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7)

세계관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7)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둘 :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6. 세계관의 주제들 (Worldview Themes)


세계관의 구조와 그 역학적인 기능에 대하여 간단히 앞에서 살펴보았다. 어떤 사회이든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전제(혹은 믿음)들과 가치들과 충성의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세계관은 그 사회의 문화의 저변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과 삶의 모든 행동을 양식화(patterning)해주는 지도(map)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식화한다는 말은 삶의 행동이나 사고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양식화는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다. 그리고 이렇게 양식화된 사고나 삶의 모양들은 그 문화권에서는 당연한 진리처럼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인식된다. 그러므로 삶의 양식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소위 말하는 “문화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충격은 결국 세계관이 다름으로 인하여 생기는 충돌인 것이다.


6.1. 이제 이러한 구조와 기능을 갖고 있는 세계관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떻게 표현되는가?


각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들과 가치들과 충성들의 내용은 우리가 학적으로 분석하고 분류하기 쉽게, 즉 눈에 뜨이게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이나 “가치”나 “충성”이라고 구별하는 이 범주들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etic 분류일 뿐이다. (etic이라는 말은 문화인류학적 용어로서 관찰자 혹은 연구자가 보편적인 범주를 갖고서 현지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접근 방식 혹은 연구 방법을 가리킨다.) 실제적으로 세계관은 그 문화권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의 언어로써 혹은 숙어들로써 표현된다.(이러한 것들은 etic과 다른 개념으로 emic의 관점이라고 부른다. 즉, 내부인의 믿음의 내용들과 그들의 관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관의 내용들은 그들의 속담이나 잠언이나 격언 혹은 수수께끼, 또 설화나 신화 속에 숨어 있게 마련이다. 또 그들의 성문화된 법이나 그들의 전통적인 과학 속에서도 발견된다. 서구 사회의 세계관은 고도로 발달된 여러 분야의 학문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관의 내용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내용들이 주어진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되는 주제이어야 한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이 믿고 있는 내용을 우리는 세계관의 주제(worldview theme)라고 부르기로 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서 남자에 대한 선호라고 하는 내용은 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발견되었다. 요즈음은 많이 변화되어 어떤 하위사회(sub-society)나 가정에서는 이러한 남성선호 내지는 남성우위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 전반을 살펴보면 남성을 선호하고 우선권을 주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들을 선호한다든지, 집안에서 결정할 일들이 있을 때에는 남자에게 우선권을 준다든지, 정치에는 남성들이 주도권을 갖는다든지, 주방이나 다과의 모든 심부름은 여성들이 한다든지, 여필종부를 당연하게 여긴다든지, 하는 등의 내용들은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문화적 테마, 즉 세계관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남성선호 혹은 남성우위 사고는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음식점이나 길가에서나 어디에서든지, 한국 사회 전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문화적 믿음(cultural belief)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엽 문화인류학자 중 한 사람인 Morris Opler는 한 사회의 문화적인 테마는 대충 여섯 개에서 열두 개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현장 조사를 한 Swahili 이슬람 문화권에서 발견한 세계관 주제 역시 열두 개 이하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의 주제들은 각각 그 하위 구조를 갖음으로써 실제로는 그 내용에 있어서 복잡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Theme은 가장 큰 범주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각 주제는 그 밑에 하위 구조로 Sub-theme을 몇 개 가질 수 있다. 또 이 Sub-theme은 Paradigm이라고 하는 하위 구조를 갖는다. 그리고 이 paradigm은 sub-paradigm이라고 하는 하위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구조는 Kraft의 이론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Kraft는 sub-paradigm 아래의 하위구조들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정도까지로 분석하게 되면 상당히 그 문화권을 깊이 이해한 것이라 보고, 여기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으려 한다. 그러면 그 실제적인 예를 Swahili 사회의 것을 중심으로 하여 설명해 보기로 한다.


