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훈] 예수 그리스도, 종으로 오신 하나님

eKOSTA 성경강해


예수 그리스도, 종으로 오신 하나님
빌립보서 1:27-2:16



편집 주
지난 8월호부터 3회에 걸쳐 빌립보서 강해를 연재하고 있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고 하면 딱딱한 음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집중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그만큼 풍성한 것을 맛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강해는 지난 KOSTA/USA-2001의 주제 성경강해를 재 구성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 읽기
빌립보서 2장 읽기


여는 말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어느 날 자기의 스튜디오에서 새 작품을 시작했다. 그는 커다란 캔바스(Canvas)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특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그림의 대상을 선택하고 구도를 잡고 윤곽을 그려 넣어 색깔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동안 열심히 그리다가, 아직도 작품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멈추고는 그의 제자 한 사람을 불러 “이 그림을 완성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자 제자는 “저는 이런 걸작에 손을 대서 완성할 자격이 없습니다. 제대로 끝낼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다 빈치는 이 한 마디로 그 제자를 완전히 침묵시켰다. “그래도, 내가 시작한 이 그림을 보면, 넌 이 그림의 완성을 위해 네가 지닌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마음을 갖게 되지 않느냐?”


이렇게 다 빈치가 그림을 시작했듯이,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어떤 작품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고난을 통해서 시작하신 그 일을 우리 더러 완성하라고 하신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본보기를 보여 주는데, 이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함께 살펴 보도록 하자.


빌립보 교회의 배경


지난 8월호에서도 말한 것 같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교회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 이 교회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를 이끌던 두 명의 리더 사이에 불화가 있었고, 그 주위에 파당이 조성될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아마도 자세한 내막을 에바브로디도에게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두면 이 교회가 파국에 처할 수도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빌4:2). 바울은 유오디아에게 권하고, 순두게에게 무언가 호소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예 이름을 들어가며 호소할 정도로 이 불화는 이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2절에서 직접적으로 대놓고 호소하기 전에, 그는 2장에서 먼저 그 기초가 되는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보면, 1장 27절-2장 16절은 빌립보서 전체에서 첫번째의 권면을 담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 (1) 1장 27절-1장 30절, (2) 2장 1절-11절, (3) 2장 12절-18절. 이 세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려면 먼저 첫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을 살펴야 한다. 1장 27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한 다음, 그 구체적 내용을 세 가지로 나타내 주고 있으며, 2장 12절에서도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한 다음, 그 구체적 내용을 세 가지로 나타내 주고 있다.















1장 27절 2장 12절
(1) 하나되는 삶 (1) 화합하는 삶
(2) 각자가 신앙 인격이 성숙해 가는 것 (2) 신앙 인격이 성숙해 가는 삶
(3) 그 결과로 복음이 증거되는 삶 (3) 그 결과로 복음이 증거되는 삶

즉, 서로 사랑하며, 신앙 인격이 예수님을 닳아 가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라는 말로 결국 첫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이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두 번째 부분인 2장 1절-11절이 나타나는데, 이런 문맥 안에서 이 말씀은 먼저 ‘하나 됨’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신앙 인격의 성장’은 3장에서 다루어진다. 하나 됨과 신앙 인격의 성장, 이 두 가지가 이루어졌을 때야 비로소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보았던)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먼저 안부를 통하여 자연스레 실례를 보여줬고 이제는 그 원리를 가르치고 호소하고 있다. 마치 당대의 피아니스트 Arthur Rubinstein이 제자들 앞에서 기막힌 연주를 한 다음, 그 원리와 방법을 가르치고, 그대로 실행할 것을 호소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 호에서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세 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그런 사랑을 가지게 되느냐’고 궁금해할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다. 빌립보서 2장에서 여러분은 그 단서를 얻게 될 것이다.


빌립보서 2장 1절-11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절-4절은 하나 됨(Oneness)을 촉구하는 바울의 권면이고, 5절-11절은 하나되는 데 꼭 필요한 자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나 됨(Oneness)


이제 하나 됨을 촉구하는 바울의 권면을 살펴 보자. 그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격려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나, 성령의 어떠한 교제나, 어떠한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이라며 그들에게 주어진 네 가지의 엄청난 특권을 일깨워 주고 있다. 무슨 말인가? 첫째로 ‘그리스도 안의 격려’란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받는 큰 격려와 용기’를 말한다. 둘째로 ‘사랑의 위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에서 확증된(demonstrate)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셋째로 ‘성령의 교제’란 일차적으로는 ‘성령님과 나와의 교제’를 말하고 나아가 ‘성령님을 통한 우리들 사이의 교제’를 일컫는다. 넷째로 ‘긍휼이나 자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간에 가지는 마음의 자세’이다.


