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늘 푸른 나무, 비탈에 서다.

코스탄 현장 이야기


늘 푸른 나무, 비탈에 서다.


용혜원 시인이 학교를 방문하여 <시와 음악이 흐르는 밤>이라는 문화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그 행사 준비를 하느라 아내와 더불어 내가 지도하는 <늘푸른 나무> 써클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시 낭송을 처음 해보는 아이들인지라 아름다운 선율에 감정을 넣어 서정적인 시를 읊조리는 모습이 어설프다. 그러나 그 서투름 속에 이곳 아이들의 소박한 심성들이 묻어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린다.


(1)


“선생님, 큰일 났어요……”
내가 지도하는 서클의 남녀학생 둘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어도 그저 낙심한 표정으로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그들 중 얼굴이 하얀 한 여학생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힘없이 내뱉는다.
“이제, 우리 서클은 끝장이야요.”
평소에 서클 활동에 적극적이고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던 그 여학생은 아예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글줄이나 좀 쓴다는 아이들을 모아서 문학 서클을 만들었다. 생각이 깊다고 자부하며 자존심과 개성들이 강한 아이들이었다. 그만큼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면들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의 순수함이 그 모든 것들을 감싸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을 모아서 내면의 응어리진 것들을 글로 표현시키며 다듬어가려고 했다. 걸음마를 시작한 대학 문화를 정신적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포부들도 있었다.


학교에 심어놓은 어린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늘 푸른 나무>라고 이름을 짓고 문집을 내기 시작했다. 푸르름을 잃지 않는 모임이 되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처음에는 아주 소박하게 시작했다. 한 학기에 한번씩 겨우 겨우 자신들이 틈틈이 모아놓은 소품들을 발표하는 형편이었다. 첫 문집을 내었을 때에는 모두들 좋아했다. 두 번째에는 외부에서 작품 공모를 받아서 좀 더 세련되게 다듬었다. 편집하는 기술도 늘었고, 약간의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학교 내 다른 동아리들에 비해 유달리 단결도 잘 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동아리에 대한 사랑이 날이 갈수록 불붙는 것을 느꼈다.


대학 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문학의 밤’을 개최했다. 도무지 문학의 밤이라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취지와 형식을 대충 설명해 주고 맡겨두었더니 아이들끼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문도 구하고 밤을 새워 끙끙거리며 작품을 만들어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대 성공이었다. 국제대학의 면모를 살려서 한국시, 중국시, 영시, 불란서 시들을 섞어 가며 시를 낭송하고 계절의 감각을 드러내는 수필을 빔 프로젝터를 동원하여 대형 스크린에 영상을 비추며 함께 낭독하기도 했다. 한국 대학생들도 미처 생각지 못한 장르들도 등장했다. 문학 작품 중 한 토막에서 발췌한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멋진 해설과 함께 극화로 만들어 올리기도 하였다. 자신들의 캠퍼스 라이프를 코믹하게 엮어서 스크린 상에서 영상 드라마로 연출하기도 했다. 열렬한 박수 갈채를 받으며 문학의 밤이 막을 내렸다.


그런데 그 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늘푸른 나무> 동아리를 주도하던 두 학생이 있었다. 둘 다 문재(文才)가 있고 개성이 강한 아이들이었다. 그 중 U라는 학생은 사색적이면서도 언변이 뛰어나고, 행동이 약간 괴팍하며 야심이 있는 아이였다. M이란 학생은 이미 연변 일보의 신춘문예에도 당선될 정도로 시적 감수성이 탁월하며 미술에도 조예가 깊은 예술적 끼를 지닌 아이였다. 미남형의 U에 비해 M은 체격도 왜소하며 말주변도 없었다. 반면에, 학업 성적이 뛰어난 M에 비해 성적이 밑바닥을 돌고 있던 U는 평소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문학의 밤을 통하여 언변이 뛰어난 U가 사회를 맡으며 대중 앞에서 멋진 연기를 보이자, 마침내 전교적인 히로로 등장하였다. 어쩌면 뒤에서 실질적인 총 연출을 하며 더 많은 수고를 한 것은 M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인기가 오른 U가 자신감을 얻으며 총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평소에 U를 얕보던 M은 크게 반발하며 반대편 후보의 참모로 뛰어들었다. M의 주장인즉, U는 결코 학생회를 이끌만한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서클 내부도 곧 두 패로 나뉘었다. 그렇게 친하던 아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안겨주기 시작했다. 선거전을 치르면서 양 진영의 마음은 갈갈이 찢어졌다. 상대방에 대한 심한 인신 공격이 오가는 속에서 자신들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면의 치부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거는 결국 U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누구도 진정한 승자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오욕과 수치의 상처들이 깊이 남았다. 두 학생 모두 비로소 자신들의 추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아연할 만큼 충격들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며칠 후 학교 기숙사에서 살인 사건이 날 뻔한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이었다. 선거전에서 분노를 품은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머리를 칼로 세 번 찌른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선거를 치르면서, 선거전을 민주주의의 훈련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아직 미성숙한 학생들에게 완전히 맡겨 두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자유 경선에 의한 직접 투표를 진행하는 동안에 상대와 공대의 대표로 나온 두 후보자를 서로 지지하던 측근에서 심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고, 투표일을 앞두고 선거전이 더욱 혼미해지기 시작하자 양 진영에서 심한 감정적인 대립까지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가 근소한 차이로 한쪽이 패하게 되자 평소 술만 마시면 거친 성격이 튀어나오던 한 학생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대방 진영의 한 학생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었다. 다행히 칼날이 빗겨 나가는 바람에 표피만이 크게 찢어지고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랑의 집이라 일컬어지는 기숙사에서 생겨난 이 사건을 앞에 두고 우리 교직원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바로 가르치고 다스리지 못한 자신들을 회개하며 크게 반성하는 계기를 삼게 되었다.


연변에 있는 조선족이나 한족들은 무서운 문화 혁명의 회오리바람을 통과하면서 심성이 거칠어진 탓인지 한번 싸움이 일어나면 으레 폭력을 행사하며, 일단 증오심을 품게 되면 끔찍한 연쇄 복수극을 벌이는 것을 예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길에서도 칼을 휘두르는 장면들을 더러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강력 사건들이 빈번히 일어나는 연길시의 다른 곳에 비하여 연변 과학 기술 대학만은 그 동안 한 번도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 예가 없었기 때문에 연길시 공안국에서 조차 신기하게 생각하며 매년 감사를 표시하는 특별 구역이었던 것이다. 진리, 평화, 사랑의 교훈 아래 선생과 제자 사이가 다정한 부모 자식과도 같고 학우들 사이에 사랑과 우정이 깊기로 자부하던 우리 학교에서 발생한 일종의 살인 미수 사건이었기에 더욱 그 충격이 컸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사건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그들의 대립 양상이 단순한 단과 대학의 대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연히도 두 대표 중 한 학생은 믿는 학생이었고 또 다른 학생은 믿지 않는 학생이 출마를 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 학생들을 지지하는 학생들조차도 은연중 믿는 학생들과 믿지 않는 학생들로 갈라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믿는 학생의 승리로 끝나고 말자, 평소에도 믿는 학생들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던 상대편 학생들이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던 것이다.


