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훈 교수와의 대담

eKOSTA 인터뷰


장평훈 교수와의 대담


eKOSTA 장평훈 교수님은 코스타가 생성될 때부터 기여를 하신 코스탄의 원조이면서 거의 매년 빠지지 않고 코스타를 참석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코스타가 생성된 계기와 과정, 그리고 코스타에서 받으신 일반적인 은혜들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장평훈 제가 이해하기로는, 코스타가 처음에 시작되었던 계기는 이렇습니다. 그 당시, 미국 워싱턴 DC, 보스턴, 그리고 Triangle Area(North Carolina), 이렇게 세 지역의 성경공부 모임이 굉장히 좋고 효과적이었어요. 이 모임들을 직접, 간접적으로 가르치시던 홍정길 목사님과 이동원 목사님께서 지역적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한 번 모아서 해 보자 해서 코스타가 출발을 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 보스톤 지역에서 모였던 성경공부 모임이 Gate Bible Study이었고, 저도 그 모임에 속했던 지라 그 때부터 자연스럽게 관여하게 되었고, 그 다음에 87년도에 졸업을 한 다음에 88년부터 강사로 오게 되었어요. 그 뒤부터는 가기 싫을 때는 홍 목사님에게 끌려서 오고 (웃음) 어떤 때는 제가 좋아서 오고, 아마 제 기억에는 한 해 빠지고 계속 오게 되었던 것 같아요.


코스타가 늘 6월말이나 7월초에 하게 되니까, 1학기 마칠 때쯤 되는데, 그 시기는 늘 할 일들이 많이 밀려 있고 해서 올 때마다 갈등하곤 합니다. 그래도 이기고 코스타에 오면, 늘 영적으로 풍성해지고 또 공급을 많이 받으니까, 그게 제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한 학기를 마무리하고, 또 다가올 한 학기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참 중요한 도움이 되곤 했었지요. 그리고 학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보람이 되고 그런 은혜 가운데서 이렇게 참석하게 되었어요.


eKOSTA 코스타를 첫 해부터 참석하셨는데요, 16년 동안 코스타가 많은 발전과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코스타가 어떤 경향으로 발전되어 왔고, 그 변화 과정이 어떠했으며,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었던 해나 사건이 있었다면 회상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장평훈 벌써 16년이 되었군요(웃음). 출발할 때는 약 250명이 모였는데, 주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것 같아요. 정말 여러 가지로 찌드러진 상태에서 마음도 많이 상해 있어서, 그야말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셈이었지요. 그래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은혜가 참 컸던 것 같아요. 그리고 코스타에 참석하는 강사님들도, 이 모임에서 물질적으로 뭐 얻을 것은 없고 오히려 퍼 줘야 되는 입장이었는지라, 오히려 정말 마음(Heart)이 있는 분들만 오실 수 있었지요. 그래서 강사님들과 학생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모임을 했던 것은 지금도 잘 잊혀지지 않아요. 그때는 집회의 노우하우(know-how)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왔다 갔다 하며 엉성하기만 했지요. 그후에 세월이 지나고 횟수가 반복될 수록 계속해서 사람들이 늘고, 그 다음에 강사들도 많아지고, 더불어 세미나도 많아지는 등 내용이 풍성해졌는데, 그러다 보니까 어떤 모임이나 다 그렇듯이 초기의 ‘진함’이 희석이 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 좀 있어요.


코스타가 크게 변화되었던 계기가 글쎄요, 노태우 대통령이 1987년 6.29 선언을 할 때 코스타가 바로 직전에 모였었습니다. 그때 조국을 위해 무척 기도했어요. 온통 울음 바다가 될 정도로 열심히 기도했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했다고 저는 믿고 있지요. 민족과 국가의 장래에 대해서 진정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민족과 국가를 하나님께 들어 올린다는 코스타의 정체성(identity)를 찾았던 그것이 기억에 새로와요. 나머지는 꾸준히 매년 주제를 달리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아요. 초기의 코스타 정신(Spirit)을 되찾는데 있어서 올해의 ‘낮아지신 그리스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가 참 적절한 것 같아요.


eKOSTA 코스타가 16년이나 되었는데, 코스타 출신들이 한국 사회와 교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십니까? 아직 가시적인 영향이 별로 없어서 인지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 대한 코스타의 영향이 없었다”고 까지 평가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교수님은 코스탄들의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 대한 영향력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요?


