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수] 사역이냐 고역이냐

법과 복음


사역이냐 고역이냐


1980년대만 해도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이 목회할 곳을 찾는 일이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은 오히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를 찾는 일이 더 어렵다. 비공식통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 소위 목회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무임목회자는 약 2만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매년마다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이 1년에 약 3000명에 이른다고 하니 앞으로 목회지를 구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교 졸업자들이 이처럼 많은 것을 두고 부정적으로 말하며 웃지 못할 대안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떤 분은 신학교를 10년간 일시적으로 문을 닫아버리면 목회자의 수급 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군소 신학교나 무인가 신학교를 정리하라, 농촌 목회지로 가라, 신학교에 간 저의가 의심스럽다, 통일이 되면 해결된다 조금만 기다려라,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는 등 참으로 뼈있는 대안들도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분들도 많다. 사고의 틀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들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 사역할 곳이 왜 꼭 교회이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신학교 졸업한 후 병들어 가는 이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한 10여년 일을 한 후 다시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훈련을 하고 전담 사역자로 목회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강변한다. 나이드신 목회자들은 이제 물러나신 후 다시 세상에 들어가서 일하시고 젊은 분들에게 사역을 맡기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다. 평신도들로부터 이런 의견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우리나라 성도들의 의식도 많이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회지도자들로 이런 평신도들의 의식의 변화에 맞추어 변해야 겠다.


신학교 졸업생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결국 목사들이 넘쳐서 무임 목회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학교 졸업생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동기야 어찌되었든 간에 믿음을 전파할 수 있는 잠재력 역량이 그만 큼 많아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결코 손해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부모들의 강요에 의해 들어갔던지 일반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없어서 들어갔던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쌓이는 것은 신앙과 신학지식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손해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사역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있다고 본다.


보통 그렇게 이해 하듯이, 사역이라는 개념을 교회안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교회 행정을 보고, 심방하는 그런 것에만 국한하고 세속 사회에서 땀을려 일하고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일해 돈버는 일은 사역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3000명 신학생 배출시대에, 그들 중에는 세상에서도 일하지 못하고 교회안에서도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이와같은 사역에 대한 개념을 바꾸라는 것이다. 사역은 교회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사회에서도 훌륭하게 사역을 할 수 있다. 세속사회에서 전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땀흘려 일하는 것이 사역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역이라는 것을 교회안에서의 일로 국한시켜 버리고, 세속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며 이 또한 훌륭한 사역이라는 생각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역에 대한 반쪽의 진리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일하는 것이 사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라는 말이다. 사역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다. 현대교회도 사역에 대한 개념이 교회안에서 일하는 것 또는 좀 더 넓게는 세상에서 전도하는 것 쯤으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사역이 세상에서 일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조금 남아있는 곳은 그래도 군대 뿐이다. 군대에서는 노동할 사람을 선발할 때 “사역병” 선발이라고 한다.


폴 스티븐스 교수의 사역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 사역이란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하였다고 모두 교회안에서 일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교회 밖에서 일하는 것도 사역이 될 수 있다. 교회안에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참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역(使役)이 아니라 사역(死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속가운데 땀흘려 일하는 그리스도인도 참으로 하나님과 동역한다는 믿음으로 한다면 그것은 사역(死役)이 아니라 사역(使役)이다. 성경에 나오는 텐트 메이커인 바울 사도는 칭찬하면서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사역자로 여겨주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다. 무임 목회자들이여! 신학교 나온 사람이 세상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소명감이 좀 부족한 사람으로 여길 것 같아 세상에서 일은 못하겠고, 그렇다고 사역할 목회지도 없어서 고민하는가. 그것은 고역자(苦役者)들의 몫이라고 여겨라. 만약 자신을 사역자로 여기거든 세상의 모든 영역으로 흩어져라. 신학교 졸업생의 자격으로 그렇게 하라. 신학교 졸업하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말아라. 그곳에서 신학교 졸업생의 자격으로 사역하라. 교회가 재정적 보조를 하여 줄 수 없다면 그렇게 흩어져 일하면서 자립하라. 이제 현대교회는 세상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사역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존경해 주어야한다.


