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운] 성서적 입장에서 본 환경정의

이코스타 2003년 5월호

환경과 환경문제


일반적으로 환경은 우리를 둘러싼 인문적이고 자연적인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환경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상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환경이란 말은 어찌 보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사고 속에서 등장한 말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환경을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사람도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환경’보다는 ‘생태’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위치가 생태계의 일부라는 면을 강조함으로 인간의 오만을 지적하고 결과적으로 조화로운 삶을 추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환경이라는 말을 쓰든 생태라는 말을 쓰든 중요한 사실은 성경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마지막 여섯 째 날 만드셨고 인간에게 당신이 지으신 만물을 관리하고 돌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환경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환경은 인간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고 결국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환경문제 란 산업화에 따라 자연이 파괴된 현상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인하여 자연 (환경)을 오로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이용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주인과 객체의 관계로만 생각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즉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환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존재 자체가 환경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환경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말하는 환경문제 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질서가 인간으로 인해 파괴되는 현상을 말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워 두신 인간의 역할을 넘어서서 인간의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관계와 질서와는 정반대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파괴되자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착취하는 관계가 되었으며 (창세기 4장 이후의 인간의 역사)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또한 착취 및 지배의 관계로 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람이 섬김과 사랑이 아닌 이윤추구와 욕심에 기반을 두고 자연 및 과학기술을 오용한 것이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정의 (Environmental Justice)


‘환경’과 ‘정의’를 붙여서 ‘환경정의’라는 말이 미국에서 생겨났다. 이는 원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만물이 오염되지 않은 환경에서 살 권리와, 어떤 오염원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을 권리가 공평하게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즉 사람이 자연을 착취하면서 대책 없이 오염시키고, 사람들 사이에도 어떤 사람들은 보다 좋은 환경 (덜 오염된 환경)에서 사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 (오염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문제를 원천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자원낭비와 환경오염을 수반하는 생산활동에서 이익은 자본가나 경영자에게 많이 돌아가는 반면 피해는 ‘생물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에게 많이 분배되는 현상이 생겼다. 여기서 생물적 약자란 태아를 포함한 아이들, 노인 등 환경오염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말하며, 사회적 약자란 저소득층, 노동자, 농민, 어민 등을 말한다. 생물적 약자의 범위에는 인간만이 아닌 자연 생태계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만드는 가에서부터 모든 의사결정에 노동자나 주민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경영자나 전문가 및 공무원에 의해 일방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전자의 것을 분배의 부정의라고 하면 후자는 절차의 부정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둘을 합하여 환경부정의라고 하고 이러한 부정의가 해결된 상태를 ‘환경정의’라고 한다.


미국에서의 환경정의


미국에서 환경정의에 대한 논란이 심화된 것은 1980년대 초의 일이다.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나오는 유해 폐기물의 처리를 둘러싸고 1960년대부터 문제가 되었다. 환경오염의 문제에 눈을 떴던 중산층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주위에 폐기물 처리장이 들어 오지 못하도록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유해 폐기물 처리장은 조용히 저소득 아프리카 흑인과 미국 원주민이 사는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워런 카운티 (Warren County)에서 처음으로 유해 폐기물 매립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즉, PCB (Polychlorinated Biphenyl)를 담은 6천 톤의 흙을 매립하려고 했을 때,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여 약 5 백 명의 사회 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또한 1983년에는 Robert Bullard라는 흑인 학자가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고형폐기물 처리장의 위치가 저소득층이면서 흑인계층의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1987년에는 그리스도 연합교회 (United Church of Christ, UCC)의 인종과 정의 위원회 (Commission for Race and Justice)에서 미국 최초로 전국을 대상으로 유해 폐기물 처리장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조사했는데 바로 Robert Bullard의 연구 결과를 보다 심층적으로 뒷받침 하게 되었다. 이 연구를 기화로 하여 미국에서는 환경정의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었고 이후 약 10여 년간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연구의 결과가 다소 엇갈리기는 하지만 실제조사를 곁들인 상당수의 연구가 환경부정의의 사례들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이 문제가 미국의 특수한 상황 중에 하나인 인종차별(Racial Discrimination) 문제와 맞물리면서 환경문제의 뜨거운 감자로서 부상하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환경정의


