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형]교회 청년부와 캠퍼스 사역의 조화 (2)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제자양육에 대한 확신이 굳게 서 있다 할지라도 캠퍼스 선교와 교회 청년회 사역의 조화를 이루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도 캠퍼스 사역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들의 시선과 비난을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나 모든 교인이 그 중요성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제도를 구상하고 도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혹시 참고가 될까하여 이런 제도를 도입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한 교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교회는 지난번에 잠시 소개 드린 것처럼 교회에서 청년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자양육을 위하여 지역 캠퍼스 선교단체와 함께 손을 잡고 일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많은 청년들이 캠퍼스 선교단체에 간사 혹은 다른 직책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또 캠퍼스 선교단체는 캠퍼스에서 새로 믿게되는 많은 청년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예배에 참여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얼마 전부터 강조하고 있는 것은 쎌그룹 중심으로 제자 삼는 일 입니다. 물론 아직 시작하는 단계이므로 많은 쎌목자들이 제자 삼는 것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런 부족한 가운데서도 그 교회 청년부는 작년에 쎌 그룹으로 조직을 개편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조직을 새로 개편하는데 직면했던 문제점은 과연 어떻게 캠퍼스 선교와 교회 내에서 쎌 그룹을 통하여 제자 삼는 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청년들에게 선택권을 주어 교회 내에서 아니면 캠퍼스 선교단체를 통하여 제자양육을 받기 원하는지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어느 곳을 택하던지 선택하지 않은 다른 곳에서 이질감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인도자들에게도 선택권을 주어 한 곳을 선택하여 사역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도자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여러 인도자들이 겸직하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 때 캠퍼스 간사를 선택하는 자들에게 교회에서는 캠퍼스에 파송하는 선교사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예배시간에 이들을 인정해 주는 순서와 기도해 주는 시간이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 내에서 쎌 목자로서 섬기는 인도자들은 캠퍼스에서와 같은 마음으로 교회 봉사보다는 양육에 초점을 맞추고 사역해야 합니다.



위 원칙에 의하여 교회내의 청년들의 쎌을 다음과 같이 4가지의 성격으로 나누어 모든 청년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사역의 현장



훈련의 필요


캠퍼스가 지정된 선교지


교회 안에서 활동


 



말씀가운데서 서로 격려



(신앙의 기본 훈련을 받은 자)


1. 캠퍼스에서 말씀을 선포, 돌봄, 및 양육을 하는 자들의 모임. 그러므로 쎌모임에서는 말씀으로 서로 격려하며 사역지의 문제들 및 자신들의 삶을 함께 나눈다.


2. 교회 안에서 쎌을 통하여 서로 격려하는 자들의 모임. 여러 사역들을 감당하며 말씀으로 서로 격려하며 서로의 문제들 및 자신들의 삶을 함께 나눈다.


 



말씀으로 양육



(초 신자)



 


3. 말씀으로 캠퍼스에서 양육 받으며 선교에 동참하는 자들의 모임. 쎌에서는 서로 말씀으로 격려하고 사역지의 문제들 및 자신들의 삶을 함께 나눈다.


4. 쎌을 통하여 말씀으로 양육 받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 서로 돌봄으로 신앙의 훈련하며 자신들의 삶을 나눈다.


모든 청년들의 쎌은 교회의 다른 쎌모임과 같이 교회 내에서 돌아가며 감당해야 하는 기본 사역에 동참합니다 (: 주차사역, 주방사역등).



이런 조직의 개편이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하여 몇 가지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1. 제자 삼는 사역이 무엇보다 앞서야 한다. 만약 캠퍼스 선교단체나 교회청년회가 수적 부흥에 관심이 치우쳐 있거나 재미 위주의 모임을 도모하면 세상적 단체의 운영체제의 모습을 띄게 된다. 이럴 때 순수성을 상실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떠나게 된다.



2. 담임목사님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담임목사님의 목회철학이 다르면 캠퍼스 선교단체는 지역교회와 동역하기가 불가능하며 계속 마찰만 생긴다. 이럴 때는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율적이며 청년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확신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3. 캠퍼스 선교단체 리더십과 교회 청년회 리더십이 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교회 안이던지 밖이던지 한 영혼이 참 제자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어야 한다. 그 이상의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이다.



4. 지역교회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제자양육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제자양육을 지역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성령님의 활동 영역을 인간의 잘못된 인식으로 제한하는 죄를 범하면 안 된다.



5. 모든 결정을 할 때 사랑하는 마음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힘들어 진다.



물론 이런 조건들이 다 만족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확신가운데 기다리면 하나님의 때에 상황을 이끌어 가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가운데서 모든 인간의 관례와 습관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장이규]인간 관계 갈등 다루기 지도 & Spiritual Transformation

 

Q: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일을 처리할 수 있죠참 덕이 안 되요. 어떡하면 우리 그룹에 있어서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보고/해결할 수 있나요