[강동인] 미리보는 KOSTA/USA-2002 : 하나님의 그림

이코스타 2002년 6/7월호

코스타 2002에 거는 기대가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회복과 치유를 보는 것이다. 약 1년전 올해의 주제를 정하기 위해 모인 간사회의에서 하나님께서는 간사들에게 유학생들이 직면하고있는 영적 어려움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주셨다. 그 모임에서 우리는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를 주제로 선택했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영적 각성이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의 자아가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원한다.


코스타 2002에 거는 기대


집회를 통해 가장 먼저 구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회복’이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죄로부터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매년 코스타 집회에서 우리는 백여명의 잃었던 영혼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영혼의 축제를 경험해왔다. 구원을 위해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이름 예수, 그 이름을 믿지 않는 영혼들을 코스타에 보내는 이들이 있다. 코스타 집회 중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 개개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조장들과 강사님들이 있다. 이들의 아름다운 동역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휘자가 되셔서 이끌어내시는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선율로써 코스타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전통의 하나이다. 주변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친구가 있는가? 적극적으로 권하여 함께 오기 바란다. 코스타에는 그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며 기다리는 주의 일꾼들이 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치유와 회복을 기대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부여한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는 이미 죄로 말미암아 구겨져있고 상처와 쓴뿌리로 인해 병들어 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집회 가운데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치료의 광선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우리 안에 있는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서 우리 삶의 전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처와 미움과 쓴뿌리와 더불어 현재 유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오는 독특한 문제들 — 타문화권에서의 미성숙한 적응, 지나친 목표 지향적 삶, 급변하는 조국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으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과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소위 잘 믿는다는 이들 조차도 타문화에서의 열등의식, 비전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성공주의라는 세상적인 가치관에 끌려 가고 있는가? 더욱이 그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고 치유하는 효과적인 사역의 부재로 말미암아 그들의 자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룩하게 회복되는 과정에 있기보다, 오히려 영적으로 소진되고 상처의 골은 더욱 깊어지는 과정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치료하실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영혼을 쪼개고 회개케 하시며 그 가운데 치료하시는 역사가 코스타 집회 중에 있기를 기대한다.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 안에 충만히 채워진 은혜가 밖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유학생들의 삶의 대부분이 드려지는 학문과 캠퍼스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안에서는 좋은 크리스찬, 그러나 사회에서는 열등생이라는 균형잡히지 않은 신앙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삶의 전영역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위해 힘쓰는 것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기 원한다.


크지만 작은 집회


외견상의 코스타는 대형집회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개개인의 참가자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작은 집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첫째, ‘조’별 활동은 코스타가 크지만 작은 집회가 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프로그램 중의 하나이다. 여러 지역에서 온 참가자들로 구성되는 개개의 조는 코스타 기간동안 서로 중보하고 격려하며 서로의 삶을 나누는 귀한 신앙 공동체이다. 조별활동을 통해 신앙의 눈이 자신의 지역사회를 넘어 미국 전역을 보게되는 시야의 확장도 경험하게 된다. 이때에 이루어진 교제가 코스타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된다. 둘째, 참가자들은 다양한 세미나를 통해 자신들의 상황에 맞는 영적 훈련과 진단의 기회를 제공받는다. 강사님들과의 격이 없는 교제도 아름답게 내려오는 코스타의 전통이다. 셋째, 참가자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상담하고 함께 기도하는 ‘개인 상담’의 기회가 있다. 특별히 유학생 가정의 어려움, 학업과 진로 상담, 건강한 교회생활, 배우자 등의 문제들을 들어주시고 함께 기도하며 상담해주실 전문 상담요원과 강사님들이 참가자들을 섬길 것이다. 올해는 특별히 조별로 배정된 멘토(mentor)를 통한 상담의 기회가 주어진다. 멘토들은 주로 신앙과 학문의 선배들로 구성될 것이다. 멘토들은 참가자들과 비슷한 과정을 겪어온 사람들로써 참가자들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함께 기도하며 조언하는 형님, 누나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조별활동, 세미나, 상담, 그리고 멘토링을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개별적 음성을 듣게되기를 기대한다.