일본에서도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함께 각종 공해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공해의 피해가 대부분 ‘생물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음이 미야모또 겡이찌 (宮本憲一)에 의해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의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사망자의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다. 일본의 공해문제의 심각성을 알렸던 미나마따 병의 가장 큰 피해자는 영세 어민들이었다. 식품공해 또한 그 중의 하나로서 어육 햄, 소시지, 두부 등의 살균제로 쓰여지고 있는 식품 첨가물 AF2가 간암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음식은 주로 저소득 층이 많이 먹고 있었다.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긴 하나 무 농약, 무 첨가 식품의 값이 농약을 치거나 방부제 등의 식품첨가물을 넣은 것보다 좀 더 비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미나마따의 경우 생물적 약자의 범위에 인간만이 아닌 자연 생태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나마따에서 유기수은에 중독된 것은 사람이 먼저 가 아니라 어패류나 고양이였으며, PCB 중독증으로 알려진 카네미유증을 알린 것은 닭들의 집단 폐사였기 때문이다.


정책적인 면에서 환경정의 구현


환경오염으로부터 생물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환경권을 보호하려면 법에 근거를 둔 실제적인 장치들이 필요하다. 그 장치들은 곧 각종 산업, 개발, 의료, 에너지, 환경관리 등의 분야에 환경정의의 개념을 반영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도록 하는 정책 개발을 말한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환경정의에 대한 요구가 사회 각계 각층에서 일어나고 환경부정의의 사례가 인종차별과 궤를 같이 하면서 급기야 1994년에 클린턴 대통령이 “환경정의 특별 행정명령 (Executive 12898)”에 사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환경정의의 개념이 법제화되고 각종 국가 정책에 환경정의의 개념이 실현되게 되었다. 즉, 모든 정책을 수행할 때는 반드시 환경정의를 고려하여 절차적인 면에서 공평하고 투명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환경오염의 분배의 면에서 형평성을 찾도록 정책 대안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클린턴의 행정명령 12898에는 생물적 약자로서 생태계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 (아래 글 참조).

“To the greatest extent practicable and permitted by law, and consistent with the principles set forth in the report on the National Performance Review, each Federal agency shall make achieving environmental justice part of its mission by identifying and addressing, as appropriate, disproportionately high and adverse human health or environmental effects of its programs, policies, and activities on minority populations and low-income populations in the United States and its territories and possessions, the District of Columbia, the Commonwealth of Puerto Rico, and the Commonwealth of the Mariana Islands” (Executive Order 12898, Section 1 1-101 Agency Responsibilities).

그저 문제가 되고 있는 소수 인종과 저소득 층에게 분배면에서 공정하고, 절차적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라도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부정의의 문제에 대한 정부 정책의 진일보한 면을 읽을 수 있으나 역시 인간 중심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따라서 본질적인 환경정의를 실현하려면 말 그대로 ‘생물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가 불공평하게 취급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


환경문제는 지역적이고 국부적인 경우도 있지만 나라를 넘어서 발생하는 경우가 빈발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환경정의의 논의는 이제 한 나라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세대 간, 내부 사회 간, 종간의 정의를 생각하여 국내법이나 국제법을 만들고 각 정책을 구체적으로 입안하고 실행하는 데 맞추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환경 기본법에 환경정의의 개념을 넣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는 환경정의의 개념도 미국의 것보다 좀 더 포괄적으로 적용하려고 애쓰고 있다. 만일 환경기본법이 환경정의의 정신에 의해 개편되면, 많은 부분에서 각종 개발 정책이나 환경관리 정책, 기타 인간의 복지와 관계된 정책들의 입안 과정에서부터 실행계획까지 검토를 받도록 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 국민과 다른 나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 간에 필요한 조약을 체결하고 유해폐기물을 수출하거나 수입하지 않도록 하며 물이나 공기를 통해 타 국가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규제해야 한다. 둘째로 다음 세대가 필요로 하는 자원이나 에너지를 고려해서 현세대의 계획을 세우고 집행해야 하며, 다음세대에게 현 세대의 오염이 계승되지 않도록 하는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셋째로 사회 내부적으로 어느 한 계층이나 집단이 편파적으로 특별한 이익이나 피해를 보거나 당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넷째로 생태계의 조화를 고려하여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계획을 하지 않고 자연 친화적인 방법으로 모든 정책과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멸종위험이 있는 동물과 식물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가능한 한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서적 입장에서의 환경정의 구현


이제까지 환경정의를 어떻게 정책적으로 이루어 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다분히 인간적인 지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이러한 원칙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실천할 의지가 없으면 이러한 논의는 거의 필요 없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우리 인간이 걸어온 발자취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자신도 생각과 입으로 내뱉는 것과 실제 행동이 많이 다름을 볼 때 인간적인 시도의 절망을 느낀다.


