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혁] 요단에 들어서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요단에 들어서라



“너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수3:8)


들어가는 말


모맥 거두는 시기에 요단강의 물은 강언덕까지 넘쳐흐르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강을 건너기도 쉽지 아니하려니와, 또 건넌다고 한들 수많은 가나안 이방 족속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사도 있고 장정도 많지만, 수많은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데리고 미지의 땅으로,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나가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얼마나 기대와 함께 두려움과 갈등이 있었을까? 밀려오는 두려움과 갈등 속에서 숨소리마저 죽이며, 묵묵히 요단강을 향해 걸어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열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여호수아는 아직도 구체적인 요단강의 도강 계획을 온 백성에게 말하지 않고, 다만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의 뒤를 좇아 요단에 들어서라고만 이르고 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요단강 위에 보트를 띄우든지, 아니면 임시 다리를 놓는다하여도, 그 많은 백성이 건너기에는 며칠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한명도 불평없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는 여호수아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하며 묵묵히 나아갔던 것이다. 즉 모든 지도자와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는 “믿음과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의 고된 영적 및 육적 훈련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순종하며 용기있게 나아가는 것만이 저들이 좇아야 할 참 길임을 이미 터득하였던 것이다. 요단을 건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여호수아가 말한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는 말씀 중에서 그 기사를 예견하고 볼 수 있는 백성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나님이 행하실 요단강을 가르실 기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간적인 인식의 범위를 넘는 기적이다. 그러나 저들은 40년전 출애굽 시에 홍해를 가르며 건넜던 기사에 대하여 부모로부터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이 홍해처럼 분명히 갈라지리라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을 따라 요단강을 향하여 과감히 나아갔던 것이다.


미국 이민을 고려하고 또 타국에서 취업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마음도 요단강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큰 기대에 차 있으면서도, 자신이 없고 또 용기도 없을 수도 있다. 대학에 교수로 지원할지, 회사나 연방정부의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가야할지, 또는 어떤 교향악단에 입단해야 될지가 모두 불투명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칼럼에서 썼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계속적인 주저함과 생각함만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으로 나아가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즉 이스라엘 백성처럼 언약궤를 맨 제사장을 따라 요단에 들어서는 실행의 용기가 필요하다.


개척정신


우리가 갈 길을 알지 못하고, 이전에 지나보지 못한 인생길을 가는 것은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다. 더욱이 남이 가보지 아니한 길을 가는 것은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 인생길을 가는데 실제로 가장 무서운 적은, 실패를 두려워하여 어떤 일을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무기력함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에서도,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마25:25)라고 변명하였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주인의 책망을 듣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젊은 유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과 인도함에 따라 믿음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용기이다. 오늘도 미국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정신은 신앙의 자유와 정의를 찾아서, 죽음을 무릅쓰고 미지의 땅, 아메리카 대륙을 향하여 용기있게 항해하였던 청교도들의 “개척정신”일 것이다. 대서양의 거센 파도와 질병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청교도들이 미지의 땅 플리머스(Plymouth)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혹심한 추위와 배고픔뿐이었지만, 저들은 먼저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오랫동안의 농경문화와 유교문화의 전통에 길들여진 한국 젊은이들에게, 아마도 가장 낯설고 두려운 단어는 “개척정신”이라는 말일 것이다. 미국에 공부하고있는 많은 다른 나라의 유학생들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유학생들에게 특히 부족한 것은, 믿음에 의지한 “창의적인 개척정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믿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한 용기있는 “개척정신”을 가졌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크게 쓰임을 받았던 것을 성경이 잘 증거해 주고 있다. 한국이 좁은 것은 불편스럽지만, 새로운 세계와 환경의 변화를 통한 도전적인 삶의 개척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에 의지한 “개척정신”은 바로 이민과 타국취업을 고려하는 유학생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기본정신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은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던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며 책망하셨다. 때론 실수하고, 실패하고, 주어진 달란트를 모두 잃어버릴지도 모르지만, 용기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며 나아가는 신앙의 “개척정신”을 갖는 종을 더욱 기뻐하신다.


진정한 순종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과 믿음을 실행하는 용기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요단이 갈라지리라는 약속이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움 때문에 언약궤를 좇아 요단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사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직장을 얻어 보겠다고 수없이 말만하고 마음만 먹었지, 이를 적극 준비하고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천 유학생이 있다면, 이제 용기있게 나아가는 “개척정신”을 먼저 갖도록 권하고 싶다. 이제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이민자의 땅에서 취업을 하겠다고 마음이 준비되었으면, 실제적인 취업정보 얻기, 이력서 작성하기 및 인터뷰 준비하기에 대하여 논하여 보고자 한다.