코스타 2002 그 이후…


이 모든 것은 한번의 코스타 집회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년간의 코스타 집회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이다. 매년 코스타를 마치고 참가자들이 돌아갈 때, 가장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돌아간 그 땅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번 코스타 2002에 참가하는 거의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영적 휴식/재공급’을 참석의 동기로 선택했다. 현재의 상황을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전 지역에서 ‘삶’에 지친 그리스도인들이 코스타에 긴급 수혈을 받으러 오는 것이다. 긴급 수혈을 받은 후 돌아가면, 약효가 있는 동안 (약 1달?) 반짝 열심을 내다가, 무시무시한 가을학기의 시작과 더불어 장렬히 전사해 가는 것은 아닌지….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본다면 가을학기 중간고사가 가장 치열하면서도 처참한 전투장이 되는 것 같다. (성경공부 인원의 절반이 중간 고사 전후로 어디론가 사라진다.) 개인적으로는 코스타가 긴급수혈의 장이 되기보다는 ‘축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전국적으로 흩어져 열심히 주를 위한 선한 싸움을 싸우던 지체들이 모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누고 함께 기뻐하는 축제의 장이 코스타가 되었으면 좋겠다. 상처받은 군사들을 위로하고 승전한 군사들은 함께 그 기쁨을 나누며, 계속되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꿈꾸며 서로 중보하는 그런 장이 코스타가 되었으면 한다.


이것은 지나친 꿈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코스타 집회 기간중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아의 치유는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참가자들의 코스타 참석 이후의 삶에서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참가자들이 섬기고 있는 지역교회에서 그들을 계속 격려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세워주어야 한다. 유학생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말씀으로 세워주는 여러 모범적인 교회가 있음에 감사한다. 이제는 힘을 합하여 미국 전역을 향한 사역을 해야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받은 은혜를 나누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코스타는 지역에 있는 유학생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사역(gpKOSTA)을 지역교회의 도움을 받아 진행해왔다 (http://gp.kosta.ws). 지금까지 보스톤, 샌프란시스코, LA, 뉴욕/뉴저지, 그리고 중서부 지역에서 gpKOSTA가 열렸으며, 향후의 지역선정을 위해 기도로 준비중이다. 코스타는 신세대의 공간인 싸이버 공간을 통한 사역들도 개발해 왔다. 코스타 집회 이후의 계속적인 영적 공급을 위한 eKOSTA (http://www.ekosta.org), 같은 학문 또는 관심자들이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함께 고민하는 나눔의 장 tmKOSTA(http://tm.kosta.ws), 타문화권 선교에 헌신한 지체들의 후속 양육의 장 winKOSTA (http://win.kosta.ws) 가 있다. 올해는 특별히 코스타에 조장으로 섬기는 지체들의 네트워크와 지원을 위한 jjKOSTA (http://jj.kosta.ws)가 새로운 사역으로 시작된다. 물리적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나눌 수 없었던 교제와 누릴 수 없었던 자원을 싸이버 공간에서 연중 내내 공유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림


코스타 집회를 준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보내어 주신다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사역의 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켜나가는 귀한 동역자들을 만나게 해주신다. 각자의 눈에는 자신의 사역의 조각만 보인다. 하지만 코스타를 준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그 조각들을 조금씩 맞추어 가시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코스타 집회 중에 하나님께서 맞추신 전체 그림을 발견하고 전율케 된다. 그렇게 만난 동역자들은 비록 거리가 떨어져있더라도 얼마나 귀한 동역자가 되는지, 하나님께 감사드릴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실까? 우리들의 부서지고 훼손된 자아가 하나님의 손에서 온전해지는 것을 꿈꾸어본다. 그리고 회복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미국, 한국, 그리고 전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는 그림을 상상해본다.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그림의 한 조각이 되고싶지 않은가?