그렇다면 어떻게 환경정의를 성경적으로 이뤄내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적인 입장에서 환경정의를 이루기 위한 정책적인 대안 뿐 아니라 근본적인 삶의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성경에 환경정의 문제에 대한 세세한 대안이 있지는 않지만 어떠한 정신으로 환경정의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로, 총체적인 구원의 정신이 필요하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열어 놓으신 하나님과의 회복과 화평의 길에 동참하는 것이며, 믿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만이 아닌 지금 이 순간부터 연결된 영원의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흔히 영적인 구원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만물과 우주가 함께 구원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기적이거나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구원 관은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를 깨는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도 식물도 가난하고 약한 사람도 하늘도 땅도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구원을 이뤄가도록 하는 중책을 우리 사람,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에 주신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정신이 우리에게 소화되고 생활화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환경 지킴이가 되고 서로를 참 이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자연도 우리의 이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만일 우리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 관이 그렇게 깊어진다면 우리는 감히 경제적인 불가피성을 이유로 하여 우리의 이웃에게 피해를 전가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이웃을 위해 우리가 대신 피해를 당하고 예수님처럼 죽음까지도 기쁘게 맞게 되지 않을까?


둘째로, 청지기적인 정신이 있어야 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대로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청지기적인 직분을 허락하고 있다. 구약에서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직분이 그것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 우리가 관리하고 다스려야 하는 에덴은 어디일까? 바로 우리가 사는 주위와 사회, 국가, 더 나아가서는 세계 구석구석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이자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땅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주께서 주신 지혜를 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환경적인 부담이 생겨날 경우에는 그 책임을 이웃에게 떠미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지는 것은 정말 무리한 일일까? 점점 더 거세어 지고 있는 지역 이기주의 움직임에 교회공동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들도 대거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셋째로 종말론적 정신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세상에 대한 심판자로서 또 어그러진 세상의 완성자로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는 정신이다. 그 사상이 있어야 세상 속에서 헛되이 키워오는 욕심의 굴레를 벗을 수 있고 자연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즉 나그네의 자세로 있어야만 참으로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세상을 등지는 무관심으로서의 종말사상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욕심을 포기하고 참을 추구하는 정신이 너무나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구원의 완성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8장 19 – 23절에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구원을 고대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요한 계시록 21장 1-7절에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세상을 새롭게 하시면서 고난을 받아 온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주께서 오실 때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환경정의를 이루도록 부탁하시는 것은 아닐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결코 이루지 못하는 궁극적인 절망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환경정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루어 가야 할 사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넷째로, 환경정의를 이루려면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웃사랑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웃사랑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사람뿐만 아니라 환경도 포함한다. 사회의 아픔과 사회의 불평등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듯이.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제사장이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12장 1-2절). 우리가 사회의 아픔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의 문제는 제사장의 입장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다. 일부 영웅적인 운동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세상사람은 희생의 제사를 드릴 근거가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웅이 되지 않더라도, 돈이 생기지 않아도 중요한 것을 소리 없이 할 수 있는 충분한 성경적인 근거와 존재적인 근거가 있다.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산 제물로 바쳐도 좋을 만큼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이 우리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될 때 환경정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란 인간이 자연 속에서 노동을 통해 삶의 양식을 얻고, 한 편 자연이 인간의 노동을 통한 섬김으로 풍요로워지도록 하는 조화로운 삶임을 우리는 타락하기 전 에덴에서의 아담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에 국한되지 않고 눈을 넓혀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게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웃 사랑의 정신에 비추어서 대안을 만들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맺으며