A: 신앙 공동체 모임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차원의 영적 성장은 어른처럼 성장하였음에도 불구라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인격적 차원의 영적 성장이 균형 있게 양육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룹 내에서 인간 갈등을 다루는 지도를 사용해 보세요. 그룹 내에서 인격적 차원의 영적 훈련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성숙하게 됨(spiritual transformation)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 영적 관계와 더불어 그룹 멤버들과의 관계성(relationship) 문제 역시 우리의 성숙한 믿음 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오랜 시간동안의 신앙의 경험을 가진 사람조차도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좋지 않거나, 관계가 껄끄러워 지면, 그 공동체의 모임이 재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 모임이 행사나 혹은 그 모임 자체까지도 무의미해 짐을 경험한다. 성경 공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리더와 관계성이 좋으면 리더가 성경을 조금 잘 못 가르쳐도, 말을 좀 더듬거려도 참 은혜스러워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리더와 관계성이 좋지 않으면 그 리더가 아무리 성경을 잘 가르쳐도, ‘말만 잘해‘, ‘너나 잘해하며 은혜를 전혀 받지 못함을 경험하게 된다. 비단 이것은 가정 혹은 친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함께 큐티를 하기로 해서 며칠을 하다가, 어느 날 서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더 이상 큐티를 하고 싶지 않거나, 큐티를 해도 그 내용 나눔에 있어서 겉도는 적이 많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 차원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성숙(spiritual transformation)에 있어서 더불어 함께 하고 있는 이웃 공동체와 나와의 관계도 매주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모든 계명 중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말씀하시며(22:34-40/ 12:28-34) 이 두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으리라(10: 25)고 하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 나가야 하는 가에 대한 안내서로 주신 십계명도 그 내용을 보면 제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들이 해야 할 자세이고 나머지 제 5계명부터 제 10계명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하는 우리들의 자세, 즉 공동체, 이웃과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십계명과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그 만큼 우리 신앙에 있어서 나와 하나님의 일대일 관계 영성과, 이웃/공동체와의 관계적 차원의 영성, 이 두 가지 모두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차원의 영성과 나와 이웃/공동체와의 관계적 영성관계는 분리 될 수 없음도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무 나와 하나님과 수직적인 측면에만 강조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2:27) 말씀을 하시며, 율법만 중시하고 이웃/공동체를 돌아보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믿음을 책망 하셨다. 요한 14장에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1 4:7),’라고 했고,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1 4:20) 하며 이웃 사랑을 통하여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풍성해 짐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 모두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영성뿐 아니라 이웃/공동체와의 관계 영성에 대해 균형의 중요성을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오늘 우리 신앙 공동체 모임과 그 커리큘럼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성경 공부와 기도 등, 개인적 영성 훈련 부분에 일방적으로 너무 많이 치우쳐 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이웃/공동체와의 관계성의 대한 양육과 훈련에 관해서는 개인의 성격이나 신앙의 깊이, 혹은 개인적 판단의 일로 생각을 하고 관심을 잘 가지지 않는다. 심한 경우는 아예 그와 같은 인격적 훈련은 생각하지도 않고 커리큘럼 자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령 그룹 모임에 있어서 공동체 구성원 서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진다 해도 그룹 내에선 깊이 고민하거나, 다루지 않고 그저 상대의 고민을 듣고, 안됐다 생각하여 안타까워하다 끝나지, 그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접근 방법이나 해결 방법을 함께 실제적으로 모색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경 공부나 기도, 혹은 그룹에서의 삶의 나눔을 통해 어른처럼 많이 성장하였지만, 공동체내에서의 나와 다른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 차원에서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해 여전히 유아기 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신앙의 연수는 길어도 여전히 인격적 성장과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오늘 우리들의 하루 하루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삶의 문제,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 판단, 그리고 우리의 결단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삶의 문제가 무엇인가모두 공동체, 혹은 인간 관계와 연관되어 있는 일들이다. 매 순간, 우리들은 주어진 일들과 문제들을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결단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사는 날 동안에 공동체와의 관계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혼자 독처 하는 그의 모습을 좋지 않게 여기셨다. 그래서 아담을 하와와 짝 지어 주셨다. 바로 공동체를 만들어 관계성을 가지고 살도록 하셨다. 창조의 법칙이 그러하기에 아무리 우리들이 개인적인 영역에 혼자 머무르려해도 공동체와 인간 관계성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다. 혼자서 살수 없다. 외롭다. 고독하다.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나 관계가 나쁘면 괴롭다. 그것으로부터 초월하기가 쉽지 않다. 혹 우리들은 현실의 문제에 지쳐 혼자 있기를 원할 때도 있으나 그것은 잠깐이다. 다시 사람을 그리워한다. 심지어 사람에게 상처받아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또한 위로 받기를 원한다. 속세를 떠나 산 속에 들어가도 산 속으로 들어온 사람들끼리 다시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 영화를 보니 E.T.조차도 지구를 떠나 다른 E.T.들과 함께 살고 있음을 본다. 특별한 은사 없이 어느 누구도 사람과의 관계, 공동체에서 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 자체가 공동체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성으로 되어있기에 십계명도, 예수님도, 성경 말씀도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 개인과 이웃의 관계 모두가 영적으로 다 연결해 하나임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룹의 신앙교육은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 만남에 대한 영성 훈련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웃/공동체를 향한 나의 영성 역시 성숙되어지도록 함께 교육되어지고 훈련되어져야 한다. 어른과 같은 인격적 영성 교육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병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그룹 안에서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공동체의 균형 있는 영성 훈련과 양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까? 어떤 모델이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70인 제자 양육 모델이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영적인 측면과 인격적인 측면을 불균형하도록 가르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구체적으로 70인의 제자를 양육하셨을 때 개인의 영적인 성숙과 더불어 공동체/이웃 관계에서 인격적인 차원의 영적 성숙을 함께 가르치셨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이 제자를 양육하시는 교육 모습은 필경 우리의 그룹 모임 안에서 이루어져야하는 제자 양육의 참된 교육 모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앙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70인 제자 양육 모델은 무엇인가?



누가 복음 928절부터 1020절까지의 내용은 예수님 공동체 교육의 대표적 본문들 중 하나로,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파송 (sending out) 하시는 사건을 중심으로 그 바로 앞과 뒷 부분의 장면들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70인 공동체 제자화 과정을 보면,



첫 단계로,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경험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게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산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시고, 옷이 희어지면서 광채가 나는 신적 경험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튿날에는 산에서 내려와 귀신들린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제자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영적인 체험과 확신을 갖게 된다.(9:28-45) 그런데 예수님을 그 제자들을 그대로 파송하지 않으셨다.



둘째 단계로, 예수님은 공동체에서 인격적 영성 차원의 처신 문제를 가르치신다.(46-56)



오히려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숨어 있던 공동체 내에서의 우열의 문제, ‘누가 높고, 낮은지?의 문제를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이가 큰 자니라(9:48). 더 나아가 공동체내에서 내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 상대방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가지고 응분의 보복을 생각하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처신을 책망하시며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러 왔노라?(9:55) 하시며, 공동체에 대한 처신 과 문제 해결 방법을 가르치신다. 또한 제자들에게 파송되어 나갔을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 처신 방법까지 알려 주셨다: ?어느 집으로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 지어다 하라?(10:5).



셋째 단계로,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들을 파송 하셨다.(10:1)



그 결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매를 맺고 돌아온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0:17)?



