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빛, 색깔, 공기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다.

Q: 혼자되신 할머니 권사님과 설교를 잘 못하시는
목사님의 공통점은?

A: ‘영감’이 없다.


감을 얻기란 쉽지않다. 하지만 좋은 신앙서적은 영감의 원천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달에 소개하는 책, “빛, 색깔,
공기”(김동건, 대한기독교서회, 2002)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영감을 주는 책이다. 먼저 저자의
말로써 이 책이 어떻게 책으로 나오게 되었는가 살펴보자.


나는 원래 이글을 책으로 낼 생각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셨을때, 만약 우리 가족이 아무런 고통없이 그 모든 어려움을
단숨에 헤쳐나갔다면 이 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우리는 이 사실을 신앙적으로 받아글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책은 간암에 걸린 아버지을 바라보는 둘째 아들이 쓴 병상일지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마지막 4개월을 지내며 아들와 아버지가
나눈 대서, 그리고 그 병상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다. 아버지는 김치영 목사, 둘째아들은
김동건교수(영남신학대학교), 두 신학자가 겪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이다.

“어떤 시련 앞에서 겪는 고통에는 모두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시련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각기 다르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도 결국 그들이 삶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동건교수)


책은 많은 암투병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극적으로 암을 이기고 건서을 되찾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한 신앙인과 그의
가족이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죽음을 받아드린 과정들이 그려져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여러가지 삶의 문제에 대해 깊은 통찰을 나눈다.

고통에 관해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니다. 고통을 겪는 다는 사실에는 비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는 없지. 그러나 고통에
임해서 기독교인이 가져야할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에게 고통은 육체의 고통으로 끝나야한다. 우리는 고통이 올때, 신음할 수 있다.
고통을 호소 할 수 있고…. 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불평과 절망이 되고, 그 고통이 허무감으로
연결된다면 이는 불신앙이다.” (김치영목사)

심한 고통 속에서 곧 다가올 죽음을 앞둔 이에게 그의남은 생은 어떤의미를 부여 할 수 있을까?
나는 요즘 인간의 삶을 여행에 비유해 생각해 보곤 한다. 인간은 두가지 여행을 한다. 한여행은 육체를 입고 이세상을 사는 것이고
다른 한 여행은 부활체로서 영생을 사는 것이다. 나는 70여년간 살아온 하나의 여행을 마치고 다른 하나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겪고있는 이고통을 이 세상에서의 여행을 정리하고, 주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향한 고통이라 생각한다.”
(김치영 목사)

죽음의 본질에 대해…

십자가 속에 있는 바울에게는 죽음이 무엇인지 환히 보였어. 죽음의 본질이 너무 환히 보여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드냐고 조롱 했던
것이다. 바울은 죄의 삯에 의한 죽음을 조롱했다! 오늘 저녁 나에게 바울의 말씀이 그냥 전해지는 구나. 그 쏘는 것이 다 빠진
죽음, 이제는 증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친숙하고 친근하게 맞아진다. 이제 죽음은 그 쪼는 것이 빠져버린, 부활을 향한 하나의
과정 일 뿐이다.” (김치영 목사)

병상에 비친 옅은 햇빛을 보며…
“어때! 빛이다. 그렇지?” (김치영 목사)

달란트에 대하여..

나는 달란트는 어떤 재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삶 자체라고 생각해본다…중략…무엇을 배워서 어떻게 써먹을 지만 생각하면서,
우리 생명을 통해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하는 자가 바로 달란트를 묻어둔 자이다.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 좀더
느끼도 배우고, 좀더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좀더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 그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이리라.” (김동건교수)


제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 코스탄에게도 산적한 문제가 있으리라. 지도교수와의 문제, 경제적 문제, 학업문제, 결혼문제…
이러한 문제의 끝, 문제의 최고봉이라 할수 있는 죽음을 예수님께 해방시키셨다. 이제 정말 남은 문제는 앞서 저자의 말처럼,
주어진 상황가운데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인 답게 반응하느냐 일 것이다.

사족1: 고인이 되신 김목사님이 고통의 순간에 붙들었던 탁상시계가 있었단다. 이시계 뒤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이 있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비록 지금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 전서 1장 8절).
Without having seen him you love him: though you do not now see him,
you believe in him and rejoice with unutterable and exalted joy. 그는
숨질때까지 이 구절을 ‘붙들고’ 있었다.


족2: 아마도 이책을 골라 읽게 된 계기는 얼마전 10년간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요즘도 종종 아버지 생각을 한다. 이미 천국 가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나의 삶이 풍요로와 짐을 경험한다.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이진석] 냉면 유죄


번은 어른 목사님들과 같이 미 동부 필라델피아의 한국 식당을 갔다. 어르신 목사님께서 주문하셨다. “여기 식당에 회 덮밥, 빨리
나오지요?” 말 떨어지자 말자,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나도 회 덮밥이다. 먼저 와서 멋모르고 다른 것을 시킨 사람들도 슬금슬금 회
덮밥으로 바꾼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었다. 난 그 날 정말 회 덮밥 무드가 아니었다. 아랫배에 살짝 힘을 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냉면 곱빼기! 주문하는 순간, 방안의 체감 온도가 냉랭하게 내려감을 느꼈다. 그 날 냉면은 무척 춥게 먹었다. 미국에서 찍히던
순간이었다.


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이제는 아무도 음식점에서 어른의 눈치를 보면서 주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 있으면 고지식하고 주체성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자기 구미 당기는 대로 주문을 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다양성의 강요도 또 다른 종류의 획일성일 뿐이다.


국에 와서 산 지 20여 년이 되지만 지금도 어색한 것은 미국 식당에서 음식 주문이다. 계란 하나를 주문해도 유정란, 노
콜레스테롤 일반계란, 익히는 것도 반숙, 완숙, 노른자 그대로, 노른자 뒤집기, 스크램블드,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는 수도 있다.
후추를 넣어, 말아? 치즈 얹어 줘, 그냥 줘? 토스트는 어떻게, 잼은 어떤 잼, 시럽은 무슨 시럽, 감자는 어떻게, 마치
취조관에게 심문 당하듯 진땀을 뻘뻘 흘린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소소한(?) 것까지 선택을 강요받는다는 느낌은 세월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색하고, 때로는 귀찮기까지 하다. 산술적인 선택의 증가가 자유의 확장이 아님을 체득한 셈이다.