장평훈 제 생각에는 코스탄들이 코스탄이란 이름을 가지고 한국 사회와 교회에 무엇을 했던 것은 별로 없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만 코스타에 와서 많은 동기부여를 받고,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면, 그 만큼 한국으로 돌아가서 기여(contribution)를 하지 않겠느냐는 다소 막연한 기대는 가져 왔던 것 같아요. 그러나 솔직히 이 점에 대해서는 마음에 부담을 많이 가지고 있고, 또한 코스타가 정말 개선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점이기도 합니다.


글쎄 어떻게 구현(implement)해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코스탄들이 이곳에서 동기부여를 받고 새롭게 도전(challenge) 받았던 일들을 지속적으로 이룰 수 있는 네트워킹(networking)이라든지, 교제(fellowship)라든지, 이런 것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좀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바람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받은 충격(impact)이라는 것이 상당히 역동적(dynamic)이기 때문에, 한국에 갔을 때 그곳에서 좀 좋은 영적인 기반이 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여기서의 귀한 도전이 별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된다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코스타가 보완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eKOSTA 그러한 일환으로 작년부터 eKOSTA와 tmKOSTA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좋은 동기로 시작되어졌지만 아직은 시작 단계라서 자리 매김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데,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eKOSTA와 tmKOSTA의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과 자리 매김과, 그리고 한계나 주의할 점 등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장평훈 아, eKOSTA참 좋아요, tmKOSTA도 그렇구요. 우리는 미주 코스타가 ‘7월초 시카고 휘튼’이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 바꾸어서, 7월초 시카고 휘튼에서 이루어지는 코스타는 코스타 lifestyle의 initiation 정도로 생각하고, 그 후에 eKOSTA나 tmKOSTA를 통해서 매일의 삶 속에서 코스타 집회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코스타 집회를 연중 내내 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가능해지도록 eKOSTA나 tmKOSTA는 ‘반드시'(definitely) 계속해서 활성화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피드백(feedback)을 하고 나눔(sharing)이 이루어지고 좋은 사람들이 발굴이 되기도 하고, 가상공간(cyberspace)이긴 하지만 거기서 교제(fellowship)가 이루어짐으로써, 코스타가 일회성 집회가 아니라 이제는 만남의 장이 되고 네트워킹(networking)이 되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훌륭하잖아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으면 좋겠다 싶구요. 또 하나 바램은 한국에도 이코스타가 더 잘 알려졌으면 하는 것인데, 현재 한국의 코스타 출신들은 eKOSTA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니 코스타 출신들에게 여기 있을 때부터 eKOSTA가 많이 알려지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늘 이곳을 확인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네트워킹(networking) 등 많은 문제들이 상당 부분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이제는 화제를 좀 바꾸어서, 교수님께서는 신앙과 학문을 잘 조화시킨, 우리 유학생들로서는 귀한 본이 된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어떻게 기독 신자로서 또 동시에 연구와 학문을 하는 대학 교수로서 신앙과 학문을 통합하고 관련지어서 하고 계신가요?


장평훈 전공을 하면서 학문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고 있는 전공이 좀 더 가시적으로 유용하게 쓰였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바램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연구를 하면서도, ‘나의 연구 분야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하는 바램이 있어요. 마치 의사들이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듯이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인 학문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래서 최근에 하는 일은 수족을 못 쓰는 장애인들을 도와 주는 로봇을 개발하고 있고, 또 화재가 났을 때 사람을 구하고 화재 진압을 하는 로봇을 개발하는 등 인간 복지와 관련되는 분야를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보람도 느끼고, 또 ‘잘 찾아보면 학문과 관련된 일에 이런 것이 있을 수도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지요.


eKOSTA 올해 코스타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장평훈 교수님이세요, 아니면 목사님이세요? 하며 질문할 정도로 너무도 귀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현재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교수 생활하기도 바쁜데,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목사님이나 사역자들도 하기 힘든 주제 성경공부를 어떻게 이렇게 삶의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충실한 주제 강의를 하실 수 있었는지, 이코스타 독자들에게 그 비결을 좀 공개해 주시지요.


