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제 3 떡 소알에서 소돔까지 – 도시 지향적 인간형, 롯과 그의 아내

 

성경에는 정말 귀중한 것을 버리고 도시(都市)에 속한 문화와 향락을 좇아가다가 화를 당한 한 가정의 불행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 가운데 롯만큼 여러 번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고도 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인물도 드물다. 롯은 우상(偶像)의 도시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의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삶의 거처를 옮긴다.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과 일찍 아버지를 여읜 롯 사이에 부자지간과 같은 정으로 맺어져 있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롯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도 간과해선 안 된다. 아무튼 그는 그 당시로는 드물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아브라함의 집에서 살게 되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모태신앙의 축복을 누린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기근을 피해 아브라함과 롯이 애굽으로 이주했을 때, 롯은 이방의 도시문화가 가져다주는 풍요와 안락함의 단맛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곳에서 롯은 청년 시기를 보내며 연애를 하고 아내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위기를 넘긴 아브라함은 오히려 바로의 궁에서 수많은 소유물, 즉 육축과 은금을 이끌고 애굽을 나오게 된다. 그러나 소유물의 넘치는 풍요로 말미암아 롯은 아브라함과 다투게 된다. 육축으로 인한 하속들의 다툼이 심해지자 마침내 아브라함은 친아들처럼 키워왔던 롯과 갈라서는 길을 택하고 만다. 행운이라 생각되었던 물질의 축복이 오히려 화근이 되고만 것이다. 지금도 재물로 인해 친밀했던 가족 사이에 금이 가고 때론 원수지간으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골육간에 헤어지는 아픔을 삼키며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조카에게 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먼저 주었을 때, 롯은 애굽 시절을 회상하며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리고 요단 동편의 성읍을 선택한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롯에게는 이미 삼촌에 대한 양보심은 뒷전이었고, 메마른 땅 가나안보다도 물이 넉넉히 차 있는 비옥한 땅 요단 들판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롯이 요단 들을 바라보았을 때의 심정을 표현하여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10)고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그의 내면에는 애굽의 피난 시절 누리던 도시의 안락함과 화려함에 대한 그리움이 잠재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그의 눈을 자극했던 것은 바로 도시 생활에 대한 향수였던 것이다. 하루 속히 지긋지긋한 유목민 생활을 벗어나 독립하여 도시로 가서 살자고 충동질하며 옆에서 부추긴 것은 롯의 아내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들의 눈에 처음 들어왔던 것은 작은 성읍 소알이었다. 비록 작은 도시였지만 도시 생활을 시작한다는 기쁨에 젖어 그들은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났다. 더 크고 화려한 도시를 사모하던 그들은 요단 평지에 속한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죄악의 도시 소돔성으로 들어가고 만다.



인간적인 꾀로 당시에는 자신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 준 듯이 보이던 선택이 세월이 지나며 결국 어리석은 선택이었음이 판명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롯은 요단 동편을 택한 후 거친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도시생활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게 되었다. 당시의 대도시요 화려한 문화도시 소돔으로 들어간 그 가정은 뜻하지 않은 전화(戰禍)에 휘말리게 된다. 창세기 14장은 그 당시에 벌어졌던 여러 도시간의 치열한 전쟁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당시 시날 평야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종주국 엘람의 그돌라오멜에 반기를 들고 반역 전쟁을 일으킨 다섯 도시가 있었다.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이 다섯 도시가 더 이상의 조공을 거부하며 독립 전쟁을 일으킨다. 이에 맞서 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 네 도시가 반격을 가하여 반란군과 연합군 사이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은 단순한 육적 전쟁이 아니라, 셈의 장자였던 엘람(10:22)을 통해 믿음의 정통성을 이어오던 종주국에 대해 맞서고자 하는 영적 반역 전쟁이었다. 그 결과는 반란군의 대 참패로 끝나고 소돔왕 베라는 재물과 사람을 모두 빼앗기고 롯은 전쟁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된다.



그 당시 전쟁 포로에게 내려지던 풍습에 따라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롯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조카 롯이 당한 비운의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조카를 구하기 위해 삼백 십팔 인의 훈련된 부하를 이끌고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포로와 재물을 전부 찾아온다. 이때 만일 롯이 정신을 차렸다면 죄악의 도시 소돔을 떠나 아브라함과 화해하고 재결합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롯은 여전히 소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박한 죄악의 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소돔을 심판하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게 된 아브라함은 자식처럼 키운 롯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중보자로서 하나님과의 끈질긴 설득 작업에 나선다. ?만일 소돔 땅에 의인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 도시를 멸하시겠습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의인들을 위해 그 도시를 구원해 주심이 마땅치 않습니까?? 라고 질문을 던졌던 아브라함은, 물론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대답 앞에 자신을 잃고 의인의 수를 감소시킨다. 사십 오, 사십, 삼십, 이십, 십까지 내려가던 중 그 대화는 갑자기 끝이 난다. 많은 경우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한 소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소돔에 의인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몇 명이? 아홉명? 다섯명? 아니면 한 명? 의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셨을까? 그보다 롯은 과연 의인이었는가? 그는 의인이었기에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대화 가운데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소돔 안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음을.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대화를 진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롯을 구원해 주신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통해 베푸신 은혜일 뿐이다.



창세기 19장은 심판이 임박한 소돔성의 전야에 전개되는 롯의 가족을 둘러싼 삶과 죽음의 변주곡을 숨막히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소도미스트(sodomist, 소돔사람들, 곧 동성연애자)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온갖 음욕과 육욕이 들끓는 남색(男色)의 도시 소돔에서 롯은 최후의 전령으로 파견된 두 천사를 부지 중 나그네로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두 청년이 롯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은 소돔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그의 집을 둘러싸게 된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존귀성을 찾아보기 힘든 소돔인들이 두 나그네를 자신들의 육욕의 재물로 내놓으라고 아우성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소돔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머리 위에 머무르며 얼마나 오래 참아왔던가를 엿볼 수 있다.