환경문제가 점점 국가간 세대간의 문제가 되어가듯이 환경부정의의 문제도 우리 이웃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문제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가 최소한의 소비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지혜를 다 해서 환경을 해치지 않는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환경문제에 대한 예민한 감시는 물론 현안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현재 환경분야에서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공공참여 (Public Participation)이다. 이제까지의 환경정책이나 각종 개발정책에 공공의 의견을 듣지않고 전문가들이나 정치가들이 자신들에 맞게 의사결정을 해 옴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생겨난 것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따라서 계획의 시작부터 실행 및 관리에 이르기까지 공공이 참여함으로써 문제를 사전에 방지하고 좋은 대안을 찾아가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 들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연과 사람을 해치지 않고 환경적인 부담과 짐을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우리의 미래 세대들의 권한을 빼앗지 않는 대안 (지속 가능한 발전)을 마련하는 데에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 일은 환경 전문가들의 몫이 아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중요한 구성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사람 혼자서 살 수 없고 사람과 자연이 서로 사랑해야만 살 수 있게 되어 있다.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살기 위한 근본적인 책임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에게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만이 총체적인 구원 관과 종말적인 정신에 입각하여 청지기적인 삶과 이웃사랑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의 칭찬과 멸시에도 요동치 않고 그리스도로 인한 평화와 구원의 기쁨에 만족하면서 자발적인 가난과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듯이 자신과 사람과 자연과 우주를 사랑하면서…

[이시훈] 감사의 이유

2003년 5월호

가끔 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는 친구인 한 자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저는 이번엔 어떤 따뜻한 글이 있을까 기대를 하곤 합니다. 그녀의 글 속에는 제가 평소 깨닫지 못하는 감사의 의미가 늘 담겨있어 제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십여 년 전 교통사고로 전신장애를 갖고 살게 된 그녀는 휠체어에 의지한 생활에 어느덧 익숙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음악 듣는 것과 책 읽는 일을 무척 좋아하는 그녀의 감사는 자신이 가장 즐겨 하는 일에 지장이 없는 장애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그녀의 감사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진실하기에 더욱 귀하게 느껴집니다.


성악가의 꿈을 키우던 젊은 시절 늘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콧대가 무척 높다는 평을 듣곤 했다는 그녀의 아름다웠을 시절을 상상해 보면 모란꽃이나 다알리아 꽃처럼 수려하고 당당했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 그녀가 느꼈을 절망과 분노를 상상해 보면 얼마나 처참했을지 마음이 아파 옵니다. 그러나 그녀가 보내는 편지에는 늘 밝고 온화한 모습만이 느껴집니다. 교만했던 자신을 겸손케 하시는 분, 쉽게 분노하고 모든 일에 성급하던 자신에게 인내를 가르치신 분, 헛된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가치관을 갖게 하신 분, 캄캄한 절망의 늪에서 자신을 건져내신 손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언제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저 자신을 포함해서) 늘 불만 불평을 늘어놓는 일에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자신과 남들을 비교하며 상대적인 빈곤과 열등감을 이끌어 내어 자신과 주변 환경에 대한 분노를 품거나, 이웃의 작은 결함을 확대하여 자신의 열등감을 회복하려는 교만으로 다른 이들을 상처 입히는 행위를 알면서 모르면서 저지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건강한 육신과 일용할 양식,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안전한 사회에서 이웃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느끼며,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덫에 걸린 채, 감사한 마음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를 성취하면 다른 한가지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안에서 샘솟듯 일어나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감사보다는 원망과 탄식이 자주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 자매가 음악을 듣다 말고 감격하여 써 보낸 편지에는 하나님이 그 음악가에게 주신 재능에 대한 감탄과 그 재능으로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에 대한 감사, 자신의 귀를 온전히 지켜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책을 읽다 말고 써 보낸 편지에는 진리에 대한 온갖 질문과 온전한 판단력을 지켜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날씨가 궂으면 아파 오는 관절과 독신 생활의 외로움과 생활의 온갖 어려움을 통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사마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태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곤 합니다.