약 한국 식당에서, 비빔밥 위에 얹어주는 계란을 미국 식당 주문하듯이 각 손님마다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방장 아줌마에게 뺨
맞고 나오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식당의 경험이 미국 식당에 뒤진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자유는 주로 식당과 음식의 종류를 선택하는 데 국한된다. 그 이상은 식당의 재량에 맡긴다. 알아서 잘 해 달라는 것이다. 식당과
주방을 믿고 자신의 식탁을 맡기는 것이다. 미국인으로선 대단한 믿음의 결단일 수가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못 믿을
바에야 왜 식당을 가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자유의 과실
그래서 한국인은 강요된 선택의 확장만으로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선택의 확장까지도, 자유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선택의 자유보다 신뢰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신뢰가 자유에 선행할 때 자유가 자유스럽게 다가온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선택을 존중하여 줘야 할 이유는 그런 임의의 자유를 누리게끔 창조부터 설정하여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영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 교감을 가져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조의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처음 당부는 동산 안의 각종 실과를 네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큼은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준 자유의 선택에서 하나님처럼 되는 자유는 열외로 두셨다. 만들어진 사람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런
설정을 거부하고 하나님같이 살고자하는 이들이, 오히려 사람답지 못한 모습으로 전락된 모습들이 인간사에 질펀하게 어질러져 있다.
자유가 오염될 때 증가하는 것은 고통의 선택이었다. 한가지 금령은 만가지 자유를 누리기 위한 함축된 경고문이라고나 할까! 사람이
가장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입장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신 사람의 입장에 설 때라는 것을 최소단위의 금령이 상기시켜 준다. .

[임성우]부자청년의 고민과 나의 결정

이코스타 2003년 10월호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 대 (마태복음 19장 16 27절)


과거에 마태복음의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 청년, 참 어리석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냥 순종하면 되지 뭘 그렇게 고민했을까 말이다. 그런데, 부자청년의 고민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 속에서 내가 바로 고민하는 부자청년이 되어 버렸다.


두 가지 사건
(1).1995년, 1996년
포기할 때 채워주시는 은혜. 그 감격을 누린 적이 있었다. 대학교 2학년 2학기. 경영학도인 나는 2학년이 끝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이 선배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최고의 코스였다. 대학2년, 군대, 어학연수, 나머지 2년, 취직… 이렇듯 빈틈 없이 준비했다. 편하게 가고 싶어서 카투사 준비도 해서 시험도 보았고, 서클활동을 하며 배운 악기실력을 가지고 군악대 시험도 보았다. 두 가지가 다 안 되도 군대에 갈 수 있도록 입영 원도 일찌감치 내 놓았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군대를 가야 했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러한 철저한 계획에 틈새를 가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 대학부 임원이었다.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대학교 3학년의 나이가 되는 형제, 자매들을 대학부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당시 찬양 팀에서 섬기고 있던 나에게 형, 누나들은 찬양팀 장으로 섬기라고 섭외를 하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 인생의 계획을 찬양팀 1년 섬기는 것 때문에 바꿀 수 없었다. 그러나, 95년 가을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게 준비하고 믿었던 카투사와 군악대 시험에서 난 낙방을 하고 말았다. 큰 두개의 시험 사이로 3번 정도 보았던 운전면허 시험에서조차 난 떨어졌다. 뭐 대단한 실패는 아니었지만, 이제껏 낙방에 익숙하지 않던 나에게 짧은 시간동안 발생한 연속적인 실패의 충격은 컸다. 임원총회가 있는 11월 중순이 다가오면서 이전의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군대 1년 미룰까?


내 계획에 없던 대학교 3학년은 쉽지 않았다. 돌아온 복학생들의 공부하는 모습에 나 스스로 메뚜기처럼 느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의 부족함 가운데 자연스럽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주님은 이제 막 첫 포기를 한 나에게 기적과 같은 성적을 거두게 해 주셨다. 내가 포기한 작은 것에 넘치도록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96년 한 해 가운데 하나님은 성적, 친구, 사역, 선교여행 등등 세상 누구도 부러워 할 것들로 가득 채워 주셨다.


(2). 2002년, 2003년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미국경기, 대학원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금새 마지막 학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나 다 하게되는 진로문제.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결정은 한국에 가느냐 미국에 좀 더 있느냐에 있었다. 졸업을 하게 되면 반드시 사회에 나가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오랫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신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낭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될 수 없었다. 그것은 숨가쁘게 진행되는 경쟁사회에서 낙오를 뜻하는 것이었다. 예전대로라면, 직장을 따라 어디로든 가야 했다. 하지만, 나의 발목을 잡은 것이 있었다. 대학원 2학년 들어오면서 시작한 Campus Bible Study 간사의 사역이었다. 내가 맡고 있던 그룹은 82년부터 84년 사이에 태어난 학부 1학년, 2학년 학생들이었다. 말씀을 준비하고 가르치는 가운데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키셨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고통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다가왔다. 그 은혜와 사랑이 감격스러워 “예수님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었고, 요한복음 21장의 예수님의 말씀인 “나의 양을 치라”.는 나를 향한 개인적인 명령으로 다가왔다.


중대한 결정 앞에 한 영혼은 진정 크게 다가왔다. 영혼과 나의 확실한 미래를 사이에 두고 고민이 시작되었다. 결정을 앞두고 교포친구에게 물어보았다.“”Bible Study때문에 미국에 더 있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니?“ 친구의 답은”It does not make sense.“ 였다. 그렇지만, 확실한 미래를 나는 어렵지 않게 포기할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주신 영혼을 섬길 수 있는 기회에 나의 마음이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영혼에 대한 소중함과 더불어, 예전에 경험했던 포기에 대한 채워짐의 확신 또한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졸업후의 현실은 정말로 만만하지 않았다. 분명 신앙의 연륜은 깊어졌는데, 하나님과 더 가까워 진 것 같은데, 96년에 있었던 것과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Bank account에 날마다 돈이 줄어들고, 어렵사리 하게 된 인터뷰를 통과하는 건 더 어려웠다. 눈에 보이는 기적 없이 3달이 지나가니 자연스럽게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고, 나의 결정에 대한 후회마저 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기는 하신 걸까? 포기는 분명히 했는데, 하나님은 왜 안 채워주시나?