도대체 롯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를 가리켜 성경은 의인이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벧후 2:7-8) 롯은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자란 사람이다. 물론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워 알았던 사람이다. 그의 마음에는 믿음으로 인한 선한 양심이 있었다. 그랬기에 소돔 땅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온갖 음란한 행실로 인해 그의 심령이 상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롯의 도덕성과 성결성을 크게 해치고 손상하였을 것이다. 두 천사를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폭도들에게 정혼한 자신의 두 딸을 대신 내어주겠다고 제의를 하는 아버지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일 수가 없다. 믿는 자라 할지라도 음란의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 그의 영이 심한 상처를 입게 되어 양심이 무뎌지게 마련이듯이 이미 롯의 양심과 판단력은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다.



마침내 천사들에 의해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성읍을 곧 떠나라는 권고와 함께 그에 속한 모든 식구들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진다. 소돔성을 떠나라는 구원의 메시지는 롯의 사위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진다. 정작 롯 조차도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결단을 못 내리며 머뭇머뭇 지체하다가 마침내 새벽 동이 틀 시간이 되고 말았다. 곧 시작될 유황불의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은 은총을 더하셔서 천사들이 강제로 롯과 아내 그리고 두 딸의 손목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는 황급한 명령 앞에서 롯이 보인 태도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린 그 순간에 있어서도 롯은 머뭇거리며 작은 성읍 소알로 자신들의 피신처를 삼게 해 달라고 안간힘을 쓰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19:17-22) 작은 성읍 소알은 과연 어떤 도시인가?



롯은 산으로 피하라는 명령을 두려워하여 작은 성읍 소알로 자신의 가족이 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절히 구하였다. 소돔을 창졸지간에 떠나야했던 롯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신뢰보다는 최소한 소알 정도의 도시가 되어야만 자신들의 가족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앞서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어 그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어리석은 자의 기도이지만 간청하는 기도를 뿌리치지 않고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마치 창세기 4장에서 살인자 카인의 간청을 들으사 그에게 표를 주시고 생명을 구원토록 하시는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기억하셨음은 물론이다.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그 질주의 순간에도 롯의 아내는 두고 온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아 비극적인 소금기둥이 되고 만다. 롯이 두 딸과 함께 소알에 들어서는 순간 해가 솟았고 유황불이 비같이 하늘에서 쏟아져 소돔과 고모라는 마침내 멸망당하고 만다.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옹기점 연기처럼 치밀어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에 피어올랐던 버섯구름의 모습이 아니었을지….



창세기 19장을 통해 보면, 이 날 멸망당한 도시가 소돔과 고모라 뿐인 듯이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신명기 2923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멸망당한 성은 아드마와 스보임을 포함한 네 개 성읍이었다. 이 도시들은 창세기 14장에서 종주국 엘람 왕에게 영적 반란을 일으켰던 다섯 도시 중 네 도시였고, 오직 소알 만이 그 심판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소알 역시 이날 멸망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도시였으나 롯의 간청으로 말미암아 한 도시가 구원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천사들이 산으로 피신하라고 권할 때는 절대 못 가겠다고 버텼던 롯이 가까스로 얻은 새 삶의 거쳐 소알을 버리고 스스로 다시 산으로 도망가고 만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아 멸망당하는 것을 체험한 롯은 비슷한 죄 속에서 살아가는 소알 역시 언제 멸망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아야만 했던 카인의 심리 상태……. 이미 롯에게는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못하는 카인의 불신앙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롯이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롯에게는 더 이상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두 딸과 함께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도시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 굴혈인(掘穴人) 되어 폐인과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던 그는 자신이 이미 음욕의 제물로 내어주었던 두 딸로 하여금 근친상간의 불륜을 저지르게 하여 인류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결국 처절한 멸망의 인생으로 끝을 맺고만 롯……, 도대체 그의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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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KBS 인간극장의 책임 PD로 이름이 알려진 김우현 PD가 자신이 운영하는 버드나무(www.birdtree.net)의 촬영 제작진을 이끌고 취재차 연변과기대를 방문하였다. 그 일행 중 하나로 김동호 목사님의 둘째 아들 지열이가 함께 와서 우리 집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다니던 한동대학을 그만 두고 영화 제작에 꿈을 품고 한국종합예술대학 영화과에 다시 입학한 독특한 친구다. 그래서 그런지 예술적인 끼가 있어서 아내와 금새 잘 통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가 꾸며놓은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고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사모님은 파리에서 사는 것이 어울릴 분인데, 연길에 사시는군요.?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아내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는지 퇴근 후에 보니 얼굴이 시무룩해 있었다.



중국 생활을 시작한 이후 아내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을 채워 주지 못하는 연길의 열악한 문화 환경이었다. 간혹 자기는 뉴욕 맨하탄에서 살아야 할 시티 걸(city girl)인데, 남편을 잘못 만나서 이곳까지 왔노라고 투정을 하곤 했다. 유일한 문화 생활이라고 해야 고작 틈을 내어 영화를 빌려 보는 것인데, 미국 영화는 왜 그리 보스톤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많은 지. 영화를 보다가 보스톤 중심가와 찰스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나오면 다시금 옛 향수에 젖어서 눈물을 글썽일 때가 많았다.



