투를 하는 군인처럼 느껴지는 냉혹하고 고독한 현실 가운데로 돌아온 것일까? 나는 이제 또 한 해를 날마다 순간마다 그 수 많은 결정들을 홀로 내리면서 살아야 한다. 마치 두 갈래 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존재로 서게 되는 두려움을 항상 갖고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Savior)으로 모시면 그 분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Lord)이 되신다던데, 도대체 나는 이 “홀로 서기”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란 말인가?

2.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구약의 지혜서인 잠언 3장 5절에서 6절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축복된 삶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기서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는 말씀은 가야할 길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 이상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실 때에는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그리고 높은 곳은 깎고 깊은 곳은 돋우어 평탄하게 만들어 주시는 동행하심의 의미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 발 앞서 가시면서 가야 할 길을 “예비해 주심”의 의미가 더 강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동행함”의 축복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면에서 주님께 의지적인 순종을 해야 함을 이 말씀은 아울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나의 “감성, 지성, 의지”의 모든 면을 다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성과 지성과 의지적인 면이 별로 성숙되어있지 않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인격을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초청에 응답하는 일, 즉, “의뢰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기대감”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 기대감을 갖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동행하시기를 원하는 그 초청의 은혜를 기대하는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그 동행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의 지적인 활동을 통해 알아가게 되기를 기대하는 모든 지식적인 “탐구(연구)활동”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적인 활동은 성경 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전공분야에서 나에게 주신 지적 활동의 수행까지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참고: 본지에 계속 연재된 “이일형”의 글을 참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내가 “순종”할 의지적인 결단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원리들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능력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만으로도 매우 괜찮아 보이는 일들을 이룰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할 때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절대적인 위치에 놓게 되고, 성경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하나님의 저주하시는 삶”(예레미야 17:5)을 살게 되어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삶이란, 삶의 기저에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신 창조주이심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사물의 원리들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능력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면 결국에는 나의 생각과 삶의 방식들이 하나님의 그것들과 비교하여 매우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인식은 결국, 다음의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에 무한한 가능성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처험하게되는 진정한 축복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

셋째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범사”란 나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의 삶의 모든 영역을 의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삶”이란 나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자원과 기회들이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기꺼이(감성) 탐구하며(지성), 그 알게 되고 느껴진 것들을 하나 하나 적용하며(의지)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치기 쉬운 것은, 이 “범사”의 개념은 나 한 개인의 삶에만 국한된 것이라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 이 때에 내가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알게 모르게 관련된 다양한 공동체들을 포함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코스타 기간 동안 열광하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번 뒤집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력한 감성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의 삶이 하나님 없이 홀로 서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무기력 속에 빠져 있는 스스로를 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지성적인 면과 의지적인 면의 성숙을 위해 나의 삶을 점검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대로 사는 법을 말씀 속에서 탐구해 나가고 내게 주어진 학문 활동을 진지하게 수행하며, 지식으로 알게 된 말씀의 원리에 나의 삶을 복종시키는 작업을 해 나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삶의 정황에 주어진 작고 큰 공동체의 모습들도 동일한 원리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데이트, 가정, 연구실, 캠퍼스 소그룹, 교회, 그리고 한민족 등등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대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각오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삶의 점검과 성숙은 강력한 헌신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적 자아가 뒤집어지게(?) 열광한 것보다도 더 강력한 강도의 헌신을 요구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가라 앉히고 진지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막대한 대가를 치뤄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마십시다. 이 길은 매우 즐겁고 흥분되는 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나의 인생의 여정에 앞서 가시는 주님의 흔적을 기적과 같이 날마다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기독 유학생의 열 두 가지 다짐을 위한 기도 제목

우리는 코스타의 마지막 날 밤에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갖고 헌신의 기도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이 기도 제목들은 “헌신”의 시간을 위한 기도 제목들이었지만 사실은 앞서 언급한 잠언의 약속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축복”의 기도 제목들입니다. 이 잠언에 약속된, 주님의 앞서 가시는 동행하심의 축복은 이 기도들이 나의 삶 가운데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경험되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감성적 체험의 폭이 넓어짐과 더불어 지식의 자라감과 의지적 순종이 다음 일년 동안 우리의 삶에 경험되어지기를 바라십시다. 이를 위해 이제 다음의 다짐들이 날 마다 나의 삶에 더 성숙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또 한 해의 경주를, 기도하며 같이 시작하십시다.

1) 주 되심(Lordship)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개인적인 구주(Savior)일뿐 아니라 내 삶의 주인(Lord)이신 것을 고백한다. 또한 그분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인 것을 고백하며 살 것을 다짐한다.

2) 경건의 시간(Quiet Time) … 우리는 매일 일정 시간(30분 이상)을 떼어 놓고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갖기로 다짐한다.

3) 중보 기도(Prayer) …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조국, 교회, 민족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수행할 것을 다짐한다.

4) 성경 연구(Bible Study) … 우리는 성경 말씀을 우리 삶의 좌표로 삼고 순종하기 위하여 매 주 일정 시간을 떼어 놓고 성경 연구에 투자할 것을 다짐한다.