이 네 가지는 정말 엄청난 것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그 자녀들 중에는 빌립보 교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루디아와 간수장이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며, 거듭난 사람들만이 보이는 이 특징을 그들 가운데 생생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지금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 그때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 안의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이나 자비가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아마도 그들은 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울은 계속 말한다. “여러분,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완전해 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바로 2절의 내용인 것이다.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예를 들어보자. 신혼 부부들을 보고 있자면 (낯간지러운 소리를 대담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자기 나 사랑해?”라는 질문을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주로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이야기들이다. 즉, “정말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벗은 양말은 반드시 빨래통 안에 넣어줘요” 라든지, 뭐 그런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대해 행동을, 어떤 일을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2절을 보면,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 ‘한 마음’ 등의 단어가 나열되어 있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빌립보 교회가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되라’는 바울의 요구는 좀 더 “delicate”한 차원에서 받아 들여야 한다. 먼저 ‘아닌’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떠벌이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교회를 간다면서 넌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고 있느냐?” 그 친구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나야 물론 우리 교회가 믿는 것들을 믿지.” 그는 다시 묻는다. “그래, 그러면, 너희 교회는 무엇을 믿냐?” 교회 다니는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거야, 우리 교회는 내가 믿는 것을 믿는다.” 그러자 또 다시 묻는다. “그러면, 너와 너희 교회는 무엇을 믿는가?” 교회 다니는 친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똑같은 것을 믿는다.”


그러나,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뚜렷한 대상이 없는, 일치를 위한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찬성률 100%로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개성도 다르고, 의견도 다를 수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마치 성가대가 합창을 할 때,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가 멜로디를 중심으로 각각 다른 소리를 내더라도 그것이 기막힌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이때 각자가 멜로디에 맞추려는 최선의 ‘자세’와 최선의 ‘태도’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 ‘한 마음’에 해당한다. 결국 바울은 2장 1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풍요함이 얼마나 큰지를 먼저 일깨워 주고는, 2절에서, 서로 생각과 개성은 다르더라도 어떤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를 공유하라, 그래서 하나됨을 이루라고 호소한다. 4장 2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권면했던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도 바로 이런 자세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때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3절에서 나타나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어휘 중 하나인 ‘겸손’이다. 바울은 그런 겸손의 최상의 예를 5절에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빌2:3-5).


겸손


‘겸손’이란 교회 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다. 그런데도 사실 가장 발견하기 힘든 덕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평균 5분마다 한 번 꼴로 섬긴다는 말을 사용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섬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보기를 원하시는 덕목이지만 어쩐 이유 때문인지 가장 안 되는 것이 겸손인 것이다.


바울은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교만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보는 잘못된 시각의 문제, 곧 ‘허영’인데, 영어로 “I am somebody” 라고 말하는 태도를 말한다. 소위 말하는 공주병이나 왕자병의 증상과 비슷하다. 둘째는 그런 허영의 시각으로 자기 권리나 주장을 내세우는 자세, 곧 ‘다툼’인데, 영어로 “Me first!” 라고 소리치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이 요즘 들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스스로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당신, 어째 기도가 좀 부족한 것 같아” 라는 말을 한다면, 대부분은 언짢게 생각할 것이다. 왜 그런가? 나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존 의식이 누군가에 의해 손상 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허영의 문제이다. “그래 좋다. 그럼 너는 얼마나 잘 하느냐? 당신 QT 해? 나는 하는데….” 이렇게 되면 이것은 다툼의 문제가 된다. 이런 다툼이 더 진행되면, “너 나이 몇 살이냐?” 라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 문화는 호칭에 민감한 문화로 교수, 교수님, 박사, 박사님이 서로 다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접 받기를 좋아한다. 만일 제자가 나보고 Mr. 장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싸우자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건 격식(protocol)이라는 것을 유난히 따지는 문화가 아닌가.


자기가 얼마나 겸손한지 혹은 교만한지 알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리트머스 시험을 해 보라. 첫째는 ‘다른 사람이 나를 비판했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하는가’하는 시험으로, 이를 통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곧 이 시험을 통해 내가 스스로에 대한 ‘허영’에 빠져 있는지 아닌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장기(長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떠들며 화제를 독점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시험이다. 이때 만일 속으로 부글부글 한다면, 나도 알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이 시험 결과는 곧 허영심을 못 이겨 이제 ‘다툼’을 하고자 하는 나의 본질을 드러낸다. 교회가 분열되는 곳을 잘 보라. 그곳에는 반드시 허영과 다툼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속한 성경 공부 그룹 안에 긴장과 불화가 있는가? 틀림 없이 허영과 다툼이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겸손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빌2:3-4) 이 구절은 겸손도 (교만과 비슷하게) 두 가지 자세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Consider others better than yourselves)는 것이 첫째 자세이고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둘째 자세이다.