축복과 형통에 대한 탐구 달리 생각해 보기로 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지나온 3개월을 돌아보니 하나님은 어느 때보다 더 신실하게 내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걸 깨닫게 된다. 물질적인 채우심보다 더 크고 중요한 영적인 채우심을 진행하고 계셨다. 어려움 덕분에 기도의 시간과 말씀 보는 시간이 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다시 한번 십자가의 사건을 더 분명히 깨닫게 하셨다. 이미 주신 그 사랑, 그 크신 사랑이 나를 채우니 나는 부자가 되었다. 간구하기가 어려웠다. 그 은혜와 사랑은 나의 낮아진 맘 가운데 더 강하게 더 깊게 부어졌고,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더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나의 물질 관과 성공 관이 변화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소유와 성공에서 자유하지 못하면 예수님 따라가는 삶이 얼마나 온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세상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며, 고통과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고난과 고통에 대한 진정한 해답은 일일이 구체적인 해결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올 천국에 대한 확실한 그리고 진실한 소망을 갖는 것이다.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 그리고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 하나님이 주신 너무도 놀라운 채움 앞에 신실하게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장이규]SPIRITUAL TRANSFORMATION

Q: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천주교처럼 한 지역에 하나씩만 있으면 될 텐데요. 그리고 왜 그렇게 교인들이 싸움을 많이 하나요? 교회 다니면 무언가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A: 1. 질문자의 겉을 보지말고 그 마음가운데 있는 상처를 돌보아 주세요.
2. 그리고 할 수 있는 적절한 대답을 해 주세요. 그럴 때 영적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기회가 열려지게 됩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우리 집의 첫째 아이 하일이를 학교에 데리고 가야 하는 분주한 가운데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한국에 계신 아버지로부터의 전화였다. 전화 소리는 다급한 마음이셨다. “미국에 전쟁이 났다며? 너는 괜찮냐?” 갑작스런 아버지의 염려 전화로 어리둥절한 나는 “여기 전쟁이 안 났는데요?” “무슨 소리야. 아니 지금 한국 TV는 미국에 전쟁이 나서 계속 방송이 되고 있는데…”


한국에서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에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해 어리둥절한 나는 TV를 켰고, 그때서야 World Trade Center가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비행기와 함께 부딪히는 참담한 현장을 보게 되었다. 너무 어이가 없고, 실감나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한 비행기가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World Trade Center로 날아가 부딪히는 장면을 보게 되었고, 그러더니 잠시 후 이번에는 World Trade Center가 폭삭 무너져 내렸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참사의 현장과 피와 눈물, 두려움으로 가득한 두려워하는 뉴욕 시민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실감나지 않는 현실이었다. TV로 방영된 빌딩을 향해 날아드는 민간 항공기의 모습, 빌딩과 부딪히면서 비행기가 빌딩 안에 들어가 터지는 모습, 빌딩이 얼마나 큰지 비행기가 돌진하여 부딪힌 그 자리가 그저 자그마한 칼의 흠집처럼 조금 찢어진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검은 연기, 그러더니 갑자기 빌딩이 어이없이 재처럼 그냥 푹석 내려않는 모습… 시카고에 살고 있는 내게, TV를 통해 보는 장면이 정말 실감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다이하드’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그러던 가운데 또 다른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였다. ‘오늘 저녁에 특별한 예배를 드린다고… 그리고 그룹 멤버들에게 전화하여 함께 추모와 시국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게 하라고…’


그 날 저녁 특별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문명, 종교, 테러, 목적, 인간, 생명, 삶 등등 다양한 삶의 현장 문제들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는 만일 이 순간 내가 예배를 준비했다면 이러한 참사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예배를 준비할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쉽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회에 도착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큰 예배당 밖에까지 회중들로 가득 메워진 가운데 예배가 시작되었다. 특별 예배는 담임 빌 하이빌스 목사를 중심으로 2명의 교육목사들과 함께 3단계 예배로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상담의 예배였다. 먼저 3-4명의 옆 사람과 함께 World Trade Center 가 무너지던 그 시간에 어디에 있었는지, 그 참사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는지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제 옆 사람과 함께 그때의 느낌을 나누려고 할 때 사실 나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다이하드’의 한 장면과 같았다고 할 수 도 없고, 그저 나는 “이것이 사실인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그룹에 있는 다른 3 사람 모두 다 너무 너무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한편으로는 분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와 너무나도 다른 반응의 모습이었다. 예배는 이렇게 자신의 분(anger)과 아픔을 나누도록 하고 함께 이 아픔에 대한 주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두 번째 20여분은 교육의 예배로 이어졌다. 내용은 한 마디로 “자녀들 앞에서 말조심하라” 는 것이었다. 오늘 일어난 테러와 참사에 대해서 우리가 어른으로서 혹은 부모로서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자녀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미래와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지혜의 가르침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들에게 만일 단순히 회교권에서 이 참사를 일으켰다고 이야기하면 그들이 회교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원수처럼 적대시 할 수 있는 미래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언어에 조심성과 그 영향력을 생각하도록 교육했다.


세 번째 20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리더의 자세와 역할에 대한 예배였다. 이제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가면 믿음이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기독교와 회교의 종교 전쟁 아니냐?” “종교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 종교의 아집이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 아니냐?” “이렇게 자기 종교를 위해 전쟁하다 죽으면 순교냐?” “이러면 구원 얻는 것이냐?”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저 죽은 가족들은 가만있어야 하는 거냐?” “믿어도 광신적으로 믿으면 안되지 않느냐?” “보복은 하나님 손에 있다고 하는데 보복해야 하냐, 아니냐?” 등등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 개인의 신앙이 성숙 하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땡땡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질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인의 대표자가 될 것이고, 이러한 비판이 섞여있는 가시 같은 물음을 사람들이 제기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응답을 하겠느냐는 것이 이 예배의 내용이었다. 여기서 주어진 권고는 “비판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의 질문 겉 표면을 보지말고 그 뒤에 있는 상처를 보라” 그리고 “치유하는데 더 초점을 맞추라”였다.