장평훈 우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된 것은 ‘모든 학문은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하는 일이나, 연구를 하는 일이나 다 통하는 것 같아요. 그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면, 연구를 함으로써 성경공부를 하는데 필요한 ‘skill’을 정진시킬 수 있고, 또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방법을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서로 시너지(synergy)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어요. 이런 효과를 개인적으로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은혜를 새삼스럽게 느끼는 때가 많아요.


목사님들이 종종 신학을 했느냐고 물으시는데, 저는 그런 말 듣기가 미안할 정도로 신학은 한 적이 없어요. 생각해 보건대, 아마 유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성경공부를 해 왔던 것들이 쌓인 결과라고 봅니다. 그냥, 함께 말씀 나누고 또 삶에 적용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또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신학 서적도 찾아본 것들이 나름 대로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평소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암송하던 것이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결국 하나님께서 베푸신 많은 은혜를 통하여 오늘 저의 모습이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학생 때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삶에 잘 적용하면, 어느 시점에 충분히 자기 몫을 훌륭히 할 수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자꾸 많이 나와 주어야 한다고 저는 바라고 있어요. 사실 그것이 코스타를 통한 저의 아주 간절한 바램입니다.


eKOSTA 이번 코스타 주제 성경말씀을 위해서 어느 정도 준비하셨는지 말씀해 주시죠.


장평훈 이렇게 주 강사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마음에 부담이 되었고, 특히 이번의 주제(theme) 자체가 너무 소중하고 중요한 주제였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큰 부담이 되었어요. 그리고 동시에 도전도 되기도 했구요. 그러면서 많이 기도하고 준비를 했습니다. 본문 자체는 늘 하던 대로여서 특별히 준비한 것이 없었는데, 강해 설교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노력을 더 많이 기울였습니다.


eKOSTA 이번 코스타가 어떻게 보면 주제도 그렇고, 평신도나 학생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던 점에서 전환점의 한 계기나 새로운 시작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번 코스타를 계기로 앞으로 코스타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주의할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장평훈 작년 코스타까지는 참석 인원들이 눈에 띄게 증가해왔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코스타가 좋다니까 한 번 가보자’라고 마지막 순간에 충동적으로 결정해서 온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또 집회 분위기라든지 이런 것에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코스타는 그런 사람들도 다 수용하고 포용해야겠지만, 그래도 준비된 마음이 있는 곳에 은혜가 크겠다 싶어, 좀 더 준비된 마음으로 왔으면 하는 것이 아쉬운 점이었어요.


어느 자매가 한 이야기처럼 이번 코스타가 여러 가지 면에서 거품이 빠졌다 하는 얘기가 정말로 맞는 것 같고, 그래서 준비된 사람들이 준비된 심령으로 왔던 것이 두드러진 것 같아요. 올해 주제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주제인 것 같아서, 이번 코스타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거품이 빠지고 생각도 다시 한 번 해 보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모임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기 원하는가를 좀 민감(sensitive)하게 들을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eKOSTA 교수님께서 살아 오시면서 많이 영향력을 받은 사람들, 현재 살아 계신 분도 괜찮고, 과거의 역사적 인물도 괜찮으니 저희 독자들에게 나눠 주시죠.


장평훈 세 사람을 들고 싶은데 첫째는 홍정길 목사님인데, 그분이 하나님 사랑하는 자세, 그리고 자기의 의지를 쳐서 복종시키는 그 태도, 그 다음에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나한테는 좋은 귀감(role model)이 되었어요. 끊임 없이 좋은 교제를 가지면서 격려를 받았던 것이 오늘날 제가 서게 되는 데 큰 힘이 되었어요.


또 한 분은 김인수 장로님인데, 역시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표 안 나게 계속 신경 써 주시고, 또 평신도로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 가시는 모습이 많은 도전이 되었어요. 또 저와 같이 교직을 갖고 계시니까 계속 쳐다보게 되는데, 그 어른을 생각할 때마다 늘 그분에게 못 미친다고 생각하게 되어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한편, 사표로서 바라볼 분이 주위에 계신다는 점이 나에게는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또 한 분은 존 스토트 목사님인데요. 그분은 글을 통해서 나한테 스승이 되었어요. 그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한테는 굉장히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그 분이 얘기했던 내용은 때때로 기억하지 못 할지라도, 그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태도는 많이 배운 것 같고, 그 다음에 객관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는 자세가 적지 않게 영향을 준 것 같아요.


eKOSTA 또한 교수님에게 영향력을 많이 끼친 책을 좀 소개해 주십시오.