명백하게,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허영심(“I am somebody”)과는 대조되는 자세이며,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다툼(“What is best for me”)과 대조되는 “What is best for you”의 자세다. 결국 ‘겸손’이란 (허영 대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내적인 자세를 가지고, (다툼 대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고 섬기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사실 이런 자세는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로마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다른 사람보다 (물리적인 힘이든, 권력이든) 더 강해지는 것, 무지막지하게라도 지배하는 것이었다. 소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를 가졌던 유일한 부류는 ‘노예’들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세를 최상의 미덕으로 들고 나온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도 힘의 논리가 앞서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앞에 돈키호테 같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지만, 우리는 ‘종’의 논리로 낮아져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 됨을 누리고 싶은가? 개성과 기질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천국의 하모니를 이루고 싶은가? 겸손하라. 물론 겸손이 힘들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안다. 그렇지만 그 최상의 예를 보인 분을 보면서 겸손하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 최상의 예로 들고 있다(빌2:5-11). 아브라함을 예로 들 수도 있었고, 모세를 예로 들 수도 있었고, 다윗을 예로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시는 그 분이 어디까지 낮아지셨는지를 보여준다 –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까지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본문은 초대 교회의 찬송가의 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리스어에 능통한 사람들의 말을 빌면, 원문은 라임(rhyme)과 미터(meter)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산문이 아니라 운문, 운문 중에도 노래의 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초대 교회들이 불렀던 찬송가이고, 빌립보 교인들도 잘 아는, 어쩌면 그들이 바울과 함께 불렀을 지도 모르는 찬송가라면, 서로 잘 아는 찬송가의 가사를 가지고 그들에게 호소를 하는 셈이 된다. 두 번째 특징은 ‘낮아짐’과 ‘높아짐’이 대조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높은 곳에서 말할 수 없이 낮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상상할 수 없는 곳으로 높아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때 ‘낮아짐’과 ‘높아짐’의 하나 하나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그분의 낮아지심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보자.


7절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말씀은 그분을 하나님 자신이었으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 곧 ‘Three persons in one Godhead’이다.) 그리고는 그분의 낮아지심을 소위 점층법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을 비워 종이 되셨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죽기까지 섬기셨다·죽임을 당하셨다.



죽임을 당하시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20년 전, 12·12 사태 후에 있었던 일로 육군 참모총장이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 아마 우리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고 사령관이 다시 머리 깎고 훈련소에 입대해서 군가 부르고 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그것과는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으로 오시되, 왕이나 장군이나 학자로 오실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분은 종의 신분으로 오셨다. 그분이 태어난 곳은 쥐나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외양간이었다. 목수로 출발해서 한때 랍비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분의 삶을 돌이켜보면 철저히 하나님의 종(servant)이었고, 인간들의 종이었다. 그분의 삶은 인간들의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부분을 씻어 주려고 자신을 바친 종의 삶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몸을 던져 죽임을 당하시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는 반역자들이나 가장 흉악범을 처형하는 사형 도구로, 곧 ‘치욕’의 상징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었다 – 신명기에서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마디로 ‘치욕’과 ‘저주’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치욕과 저주를 한 몸에 지닌 채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아예 저주 그 자체가 되셨다고도 말하고 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 그 자체가 되셨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유대인 꼬마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의 남자아이로 아주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두뇌로 그 학교 사상 전무후무한 문제아가 되었는데, 갖은 기합을 다 받고 벌이란 벌은 다 받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드디어 그 학교 생긴 이래, 3학년으로서 최초로 퇴학을 당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 꼬마가 원래 다니던 학교는 유대인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였는데, 부모들이 공립학교로 전학을 시킬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도 3개월을 못 버티고 또 퇴학을 당한다. 이제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모는 유대인들이 잘 안 다니는 카톨릭 사립학교로 아들을 보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학교를 옮긴 그 다음 날부터 그 꼬마가 변하기 시작했다. 변해도 180도로 변한 것이다. 그 부모가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그 꼬마에게 묻는다. 도대체 너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그 꼬마가 실토를 하기를, 등교 첫날 신부님 방에 인사하러 갔다가 다시는 장난 안 치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꼬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에 신부님이 이제는 장난을 그만 치라고 타이르는데 말 같지도 않아서 대답도 잘 안 했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뒤를 썩 돌아보더란다. 그래서 자기도 따라서 봤더니 벽에 십자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 잘 보니까 어떤 아저씨가 매달려서 벌을 서고 있는데 반쯤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자기 머리털 나고 그렇게 몰상식한 기합은 처음 봤다는 것이다. 신부님이 다시 자기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짓는데 소름이 확 끼치더라며, 그리고는 다시는 장난 안 치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어떤가? 철 없는 아이지만, 십자가의 본질을 제대로 본 것 같지 않은가? 그 십자가에 자기가 매달릴 것을 생각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서 저주와 치욕을 당해야 할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와 여러분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이신 주님이 그곳에 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가? 바로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 높고 높은 곳에서 낮고 낮은 곳으로 오신 그 거리만큼이나 크고 크신 사랑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주님께서 우리 대신 저 저주의 자리에 계시는데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마땅하겠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기 자존심 내세워서 형제들에게 상처나 주고 있지는 않은가? 자존심 좀 상했다고 형제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이 종이 되어 죽음을 당하셨는데, 우리는 뭐가 되어야 마땅한가? 우리가 포기 못할 다툼이 어디에 있으며, 포기 못할 허영심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용납 못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제는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가는 길에는 이미 먼저 간 발자국이 있다. 피 묻은 발자국이 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우리도 낮은 곳에 가서 형제들의 더러운 곳을 씻어 주며, 그들을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랑을 알았던 바울은 그 주님을 평생 사랑하며 따랐다. 그 사랑으로 환경의 어려움, 인간 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죽음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내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먼저 돌아보셨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을 향해서,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본이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도저히 주님이 갔던 길을 갈 수 없다. 정말 두렵고 힘들 것 같아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존심에, 내 성깔에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분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9절부터 나타난다. 이제 9절부터 그리스도의 높아짐이 나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셨을 때 하나님께서 는 그분을 높이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스스로 높아지는 자를 낮추시고 스스로 낮아지는 자를 높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그 영적인 원리는 구약에서부터 많이 보아온 것이며, 주님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좀더 중요한 원리를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보좌는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이며, 이제 그분 앞에서 만물이 무릎을 꿇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8-19).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만물을 발 아래 두신 이가 바로 우리 주님이실진대, 그 어찌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이제 우리로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게 하신다. 그분의 능력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낮아짐을 감당하게 하신다. 우리는 도저히 스스로는 낮아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 고난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이 부활의 능력으로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2:12)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하나됨을 이루고, 주님 닮은 모습으로 자라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위에 드러내라고 말하고 있다.