취업정보 얻기와 이력서 (Crriculum Vitae , CV) 작성하기


자신이 전공하고 있는 분야에 관한 취업이, 어느 곳에서 가능한가에 관한 취업정보는 미리 알아놓을수록 좋을 것이다. 대게 관련된 전공분야의 매거진(Magazine)에서 관련분야의 전공에 관한 취업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또 전공분야의 전문학회(Conference)에 가면 대게 많은 취업정보를 얻을 수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관심있는 회사 및 학교의 구인광고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수시로 인터넷을 통하여 필요한 취업정보, 취업동향 및 요구되는 자격 등을 숙지해 놓고, 취업관련 서류를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도교수나 전문분야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미래의 취업계획을 미리 말해두고, 관련정보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해두는 것도 취업정보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직업소개소(Headhunter group)를 통하여 직장을 찾는 것을 부끄럽고, 불편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특별히 취업의 문이 좁은 전공분야일수록 직업소개소에 본인의 전문분야와 찾고있는 관심분야를 미리 알려주면, 의외로 좋은 취업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기 바란다.


이제 전문직을 갖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이력서(CV) 작성에 관하여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력서는 바로 자신의 얼굴이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미국에서 전문직 직업인에게 통용되는 이력서의 기본양식을 유지하며, 자유롭게 작성하면 된다. 한국에서처럼 획일적으로 인쇄된 이력서 양식이 미국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취업분야에 따라 요구되는 주안점을 융통성있게 바꾸어주므로써, 지원하는 회사나 대학의 인사위원들의 관심을 쉽게 끌 수 있도록 작성하면 좋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작성자의 이름과 주소, 학력, 직업 및 연구경력, 수상경력, 전문분야와 전문성, 발표된 연구논문이나 연주회 경력, 추천인등의 순으로 쓰면 무난할 것이다. 특별히 전문분야와 전문성은 본인이 전공한 분야와 더불어, 자신의 전공분야를 취업분야에 초점을 맞추어 작성해 주면 좋은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도 지적하였지만, 학교나 회사의 인사담당자나 인사위원들은 추천인에게 추천서를 써보내 줄 것을 요구하거나, 직접 전화를 걸어서 지원자의 자질 등을 꼭 묻는다. 따라서, 추천인의 이름을 쓰기 전에, 추천인에게 본인을 추천해 줄 수 있는지의 양해를 먼저 구하는 것이 예의이다. 대학의 교수로 지원하는 경우는, 주로 창의력, 책임감, 강의능력 및 연구수행능력 등에 초점을 두고 추천서를 쓰도록 추천인들은 요구를 받는다. 회사의 연구원인 경우에는 주로 독창적인 연구수행능력, 책임감 및 팀웍 능력 등에 관하여 아주 꼼꼼하게 쓰도록 요구되기도 한다. 특히 미국의 취업에서는 필요와 공급의 원리가 잘 맞아야 하기 때문에, 취업분야에 따라 자신의 전공분야를 잘 적용시키는 지혜도 꼭 필요하다.


최근 미국경제의 어려움 때문에 미국의 대학 교수로 지원하는 학위취득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거의 모든 대학에서 요구하는 “강의계획서”와 “연구계획서”는 철저히 준비해야 될 것이다. 여기서 강의계획서나 연구계획서의 작성시 유의할 몇가지 중요점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대학은 학부강의가 중심인 “학부 중심대학”이 있으며, 또 학부와 대학원의 강의와 연구가 중심인 “대학원 중심대학”이 구별되어 있다. 먼저 자신이 지원하고자 하는 대학이 학부 중심인지, 대학원 중심인지에 따라, 학부와 대학원에 개설된 강의들과 중심되는 연구분야를 먼저 잘 분석해야 한다.


첫째, 강의 계획서는 본인의 학위과정 중 자신이 이미 들었던 강의 과목 및 강의 경험, 가르칠 수 있는 강의 과목(학부 및 대학원으로 분리), 새롭게 계발할 작정인 강의 과목 순으로 서술하면서, 1-2 페이지 정도 작성하면 된다. 특별히, 이미 지원코자하는 대학에서 개설된 강의 중 어떤 과목을 가르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해 두는 것이 좋다. 또한 신임 교수로서 교육과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새롭게 개발할 강의목록을 기술해 주어야 한다. 새로이 개발할 강의가 왜 중요한지를 강의할 내용과 함께 기술해 주면 좋을 것이다. 지원대학과 전공분야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학부에서 1-2 과목과 대학원에서 2-3 과목을 새롭게 개설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면 좋을 것이다. 물론 강의 제목과 함께 간단한 강의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해 주면 더욱 좋다.