넷째 단계로, 그랬더니 예수님은 돌아온 제자들을 다시 교육 시키셨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0:20)



예수님의 제자화 과정은 개인적인 영성 차원에서의 종교적 경험에 더하여 공동체/ 이웃에 대한 인격적 영성 차원의 훈련을 하신 후 제자들의 파송 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복음 선포의 결과를 가지고 돌아온 후의 인격적 차원의 재교육까지 포함되었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러한 인격적 차원의 영성을 가르치시지 않고 제자들을 파송 하셨다면, 제자들은 자신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복음의 열매/결과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실력과 능력에 대한 자랑과 우열의 자리다툼이 일어났을 것이 본문의 상황 상 자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공동체에서 자리다툼의 교만 문제를 접하였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서로의 관계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더 나아가 반대하는 이들을 만났을 때 생겨지는 상처와 분한 감정의 처리방법, 그리고 만나는 이들을 향한 자세와 언어까지 가르치셨다. 그러했기에 제자들이 많은 열매를 가지고 기뻐하며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육은 열매를 맺는데서 멈추지 않으신다. 오히려 열매 뒤에 생길 수 있는 문제까지도 바라보시면서 지속적인 인격적 교육을 행하셨다.



결국 예수님의 70인 제자양육은 이처럼 개인의 영적인 경험과 더불어 공동체에서 구체적으로 겪어지게 될 인격적 차원의 관계성 문제를 가르치시고, 어떻게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할지 훈련시키신 통전적(Wholeness) 교육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제자 양육 교육 모델이 오늘 우리의 교회의 신앙 교육, 혹은 우리의 작은 신앙 공동체 모임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 개인의 영성 교육뿐 아니라 동시에 이웃/공동체 속에서의 인격적 차원의 영성 교육이 균형 있게 이루어 져야 한다. 이를 통해 인격적으로도 그리스도인들이 성숙되게 양육되어 오늘 우리들이 접하게 되는 문제를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어른스럽게 다룸으로서 개인적으로도, 더 나아가 소속한 공동체, 혹은 문제를 가져온 공동체와 그 관계를 성숙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그룹에서 인격적인 차원의 영성을 훈련시킬 수 있는가? 나와 이웃의 관계를 성숙시켜 나가게 할 수 있는 도구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접하게된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는 성서 가르침은 어떤 것이 있는가? 물론 많이 있다. 많은 것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도움이 되는 틀 하나는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의 사용이다 (1)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 (엡 4: 15, 25)



사람들의 감정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이해 시키라 (롬 12: 15/ 고전 12: 26)



덕을 세우며 은혜롭게 행하라 (엡 4: 29-32)



진실된 감정을 표현하되 죄는 범하지 말라 (엡 4: 26-27)



개인적인 이견은 개인적으로 해결하라 (마 18: 15-17)



잘못한 것들의 기록을 보관하지 말라 (고전 13: 5)



말하기 전에 생각하라 (잠 15: 23, 28)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 (벧전 3: 8-9)



갈등시 동기를 확인하라 (약 4: 1-2/ 잠 13: 10)



인간관계에서 화평과 덕을 추구하라 (롬 14: 19)



쓸데없는 싸움은 피하라 (잠 20: 3, 딤후 2: 24)



자신의 유익뿐 아니라 그룹 지체들의 유익도 기억하라 (빌 2: 4)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우리의 삶은 관계성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의 영성 역시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개인적 영성이 성숙하다 할 지라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을 때에는 영성이 침체 되게 된다. 주일에 말씀과 찬양, 기도를 통해 은혜가 충만해도 어느 누군가와 관계가 어그러지면 그 날 은혜는 ??이 되는 것을 우리는 쉽게 경험한다. 어느 공동체에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그곳에서 내 마음이 얼어붙음을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성 문제의 바른 처리는 우리의 개인적 영적 성숙 차원에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여기서 제시하는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는 공동체 가운데서 우리의 인격적 차원의 영성을 개발하는 좋은 도구이다.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문제 속에서 주어진 관계성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접근을 통해 해결하도록 돕는 다리(bridge) 라 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를 사용할 것인가? 사용법은 다음과 같다.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 사용법



첫째: 우리 그룹원들에게 이 지도를 나누어 주라. 그리고 개인이 삶의 문제 해결에 있어 제일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나누라.



둘째: 우리 공동체에서 이 지도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구절 두 개를 리더가 선택하라. 그리고 그룹 성장 계획서(그룹 성장 계획 세우기 글을 참조하라) 의 상단 혹은 하단에 기록하라. 그룹이 모일 때 마나 이 구절을 놓고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인격적 차원의 성숙을 위해 기도하라.



셋째: 그룹원들로 하여금 개인의 책상 위에 이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를 붙이거나 놓으라.



넷째: 관계성이 문제가 있을 때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벌라.



다섯째: 이 지도를 묵상하라.



여섯째: 묵상 후엔 성령이 인도하시는 구절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어떻게 그 문제를 접근해서 해결해야 할 지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



일곱째: 말씀에 순종하여 겸손하면서 담대하게 결단하라.


위에서 제시된 방법은 이 지도를 사용하는 방법중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이 방법을 기초로 해서 상황에 맞게 적절히 응용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다음의 스토리는 이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가 어떻게 적용되었었는지에 대한 한 예 이다.



언젠가, 우리 집 첫째 아이, 하일(Ha Il)이가 2 학년 때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 학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온 편지하나를 쑥 내밀었다. 편지 내용은 그 날 하일이가 학교에서 오줌을 싼 내용의 경위 설명이었다. 선생님의 편지를 요약하면 3가지 내용이었다. 하나는 하일이가 그 날 오전 휴식 시간(recess) 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너 참을 수 있니?? 하고 물어 보니까, 하일이가 ?? 했는데, 그만 참지 못해 오줌을 샀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선생님이 하일이가 화장실 갈 수 있냐고 물어보았을 때 운동장에서 120명의 노는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가 자신 하나밖에 없어서 그렇게 물어 봤다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는 하일이에게 여분의 반바지가 없어서 속옷만 갈아 입히고, 겉의 반바지는 갈아 입히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다 읽은 후, 하일이에게 ?어떻게 된 거야, 오줌을 다 싸고? 하면서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하일이는 선생님이 참을 수 있냐고 묻지 않고 ?갈 수 없어?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이 혼자 아이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다른 선생님 2명이 더 있었다고 했다.