보스톤의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는 금요일 저녁의 부부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말씀으로 한창 깨우치던 때라 그 시간이 꿀처럼 달고 기다려졌다. 더욱 좋았던 것은 성경공부가 끝나고 다과를 나누며 밤늦게까지 모여 앉아 담소하며 주말을 만끽하던 그 여유로운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학업이나 스포츠, 세상 정치 이야기로, 또 아내들은 자기들만의 가정 화제로 모여 앉아 수다(?)들을 떨곤 했다. 유학생 아내들의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사와 화제거리는 남편의 학위가 끝난 후 어디로 직장이 구해지는가 하는 것과 돌아가기 전에 미국서 어떤 살림살이를 장만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부인들은 어떻게든 남편이 서울에 직장을 구하기를 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자매가 힘주어 하는 이야기가 우연히 귀에 들려왔다. ?나는 대전까지는 참을 수 있어도 그 이하는 절대로 안돼.?라고 했던 것 같다. 아마 농담으로 한 것이었겠지만, 그 한 마디 말속에 크고 화려한 도시에서 살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던 것 같다. 다름 아닌 롯의 아내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와 아내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우리 부부야말로 롯과 롯의 아내의 삶을 살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런 사람을 어찌하여 하나님이 이곳까지 끌고 오셔서 강제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을 살게 하셨는지은혜일 뿐이다. 롯의 아내만큼이나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여자. 온갖 세간으로 우아하게 집안을 꾸미며 살아가고 싶어했던 여자. 그리고 고급 백화점에서 자기 맘에 드는 의상으로 마음껏 쇼핑을 하며 살고 싶었던 그녀가 연길이라는 새장에 갇혀버린 것이다. 백화점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생일 선물을 사줄 것이 없어서 중국식 주방용 식칼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 먼지 바람과 연기에 휩싸인 추운 겨울 거리에 겹겹이 입은 내복과 파카 이외에는 아무런 옷이 필요 없는 도시. 그 새장 안에 갇혀서 아내는 보스톤을 꿈꾸며 눈물 흘렸다. 그토록 화려한 도시의 문화 생활을 그리워하던 아내도 십년이라는 세월 앞에서 나이가 들어가고 점차 체념의 세월을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지고 왔던 살림살이와 옷가지들을 지난 10년 간 계속 줄이고 버리고 남을 주는 바람에 이제는 단촐한 세간과 여기 저기 고장난 전자제품들 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 집에 오면 이상하게 까페 분위기가 난다고 한다. 그것은 안타까움으로 배어있는 아내의 문화적 체취일 뿐이다.



화려한 연주자로 대형 교회의 파이프 오르가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던 아내. 독주회와 청중의 박수갈채에 익숙하고 바하와 오르간이 우상이었던 아내에게 연길 생활은 그녀가 원하던 음악과 문화를 빼앗아 갔다. 피아노 앞에서 딩동거리는 반주자 양성, 유행가를 가르쳐야 하는 수업시간, 초라한 키보드로 반주를 하는 예배 시간, 그 모든 것이 괴로웠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하게 학생들은 감동을 받는다. 예배가 끝나면 속도 모르는 분들이 그녀에게 찾아와 반주에 은혜 받았다고 진심으로 인사를 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내는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그 세월이 이제 10년이 흘렀다. 어느 날 저녁, 아내를 위하여 이웃에서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를 빌려와 함께 보았다. 홀러코스트의 잔혹한 장면에 눈쌀을 찌푸리던 그녀는 간간이 흘러나오는 쇼팽의 녹턴 피아노 선율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끝까지 영화를 보았다. 클라이막스에서 자신이 학생 시절 가장 잘 치고 좋아했던 곡을 주인공이 치기 시작했다.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을 무엇에 홀린 듯이 듣고 있던 그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져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양 손가락을 펴서 내려다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피아니스트도 오르가니스트도 아니라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어느새 변해버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자각하고 울음이 터진 것이다.



그러던 아내를 지난여름 아주 오랜만에 보스톤에 데려갔다. 고색창연한 아치형 교회 건물과 현대식 빌딩이 조화를 이룬 보스톤의 아름다운 시가지는 여전히 청명한 하늘 햇살 아래서 신비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보스톤이었기에 아내가 오랜만에 마음껏 만끽하기를 내심 기대하였는데이상하게도 아내의 반응이 신통치가 않았다. 보스톤 이야기만 나와도 가슴이 설레던 그녀가 정작 보스톤 땅을 밟고서도 심드렁하여 별로 웃지도 않았다.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이제 하나님이 자기 마음속에 있던 보스톤에 대한 그리움마저도 거두어 가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옛날에 그녀가 다니던 학교는 한번 데리고 가야할 것 같아서 후배의 라이드를 받아 찰스 강변을 따라 보스톤 대학의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건물들을 찾아갔다. 어린 다니엘을 뒤에 태우고 차를 몰며 바삐 다니던 거리의 옛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피곤한 듯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그녀가 오르간 독주회를 했던 마쉬(Marshy) 채플 앞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그곳은 한번쯤 들려보아야 할 것 같아서 강제로 손목을 이끌고 차에서 내렸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엄숙한 채플 안은 십여 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고풍스런 분위기 속에 남아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이 전면을 감싸고 우리를 맞이했다. 중앙 복도를 가로질러 앞자리에 앉아 잠시 기도를 하였다. 옛날 아내가 이곳에서 연주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어린 다니엘을 데리고 뒤에서 기다리며 나도 모르게 웅장한 오르간 음악에 심취하곤 했던 시절. 그녀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조심스레 단위에 올라가 오르간을 기웃거린다. 아마 다시 한번 쳐보고 싶겠지그러고 있는데, 사찰 집사인 듯한 분이 다가와 아내에게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다. 아내가 자신이 이 학교 학생이었다고 이야기하며 오르간을 잠시 만져보아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였다. 흔쾌히 허락하는 너그러움그녀는 미끄러지듯 오르간 의자에 앉았다. 잠시의 침묵중국에 처음 이삿짐을 풀던 날 가지고 간 연습용 전자 오르간으로 정신없이 바하를 쳐대던 아내의 뜨거운 열정이 떠오른다. 그녀의 절반 인생과도 같았던 바하. 또 다시 바하를 치려나? 그러나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조용한 찬송가 반주였다. 잔잔하면서도 힘있는 찬송가를 메들리로 치고 있는 그녀의 성숙한 모습에서 십 년의 세월 속에 감추어진 눈물이 느껴졌다. 오르간 선율 속에 담긴 그녀의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 가슴에 안기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또 울지어떡하나걱정하고 있는데갑자기 뚝 그치며 그녀가 일어섰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에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꺽어버린 것이다. 안심안도눈시울이 붉어진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나오는데 그녀가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걸어가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아내가 그동안 가르친 제자들이 인근 도시마다 교회의 반주자로 활동하고 있고, 그 중에는 오르간을 배우고 유학을 다녀와서 중국에서 최초의 전문적인 오르간 반주자를 꿈꾸는 제자도 있다. 언젠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아내의 눈물이 씨앗이 되어 자란 그 제자들에 의해 중국의 교회가 부흥하고 곳곳에서 찬송이 차고 넘치는 그날이 왔을 때, 후세 사람들이 아내가 중국 교회 음악의 어머니였다고 기억할 날이 있지 않을까?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그녀의 거칠어진 손가락 마디를 꼭 잡아 주었다.