둘째, 연구 계획서는 자신의 전문 연구분야, 전문성, 새롭게 시도할 연구분야, 및 연구비 수혜 계획 등의 순으로 서술하며, 1-2 페이지 정도 작성하면 될 것이다. 특별히 지원하는 대학의 기존 연구분야와 협력하며 활력을 불어넣으면서도, 자신의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창의적인 연구계획을 쓴다면 좋을 것이다. 거의 모든 미국의 대학원 중심대학은 신임교수의 연구비 수혜 가능성과 능력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전문 연구분야의 연구비는 어디에서 주로 나오는 지를 잘 알아둔 후에, 임용이 되면 어떤 기관에 연구비를 신청할 수 있는지를 간단히 서술해 두면 실제적으로 좋은 인상을 줄 수있다.


모든 작성된 서류는 심사하기에 명쾌하고 또 간결하도록 작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또 오류가 없도록 철저히 준비해야 하다. 지도교수나 미국 동료에게 마지막 교정을 받은 후에 제출하는 것도 좋은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인터뷰 준비하기


미국의 거의 모든 회사나 대학은 이력서의 접수가 시작되고, 관심있는 지원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바로 인터뷰를 시작하게 된다. 대개 2-3명 정도가 최종 인터뷰에 초청되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인터뷰에 초청이 되면, 최종경선자 명단에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인터뷰는 주로 자신의 연구분야 발표, 관련된 장래 동료들과의 인터뷰 및 담소와 식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0분 간격으로 거의 하루종일 인터뷰를 하게된다.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전문분야의 연구발표이다. 특별히 자신의 연구분야의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보여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 한시간 정도의 전문분야 발표의 준비를 철저하게 해두고, 또 예상되는 질문의 답도 잘 준비해 두면 좋을 것이다. 한시간의 전문분야 발표가 인사위원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특히 대학의 교수로 지원하는 경우에는, 전문분야의 발표시에 자신의 연구분야의 깊이를 보여주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겸손은 미덕이다. 미국에서도 자신의 충분한 전문성의 역량을 보여줌과 동시에 동료들의 연구 업적을 충분히 존중해 줄주 아는 겸손함이 큰 미덕이다. 특히 미국에서도 “겸손이 미덕”이라는 충고에 아마도 많은 학생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겸손은 실력이 있어도 없다고 해야하고 또 알아도 모른다고 해야 “한국적 겸손”이 된다. 그러나 “미국적 겸손”이란, 아는 것은 안다고 확실히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많은 동양계 유학생들이 때론 잘못된 서구문화의 이해로, 앞 뒤 구분없이 계속 아는 척을 해야 실력있다고 인정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이다. 그런 태도는 오만한 태도이다. 지역과 학교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아직도 보수적인 학문중심의 전문가 세계에서는 그런 태도는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무엇보다도 미국사회와 문화에 대한 격식있는 태도와 이해, 그리고 전문성에 대한 자신감은 인사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인터뷰는 미국적으로 겸손하며,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자신감 있게 모든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 주로 모든 인터뷰의 인사위원들이 연구역량, 의사소통 능력, 예의범절, 사회성 및 개인특성 등을 잘 관찰한 후에 각기 개인적인 보고를 인사위원회에 제출하게되며, 인사위원회는 종합적인 평가에 의해서 job offer를 할 것인가 아닌가를 아주 공정하게 결정하게 된다. 인터뷰를 하고 돌아온 후에는 개인적인 인터뷰를 한 모든 인사위원에게 짤막한 감사의 e-mail을 보내는 것은 바른예의이다.