장평훈 두 권의 책을 얘기하고 싶은데, 역시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뭐 그분 책은 뭐든지 다 좋은 것 같아요. 이를 테면 <기독교의 기본진리>(Basic Christianity), 그 다음에 이번 코스타에서도 소개된 <예수님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 그 두 권, 아, 그리고 로마서 강해 이 세 권은 참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산상수훈> 그 책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리고 고든 맥도날드의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그리고 자꾸 생각이 나는데….


eKOSTA 많이 소개해 주시면 더 좋죠.


장평훈 J.I. Packer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의 <영적 훈련과 성장>(Celebration of Spiritual Discipline) 등이지요. 그리고 꼭 권하고 싶은 책은 M. Adler의 <How to Read a Book>인데, 이 책이 없었다면 이번 본문 강해는 불가능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성경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책보다 더 도움이 되는 책을 아직 보지 못했어요.


eKOSTA 교수님은 원서로 읽으시나봐요.


장평훈 예 그렇습니다. 그때는 번역이 안 된 책도 있고 해서 영어로 읽기 시작했었는데, 그 때문에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신학서적의 영어가 만만치 않은데, 정말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읽다 보니까 영어가 늘더라구요.


eKOSTA 끝으로 이코스타 독자들을 위해서, 유학 생활 선배로서 유학 생활에서 신앙과 학문을 함께 해 나가야 되는 점에서 학문을 하시는 신앙 선배로서 조언과 충고를 부탁드립니다.


장평훈 역시 순수성과 그 다음에 균형성, 그 두 가지를 얘기하고 싶어요. 순수성에 대해서 말하자면, 삶의 문제에 있어서 불순물들, 즉 허영심, 자긍심, 탐심, 성적인 문제들을 발견하는 대로 빨리 빨리 제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그 다음에는 균형성인데, (신앙 공동체와 관련된) 신앙 생활도 열심히 할 뿐 아니라, 가정 생활, 사회 생활, 그리고 학문도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성서적인 방법이 있는 것 같아요. 정확성과 정직성, 그런 것이 학문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학문을 하는 데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나름 대로의 좋은 모델을 개발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팽동국] 정연희 전작 장편소설