*



아브라함과 롯,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있었던 두 사람. 소유의 문제에 자유롭지 못하여 가는 곳마다 전 재산을 이끌고 다녔으며 재물로 인해 다투어 갈라지기까지 했던 그들. 창세기 18장과 19장에서 부지중 나그네를 대접하여 천사를 맞이하는 모습조차 두 사람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묵상 중에 천사를 맞이했다면, 롯은 사람들이 바삐 드나드는 성문 앞에 앉았다가 천사들을 영접한다. 그리고 그들은 천사들을 집으로 안내하여 떡을 대접한다. 아브라함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라가 고운 가루를 반죽하여 떡을 굽는데 비해, 롯은 직접 급히 무교병을 굽는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다른 사업(부동산 투기와 주식투자?)에 바빴던지 갑작스레 남편이 데리고 들어온 불청객이 불편하여 눈쌀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했던 모양이다. 두 가정의 식탁과 떡. 그러나 그들이 베풀었던 식탁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천사를 대접한 그 떡의 식사를 기점으로 두 가정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식사 후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아들 이삭의 잉태에 대한 축복의 예언을 받게 되지만, 롯과 그의 아내는 소돔 땅을 속히 떠나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 아브라함의 식탁은 풍요와 평화와 웃음이 넘치는 식탁이었지만, 롯의 식탁은 멸망을 앞둔 자가 지닌 불안과 조급함과 메마름의 식탁이었다.



롯과 롯의 아내…… 이들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가운데 보인 롯의 태도, 결국은 소금기둥이 되고만 롯의 아내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묶고 있었던 것은 재물과 도시에 대한 우상 숭배였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그들이 소돔으로 이사가게 된 배경 속에는 처음부터 화려한 도시 생활을 사모하며 남편을 부추기어 소돔으로 옮겨가자고 졸라대었을 롯의 아내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사라와 롯의 아내도 표면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아브라함의 가정은 남자가 그 가정을 이끌고 다녔다면 롯의 아내는 그 아내가 주도권을 쥐고 이사를 다닌 것은 아니었는지?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언 141)?는 말씀처럼 한 집안이 사치와 화려함을 좋아하는 여인의 어리석음 때문에 멸망의 길로 간 것이다. 그저 편안한 도시의 삶에 이끌리며 도시가 아니면 살기를 꺼려했던 롯과 그의 가족의 도시에 대한 우상 숭배가 그 가정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자신의 직장을 구하는 젊은이들이 직장 자체의 질과 삶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직장의 소재지가 어디인가에 따라 판단기준을 두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목회지나 사역지를 정하는 경우에도 이와 같은 도시 혹은 대도시 지향적 사고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롯과 롯의 아내, 그들은 다름 아닌 도시로 도시로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현대의 도시 지향적 인간들의 전형(典型)이다. 복의 근원 아브라함의 장막을 마다하고 멸망의 도시 소돔으로 나아간 롯. 시편 4920절에서 이르기를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도시의 삶 자체가 특별히 악하다든지 벽지(僻地)의 삶을 권하든지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돔성의 롯이 그러했듯이 향락적이고 부패한 도시문화에 무방비적으로 노출되어 오염된다면, 혹은 도시가 가져다주는 여러가지 안락함과 문화적 편이(便易)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리는 우상이 된다면, 그곳은 이미 중립지대에서 벗어난 곳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인정되고 선포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산촌 벽지이건 니느웨 성이건 우리는 마다하지 않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영원히 사모하는 하나의 도시가 있을 뿐이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2)>


[편집부]시애틀 지역 대학 청년 성경공부

무엇을 위한 보고인가?

‘다른 모임은 어떻게 하고 있지?’, ‘ 이 방법말고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이 정도지만, 다른 모임은 더 잘한다고 하던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코스타에서 만나는 많은 형제 자매를 통해 우리는, 효과적이고 힘있는 성경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또 그런 모임들이 각 지역에 많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실제로 어떤 모임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성경공부를 진행하는 지는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못한다.   이번 글을 통해, 각 지역의 몇 대학 청년 모임의 상황과 성경공부의 자료, 방법들을 나누고 서로 발전해 가는 계기가 되길 소원해 본다.