맺는 말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아메리카 신대륙을 향하여, 목숨을 걸고 긴 항해를 결심한 청교도의 “개척정신”은 오늘도 미국을 지탱하는 기본 정신이다. 항해의 돛을 올려보기도 전에, 걱정과 염려와 불안으로 항해를 포기하는 자는 결코 새로운 세계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크리스천 유학생들은 이미 태평양을 건너며, 이 희망에 찬 “개척정신”의 깃발과 돛을 올려 본 사람들이다.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이제 요단에 주저없이 들어서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수3:15-16)에서 처럼, 온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던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많은 한국유학생들은 미국에서 직장을 찾으면서도 자신의 이력서 보내기를 무척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요단에 들어서길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요단을 가르는 기적도 볼 수 없고, 요단을 건너는 축복도 누릴 수 없다. 행동하지 못하는 지성이 죽은 지성인 것처럼, 실행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과감히 이력서를 보내기 바란다. 실패를 두려워 말자. 인터뷰 초청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인터뷰 초청이 있을 때까지, 기도하며 줄곧 찾고 또 이력서를 여러군데 보내기 바란다. “개척정신”을 갖고 믿음과 용기로 나아가는 유학생 모두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보았던 요단의 가름의 역사가 있을 줄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난 수년동안 미국학생들의 연구 및 취업을 지도해 오며, 또 신임교수 채용의 인사위원으로 일하면서 얻은 나의 경험이, 미국이나 또는 제3국에서 취업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길 기도한다. 다만, 공학과 자연과학에 기초를 둔 나의 전문성과 경험이, 인문 사회과학과 예술분야를 전공하는 유학생들에게까지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이민과 타국취업을 고려하는 모든 유학생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취업준비라는 관점에서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다음 칼럼에서는 인터뷰 후에 job offer를 받았을 경우, 어떻게 미국땅에서 새로운 직장생활을 준비하고 시작할 것인가에 관하여 여호수아의 말씀에 비추어 계속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주명수] 종교 NGO

복음과 법


종교 NGO


얼마전 기독 시민사회연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참여불교 재가연대 등 종교단체들이 연합하여 개혁을 위한 종교NGO 네트워크 발족식을 갖고 종교 바로 세우기를 선언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종교가 황금의 노예가 되어 물량주의와 기복주의를 신앙생활의 기본으로 받들고 있으며 종교지도자들의 부정부폐와 신자들의 근시안적 신앙행위로 말미암아 대내외적인 비판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하면서 5대 목표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교단재정의 투명성 확보와 바른 목적에의 사용, 성직주의를 타파하고 모든 구성원이 함께 진리의 삶을 사는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교역자의 헌신, 가부장적/반생명적 종교문화를 척결하기 위한 활동전개, 약한 자와 소수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교단내 법제도 개선, 교단개혁을 위한 지속적인 대안 모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 등 종교단체들이 스스로 자신을 개혁하는 자정능력을 잃게 되자 이제 시민단체들이 그 동안 성역시 되었던 종교문제에까지 바른 소리, 쓴 소리를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대 목표실현 중 눈에 띄는 것은 돈에 관한 것과 성직주의에 관한 것이다. 이는 한국 교회와도 아주 밀접하게 관계되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종교 단체들이 헌금을 잘 거두어 들이기는 하였으나 헌금의 사용이 투명치 못해 내외적으로 비난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또 헌금이 인재를 길러 내거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 보다는 경쟁적으로 더 큰 건물을 짓는데 사용된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어떤 교회들은 성전건축을 교회목표로 삼았다고 하면서 교회 주보에까지 실어 홍보를 하기도 하였다. 성전건축은 교회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교회의 목표는 사람을 데려다 예수님 믿게 하고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그로 하여금 다시 이 세속사회에 들어가 거룩한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헌금은 올바른 방법으로 거두어야 한다. 헌금은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헌금사용은 투명해야 한다. 앞으로 성도들은 목사의 헌금하라는 설교를 듣고 헌금하기 보다는 연말 결산보고서를 보고 헌금을 하는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다. 성도들은 연말 결산보고서를 볼 것이다. 연말 결산보고서를 통해 헌금이 옳게 사용되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데 헌금이 사용된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성도들은 헌금을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자기가 기부한 헌금이 이렇게 잘 쓰여졌으니 왜 더 많은 헌금을 하지 않겠는가. 반대로 연말 결산보고서가 헌금이 올바르게 사용되었다는 흔적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성도들은 더 이상 그곳에 헌금하지 않을 것이다. 헌금을 많이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반협박조의 설교를 듣고 헌금하는 성도들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을 확신한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라고 설교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이제 한편의 설교로써 헌금을 거두어 들이는 시대는 지났다. 헌금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가르쳤으면 이제 예산 결산보고서를 성도들에게 보여 줌으로 자발적으로 헌금하도록 하여야 한다.