이 1시간의 예배 후 돌아 나오는 나의 마음은 깊은 감동으로 솟아 오른 기쁨이 가득 하였다. 내가 이러한 참사의 현장가운데 서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그리고 앞으로 내가 처신을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행동해 나아가야 할 지를 알게 해 준 안내자의 예배고, 동시에 나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숙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한 영감 있는 예배였다.


이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내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방향성’ 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영적 성숙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좁은 의미에서의 리더, 넓은 의미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역할 중 하나는 ‘방향을 잡아주는 것’ 이었다. 주어진 오늘의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 속에 혼돈 되어 있거나, 근심 속에 쌓여 있거나, 아니면 편견 속에 쌓여 있거나, 믿음의 삶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주어 바른 길을, 주님이 주시는 축복된 은총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며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가슴 벅찬 영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천주교처럼 한 지역에 하나 씩만 있으면 될 텐데요. 그리고 왜 그렇게 교인들이 싸움을 많이 하나요? 교회 다니면 무언가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는 제기된 물음을 9.11 윌로우 크릭 특별 예배가 던져준 영감을 토대로 이 문제 해결에 접근해 보자.


일반적으로 위에서 제기된 질문처럼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의도적인 가시의 물음을 던지는 주체가 교회에 전혀 다니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마음에 그들의 이야기를 웃고 지나가면서 무시(ignore)해 버리거나, 반대로 반박을 하면서 논쟁 할 준비가 되어 있거나 상대방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물음을 던지는 주체가 교회에 갈 마음은 전혀 없으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들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교회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거나 편견 속에 갇혀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이미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그의 마음에 무엇인가 상처로 그 문제를 경험하고 있거나 그러한 문제를 경험한 후 그 문제가 해결점을 찾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 제기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고 처신해야 할까?


첫째는 그들의 상처를 돌아 보라.


문제 제기를 하는 대상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이미 그들 마음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나쁜 이미지 와 편견, 그리고 상처 경험은 믿음에 있어서 일종의 ‘바이러스’라 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점점 그들을 영적으로 병들게(distort) 만든다. 그리고 나서 그 영적인 병이 서서히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공격적이고, 비판적 가시를 가진 문제제기로 나타난다. 만일 비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공격을 하면 원래 믿음이 없으니까, 혹은 아직 모르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리더를 가장 당황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 좋았던 사람들이 그리고 공동체에서 아주 성실했던 사람들이 그러한 질문을 가지고 나오는 경우이다. 실제로 그들의 문제 제기가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 파장이 얼마나 큰 지 모른다. 그런데 더욱더 큰 문제는, 대다수 비판적 질문을 던지거나 가시 있는 물음을 가지고 공격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자신이 경험한 상처는 드러내지를 않기에, 리더들이 이 문제 제기의 핵심을 빨리 파악해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가정이 장시간의 자동차 운전을 하고 시카고로 여행을 와서 우리 집에 며칠 머무르게 되었다. 며칠 즐겁게 머물고 돌아가려는 날 아침에 그 형제가 갑자기 허리가 아프고, 힘을 전혀 허리에 주지 못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화장실을 가려해도 허리에 힘을 줄 수 없어 가서 앉을 수도 없었다. 마사지를 해주면서 시간이 가면 조금씩 좋아지겠지 하고 지켜보았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볼수록 점점 악화만 되어 갔다. 그래서 아는 의사에게 연락을 해, 오늘 아침 갑자기 몸이 이렇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의사가 이야기하기를 “모든 병은 갑자기가 없어요. 이미 그 전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 밖으로 이제 나왔을 뿐 이예요” 라고 하였다.


우리가 볼 때에는 갑작스러운 것처럼 보였던 그 육체적 병의 문제도 이미 그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그 의사의 이야기처럼 영적으로 가시의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의 문제 역시 이미 그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곯은 상처가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를 제기하는 대상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간에 그 표면적 문제를 응답하기 전에 그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먼저 손을 뻗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일까?


1 단계는 기본적으로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부부 싸움에 있어서 대화를 안 하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상담 가들은 경고를 한다. 따라서 부부 싸움을 해도 말하면서 싸우도록 권하다. 말하지 않는 가운데 갇혀 있으면 성령이 역사 하실 공간이 없다. 리더의 역할은 바로 그 상처받은 심령 가운데 성령이 역사 하실 공간을 만들어 드리는 중간 다리 (bridge)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제 제기자가 말하는 가운데 성령이 치유하시기 시작한다. 문제 제기자가 이야기를 하다보면 실제로 속에 담아 놓았던 이야기를 충분히 하게 된다. 이때는 리더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그의 이야기 가운데 성령이 역사 하신다. 답변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충분하게 들어 주라. 하지만 만일 내가 그 사람의 이야기와 상처를 들어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거나 공격한다면 그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 하실 수 있는 자리를 내가 막아 놓게 됨도 기억하라.


2 단계는 그 이야기에 공감을 표현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아픔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함께 그 상황을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나도 처했다면 충분히 그렇게 상처를 혹은 그런 반응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공감의 표현이다. 그런데 많은 부분에 있어 이 부분에 리더들이 실패를 한다. 일단 상대방이 믿음의 문제, 혹은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하면 리더는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분이 상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리더십과 혹은 자신의 공동체의 명예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심하면 어떤 사람은 들으면서 얼굴까지 상기되고 가슴에서 불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이야기는 들어도 무엇인가 상대방의 이야기의 모순이나 허점을 찾는데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는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대부분 논쟁으로 빠지게 되고, 결국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더 이상 내 놓지 않도록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눈을 잘 쳐다 보라. 그리고 대화의 중간 중간 공감의 표현을 해 주라. 예를 들면 “정말 힘들었겠네요” “정말요?” “저도 가슴이 답답하네요” “저도 느껴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되었어요” “그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풀어야 할 부분이에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가 책임을 느껴요” 등등.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 그리고 상대방의 이야기 속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나 혹은 과장하여 표현하는 것이 있어도 넘어 가라. 왜냐하면 그 과장의 초점은 문제를 강조하는데 있기에 그 문제를 치유하기 시작하면 그 문제도 사그라지고 만다. 왜 그것을 과장 하냐 하고 파고들면 오히려 더 상황을 악화시키게 된다.