맺는 말


이번 호의 본문, 빌1:27-2:16절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삶’ 혹은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인 ‘하나되어 서로 사랑하는 삶’에 관해서 함께 살펴봤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을 보면서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여서, 우리도 낮아져서 섬길 때, 진정한 하나됨을 이룰 수 있고, 서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봤다.


초대교회 시절 어떤 믿지 않는 역사학자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사람들이 반드시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예측은 결국 실현되었다. 주님 십자가 때문에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그들의 섬김과 사랑이 교회 안에서 끓어올라 밖으로 폭발했을 때, 결국엔 전 로마 제국을 뒤집어 놓지 않았는가!


우리가 이런 섬김과 사랑을 교회 안에서 먼저 회복해야만 한다. 이 일에 KOSTAN들이 앞장서야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 섬김과 사랑이 교회 안에서 다시 한번 끓어서 밖으로 폭발하여, 한국을 뒤집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 주님께서 2000년 전에 먼저 시작하신 낮아지심과 섬김, 그것은 우리 대에, 우리가 감당할 몫을 남기고 있다. 이 일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 가는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시기를 기도한다.

[반영운] 나의 유학 생활, 그리고 작은 제언

이코스타 2001년 9월호

학제가 한국과 다른 미국에서의 9월은 새로운 Academic Year가 시작되는 달이다. 그새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의 곳곳에 흩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대부분 태평양을 건널 때는 두려움도 있지만 그 보다는 청운의 부푼 꿈을 안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무언가 해 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으리라 생각된다. 십년 전에 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김포 공항을 이륙하던 날 하늘에서 신기하기도 하고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조마 조마함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유학 생활을 주께 의탁하면서 나름대로의 각오를 몇 페이지 정도의 글로 정리해 보기도 했다.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편집부에서 이 달 초점의 방향이 학업 시작에 맞추어 어떤 관점으로 유학 생활 및 학업을 바라보고 준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전을 주는 메시지이니 맞춰서 원고를 써 보내라는 명령을 받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써야 할 글의 주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터라 감히 어떤 도전의 메시지를 줄 자신이 도무지 나지 않아 고민하다가, 도전의 메시지는 되지 않아도 실패의 경험담을 나눠 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부족한 경험과 생각들이 유학 생활 새내기들이나 나와 같이 유학 생활 중에 힘들어 하고 방황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혹시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부끄러운 실패의 고백은 한국에서의 대학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을 선택한 동기와 대학 시절에 경험한 편협하고 부끄러운 방황에 대해서는 이코스타 2001년 1월호에 실린 졸고, ‘지성소로 지성소로’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군대 문제와 아직 결론 나지 않은 장래에 대한 고민을 안고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나는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와 DCF라는 선교 단체에서의 힘든 제자 훈련과 개인적으로 하는 양육의 빡빡한 스케줄에 허덕이고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 갈 때는 환경이라는 화두를 잡고 막연히 출발을 했으나 막상 들어가서는 도시 계획을 공부하게 되었고 마땅히 환경을 구체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더 더욱 공부에서는 좀 멀어지고 막 뜨거워지고 있던 제자 훈련과 개인 양육에 흠뻑 빠져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서도 뇌리를 떠나지 않고 늘 소화되지 않은 것 같이 속에 잠재해 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처음 예수 믿을 때에 내심 다짐하고 희구해 오던 전임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부담감은 물론 학부 시절 경험했던 교회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한 막연한 책임감이 발동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때는 군대도 아직 마치지 않은 상황(!)이어서 군대를 마치기 위해 석사 장교라는 제도에 목을 매고 있던 터라 함부로 공부를 그만 두고 신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신 없이 방황하며 분주히 대학원 1학기를 지내고 있던 어느 날 광화문에 있는 말씀사에서 작은 책자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겉 표지에는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고 제목은 김교신 평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표지 인물의 인상이 곧고 강직함에 마음이 끌리어 책을 사서 몇 줄 읽다가 얼마나 감동이 되던지 그 날 밤 내내 그 책을 읽으며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일개 중학교 선생으로서 신앙과 삶이 일치되어 나타나는 삶의 역정은 그 당시 방황하던 젊은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순수한 속죄의 복음에 사로 잡혀 펼쳐 내던 그의 성경 공부와 교육과 진실한 삶을 통한 전도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이후 그의 저작과 우찌무라 간조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나름 대로 그 때까지 하던 질문과 방황들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성경에 