[반영운] 환경에 대한 크리스챤의 자세 (2)

이코스타 2002년 6/7월호

환경에 대한 크리스챤의 자세 (2)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성경적인 입장


지난 호에서는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환경과 환경문제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성경적인 자세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폐기물 처리문제, 오염된 물 정화, 오염된 땅의 정화, 대기질의 향상 등의 구체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책을 제기하는 대신에 필자의 능력의 한계와 지면의 한정됨을 고려하여 성경에 바탕을 둔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자세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1. 환경문제의 재조명


세계교회협의회(WCC)는 1989년에 발간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이라는 보고서에서 세계의 종말적인 위기 상황을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1. 매일 생물종이 하나씩 멸종하고 있다

  2. 매년 남한 면적의 3/4 크기의 열대림이 파괴되어 없어진다.

  3. 지난 몇 십년 동안 매 십년 마다 해수면이 높아져 왔다. 이는 지구가 뜨거워지는 추세에 따른 것으로 우리 지구와 전 인류의 비참한 결과를 암시하는 것이며 이 추세는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다.

그 때로부터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화석연료의 과다 사용으로 인해 현재의 소비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면 지구의 대기 온도가 오는 21세기 중반에 화씨 4도에서 15도 정도나 상승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남미의 아마죤 (Amazon)은 축구장 만한 크기의 열대림이 하루에 벌목 되어 사라지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지만 그들의 경제문제는 여전히 힘든 상태이다. 열대림 및 전지구적인 삼림벌채로 인해서 토양유실, 온실효과, 물 부족 및 홍수 등의 문제가 우려되고 있다. 화학혁명으로 인해 기하급수적으로 생겨나는 화학물질로 인해 자연계 및 인간의 건강 등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지난 97년 이후 한국을 포함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IMF 위기를 맞았고 아직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사슬처럼 묶여 있는 경제 공동체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환경문제는 경제문제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만큼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당분간은 개발도상국들에 국한된 문제가 되겠지만 얼마 후에는 전 지구적인 위기가 될 것이다.


2.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성경적인 입장


지난 호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이러한 환경문제의 원인은 흔히들 지적하듯이 인구의 증가나 통제되지 않은 기술개발 등에만 있지는 않다. 성경적으로 보면 오히려 피조물인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이기적인 동기로 모든 관계를 어그러뜨리고 악화시킨 교만과 욕심이 모든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환경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이 된 후 하나님을 중심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가 깨어지면서 생겨난 엄청난 무질서의 결과이다. 인간과 자연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생겨난 관계의 파괴가 빚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닥쳐 올지도 모를 환경의 위기를 사전에 예방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성경적인 자세는 무엇일까? 본 고에서는 그러한 성경적인 입장을 창조신앙, 속죄 (십자가)신앙, 부활 및 재림 신앙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창조신앙의 입장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같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같은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는 관리자의 책임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물의 이치를 잘 알아서 이름을 짓고 이름을 지은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짓고는 평생토록 자식의 삶을 책임지며 돌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러한 고귀한 권한과 의무를 인간에게 주셨다.


창조신앙은 또한 우리에게 주인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진정한 의미의 순종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면서 또한 생명의 주인이시다. 친근함에 있어서 아버지라고 한다면 권위와 질서의 면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인간은 주인의 뜻을 잘 알아야 하고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창세기 1, 2장, 이사야 11장, 35장 등에서 나타나는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어 잘 사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화의 중심에 바로 인간이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힘과 성령의 인도에서 나오는 지혜를 동원하여 피조물들의 특성에 맞게 잘 섬기고 스스로의 행동이 다른 피조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주인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피조물을 근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로마서 8장 21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하고 있다고 한 것은 아닐까?