하일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의 거짓말에 머리에는 김이 나기 시작했고,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을 더욱 화가 나게 한 것은 하일이의 그 다음 이야기였다. 속옷을 갈아입고 오줌싼 바지를 갈아입지 않아, 친구들이 ?야키? 하다며 놀렸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비열하거나 야비한 아이들은 매번 친구들 가운데서 ?하일이는 오줌싸게? 하는 식으로 놀려 하일이를 바보로 만들거나, 일명 ?왕따?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밤 아내와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라 주변의 한인 2, 1.5세 자녀를 가지고 미국 교육 환경을 잘 아는 여러 가정에 전화로 상담을 하였다. 답변은 모두 한결같이 그 선생님의 보스와 교장을 통해 담임 선생님을 혼내주어야 하고, 하일이의 경우는 반을 바꾸어 주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한 하일이의 선생님에게 책임을 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무슨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야할지 우리의 생각을 페이퍼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선생님에게 수업 후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결혼식 참여 선약으로 면담이 하루 미루어지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그 날 하일이가 학교에 가서 어제 오줌싼 것 때문에 부끄러워 할 것을 생각하니 화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 날밤까지도 역시 내일 선생님을 만나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좀처럼 떠나지 않고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밤이 깊어 아내는 잠자리로 갔고, 나는 책을 보기 위해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마음에 하나 떠오르는 지도가 있었다.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 이었다. 그래서 책상에서 일어나 이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를 찾게 되었고, 그 지도를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마음에 두 가지 말씀이 내 마음에 딱 걸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인간관계에서 화평과 덕을 추구하라? (14: 19), 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유익뿐 아니라 그룹 지체들의 유익도 기억하라? (2: 4)였다. 너무나 고민이 되는 말씀이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화평도, 덕도, 그리고 하일이의 유익도 그리고 그 선생님의 유익도? 다르게 이야기하면 하일이도 살리고, 선생님도 살리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가능한가? 너무 갈등이 되었다. 좀처럼 생각에 해결이 없었다.



아침이 되어 선생님과 면담을 준비하는 아내에게 지난 밤 내게 부딪혔던 ?갈등해결을 위한 지도? 이야기와 나의 마음에 든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아내도 그 지도를 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다시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마음에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지혜를 주세요.? 라고 흐르는 기도 뿐 이었다. 선생님과 무슨 말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서 문제를 풀어갈지 정리도 못한 채, 단지 하일이 선생님의 보스와 교장은 대동하지 않을 것을 의논한 후 일단 선생님만 만나게 되었다.



그 날 오후 선생님과의 면담이 시작되었다. ?편지 고맙다고, 그리고 하일이가 오줌을 싸서 놀랬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간단하게 4가지를 이야기했다. 첫째는,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 이었다. 우리 한국 문화 중 좋은 것 하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부모와 임금이 하는 이야기와 똑같이 존경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하일이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면서 아마 하일이가 선생님이 ?참을 수 있니?? 라고 물어 보았을 때 가능한 한 참아 보려고 노력 했을 거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하일이에게 꼭 2-3번은 ? 너 정말 참을 수 있어?? 하고 물어 봐 달라고 부탁했다. 선생님이 ?안 돼? 라고 했던 거짓말 때문인지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운동장 휴식 시간에 120명을 혼자서 보고 있었다는 선생님의 거짓말에 대해, 혼자서’ 120명을 보시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하면서 혼자서 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리고는 ?제가 일주일에 두 번 밖에 수업이 없으니까 그 나머지 시간은 언제든지 발런티어로 아이들의 안전을 돌보는 것을 도울 수 있으니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했다. 당황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어서, 하일이가 오줌을 싼 후 속옷만 갈아입고, 겉 반바지가 없어 갈아입지 못한 것에 대해, ?우리가 실수했다고, 여분의 겉옷이 학교에 있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 하고는, ?집이 학교에서 4분 정도 밖에 안 되니까 그런 경우는 꼭 긴급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일이에게 친구들 중 누군가가 ?야키? 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일이의 학교 적응과 친구들의 놀림에 대한 선생님의 각별한 관심을 부탁하였다.



우리가 선생님께 이야기하는 동안 선생님의 태도는 매우 미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마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 어떻게 접근했는지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면담이 있은 지 며칠 후부터 선생님이 하일이의 기분과 교실 안에서의 하일이 위상을 띄워 주기 위해서 그 사건이 있은 지 바로 다음 주에 ?그 주간의 스타? 로 하일이를 선정해 하일이의 모든 좋은 점들, 장점, 한국의 문화 등등을 전시하고 하일이이 좋은 이미지를 친구들 가운데 가지도록 하여 신나는 2학년 생활을 지나게 하였다. 더 나아가 하일이를 그 학년 전체에서 2명밖에 뽑히지 않은 고급 Reading & Math 반에 추천해 주어서 별도의 고급 교육을 받도록 해 주었고, 이 고급 교육은 결국 하일이로 하여금 영재 학교에 들어가도록 발판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하일이의 이야기가 자녀를 자랑하는 ?푼수 부모?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그러한 푼수 부모의 오해 위험을 무릅쓰고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가 내가 접한 문제에, 내 개인의 분한 마음과 자녀의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다루는데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믿음의 축복된 도구였는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그것은 선생님, 하일이, 모두가 깨질 수 있고, 상처날 수 있는 상황을 바꾸어 둘 다 살리고, 오줌싸게 에서 영재 교육이라는 변화, 화를 복으로 변화시킨 능력의 도구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지금까지도 하일이에게 유효하게 이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때 사건은 생각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력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는 분한 마음으로 기도의 영이 막혀 있던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를 다시 세워 문제를 바라보게 한, 막힌 영성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도구였다. 그리고 이것은 나로 하여금 문제 처리과정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차원의 영성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다.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차원의 영성이 내 삶 속에서 이원론처럼 분리되지 않게 만들어 주었던 다리(bridge) 이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신앙 공동체 그룹은 어떠한가? 커리큘럼에 나와 하나님의 관계 성숙을 위한 영성 훈련 뿐 아니라 나와 이웃/공동체의 관계의 인격적 성숙을 위한 영성 훈련 커리큘럼이 있는가? 비록 작은 도구일지라도 우리 그룹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와 같은 커리큘럼은 실제적으로 그룹 멤버들의 개인 영성을 더욱 성숙하게 이끌게 된다. 구체적으로 묶여진 매듭들이 풀어지고 화가 복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더욱 새로운 영적인 경험을 하게 만든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오늘 구체적인 나의 삶 속에 연결시키는 다리(bridge)역할을 한다. 나와 이웃/공동체와의 원만하고 성숙한 관계를 갖게 함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영성을 더욱 성숙하게 한다. 더 나아가 공동체를 성숙하게 하는 역할까지도 감당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옆에서 바라보는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덕을 드러내게 되고 영적인 호기심과 믿음에 관한 갈증을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자리로 초대하게 되는 소중한 사역까지 이루게 한다.