우리 교직원들은 이 사건을 돌이켜 보면서 믿지 않는 학생들에 대하여 소홀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기 시작했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 나름대로 학생들에 대하여 예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더러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소외된 학생들이 있어 왔으며 비록 고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편애로 인한 아픔과 상처를 안겨준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카인의 잘못을 두둔할 수는 없다.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여 최초의 살인자로 성경에 기록된 불행한 사람 카인의 경우는, 흔히 오해되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편애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것이 절대 아니다. 카인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받았으나 그 마음속에서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반발하고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살인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성품을 지닌 우리 인간이 편애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가 아무리 공평한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사랑을 주는 자나 그것을 받는 자가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편애로 인한 불씨를 일으킬 소지가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비책은 한가지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그 방법대로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자부터 먼저 사랑하고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에게 선대하며 우리를 죽이려 하는 그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는 길일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학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살인 미수 사건이기에 마땅히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비록 그 행위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한번 우리 학교에서 받은 학생은 끝까지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그에게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 대립되었다. 결국은 일단 학교에서는 제적시키되 계속 돌보아서 그가 참으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고난 주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기에 우리 교직원들은 십자가 앞에 모두 모여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2)


그 사건에 깊이 관여했던 <늘 푸른 나무> 써클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도 선거라는 일종의 정치바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정치권에 몸담았던 경력이 있으신 어떤 교수님은 정치 마당에서 편이 한번 갈라지면 다시는 합치기 힘든 우리 민족의 근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평하면서 그들 사이의 우정은 이제 끝났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늘 푸른 나무>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떻게 할까? 이들을 그냥 해체시켜야만 하나? 심히 고민이 되었다.


마침 그 날은 예수가 돌아가신 성금요일이었다. 그 날 저녁,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조차 바라보기 힘들만큼 어려운 자리였다. 한참 만에 말문이 열리면서 다시금 분노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학생 몇몇은 과거에 멋모르고 상대방을 잘못 판단하여 좋아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치를 떨며 분개하기도 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고개들을 내저었다.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차가운 무덤 속에 함께 모여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기도하다가 갑자기 용기를 얻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말문을 열었다. 예수 십자가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다. 그 이전에는 의식적으로 써클 아이들을 앞에서 한 번도 기독교에 대해 설명해 본 일이 없었다. 써클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공개적으로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중국 법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의 가로막힌 담장을 허물 다른 어떤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화해와 용서의 의미를 이야기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던 그 사람들과 그 여인을 용서한 예수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 가운데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심히 반발하는 학생들도 섞여 있었지만, 그 시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심을 느꼈다. 모두들 숙연히 듣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면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대방을 용서해야만 하는 그 아픔에서 오는 설움의 눈물이었다. 한참 후에 아이들의 얼굴에서 평온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자신들끼리 그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그 다음날 늘 푸른 나무의 어린 가지들이 다시 만나서 자신의 잘못들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서하는 아픈 절차들을 밟았다. U와 M이 다시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부활의 주일 아침, <늘 푸른 나무>가 밝은 햇살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김철수]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8)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8)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둘 :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6. 세계관의 주제들 (Worldview Themes)


6.2. Swahili 사회의 세계관 주제들


이번 호에서도 계속하여 스와힐리 사람들의 세계관의 테마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다시 반복해서 설명하자면, 세계관의 테마 혹은 주제라 함은 어떤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사회가)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세계 이해 혹은 믿음들(assumptions)의 내용들이다.


(1) 초자연주의 (Supernaturalism) [계속]


Sub-theme 2. 알라는 인간들로 하여금 진(jinn)과 함께 살도록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진들과 함께 사는 것은 신의 정한 이치이다.



Paradigm 1. 진은 이 세상의 어디에든지 있으며 특별히 인간에게 가까이 있다



Sub-paradigm 1. 어떤 짐승들은 사람이 못 보는 진을 볼 수 있다.
Sub-paradigm 2. 진은 대부분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뱀이나 고양이나 개나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Sub-paradigm 3. 진은 인간의 꿈에 나타나기도 한다.
Sub-paradigm 4. 진은 여러 면에서 인간과 흡사하다. 진은 태어나며 성장하며 결혼도 하고 성관계도 갖고 자식도 낳고 늙어 죽기도 한다. 따라서 진도 인간처럼 가문과 뿌리가 있다.


Paradigm 2. 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좋은(유익한) 진”과 “나쁜(해로운) 진”이 있다.



Sub-paradigm 1. 진은 일반적으로 변덕이 심하고 예측이 불가하며 미성숙하고 이기적이고 인간에게 매우 해롭다.
Sub-paradigm 2. 사람들이 병을 앓는 것은 종종 진 때문에 그렇다. Sub-paradigm 3. 심지어 좋다고 하는 진(특별히 “루하니”라고 알려져 있음) 역시 언제 해롭게 변할지 모른다.


Paradigm 3. 사람들은 사회를 평화롭게 그리고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진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Sub-paradigm 1. 사람들은 진의 영역을 침범하여 그들의 노를 사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Sub-paradigm 2. 진이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서 진들을 달래주는 의식을 행하여야 한다.
Sub-paradigm 3. 평민들은 진을 통제하는 능력이 없으나 “waganga”는[스와힐리어로 치유자를 의미하며 곧 샤만들을 가리킴] 능력을 갖고 있다.


Paradigm 4. 진은 인간의 머리에 올라탈 수 있다. [사람들을 (말하자면 귀신)들리게 할 수 있다는 뜻]


Paradigm 5. 오직 waganga들만이 진을 다룰 수 있다.



Sub-paradigm 1. waganga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Sub-paradigm 2. 진이 머리에 올라타면 waganga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Sub-paradigm 3. 진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진과의 의사 소통이 대단히 중요하다.
Sub-paradigm 4.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진들의 이름들과 출신을 아는 것이 waganga들에게 필요한데, 이는 진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데에 도움이 된다.


Sub-theme 3. (그러나) 공동체의 집단적인 문제들은 mizimu가 그 원인이다. [mizimu는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영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슬람의 영계와 아프리카 전통적인 영계가 스와힐리 무슬림들의 세계관 안에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조상(ancestors)에 대한 믿음


Sub-theme 1. 조상들은 사회 구성원의 일부이다.



Paradigm 1. 조상들은 육신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조상님들”의 영역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가리킨다.
Pradigm 2.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야 한다. 즉, 죽을 때의 나이와 살아 있었을 때의 명성 등이 그 기준이 된다.
Paradigm 3. 조상들은 그들이 산 자들에 의하여 기억되는 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Paradigm 4. 조상들은 산자들, 특별히 그 사회 공동체의 어른들의 꿈에 나타나 자신들이 살았던 사회와 계속 교류(communication)하기를 원한다.


Sub-theme 2. 조상의 영들은[mizimu라고 하기도 함] 존중되어야 하고 전통이 가르쳐주는 대로 온당하게 그들을 대우하여야 한다.



Paradigm 1. 모든 가문은 mizimu가 있게 마련이다. [이때 mizimu는 각 가문의 중심으로서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Paradigm 2. 조상들은 정기적으로 mizimuni에서 [이때 mizimuni는 mizimu를 모신 곳을 가리킨다] 예를 받아야 한다.
Paradigm 3. 각 사회 공동체에서 치르게 되는 대부분의 행사는 조상들의 허락이 필요하다.
Paradigm 4. mizimu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제대로 대우만 해주면 그 공동체를 보호하여 준다.
Paradigm 5.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조상들은 산 자들에게 격노하게 될 것이며 후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도록 사회에 어려움을 주든지 아니면 벌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스와힐리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들을 갖고 사는데, 이러한 믿음들이 앞서서 이론적으로 설명한 문화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개념의 구체적인 내용이 된다. 내부인으로서의 믿음의 내용들을 (즉, emic의 관점을) 문화적 테마라고 하는 연구자의 학문적인 틀로써 (즉, etic의 방법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지금 내가 기술하고 있는 스와힐리 사람들의 세계관 내용이다. 다음 호에서는 세 번째 테마로서 “과거지향주의”와 “집단주의” 등의 주제들을 다루도록 하겠다.