3단계는 그/그녀의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기도하라. 그리고 그/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주님께 드리라. “저도 느껴요” “제 마음도 참 아프네요” 등등의 공감을 표현한 후에 만약 상황이 허락을 한다면 “ 괜찮으시면 제가 잠시 기도해도 될까요?” 하고 물어보고 상대방의 상처를 놓고 기도하라. 예를 들면 “주님, 누구 형제/자매 님의 아픔이야기 들으셨죠? 이야기로 나누지 못한 저의 마음 한가운데 있는 많은 아픔들 하나님 아시지요? 간절히 소원하옵기는 저의 아픈 가슴을 치유해 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일어나 승리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끄러운 모습, 저 자신부터 비로소 변화시키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세요. 오늘 우리의 만남을 주님이 계획해 주셨음을 감사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두 번째로,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비판적 문제 제기에 대한 처신은 적절한 응답을 통한 영적인 성숙으로의 안내이다.


가능한 적절한 응답은 믿음의 갈등을 많이 해소 시켜 줄 뿐 아니라 새로이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한다. 기독교 교육학자 존 웨스터 호프 3세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성장 단계가 기본적으로 4단계로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단계는 경험적 단계이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 이 교회를 다니는지. 이 교회 목 사가 설교는 잘하는지, 성가대가 잘하는지, 나를 알아주는지 등등 교회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단계이다. 교회 좌석으로 본다면 맨 뒷줄에 앉아 교회를 쳐다보고 탐색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둘째 단계는 귀속적 단계이다. 교회의 맨 뒷줄에 앉아 교회와 목사, 성가대, 사람들을 탐색하면서 나쁘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맨 뒷줄의 좌석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와 앉게 되고, 교회 부서든, 아니면 활동자리에 참여를 하게 된다. 심지어는 임원까지 맞아 적극적으로 섬기게 된다. 교회가 익숙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셋째 단계는 이성적 단계이다. 이렇게 교회에 익숙해져서 여러 모양으로 참여하여 섬기다 보면 외적, 내적이든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개인적인 삶의 문제와 더불어 영적인 시험이 찾아오게 된다. 예를 들면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이 지고, 열심히 하면 할수록 책임감을 가지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와서 사람들이 불평만 늘어놓을 때, 지도자가 격려에 인색할 때, 기획 안이 지도자에 의해서 거절될 때 등… 이러한 외적 문제와 더불어 개인적 삶의 문제까지 겹치면서 영적인 시험이 찾아오게 되고, 그리고는 근본적인 신앙의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정말 구원의 확신이 있어 이렇게 열심히 섬기는 것인가?” “믿음이 무엇인가?” “교회 섬김이 믿음인가?” “교회가 그럴 수 있는가?” 등등 수없이 많은 신앙의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그런데 웨스터 호프 3세에 의하면 미국 교회의 젊은이들이 이 단계에서 대답을 얻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 현재 미국교회는 허리 없는 호리병의 모양과 같은 교회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넷째 단계는 고백적 단계이다. 그러면서 웨스터 호프는 이 이성적 단계에 교회가 응답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믿음은 근본적인 믿음의 회의 질문의 단계를 지나 이제는 적어도 주위 환경으로 인해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에 흔들리지 않는 고백적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웨스터 호프 3세의 이론은 수없이 많은 신앙의 성장 이론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사람들의 신앙성장 변화가 그의 이론처럼 다 동일할 과정을 거치게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고백적 단계에서도 여러 가지 신앙적 단계가 나타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기초적으로 그의 이론은 초신자들이 교회에 적응해 적어도 환경으로 인해 근본적인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신앙의 기초 단계로의 변화 과정을 체계화하는 점에서 어느 정도 타당성을 주고 있다.


존 웨스터 호프 3세가 그의 이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성적 질문은 그 문제 제기자의 신앙을 한층 더 성숙한 길로 인도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거나 반대로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하는 신앙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리더는 제기되는 가시 같은 질문들에 대해 피하거나 대적(against) 하기보다는 겸손하면서도 적절한 응답(confrontation)을 할 준비도 필요하다. 상한 마음을 돌아보는 데서 한 발자국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 응답을 통한 영적인 성장(spiritual transformation)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성적인 단계의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질문에 답을 줄 때 정확한 답을 줄 수 있는 문제도 있는 반면에 너무 큰 문제 (big question)들 일 경우는 답을 주어도 답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왜 그리스도인이 잘 되어야 하는데 고통을 받나요?” “ 왜 새벽기도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나요?” “왜 선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악을 만드셨나요?” 그런 면에서 리더는 그 질문이 어느 범주 안에 들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한다. 가장 기초적으로 이 질문이 상처에서 나온 질문인가? 둘째: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인가? 셋째: 대답을 해 주어도 답이 시원하게 되지 않는 질문인가? 등의 간단한 범위 안에서 판단을 해야한다.