분명히 내적인 갈등과 번민이 수없이 그녀를 괴롭혔을 그녀의 삶에 주님의 만지심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빛나는 감성을 대할 때마다, 그녀 안에 빛나는 소중한 무엇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통해 사모하는 것은 물질과 명예와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꿈이 아니라 참된 지혜와 정결한 영혼에 대한 소망일 것입니다. 순수한 영혼을 느끼는 자는 현실에서 듣지 못하는 아름다운 소릴 들을 것이며,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나 홀로 드리는 기도 중에 간구하는 축복이 얼마나 즉물적이고 가시적인 안정과 가치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인지 가끔 반성하곤 합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아름답고 정의로워지는 것, 나의 삶이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는 것은 내 자신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성숙한 영혼을 가질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획득이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하고 절실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우리에게서 사랑을 이끌어 내거나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하지는 못하므로 삶은 늘 공허한 상태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내 안에 성숙한 자아의 눈이 열리고 작고 사소한 일들에도 감사를 느낄 때, 더불어 사는 사회, 아름답고 공평한 인간관계에 대한 적극적인 소망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부족한 환경 때문에 도전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아플 때 비로소 건강함에 감사하게 되며, 외로움은 벗과 가족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를 일깨우게 합니다. 각 지체마다 다르게 소용되어짐을 알기에 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음은 범사에 그분의 손길이 닿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감사는 주님께 대한 우리 사랑의 표현입니다.


”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 송명희 시인의 놀라운 고백을 통해 감사의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다시 헤아려봅니다. ☆

[차문희] 가족 요법 (Family Therapy): Caring Heart for Others

이코스타 2003년 5월호

처음 미국에 와서 도저히 이해 되지 않고, 문화적 충격 이었던 것이 있다면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미국의 가정 생활이었습니다. 제가 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주위에 있는 친구들만 보아도 원만한 가정-양쪽 부모님이 계신-에서 자란 친구들 보다는 기독교인들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들이 이혼하여 편 부모와 함께 혹은 친척들이나 조 부모님들과 함께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어 가면서 사는 친구들이 더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보아도 제 클래스의 90%의 아이들은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 대 부분이고,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자란 아이들 보다는 결핍과 학대로 상처 받은 아이들이 더 많이 있다 보니, 그 아이들은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을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저의 학급에 D라는 학생이 있는데, 그 아이는 매일 아침에 저를 보면 얼마 전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난 Mr. Roger가 그의 TV 프로그램 Mr. Roger’s neighborhood에서 부르던 노래 한 곡을 부릅니다.

It’s a beautiful day in this neighborhood,
A beautiful day for a neighbor.
Would you be mine?
Could you be mine?

It’s a neighborly day in this beauty wood,
A neighborly day for a beauty.
Would you be mine?
Could you be mine?

I’ve always wanted to have a neighbor just like you.
I’ve always wanted to live in a neighborhood with you.

So, let’s make the most of this beautiful day.
Since we’re together we might as well say:
Would you be mine?
Could you be mine?
Won’t you be my neighbor?
Won’t you please,
Won’t you please?
Please won’t you be my neighbor?

D라는 학생은 이 노래를 저에게 와서 부를 때 “Would you be mine? Could you be mine? Please won’t you be my neighbor” 이라는 가사 중 ‘mine’ 이나 ‘neighbor’ 라는 단어 대신 ‘mother’ 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부릅니다. “Would you be my mother? Could you be my mother? Please won’t you be my mother?” 이렇게 말입니다. 처음에 그가 이 노래를 부를 때 저는 너무 재미 있어서 그냥 웃어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엄마가 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할 때에도 계속 웃고만 있었더니, 제가 대답을 안 하면 계속 노래만 할 거라고 하여 결국은 “Yes”라고 대답 했답니다.