독자들은 우리 한국인 혹은 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믿음들이 무엇인지 스와힐리 사람들의 내용과 비교하여 생각하여 보기를 바란다. 즉, 우리 한인들이 어려서부터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움으로써 형성된 믿음들과 가치관들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놓고 분석하고, 또 이것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의 그것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를 좀더 관찰자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우리가 변화를 필요로 하는 부분들을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석적인 틀을 제공하여 준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과 서구화된 사고 방식 사이에서 형성되는 가치의 충돌과 이러한 충돌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을 통하여 문화적 세계관은 변천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함철훈] 압록강이 바라다 보이는 교회였습니다

eKOSTA 갤러리


압록강이 바라다 보이는 교회였습니다








꽃들이 창턱서 가지런히 빛 쪼이도록 화분들을 돌보는 성도들도 만났습니다.







창 밖으론 압록강이 소리없이 흐르고,







강 건너 멀리 산 넘어 하늘은 어제처럼 무심하게 물들어 가고,







뒷 담 넘어 나무 사이로 바람이 일면,
숲 속 깊숙히 어둠이 안개 내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내일속으로 스며 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마땅히 볼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거기서도 나는 나를 기다렸습니다.
압록강이 흐르듯, 유월이 흐르듯…


[팽동국] 가트 린(Garth Lean)의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eKOSTA 서평


가트 린(Garth Lean)의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윌리암 윌버포스의 생애>
<God’s Politician : William Willberforce’s Struggle>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란 주제로 열 일곱번째 코스타가 이제 다음달이면 시카고 근방의 휘튼 컬리지에서 열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치유되는 자아에 대해서는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지만, 사실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에 대해서는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고 어떤 모습일지를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는 본인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지역이나 공동체, 혹은 족속, 민족, 국가에 회복된 경우를 역사에서나 현시대에 보아온 예가 매우 드물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가트 린의 <윌리암 윌버포스의 생애>는 한 정치가와 그의 친구들을 통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한 국가 전체에 걸쳐 회복된, 역사에서도 많지 않은 예임이 분명하다. 특별히 선교사나 목사 등의 전임 사역자가 아닌 평신도였던 정치가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한 국가, 아니 국가를 넘어 온 세상에 회복되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윌버포스와 그의 동역자들의 삶은, 특별히 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소망조차도 갖기 힘든 조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에, 우리 코스탄들이 2002년 코스타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영역이 개인의 삶과 지역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문 분야와 사회 구석구석에까지 미치게 되는 거룩한 꿈들을 꾸며 비전을 갖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저자 가트린은 서문에서 이 책을 엄격한 연대순으로 쓰지 않고 주제 중심으로 썼으며 그 이유는 윌버포스와 그 친구들이 독특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시대정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자질들과 방법들을 살펴보고자 함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이 책은 많은 시대적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좀 더 객관적이며 비교 분석적이라 다른 일반적인 전기와는 다르게 전반적으로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별히 첫 몇 장은 윌버포스가 살았던 당시의 영국의 배경과 노예무역 상황, 그리고 영국의 의회제도와 윌버포스의 정치입문 등을 서술하였는데,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자칫 따분할 수도 있으나, 그 시대 전반을 이해하고 윌버포스와 그 친구들을 이해하는데는 많은 도움이 된다. 더불어 그 시대의 역사와 정치 등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도 덤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저자가 분명히 했듯이 이 책이 비록 윌버포스의 전기이지만, 한 개인의 전기라기보다는 윌버포스를 중심으로 그의 친구들과 공동체로서의 동역에 강조점을 두어, ‘윌버포스는 한 사람이 그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지만 혼자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장했다’는 존 폴록(John Pollock)의 말을 인용했다. 첫째는, 자신을 변화시키시고 동기를 부여해 주시며,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또한 자신과 함께 계획하고 일하며, 목표와 동기를 명확히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 맞는 친구들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서로 힘을 합해서 필요한 지도력을 창출했으며, 그 지도력을 효과 있게 해주는 전국적인 여론도 만들어 냈다. 그런 면에서 때때로 하나님은 의인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만 알고 있기 쉬운데,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맞지만, 어떤 면에서는 틀리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헌신과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동역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를 통치하고 계시는 것 같다.


윌버포스는 작은 키에 천성적으로 다정다감하며 열정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기에 사람들을 모을만한 매력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넘쳐났다. 거기에 그의 목소리는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음역을 갖고 있었고, 의회에서 유창한 표현력과 통렬한 풍자로 가득찬 연설을 할 때에 ‘아무리 적대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즐겁게 들었을 정도’로 천부적인 목소리의 연설가이자 정치가였다. 10대 초반에 윌리암 윌버포스는 조지 휫필드의 친구였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으며 노예선 선장이었다가 회심한 존 뉴턴 목사의 설교와 간증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으며 감리교도가 되어 자라왔으나,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반대로 고향인 헐로 돌아와 더 이상 신앙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고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정치에의 꿈을 꾸었고, 열 일곱 살에 캠브리지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보다는 사교에 관심을 두며, 후에 친한 친구이자 수상이 되었던 정치 동지 피트와 만났을 뿐 아니라, 다른 신앙의 동역자들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피트와 함께 21세에 의원으로 출마해 윌버포스는 헐에서 당선되고, 24세에 영국내 가장 크고 중요한 요크셔 주에서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탄탄대로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 누이가 아파서 따뜻한 지방으로 여행할 때 친구 아이작 밀너(Isaac Milner)와 동행을 하며 토론을 할 기회가 주어졌고, 성경적인 기독교에 지적 동의를 하게 되며, 그 이후 런던으로 돌아와 짧은 시간을 방황을 하나 결국 회심하게 되고, 친한 친구이자 수상이었던 정치 동역자 피트와 존 뉴턴 목사와의 면담을 통해서 ‘교회의 유익과 국가의 유익’을 위해 변화된 새로운 삶과 사고로 살아가는 신앙인인 동시에 정치인으로서 공적인 생활을 계속 유지할 것을 권유받는다. 그 이후 18개월간 동안 정치가로서의 공적인 삶과 내면에서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갈등과 삶의 목표로 고민하게 되고, 그 고민과 갈등의 여정을 통해 결국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근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라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그 두 가지 목표를 위해 50년 동안이나 그는 수상직을 포함한 여러 공직도 포기하고 클래펌 공동체를 형성하며 신앙의 동역자들과 함께 수고하다가, 죽기 이틀 전에 드디어 노예 해방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나서야 운명을 한다.


윌버포스와 그의 친구들은 타락한 시대에 새로운 정치적 순결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정치인들로서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서 공공복지라는 큰 문제를 책임지는 집단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으며, 여론을 환기시키는 새로운 방법들을 개발하여 그것으로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새로운 민주주의가 신앙에 뿌리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영국과 전 세계에 확신시켜준 사람들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후기에서 저자 가트린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 제기를 한다.