6.2. Swahili 사회의 세계관 주제들


동아프리카 동해안에 위치한 Swahili 이슬람 사회의 세계관은 다음 몇 가지의 주제들로 설명될 수 있다. Swahili 세계관은 Supernaturalism(초자연주의), 조상숭배, 과거지향주의, 집단주의, Baraka(축복, 혹은 능력의 개념), 사건 및 사람 중심주의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좀더 연구하면 몇 가지 범주가 더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 여섯 가지의 주제만 해도 엄청난 내용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주제들을 깊이 분석하면 스와힐리 사람들의 믿음들과 가치들, 그리고 충성의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 설명된다고 보인다. 그럼, 각 주제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초자연주의


스와힐리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들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영들은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고 믿는다. 이 진술은 스와힐리 사람들이 믿는 세계관의 대 주제가 된다. 이 믿음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입력되어 믿어지는 내용으로서 스와힐리 사람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 이 대 주제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하위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Sub-theme 1. 뭉구(하나님의 스와힐리 말)는 전능하시다. 그러나 그분은 엄격하시고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계시다.


이것은 분명히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내용이다. 전통적으로 스와힐리 사람들이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에 어떠한 신관을 갖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다른 아프리카 반투족의 신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슬람의 영향으로 신에 대한 친근감은 훨씬 약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믿음은 다음 하위 주제들 즉, Paradigm들로써 설명된다.


Paradigm 1. 하나님은 인간 마음의 모든 것들을 아시고 모든 행위들을 아신다.


Paradigm 2.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인간들이 따라야 하는 규칙을 정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의 규율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을 화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Sub-paradigm 1. 하나님은 악행하는 자들을 벌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


Sub-paradigm 2. 하나님은 매우 엄격하셔서 사람들은 반드시 그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Paradigm 3.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다른 영들이나 조상들보다 덜 관여하신다.


Paradigm 4. 보통사람들이 하나님께 부탁을 할 일들이 있으면, 사람들은 이슬람 성인들이나 조상들에게 중보를 부탁해야 한다.


이 첫 번째 Sub-theme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스와힐리 사람들의 신관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사 늘 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리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들의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믿음은 신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인 것이다. 이것은 현지 스와힐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알 수 있었는데, 나는 이러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른 스와힐리 사람들에게 재차 물어보았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동일한 내용과 느낌으로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 혹은 지식은 그 사회의 세계관의 주제로 설정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도 계속 이어서 이 스와힐리 사람들의 주제들과 하위 주제들의 내용들을 다루도록 하겠다. 바라기는 나의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독자들 역시 스스로 자신의 문화권의 세계관 주제들을 한번 찾아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이라면 분명 대부분이 한국 사회 내지는 한인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이 enculturation된 사회를 객관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놓고 세계관의 주제들을 찾아보기를 바란다.


[편집부] 기독 유학생의 엘리트 주의

이코스타 2002년 4월호

유학을 한다는 것,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 자신을 던져 더 나은 학업환경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험을 감수하는(risk-taking)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을 나온 유학생들 가운데에서 그러한 모험 감수(risk-taking)를 하고서도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나선, 적극적, 진취적, 모험적 엘리트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허들을 뛰어 넘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성향을 가진 유학생들이기에 그들이 보이는 삶의 방식과 태도도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 그것은 그들이 매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며 행동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학위’로 상징되어 질 수 있는 어떤 ‘성공’을 바라보지 않고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에게 이러한 모험 감수는 그 자체로 절대로 매력적인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이들의 삶의 방식은 매우 자주 그리스도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든 유학 생활 도중에 만난 사람이건, 이미 유학을 오기 전에 그리스도인이었건 간에 이들의 신앙 행태는 매우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회심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질이나 성품 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러한 기질과 성품도 분명히 ‘거듭나야’함을 생각해 볼 때 유학생들의 일반적인 신앙의 모습들은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목표 지향적 자세의 문제


긍정적인 목표 지향적 자세의 모델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빌립보서 3:14)을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표 지향적인 자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어디에서 기인했느냐, 그리고 그 목표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거의 모든 기독 유학생들의 ‘목표’는 비기독 유학생들의 목표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저 ‘공부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허울 좋은 합리화를 한다는 것을 굳이 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목표 지향적 자세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목표를 학문적/직업적 성취로 설정해 놓고 있는 유학생들에게 신앙 훈련/신앙 교육의 필요를 인식시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유학생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신앙 훈련이나 성경공부도 자신의 목표를이루는 장애물로 여기지기 십상이다.


