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상] 역사의 공동체, 우리의 공동체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들어가며


이것은 누구나 경험이 있는 일이 아닐까. 이를테면, 뭔가 새롭게 깨닫고, 그 일을 시작하고 애쓰다가, 문득 멈추어 살펴보니,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고, 뭔가 잘못 되 있는 것도 같고, 또 너무도 외로울 때가 있을 때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돌아보면, 그 일이 결코 나만의 깨달음도 아니요, 나 혼자 가고 있는 길도 아닐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끊임없이 이루기 위해 그토록 애써오던 바로 그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위안이 되었었던가. ‘초대교회의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재하신 후 시작되었던 성령 공동체는, 초대교회를 거쳐 속사도 시대에도, 또 기독교가 국교화된 중세에도, 종교개혁 시대에도, 근세에도, 그리고 지금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중단된 일이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번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일하셨는지를 살펴보고, 그 역사를 통해 지금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이 공동체의 역사를 공부한다기 보다는, 그 역사를 통한 우리에게로의 적용을 생각해 보는 것이기에, 순서를 다소 바꾸어 보고자 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점들을 우선적으로 언급하고, 그 역사의 사건들을 간단하게 짚어 보았으면 한다.


1. 공동체성 회복의 움직임이 시작했던 때의 특징


(1) 조직교회의 부패에 대한 개혁이었다
교회사에서 볼 때,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예외 없이 볼 수 있는 현상은 당시 조직교회가 부패했다는 것이었다. 정치적인 다툼이 있거나, 도덕적인 타락이 있어, 개혁에 대한 요구가 팽배해 있을 때였다. 모든 개혁이 공동체성을 띠고 이루어 진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 공동체성을 포함했었다.


(2) 영성 회복에 대한 움직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공동체성 회복에 대한 운동은 조직 구성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그 내면의 동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영성에 관한 관심이었슴을 알 수 있다. 급진적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기는 했지만, 주로 공동체성을 추구한 무리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려는 몸부림으로부터 시작했었다.


(3) 기존 질서로부터 배척 받았었다: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들은, 늘 기존의 세력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보수세력에게는 너무 진보라고 배척 받았고, 또 자칭 진보라는 세력에게는 보수 세력이라고 외면당했다. 어떤 움직임은 기존의 교회 질서 내에서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힘썼고, 또 어떤 운동은 조직 교회 밖에서 이루어 졌으나, 양쪽 모두 초기에는 상당한 반대에 직면했던 경우가 허다했다.


(4) 철저했고, 가시적이었다.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움직임의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특징의 또 한가지는, 그들 모두가 철저한 순종과 헌신이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로 세상에 드러났다는 점이다. 입으로만 회복과 갱신을 논하는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삶으로써 그리스도인됨을 보이는 생활 공동체로 드러났었다. 각자의 소유를 공용하고, 시간과 노동으로 서로를 섬기는 가시적인 모임이었다.


2. 각 공동체 모임이 쇠퇴하게 될 때의 특징


(1) 교만해 진다.
공동체성이 강한 모임으로 세상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알려지게 된 모임들이 쇠퇴하게 되는 첫번 째 이유는,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는 교만이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지겠다고, 또 완전한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시작한 공동체이었지만, 서서히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되고, 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열매가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 장기화됨에 따라, ‘나는 다르다’라는 영적 교만함을 가지기 쉽다. 이 교만이 다른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기 십상임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기에 더 무서운 문제가 되곤 한다.


(2) 동기가 율법화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말씀을 연구하고 세분화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그토록 애썼던 바리새인들이, 그 말씀의 본질을 상실한 채, 얼마나 자신이 만든 원칙을 율법화하고 고착화시켰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똑같은 현상이, 공동체 운동에도 발생하여, 예수님의 철저한 제자가 되고자 했던 원칙들이 자꾸만 율법화되어 그들을 얽매고, 또 서로를 정죄하는 잣대가 되곤 했다. 물론 그 원칙조차 지키지 않아 문제가 된 경우도 허다하지만 말이다.