eKOSTA 서평


정연희 전작 장편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많은 사람들이 지난 9월 11일의 대 테러사건을 두고 도데체 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알기를 원하거나, 하나님은 왜 그런 끔찍한 일들을 허락하셨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을 줄 안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으로 과연 예수님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아 계신다면,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을 어떻게 바라 보실까 하는 질문을 했었다. 그런데 바로 성경에 그 답이 있지 않은가? 누가복음 13장 1절에서 5절까지 보면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던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에 대한 답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 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눅13:4,5 표준새번역). 예수님은 분명 그 시대 당시의 질문하던 사람들, 혹은 나를 비롯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원하는 “왜?”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도무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있다는 것과, 그렇기에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궁극적인 우리의 운명을 이야기하심으로 답을 주시는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달의 양서로 선정한 책 ‘내잔이 넘치나이다’가 결국은 같은 문제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고난을 어떻게 바라 보아야 되고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문제를 이 책에서는 한 사람의 무명 크리스천의 고난의 인생을 통해서 풀어 나가고 있다. 우리 민족의 대 비극인 육이오 시대를 살면서 고난을 통해 아름답게 피어난 우리의 믿음의 선배에 대한 책인 것이다. 시대적으로 고난과 비극의 시대인 일제시대 말기에 태어나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1952년까지 겨우 26년 8개월을 살았던 한 젊은이의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읽어 가면서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발견하게 된다. 매서운 북풍한설을 지나고 피어나는 한 송이 매화에 비교될 수 있는 인생, 모래 조각으로 인한 살을 째는 아픔을 감싸 생성되는 진주 같은 인생, 그리고 욥과 같은 고난의 삶을 살았던 현대 우리 민족의 욥에 비유될 수 있는 인생, 맹의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도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맹의순 선생의 제자 중 하나인 박용기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 절망감 속에서도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신앙을 보면서 분노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제시대에 평양의 비교적 부유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맹의순은 민족의 식민 상황이라는 아픔 외에는 아무 어려움 없이 자라나는 한 젊은 청년이었다. 중학교 졸업할 무렵 그렇게도 사랑했던 누님의 죽음, 그리고 채 석 달이 되지 않아서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형님의 전사 소식, 그리고 해방 이후 이북에 세워지는 공산정권으로 인해서 남하하던 나머지 가족은 모든 재산을 사기 당하고 빈털터리로 목숨만 건져 이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연이어 곧 뇌졸중으로 쓰러져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님과 이유 없이 죽어버린 여동생,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그의 어이 없는 삶의 여정, 육이오 전쟁 속에서 남쪽으로 남하하던 중, 공산군 첩자로 오해를 받아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는 비극의 삶으로 점철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몇 몇 친구들의 수고 끝에 석방될 기회를 가졌음에도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그 곳을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사역지로 생각하고, 포로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중공군 포로 병동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살신성인의 본을 좇아 환자들을 돌보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며 무리해서 사역하던 중, 시편 23편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암송하면서 쓰러져 20대 후반의 꽃같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그의 삶을 읽으면서 우리도 함께 아파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큰 소리로 울기도 경박해 보인다. 우리 가슴을 짓이기는 듯하고 우리 몸 전체가 눌린 듯 압박감을 느끼게도 하는 그 고난의 무게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에 그 오묘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인도하심과 그 삶을 통해 피어나는 참된 신앙과 복음의 힘과 능력을 깨닫게 되고 우리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믿음의 선배를 통한 도전과 그러한 삶으로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전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맹의순의 편지를 비롯한 그를 아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자료가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 있기도 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나 거물은 아니지만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살아갔던 우리의 신앙 선배들 중 한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 민족에게 이러한 무명의 신앙 선배들이 수 없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참으로 자랑스럽다. 우리 이코스타 독자 여러분들도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민족의 비극을 통해 피어나는 아름다운 삶, 고난을 뚫고 우뚝 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그리고 고난을 통해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신앙과 복음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하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 달에 추수 감사절이 있는데, 진실로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고 싶은 사람들 역시 이 책을 읽는다면 참 감사가 무엇인지, 상황과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그 자체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할 것이다. 이 책은 소설이기에 매우 재미있고, 사건의 전개가 아주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어 한 번 손에 잡으면 쉽게 놓지 못할 것이다. 내가 처음 접한 책은 여원에서 나온 책으로 ‘여원이 만든 베스트셀러 정연희의 장편소설’ 이라는 문구가 책 제목 앞에 붙어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지난 호에 유학생 배우자의 소고가 있었는데, 이 책을 선정한 이유 중 하나가 유학생 배우자에 대한 배려에서라는 사실이다. 사실 많은 배우자들이 좋은 학력과 경력, 그리고 능력 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실 제한된 법과 상황 속에서 그냥 ‘아줌마'(또 아주 소수지만 그냥 ‘아저씨’)로 살아 가면서 많은 서러움과 아픔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이코스타에서 지면이 할애되어 소외되어 있는 잠재적인 유학생 배우자를 위한 장이 마련된 것을 환영하면서, 이 서평 코너에서도 더 많은 유학생 배우자들의 참여를 권장하고 싶다. 사실 유학생들은 시간도 문제지만 심리적 압박 가운데, 신앙 양서를 많이 읽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배우자들도 집안 일 하랴, 남편과 아이들 돌보랴, 바쁘기는 매 한가지이겠지만 그래도 심리적 압박을 덜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여 신앙 양서를 읽어 나간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새로운 삶의 동기 부여와 도전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결국에는 가족과 자녀들의 신앙과 삶에 영향을 미치며, 더 나아가 같은 아픔과 고민을 가지고 있는 이웃에게 주의 빛을 발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유학생 배우자들이 이 미국 땅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국력 낭비(?) – 질적으로 양적으로 굉장한 코스타 강사들을 두고 하는 말에 빗대어, 수 많은 능력 있는 유학생 배우자를 두고 하는 말 – 일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주 유용한 일꾼들이 양육되고 훈련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이번 11월의 양서를 비교적 여성들이 접하기 쉬운 소설,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우리의 삶에 큰 감동과 도전과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책, ‘내 잔이 넘치나이다’로 선정했다. 이를 시발점으로 계속해서 양서를 함께 읽고, 그 양서들을 통해 받은 은혜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거나 이웃과 나누는 일들, 그리고 독후감이나 좋은 서평들을 투고하는데 유학생 배우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배헌석] Beauty of Oneness, Beauty of Unity