창조신앙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인간만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모든 시도들을 포기하게 된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지상주의에 빠져서 무한 성장을 통한 ‘문명의 발전’을 추구해 오던 노력들을 재점검하고 방향을 선회하게 될 것이다. 창조신앙의 확고한 정립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우월주의와 욕망절대주의를 벗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는 물론 인간 자신의 생존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 받게 될 것이다.


2) 속죄신앙 (십자가) 신앙의 입장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반은 바로 십자가를 통한 속죄의 신앙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로 인하여 죄 씻음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죄 씻음이라 하면 구약적인 의미에서 보여지는 율법적인 의미의 개별 행위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인 죄인 ‘교만,’ 즉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 했던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단절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와 자격의 회복이자 책임과 의무의 부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고 그 아버지를 더욱 깊이 알아갈수록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속죄의 신앙 (십자가의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속죄를 위해 필요하지 않았으며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사랑으로 이루어 내신 은혜의 산물이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어그러진 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멸시와 냉대를 무릅쓰고 결국 십자가의 희생이 되셨기에 우리의 구원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 신앙이 자칫 소극적이고 패배적인 모습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에 담겨 있는 깊은 힘을 모르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 보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십자가의 신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과 은혜의 시각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오직 성령의 힘을 의지하면서 예수께서 가셨던 고난의 길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면에서 세상의 어떤 철학적인 시도보다 심오한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십자가의 신앙을 통해 참 회복과 희생의 자세를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회복해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인 사람들과 자연 만물들과 회복과 조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이성을 동원하여 이웃과 자연 만물들과 하나됨을 이루어 낼 수 있게 된다. 오직 십자가의 신앙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여 마치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듯이 전체의 질서와 화합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포기하고 조화를 선택하게 한다.


작금의 한국 교회에 불고있는 이기적인 기복신앙은 기독교의 십자가 신앙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다. 인간의 필요만 채우려고 기술을 개발하고 그 결과는 책임지지도 않는 경제 중심적인 제 행위들을 기복 신앙의 하나로 보면 무리일까? 우리가 입으로는 환경, 환경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정작 어떤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국가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모두 다 돈 되는 일이면 혈안이 되어 사람도 해치고 땅도 해치고 있으니 기독교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적인 의식과 계명들은 거창하지만 정작 십자가의 신앙이 드러나야 할 곳에서는 모두 숨어 버리고 진지한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들에게 자리를 겸손히 (?) 양보하고 있다. 그러한 세속적인 일들에는 드릴 시간적인 여유도 없으며 거룩한 (?) 일들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들을 들면서…


하나님이 지으시고 좋았더라고 하셨고 우리에게 잘 관리하라고 맡기신 세상. 십자가의 신앙을 통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함께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게 된다. 아니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현재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의 세대들이 겪어야 할 아픔까지도 보게 될 것이다. 어느 곳은 부가 편중되어 가난에 찌들고, 어느 곳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외국 기업의 위험한 쓰레기를 들여와야 하고, 어느 곳은 배고픔으로 인해 자식마저 먹어야 하고, 어느 곳은 숨쉴 수 없을 만큼 공기가 나빠져서 사람들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고, 어느 곳은 먹을 물이 없어 헤매며, 결국 전쟁으로 연결될 이 땅의 처절한 아픔들을…


십자가의 신앙으로 우리는 이 손해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라고 하는 예수님의 자신의 삶과 구원의 도리를 가리켜 말씀하신 이 절대 진리의 말씀을 오늘의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발걸음으로 그냥 걸어가면 우리는 머지 않은 장래에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것이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천 년 전에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과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 예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자원하여서 지고 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각자의 학문 영역에서, 각자의 직업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현장에서, 국가의 정책이 입안 되는 과정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세계 경제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에 적절한 대응을 해 가면서…