2. 성공 지향적 자세의 문제


이 역시 소위 ‘성공’에의 기준과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세의 건강함 여부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경우에도 세속적 가치관에 근거한 성공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공 지향적 자세들이 유학생들과 같은 소위 ‘엘리트’ 그리스도인 사이에 편만한 듯 보인다.


대부분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노력(성실함)과 성공(성취)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 하지만, 모든 성실함이 언제나 성공으로 이끌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노력을 했음에도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한 사람들은 실패자이자 낙오자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소위 ‘고지론’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기도와 믿음으로 담대히” 물리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3. 행동 지향적 자세의 문제


“40일 금식기도 3회” 어느 ‘부흥사’의 명함에 이런 ‘경력’이 써 있었다고 한다. 40일 금식기도를 몇번 했다는 것이 신앙의 이력에 들어가는 것도 우습거니와, 어떤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로 판단되는 모습은 더욱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소위 ‘엘리트’ 기독 유학생들 사이에 너무나도 많이 발견되는 모습들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것들은 해야지’ 하면서 여러 가지 신앙의 행동들을 시도해 보는 모습들. 그래서 흔히 ‘헌신’의 핵심을 ‘행함’에 두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너무나도 자주 눈에 뜨인다. 지역교회에서도 당장 이처럼 눈에 띄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여기기 마련이고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진정으로 이르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되고, 고갈이 되고, 상처를 받게 된다.


금년 코스타의 주제를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로 잡은 것은 어찌보면 매우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유학생들의 성향에 매우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비정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기독) 유학생들의 흐름이 이번 코스타 한번으로 완전히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다소 비상식적인 낙관적 기대이겠으나,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이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유학생 문화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언급한 유학생들의 문화 속에서 상처를 받고 고갈된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풍성한 “치유”를 경험하는 일들이 있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크게 일하실 코스타를 기대해 본다.

[반영운] 환경에 대한 크리스챤의 자세 (1)

이코스타 2002년 4월호

환경에 대한 크리스챤의 자세 (1)


환경과 환경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시각


지난 호에서 살펴 본 내용들을 통해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소위 문화명령이 환경파괴의 원인이 아님을 익히 알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구원을 경험한 크리스챤들은 환경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며 구체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본 고에서는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개괄적으로 다루는 동시에 환경에 대한 기독교적인 시각을 살펴보고, 다음 호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크리스찬의 자세를 알아보고자 한다.


1. 환경문제


20세기 후반을 지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환경’은 모든 분야를 통괄하는 거대 담론으로 자리하고 있다.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농학, 공학, 예술, 문화 등 모든 학문분야에서 환경파괴로 인한 인류의 생존문제를 놓고 문제의 근원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실제적인 대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담론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문제가 지구 전체의 생존과 깊이 연관되어있을 만큼 심각하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어느 한 시기도 문제가 없는 시기가 없었고 늘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히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굳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때 과거에는 그 문제의 폭이 국지적이라고 한다면 현재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전지구적이라고 하는 면에서 차이의 한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라 하면 인간성의 상실, 빈곤, 질병, 소외 등 다양하게 지적될 수 있겠으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해서 인간문제의 총체적인 집합으로서 환경문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환경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바로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이라 할 때 산업혁명 이후 생겨난 기술지상주의, 성장지상주의의 영향으로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자연계를 비롯한 인간의 삶의 영역까지 심각한 파괴를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달리 기술산업의 발달로 생산이 증가되고 에너지의 소비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천연자원을 마구 파헤치고 망가뜨린 결과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농촌은 개발압력이 거세어지면서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고,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시는 물론 도시와 연계된 주변지역에까지 도시화의 부산물 (Externalities)인 각종 오염이 확대되어 가고 있고, 핵무기 개발과 실험으로 인해 인간의 삶의 질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인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대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 해양오염, 원자력 문제, 쓰레기 처리, 생태계의 변화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 문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 영향의 범위도 부분적이지 않고 모든 자연환경 및 인간사회에까지 전면적이고 전체적인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대기오염으로 인해 인간의 건강은 물론 자연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대기 중에 화석연료를 태움으로써 생겨나는 이산화 탄소가 공기 중에 많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나는 지구온난화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산화 탄소나 아황산 가스가 수증기와 반응하여 생겨나는 산성비의 폐해가 국경을 넘어서 나타나고 있는 것도 큰 문제 중의 하나이다. 공장건립, 농약의 과다사용, 산업쓰레기의 무단투기 등으로 인해 지표수 및 지하수, 그리고 토양이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고 그 영향권도 이제는 해양에까지 미치고 있다. 한 편 핵에너지의 사용, 폐기물 처리를 둘러싼 위해 (危害) 논쟁은 아직도 뜨겁기만 하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사막화, 오존층 파괴, 동식물의 변종화, 기형화와 같은 생태계 변화 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2. 환경문제의 성격과 원인