이코스타 2001년 11월호

글을 시작하면서


쑥스럽지만 내 개인적인 얘기를 함으로써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내게는 현재 아들이 하나 있다. 결혼하기 전부터, 좀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미래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으면 짓게 될 이름을 미리 생각해 놓았었다. 딸일지 아들일지를 그 당시로서는 모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별에 관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이름을 생각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우리”이다. 내 아이에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우리”(us)라는 개념을 심어 주기 위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그 아기가 자라서 지금은 일곱 살이 되었고, 교회 공동체를 잘 섬기고 있다. 현재 내 아내는 뱃 속에 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데, 아내와 고심 끝에 이번에는 이런 이름을 지으려고 한다. 딸이면 “하나”(1)로, 아들이면 “원”(one)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과는 많이 동떨어진 현대의 이기적, 개인적 사회를 살면서 조금이라도 주님 뜻을 이룩하고자 하는 마음의 간절한 소원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하고자 하는 목회자의 심정을 여러분께서 알아 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다.


유언은 귀중한 것


유언이란 언제나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행하신 마지막 유언에 해당하는 말씀이 무엇일까? 몇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이다. 그런데 이 기도 중 마지막 부분이야말로 유언 중의 유언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내용이 구분된다.


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믿는 무리들이 하나가 되어야 함.
2) 성도가 하나가 될 때 하나님 안에 있게 됨.
3) 그런 하나됨을 통하여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됨.


하나되신 삼위일체 하나님


위와 같은 기도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점을 우리들에게 시사한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됨”이며, 이를 가리켜 우리는 “삼위일체”라 한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하실 때 “우리”라는 단어를 쓰고 계신다(창1:26, 창3:22, 창11:7 등등).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는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대부분이지만,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실 때는 “우리”라는 복수적 연합(plural unity)의 표현을 많이 하시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중요한 구절이 된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라고 표현하심으로 공동체, 하나됨의 모습을 전달해 주신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됨, 연합을 좋아하는 분이시다. 각자의 개성과 차이가 다른 무리들을 그냥 무리 지음이 아닌, 진정한 연합, 즉 갈등과 차이를 극복하고 소화해 냄으로 진정한 평화의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한 소망인 것이다(참조. 로마서5:1, 8).


그러나 하나님의 하나됨은 통합이나 균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아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각각 다른 역할이 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구속 사역 후 성령 하나님이 인도와 보호의 역할을 하실 수 있도록 “내가 떠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요16:7)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는 실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연합(Unity in Variety)이라는 진정한 하나됨을 실제로 보여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됨을 이룬 공동체 안에 있는 각 개체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 자아에 대해서도 소중한 자아관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그 개체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시는 길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됨을 이룩”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안”이라는 말은 “in”과 “among”, 둘 다로 해석할 수 있다. 개인의 심령 안에 천국이 있기도 하지만, 믿는 성도 개개인이 모여서 하나됨의 공동체를 이룩할 때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지표로는 내적, 외적인 두 가지의 길이 있다. 곧, 구원받은 성도는 내적으로는 “평안”을 이루어야 하며, 외적으로는 “하나됨의 공동체”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관계적으로 하나됨이 부족할 때 구원의 감격과 능력은 약해진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개교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보편교회(Universal Church) 개념에 헌신하지 않게 되면, 참다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맛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구원의 감격을 많이 상실한, 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전도의 문을 막지 말라


반대로 성도가 하나됨을 이룩하고 개 교회가 모여 보편교회의 하나됨을 이룩하게 될 때, 그 속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건설되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쉽게 떠나는 이유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별다른 차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민 목회를 연구하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이민 가정에서 자라난 2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을 들어가면서 그들의 90퍼센트 이상이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에 남았던 나머지 10퍼센트마저도,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에 들어가면서 그들 중의 90퍼센트가 또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주된 이유는 교회 내에서 분열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고, 1세와 2세의 갈등과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됨을 이룩하지 못할 때 교회 자체가 전도의 문을 막게 된다는 심각한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곧 하나됨의 공동체를 통해 천국을 보게 될 때이기 때문이다.