첫번째, 시애틀 지역


‘미국 서쪽 구석에 위치한 도시 시애틀(Seattle). 한인 사회 규모가 미국 5위권에 드는 적지 않은 도시이지만, 미주 코스타와는 큰 관련을 가져오지 못한 도시이다. 더구나, 각 보고에 의하면, 이 지역은 크리스챤의 비율이 가장 적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한인들도 교회 참석률이 지극히 저조한 지역이竪?하다. 시애틀에는 University of Washington등의 많은 학교가 위치하고 있고, Microsoft와 Starbucks의 본거지로 많은 젊은 이들이 살고 있는 이 지역 대학 청년부 몇 모임들을 중심으로 그 상황을 보고하려고 한다.


시애틀의 모임들


(1) 형제교회 대학 청년부
(2) 온누리교회 유학생 부부 순모임
(3) DFC
(4) 해뜨는교회 대학 청년부
(5) 온누리교회 대학 청년부


  더 많은 모임이 있지만, 대표적인 5개의 모임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외의 모임들의 양해를 바란다.  


(1) 형제교회 대학 청년부


-  소개: 삶과 신앙의 일원화를 목표로 하는 이 모임은, 한국 온누리교회 부목사 출신이신 권준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형제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  특징: 대다수가 미혼인 학부생들로 구성되어 있고, 기혼은 주로 장년 모임에 출석하고 있다.


-  현황: 주일 오후, 열린예배로 드리는 청년 모임에 약 110명이 참석하고 있으며, 매주 금요일에는 각 목장이 모이는데, 약 70% 이상이 출석하여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 출신의 목사님이 청년부 전임으로 계시는데, 이 영향으로 인한 활발한 가정교회 중심의 사역이 모임의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  성경공부: 현재는, 주일 예배 후에 모여 4가지 선택식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주제


기간


방식


교재


요한복음 강해


12


강의식


한 형제의 지난 모임의 자료를 보완하여 사용


QT 실전


8


강의식


교회 자체적으로 장로님들이 개발한 교재 사용


일대일


16


그룹


두란도 발행 일대일 제자양육


목사님 강의


?


강의


생명의 삶, 제자의 삶, 경건의 삶 등 목사님의 교재 사용



-   이전에는 약 10개월간 일대일 교재로 기본 교육을 실시하였다. 일대일 교재로 그룹 공부를 하였기에, 일대일의 친밀함은 조금 떨어졌지만, 기독교 기초 교육을 효과적으로 실시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   형제교회 홈페이지: http://www.adelpos.com


(2) 온누리교회 유학생 부부 순모임


-   소개: 유학 이후의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양육할 수 있는 자질 향상을 목표로 하는 이 모임은, 시애틀 온누리교회의 한 순모임이다.


-   특징: 대다수가 기혼 대학원생 부부로 구성되어 있고, 많은 자녀들이 모임의 즐거움과 함께 시끄러움에 대한 인내도 키워주고 있다. 올해에만 6가정이 졸업 후, 이사를 갈 정도로 이동이 많은 모임이기도 하다.


-   현황: 6 7가정이 매주 금요일 아이들과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각자의 자리로 섬기고 있다.


-   성경공부: 아직까지 해 온 성경공부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요한복음 1


20


귀납법적 공부

자체 교재 사용. 참고하는 도서는
– ‘The Gospel of John’, Willam Barclay
– ‘요한복음 강해’, 김세윤
– IVP 성경배경 주석 – 신약
– ‘How to read the Bible, book by book’, Fee & Stuart
– 아가페 성경사전, 메튜헨리 주석 등.

공동체


16


독서토론

독서 후 토론 형식으로 진행
– “신도의 공동생활” 본회퍼 저, 기독교서회
– “성경은 공동체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송인규 저, IVP
– “공동체 101”, 길버트 빌키지언 저, 두란노
–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송인규 저, IVP
– “산골짝기에서 외치는 소리” 대천덕 저, 기독양서
– 목회와 신학” 1989년 9월 특집 기사 6편

열왕기서


10


귀납법적 공부

매주 5장씩을 공부, 사용한 교재는
– “이스라엘의 역사”, 레온우드 저,기문선
– “구약 이스라엘사”, 김희보 저, 총신대출판사
– “구약이야기”, 존드레인 저, 두란노
– “IVP 성경배경 주석 – 구약”, 빅터매튜스 저, IVP
– “이상근 열왕기 상하 주석”, 이상근 저, 성등사
– 기타 사전류


(3) DFC (Disciples For Christ)


-   소개: 한국에서 선교단체로 이미 널리 알려진 DFC가 시애틀 지역 들어와 활발한 활동은 하고 있다. 졸업 후에도 평생 제자를 삼으며 살아가는 건강한 신앙인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특징: 대부분 학부생으로 구성된 이 모임은 주로 캠퍼스에서 일대일과 전체 모임을 갖는다.


-   현황: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시작한 사역이 5년이 지난 지금, 6개 캠퍼스에 약 200여명이 모여 제자 훈련을 받고 있다. 3명의 전문 사역자가 섬기고 있다.


-   성경공부: 기존 DFC 본부에서 사용하는 교재를 중심으로 사용하고 있다. 첫 만남을 위해 교재를 비롯해서, 각 주제에 맞는 귀납법적 성경공부로 구성된 자료들이 잘 구성되어 있다. 기존의 자료를 사용하기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4) 해뜨는교회


-   소개: 단기간에 예수님을 만나 영향을 끼치는 사람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젊은이 중심의 교회 모임이다.


-   특징: 대부분 20대 초반인 구성인원의 70%이상이 어학연수생이라는 대단히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   현황: 약 40 50명의 청년이 매 주일 모여 찬양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한다. 금요일에는 찬양예배로 모이는데, 약 20명의 청년들이 참석하고 있다.