다음으로는 성직주의의 타파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띈다. 성직자란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직자는 평신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국교회가 성도들에게 주입시켜 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많은 부작용이 있었다. 성도들은 성직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었다. 성직자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게 되었다. 평신도들은 성직자 앞에서는 늘 주눅이 들었고 그들에게 바른 말을 감히 하지 못했다. 성직자들의 말에는 감히 의문을 달지 못했다. 성직자에게는 감히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전인적 회복을 이룬 바른 영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직자는 목자이고 평신도들은 양이므로 양이 새끼를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양으로서 모두 성장해 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직자는 양무리 가운데 조금 성숙한 양으로서 미성숙한 양들을 돌보기 위해 보냄 받은 선물에 불과하다. 성직자와 평신도 간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모두 하나님 앞에 양이다. 모두 함께 고민하며 성장해야 할 양들이다. 모두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될 양들이다. 선한 목자는 한 분 뿐이시다.


종교 내부의 문제를 밖으로 끄집어내 건강한 평가를 받게 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종교 NGO 네트워크의 발족, 그 자체가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4)

세계관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4)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돌: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세계관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보는 관점 혹은 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어느 한 공동체가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며 혹은 싸워나가면서 형성된 세계 이해이다. 따라서 세계관은 단번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처해진 환경을 이해해야 하며 또 그 환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사회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장에서는 오늘날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슬람의 세계관을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이슬람의 세계는 지난 2세기 동안 무함마드의 이슬람 정신, 즉 이슬람의 원리로 돌아가자는 부흥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다. 이 운동은 이슬람의 가장 원형적인 세계관으로 복귀하자고 하는 신앙운동이자 세계관 정립의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자연히 이슬람 선교(jihad)의 성격으로 나타나게 되며, 그 결과 선교적인 기독교와 기독교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발전한 서구 사회의 사상과의 또 한번의 대결이 예상된다. (이미 역사 속에서 기독교적인 서구 사회와 무슬림들과의 갈등은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주듯이 항상 계속되어 왔다.) 이렇게 이슬람 사상이 현대주의를 이룩한 서구 사회에 큰 도전과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슬람을 세계관의 이론에 입각하여 이해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본고에서는 이슬람의 역사적 발전이나 교리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루지 않고, 모든 무슬림들이 고수하고 있는 이슬람의 보편적인 세계관 전제들(worldview assumptions)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5.1. 이슬람의 기본 믿음에 반영된 세계관의 내용들


이슬람에는 기본적인 6가지 믿음의 내용이 있다. 무슬림은 알라를 믿으며, 알라의 천사들과, 알라의 책들과, 알라의 선지자들을 믿는다. 그리고 알라의 절대 작정을 믿으며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을 믿는다. 본고에서는 이 가운데 이슬람의 세계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관과 알라의 작정, 그리고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그들의 신앙만을 다루기로 한다.


(1) 알라


이슬람의 가장 기본은 신앙고백이다.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마지막) 선지자이다(la ilaha illa allah, muhammad rasul allah)”라는 그들의 신앙을 모든 무슬림들은 거의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반복하여 고백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무슬림들이 교육받는(enculturation) 내용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알라의 유일성(tauHid)과 무함마드의 마지막 선지자됨(risalah)이다.


알라는 전지전능한 신이며 만물의 창조주로서 그 어떤 존재도 알라에게 비견할 수 없다. 무슬림들의 신관(view of God)은 매우 엄격한 유일신관이다. 알라는 숫자적으로도 한 하나님이다. 고로 삼위일체의 교리는 이슬람의 신관에 위배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슬람의 신관은 인간의 매우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알라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신의 유일성을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의 틀에 가장 잘 맞게 설명하고 있다. 즉 알라는 숫자적으로 단일신이라는 신 개념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다. 성경의 오묘한 삼위 하나님의 개념은 이슬람에서는 가장 큰 신성모독의 죄(shirk)가 된다.


또 알라는 인간이 이해할 수도 없으며 알 수도 없다. 단지 꾸란을 통하여 그의 뜻이 계시될 뿐이다. 그러므로 알라를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이 아들이 있으며 자신을 인격적으로 계시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인간으로 보냈다고 하는 기독교의 신 이해는 무슬림들에게는 오직 신성모독일 뿐이다. 꾸란 112번째 수라(章)는 이슬람의 신관을 잘 요약하여 준다.


1절: 알라는 오직 유일하고 하나뿐인 신이시다. 2절: 알라는 영원하시며 절대자이시다.
3절: 그는 자녀를 낳지도 않으시며 자녀로 태어나지도 않으신다.
4절: 그와 같은 이가 없다.