개인의 영적인 성숙(spiritual transformation)? 바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갈등의 문제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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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윌로우크릭 소그룹 이야기(도서출판 디모데,1997)에는 이것을 ?갈등 해소를 위한 중요한 성경 구절(150)? 이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을 나는 ?갈등 해결을 위한 지도? 로 번역을 해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갈등의 문제들에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하게 하시는 지에 초점을 두었다: Bill Donahue, Leading Life Changing Small Group,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1996, p. 121)

[이시훈] 지키지 못한 약속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해마다 새해가 되면 지난 일들을 돌아보며 한 해의 소망이나 계획을 나름대로 열심히 세우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리라 다짐을 하곤 합니다. 해마다 비슷한 결심을 하였건만 얼마나 성실히 계획을 실천했는지 반성하는 일도 언제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가족들, 친구들과 서로의 계획을 나누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마음 아픈 일 한 가지가 떠오릅니다. 제게 엄격한 스승이면서 따뜻한 친구로서의 역할을 함께 해주시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시인으로서는 대 선배이시고, 신앙적으로는 멘토의 역을 기꺼이 감당해 주시던 그 선생님으로부터 작년 설날에 긴 편지를 받았었습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과 후배에게 거는 기대와 지침, 한국 문학에 대한 본인의 소명, 개인의 비전과 세계관등… 그동안 늘 나누었던 가치관을 느낄 수 있는 참으로 가치 있는 글이었고 선생님의 자상한 인품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긴 글 속에서 제가 지킬 수 있는 몇 가지를 흔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성실한 습작생활과 독서 생활, 신앙의 훈련 글을 쓰는 자세와 소명 등… 선생님도 여러 가지 약속을 제게 하셨습니다. 가령 맛있고 멋진 식당을 발견했으니 귀국하면 점심이라도 나누자는 등의 사소하고 재미있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그런 글을 보내신 이후 두어 달 만에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소에 워낙 건강하시던 분이라 본인이나 주변 누구도 병이 그리 깊은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었지요. 한동안 저는 우울하고 믿어지지 않는 마음에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지냈습니다. 다음에 귀국하면 다시 뵙고 인사를 나눌 것도 같고 편지를 드리면 답장을 주실 것도 같은 착각을 아직도 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시 새해를 맞아 여러 분들께 카드를 보내면서 선생님께도 카드를 써보았습니다. 그렇게 다양하고 확신에 차있던 모든 계획들과 소망과 약속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지나간 한 해에 대해서, 부치지도 못하는 긴 편지를 써 보았습니다.


지난 늦여름 어떤 자매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던 그녀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습니다. 항암 치료로 이미 머리칼을 다 잃었고 창백한 피부는 심한 부종으로 혈관이 다 비칠 정도로 얇아져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성실하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이기에 그 모습은 더욱 안쓰럽게 보였습니다. 앉아있기도 힘든 상태에 있던 그녀가 힘겨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산책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 부탁을 하였기에 무리가 되는 줄 알면서도 부축을 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산책이라고 해야 기껏 집 주변을 간신히 서성거리는 정도였지만 그 짧은 시간이 무척이나 긴 여행길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온 힘을 실어야하는 힘든 상태에서도 그녀의 얼굴에 번져나가던 미소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집 앞의 뜰을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경이에 가득 차 오르던 눈빛과 탄성도…


옆 집 뜰에 핀 봉숭아꽃을 보다가 내년 봄 자신의 뜰에도 심고 싶다며 씨를 받던 손길과 자두 만한 배 열매를 바라보며 과연 저 배를 먹을 수 있을까하고 묻던 일들이 영상처럼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다음 여름에 봉숭아 꽃 물을 제 손톱에 들여 주겠다는 약속과 다음 주에 만나면 조금 더 멀리 산책을 나가보자는 약속조차 우리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변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며, 사진을 찍듯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라보던 눈길과 아직 다하지 못한 일들,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말하던 떨리던 목소리가 뚜렷하게 기억나는데도 그 사소한 약속을 지킬 만큼의 시간은 허락되지 못했습니다.


몇 해전 강도를 만나 짧은 순간 동안에 죽음과 삶의 경계를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예고도 없이 우연한 길에서 우연하게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 단 몇 초안에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경험은 제게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하였습니다. 제가 세운 인생의 계획이나 목표라는 것이 물위에 쓴 글자나 바람에 세운 집처럼 허망한 것임을 느꼈을 때 무척 참담하고 외로웠습니다. 그 이후 저는 항상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순간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 바람에 실려온 꽃향기처럼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순간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구속과 한계를 벗어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개념이며 연! 속되는 순간, 연속되는 현재가 영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순간을 살고 있기에 영원을 살수 있다는 역설적인 생각으로 범위를 넓혀도 봅니다.


게으름이나 고의적으로 지키지 못한 약속만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지킬 수 없었던 약속들을 기억하면 사람의 신념이나 맹세는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한번의 오류도 없이 신실하게 지켜지는 약속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구원의 약속은 어제도 오늘 이 순간에 지켜지고 있고, 내일에도 영원토록 지켜질 가장 확실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무슨 일들을 해야 할 지 생각하다가 그만 하루를 보내버릴 것 같습니다. 아직 갚지 못한 청구서와 누군가에게 진 빚을 기억하려 할 것이고,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여러 곳을 찾으며 정다운 얼굴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애쓰겠지요. 지난 일기들을 정리하며 용서해야 할 일들과 용서 받아야할 일들을 떠올리고 이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라는 상상은 마음을 한없이 초조하게 만들기도 하고 한없이 너그럽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직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족과 이웃들을 향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값지고 향기로운 말들이 넘쳐나는지, 지켜야할 귀한 것들과 무한한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직도 무거운 삶의 짐들을 벗어버리고 가볍고 자유롭게 한 순간 순간을 호흡하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확실하게 지켜질 약속을 기다리며 생의 슬픔을 지우고 싶습니다.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가치 있고 진지한 의미를 갖게 되고, 신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인격을 갖게 되며 진정한 소망의 빛을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정도일] Urbana03을 마치고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코스타의 모체가 되는 제 20회 Urbana집회가 지난 2003년 12월 27일부터 31일까지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이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미국 전역과 93개국(미국에 있는 각나라 유학생들)에서 온 20.000명의 크리스챤들이 모인 이번 집회에서 제가 느끼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기적들을 이곳 eKOSTA에서 여러 코스탄들과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1946년 부터 3년에 한번씩 열렸던 Urbana집회는 우리나라에선 IVF(대학생 선교회)로 많이 알려져있는 InterVersity Christian Fellowship에서 후원하는 Student Mission Convention입니다. 현재 미국의 거의 모든 Community College 부터 사립,주립대학까지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이 크리스챤 단체는 “대학생 복음화”라는 큰 미션을 가지고 자본주의와 유물론으로 병들어 가고 있는 대학교 캠퍼스 복음화 사역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IVCF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각 지역에도 퍼져 있어 Urbana 집회를 마친 선교에 열정있는 대학생들의 단기 선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선교대회인 만큼 대학생들에게 선교의 비젼을 강하게 심어주는 집회입니다.