-   성경공부:

















기초공부


20


연역법


하나님을 경외하는 ”, 헨리 블랙가비 , 요단


창세기 인물공부


?


연역법

목사의 자체교재


(5)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


-  소개: 신앙과 삶의 통합을 목표로 시애틀 온누리교회에 소속된 모임이다.


-   특징: 6개월 전, 전임 목사의 부임과 예배 시간 이전으로 아직 안정기를 찾고 있다.


-   현황: 20 30명의 학부생과 직장인들이 주일 오후 예배와 성경공부를 진행하고 있다. 주중 모임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   성경공부: 이전에는 다양한 귀납법적 성경공부(예레미야, 느헤미야, 다니엘, 고린도 등등)과 주제별 모임(예배, 찬양, 통독 등)이 존재하였으나, 새로운 전임목사의 부임 후 기초를 새롭게 하기 위해 ‘네비게이토 성경공부’ 교재를 일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특별히 보고할 성경공부의 커리큘럼이 존재하지 않는다


총평


각 모임별로 활발한 성경공부와 교제를 가지고 나름대로 신바람나는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예상보다 규모가 큰 모임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서로 대결구도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각 모임의 성경공부가 많은 부분 기존의 교재에 의존하거나, 목회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방법들도 많은 장점이 있겠으나, 스스로 성경을 탐구하고 나누는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황병구 PD와의 만남



eKosta: 먼저 본인과 가족의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캘리포니아에 있는 페퍼다인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공학도에서…PD를 거쳐지금 경영학 공부에 이르시기까지의 근황을 좀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미국에서 섬기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신지요?



황병구: 소개를 어떻게 해야 하나… 30대 양띠(나이가 좀 들었지요)구요. 사회사업을 전공한 아내의 사업의 일환으로 결혼에 성공했구요. 지금은 여덟살 딸 아이(은율, 恩律)와 세살 아들 아이(지언, 知言)를 기르는 아빱니다. LA에 와서는 6개월간 여러 교회를 방문하는 기회를 좀 가졌었구요. 지금은 엘에이한인침례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성가대원으로 참석한 지도 1년이 되어 가네요.



제 과거가 좀 복잡합니다. ^^ 전자공학(세부 분야로는 제어계측공학이라고 합니다.)을 석사과정까지 마쳤었는데, 석사과정까지 공부한 공학을 접었던 것은 몇 가지 사건 가운데 알게 된 부르심 때문이었습니다. 몇 가지 사건 중에는 병역을 면제받는 사건이 들어갑니다. 현역병 대상이었던 제가 일반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특례로 5년 동안 기업체에 묶이는 것이었는데,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어릴 때 복합 골절되었던 제 왼팔이 장애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겐 박사과정 또는 직업연구원 생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에 당시 기독운동의 영향을 두루 받았던 저는 보기 드문 진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군복무 기간 정도를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나름의 신앙적 소명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이후 5년간 기독노래운동 뜨인돌에서 리더 역할을 하면서 낮에는 선교한국에서 자원 봉사하는 이력을 쌓았습니다. 20대 박사로서 성공을 기대하셨던 아버님과의 갈등이 제가 치러야 할 마음고생이었습니다. 물론 이 기간 중 결혼이라는 문에 들어서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르바이트 정도의 가계수입으로 부모님 용돈 챙겨드리고 융자 받은 것 갚아 나가면서 결혼생활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 기간은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은 은사들을 총동원해서 제가 하고자 했던 일들을 해나갔던 때였습니다. 공연연출이나 컨퍼런스 운영, 이벤트 기획, 글쓰기, 노래짓기 등등. 그러던 중 우연히 새로 시작되는 기독교텔레비전의 방송 책임자 되시는 분과 만나 큰 신임을 얻게 되어, 노래운동을 마무리하고 이후 5년 간 프로듀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선교한국 운동이나 ?부흥? 콘서트 등을 위해 계속 일했었지요.


2000년이 되면서 지난 10 년간을 돌아보고 향후 10년 정도를 계획하는 시간으로 1년 정도를 지내기로 하고, 포항에 있는 한동대에서 미디어센터를 운영하는 일을 요청받아 서울을 떠났습니다. 센터를 구축하던 반년은 무척 바빴지만 이후 반년은 좀 한적한 시간을 지내면서 미래를 구상했는데, 이제껏 참여해온 일들을 보다 잘 섬기기 위해서는 리더십에 대한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미디어 과정이나 신학, 심지어 공학에 대해서도 주변의 추천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MBA 과정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와 교수로 대표되는 기독지성인들의 리더십 유형이 보다 다양해지면 좋겠다는 나름의 고집도 있었고, 리더십과 실무능력을 함께 갖추어 그간 해왔던 일들을 업그레이드시키고 싶은 욕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관심을 두었던 것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여러 뜻있는 모임과 단체를 보며, 앞으로는 더 효율적이면서도 큰 유익을 가져오는 조직이 되게끔 돕고 이끄는 일을 자청하고 싶었습니다. 미디어와 문화 관련해서는 보다 전문적인 경영지식이 필요하지만, 이 분야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에는 한국교회의 인적자원들이 역부족임을 절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페퍼다인(Pepperdine) 대학으로 오게 된 것은 (TOP 비지니스 스쿨에 가기에는 우선 제 실력이 많이 딸렸구요) 이 학교 설립의 바탕이 된 기독교적 정신 및 오래도록 지속된 비영리기관과의 관계를 주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학교로 믿게 되었고 만족하며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유학 온 지난 일년은 나름의 고생은 있었지만 감사한 일들이 더 많았고 가족들도 평안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드물게 제공되는 장학금도 일부 받게 되어 학비 부담도 좀 덜었습니다. MBA 자체가 워낙 학비가 드는 과정이라 전세금을 털어서도 1년 밖에 감당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내시는 길을 따라가 보겠다는 용기로 시작을 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남편을 믿고 따라 나선 아내의 용기가 더 큰 것 같습니다.