대한 폭 넓고 심도 깊은 이해, 발견된 진리를 삶으로 옮겨내는 실천력, 박물학(지금은 지리학) 교사로서의 전문적인 지식과 깊은 연구, 영혼은 울리는 살아 있는 교육, 소화된 만인 사제의 정신, 교파와 신분을 초월하여 복음만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동지들과의 생명을 주는 교제, 타락한 세상을 향한 냉철하고 뜨거운 예언, 그리고 억눌린 백성들(특히 소록도의 나환자들)을 향한 애끓는 사랑 등이 그 당시 여름 방학 내내 받았던 감동의 편린들이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전임 목회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다소 누그러지고 무엇보다 만인 제사장의 정신에 입각하여 생활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발견된 진리를 생활 속에 실천하는 생활 예배를 드리는 부분에 깊이 매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워낙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위와 같은 것은 생각으로의 동의일 뿐 대학원 기간 동안 예전과 비슷한 생활을 지속할 수 밖에 없었다. 교회 봉사와 양육과 제자 훈련을 겸하면서. 주께서 베푸신 긍휼에 힘입어 부족한 대로 대학원을 졸업한 후 6개월의 군대 훈련을 마치고 나서 다시금 진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 때 대학원에 가게 되었던 주된 이유였던 환경이 머리에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국내에서는 환경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었던 때라 좀 더 잘 공부해서 피폐해져 가는 환경을 살리는 전문인이 되어보자는 생각에서, 학부 시절 영향을 받은 ‘Design With Nature’라는 책의 저자가 있는 학교로 유학을 가기로 마음을 먹고 1년 반이라는 준비를 거쳐 박사 과정의 입학 허가를 얻게 되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내심 유학을 하게 되면 가능하면 한국인 교회를 다니지 않고 미국인 교회에 다니면서 다양한 경험과 함께 성경에 기반을 둔 환경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과는 달리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던 첫날 저녁, 마중 나온 후배를 따라 한국인 교회의 청년회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 이후 9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충실히 교회와 청년회의 일에 다시 몰두하게 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유학 생활은 경제 문제 해결이라는 초미의 관심사와 맞물리면서 교회 안에서 운영하는 한글 학교에 매이게 되었고 이후 한글 학교의 실제적인 운영의 책임을 맡으면서 유학 생활은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삐걱대기 시작했다. 이후 한글 학교와 교회 청년회와 성가대 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공부에 대한 절대 시간을 확보해 내지 못하게 되고 공부는 어쩌면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가끔씩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으나 교회에서 자의 반 타의 반 맡겨진 일들은 이에 대한 보다 깊은 고민과 반성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이라는 절대 명제 하에서 유학 생활을 종교적으로 몰고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 미국 사회와 한인 사회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최소한으로 필요한 공부와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자격들을 갖추어 가긴 했으나 늘 허덕이고 끌려가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서 논문 자격 시험을 앞 두고 수양회와 부흥회를 참석하고 나서의 일이다. 이제까지 해결되었다고 생각되었던 전임 목회자에 대한 생각이 다시금 밀고 올라왔다. 유학을 결정하고 올 때는 분명히 기독교인 환경 전문가로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정신에 맞게 일하며 주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목표였었는데…. 기도하면서 처음 유학을 결정할 때를 떠 올리며 곰곰 생각해 보니 이것은 아마도 전공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자신감과 흥미를 잃은 데서 온 것이라는 결론이 났다. 그 당시 생각에는 어쩌면 전임 목회자가 되면 맘대로 시간의 구애 없이 성경도 공부하고 기도도 맘껏 하고 전도도 지치지 않을 만큼 하고 찬양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이 합리화의 근거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 때 습관적으로 읽던 성경과 방 한 구석에 쌓아 두었던 세계관에 관한 책들과 김교신 저작들을 다시 심각하게 읽고, 또 주님께 회개 및 간구의 기도를 드리고, 그리고 코스타와의 만남을 통해서 다시금 방향을 정리하게 되었고 주께서 허락하셨던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간이었던 것 같다. 그간 밀린 공부들을 따라 잡느라 힘은 들었지만 주께서 은혜를 허락하셔서 한두 가지 정말 불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바쁜 생활들을 대부분 유지하면서도 논문도 무사히 쓰고 전공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책임감도 깨달으면서 유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황 덕분에 졸업이 늦어지긴 했으나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청소년기와 대학 생활 동안 뇌리에 박혀 있던 점검되지 않은 가치관들을 정리하고 앞으로 해야 할 방향을 얻게 되었다는 데서 주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혹시 있을 지 모르는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한두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이러한 방황과 실패는 철저히 나 개인의 불신과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 한편 교회에서 했던 봉사나 섬김이 모두 다 잘못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총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일에 너무 치우쳤었고, 교회 또한 바람직한 대안들을 청년들에게 제시하지 않고 열심있는 청년들을 교회의 일에 묶어 두는 경향이 있음을 아픈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 뿐이다.