코스타와 마찬가지로 Urbana03도 4박5일의 일정중에 3일째 되는 날 점심 금식을 하면서 세계를 품에 안고 기도했습니다. UIUC Assembly Hall에 모인 20,000명의 학생들과 선교사들, 사역자들은 대형 스크린에 표시된 세계 지도안에 구체적인 나라들(크리스챤들이 가장 심하게 박해를 받고 있는 나라들, 기아와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 내란으로 평화가 없는 나라들…)을 놓고 그 나라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며 기도했습니다. 또한 그 시간에 기도 뿐만이 아닌 실제적인 우리의 헌신을 표현하는 차원에서 선교 헌금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1.1million이라는 엄청난 헌금이 모인것입니다. 여기에서 스토리는 끝난것이 아닙니다. 다음날 저녁, InterVersity에서 엄선하고 또 엄선한 세계 각 지역에 가장 효율적으로 Impact를 줄 수 있는 선교단체의 Director들이 집회 무대 위에 모였습니다. 어림잡아 20여개 단체 정도 되었던것 같습니다. Urbana03 Director 였던 Jim Tebbe는 그 자리에서 1.1million의 선교자금을 20,000명의 학생들 앞에서 각 선교단체 장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중에 자랑스럽게도 Mission Korea가 껴있었습니다. 다시한번 우리나라에 그 분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심을 감사드렸습니다.


수련회 은혜를 더 많이 받는 비결, 또 받은 은헤를 생활과 학교에서 유지해 나가는 비결


코스타2003 찬양팀과 함께 “Roman 16:19 says” 를 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주님안에서 한없이 기뻐하던 때가 어그제 같은데 벌써 몇개월 후면 코스타2004가 등록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다시한번 시간은 화살같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코스타 2004를 6개월 앞두고 작년 코스타에서 만났던 조원들, 조장들과 이메일이나 전화로 나누는 얘기들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다음 코스타에선 어떻게 하면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작년 코스타때 받은 은혜들을 지금 나의 삶에 적용하며 유지 할 수 있을까?” 위의 두 질문들은 아마도 모든 코스탄들이 받는 도전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아니 큰 집회 혹은 지교회 수련회를 준비하거나 그 후에 은혜를 받았던 모든 크리스챤들의 공통적인 도전과제 임에 틀림없습니다.


6년간의 미국 유학생활동안 많은 큰 집회들을 다니며 겪었던 제 경험으로 부족하지만 집회 준비와 그 후에 받았던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제가 시도했던 여러가지 방법들과 그 비결들을 이곳에서 여러 코스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1999년 SDSU에서 열렸던 JAMA99’(Jesus Awakening Movement of America)를 시작으로 코스타2002, 코스타2003, 일본코스타 2003, 바로 2주전에 막을 내린 Urbana03까지 제가 참석 했던 이 큰 집회들 프로그램에 흐르고 있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많은 공통점들이 있겠지만 3가지로 압축해본다면, 첫째, 영접의 시간(재헌신의 시간), 둘째, 선교에 대한 비젼을 심어주는 시간(선교헌신의 시간), 셋째, 세미나를 통한 전공(혹은 흥미분야)과 선교와의 접목의 시간 입니다. 이 세가지의 큰 흐름을 우리 영혼 깊은곳으로 흐르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몇가지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큰 집회나 수련회때 은혜를 더욱 더 많이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할 3가지에 대해 나눠 보고자 합니다.


집회나 수련회 준비기간에 해야할 일 3가지


첫째는 새벽기도 제단을 쌓는 일 입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집회나 수련회를 통해 변화 받아야 하는 자기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놓고 기도 합니다. 새벽기도의 힘은 물론 그 시간에 받는 말씀의 도전도 중요하지만, 매일 아침 새벽에 단잠을 깨운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자기 부인” 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횟수나 기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번을 가더라도 그 새벽에 자기의 모든 죄악된 마음을 주님께 쏟아놓는게 중요하죠. 주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더 없는 큰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저는 항상 새벽에 잠을 깨우는 저만의 비결 한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크리스챤 라디오 스테이션에 알람을 맞추어 놓죠. 잠결에 들리는 워십송은 하루종일 저의 머리에서 맴돌곤 합니다. 캠퍼스에서 그 잠결에 들었던 워십송을 흥얼거리기도 하죠. 말 그대로 Walking Q.T. 인 셈이죠. 또 하나 제가 잘 사용하는 방법은 새벽에 일어나기 정말 싫을 때 제가 외우는 자기 주문이 있습니다. “30분후에 일어나도 똑같은 기분일꺼야.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자 ” 기억하세요. 새벽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우리 코스탄도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집회나 수련회때 목사님이나 강사님들을 통해 선포될 말씀들을 먼저 읽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2003 코스타 조장과 Urbana03 small group leader 로 섬기면서 “집회때 선포될 말씀을 먼저 읽어 보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준비된 영혼을 기뻐하십니다. 집회때 말씀을 먼저 읽고 그 집회에 참석한다면 우선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집회때 더욱 풍성한 은혜와 말씀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게 됩니다. 사실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바로 한번 읽어서는 깊은 이해와 그 속에 숨겨진 본뜻을 이해하기 어려움을 자주 느끼곤 합니다. 특히 전도서나 로마서와 같은 파워풀한 서신들은 같은 구절을 두세번 읽어야만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집회에 오셔서 그 말씀들을 예습하겠다는 생각은 미리 포기하세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코스타 스케줄이 얼마나 빡빡합니까? 안그래요?