첫째는 개인의 무기력 증후군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시대에 가장 보편화된 오해중 하나는, 개인은 무력하며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기독교는 이런 견해에 대해서 언제나 반대하며 개인의 무한한 가치와 잠재력을 선언한다. 그러나 헌신되었다는 그리스도인 들도 종종 다음 두 가지 그릇된 대안들에 의존하는 것 같다. 하나는 세상 문제들과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개인적 신앙의 게토(ghetto)속에 도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심할 필요가 없어 보일 정도로 거의 완전하게 정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일들이 18, 19세기 영국에서는 일어날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조직이 방대하고 권력이 비인간적이어서 한 개인이 더 의상 그런 사회나 국가를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심과 능력을 제한하는 것에서 기인할 뿐이며, 저자는 개인적으로 상황의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을 통한 변화를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려왔고 그 변화중 일부는 국제적 규모의 변화였다고 고백한다. 문제는 윌버포스와 그 친구들처럼,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 막다른 골목과 같은 상황에서 문제들과 씨름할 일단의 헌신된 사람들에게 달려있다고 도전한다.


이제 우리 나라에도 윌리암 윌버포스와 그 친구들 같은 정치가들이 속속들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느헤미야, 에스라, 모르드개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삶의 구석구석 모든 분야에 걸쳐 나오되, 특별히 정치분야에 그런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노풍’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이 우리의 조국을 휩쓸며, 우리 코스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일이 있기를 2002년 코스타를 준비하면서 기대하고 기다리며 기도한다.

[은지영]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 : 비극의 자리에서 다시 부르는 희망가

영화 속의 숨은 그림 찾기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
비극의 자리에서 다시 부르는 희망가


 

















개봉연도 2000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감독 박찬욱
원작 소설 DMZ (박상연 작, 민음사 1997년)
각색 박상연, 김현석, 정성산, 이무영, 박찬욱

주요 등장 인물

오경필 중사
이수혁 병장
정진우 전사
남성식 일병
소피장 (Sophie E. Jean)
최만수 상위
표장군
장소령


송강호
이병헌
신하균
김태우
이영애
김명수
기주봉
이한위


지난 3월 초순 드디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이하 JSA)를 보았습니다. 미시간대학 한국유학생회에서 주관한 ‘한국영화의 밤’ 덕분이었지요. 2000년 9월경에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를 1년 반이나 지나서야 처음으로 보게된 것입니다.


더 이상 깨지지 않으리라던 <쉬리>의 관중동원기록을 역사에 묻는 성공을 거두었던<JSA> . 당시 대부분의 보도내용은 이 영화를 <쉬리>와 동급으로 비교하는 분위기였는데, 개인적으로 <쉬리>란 영화를 ‘로맨스가 적당히 사탕발림된 어설픈 블락버스터(blockbuster)’ (특히 미국영화 을 꽤나 ‘참조’한 듯한 분위기의)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던 터라 동네 한국상점에 비디오가 나왔다는 입소문에도 초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집에 사는 외국인 하우스메이트들에게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려야한다는 한민족으로서의 사명감이 불끈불끈 솟는 바람에 뒤늦은 밤나들이를 감행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난 느낌은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유신정권의 아스라한 끝자락과 80년대의 아수라들을 기억하는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더군요. “그곳에도 사람이 있었네 그려” “승냥이들이 아니더만” 식의 북한 다시보기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우리 민족 모두를 향한 깊은 외침. 뭔가 묵직한 것이 심장을 내리누르는 듯한 부담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 삼개월이 지난 지금, 또다른 부담감으로 태평양 건너의 조국을 바라보며 이 글을 씁니다. (<JSA> 줄거리 보기)




<JSA>는 ‘현재-과거-현재-과거-현재’로 짜여진 미스테리 형식의 영화입니다. 플래시백(flashback) 효과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수사관 소피와 함께 미궁의 사건을 해결하는 재미를 즐기는 동안, 관객은 그들이 풀어야할 수수께끼는 사라진 총알 하나의 행방도 아니요, 이수혁과 오경필 둘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중립국감독위원회(이하 중감위)의 보타장군이 처음 소피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지요.


 





보타 우리 임무는 누가 그랬는지를 찾아내는게 아니라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 내는 거네. 또한 수사 결과가 아니라 어떻게 수사를 해나가느냐가 중요하지. (Our job is to find out not who but why. Also what’s important is not the outcome but the procedure.)


제 1 부: AREA



<JSA>는 또한 ‘Area-Security-Joint’의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영화 제목을 거꾸로 해놓은 듯한 배열인데, 제1부 ‘Area’는 이름 그대로 ‘구역’, 즉 ‘남과 북’, ‘아군과 적군’, ‘양키괴뢰군과 빨갱이괴뢰군’으로 나뉘어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대치하고 있는 긴장된 분단상황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1부 Area는 이런 분단상황에 의한 편견과 허상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를 소피가 만나는 남북한 군인들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기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JSA에 파견된 한국계 스위스인인 소피소령은 보타장군으로부터 남과 북 어디도 자극하지 말고 철저히 중립을 지키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하지만 수사본부에서 만난 한국군의 표장군은 그녀에게 처음부터 선택을 요구합니다.


 





표장군 “중립국감독위원회? (코웃음치며)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어. 빨갱이, 그리구 빨갱이들의 적…. 여기 ‘중립’ 설 자리 없어, 선택만 있을 뿐이야…. 법대 나왔대며? 현명한 선택하리라 믿네.”


반공이데올로기로 철두철미하게 무장된 표장군에게 북한군은 한’마리’라도 더 쏴 죽여야 속시원한 야수들에 불과합니다.


 














표장군 (이수혁구출조의 책임자를 문책하며) “그래서? 그래서 중화기들도 일부러 엉터리로 쐈니? 나무나 부러뜨리라고 명령했어?”
대령 “그냥 구출조 엄호용으로 겁만 주라고 그랬습니다.”
표장군 “뭐? 야! 야! 니가 겁먹은게 아니구?”
표장군 (소피와 페르손더러 들으라는 듯이 강소령에게) “… 이 사건은 뭐 뻔한 거 아냐? 빨 갱이 놈들이 납치해놓구 자진월북으루 조작하려 한거. (강소령에게) 안그래? …우리 애…. (수혁의 곁에 앉으며) ….이름이 뭐랬지? … 그래 수혁이…. 우리 수혁이 포상휴 가 좀 보내주게 빨리 좀 끝냅시다. 대단한 놈이야, 이놈… (수혁의 두볼을 쥐고 흔들 어대며) 두마리나 사살하다니…. 아주, 영웅이야, 영웅! (수혁의 등을 두드리며 소피 에게) 안 그래, 장소령?”


북한군의 리상좌 또한 표장군에 뒤지지 않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위에 수혁에 쓰러져 있던 자리의 윤곽선을 들여다보는 소피에게 그는 “정확히 군사분계선 위에 쓰러지다니 어케 좀 연극같디 않소?” 라고 말하며 사건의 모든 책임을 남쪽으로 돌리며, 마치 남쪽의 뻔뻔스런 악선전에 대항하기 위해 오경필이 살아남아 준 것인양 그의 생존을 다행스러워 합니다.


빨갱이 아니면 빨갱이의 적. 적군 아니면 아군. 이처럼 단순명료한 이분법이 통하는 곳에서는 상대방을 바보로 만들거나 곤경에 빠뜨리는 등의 작은 일로도 쉽게 ‘장한’ 일을 한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북쪽을 살짝 묻거나 팔아 꾸며낸 거짓말 몇마디로 이수혁은 상급자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미화됩니다.