이슬람이 무함마드에 의하여 아라비아 반도에서 처음 형성될 때에 이 유일신 사상(tauHid)은 가장 중요한 무함마드의 메시지였고 오늘날도 이 사상은 이슬람의 모든 문화의 기저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메시지의 근본은 바로 이 알라의 유일성과 절대성의 선포에 있는 것이다. 무함마드의 초기 메시지 역시 우상을 타파하고 유일하신 신 앞으로 사람들이 돌아올 것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당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아랍 사회가 그들의 육적 조상인 아브라함의 종교로 돌아가자고 하는 종교 개혁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알라에게 순복”이라는 의미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이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슬림들의 종교와 세계관은 거의 일치하는 것 같이 보인다. 편의상 우리는 이슬람의 세계관은 무슬림들의 종교, 즉 이슬람의 기저에 있는 믿음의 내용들이라고 구별하면 될 것이다.)


(2) 알라의 절대 주권과 작정(qadr)


무슬림들의 문화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로 이 신관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전래되기 전의 토속적인 세계관의 다름으로 인한 차이들이 각 이슬람 사회마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슬람권 내의 사회들이 대체적으로 비슷한 사상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신관에 대한 투철한 그들의 충성 혹은 헌신(allegiance) 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의 신관은 자연히 그 사회의 정신 세계(혹은 문화의 정신적 측면)에 영향을 주었고, 역으로 이슬람권 사회의 보편적 성격을 알기 위하여서는 이슬람의 신관을 먼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무슬림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해하게 되는 알라의 속성은 어떠한가 알아보자. 꾸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쓰의 전통에 의할 때에 알라는 엄격하고 장차 모든 죄를 다 심판할 신이시다. 비록 알라의 이름이 꾸란에는 항상 자비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이(ar-rahmani, ar-rahim)로 등장하지만 이슬람의 신관은 알라의 엄중함과 그의 두려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절대주관자이다. 중세기 수피 신학의 초석을 놓은 가잘리(al-Ghazzali)에 의하면 알라에게는 사랑이라고 하는 개념이 필요 없다. 사랑은 사람이 필요를 느낄 때에 생기는 감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알라는 어떠한 필요를 느낄 필요가 없는 완전한 신이시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알라를 자비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름뿐이지 알라가 자비하신지에 대하여 무슬림들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자비의 개념은 알라가 용서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한 것이지, 기독교에서처럼 이미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용서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라의 용서와 자비는 조건적이지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신의 속성은 그의 절대적인 주권이다. 어느 정도 주권적인가 하면, 그는 모든 선과 악을 다 작정하였다. 가잘리와 같은 학자들의 신 개념에 의하면, 알라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또 어떤 사람들로는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다. (꾸란 5:20, 7:178-179, 14:4, 11:118-119, 32:13 참조) 결국 죄도 알라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알라의 작정에 반론을 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 주권자이며 인간은 오직 순종을 요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라 50:16에 의하면 알라는 인간의 대정맥보다도 더 가까이 계신 신으로 묘사되지만, 이 구절은 알라가 창조자로서 그만큼 인간의 모든 깊은 곳을 다 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구절이 알라가 인간에게 친밀하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슬람의 신 개념은 인격적인 계시이기보다는 어떤 힘(Power)의 계시인 듯하다. 그는 자비한 신이라기보다는 자비할 수도 있는 전능의 신이다. 꾸란에 나타난 알라의 계시는 결국 그의 힘의 계시이다. 인간의 고뇌 속에서 만나지는 그러한 신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인간의 불순종을 심판하며 거역하는 자들에게 승리자로 다가오는 그러한 능력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에서 중요한 이슈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전능자에게 순복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 된다. 그 결과 정통 이슬람에서는 율법학이 발달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슬람의 역사를 보면 이슬람이 추구하는 것은 승리이다. 알라는 근본적으로 승리의 신이시다. 그에게 실패나 패배는 있을 수가 없다. 설사 하나님의 아들이 있어서 인간 세상에 왔었다고 하더라도, 죄인들에게 어이없이 당하고 십자가에서 치욕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이슬람의 세계관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기본적인 가치관은 승리이다. 그리고 이 승리는 매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승리이며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말은 매우 교묘하고 기만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이슬람은 기실 그 처음 발흥 때부터 매우 현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현실성은 이슬람이 지금까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특징으로 항상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기본 세계관이 절대 주권자의 개념, 힘, 불가지론적인 신관이라는 아이러니 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의 사회 역시 이러한 개념들이 사회의 구조 속에 곳곳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이슬람 국가들이 왕국의 전통을 고수하거나 독재를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신관에 어려서부터 익숙해져 있는 무슬림들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제 무함마드에 대한 무슬림들의 이해와 사랑과 존경을 알아보도록 하자. 무함마드 선지자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오늘날까지 이슬람 사회의 세계관의 중요한 중추 역할을 해 왔다. 다음 호에 계속하여 이 부분을 다루도록 한다.