그 아이의 아빠는 감옥에 가 있고, 혼자서 두 남매를 키우면서 사는 엄마는 생계 유지에 허덕이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적인 여유 조차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그런 가정 환경 뿐만 아니라 그에게 기대하는 엄마의 생각에 저는 더욱 놀랐습니다. 그의 엄마는 아들인 D가 워낙 학교에서 문제만 일으키는 정서 장애 아동이다 보니 아예 포기하고 이미 초등 학교 2학년 때부터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 하고 나이가 어느 정도 차면 소년원에 보낼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학습적인 면을 보면 그렇게 장애를 가진 아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의 원만하지 못한 가정 생활로 인해 그가 정서 장애 아동이 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또한 몇 달 전에 이코스타에서 소개한 알코올 중독 엄마의 가출로 다른 엄마를 필요로 하는 B 라는 어린이는 한 동안 새 엄마가 있었으나 학대와 구타를 당해서 힘들어 했습니다. 결국 싱글 인 저에게 자기 아빠와 결혼하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답니다. 제가 보기에 청교도 정신에 세워진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의 가정은 너무나 많은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급격하게 증가하는 이혼율, 알코올과 마약 사용의 증가, 타락한 성 문화, 10대의 임신, 동성 연애 등등은 한 가정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정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태어난 학문이 바로 가족 요법 (Family Therapy)입니다. 사회의 기본이 되고 모범이 되어야 할 가정의 무너짐은 우리들에게 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가져와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담 (counseling)에 비해 가족 요법은 그 문제를 좀 더 폭 넓게 이해하고 함께 연구하려는 관점에서 치료 (Therapy)를 시작 합니다. 1950년대에 새로이 태어난 가족 요법이라는 학문은 그 역사도 짧은 반면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학문으로서 많은 관심을 얻고 있습니다.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철학 등의 다양한 학문들이 합쳐 져서 이루어진 가족 요법은 가족 서로간에 갖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사회 복지 (Social work/ Social welfare)에 가까울 수 있겠고 문제를 이해하고 도움을 찾았을 때 정신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정신 의학 (Psychiatric medicine) 에도 가깝습니다. 그래서 가족 요법이 사회 복지 대학 내에 있는 학교도 있고 의과 대학 내에 있는 학교도 있으며 심지어 많은 신학교에서도 기독교 상담 학을 하면서 가정 사역에 관심 있는 목회자들에게 가족 요법(Family therapy) 자격증을 취득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럼 이 가족 요법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자세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저는 가족 요법의 기본 적인 개념과 우리 기독교 세계관이 많은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가족 요법을 통해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다 보니 .(Accept yourself the way you are.) 우리에게 처한 환경을 현실 그대로 받아 들인다. (Accept your situation the way it is)


만약 우리 자신과 처한 환경을 부인하는 것은 어떤 문제와 갈등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가족 요법 치료사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 하기 때문에 각자가 다른 환경에서 자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감옥살이를 한 요셉의 삶을 보면,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시기와 질투 속에서 미움을 받고 결국 노예로 팔려가 수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 갔지만 그의 현실을 비관 하지 않고 언제나 꿈을 갖고 그 꿈을 현실화 하는데 노력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꿈이 이루어 진 이후에도 요셉은 형제간의 우애를 변치 않으며 살아가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 크리스천들도 요셉 처럼 자신에게 처한 고난과 아픔 까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가족 요법을 통해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Understanding others and their life situation)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사람의 환경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내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자신을 합리화 시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가족 요법 치료사들은 심리극 (psychodrama)과 같은 방법들을 도입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에 앞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이해 시키는 역할을 먼저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큰 다른 점이 있다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순결한 섬김을 통해서, 특히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면서 온 인류의 영혼 구원까지 책임지신 그의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남을 사랑으로 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잘 이해해 주시는 첫 번째 role model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각자 자라온 환경, 즉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Understanding of diversity)


가족 요법 치료사들은 사람들의 자라온 환경을 비롯해서 사회적 문화적 차이를 이해할 때 그들의 문제점과 갈등해소 방법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상대방을 향해 마음의 문이 열려 있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 과정에서 치료는 시작된다고 보는데 예수님께서도 어떤 문제들을 갖고 찾아 오는 분들을 위해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받아 들이시고 치유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양성의 이해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열린 마음 (Open mind)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3가지의 내용들을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에 적용해 봅시다. 각각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자와 여자가 부모님을 떠나서 한 몸을 이루어 한 지붕아래 살아갈 때, 자기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제대로 알지 못 하고 자신에게 처해 있는 현실 (고난 혹은 어려움을 의미함)의 이해가 부족하다면 상대방 (배우자, 자녀, 가족 구성원 모두)을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생물학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으로 달리 성장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에는 반드시 어떤 문제를 갖고 살아가고 그 문제 해결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의 가족 관계 형태 (different structure of the family)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가족 요법은 크게 근대적 가족 요법 (modern family therapy)과 현대적 가족 요법 (post modern family therapy) 으로 나누어 지고 이 두 가지 요법 안에는 대략 15개 정도의 요법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과 처한 환경에 따라 치료 방법 또한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법들이 사용되기 전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 (Caring Heart for Others)” 입니다. 지금까지는 가족 요법의 이모저모를 살펴 보았는데 다음 달 이코스타에서는 여러 가지의 가족 요법들 중에 제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들을 소개할 까 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