eKosta: 911일이 결혼기념일이라는 루머가 있던데요


황병구: , 지난 911일이 결혼 1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루머가 아니고 사실이지요. 결혼 8주년 때 테러사건이 있었고, 세계인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날로 역사에 남게 되었지요. 흠… 급기야 올해로 결혼 1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날 기념될 만한 이벤트를 해야한다는 부담이 있어서 좀 맘을 태웠는데, 막상 애 둘 딸린 부부가 타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더군요. 결과적으로 이곳 문화방송에 근무하시는 선배께 추천을 한곳 받아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부부만 단둘이 우아한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자축파티를 대신했습니다.


 


eKosta: 코스타 참석은 지난 2003년도 미주 코스타가 처음이셨나요? 이번에 예배와 찬양 분야에 강사로 오시게 되었던 과정과 강의에서 나누어 주셨던 강의 내용을 잠깐 소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미주 코스타에 참석하시면서 받으신 느낌과 강의에서 만났던 학생들로부터 받으신 소감은 어떠신지요?


황병구: , 처음이구요. 2003년에 LA 지역에서 열린 cKosta와 시카고 Kosta(감히) 강사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두 수련회에서 ?지역교회와 캠퍼스에서의 찬양팀의 운영?이라는 선택식 세미나를 맡아서 참석했었습니다. 수련회마다 90분 강의를 사흘 동안 네 번씩 하면서 120명 정도의 참석자들을 가까이서 대했는데… 역시 제겐 체력보강이 개인적인 과제로 남았습니다. ^^ 다들 크지 않은 교회에서 어떻게든 찬양을 통해 회중과 함께 은혜로운 예배를 드릴까 고민하는 분들과 마주한 시간이었고, 여건도 인력도 재정도 없이 맨땅에서 시작해서 제가 경험했던 그간의 이야기들이 좋은 이야기 재료가 되었습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제가 번번히 부탁했던 부분은, 찬양과 예배라는 주제가 모든 성도들의 신앙성숙을 위한 훈련과 교육의 과정에 꼭 들어가도록 각자 섬기는 곳에서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에 대해, 전도에 대해, 경건의 시간에 대해 강조하고 훈련하듯 예배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이런 과정도 없이 찬양팀이 마치 공동체의 예배를 책임진 양 그 역할을 언제나 도맡아 나아가는 것은 하염없는 소모전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회중찬양마저 몇몇 찬양인도자 또는 찬양팀이라고 일컬어지는 은사집단의 소유물이 되고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구요.


 


eKosta: 예배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많은 코스탄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질문 중에서, 아무래도 크게 부각되었던 이슈가 다양한 세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의 예배 인도, 그리고 예배 인도자의 영성과 실력의 조화 부분인데요. 어떻게 그 질문들을 풀어나가셨고 그 부분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하신 점들이 있다면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황병구: 앞서의 답변과 상통하는 부분인데요. 예배인도라는 문제를 반드시 일년 52주 목회라는 큰 틀에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이 이 문제를 푸는 데에도 유효하리라는 생각입니다. 보통 예배인도팀이 의욕적인 젊은 세대로 이루어지고, 회중과 목회자는 더 나이 드신 세대여서 드러나는 어려움이 대부분이지요. 그 반대의 경우도 간혹 있을 수 있지만, 그건 도리어 그동안 젊은 세대가 묵묵히 참아온 익숙한 세팅입니다.



어쨌든 한방에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환상을 내려놓고 한 가족이라는 관점으로 다양한 회중을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음악스타일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어울림과 선택의 문제이거든요. 요즈음에 새로 나온 예배곡들 중에 좋은 내용을 지닌 곡들이 상대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최신곡의 트렌드를 좇아가지 못한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어떤 내용이 나누어져야 하는가라는 필요의 문제가 선곡의 문제를 좌우하여야 합니다. 요즘 뜬다는 곡을 어떻게 해서라도 꼭 소화해 봐야지 하는 욕심이 무리한 적용을 낳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세대간 선호하는 찬양 스타일의 문제를 단순화해보면 사실 명료한 내용을 담은 복잡한 음악‘(young)깊고 다양한 내용을 담은 단순한 음악‘(old)이라는 두가지 부류이지요. 이 두가지를 적절히 균형 있게 다룰 수 있으면 다양한 세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도 큰 갈등은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복잡한 내용을 지닌 복잡한 음악?이 일단은 금기인 셈이지요. 참… 어떤 때는 엉뚱하게도 단지 음량의 문제가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음량 조절만 잘해도 어르신들이 큰 부담 없이 젊은이들의 음악을 이해하시려는 엄두를 내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영성과 실력이라고 할 때 출발점은 기본기, 즉 성실함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영성의 기본기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성실함이라고 보구요. 음악적 실력의 기본기는 일반적으로 음정과 박자인데, 이것도 어떻게 보면 또다른 의미의 성실함입니다. 악기 반주의 경우도 우선은 주어진 악보에 충실할 수 있는가가 출발점입니다. 모임 약속시간을 잘 지키고 개인적인 연습에 일정한 시간을 투자하는 나름의 책임감이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사실 이런 바탕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제가 예배팀을 사역공동체가 아닌 훈련공동체로 이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바탕이 확보된 이후에야 영성이나 음악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습니다.