[편집부] 미운오리새끼 신드롬에 걸린 그리스도인

이코스타 2002년 1월호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백조인 자신의 정체성(identity)를 알지 못한채, 자신의 외모에 대해 낙망하다가 언젠가 백조가 된다는 동화이다. 어릴적, 이 동화를 읽으며 미운 오리새끼가 스스로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들이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수년간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경험하는 주위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눈에 천사와 같이 보이기 십상이다. 도무지 옛 부대에 담을 수 없는 끓어오르는 거룩에의 열망을 가졌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것인지 잘 모르는 탓에 좌충우돌 주변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을 따라하면서 ‘크리스천 문화’와 ‘교회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그러다가 언젠가, 주변의 ‘선배’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성품과 삶의 기준들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삶의 기준이나 성품의 기준과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들은 깊은 혼란에 빠진다. 그럴 때 보통 이들이 듣게 되는 ‘충고’는 ‘사람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험받지 말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진정으로 사람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험을 받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충고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한 기준을 낮추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우 각종 수뢰,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연루된 것으로 나오는 집사, 장로들. 자신 부부의 포르노 테이프를 판매하다가 적발된 목사 부부. 자신의 아들에게 담임 목사직을 승계하는 제왕적 ‘당회장’들. 미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목사들의 성적 부정 문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면서도 전혀 비복음적인 대내외 정책을 펴는 미국의 정치인들.


지나치게 먼 곳(?)에서 예를 들어 피부와 와 닿질 않는가?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포르노 사이트를 기웃거리는 어느 성경공부 조장, 매일 아침 QT를 하면서도 직장, 승진, 성공 등 개인의 이익(interest)이 걸린 일이라면 복음과 무관하게 눈을 반짝이며 달려드는 어느 집사님, 매일 아침 ‘주여, 주여’ 하면서 새벽기도를 하지만 자신 자녀의 음악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입시 담당관 교수에서 돈 봉투를 내미는 한 권사님, 자기 자녀의 결혼 상대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재정적 안정성을 복음적 가치보다 우선에 두며 심지어는 택일을 위해 점집에 찾아가는 장로님.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저 ‘사람의 연약함’에만 탓을 할 것인가. “남들도 다 그러는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선 어쩔수 없지” “우리교회 장로님들도 그러는데” 라며 초신자들에게 한수 가르칠 것인가.


분명 성경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예(example)라면 충분히 그들의 삶을 완전히 뒤집을 합당한 근거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삶의 기준을 삼는 사람들을 찾기가 의외로(!)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로서 우리와 같은 복음을 믿었던 사람들의 예를 찾아보자.


박해가 아주 심했던 것으로 알려진 로마시대. ‘고문을 당하며 죽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주라 고백하며, 부서져 너덜거리는 육체가 영과 분리되려 하는 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럽고 축복받는 일이 어디 있으랴!’ 라며 당당하게 순교하였던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복음을 믿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다.
명문 휘튼대학을 졸업한 후 젊은 나이에 에쿠아도르의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짐 엘리옷도 우리와 같은 성경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잠깐의 타협으로 신앙의 양심을 조금만 양보하면 될 것을 꿋꿋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와 같이 한국말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죽인 사람들 양아들로 삼은 ‘새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랑을 보여주신 손양원 목사님도 우리와 똑같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들을 편만하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부정을 저지르는 직장의 사업 방침에 반대하다가 왕따를 당한 회사원, 자신의 연구업적을 부풀리지 않고 정직하게 이야기했다가 교수 임용에 탈락한 포스트 닥(post-doc), 미국 최고의 학교에서 입학허가(admission)을 받고도 비자 서류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작성했다가 비자를 거부당해 유학을 포기한 학생 등등…


언제까지 우리들은 하늘의 별들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을, 그저 하늘을 나는 멋진 백조를 바라보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바라보아야만 할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가 끊을 수 있는 죄의 고리들을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핑계 뒤에 감추어두고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라고 하신 명백한 명령을 언제까지 ‘아직은 부족합니다’는 거짓된 겸손으로 가려둘 것인가.