3) 부활과 재림 신앙의 입장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죽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였다면 부활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고난과 희생과 화합의 삶을 살아갈 근본적인 힘과 소망을 줌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부활은 또 다른 의미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연결되어있다. 구원으로 인한 위로가 우리에게 있지만 결국 부활과 재림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자칫 왜소해 지기도 하고, 오만해지기도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세상과 대립적인 입장에 섰던 것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세상과 반대적인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의 주권과 아버지 됨을 거부하는 모든 인본적인 시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겉으로는 평화와 화목을 도모하는 것처럼 보여도 참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과 겸손이 없다. 따라서 세상적인 시각을 가진 대부분의 시도들은 인간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려 할 뿐 진정한 조화를 이루어 내지 못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마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 버리게 할 뿐이다.


부활과 재림을 생각하지 않게 되면 이 세상만을 바라보게 되어서 극한 어려움이 오게 되면 자포자기의 모습이 되어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서로 간에 양보나 포기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어떻게든지 이땅에 있을 동안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을 치게 된다. 여기에서 부활과 재림신앙의 중요함을 더욱 볼 수 있다.


재림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자칫하면 염세적으로 될 가능성이 있으나 그것은 재림의 근본 정신이 결여된 데서 오는 현상이다. 재림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뵈옵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신랑이신 그 분을 얼마나 기억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갔는지를 고백하고 위로를 받는 환희 그 자체이다. 재림 때에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있을 동안 맡기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하고 사용하여 마지막 주인에게 보고하고 하나님의 평가를 받게 된다. 한 번 뿐인 세상이니까 적당히 살자는 생각은 십자가와 부활, 재림의 신앙을 전제하면 결코 할 수 없게 된다.


요한 계시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 (계 21장)은 바로 이런 눈물어린 기다림이 전제된 것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재림 때에 모든 것이 다시 주어지니까 마구 파괴하며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불신에서 출발한 질문에 불과하다. 부활과 재림의 신앙에 근거할 때만 현실에서의 우리의 삶이 가장 잘 깨어 있게 되고 모든 기회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 안에서 땅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 본향으로 돌아갈 나그네로서, 신랑을 맞이할 신부로서…


3. 실제적인 대안들


창조신앙, 십자가의 신앙, 부활과 재림의 신앙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환경을 보호하고 서로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은 무엇일까? 각 개인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삶의 예배를 드릴 제사장들로서 개인, 가정, 지역, 국가, 세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각 개인이 바로 작게는 가정 크게는 우주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이 모든 영역의 관리자 또는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따라서 모든 일에 있어서 우주적인 시각과 종말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작은 의사결정에서부터 국가적인 의사결정에 까지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1) 개인


먼저 개인은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로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에 기반을 둔 건강하고 독립적인 세계관을 키워가야 한다. 창조, 십자가, 부활과 재림의 신앙에 투철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가깝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서부터 멀리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난 우주까지 하나님의 눈으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마음이… 이 마음으로만 개인이 날마다 숨쉬고 먹고 쓰는 행위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여 어떠한 조직이나 세상의 압박과 꾀임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개인이 절실히 필요하다. 모든 정치 경제적인 갈등구조에서 파생되는 이익의 부조화 속에서 참 신앙과 현실에 바탕을 둔 지혜와 지식을 동원하여 화목을 이루어내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느 그리스도인이 과학자로서 기술을 개발하려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거나 실제 실험을 하게 되었을 경우 그 기술의 득과 실을 잘 알 수 있는 현실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혹시 그것의 위험이나 좋은 점을 발견하였을 때 국가적인 이익과 조직의 이익과 상반되어 많은 반대와 위협을 무릅쓰게 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히 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필자의 전공인 도시환경계획 분야를 포함해서 인간의 활동이 관련된 모든 영역에 이러한 자세가 필요하다. 날마다 성령에 충만하고 성경의 진리로 무장하여서…