생태계가 파괴되는 현상적인 원인들로는 위에서 살펴 본대로 자연의 집중적인 이용 및 착취, 인구의 팽창, 그리고 에너지의 과다사용이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들은 다분히 문제의 결과나 과정을 토대로 찾아낸 것들일 뿐이다. Garret Hardin은 그의 유명한 논문인 “The Tragedy of the Commons (공유재의 비극)”에서 환경문제의 근원적인 원인으로서 인구문제를 들고 있다. 따라서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기 보다는 출산을 조절하게 하는 법제를 만들어서 인구를 통제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과연 Garret Hardin이 주장하는 것처럼 환경문제가 인구증가에 근본적인 원인을 두고 있는 것일까? 또 여러 학자들은 정치 경제적인 구조의 모순에서 환경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경제구조의 불안정성은 물론 국가 내 또는 국가 간의 정치구도의 역학관계에서 환경문제의 원인을 찾기도 한다. 이러한 원인규명은 한 편으로는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내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다분히 표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움직임이긴 하지만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는 위의 문제제기와는 달리 환경문제의 원인을 좀 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사고구조 즉 세계관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도 자연 즉 생태계의 구성원으로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최후의 소비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일체의 월권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자칫 근본주의적이고 실제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 환경문제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 대한 영적이고 기본적인 진리를 제시하고 있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환경과 환경문제는 어떤 성격과 원인을 가지고 있을까?


성경의 창세기를 토대로 볼 때 환경문제는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질서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파괴되면서 생겨난 것으로서, 하나님 중심의 질서가 인간 중심의 질서로 변하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깨어짐으로써 자연을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 결국 세상은 총체적으로 부조리와 탐욕으로 가득찬 황량한 곳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문제에 대한 해답은 다분히 사람의 수의 증가를 억제하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정치 경제적인 구조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인간과 환경의 일체적인 관계를 역설하는 생태적인 시각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다. 환경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오직 성경이 제기하고 있는 환경문제의 근원인 인간의 타락을 해결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에서는 창조, 타락, 회복 (구속)이라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통해 환경과 환경문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창조의 눈으로 본 환경