시너지(synergy) 효과라는 말이 있다. 말 한 필과 또 다른 말 한 필로 하여금 함께 물건을 끌게 하면, 두 필에 해당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네 필에 해당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도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한다고 했고, 두 사람이 함께 누울 때 더 따뜻해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하나됨의 명령과 능력을 의지하면서 내가 섬기고 있는 지역인 앤아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합 운동을 살펴 보면서, 연합에 대한 몇가지 실제적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참된 연합은 각자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 이룩되는 것


주민 1천명, 학생 7백여 명으로 한인 인구가 대략 1,700여 명 정도로 추산되는 앤아버 지역에는 10여 개의 한인교회와 약 300여 개의 미국 교회가 있다. 미시간 대학(University of Michigan)이 있는 대학도시 지역이므로, 비교적 각 교회마다 청년의 숫자가 타 지역에 비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3년 전, 몇몇 청년들의 제안으로 각 교회 청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모임을 갖기로 했다. 격주로 토요일마다 오전 9시에 모여서 한 시간 반 정도를 찬양과 기도 시간으로 가졌다. 처음에는 다른 교회 사람들과의 만남을 어색해 하는 모습도 있었고, 또 약간의 경쟁심(?)같은 것도 있었고, 모임이 잘 되니까 더 많은 연합 행사와 발전적 프로그램을 갖자는 제안도 나왔다. 그리고 찬양과 기도보다는 그 시간 후 잠시 갖는 토론 시간에 사람들이 더 많은 신경을 쓰는 듯 하기도 했다. 결국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한 하나됨 보다는 인간의 생각과 자랑, 주장에 더 많이 마음을 쓰는 쪽으로 기울게 됐고, 당연히 처음에 뜨겁게 타오르는 모습이 금방 식어지게 되고 말았다. 이 때, 몇 명의 신실하게 섬기는 분들이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의 모임은 찬양과 기도”만” 하는 모임으로 하자고. 찬양과 기도로 뜨거워진 마음들을 함께 모아 각자의 교회에 가서 잘 섬기도록 하자고. 이 제안 이후로 토론과 회의도 짧게, 다른 교회 사람들이 몇 명 나오는가 등에 신경을 쓰지 않고, 1시간 이상을 찬양과 기도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다 나오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묶어지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3년 전에 시작된 이 연합 찬양기도(Unity Praise and Prayer) 모임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기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하나됨이 있게 되자, 그 결과가 풍성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일년에 2-3차례, 앤아버 전(全) 한인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합 찬양과 기도 집회를 열 수 있게 되었으며, 해마다 9월이 되면 신입생들이 많이 오는 앤아버 지역에 각 교회를 소개하는 연합 안내지를 함께 내게도 되었다. 또 이러한 연합의 불길은 인근 지역인 디트로이트 지역에도 일어나게 되었고, 이제는 앤아버와 디트로이트 지역이 다양성과 연합이라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모여서 찬양과 기도하는 것은 가장 “소극적”인 자세일 것 같지만, 가장 “큰” 일을 낳게 된다. 하나님으로 가득 차기 때문이다.


희생 없이는 이룩될 수 없는 하나됨


외적으로 보기에 하나됨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고, 힘을 합하기에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그냥 이룩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화해하시고 우리와 부모-자녀의 관계, 즉 가족과 같은 하나됨을 이룩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감행하셨다. 이러한 원리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희생 없이는 결코 하나됨이 이룩될 수 없다.