2) 가정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이 곧 더 큰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각 가정은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좀 더 공동체적인 시각에서 경제행위를 비롯한 대 사회 관계를 가져야 한다. 가정은 엄연히 한 개인을 넘어선 국가나 인류 공동체의 공적 기관이므로 각 가정의 구성원들은 의사결정에 있어서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및 관계들을 대하고 이용할 때 가정 나름대로 바람직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이웃과의 연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모든 에너지를 사용할 때 가능한 만큼 아끼고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길을 찾아가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수돗물과 전기를 쓸 때, 쓰레기를 버릴 때, 교통수단을 선택할 때 가능한 대로 환경 친화적인 방법을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


3) 공동체 (교회, 학교, 마을, 직장 등)


개인이나 가정이 비슷한 기호, 종교, 지리적인 위치, 경제행위를 중심으로 뭉쳐서 이룬 기관을 우리는 공동체라 부른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경제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데 각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견을 개진하고 필요하다면 정보를 공유하며 설득력 있고 전체의 공감을 얻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교회를 포함하여 의견을 같이하는 작은 공동체와 함께 대 사회적인 역할도 감당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적으로 주위의 어두운 곳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환경적으로 열악한 곳들을 찾아 고발하고 건설적인 대안들을 모색하도록 정부의 관심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유해한 정책결정에 대하여 적극적인 감시자 역할도 해야 한다. 각 교회나 공동체에서는 환경문제 뿐만 아니라 각 정치 경제 인권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다수의 힘과 자본의 힘이 지배하고 있으므로 뱀 같이 지혜로운 자세로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제 사건들에 심도 깊은 관심을 표현해야 한다. 흔히 재세례파로 구분되는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미국의 종교단체로서는 유일하게 워싱톤에 대표부를 설치하고 각종 법제 및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현실 안주적이고 이기적이며 좁은 시각을 반성해야 할 것 같다.


환경문제는 몇몇 전문가들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개인과 국가가 함께 노력하여 풀어가야 하는 인류 공동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환경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과 관련되어 있어서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으면 환경을 악화시키고 결국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들의 삶을 황폐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이 땅의 관리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환경문제는 더 더욱 중요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개인은 물론 교회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좀 더 빨리 인식하여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 가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창조의 신앙과 십자가의 신앙과 부활과 재림의 신앙에 굳게 서서…


끝으로 알트너가 제시하는 몇 가지의 실천방안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는다.



  1. 자연자원을 최대한 아껴쓰고 재생이 가능한 자원은 재생하여 다시 사용한다.
  2. 생태계의 균형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것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태계를 사용해야 한다.
  3.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주로 경제적, 정치적 관심에서 발전되었으나 앞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행복을 위하여 봉사하는 목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며, 새로 발견되는 과학기술이 생태계에 대하여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4. 지금까지 땅과 바다와 우주의 공간이 별다른 고려 없이 함부로 사용되었으나 앞으로는 땅과 바다와 우주의 공간은 책임적이며 이성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바다와 우주 공간에 핵 폐기물을 버리는 행위는 철저히 금지되어야 한다.
  5. 지금까지 묵살되어 온 힘없는 사람들, 특히 후진국 국민들과 말을 하지 못하는 자연의 삶의 권리와 존재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6. 언젠가 고갈될 수 밖에 없는 에너지 자원을 무계획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각종 오염과 파괴를 유발하였으나 앞으로는 고갈되지 않으며 오염과 파괴를 일으키지 않은 에너지 자원, 예를 들어 태양에너지, 물과 바람의 에너지를 개발하여 사용해야 한다.
  7. 지금까지는 핵무기, 화학무기, 광학무기 등의 현대무기를 통하여 평화를 보장하려 하였으나 앞으로는 무기의 제한과 폐기, 평화조약 등을 통하여 세계평화를 보장해야 한다. *

* 이인우, 1995, 자연환경에 대한 일반 은총적 인식의 중요성, 1996년 기독학문학회 발표문. p. 88.