 


eKosta: 2002년도에 출판되었던 많은 물소리.org’가 큰 반향을 일으켜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찬양집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많은 물소리를 만드시고 편집하시면서 겪으셨던 수많은 경험들이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많은 물소리 홈페이지 역시 관리하시느라 몸이 두개라도 모자르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황병구피디께서 생각하시는 우리 세대가 갖고 있는 찬양에 대한 화두랄까요님께서 보시는 우리 세대는 어떠한 세대입니까? 무엇이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황병구: 저 혼자 그 일들을 다 한 것은 아니구요. 드러나지 않게 찬양집과 홈피를 위해 중요한 부분을 섬기며 힘쓰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우리 세대라… 찬양과 관련해서 생각한다면 일단 현대적인 미디어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제법 받은 세대인 것 같습니다. 음반이나 영상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자료와 정보들은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기술의 발달도 한 몫 하고 있지요. 예전에는 엄두를 못내던 고가의 악기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많은물소리 CD-ROM 이 지닌 찬양시트 편집기능도 생각은 오래 전에 했었지만 최근에나 가능하게 된 거지요. 결과적으로 도구에 능한 세대로 변하는 느낌입니다.



예전에는 실용적이지 못한 생각들이 비판 받았지만, 이제는 도리어 지나치게 실용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비판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교회 내에 아직 남아 있는 지나친 권위와 비효율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구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그 무엇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되도록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찬양들도 점차 그 수명이 짧아지고 있습니다. 한번 받은 감동을 되새기는 이들보다는 새로운 감동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찬양의 트렌드는 좋은 악기와 시설이 없으면 구현하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화려한 도구에 의해서라기보다 심중을 꿰뚷는 적절한 비유와 상징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함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것들은 개인적인 순발력이나 효율적인 조직운영에서 온다기보다, 사람에 대한 오랜 생각과 만남, 삶에 대한 이해에서 오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가 혹 이런 가치를 놓치고 있다면 함께 돌아보며 다시 채워갔으면 합니다.



아울러 피아노 한대, 기타 한대로 이민교회를 섬기며 찬양을 인도해야 하는 상황에 있는 분들은 부족한 악기와 장비에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진실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으로 주어진 환경을 선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여서 잡히시기 전날 밤 감람산으로 올라가시면서 한 찬양을 생각하면, 또 지하교회에서 숨어서 빌립보서 2장을 찬양하던 초대교회 성도들과 옥에 있던 사도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한국교회 초기의 가정교회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찬양은 참 넉넉한 도구들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eKosta: 찬양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많이 이야기 하시는데요. 두개의 문화가 공존하는 이민교회의 현실을 비추어 보면서 느끼시는 이민교회의 찬양의 현실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있다면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황병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CCM, ,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을 주로 현대적인 음악장르나 스타일로만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Contemporary(동시대의)라는 말 속에는 Contextualized(상황화된)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현대성은 음악에 국한되지 않고 가사의 내용에 많은 부분 투영되어 있다고 보는 거지요.



저는 이민교회의 찬양의 내용이 미국의 것(EM)과 한국의 것(KM)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것 외에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상황 안에서 독특한 내용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타문화 가운데 던져진 성경의 인물들 중 요셉이나 다니엘의 고백을 찬양의 내용으로 나눌 수도 있다고 보는 거지요. 나아가 이런 이중적인 환경이 아모스적인 예언이나 예레미아 애가의 현대적인 해석이 가능한 문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의 시편은 이제 우리가 음악으로 다양하게 덧입히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많은 음악이 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부분들은 남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다윗의 저작권 침해라고, 표절이라고까지 말할 때도 있습니다. 일면 우스개로 들릴 수 있지만, 제가 더욱 염려하는 것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회중들의 내용적인 편식입니다. 찬양을 위해 일하는 분들이 회중의 영성을 함께 신경쓰신다면 특정 내용에 집중된 찬양에 대해 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찬양을 사랑하는 이들 대부분이 말씀의 깊이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함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말씀의 깊이가 깊은 분들이 지은 찬양곡들이 장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말씀의 깊이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본으로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시로 잘 표현할 수 있다면 전 이것이 바로 시편 151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보다 가까운 적용으로는, 음악적 스타일은 미국의 것과 보다 가까와서 음악언어로는 이곳의 이들과 무리없이 소통할 수 있으면서, 담겨있는 내용은 한국민족의 정체성과 한국교회의 사명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채워 갈 수 있다면 미국이라는 시공간에서 고유한 사역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eKosta: 최근 마이클 카드의 책을 한권 번역하셔셔 그 책이 얼마 전에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책을 잠깐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황병구: , 올초부터 지난 여름까지 짬짬히 번역했던 책이 올 10월 출간되었습니다. 중견 아티스트이자 사역자인 마이클 카드의 ?Scribbling in the Sand-땅에 쓰신 글씨? 라는 책입니다. IVP에서 나왔구요. 저도 인터넷 쇼핑몰에서 먼저 살펴보았답니다. 아마 제게 올 책은 태평양을 건너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예술적인 창조성에 대한 생각과 묵상을 실은 책인데, 꼭 예술과 연관되지 않은 분들께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번역자로서 ?꼼꼼히?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저도 혼자 ?곰곰히? 생각할 만한 좋은 재료를 많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드리자면… 진정한 창조성은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고자 하는 갈망에서 비롯된다… 라는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사건도 마리아의 향유 사건도 이러한 범주에 드는 창조적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연인을 기쁘게 할까 고민하는 이들이 늘 기발한 사랑의 방식을 생각해 내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토론토에서 공부하고 있는 밀월일기의 저자 박총 아우가 생각이 나더군요.


 


eKosta: 오랜 시간 정말 감사합니다. 내년 코스타에서 더 맛깔스런 강의로 함께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황병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