앤아버 지역에서는 부흥 집회나 특별 세미나, 수련회 등이 각 교회 별로 열릴 때, 타 교회 교인들이나 청년들도 많이 참석하곤 한다. 타 교회에 교인을 빼앗길까봐 이웃 교회 부흥회 광고도 잘 안 하는 이민 교회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앤아버의 상황은 다르다. 그냥 참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힘껏 돕는 모습이 많다. 예를 들어, 찬양팀이 약한 교회는 찬양팀이 좀더 안정된 교회에서 나와 찬양팀 봉사를 하기도 하고, 포스터나 팜플렛을 제작하는 것과도 같은 재능 봉사를 하기도 하고, 그렇지도 못한 경우는 타 교회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몸으로 봉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희생은 서로에게 감동과 교육(교훈)을 주게 되었고, 결국은 지역 전체로 변화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하나됨이란 그냥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됨 만큼 귀한 것도 없다. 그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 내가 희생할 때, 나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천국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됨 = 놀라운 결과를 낳게 하는 삶의 기초 법칙


뉴튼의 만유인력에 관한 법칙 발견은 떨어진 사과를 손에 갖게 된 기쁨만을 준 것이 아니라 그 법칙 하나로 엄청난 과학의 발전을 가져 오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의 “연합” 혹은 “하나됨”에 대한 법칙은 엄청난 결과를 낳게 하는 삶의 기초 법칙이 된다. 즉, 그 속에 놀라운 보화의 잠재력이 담긴 보물 지도와도 같은 것이 바로 하나됨의 법칙인 것이다.


앤아버 지역에서 청년 연합이 찬양과 기도로 이루어진 후의 각 교회 청년회를 살펴 보았다. 놀라운 것은 각 교회마다 청년들의 모임이 훨씬 더 활발해졌고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진리를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이다. 이 하나됨은 기초 법칙이므로 다른 다양성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능력이 있다. 곧, 한인 청년들의 하나됨은 각 교회 안에서 1세와 2세, 한어권과 영어권의 하나됨의 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청소년들의 연합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한인교회와 미국교회 간의 하나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 한인교회의 목사님은 교회 건물이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하나됨의 발전적 적용 차원으로 미국교회 목사님들의 기도 모임을 참석하다가 기도 제목을 나누던 중 미국교회 건물을 기적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현재 그 교회는 건물을 함께 사용할 뿐만 아니라, 형제교회처럼 한미(韓美) 간에 연합예배도 자주 드리고, 성경공부 프로그램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됨은 앤아버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연합운동으로 발전하여 인종, 언어에 구별없이 2001년 4월에는 종려주일 저녁에 대학의 컨벤션 센터(convention center)를 빌려서 약 2천 5백여명이 함께 모여서 연합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이후 지역 목회자들의 계속적인 연합 기도를 통해 언젠가는 미식축구로 유명한 미시간 대학의 Stadium(10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학 축구 경기장으로는 가장 최대의 규모)에서 앤아버 전 크리스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찬양과 기도를 함께 드리는 그 날을 “같은” 비전으로 공유하고 있다. 나는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찬양과 기도하는 한, 이 비전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것을.


글을 마치면서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Contagious Christian)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성도는 소금과 빛이고, 이 두 가지의 속성을 볼 때 소금과 빛된 성도가 갖는 의미는 “영향력”을 의미한다.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도 개개인은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각 성도 속에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야 비로소 세상은 그 성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 성도가 서로 따로 떨어져서 이러한 변화를 이루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어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사역하셨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하나됨으로 사역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미국에는 현재 약 4천 개 이상의 이민 교회가 있다. 각 주마다 있는 대학도시 교회들에는 수 많은 유학생 교회가 있다. 나는 코스탄들의 이 시대적 사명 중의 하나는 바로 각 코스탄들이 섬기는 교회 현장, 사역 현장에서 이 하나됨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각 주마다, 대학 도시마다 코스탄들의 헌신과 희생에 의해서 이런 하나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그 자체가 진정한 전도, 진정한 천국 건설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청개구리도 어머니 개구리의 마지막 유언에만은 순종했다. 청개구리보다 못한 성도가 되기 보다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고 희생으로 헌신함으로 하나됨의 천국 맛을 보시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됨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유언과도 같은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를 때 그 결과가 놀라웁게 역사하리라 믿는다. 하나됨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