 








황중사 (소피에게) 수색을 나갔다가 혼자 낙오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대가 아주 발칵 뒤집 혔죠. 근데, 4시간만에 귀대를 해갔구 한다는 소리가 지뢰를 밟아갔구 그거를 해체 하구 왔다는 겁니다. 나참! 좌우간 난 그때 알았습니다. 야, 이 , 보통놈 아니구 나. 아, 독한 놈이구나 이거, 응?
대령 이수혁이, 그놈 남잡니다… 한번은 근무를 서는데 말입니다, 저쪽 애들이 우리 대통 령 욕을 막 하더랍니다. 이수혁이 그걸 듣고는 옆에 있는 돌멩일 집어서 쟤네 초소 유리창을 박살을 냈다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아이들 모아 놓구 한마디 했습니다. All right! 자알 했다 말이지.


나중에 이 진술들은 자기가 밟은 지뢰를 제거해준 북한군, 생명의 은인 오경필과 교신하다가 잘못 던진 돌멩이가 북쪽 초소 유리창을 깬 것으로 (관객에게만) 역전되어 진실이 밝혀집니다. 하지만 남쪽의 장군에게 대령에게 중사에게, 그리고 북쪽의 상좌에게 진실은 가리워진채 위장된 평화 속에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보타장군이 소피에게 “여긴 진실을 감춤으로써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네. 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는 거라구”(Here the peace is preserved by hiding the truth. What they really want is that this investigation proves nothing after all) 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영화를 함께 봤던 일본인 친구 사야코가 나중에 한가지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다며 설명을 부탁해왔습니다. 북한군인(오경필)이 그 Pretty boy(이수혁을 말함)에게는 납치된 것으로 말하라면서 왜 자기는 그렇게 증언하지 않았는지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오경필이 이수혁과 형제 이상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도 사랑하는 조국이 있다. 그 조국이 비록 가난에 겨운 독재국가라도 사랑하는 내 나라가 대외적으로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 대답에 사야코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남북 각각의 장군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냐고. 그들이 진실을 알았건 몰랐건 남북한 각각의 국민/인민들에게 전해지는 뉴스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쪽에는 이수혁의 증언이, 북쪽에는 오경필의 증언이 진실인 것으로 보도되었을 것이다. 이런 저의 설명을 사야코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엔 함께 먹고 있던 피스타치오 여섯알을 동원해야만 했습니다. 함께 먹는 피스타치오는 고소했지만 내 나라의 슬픈 아이러니를 설명하는 입맛은 쓰디 썼습니다.)


 









남북이 이토록 첨예하게 대립하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 평화가 무엇을 위한 것이든) 감추고자 노력하던 진실은 스위스 출신의 중감위 여자 소령이 개입함으로써 드러나게 됩니다. (왼쪽 두 개의 포스터를 비교해 보십시오.)


이제까지 우리가 진실이라고 들어왔고 그렇게 믿고있는 것 중에 정말 진실인 것이 얼마나 될까요? 갈라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남북의 독재자들은 각각의 국민과 인민들에게 얼마나 수없는 거짓을 말해왔으며, 오히려 그렇게 의도적으로 유지되는 긴장상태를 얼마나 즐거워했을까요?

아니, 애당초 결단코 각자가 추구하는 이념의 차이 때문에 남북이 갈라졌을까요? 아니, 6.25 전쟁에서 정말 무엇이 자유주의이고 무엇이 공산주의인지를 알고 싸우다 전사한 사람의 수는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이 영화는 이미 원죄처럼 되어버린 우리의 편견과 그 위험에 대해 끊임없는 화두를 던집니다.


제 2 부: SECURITY


 








이수혁에게 죽은 두구의 북한군 시체에 난 총상을 보고 소피는 수혁의 증언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정진우를 죽게한 것은 정조준되어 정확하게 발사된 첫번째 총알인데, 단순히 탈출만을 위한 총격이라면 왜 죽은 시체에 대고 일곱발이나 더 쏜 것일까? 최만수 상위를 죽게한 두번째 총알은 왜 ‘처형타입’으로 발사된 것일까? 도대체 이수혁의 어떤 복수심이 쓰러진 사람을 내려다 보면서 또 쏘게 만든 것일까?
게다가 수혁이 약실에 총알하나를 더 장전하는 습관이 없다는 사실과 사라진 한알의 총알에 근거하여 소피는 범행장소에 남성식 일병이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 둘을 심문하는데, 그만 겁을 먹어 투신한 남성식의 회상을 통해 관객은 그들만의 비밀한 안전지대(security)로 함께 들어가게 됩니다.








수혁의 소대는 밤중에 수색을 나갔다가 길을 잘못 들어 북쪽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수혁이 볼일보는 사이에 황급히 남쪽으로 되돌아갑니다. 본의 아니게 낙오한 수혁은 돌아서다 지뢰를 밟게 되고,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으러 나온 북한군 정진우와 오경필과 조우합니다. 지뢰를 밟은데다 북한군까지 맞닥뜨리게 된 사면초가의 수혁은 당황하여 지뢰운운하며 진우와 경필을 쫓고, 지뢰라는 말에 도망가려는 그들에게 마구 욕을 해대다 결국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수혁의 말 한마디로 긴장상황은 맥없이 풀어집니다. 그런 수혁을 마주하고 선 경필과 진우. 그들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며 갈대밭을 뒤흔듭니다. 마치 앞으로 있을 그들 간의 해빙을 암시하듯. (영화 마지막의 스틸사진 장면과 함께 개인적으로 상당히 인상깊은 장면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눈이 쌓인 비무장지대에서 다시 한번 마주치게 됩니다. 소대원들을 뒤로 하고 중앙에 선 오경필과 황중사. 경필은 황중사와 남북의 담배를 서로 바꿔 피우다가 수혁을 알아보고 경필과 우진을 알아본 수혁은 그들에 대해 궁금해하게 됩니다. 이후 JSA에서 경필과 거울처럼 마주보고 꼿꼿이 서있던 수혁은 “그림자 넘어왔어, 조심하라”는 경필의 장난에 결심을 굳히고 결국 그에게 편지를 던져 보냅니다. 이렇게 유희처럼 시작된 둘의 우정은 정우진의 장난편지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게 됩니다. (실제로 다리를 건너는 수혁의 모습을 담지 않은채 이를 능란하게 표현해내는 카메라워크에 경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광석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지포라이터를, 누드잡지를 선물하며 비밀스럽게 키득대던 셋의 운명은 남성식이라는 공범을 끌어들이면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성식이 듣던 카세트가 정방향에서 역방향으로 바뀌는 장면으로 암시됩니다.) 얼떨결에 수혁의 뒤를 따르던 성식의 순진한 두 발은 군사분계선 바로 앞에서 화들짝 놀라 멈춰 섭니다. 그것은 ‘넘을 수도 없고’, ‘넘어서도 안되는’ 금단의 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54년 유엔과 북한의 협정에 따라 처음 만들어진 JSA는 1976년의 미류나무 도끼만행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남북의 왕래가 자유롭던 곳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은 그 이후 만들어진 것입니다. 양측 군인들간 충돌 방지를 위해 표시된 선이 어느새 “넘으면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는 선,” “넘으면 이적행위가 되는 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편견의 선”을 마주한 순간 성식의 두 발은 자동적으로 뒤로 당겨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2부 Security의 도입부분, 남측의 서양인 관광단 쪽에서 북축으로 날아간 빨간 야구모자를 경필로부터 넘겨 받은 미군안내장교가 관광단에게 하던 대사가 인상적입니다.