창세기에서 그리고 있는 하늘과 땅이 생겨나는 과정은 인과관계에 익숙한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왜냐하면 창조의 유일한 동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3),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 1:4)….”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세계를 무에서 유로, 창조주 자신이 보시기에 흡족할 만큼 좋게 만드셨다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통괄하는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에 맞는 세계를 만드셨고 그 안에 사람을 만드셨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피조물들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권위를 주셨고 (창 2:19-20), 또 다스릴 수 있는 권한도 주셨다는 것이다 (창 1:26, 28, 2:15). 사실상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드신 세계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잘 조화된 곳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일례로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풀을 식물로 삼고 (창 1:30) 있어 피흘리는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믿는 기독교의 신앙은 세상을 바라볼 때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완벽한 조화와 아름다움을 지닌 곳으로 바라봐야 한다. 현실적이지 않은 몽상으로서의 이상향이 아니라 원래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의 원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 더 더욱 창세기에서 그리고 있는 태초의 환경에 대한 신앙적이고 영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된 흙을 재료로 하나님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셨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이 다른 피조물 보다 우월하다는 것보다는 인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생기가 없으면 한낱 흙에 불과하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창조의 눈으로 바라 본 환경은 인간과 동일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아버지가 자녀의 이름을 짓고 자녀를 사랑하듯이 이름을 지은 인간의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인간과 자연 모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돌봄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각은 사람이 자연의 일부라고 하는 생각이나 자연과 공생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세계관보다 환경을 바라보는 면에 있어서 보다 근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준거 틀을 제공하고 있다. 창조신앙은 생태 신학적인 이론의 틀을 넘어 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기뻐하여 만드신 세계를 즐거워하며 누리며 아비가 자식을 돌보듯이, 아들이 아버지의 것을 관리하듯이 피조세계를 이해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비인격적이며 확률적으로 환경을 바라보는 진화론적인 일체의 시도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환경문제는 인격적인 창조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비인격적이고 몰지각한 인간중심주의와 물질숭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와 물질숭배주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창세기 3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인간의 타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타락의 눈으로 본 환경, 환경문제


성경전체를 통해 볼 때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나타나는 원시 창조세계의 모습과 질서가 깨어지게 된 거대한 분기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3장의 인간 타락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타락이라고 하면 무슨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 보여지는 범죄와 타락의 묘사는 행위 중심적인 눈으로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이 있다. 여러 시각으로 인간의 타락을 설명할 수 있으나 관계 중심적인 눈으로 인간의 타락을 보면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신 이유나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와 아담의 동기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즉,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아들로서의 인간이라는 부자관계에 대한 반항이자 독립선언이라고 보면 어떨까? 인간 중심적인 사고의 시작, 곧 인간 이외에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는 영적 공황상태를 타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집단적으로 쓰일 수도 있고 개별적으로 쓰일 수 있다. 사사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 25)라는 기록을 주의 깊게 상고해 보아야 한다.


창세기 3장에 구체적으로 기록된 타락의 과정은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주권과 아버지 됨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왕 됨과 주인 됨의 기초가 되었음을 그려주고 있다. 또한 인간 (뱀의 유혹에 넘어 갔기 때문)과 자연 (뱀의 사주 때문)이 공히 저주를 받고 함께 창조의 질서가 깨어지게 되면서 인간은 더욱 수고하고 땀을 흘려 땅을 갈아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는 자연과의 질서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고 있지만 자연과 자연의 관계 역시 약육강식의 살륙과 투쟁의 관계로 떨어졌음을 이사야서 11장과 35장에 나타나는 회복의 상황을 역으로 유추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기록이 끝나고 창세기 4장에는 인간질서가 깨어진 전형으로 형제살인이라는 비극적인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비극은 민족 간에도 벌어지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바벨탑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극치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분노를 산 대홍수로 연결되고 있다. 이후 인간은 자연을 조화롭게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잃게 되었고 한 편은 자연을 두려워 하여서 섬기기도 하고, 다른 한 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여 편하고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마냥 착취하고 파괴하기도 한 것이다. 환경문제는 이렇게 인간의 타락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중심주의의 가치관 속에서 발생하고 심화되었다.