(3) 조직화하고 세력화한다.
공동체 회복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정착을 하게 될 때, 그 모임의 규모는 이미 상당히 커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 규모의 모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처음의 의도와 상관없는 조직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세상의 존경과 관심을 받으면서,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게 되고, 많은 경우엔 세력화해서 스스로 붕괴하고, 또 다른 갱신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4) 물질이 문제를 일으킨다.
공동체성이 강했던 모임의 쇠락에는 늘 물질이라는 복병이 존재했다. 세상에 몸을 담고 사는 우리들에게 물질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 물질이 지나치면 패망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무소유 원칙을 세우고 시작했던 수 많은 공동체들이, 이후 자발적인 기증과 유산에 의해 재산문제가 발생하고, 또 그로 인해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죄성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라 하겠다.


3. 공동체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점.


(1) 공동체의 형태는 다양했다
때로는 교회의 조직 내에서, 때로는 조직교회 밖에서 이루어 지기도 했다. 혹은 수도원 공동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또는 가난한 자와 함께하는 도시공동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기혼자들 중심의 모임이 있는가 하면, 미혼자들만 모이는 공동체도 있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공동체에도 여러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교회 내의 소그룹을 통한 작은 공동체의 실현부터,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고 삶을 나누는 생활 공동체, 더 나아가 형제 자매가 함께 하며 소유까지 나누는 수도원적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어떤 형태를 취하던, 우리는 반드시 내 생명과 같은 공동체 안에 있어야만 한다.


(2) 때로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운동은 진보, 보수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만일 우리가 건강한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때로는 오해도 받고 비난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동체성의 상실이 심각한 현대 조직 교회 내에서 아무런 갈등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더 문제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3) 물질까지 나누는 가시적인 형태여야 한다.
공동체는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다. 내 집, 내 가정, 내 지갑을 열 각오없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철저한 순종과 눈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만이 건강하다고 하겠다.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개인 소유가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 하지않았고,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4) 공동체 모임의 쇠퇴기를 기억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애쓰고 나서, 우리는 늘 바리새인을 기억해야 한다. 나만 특별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조심해야 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모임이 조직화 되는 것을 우려해야 한다. 역사에서 보듯이, 한 개혁은 시간이 흘러 또 다른 개혁을 불러오곤 했다. 우리 스스로가 늘 개혁의 자세로 산다면, 건강한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5) 바로 지금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역사를 보면, 공동체성을 이룩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순종, 하지만 철저한 순종을 시작한 것이 커다란 결과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유학생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중의 하나는, 졸업한 이후로 모든 일을 미루는 버릇이다. 하지만, 적어도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졸업 후로 미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아직 학생이므로, 예수님에 대한 순종을 미룰 수는 없다는 말이다. 지금 내가 있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철저하고 가시적이며, 또 갱신 지향적인 공동체가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4. 역사에서 살펴본 공동체들


(1)고대사에 나타난 공동체들
기독교는 국교화되면서, 상당 부분 세속화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대대적으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국교화로 인해 대중은 교회로 들어오는데, 수사들(Monks)은 자신의 영성을 지키기 위해 광야로 빠져나가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수도원 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안토니우스와 파울 등은 은둔 생활을 하는 은수자였던 반면, 파코미우스같은 수사에 의해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이 생겨나게 되었다. 4세기경에는 이집트에 활발하게 진행되던 수도원 운동도 눈에 띤다.


(2) 중세사에 나타난 공동체들

-  480년에 태어난 성 베네딕투스는 서방에서 수도원을 개혁한 인물로 꼽힌다. 처음에 은수자였던 그는 수도원 규율집을 만들어 더 유명해 졌는데, 그 규율은 ‘영구거주’와 ‘철저한 순종’을 기초로 하였다.


-  그 후, 8세기 초 교황청은 추문으로 얼룩지고 있었고, 수도원 생활 역시 지상 최고의 이상으로 예찬되며 세속화하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무렵, 한 수도원에서 대대적인 개혁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끌루니(Cluny)회였다. 베네딕트의 규율을 준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시작했던 이 수도회는, 후에는 기독교 이상을 사회로 스며들게 하여 변화를 추구하기까지 이르렀다. 베네틱트 수도원과는 달리, 토지에 토지 경작자들까지 함께 증여받은 그들은, 노동의 시간이 줄어들고 남은 시간을 끊임없이 중보기도에 할애했다. 하지만, 후에 수많은 선물과 유산으로 수도원이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 개혁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  12세기에는, 끌루니회가 너무 세속적 관습을 좇아 생활하며, 자신의 영성을 위한 기도에는 힘쓰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런 수도원의 세속화를 개혁하기 위해, 시토회(Cistercians)가 생겨났다. 그들은 노동을 다시 강조하였고, 후에는 교황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  수도원들의 수사들이 귀족 출신으로 구성되어, 더 이상 수도원들이 시대의 물결을 막을 수 없게 되자, 프란체스코와 도미니쿠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흐름이 전개되게 되었다. 물질 소유를 하나님과의 일치의 장애물로 보고, 자발적으로 가난해 지는 것을 택했던 그들은, 후에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희망이요, 선교 기구였다. 하지만, 프란체스코의 탁발공동체 역시, 조직화와 물질의 문제에 연루되면서, 대체로 기존의 수도회들이 걸었던 길을 걷게 되었다.