[이시훈] 패자(敗者)들의 종교

이코스타 2002년 1월호

지난 봄 초 신문에 실렸던 기사를 떠올리며, 오늘날 기독교가 받는 도전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언론계의 빅 스타 부부라고 불리던 테드 터너와 제인 폰다의 이혼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세계적인 뉴스 전문방송사의 사장과 은막계의 대모와의 결혼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었고,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던 그들의 결혼생활은 환상적인 커플로서 찬사와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그런 그들이 10년 만에 돌아서는데는 많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저의 눈길을 끈 대목은 터너 사장이 부인 제인과의 이혼 사유 중 종교적인 갈등도 한 요인이었다고 고백한 부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같이 강하고 힘있는 여인이 패자들의 종교에 빠져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크리스천으로 거듭 났다고 선언하는 부인을 보며 아연실색했다는 것이니, 패자들의 종교란 바로 기독교를 지적하는 말이었겠지요. 언론계의 황제라고 자타의 인정을 받는, 세상의 힘과 권위를 자랑하는 한 남자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깨지고 상처 입은 패자들의 우울한 집단으로 보였나 봅니다. 아마 그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을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고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니까요.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승자들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부인 제인 폰다는 이혼 사유의 한 가지로서 그의 어린애와 같은 집착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혼자 있는 일에 늘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는 그가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징징거리는 아이와 같이 그녀를 피곤하게 했다는 것이었지요. 양방의 불만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구축했다고 믿는 자신감에 가득찬 사람,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 스스로 높은 자 되어 신이 필요하지 않은 그는 왜 그다지 허전하고 외로웠던 걸까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추종자들이 언제나 풍족했을 터인데 말입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가지고도 충족되지 않는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가진 거라곤 빈곤한 상황과 허약한 몸, 그다지 인정받을 만한 무엇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말씀 하나 붙잡고 기쁨과 풍만함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아무도 비켜 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조차 어이없을 정도로 담대한 패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승자(勝者)는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아마 나약한 자들의 감상주의라고 비웃거나 집단 최면이나 보상 심리에 빠진 상태라고 분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주 부드러운 마음 상태나 태도를 나약한 것으로 오해하거나, 강팍하고 독단적인 마음과 태도를 강한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강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중심보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우거나 공적 가치관을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우리 사회에서 강한 자로 인정받는 일이 종종 있곤 합니다. 게다가 타인의 아픔이나 결여 상태는 외면하고 자신의 입신양명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멋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고, 사회적인 모범상으로 까지 부각되는지요. 이웃의 아픔 때문에 애통해하고 그릇된 사회의 흐름 때문에 절망하는 모습은, 또한 자신의 이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너무나 감상적이고 나약한 사람들의 자기 연민에 불과한 걸까요? 화 나는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참고 용서하는 태도는 비겁한 태도이며, 이웃을 위해 내 몸을 걸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일, 오래도록 기다리는 일은 과연 누구나 할 수 있는 시시한 행위인지 자문해 봅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일에만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으며 조롱과 모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고백하던 그. 그들의 어리석음과 도저히 벗겨낼 수 없는 두꺼운 아집과 죄성을 부수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부숴 버린 그는 과연 완전한 패배자였던 걸까요? 사랑은 사람을 강하게 합니다. 모든 어머니는 강하다는 표현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어머니는 힘이 세고 권력과 명예를 가졌기 때문인가요? 자식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다 줄 수 있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 있기에 어머니는 강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 안의 어둡고 더러운 것들을 씻어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우리의 사망과 바꾸기 위해 값 없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보다 강함을 아직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세상에서 스스로 승자라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도 어느 한 순간 비켜갈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이 엄습할 때가 있을 겁니다. 주변의 그 많던 사람 중에 진정한 친구를 찾을 수 없어서 배신감에 젖고 외로움에 지칠 때가 있을 겁니다. 막을 수 없는 시간, 젊음도 건강도 어느새 멀어져 가고, 물질과 명예는 늘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때 허망하고 억울해서 잠을 이룰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자존심 때문에 드러내지 못하는 외로움과 서글픔을 아무도 알아 주지 않고, 고통 중에 위로해 주는 이가 없을 때, 간혹 누군가 손을 잡아 주길 간절히 바라게 될 지도 모르지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병이 들어도 절망하지 않고 배신을 당해도 분노하지 않을 만큼 진정한 강함을 바랄 때 그분을 생각한다면, 당신의 이름을 불러 주실 겁니다. 사랑하는 심령으로 항상 눈물이 가득한 당신은 분명 패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 죽음의 숲에서 빛의 벌판으로 자유롭게 들어선 당신은 이미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서 유리하는 별들'(유다1:13)이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유다1:24) 되었습니다.


내적 혁명의 무거운 지진을 극복하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