환경문제를 말할 때 늘 논란이 되는 것이 인간의 과학기술 문제이다.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에 대한 논쟁은 참으로 오랜 동안 지속되어 온 난제 중의 난제이다. 과학기술의 중립성 논쟁이 바로 그 것으로서 한 쪽은 기술 자체가 어떤 목적이 반영된 결과라고 하며, 다른 쪽은 기술은 절대적으로 중립적이고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의 목적 여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 논쟁의 결론이 어떠하든 현대 과학기술의 끝간데 모르는 질주와 그에 따른 환경 위해성 여부는 심각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영역이다. 따라서 창세기에서 지적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 중심적인 욕망충족을 위한 기술개발과 자연 착취이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진정한 이웃 사랑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될 것을 목적으로 온갖 기술을 개발하여 섬기고 돌보아야 할 자연을 이용하고 착취하게 된 것이 바로 환경문제의 근본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또 하나 변한 것이 있다면 그 것은 바로 세계관이다.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이 깨어지면서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섬기도록 되었던 인간이 자연을 두려워하고 (창 9:2) 섬기는가 하면 인간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신을 섬기기도 하였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생겨나는 본말이 전도된 현상으로써 모든 문제가 여기에 기인한다. 타락한 이후의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차츰차츰 인간중심적, 기계론적, 상대주의적 가치를 발전시켜왔고 그에 따라 인간과 자연, 객관과 주관, 존재와 본질, 이성과 신앙, 등의 이분법적인 형태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심지어 현대 기독교인들의 가치관 속에도 무섭게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즉, 환경을 비롯한 세상의 일을 도외시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하고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거나 더욱 더 현실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영혼전도나 교회봉사에 모든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으로 교육하고 교육되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이교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둔 이원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정신적인 것은 거룩하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다고 봄으로써 신앙과 삶을 분리시켜서 인간을 참된 신앙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다분히 현실 도피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따라서 크리스챤들 마저 환경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거나, 환경을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한 결과 파괴되어 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찾거나, 천국으로 빨리 들려 올라가길 바라는 파렴치한들로 변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에 의하여 무참히 파괴되어진 환경은 과연 회복될 수 있을까?


회복 (구속)의 눈으로 본 환경, 환경문제의 해결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는 대안들을 보면 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의 변화를 유도하거나 보다 완벽한 생태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것들에 집중되어 있다. 즉,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일체감의 강조, 자연에 대한 경외심 고취, 생태계에 대한 책임의 윤리 등에 입각하여 기술 사용의 절제나 생태기술과 같은 생태복원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것을 포함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를 통해 어느 정도 환경위기를 둔화시키거나 부분적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위기에 처한 환경을 근원적으로 회복할 수 있을 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볼 때 창조의 아름다움과 질서의 회복을 전제로 한 환경 위기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는 인간의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창조질서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러한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가능하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구속 (구원)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구속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담겨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단지 영혼에만 한정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 (kosmos)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뒷 부분만 보면 자칫 초점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에 쏠릴 수 있다. 그러나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은 다름아닌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은 우주까지 포함하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과 구속사역이 바로 전 우주적인 구속 사역임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진정한 영생의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는 잘 알지 못하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불교적인 것과 흡사) 보장 정도로 이해되어진 영생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 대한 구속과 깊은 연계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시각을 훨씬 더 세상에 대해 적극적이고 총체적으로 만들어 준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못한 부분이 바로 골로새서 1장 15-20절에는 만물과의 화목으로, 로마서 8장 19-23절에는 피조물들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에 의한 해방과 구속으로 구체화 되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의 어긋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완전한 회복을 이루어 내셨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서 1장, 11장, 14장, 35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회복된 세상은 메시야의 도래와 함께 인간과 자연이, 자연과 자연이 서로 싸우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참 평화와 안식이 있는 곳이다. 에덴에서 보여진 창조질서의 회복이 바로 메시야의 오심과 연결되어 있고, 이사야 53장은 그 메시아의 죽음과 대속이 인간의 죄악 때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악이 해결되고 다시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 안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믿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5-20절에 나타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 뿐 아니라 피조물도 회복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자연의 진정한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에 달려 있다.


어그러졌던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차지한 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로, 자연과는 청지기와 관리자의 위치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회복된 인간은 이러한 위치를 자각하고 실제에서 관리인답게 행하면 자기회복과 만유회복이 정상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지상에서 완전한 성화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에야 비로소 자연의 완전한 회복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너무 성급하게 서둘러서도, 그러나 너무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행동해서도 안될 것이다.


회복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환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고 돌봐야 할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만물을 완성하실 것을 믿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체에 현재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접하고 있고 접하게 될 환경까지 포함시켜 이웃사랑의 하나로 가꾸고 보살피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린도 후서 5장 17-19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백성들에게 다시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직책과 말씀을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경에 대해 이보다 더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시각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부족한 형제를 돌볼 때 공동체가 더욱 살 맛나는 풋풋한 사랑이 흘러 넘치듯 환경을 돌보고 아끼며 사랑하는 회복과 화목의 직책을 수행할 때 우리의 삶의 자리는 더욱 풍성한 생명의 잔치로 변해갈 것이다.