5) 가정(Family) … 우리는 가정을 허락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여,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을 이룰 준비를 할 뿐 아니라 이미 주신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6) 교회(Church/Community) … 우리는 매 주일 정기적으로 캠퍼스 혹은 지역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7) 학문과 신앙(Study and Faith) … 우리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성을 훈련하며, 지혜롭게 사용할 것을 다짐한다.

8) 복음 전도(Evangelism) … 우리는 복음 전도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인식하고 매 학기 1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여 크리스천 공동체로 인도할 것을 다짐한다.

9) 해외 선교(Mission) … 우리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문인 선교사 혹은 보내는 자로서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10) 이웃 사랑(Social Action) …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사회의 불의한 분야를 밝히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다짐한다.

11) 통일 한국(Unification) … 우리는 곧 현실화될 통일 한국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전공 분야에서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12)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 … 우리는 섬기는 리더십이야말로 주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 알고, 캠퍼스와 앞으로 진출할 사회에서 예수님의 모범을 좇아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을 다짐한다.

[함철훈] 우리들의 자화상

[함철훈] 우리들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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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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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다 태평양을 건너온 씨앗의 뿌리 내리기는 남의 얘기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풀들이 무엇을 남겨야 한다면 씨앗입니다.
그런데 그 풀들이 씨앗 속에 담겨진 지울 수 없는 꿈을 터뜨리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꿈이 바로 우리들에게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 꿈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KOSTAN들이 이루어낼 그 꿈들을 기대합니다.

[팽동국]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

eKOSTA 서평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


코스타에서는 전통적으로 신앙 양서를 소개하여 유학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코스타 집회 기간 동안 받았던 은혜들을 일년 내내 감동으로 간직하며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참석했던 1996년의 코스타에서 “언어의 마술사”, “황금의 입술”이라고도 알려진 이동원 목사의 그 감동적인 추천의 말들을 듣고 그분이 소개해 주신 책의 상당수를 구입하기도 했고, 또 기회가 되면 읽으려고 그 추천도서 목록을 기록해 놓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코스타 이후 그 감동을 기억하며 읽어보려고 했으나,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밀려드는 숙제와 시험, 그리고 연구 등으로 인해 샀던 책도 다 읽지 못 할 뿐 아니라 책 제목 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곤 했다. 이런 현상은 물론 양서 소개에만 제한된 것은 아니었으며, 코스타 이후 나의 신앙 생활 전반에 걸쳐 이와 유사한 현상들이 있어 왔다. 나는 이에 대한 대안 중 하나가 바로 ‘연중 코스타’를 기치로 하고 있는 이코스타(eKOSTA)와 티엠코스타(tmKOSTA)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호부터 이코스타에 양서 추천코너를 두어 좋은 책들을 소개하여 함께 읽어나갈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께 도움을 드렸으면 한다. 이 추천의 글이 여러분들께 충분한 동기 부여와 도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첫번째 책으로 이번 2001년 코스타를 통해 <복음과 상황>지의 서재석 부장이 추천해 주신 존 스토트 목사(이하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선정해 보았다. 저자인 존 스토트는 사실 거의 전 세계의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어서 더 이상의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20세기를 거쳐 현재에까지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영적 거장이며, 성경 강해자, 저술가, 학자 등으로 알려져 있는 분이다. 1974년 로잔 언약의 입안자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로마서 강해는 로잔 언약에서도 참고서로 언급되기도 했다. 이 시대 대표적인 기독 지성인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검소하고 겸손한 삶을 산 것으로서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의 책 <기독교의 기본 진리>는 1958년 영국의 IVP를 통해 출판되었고, 한국 내에서는 1962년도에 처음으로 발행되어 2000년 1월까지 3판 19쇄 발행에 이르기까지 십여 만부가 발행된 스테디 셀러이자 이제는 기독교 고전으로까지 꼽히는 책이다.


존 스토트는 본서를 통해 ‘정직한 사람이 지적 자살을 행하지 않고도 동의할 수 있는’ 예수님의 역사성과 그 분의 신성에 대한 증거로부터 시작해서, 그 분의 인격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서 불신자들과 초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내려고 하고 있다.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차차 머리가 커져 비판 능력이 생기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면서, 신앙 자체를 버리는 편이 신앙의 증거를 찾기 보다 쉬워지게 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또한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하지 못 한 사람들 모두를 위해서, 존 스토트는 기독교의 가장 본질인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행사하신 세 가지 영역 중, ‘창조’하신 하나님 외에도,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글을 시작하고 있는데, 독자들에게 부지런하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순종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찾을 것을 촉구하며 구도자의 올바른 접근을 제시한다.