“만일 제가 한국군이었다면 제 팔은 지금 막 북한과의 어떠한 교류도 금지하고 있는 남한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셈입니다. 저는 잠입, 탈출, 명령위반, 무단이탈 등의 죄로 중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 제가 고맙다는 말까지 건넸었지요. 이런 경우, 남한은 북한과의 어떠한 통 신도 금지하고 있지요. 과장을 좀 하자면, 이 단순한 행위로 저는 교수형을 당할 수 있단 얘 기입니다.” (If I were a South Korean soldier, my arm just violated the National Preservation Law which prohibits any contact with North Korea whatsoever. I could be severely punished for infiltration, extrication, disobeying orders, and secession without permission. And ah…. I also said “Thank you”. In this case, South Korean law prohibits any type of communication with North Koreans. To exaggerate, I could be hanged for this mere action.)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사분계선이란 무시무시한 용어에 비해 너무나도 시시한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무작정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젊은이들. 그들이 무료함에 지쳐 서로 농담을 주고 받고 어쩌다가 초코파이를 나누어 먹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람 사는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일로 국보법 위반이네 뭐네 해서 감옥에 가는 현실이야말로 우습도록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수혁과 성식은 단순히 한쪽 팔이, 그림자가 넘어가는 것,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농지거리와 초코파이를 주고 받는 것 이상의 모험을 감행하며 “편견의 선”을 넘나듭니다. 그들이 분단의 반세기, 그 오욕과 고통의 세월을 뛰어넘어 통일의 물꼬를 트러 북으로 건너간 “통일의 꽃돌이”가 되기에는,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에는 그 동기가 너무 단순합니다. “따뜻하구만!” 오경필의 말처럼 서로의 품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입니다. 막막하기만한 군생활에 서로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틈에서는 어떤 정치적 수사도, 이념도, 지도자도 너무 거창하기만 할 뿐입니다. 경필과 수혁, 우진 사이에 낄 자격이 없덨던 김일성 부자의 사진처럼 말입니다.


총알로 공기놀이를 하고 닭싸움을 하며 아이들 같이 즐거워하는 남북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놀이에 함께 빠져 듭니다. “그래 저렇게 쉬운 것을….” 이 생명 다해서, 꿈에도 소원이던 통일이 결코 어려운 일인 것만은 아니라고 잠시 생각하며…. 웃었다 울었다 하며…. 하지만 그럴까요? 아이들 놀이마냥 통일이 그렇게 쉬운 걸까요? 그들의 금지된 장난은 최만수 상위의 등장으로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제 3 부: JOINT


초소 안에 가득 너울대던 방귀냄새와 웃음들은 성식이 문을 여는 순간 공중에 얼어붙습니다. 최만수 상위가 문 밖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성식은 다리에 힘이 빠져 무너지고, 최상위와 수혁은 어느새 총을 빼들고 서로 겨누고 있습니다. 경필은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한 모두를 진정시키려 애쓰지만, 최상위의 명령에 어쩔 수없이 우진은 수혁과 성식을 향해 총을 빼듭니다. 이에 수혁과 성식은 경악하고, 최상위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며, 경필은 체념합니다.


 



































경필 “….수혁아, 총 내려놔라. 이제 어쩔 수 없지 않갔어.”
수혁 “싫어!”
경필 “내가 잘 말해줄 테니까…. 자진 월북한 걸루 하구 우리 공화국에서 살자우, 응? (최 상위를 돌아보며) 그렇디요?”
(조금 멈칫거리며) “먼저 총 내리면 얘기해 보자.”
수혁 (버티며) “저 말 못 믿는 거 형이 더 잘 알잖아? 형두 그랬잖아, 공 세울려구 혈안된 라구. 우리 둘 다 죽여놓구, 잠입한 놈들 사살했다구 구라칠 게 뻔해.”
경필 “내가 책임지구 너희 살려주갔어, 기래두 이 형 못 믿니? (시선을 돌려) 성식아, 넌 믿지? 니가 좀 말해보라우.”
성식 (덜덜 떨면서 수혁에게 귀엣말로) “….저거…. 다 짜구 하는 거 아닐까요?”
우진 (총 쥔 손을 덜덜 떨면서 애원하듯) “수혁이 형, 기때, 우리 중사동지가 지뢰 끊어준 거 기억하죠? 길치 않아요? 총 내리라요, 예?”
수혁 “형이구 뭐구 다 필요 없어. 결국 우린 적이야. 나보구 겁쟁이라 그랬지? 봐봐, 내가 저 죽이는지 못 죽이는지 한번 봐봐.”
경필 “야, 이수혁이 이딴 식으로 나가다가는 전부 다 죽는기야. 야,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최 상위와 수혁을 번갈아 보며) 동시에 내리는 기야요, 우진이 너두! 내리시라요. 내리라.”
성식 (귀엣말로) “….아무래두 이상해요.”


수혁과 최상위의 가운데 서서 경필은 양팔을 벌려 둘의 총구를 아래로 누르고 결국 두정의 권총이 홀스터로 되들어갑니다. 수혁과 최상위의 안도의 한숨 속에. 긴장이 풀리면서 우진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데, 순간 카세트가 정방향에서 역방향으로 바뀌면서 그들 모두의 운명은 다시 역류를 타게 됩니다. 그때까지 잔잔하게 흐르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끝나고 갑자기 시끄러운 노래로 바뀌는 순간 그들은 모두 흐트러지며, 연이어 (최상위가 갖고있던) 무전기 잡음이 들리자 이에 당황한 최상위는 저도 모르게 무전기로 손이 갑니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초소의 창에 구멍이 뚫리고 성식의 총구에서는 연기가 오릅니다. 최상위가 쓰러지자 우진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권총 손잡이를 잡지만, 순간 성식과 수혁이 발사한 총에 의해 이마가 뻥 뚫리면서 피가 튀고, 거의 동시에 손의 일부가 떨어져 나갑니다. 수혁은 우진에게서 총구를 돌려 경필에게 총을 겨눕니다. 한번. 두번. 그때마다 움찔 움찔하는 경필. 고장난 총은 격발되지 않고 경필의 얼굴은 충격으로 가득합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성식은 이미 숨진 우진에게 총을 쏘아대다가 이제 경필에게 총을 겨눕니다. 멍청히 선 성식에게서 경필은 총을 빼앗아 살려달라는 최상위를 가차없이 사살합니다. 복수하듯이.


경필은 손수건으로 (성식의) 총을 깨끗하게 닦은 다음 수혁에게 건네주고, 우진의 다리께에 떨어진 피묻은 수혁의 (고장난) 총을 주워 수동으로 슬라이드를 원위치시킨 다음 역시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성식에게 건넵니다. 수혁은 납치됐다가 탈출한거라고. 성식은 여기 없었던 거라고 말하며. 총성을 듣고 출동한 한국군의 총소리에 겁을 먹은 성식은 쓰러지면서 우진이 발사한 총에 다리를 맞아 잘 걷지 못하는 수혁을 버려두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고, 군사분계선 위에 쓰러진 수혁 위로 탄환들이 난무합니다.