[이시훈] 친구를 위하여

이코스타 2002년 4월호

드라큐라 백작은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좁고 어두운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수 백년 동안의 고독과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그리워했습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과 사랑 받고 싶은 갈망에 피가 타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격렬한 갈증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굶주림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의 방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완전한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 같아지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선택한 사람은 피의 공유와 더불어 동류의 흡혈귀로 바뀌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 시켜가며 존재의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이 그의 사랑의 길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나르시스의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솔직한 본능의 하나입니다. 부족하고 거짓되고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진 자신이 못마땅하고 괴로울지라도,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힘이 생을 이끌고 가는 견인차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취향, 환경, 가치관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곤 합니다. 게다가 내적인 기질이나 목표가 비슷한 사람에겐 쉽게 친근감을 느끼고 다가가게 됩니다. 우정이라는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반드시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지요.


처음엔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 대상을 찾고 친밀감을 느끼던 우리는 점차 가까워질수록 상대에게 자신과 같아지기를 요구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스승은 제자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자신의 가치관과 생활관을 그들에게 적용하기를 강요하게도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흔히 믿고 있기에 상대가 상처받고 있는지 점검할 이유를 느끼지 않은 채 맹목의 사랑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비단 개인적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진 단체들간이나 세대간의 갈등, 인종간, 국가간의 갈등에서도 이러한 가치관의 강요는 나의 것만이 옳고 아름답다는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개성과 독특성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고,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즐기고, 생각과 감정을 공감하고 싶은 욕망도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나와는 생각도 다르고 취향이나 표현 방법도 다르며 살아가는 배경도 완전히 다른 사람을 친구로 인정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 인지요. 상반된 가치관과 생활관의 차이로 의견이 대립되고 그것이 확대되어 미움과 분노로 변하기조차 합니다. 사소한 이해관계로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개성은 눈에 거슬리게 보여지기도 하고, 다른 습관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나와 일치하지 못하는 상대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깡은 학생들에게 “그대는 넷을 셀 줄 아는 인간인가?”라는 선문답 같은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묻는 넷은 정신분석에서 흔히 차용하는 숫자 상징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넷의 범위는 우리가 접하는 세계의 범위, 즉 관계의 범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삼 요소인 주체(subject), 대상(object), 에고(ego)에다가 타자(other)가 포함된 세계에 살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닌 이웃들이 포함된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매우 커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나보다 지식 수준이 낮거나 지능 수준이 낮다고 무시하거나 사회적 지위나 환경이 나와 걸맞지 않는다고 외면해온 이웃들, 가치관이 너무 다르고 취향이 천박하다고 멀리해온 사람들 마저 나의 울타리 안에 받아들이는 열린 자아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하거나 용납할 수 있단 말이지? 하며 자문할 때, 내 안에 울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너의 그릇됨과 어리석음과 교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의 부족함이 가득한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나는 언제나 너의 말에 귀 기울이고 같이 아파하고 받아주는 친구이길 원한다.” 보기에 그럴듯한 명예를 가진 친구를 갖고싶은 속된 욕망과 비슷한 부류에서 친구를 찾는 폐쇄적인 마음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소외 받는 이웃들, 삶의 다양한 고난에 상처받고 신음하는 이웃들을 셀 줄 아는 사랑은 훈련이나 결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선하신 존재로 인해 변화 받을 때 나의 이기적인 본성도 변하게 됩니다. 드라큐라 백작의 그 어둡고 좁은 관은 그의 자아 세계를 의미합니다. 단절된 관계 속에서 외로움에 지치고 병든 자아, 일직선상의 사랑은 그를 구원할 수 없는 길고 긴 고독의 시간에 가두고 마는 것입니다. 관계의 고리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열린 삶, 누구나 나의 친구가 되어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넷을 셀 줄 아는 성숙함을 갖게 되길 원합니다. 내가 내민 손에 누군가 손을 마주치며 지나가는 일, 혼자서 박수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