셋째는 세미나를 고르는 일입니다. 제가 이번에 Urbana03에 가서 절실히 깨닫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세미나가 큰 집회들의 Core란 사실입니다. 코스탄 들은 흔히 아침, 저녁의 다같이 모이는 session에 비중을 두곤 하죠. 하지만, 집회가 끝난 이후에 받은 은혜를 일상 생활과 자기 학교 생활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세미나란 사실, 잊지 마세요. 또한 세미나의 제목만 보고 그 세미나를 선택하는것은 좋은 선택방법이 아니라는 사실도 같이 알려드립니다. 강사님들의 스타일을 보세요.(모르시면 주변에 작년에 코스타를 갔다 오셨던 분들이나 JJKOSTA에 문의 하셔두 됩니다.) 물론 모든 세미나 강사님은 미국과 한국에서 검증되고 엄선된 분들이시지만,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들과 Talent를 가지고 계시니깐 세미나 후에 이메일 받아 놓으시는 것두 잊지 마시길!


지금까지는 집회와 수련회때 은혜를 듬뿍 듬뿍 받기 위해 준비해야할 사항들을 같이 나눠봤구요. 이제부터는 집회후에 받은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에 대해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큰 집회나 수련회 이후에 받은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


코스탄들 사이에서 오가는 속설이 있습니다. “코스타 약발은 오래 가면 6개월 간다더라 ” 하지만, 모르시는 말씀, 영원을 얘기하고, 천국을 얘기하는 우리들이 6개월이라니요? 여기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가 있습니다.이 방법들은 제가 길게는 6개월 짧게는 3개월이상 시도해본 방법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시도해 보시길.


첫째, 세미나 테입을 정기적으로 듣는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지금 이글을 보시는 분들중(많이 찔리실 테지만), 코스타에서는 정말 앞을 다투어서 세미나와 집회 테입을 사셨던 분들, 오늘 밤, 아니 이번주 안에 책장과 서랍에 먼지 부옇게 쌓여 있는 테입을 꼭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코스타의 감동이 새록 새록 다가옵니다.


둘째는 코스탄들과 삶을 나누는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KOSTA USA는 끝남과 동시에 1달이상의 여름방학 기간이 있잖아요. 제가 작년에 갔던 일본 코스타는 8월 중순에 시작하기때문에, 끝나자 마자 학교 일에 너무 바뿝니다. 보통 조는 가까운 지역 사람들이나 같은 주에 있는 사람들로 많이 구성됩니다. (늦게 등록하신 분을 제외하고). 저는 저희 1지역 코디님과 저번 학기에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물론 학교 생활이 눈코뜰새 없이 바뿌긴 했지만, 주말을 이용해서 3시간이나 떨어진 그 코디님 집에 가서 같이 잠도 자고, 밥도 같이 먹고 코스타때 감동도 나누며 서로 은혜를 받았던 너무나도 축복된 시간이었습니다. 코스타의 감동, 코스탄끼리 나눌때 더욱 더 풍성해 진다는 사실, 제가 깨달았던 중요한 진리중 하나였습니다.


셋째는 자기 삶에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회나 수련회 이후에도 이전의 삶과 별반 차이가 없다면 그건 분명 그 집회나 수련회는 자기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2003년 일본 코스타때 이찬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코스타가 끝나고 은혜 받았다는 얘기는 절대로 하지말라. 그 은혜 받음은 주변사람들과 가족들이 평가해줄 것이다.” 저는 이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은혜를 받고 안받고는 자기가 평가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는 자기 자신에 너무나도 많이 익숙해져있기때문에 말로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기 생활은 집회 이전이나 이후 별반 달라진것이 없음을 느끼곤 합니다. 저두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었구요. Blessing=Life Changing 이라는 사실,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일에 저는 저희 교회 목사님으로 부터 조금은 특별한 설교을 들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너무나도 귀가 닳도록 듯는 기도, 기도, 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 기도가 단지 기도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활에 비교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 활을 의미하고, 화살은 그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약속, 활을 당기는 힘은 믿음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기도는 코스타의 은혜를 유지하는 가장 큰 비결이 됩니다. 금년 코스타에선 더욱 더 많은 유학생들이 주님께 재헌신하며 세계를 향한 큰 비젼을 품길 기도합니다.


작년 코스타가 끝난 직후 한 형제가 쓴 글이 생각이 납니다. 제목은 “고민… 기도…”였습니다.


영적 Power가 현실의 삶 가운데 잘 드러날때 비로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하나님의 기대에 부합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또다른고민이 생겼습니다.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들이 나의 주어진 현실의삶 속으로 얼마나 영향력 있게 적용이 될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입니다. 일주일의 꿈과도 같았던 시간을 뒤로한 채 현실로 돌아와보니, 역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적어도 나는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봅니다. 바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부흥이 필요한 곳이라고, 그리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얻을 수 없다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시고 세우시는 목적은 나로 수고하기를 원하신다고..

[김한준] 레드우드 나무 (redwood tree) 숲을 걸으며…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Big Basin Redwood State Park라고 하는, 그다지 크지도 않고 많이 알려지지도 않은 주립공원이 하나가 있다. 공원 자체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이곳에는 레드우드(Redwood) 나무에 관한한 작품사진들 속에 종종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하는 멋진 모델(?) 나무들이 몇 그루 서있다. “Father of the forest”와 “Mother of the forest”라고 이름 붙여진 나무들을 포함한 오래된 Coast redwood 나무들이 그들인데, 나이는 “Father” 가 2000 살, “Mother”가1800 살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며, 키는 “Mother”가 조금 더 커서 330 ft (100 m; 약 30층 건물 높이) 에 이른다.


나무들이 그 당당한 위용을 숲 속에 조용히 감추듯 하며 서있는 레드우드 산책로(Redwood trail)를 천천히 걷다 보면,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의 숲길이건만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경외감 같은 것에 부드럽게 사로잡히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 경외감이란 다름아닌 생명에의 경외감이요, 더 나아가서는, 이를 지으시고 기르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끼는 데서 오는 경외감이다. 지금 2000 살이라면, 이 나무는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을 바로 그 무렵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말이 아닌가?