독자에 따라 느낀 바가 다 다르겠지만 나 나름대로 유학 생활을 이렇게 방황하면서 보낸 주된 이유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고 싶다. 첫번 째는 바로 (지난 1월 호에서도 밝힌 바 있는) 내가 경험한 한국 교회 안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이원론적인 세계관 때문이다. 즉 성(聖)과 속(俗)의 그릇된 구분에서 비롯되는 교회당 중심적인 가치관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와 관계되거나 선교라는 이름과 연결되는 것이면 지극히 거룩하고 선한 것이기에 그것은 공부보다도 중요하고 가족보다도 중요하다고 가르침을 받고, 또한 가르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해지면 바로 나같은 극단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함께 교회에 다니는 형제 자매들 중에 열심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번 씩은 목사가 될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고, 이제 막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선교사나 전임 목회자로 나가야만 주님께 가장 충성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간혹 본다. 어떤 형제는 자신의 공부는 제쳐두고 교회 일에 몰두하는 것을 본다. 나중에 뭐가 되려고 하는가 물어보면 목사가 되어서 선교사가 되려고 한다고 대답하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물론 훌륭한 각오이고 칭찬할 만한 용기이지만 가까이서 지켜 보는 형제는 어쩐지 전공 과목 공부는 소홀히 하고 있고 학점 따기에 바쁘다. 한 때 그는 지금 공부가 좋아서 유학을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직인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서 주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고 담담하게 그의 소신을 피력하기도 한다. 정말로 세상의 일들은 썩어질 것들이라서 가치가 없고 전도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영원한 것이라서 그 일에 전념하는 것만이 더 없이 성스럽고 복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둘째는 ‘하나님 나라’라는 세계관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말을 대학원 시절에 처음 접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죽으면 가는 곳, 그것도 어떤 장소라는 개념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품고 있는 내용은 장소성을 뛰어 넘어서 통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만일 하나님의 통치가 더욱 넓어진다는 것을 우리의 생각과 주권에 관한 것으로 보고 우리의 현실 생활 전반과 연결시켜 이해하기만 해도 우리의 행동 양식은 좀 더 균형 잡히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금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고 있는 일 그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구체적인 현장이자 나의 신앙을 확인하고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공부에 대한 관심도 많이 달라져야 한다. 복음 전도를 위한 수단이나 마지 못해 하는 밥벌이의 수단 정도로 치부해 온 우리의 공부나 일터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가 더욱 요청된다. 요즘, 몇몇 시민 단체와 연결을 맺으면서 그 내부의 구성 인원들을 파악하며 내심 놀란 것이 있다. 약 40여 명이나 되는 구성원 중에 기독교인은 두 명이고 그 중에 한 명은 그나마 예전에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한다. 참고로 그 단체의 전임 운동가들의 월급이 약 오십 여 만원이라고 한다. 급여 때문에 기피하기도 하겠으나,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조금 색깔있는 것은 지나치게 세상적으로 여기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예전에 운동권에서 핵심 멤버로 일하던 분이 기독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예전의 모습을 버리고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던지 참으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지금의 굵직 굵직한 교회의 중심 멤버들 중에는 많은 수가 국회의원이고 정부요직과 재계의 인사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지금 보여 주고 있는 타락한 모습이나 정계나 재계의 인물들이 보여 주는 모습들 속에 들어 있는 두 얼굴의 정체들을 보면서 뭐라 할 말을 잃는다. 나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모습이 있음을 부끄러워 한다.