[이시훈] 백설공주 이야기 2

이코스타 2002년 6/7월호

백설 공주의 왕실에서의 삶은 어쩌면 무척 외롭고 고립된 생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곁에는 늘 자상한 유모가 있고 작은 일 조차도 다 거들어 주는 시종들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과 총명함을 칭송하는 많은 사람들의 호의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아버지의 다정함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무엇보다 그녀와 새 왕비를 비교하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새엄마의 광기 어린 질투심은 어린 공주의 마음에 커다란 가시로 자리하고 있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고립되어 있고, 마음 한편에 언제나 깊은 그늘이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모든 환경이 열악하기만 숲 속에서의 생활이 처음부터 순조롭고 즐거웠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청결하지 못한 주변 환경, 비좁고 불편한 집안, 거친 잠자리, 형편없는 음식과 의복…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부족한 생활은 그녀를 절망하게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왕실에서 특별한 잔치가 있을 때나 볼 수 있었던 어릿광대 같은 난쟁이들이 일곱 명씩이나…. 맙소사! 어린 공주가 느꼈을 막막한 절망과 공포를 상상해 보십시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동물들의 울음, 귀귀스런 바람 소리. 도무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익살스런 얼굴의 난쟁이들, 이제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해야하고 생존해야한다는 엄청난 부담.. 동화 속에 그려진 즐겁고 아름다운 숲 속의 생활이 결코 처음부터 가능한 것은 아니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난장이들은 사회적으로 어떤 존재들이었을까요? 그들은 어릿광대의 역활을 강요당하며 살아가는 천민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고,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 받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스스로 사회를 등지고 숲 속 깊은 곳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서로 도우며 살아갑니다. 매우 작은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의 공동체 생활에 어느날 예쁘고 총명한 천사와 같은 공주가 끼어 들게 되면서 우리들의 동화는 꿈과 같은 드라마를 엮게 되는 거지요.


소외된 자들과의 공동체적인 삶은 공주를 변화시켰을 겁니다. 더 이상 절망에만 기대어 있을 수 없이 바쁜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광대로만 보이던 난쟁이들과 협력해서 더 나은 생활 환경을 이룩해 나가는 동안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로서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왕실에서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던 모든 것들을 스스로 구하는 능동적인 자세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난쟁이들과의 따뜻한 관계와 한 가족으로서 동행하는 삶 속에서 소외된 이웃을 향한 사랑을 배우고 의식의 전환을 갖게되었습니다. 비록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하고 있을지라도 그들도 자신과 같은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존재, 사고하는 존재, 그 안에 하나님의 동일한 숨결을 간직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공주는 매우 성숙한 의식을 갖게 되었고 무엇 보다 소중한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왕실의 공주라는 위치를 잃은 것은 커다란 상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공주가 내적으로 얻은 변화와 성숙의 의미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것입니다. 받기보다는 베푸는 생활, 사랑을 주고 받는 삶, 실천하는 삶의 의미를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고 성숙한 인격을 가졌다해도 우리는 유혹 앞에 나약한 존재입니다. 공주의 앞에 나타난 마녀의 유혹은 얼마나 달콤한 것이었는지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탐스러운 사과를 아무 의심 없이 베어먹은 공주는 영원한 잠 속에 빠져듭니다. 영원한 잠이란 의식의 무방비를 의미합니다. 잃어버린 자아, 사랑의 부재, 관계의 단절, 죄에 대한 불감증… 이러한 것들이 완전한 어둠, 영원한 잠으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한 죄성으로 인해 영원히 잠들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거룩한 입맞춤으로 우리를 깨워 주시는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날 때 우리의 존재는 거룩함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백설 공주는 드디어 왕자님의 손을 잡고 영원한 왕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치렵니다. 혹, 당신은 잠자는 공주님이십니까? 이미 왕자님의 키스를 받았음에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 전서 13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