제1부에서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증거들을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과 그 분의 인격과 부활을 중심으로 펼쳐 나가고 있다. 여러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고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와, 죄와 생명과 진리와 세상의 심판에 대한 주장을 통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 그리고 기적과 표적들을 통한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이 나사렛 목수라는 역사적 인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셨다는 사실을 아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나가고 있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인격 편에서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을 역시 예수님 자신의 견해와, 제자와 친구들의 견해, 그리고 예수님의 대적들의 생각과 행동과 말을 통해서 증명해 보이며, 더불어 우리 스스로도 이기심과 죄가 없으셨던 예수님, 즉 사랑의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증거를 검토함에 있어서, 시체가 사라지고 수의가 헝클어지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이 경험했던 두려움으로 숨어 지내다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부활을 증거했던 극적인 변화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졌다는 사실들을 조목 조목 들어가며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일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존 스토트는 신약성경 부분에서 ‘예수님이 누구시냐’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가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도 주목하고 있는데, 그가 이루신 일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근간으로 한 제2부에서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해서 소극적 의미의 죄인 ‘결함’과 적극적 의미의 죄인 ‘위반’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을 ‘죄인’으로 단정하며 그 이유들을 십계명의 항목들을 검토하며 구체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스토트는 이렇게 죄의 보편성과 성격을 살펴본 후에, 이러한 죄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과 분리, 죄의 내적 부패를 통한 노예화, 즉 자기에의 속박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는 타인과의 갈등이 야기되었을을 이야기하며, 결론적으로 이러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본성의 근본적 변화 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죄를 폭로한 까닭은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우리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준비시키기 위함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제3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우리 죄인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를 통한 우리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십자가의 중심성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데 있어, 우리의 본(本)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려 죄를 담당하며 죽으신 그리스도를 마치 빠뜨려진 조각을 찾아 맞추듯 (베드로 전서를 중심으로) 잘 설명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죄 사함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포괄적인 의미로서의 구원, 즉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속죄를 얻고 하나님과 화목된 우리를 더 나아가 성령을 통해서 자기 중심이라는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며, 교회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사랑의 교제로 연합하게 하는 구원의 측면들을 종합적으로 또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이 해야할 일을 다루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이란 비록 진정으로 할지라도, 단순히 일련의 제안에 대해 수동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며,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겨 그를 우리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야 되는 실제적 의미와 구체적 설명을 살펴보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해야 하는데, 이는 죄와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우리 자신과 타인을 위해 살고자 하는 동기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를 위한 동기 이어야 함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와 그 분이 하신 일에 대한 어떤 사실을 믿는 ‘지적인 믿음’이 ‘신뢰의 행동’으로 옮겨지고 ‘지적인 확신’이 ‘인격적인 의탁’으로 바뀌어져야 함을 지적하며, 각자가 예수님을 개인의 주님과 구주로 초청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을 행동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고 있다. 즉, 존 스토트는 이렇게 분명하고 개인적이며 의지적이고, 긴급하고 불가피한 ‘행동’을 마음으로 결정하고, 진정한 기도로 주의 약속을 신뢰하며 할 것을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삶의 문을 예수님께로 열어 드린 사람들을 위해, 친밀하고 확실하며 안전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분의 자녀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만의 특권’이라고 말하며, 이 특권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때의 책임과 의무란 성경 읽기와 기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형제 자매로서의 교제를 바탕으로 한 ‘교회’에 대한 의무,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세상’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데, 스토트는 독자들에게 이를 잊지 말 것을 덧붙이며 이 책을 맺고 있다.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야 될 사람들은 이번 코스타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과 섭리하심으로 이번 코스타에서 예수님을 개인의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신 분들이 이 책을 꼭 읽으셔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보다 더 깊이 알고 이해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논리적으로 복음을 잘 설명하지 못하시는 분들에게도 본서는 아주 유익할 것이다. 그리고 조장으로 섬기셨던 분이나 섬기시기를 원하시는 분들, 아니면 지역 교회나 대학 캠퍼스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시거나 준비하시는 분들 중에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꼭 필독하시기를 권한다. 나 개인적으로도 오래 전부터 이 책의 명성은 듣고 있었지만 읽을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지난 해에야 비로소 이 책을 읽고는 얼마나 후회했었는지 모른다. 미리 읽어 두지 못해, 전도할 때나 성경 공부를 인도할 때 잘 활용하지 못한 것과, 불신자들과 초신자들에게 권하거나 선물하지 못한 것을 말이다.


이 책과 함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서로 손꼽히고 있는 책을 소개하자면,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 지성인인 C. S 루이스가 쓴 <Mere Christianity>이다. 우리 나라에는 1949년에 처음으로 <내가 믿는 基督敎(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김주병 목사가 번역하여 대한기독교서회(大韓基督敎書會)에서 발간했으며, 그 이후 1991년과 2001에 각각 은성사과 홍성사에서 <순전한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 외 존 스토트의 대표적인 다른 저서들은 <로마서 강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등이 있습니다. 참고로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바탕으로 존 스토트가 쓴 성경공부 교재가 <Christian Basics Bible studies >라는 제목으로 미국 IVP에서 발간되었는데, 한국 IVP에서 편역해 <베이직 시리즈 1 – 그리스도>로 출판했음을 알려 드린다. 이 책을 읽어가며 구도자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하면 복음 전도나 양육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