셋째는 생활 속에서 실현되는 참 신앙의 Role Model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나의 경험이 부족하고 시각이 열리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안 된 소리이지만 기존의 조직 교회 안에 균형 잡힌 신앙을 소유하며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삶 속에서 실천해 내는 본보기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참 정신적으로 예민한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이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 속에 참된 신앙 싸움을 싸워가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신앙 교육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 속에는 안타깝게도 그런 모습이 너무나 드물고 간혹 있다 해도 숨어 있어서 찾아 보기가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비근한 예로 교회에서 가장 높은 권위로 큰 목소리를 내는 목사부터 현실적인 삶에 뿌리를 두지 않고 있어 실제적인 경험이 없고 대부분의 생활을 교회당이라고 하는 담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머리로써만, 입으로써만 교리적으로 진리를 외치고 있으니 기존의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적인 전통 속에서 그러한 모델이 여과 없이 성도들의 뇌리에 박히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암암리에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을 지고지선의 하나님의 일로 포장하고 있는 것도 젊은이들이 삶의 지표를 설정할 때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또는 “죄 많은 세상은 내 집 아니네”와 같은 복음성가들이 자칫하면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의도와는 반대로 세상을 떠나, 아니 마지 못해 살아가면서 보다 선한 일을 위해 나머지의 인생을 바치겠다는 쪽으로 젊은이들을 몰고 가기도 하는 것을 종종 본다. 각종 부흥회나 청년 집회에 가보면 마치 선교사 모집 대회를 방불케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언가 정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엊그제 한 형제를 만났는데 그 형제에게 심각한 고민이 있다기에 들어 보니 지금까지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많이 놀랐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사귀는 아가씨와 그 어머니가 다짜고짜로 선교에 헌신하는 것을 결혼의 조건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한참을 이야기 하면서 힘들어 하는 형제에게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이 삶을 나누며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져 나갔다는 사도행전의 기사를 읽을 때는 늘 마음에 통쾌함을 경험하곤 한다. 천막쟁이 (Tentmaker)이자 전도자로서 바울이 살아가던 삶의 모본, 정치가이면서 멋지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던 느헤미야, 팔려간 노예의 신분을 극복하면서 결국 애굽의 총리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냈던 요셉, 농부의 신분으로서 예언 활동에 나섰던 아모스, 자주 장사 루디아 그 외 무수히 많은 성경의 인물들의 정신과 삶을 본받으려는 진지한 노력이 그립다. 초대 교회에 그 많던 노예들이 그들의 노예신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으로 주인을 사랑하고 섬기며 자신들의 일에 열심을 냈을 때 훗날 로마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대단한 세력으로 변해 있었던 예를 역사 속에서 찾아 보고 그 진정한 힘을 배워야 한다. 먼저 가정에서부터 철저히 만인제사장의 정신을 실천하고 교회에서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십자가를 지는 정신이 살아 나도록 서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넷째는 신앙의 공동체성의 부족이다. 신앙이 다분히 개인적인 체험을 우선한다는 것은 한편 좋은 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으로 변하면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독단적이고 무모함을 지니게 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토레이 신부의 지적처럼, 교회는 가르침만을 위해 모인 모임이 아니라 (가르칠 교(敎) 모을 회(會)) 나눔을 위한 모임(사귈 교(交) 모을 회(會))이 될 때 권면과 가르침과 용납함과 서로 존경함이 어우러지게 되고 함께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단계까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인격적인 교제를 인도하시고 그런 중에 생겨나는 참 교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람이 성숙하고 세상을 이길 힘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이민 교회를 포함하여 지금의 교회는 특히나 성도간의 교제가 지극히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면이 있다. 교제 자체도 사교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경우를 종종 본다. 어른들은 사업의 목적과 인간 관계를 넓히려는 잘 계산된 면이 없지 않고 젊은이들은 이성과의 교제나 외로움을 달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정말로 공동체가 살아있다면 잘은 모르겠으나 청년기에 중요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눈에 뜨이면 민감하게 눈치를 채고 조언과 도움을 주려고 발버둥을 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마치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을 대하면서 그 부족함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듯이. 돌아보면 그래도 나는 교회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과 유학 시기에 교회의 어른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만일 공동체가 사상적으로 신앙적으로 무장한 상태였다면 나와 같은 방황과 고민은 최소화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로서 교회에 대한 이상과 꿈을 꾸게 된다면 이러한 성경적인 공동체를 이뤄가면서 그 속에서 개인도 공동체도 성숙해 갈 수 있었으면 한다. 성도간의 진정한 교제를 통해서..


실패자의 용기를 가지고 주제 넘기는 하지만 처음 유학 생활을 시작하거나 나처럼 방황하시는 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 싶다. 위에서 다 한 말들을 순서적으로 이해가 편하도록 정리하면 제언들이 될 듯 하다. 첫째는 유학 생활 동안의 시간 배분에 있어서 교회 생활과 학업과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쌓는 데에 지혜가 있어야 할 듯하다.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하는 깊이 있는 성경 공부에 시간의 삼분의 일 정도를 썼으면 한다. 그 삼분의 일 속에 첨부하고 싶은 것은 깊이 있는 신앙 서적과 함께 인문학 및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는 것도 포함하고 싶다. 그리고 성경의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작은 그룹이 형성되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공부했으면 한다. 번역된 성경을 읽는 것도 좋은 일이나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근본을 성경의 정신에 둔다면 우리 각자가 성경을 나름대로 원어에 충실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일을 하는 목사나 성경 번역가들의 몫으로 돌려서는 안 될, 나름 대로 학문적인 영역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관심 써야 하는 중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나머지 삼분의 이는 전공 공부와 같은 전공을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넓혀가는 데에 썼으면 한다. 또 한편 전공을 어떻게 기독교 신앙으로 소화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 없이 성서를 통해 묻고 성서를 통해 답을 찾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과거 나는 삼분의 이는 교회에 관계된 일들에 삼분의 일은 전공은 물론 관계를 쌓는데 사용했었다. 이를 위해 각 지역 교회에서는 교회 청년들을 섬김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고 장차 한국의 일꾼들을 키워낸다는 사명감으로 좋은 본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랑의 교제의 대상으로 여겨 주었으면 한다.


둘째는 사회 봉사 활동을 포함한 폭 넓은 경험을 했으면 한다. 지나치게 종교적인 명분에 매이지 않고 사회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서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기회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공학을 하는 사람도, 이학을 하는 사람도,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 더욱, 순수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우리가 현재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을 좀 더 잘 알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교회에서 비전 트립이라고 하면서 해외 선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 내만 하더라도 얼마든지 구체적으로 배울 것이 많이 있는지 모른다. 문화와 사회 체제, 가정 운영, 빈민 대책, 정치 운영, 외교 정책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배우고 점검하면서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우리의 것들을 확립시켜 갈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작업은 장차 우리가 책임있는 자리에 들어 갔을 때 사람과 사회를 바람직하게 섬기기 위해서 해야 하는 필수적인 일이라고 본다. 지역 교회에서도 이러한 시각으로 젊은이들에게 도전하고 그들을 바람직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훈련시켜 주었으면 한다.