중요한 것은 상처 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상한 마음의 상처를 안아주고, 어루만져 주고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해답인 경우가 많다. 이때의 응답은 오히려 변명으로밖에 혹은 상처난 사람이 잘못 이해했다는 변론밖에 결과가 나오지 않게 된다. 그럴 경우 상처를 더 깊게 만들게도 한다. 만일 제기한 질문이 간단한 지식적 문제일 경우는 명확한 답을 주면 쉽게 해결이 된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르는 경우는 “나도 그 질문이 궁금했는데… 하면서 나도 물어봐서 알려 주겠다”고 대답하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알려주면 된다. 그런데 만일 제기된 질문이 대답하려 해도 대답이 되기 어려운, 대답을 해 주어도 납득하기가 쉽지 않은 큰 질문(big question)일 경우는 “Big Question 에 Small Answer를 준다고 해서 그 답변을 채워 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럴 경우는 지극히 개인적 입장에서의 내가 개인적으로 그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경험 이야기를 간증으로 하는 편이 더 낫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천주교처럼 한 지역에 하나씩만 있으면 될 텐데요…” “왜 그렇게 교인들이 싸움을 많이 하나요? 교회 다니면 무언가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질문들을 분석할 때 어느 범주에 드는가? 상처가 있는 질문인가? 간단히 정보를 요구하는 궁금해하는 질문인가? 아니면 대답해도 대답이 시원하게 들리지 않는 큰 질문인가? 사실 이러한 질문은 상처가 있는 질문인 동시에 대답도 어렵고, 대답해도 납득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상처를 안아 주는 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나 자신이 그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경험과 간증으로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좋다.


나의 경우는 이렇게 대답을 하곤 했다. 나 역시 그러한 질문을 신학교 다니고 있던 86년도에 가지게 되었다. 그때 당시 한참 잠실과 가락동의 아파트 단지들이 개발되고 있었을 때 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다가 밤에 산책을 나와 주위를 돌아보는데 조금 과장해서 근 100m 안에 빨간 십자가가 14개가 있었다. 심지어 어느 교회는 1층 교회 2층 다른 교단의 교회 그리고 지하는 유흥업소였다.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집에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고는 얼굴이 상기가 되어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때 아버지가 가만히 듣고 계시더니 말씀을 하셨다. “이규야! 너는 신학생으로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 너는 이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대학가 앞에 가득 메워있고, 그것도 모자라 늘어만 가는 유흥업소와 창녀촌에 대해서는 한번도 비판을 한 적이 없었어. 지금 네가 비판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 된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지, 만일 교회가 교회된 사명을 잘 감당하면 그러한 교회는 이 땅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냐?”


이 말씀을 하시는데 나는 그 순간 이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신촌 로터리를 중심으로 있는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 홍익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는 신수동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 동네는 유흥업소와 창녀촌, 그리고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우리 동네 가정집을 사서 룸 살롱으로 바꾸고 있는 상태였다. 아버지의 말씀은 나의 마음에 내 편견을 볼 수 있게 만드신 설득력 있는 답변이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러면 왜 그렇게 교인들이 쌈을 잘 하냐? 차라리 세상 사람들은 싸움을 하더라도 술 먹고 바로 푸는데… 교인들은 한번 터지면 끝이더라!” 하면서 다시 공격을 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오늘 교회도 죄인을 위해 있는 것이야. 교회는 죄인의 공동체지. 사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도 없어. 그리고 사실 성질이 더러워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든 도둑이든 강도든 그들이 교회에 마저 올 수 없다면 어디서 그들의 삶이 변화 될 수 있겠니?” 하셨다. 그리고는 “그런데 죄인들이 교회에 찾아오자마자 바로 바뀌면 그것처럼 좋은 것이 없지만 어디 그러냐?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돈 만원을 쓰지 못하고, 칼로 사과를 깎지 못하듯이 시간과 때가 필요한 거야. 성령께서 그들에 맞게 때에 따라서 새롭게 하시지.”


아버지의 이러한 적절한 답변은 당시 신학생인 나의 비판적 고민을 새로운 영적 성숙의 길로 인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거나 그와 같은 문제를 이야기했을 경우 아버지와의 대화에 대한 나의 간증은 정답은 아니었을는지 몰라도 실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했던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가운데 알게된 분명한 것은 그룹 원들이든 믿음의 경험이 없던 사람이든, 혹은 상처 난 그리스도인이든 그들이 제기하는 비판적인 질문들은 성령께서 그들을 새로운 영적인 성숙의 자리로 도약하도록 허락하여 주신 기회임을 리더는 보아야 한다. 이때 리더의 할 역할은 바로 그러한 성령이 새롭게 만지시고 빚으시고 계시는 그 환경을 겸손히, 지혜롭게 잘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 형제/자매로 하여금 새로운 영적 차원의 자리에 서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적인 변화와 성숙은 모든 순간에 일어난다. 예배를 드릴 때도 기도를 드릴 때도, 말씀을 공부할 때도, 부흥회에서도, 등등 성령의 역사는 어느 순간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것은 영적 성숙을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어느 순간에 “날카롭고, 가시 같은 비판성 질문을 가진 형제나 자매가 다가올 경우는 오히려 그들을 불편해 하고, 마치 불평분자인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존 웨스터 호프 3세의 지적처럼 이 단계는 새로운 영적 성숙을 위해 누구든지 지나야 하는 관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성령께서 그 형제/자매를 영적으로 더욱 굳게 세우셔서 동역 하시려는 계획이요, 그 다리(bridge)로 나를 선택하여주신 축복의 기회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나의 복음의 동역 자로 붙여주셔서 나의 복음의 사역을 더욱 열매 맺게 하시는 기회주심을 보아야 한다.


지금 누군가 날카로운 그리고 가시 있는 비판의 질문을 던지고 있나요?
1.문제의 분별을 위한 영 분별의 능력을 위해 기도하세요
2.상처 난 마음의 문제는 상한 마음을 안아 주세요. 아픔을 같이 하세요. 그리고 그 상처를 주님께 드리는 기도를 드리세요.
3.간단한 지식의 문제는 분명하게 그 근거를 찾아 알려 주세요. 만일 현재 모르면 “나 도 그 질문이 궁금했는데…” 하면서 나도 물어봐서 알려 주겠다고 대답하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알려 주세요.
4.Big Question에 Small Answer를 주지 마십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간증이 보다 효과적입니다.
5. 이 모든 이성적 질문들이 그 형제/자매에게 성령께서 주신 영적 성숙을 위한 기회임을 잊지 말고 소중히 다루세요. 그 가운데 변화의 영적 변화의 경험과 동시에 리더의 좋은 동역자를 얻게 될 것입니다.