“상호몰이해”와 “상호불신”. 최만수 상위는 남쪽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남성식은 결국 북쪽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자에게 오경필들은 반동들에 불과했고, 믿지 못하는 자에게 위기상황은 “다 짜고하는 쇼”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남성식 일병을 보면서, 처음 유학왔을 때 한국상점에서 마주친 12살 정도의 한 흑인소년이 생각나더군요. 후드가 달린 스웨트셔츠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두리번거리던 그 아이를 구석에서 물건을 고르다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툭 불거져나와 보이는 오른쪽 주머니가 꼭 총 같아 보였고, 그것은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서 매우 낯이 익은 모양이었습니다. 너무 놀라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저를 의아해하던 아이는 순간 상황을 알아차린 듯 가뜩이나 큰 눈이 더 둥그레지며 주먹 쥔 오른손을 빼더군요.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Yeah, I get that a lot”하는 것 같았습니다. 미안했습니다. 그 아이가 흑인이 아니었더래도 제가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거창하게 인종주의를 비판하던 저도 지독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순이지요.







마찬가지로 남성식은 북에 대해 모순된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음악교과서에 실린 “우리의 소원”을 부르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을 기억하며, 통일을 부러워 하지만, 그 열망은 지극히 감상주의적입니다. 더 이상 넘어가지 말자는 수혁을 마지막이라며 북으로 데려간 사람은 바로 남성식입니다. 동생처럼 아끼며 구두를 닦아주고 생일까지 챙겨주던 정우진인데, 그는 마지막 순간 모든 신뢰를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소원을 부르는 한편으로 주입된 반공교육 덕분으로, 북에 대한 공포와 의구심은 그의 동경보다 더 뿌리가 깊고 강했기 때문입니다. 왜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지,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나약한 감상주의자가 극도의 긴장상황을 맞았을 때 바로 남성식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극도의 공포상황에서 남성식은 무전기를 뽑으려는 최상위를 오해하여 무의식적으로 총을 뽑아 발사합니다.


편견의 선을 넘어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이던 이수혁도 결국엔 “형이구 뭐구 다 필요 없어. 결국 우린 적이야!”라며 다시 편견의 선 안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형의 머리에 대고 총을 쏩니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표장군은 전쟁은 그렇게 쉽게 터지는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JSA와 같은 곳에 여러명의 남성식과 이수혁이 있을 때, “어!”하는 순간 일이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남성식과 이수혁은 바로 대부분의 전후세대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호주의”. “먼저 총 내리면 얘기해 보자”던 최만수 상위.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입니다. “햇볕정책”을 “퍼주기”로 매도하며 레드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전쟁세대와 전후세대 개개인의 북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더욱 부추기는 최만수들이 남쪽에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최만수 상위는 북에도 수없이 많겠지요. 최만수로 상징되는 이들은 크게 보면 두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첫번째가 제 하우스메이트 안드레아 같은 사람들. 안드레아는 소련 공산당을 이를 갈며 증오하는 루마니아인입니다. 그 친구는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이런 영화 만든 너희 나라 사람들 정말 나이브(naive)하다”며 흥분하더군요. 공산당이 어떤지 몰라서 그렇다고. 겪어봐야 안다고. 그런 놈들 잘 해줘 봤자 이용만 실컷 당하다 말거라고. 이북에서 종교박해를 받고 남하한 우리 조·부모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입니다. 두번째는 상호주의를 역설하며 분단상태를 고착화함으로써 그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세력들. 이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조성된 여론은 통일을 위한 키워드인 “상호신뢰회복”이나 “상호이해”보다는 “상호주의”를 복음으로 전파하고, 그 영향으로 편견에 싸인 남성식과 이수혁들은 주고 나서도 “다 필요없어!”라고 쉽게 포기하고마는 조급증에 걸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악순환(Vicious circle)입니다. 오경필이 최만수를 처형한 것처럼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질 수 있을까요?


“상호이해,” “상호신뢰,” “반상호주의”. 영화에서 오경필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피가 튀는 장면들이 끔찍하고 무서워서 거의 눈을 감고 있다보니 수혁이 경필에게 두번이나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비디오로 다시 보면서 그 장면을 처음 본 순간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수혁이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고장난 총이 철컥 철컥 빈 소리를 낼 때마다 움찔거리던 오경필의 두눈과 경련이 일던 그의 뺨. 충격이었을 겁니다. 배신감이 들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수혁을 보호합니다. 죽여도 시원치 않았을 수혁을 보호하기 위해 대질심문에서도 그를 공격하며 “인민공화국 만세!” “김정일 만세!”를 목이 쉬도록 외친 것입니다 .









소피 “남성식하고 이수혁을 용서할 수 있겠어요?”
경필 “우리가 남초소에서 기런 일 당했대면, 내가 먼저 쐈을 겁니다.”

“그래, 나라도 그랬을 거야.” 성식과 수혁에 대한 증오 대신 경필은 이해를 택합니다. “혹시 지금 이 총을 건네주면 나를 쏘지 않을까?” 이렇게 의심하는 대신 성식과 수혁을 믿고 총을 잘 닦아 그들에게 건넵니다. 이미 신뢰는 깨지고도 남았을 그런 판에 말입니다. “네가 준 만큼 갚는다”는 상호주의는 “네가 지금 내게 준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라고 이해하고 신뢰하는 경필에게 힘을 쓰지 못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신뢰함으로, 양보하고 참아주자고 이 영화는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역할이 북한군에게 간 것 때문에 불편한 분들이 혹시 계신가요? 하지만 우리 그동안 좋은 역할 많이 먹지 않았습니까? 남성식, 이수혁, 최만수 (또는 표장군), 오경필, 그리고 정진우는 남과 북 양쪽에 공존하는 인간 군상의 전형일 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극중 수사관으로 여성이 등장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입니다. 남성적 특성이 강한 ‘전쟁, 증오, 불신’의 코드가 지배적이던 지난 1953년 휴전 이후의 한반도에 이제는 여성적 코드인 ‘이해, 신뢰, 수용’이 들어설 차례라는 암시인 것입니다.


 





페르손 “중감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소령님은 53년이래 판문점에 부임한 최초의 여군 이십니다.” (Welcome to the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 You’re the first female posted here since ’53.)


그런데 더욱 의미있는 것은 그녀가 스위스 출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 인민군 장교였습니다.


 





보타 “한국전 당시 거제도에는 인민군 포로 수용소가 있었지. 거기엔 공산주의자와 강제 로 군대에 끌려온 반공주의자, 두 종류의 포로가 있었는데, 이렇게 서로 갈려서 수 도 없는 살육이 계속됐다네. ‘내전 속의 내전’이었지. 종전이 되자 포로들에게 선택 의 자유가 주어졌지. 자본주의 남으로의 귀순이냐, 사회주의 북으로의 귀환이냐…. 그러나 그 17만 명중 76명은 둘 다를 거부했는데, 이른바 ‘제3국행 포로’들이라네. 결국 세계 각지로 흩어진 그들 중 일부는 아직까지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네. 바 로 소령의 아버지 장연우 같은 사람이지. 자네 아버지는 그래도 운이 좋아 아르헨티 나로가서 스위스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던거고…” (During the Korean War, there was a concentration camp for North Korean POWs in Goje Island. The North Korean POW’s were divided into two groups, communists, and anti-communists who were brought to war against their wishes. So many killings were committed on each side. It was a kind of ‘a civil war within a civil war’. After the war, the prisoners were ready for freedom to choose which side to go to: South Korea’s capitalist society, or back to communism in North Korea. But 76 prisoners out of 170,000 refused both. They were scattered all over the world, and some of their whereabouts are still unknown, like your father, Yon-Woo Jean. He was fortunate enough to go to Argentina to marry a Swiss lady.)