셋째는 여가 선용에 대한 것이다. 나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테니스 라켓도 잡아보고 실내 수영장에도 들어가 보았다.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경험하게 된 복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테니스도 아직은 미숙하고 수영은 거의 개헤엄의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스트레스가 쌓이고 힘들 때 동료들과 함께 하는 다양한 운동은 너무나 개운하고 보람 있는 여가 선용이라고 생각한다. 운동도 하고 친구도 사귈 수 있으니. 그러나 무엇보다도 권하고 싶은 것은 계획을 잡고 하는 여행이다. 도시 뿐만 아니라 광활한 미국의 산야를 누비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스스로 공부해서 발로 다니는 여행 속에서 얻는 체험은 평생을 통해 깊이 간직할 수 있는 재산이 된다. 혼자 하는 외로운 여행도, 몇이 짝을 지어 하는 그룹 여행도 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영역이라서 죄송한 말씀이지만 해외 여행도 권하고 싶다. 지역 교회에서 선교 훈련의 일환으로 여름이나 겨울에 가는 선교 여행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꼭 선교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타 문화를 이해하며 사람들을 접하고 배울 수 있다는 면에서 적극 추천하고 싶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그리스도 안의 식구들과 오랫동안 함께 머물면서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모르는 백성들도 보고 그들에게 배우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나누어 주고….


넷째는 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우리 개인의 하루 하루의 삶은 그냥 무가치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부활 신앙과 종말적인 신앙으로 하루 하루를 영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루 하루를 의미 있게 정리하고 되돌아 보게 될 것이다. 또 허락하실 내일을 위해서. 따라서 하루 일과는 물론 성경 묵상과 책 읽은 소감들을 정리하는 일기를 매일 조금씩 적어갈 것을 권하고 싶다. 예전에 김교신 전집을 읽으면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나의 경우 부족하지만 그 새 몇 권의 노트에 하루 일과, 고민, 회개, 소감 및 묵상 등이 적혀 있다. 게을러서 빼먹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너무 괴로워서 한 달 이상 손을 대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것들이 개인의 신앙 싸움의 역사로 남아서 개인을 하나님의 역사 하심 앞에 무릎 꿇게 하며 겸손하게 하고 또한 그 사랑 때문에 담대하게 하는 좋은 자료들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기를 쓸 것을 권하고 싶다. 매일 글을 쓰면 나중에 논문을 쓸 때도 글 쓰는 훈련이 되어 있어서 조금은 더 정리된 글 솜씨로 좋은 논문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섯째는 실제적인 시간관리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에서 물론 언급이 된 것이긴 하나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How)에 대한 면에 초점을 두어 말하고자 한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예전에 코스타에서 장평훈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15분 아니면 30분 마다 끊어서 시간을 계획하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면 실제적으로 짜임새 있는 시간 운영을 할 수 있다”고 배우고 그렇게 해 보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다. 아직도 시간 관리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도 이 방법을 권해 보고 싶다. 그리고 우선 순위를 반드시 정해서 급한 것 중심이 아니라 중요한 것부터 우선적으로 시간을 배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 묵상이라든지 매일 드리는 기도라든지 일기 정리라든지 하는 빼 놓을 수 없는 것들을 아침 저녁에 정확히 확보하고 나서 일과 시간에는 전적으로 공부와 일에만 몰두 할 수 있도록 하는 구분된 시간 운영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섬김과 여가 시간에 대한 확보도 중요하다. 실제로 시간을 짜고 계획하다 보면 상당한 시행 착오를 경험하면서 주께서 주시는 지혜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주께서 허락하신 젊은 시간의 유학 생활이 주님을 위해서 개인을 위해서 보다 더 준비되고 성숙한 인격으로 거듭 나기를 바란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주 안에서 꾸고 있는 나의 작은 꿈을 소개하고 싶다. 기나긴 유학 생활의 고민과 방황을 통해 주께서 심어 주신 작은 꿈들이라고 감히 고백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주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그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지금은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너무 부족해서 좀더 훈련시키시면서 최소한의 준비가 되면 주께서 허락하실 것으로 믿는다. 이제부터라도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는 공부를 틈틈이 하려고 한다. 책도 읽고 물어도 보면서…. 가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초의 공동체이자 사회 구성의 핵심이기에, 가정이야말로 제사장으로서 희생의 산 제물을 드릴 곳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경적인 신앙의 공동체를 주께서 허락하시도록 기도하고 있다. 지나치게 종교화, 제도화, 의식화되지 않고, 살아 있는 신앙의 생명과 십자가의 사랑에 구성원들이 매여서 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의 격려가 끊이지 않는 그런 교회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람이 키워지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구체적인 대안들이 모색되는 공동체이다. 셋째로는 전공 영역인 도시, 환경 계획, 환경 정책 분야에서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소화된 일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학문의 작업을 통해서 그리고 공동의 노력을 통해서. 코스타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고 있는 tmKOSTA의 환경 분야 네트워킹과 개인적으로 기존의 환경 단체들과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 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환경 정의의 세상에 대한 꿈이 있다. 국내 뿐만 아니라 개발 도상국과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환경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대안들을 찾아서 제시하고 싶은 욕심도 있으나 아직 좀 나이 많은 햇병아리 주제인지라 배우고 또 배우고 있다.


2001년 가을, 기회의 땅 미국에 건너와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려고 꿈꾸는 코스탄들과 유학생들 각자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유학 생활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긍휼하심이 임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리면서 졸고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