[조경호]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구약의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봉사할 때 신발을 신지 않았다. 발은 땅을 밟고 몸은 여호와를 섬겼다. 맨발의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성하는 땅과 하늘,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다.


‘ 순결’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삶에서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선택하는 ?거부와 선택?의 투명성을 뜻한다.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성 그리고 말과 생각과 행위에서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거룩, 곧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순결과 세속화란 단어는 오늘도 서로를 적대감으로 마주보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서로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나 사렛대학교 백위열 총장은 “…어느 독일 작가는 유대인 학살이 시작됐을 때 위대한 독일교회는 침묵을 지켰다고 저술했습니다. 곧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존립 가치와 합리성을 잃었으며 결국은 흉포한 히틀러 독재에 의해 통치되는 힘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계의 교회는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를 드리거나 시간과 물질의 바탕이 없이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걸까요? 교회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일부분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만 충실한 나머지 세상의 고통과 공포는 외면한 채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잊고 있는지 진실로 반성하지 않으면 세상과 타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평화로운 내일을 위해 각 개인의 적합한 역할을 찾아서 반성하고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라고 크리스천 논단에서 교회의 세상에 대한 책임을 쓰고 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조롱받는 괴상한 단체가 되어버렸다.


순결은 거룩성이다


순 결은 세상에 대한 의도적인 고립이 아니며 술과 담배…등 원시적 도덕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순결?은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4-16) 말씀하신 구원의 부르심을 자아 실현하는 삶으로 ?거룩의 실현?에 있다.


초 대교부였던 제롬은 “거짓된 거룩함은 두 배로 악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인은 이중적이다. 자아 속에도 이중세계를 갖고 있으며 (옛사람과 새사람, 육과 영..) 살아가야 할 삶의 세계도 이중적이다 (죄와 하나님, 세상과 하나님나라..).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삶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주님께서도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지적하셨다. 하나를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를 경멸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거룩은 버리는 능력이다.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죄와 세상과 세속적 사욕을 버릴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해야만 한다. ‘거룩’은 ‘하기오스’ 구별하다, 세속적이고 비 신앙적인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구별되다 는 뜻이다. 구별은 버리는 능력이다.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탈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24:3-6). ‘누구며..누군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중심진리를 깨닫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버리는 능력’을 찾아내야만 한다.


싱 가포르 리관유 전 총리는 “중국을 막기는 이제 어렵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에 와서 장학금 받으며 공부하는 중국 유학생들이 각 학교에서 수석과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중국의 잠재력과 고도성장과 국세확장이 더 거세질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이미 11%.. 한국의 4배에 달한다. 2002년 자동차 생산은 한국을 추월하여 세계5위 자리를 빼앗았으며, 철강과 조선 업도 위협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지난 4년 반 동안 계속 낮은 수치의 성장을 계속하면서 뒷걸음질치고, 청장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정부는 경제재건을 위해 진실하게 고민하고 바른 정책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로마서 강해


2003 년 미국 코스타 오전 성경강해 시간에 로마서를 강해한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 로마서는 복음의 교과서였다. 로마서엔 거룩에 이르는 복음의 바른 정책에 대해 논리적인 교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알지 못하고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와 하나님의 이중 세계 속에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롬6:10-11)를 만드시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  SEX. 첫째 시간의 주제는 도덕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성적문제는 도덕성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을 버린 인간을 심판하시는 죄의 유배지가 ‘성적욕구와 열등감’이었기에 우리는 먼저 죄의 본질적 속성부터 이해 할 필요성이 있었다. 구원과 순결을 말하면서 먼저 성적욕구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정체성, 문화의 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에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  SIN. 로마서의 중심주제인 죽음과 부활의 교리는 죄와 하나님의 이중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죽음과 부활, 죄와 하나님. 4개의 단어의 관계와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께 대한 부활 신앙이 인격화된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 세상 속에서 세속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  SUCCESS. 세상은 성공주의에 지배되고 있다. 세상 속에서의 진정한 성공에 대한 가치관 회복과 성공을 이루어 가는 제자의 자아상을 원리적으로 제시했다. 죽음과 부활, 나와 그리스도 그리고 육과 영의 복음의 전개를 이해해야만 한다.


오 전 성경강해는 행위 적이고 도덕적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복음의 능력. 복음의 근본 원리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다. 독일의 변증 철학자 헤겔은 삶의 인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끊임없이 교양을 채우고, 깊은 사색을 반복하면, 인식의 진보는 마지막 종착점으로 절대정신에 이르게 된다. 인식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 자기 계발이다.“ 로마서를 개인적으로 공부하며 복음의 절대정신에 이를 때까지 반복해서 학습과 깊은 사색을 반복할 필요성이 있다.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에게 첫 사역의 기회를 제공한 도시였다.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8-10)에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작된 첫 번째 교회였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 번 방문했다. 신학자 사우는 “이 서신은 바울 사도 자신의 가슴에 달린 창문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자신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그의 창문을 통해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신학자 본 소든은 “우리는 이 서신을 읽으면서 매우 거룩한 땅을 밟게 된다. 빌립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의 마지막 친서이다”라고 빌립보서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빌립보서를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한 적극적인 생활과 인격을 배울 수 있다.


제1장. 중심주제: 복음


우 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으며(롬1:16), 세상 한 가운데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거룩한 삶을 연출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며 완성인 복음에 대해 새로운 삶을 연출하는 자세가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작이다. 빌립보서 1장에 ?복음?에 대한 세 가지 생활방식을 가르치고 있다.


-  1: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1. 복음의 교제(1:3-11) 그리스도의 심장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 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1:3-5).


빌 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기쁨과 즐거운 추억을 남긴 교회였다. 바울은 10여 년 전을 되돌아보며 미소짓고 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뻐했다. ‘생각’ ‘므네이아’ 즐거운 회상을 뜻한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은 ‘첫날부터 이제까지’(5절) 복음 안에서 지속적인 교제를 나눴다.


“너 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6-8).


그 들의 교제는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7절)에 서로의 사역과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동참하는 교제였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동정- 동역?의 협력의 교제를 가졌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동정하고, 소망을 주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았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빌립보 교회와의 지속적인 교제 때문이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를 섬겼다.