휴전이 성립되자 수용소의 포로들에게는 북한이냐 남한이야 아니면 제3국이냐라는 세갈래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피의 아버지를 포함한 일부는 중립국으로의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북으로 간 사람들의 자식 오경필과, 그렇게 남으로 간 사람들의 자식 이수혁과, 그렇게 중립국으로 간 사람들의 자식 소피가 다시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고 분단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제 다시 시작이다” 라고 말하며 다시 선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판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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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경유해 여기로부터 제네바까지 2015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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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를 경유해 여기로부터 제네바까지 1976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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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을 경유해 여기로부터 제네바까지 1284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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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를 경유해 여기로부터 제네바까지 11100km


위는 소피가 군사분계선에서 빗속을 서성댈 때 보이던 표지판들입니다. 모두 소피의 고향인 스위스 제네바를 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남과 북 모두를 부정하고 “중도의 길”을 선택할 것을 남북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의 이유도 방법도 모르는 남성식 같은 감상주의자들에게 그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념을 구실로 한 강대국들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조국을 아파하며, 명실상부한 자주국가로 우뚝 설 조국을 꿈꾸며…. 통일 후 미국과 같은 체제를 택하건, 스웨덴/스위스 같은 체제를 택하건 (이 영화는 이것을 선호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로 당당히 서는 것”. 바로 이를 위해 우리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어 했던 오경필의 ‘초코파이’ 대사가 있습니다.


 




















경필 (초코파이를 들고서 기쁘게) “거저 공화국에선 왜 이런 거 못 만드나 몰라? 웅?”
(경필, 봉지를 까서 초코파이를 한입에 넣는다.)
수혁 (경필에게) “형! 저, 아니 뭐 딴거는 아니고…. 안 내려올래?”
(경필, 씹던 동작을 멈추고, 우진과 성식 놀라 수혁을 바라본다.)
수혁 “초코파이, 배 찢어지게 먹을 수 있잖아. 어휴, 아니면 말구.”
(경필, 정색을 하고 씹던 초코파이를 그대로 손바닥에 뱉어낸다.)
경필 “거 이수혁이, 내 딱 한 번만 얘기할테니까 잘 들어드라우. 내 꿈은 말이야, 언젠가 우리 공화국이 남조선보다 훨씬 더 맛있는 과자를 만드는기야. 알갔어? 그때까진 어 쩔 수 없이 이 초코파이를 그리워할 수 밖에 없어.”


아무리 못난 부모라도 저버릴 수 없는 자식의 심정. 내 한 몸 잘 먹고 잘 입겠다고 조국을 버리기 보다는 그 조국이 언젠가는 잘 살게 될 거라는 꿈을 품고 살아가겠다는 경필의 말은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 북한은 자기가 태어나 자란 조국,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사랑하는 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조국을 생각 만해도 가슴이 벅차듯이. 우리가 초콜렛 줄테니 조국을 저버리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나기 때문에, 초코파이 줄테니 조국을 저버리란 말을 그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북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려하지 말고 서로의 체제와 사상을 인정하고, 화해와 교류를 하자는 6.15 남북 공동선언문의 취지와 상통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흥행에 있어 때마침 나온 6.15 남북 공동선언문의 탄력을 상당히 받은 듯합니다. 한마디로 타이밍이 절묘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보다 가난하게 사는 연변동포들이나 중국인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심지어 그들을 착취하는 어글리코리안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마다, 과연 우리는 북을 인정하고 화해, 교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의심이 들곤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바라는 통일이란 북을 흡수통일해서 우리 맘대로 쥐고 흔드는 그런 “헐리우드 블락버스터류”의 통일은 아닌가요. 얼마전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6.15 선언의 2항을 문제 삼으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북한까지 그 체제로 가야 한다고, 초코파이 줄테니 항복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만약 북한이 자기 식대로 가자고 우기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남과 북을 갈라놓으려는 사고. 거창하게 통일을 운운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런 “냉전적 사고”와 “편견의 선”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6.15 남북 공동선언문은 “우리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직 실제적인 통일 논의가 시작된 것이 하나도 없는 백지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던 경필은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할 것 같다’며 수혁에게 지포라이터를 돌려 줍니다. 과연 이런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까?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고 합의하는데만 50년이 걸렸는데, 다시 이를 뒤로 미루어야만 합니까? 통일의 첫삽을 아직 떠보지도 못했는데, 남침에 대한 사과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통일 논의는 가능하다며 언제까지 버틸 작정인지요.


 





소피 “하지만 일 초 먼저 쏘구, 늦게 쏘구, 그런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중요하지 않다면서 굳이 소피는 수혁에게 비밀을 알려주고, 사랑하던 동생이 죽은 책임을 어디에도 물을 수 없었던 수혁은 결국 방아쇠를 당긴 스스로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포스터는 “여덟발의 총성! 진실은 그곳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극의 날 울려퍼진 열한발의 총성 중에서 여덟발의 총성. 그림을 좋아하고 강아지를 좋아하던, 어머니와 여동생 하나뿐인 집안의 가장인 어린 소년병 정진우를 죽게 한 이수혁의 첫발. 그리고 그 주검위에 난무하던 남성식의 나머지 일곱발. 그렇게 정들어했던 동생을 두번 죽게한 그 여덟발의 총성에 바로 우리 조국의 비극이라는 진실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남성식과 이수혁으로 하여금 정우진에 대고 총을 쏘게 만든 ‘편견’이라는 진실을, 그 편견이 낳는 비극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하는 진실을, 이 영화는 보여주려한 것입니다. 이런 한반도의 비극이 언제까지 대물림되어야 할까요.


오경필. 정진우. 남성식. 이수혁. 남북의 인간군상들을 대표하는 이 네 사람을 함께 담고 있는 영화 맨 마지막의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며 바로 분단된 우리 조국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하지만 남북을 갈라놓는 군사분계선, 그 비극의 자리에 서서 우리의 소원, 우리의 희망가를 다시 한번 불러보고 싶은 것은 오경필에게도 정진우에게도 남성식에게도 이수혁에게도 최만수에게도…. 모두에게 한결같은 바램일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待接)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律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미국의 911 참사 이후 아랍국가들에 대한 한국교계의 반응들에 의아해하며, 월드컵 경기장 응원석에 따로 앉아 열심히 한국을 응원하는 “하얀 천사들”을 바라보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연 북한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지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복음”과 “학문” 이외에 “조국과 민족”을 비전으로 하는 코스타를 한달여 앞두고 있는 지금,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우리 기독학생들은 우리 조국과 민족에 대해 얼마나 무거운 부담을 마음에 두고 있는 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 나온 모 대통령 후보의 관훈토론회를 보면서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내용은 100% 제 개인적 시각임을 알려 드립니다.


사족: 이 영화는 실력있는 배우들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합니다. 주연인 오경필 중사역의 송강호, 정진우 전사역의 신하균, 남성식 일병역의 김태우 뿐만 아니라, 지난 20여년간 한국 연극무대를 지켜온 표장군역의 기주봉이나 (이름은 모르겠지만) 황중사역을 맡은 조연배우들의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고 착각할 만큼 정말 감칠 맛이 났습니다. <JSA>를 통해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수혁 병장역의 이병헌의 연기도 뛰어 났으나, 소피장(Sophie E. Jean)역의 이영애와 더불어 (우리나라 젊은 배우들의 공통된 문제점인) 발성미숙으로 인한 대사전달의 문제가 남아 있었던 것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