레드우드 나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 모양의 감탄사와 더불어 많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어떻게 이렇게 크게 자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한점 구부러짐도 없이 똑바르게 자라날까?”, “어떻게 저렇게 높은 곳까지 물과 양분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등등… 연발 탄성을 자아내며 자리를 뜨지 못한 채 한참을 쳐다보다 보면, 이 나무들은 어느새인가 친절한 친구처럼 다가와서 삶의 영적인 의미들에 대하여 소리없는 말로 이야기해 주기 시작한다. 나무들이 가져다주는 경외감에 너무 깊이 빠져버린 것일까? 이 문자 그대로의 ‘거목’들이 주는 메세지들은 마치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믿음의 거목들, 즉,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 바울같은 이들이 여기 이 나무들을 통하여 전해 주는 충고와 당부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천 오백 년이 넘도록 살아온 나무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줄기 아랫부분에 불에 심하게 타다만 숯과 같은 검은 자국들이 있다는 점이다. 수백 살 정도 밖에(?) 안된 청년 나무들이 아무 상처도 없이 깨끗하게 쭉 뻗어올라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천 년의 세월을 넘겨 진정한 ‘거목’들로 자라난 나무들은 때때로 자연적으로 일어나곤 했던 산불이라는 ‘고난’으로부터 전적으로 무관했던 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때로 다가오는 고통과 고난은 우리를 정금과 같이 만드는 주님의 은혜의 도구라는 점을 성경은 수없이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이 ‘거목’들은 그 한 구체적인 증거로서 자신들을 우리에게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레드우드 나무들을 보면서 얻는 ‘은혜로운’ 깨달음의 그 첫번째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얼마나 위로와 소망이 되고 용기를 주는 메세지인가? 고난의 자국이 없는 영적인 거목은 없으되 하나도 없으며, 그런만큼 우리의 삶 가운데에 더해진 고난의 자국들 또한 우리를 주님 뜻 안에서 또 하나의 영적 거목이 되게끔 인도해주는 그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면? 천 오백 살이 된 나무의 단면이 전시된 것을 살펴보면, 이 나무는 매우 두꺼운 외피(bark)로 둘러쌓여 있어서, 이로 인하여 불에도 견디고 수분 또한 밖으로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불시험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않고 견디는 일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나무들의 외피와도 같이 견고한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일만이 자신을 시험으로부터 방어하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방책이다. 그러면, 만약에 이 외피라는 방어선이 뚫리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산책로 안에는 “Chimney tree”라고 불리우는 나무가 한 그루 서있는데, 무너진 방어선 안으로 나무의 내부는 모두 타버리고 외피만이 남아서 마치 굴뚝이나 연통처럼 그 안에서 들여다 보면 하늘이 보이는 그런 나무이다. 고난당했던 지난 날의 기억들 가운데, 성령의 전신갑주로 온전히 무장하지 못하고 주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드리며 의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치 이 나무와 같이 겉모양만이 초라하게 남아버리고 말았던 내 자신의 모습은 없었던가? 부끄러운 마음과 숙연한 마음이 교차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불시험을 당한 나무들이 역경을 이기고 거목으로 자라나기도 하지만, 더러는 불 가운데 쓰러지거나 썩어져 넘어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레드우드 나무의 특이한 점의 하나는, 한 뿌리에서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자라난다는 것이다. 보통의 나무들의 경우 큰 가지들이 땅 위의 줄기에서 갈라져 나오는데 반해 레드우드는 줄기 자체가 땅속에서부터 갈라져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따라서, 가까이 서있는 나무들이 겉에서 보면 별개의 나무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한 뿌리로 연결된 한 나무인 경우가 많다. 여기에 레드우드 나무가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 있다. 한 뿌리에 연결되어 ‘공동체적’ 생활을 하는 이 나무들의 경우, 고난이나 시험 가운데서 한 나무가 쓰러지면 바로 옆자리에서 새로운 나무가 같은 뿌리로부터 “청출어람(靑出於藍)”하여 그 못다한 생명을 대신하듯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넘어진 나무의 옆에서 새 나무가 솟아오른 모습을 보는 일은, 마치 우리가 끝끝내 불시험 가운데 넘어지거나 사명을 다 완수하지 못하여 주저앉을 때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부축하거나 업고서 함께 가며 또한 그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오버랩되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어떤 형태와 정도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든, 영원하신 그분의 나라 안에서 우리가 뿌린 일들의 의미는 헛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영원한 ‘뿌리’가 되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의 신앙은 넘어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함께 자라나고 서로 지탱해주는 동역자와 지체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 가운데 참된 희생을 이루고 사명을 다하여갈 수 있다. 한 뿌리 안에서 함께 자라나고 생명을 이어가는 레드우드의 삶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런 맥락에서 눈물이 글썽일 정도의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레드우드 나무가 현재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서식하고는 있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 거목으로 자라난 나무들은 거의 어김없이 서부 해안선과 산맥을 따라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이 지역이 사막의 열기와 태평양의 서늘한 바람이 부딛히는 가운데 매일같이 짙은 안개가 끼는 지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무의 키가 100 미터에 달하게 되면, 펌프도 없이 10기압의 강한 압력차이를 극복하여 땅 속의 수분을 하루에 수 갤론이나 끌어올리는 일에는 한계가 있게 된다. 레드우드 나무의 잎을 자세히 보면 매우 촘촘하게 생긴 작은 잎들이 여러 갈래로 겹겹이 나 있어서 물과 접촉하는 표면적이 최대화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표면적이 향상된 잎으로 안개가 낄 때 한껏 물을 웅켜쥐므로써 부족한 수분을 채운다고 한다. 밑에서만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부터도 공급받으며, 또 그 일이 가능한 곳에서만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뿌리로부터 끌어올리는 일이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묵상과 직접적인 기도, 직접적인 예배, 직접적인 사역 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잎으로부터 받는 일은 매일매일의 일상생활 안에서나 크고작은 일상의 관계들 안에서 주님의 손길과 메세지를 발견하며 배우고 깨닫는 삶이 아닐까? 아래로부터 끌어올리는 일이 스승이나 목회자 또는 멘토들로부터 배우고 영향받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옆으로부터 받는 일은 동역자나 동년배 그룹(peer group) 또는 우리가 돌보고 있는 영혼들로부터 배우고 영향받는 일이 아닐까? 숱한 인생들이 저 산 아래 이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고 명멸하는 가운데 저 언덕 위에서 말없이 이천 년 간이나 제자리를 지켰던 레드우드 거목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결국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말없이 우리를 굽어보는 그들처럼, 그리고 이 나무들과 같이 천국에서 주님 옆에 서서 말없이 우리네 사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을 영적인 거목들처럼, 우리 또한 고난과 역경을 믿음으로 이기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며, 매일매일의 삶 안에서 주님과 이웃들과 더불어 날마다 영적인 생명수를 공급받는 가운데 영적인 거목으로 커가도록 하는 그런 삶을 일깨우려 함이 아니었을까?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1-3)


[사진 출처: Big Basin State Park, Redwood National & State Parks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