헨 리 나우엔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일정한 가치에 따라 판단된다. 고용자는 피고용자를 지식과 기술과 능력으로 판단한다. 은행과 상점은 신용에 따라 사람을 대우한다. 친구는 공통된 관심사를 기초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부모가 자기 자식의 지능지수가 40이라고 해서 다른 자식과 맞바꾸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회가 버린 사람들 곧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 창녀들의 친구이셨다.


사랑과 순결의 방정식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 “사랑이 계속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자신이 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내 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11).


바울은 세 가지를 위해 기도했다.
① 사랑이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해지도록 기도했다.
② 사랑으로 위선된 삶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했다.
③ 사랑으로 의의 열매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진실하여’ ‘밀칠 하지 않은’ 고대사회는 도자기 산업이 성행했다. 가장 좋은 제품은 두께가 얇은 도자기였으나 굽는 동안 가는 금이 생기곤 했다. 가는 금이 간 도자기를 밀초로 몰래 칠해놓고 도자기를 파는 상점들이 많았다. 햇빛에 비춰보아야 장사꾼이 밀초로 틈을 메웠는지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심장만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능력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2. 복음의 진보(1:12-26). 그리스도의 이름


바 울은 14년 동안 3차례 전도여행을 다녔으며, 7년 간 감옥생활을 했다. 바울은 전도자로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야 했다. 예루살렘에서의 불법적인 체로, 로마의 반역자로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항해, 로마의 투옥..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감옥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진보’ ‘프로코페’ 앞서가며 길을 만들다, 뒤에 따라오는 군대를 위해 길잡이 표적을 세워 놓는 것을 뜻한다.


미 션 인디아 존 데브라스 회장은 인도 땅에서 자행되는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으로 오히려 수천의 인도인들이 하루 3천 여 명씩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핍박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중생과 헌신의 부흥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흥분했다.


바 울이 로마 감옥에 갇힘으로 감옥에 있었던 로마 시위대 안에서와(13절), 시위대 밖에서 복음의 진보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바울을 보초 섰던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었을 뿐 아니라 시위대 밖에서는 두 부류의 반응이 더욱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① ‘투기와 분쟁,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외모로’ 복음을 전하는 파벌의 전도자들이 있었다(15,17절). 교회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명성과 영향력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② ‘착한 뜻..참됨과 사랑..’ 바울에 대한 동정심과 복음전파의 동역자 정신으로 바울의 빈자리를 채워준 전도자들이었다.


세계선교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모든 종족마다 자기 언어로 된 성경이 번역되어야 한다. 전 세계 7천여 다양한 언어 가운데 아직 3천여 종족은 성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선교사가 없어도 자국어 성경만 있으면 토착교회설립이 가능하고 건강하게 부흥할 수 있어서 성경번역은 매우 중요한 선교사역이다. 선교사 파송과 함께 성경번역을 위해서도 중보기도와 필요한 은사와 자질을 갖춘 사람들의 헌신이 요구된다.


전도의 순결성


바 울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경쟁심이나 하찮은 시기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열등감과 시기심은 영적인 능력을 파괴한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 그리스도께 바쳐진 삶이 순결하다. 세상을 향해 복음전도의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이 순결하다. 전도는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생명의 사역이다. 세상에 복음을 증거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역은 없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그리스도의 목표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날마다 전진해야 한다. 복음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전진해야 한다.


캐 나다의 약사 엔드류 스타렛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무관심의 죄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예수께서 재림하셨을 때 약 팔고있을 자신의 모습 생각하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사업과 집을 정리하고 수단내륙선교회에 기증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친척들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다는 짤막한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결혼과 안식년도 포기하고 41년 간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았다. 전도의 열정이 그의 삶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모든 부족에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일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기회가 된다면 죽는 것은 더 나은 기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중간지대에서 바울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그의 순결의 영성을 우리에게 자세하게 고백하고 있다.


“나 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0-24).


죽 음은 위대한 모험 “기독교 신앙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우리는 핵심을 잃게되며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주변의 것에 불과하다” 존 스토트의 말이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 고정된 삶을 살았다. “살든지 죽든지..” 삶과 죽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 외에 어떤 삶의 계획도 없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삶 전체를 점령하셨다. 최상의 순결과 능력의 삶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모든 것이 되셨고 모든 것을 지배하고 계셨다.


“죽 는 것도 유익함이라” ‘유익’ ‘이익, 소득’ 죽음은 완벽한 이익이었다. 그리스도와의 영광스럽고 완전한 연합으로 가는 기회의 문으로 여겼다. ① “살든지” 감옥에서 석방된다면 주님과 세상을 위해 열매맺는 삶을 살 것이다. ② “죽든지” 죽음은 위대한 모험이며 여행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거할 소망 때문이었다. 바울은 ‘죽음이 훨씬 좋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벵겔도 고백했다. “나는 무엇을 살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


제18 회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 2연승을 했던 에티오피아 아베베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무명의 선수였다. 마라톤 경기 한 달 전 급성맹장염 수술을 하고도 그는 초인의 힘으로 우승을 이뤄냈다. 아베베의 연습장소는 산과 들이었으며, 운동화도 없는 맨발로 연습을 했었다. 도쿄올림픽 후 그는 11회나 우승을 했으나 자동차 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았다. “두 다리는 잃었지만 나는 아직 건강한 두 팔이 있습니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장애인 올림픽 썰매경주부분에서 또 다시 우승을 이뤄냈다. 오늘 우리도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천할 수 있는 강한 복음의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3. 복음의 신앙(1:27-30)


‘오 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라’ Manner of Life. 생활방식을 가져라. 너희의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서약한 사람답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폴리테스’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행동해야 한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들은 로마시민처럼 라틴어로 말하고, 라틴 풍의 옷을 입고, 로마인 신분에 집착했다. 로마시민이 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였다. 로마시민으로서 완전한 충성을 바치는 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다.


“오 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1:27-28).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이다. 바울은 일치와 협력을 열망하며 복음의 신앙을 위해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에게 싸움과 고난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참된 일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