-  프란체스코와 동시대를 살았던 발도(Waldo)에 의해 생겨난 발도파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 수도사들을 넘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청빈과 순종의 도전을 제공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성프란시스코가 교회의 울타리 내에서 교회를 갱신하려고 했다면, 발도파의 경우는 비제도권의 평신도 갱신 공동체였다. 비록 이로 인해, 지금도 많은 교회사에서는 이들을 ‘이단’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말이다.


(3)종교개혁 시대의 공동체
공동생활로 대표되는 수도원이 개혁의 주 대상이었던 종교개혁은, 공동체라는 관점을 강조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자들 양쪽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재세례파에 대해서는 재조명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재세례파는 종교개혁의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였으나, 기존 정치권을 안고 개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는 의도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그들은 형식적인 세례를 받음으로써 구원을 보장 받는다는 당시의 관행을 반대하고, 진정한 의미의 세례를 다시 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  산상수훈이 삶의 기초가 되었다.
-  유아세례를 거부했다.
-  성직자, 공직자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했다.
-  비폭력이어야 했다.


당시 재세례파는 철저한 공동체적인 삶, 즉 서로 물질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형제애적인 사랑을 실제 그들의 삶 속에 실천하는 삶으로 기존의 교회에게 많은 영향도 주었고, 또 박해도 받았다. 이런 원칙을 기초로 살았던 그들의 삶은, 지금도 후터파와 메노파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입으로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닌,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추구했던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3) 근세사에 나타난 공동체

-  지역 교회 내에서, 진정으로 헌신된 자들에 의한 작은 모임인 ‘경건한 모임’을 통해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어 보려 애썼던 야곱 스페너
-  교육체제의 철저한 변화로 독일 사회를 변화 시키고자 했던 프랑케의 교육공동체
-  진센도르프에 의해 ‘조’ 혹은 ‘속회’의 작은 모임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 힘썼던 헤르후트 공동체.
-  준 수도회의 성격을 띠었던 존 웨슬리의 순회 평신도 설교단.
-  18 19세기의 공동체인 필거휘트 공동체, 에프라타 공동체, 처치 아미, 구세군 등에 의해 영성을 회복하고, 세상의 빛으로의 삶을 살고자 하는 공동체적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4) 현대의 공동체들
지금도 세계의 각 곳에서는, 조직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하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   브루더호프(Bruderhof) 공동체: 재세례파의 후예로 초대교회의 원형대로 살고 있는 영국의 공동체


-   떼제공동체(Ecumenical Community of Taize): 20세기 초 전쟁으로 갈라지고 상처 입은 유럽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설립되어 하나됨의 참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프랑스의 공동체


-   베다니 공동체(Bethany Fellowship): 초대교회의 모델대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그런 공동체가 세계선교를 위해 얼마나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미국의 공동체.


-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 농촌에서 이루어져, 소외 받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사역하는 공동체의 본을 보여주는 모임.


-   라브리공동체(L’Abri Fellowship): 성경의 진리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지식을 통한 복음주의 전통과 삶의 조화를 보여주는 프란시스 쉐퍼에 의해 설립된 공동체


-   레바 플레이스 교회(Reba Place Church): 기성교회 내에서 부분적인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도시공동체의 지역사회에 대한 역할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공동체.


-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 규모가 다소 커지면, 바로 분교회를 하면서 도시 내에서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일하는 일반 교회의 공동체성의 본을 보여주는 교회.


이와 같이 현재 세계 도처에서 성경적인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형태는 초대교회 형태의 공동생활로부터 작은 소교회 형태의 도시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외에도,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소그룹의 형태로 진정한 의미의 ‘교회’ 갱신을 위해 애쓰고 있는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우리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맺는말


계속 언급하지만, 예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고, 또 가시적인 나눔을 동반한 성령공동체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사항이 아니다. 비록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성도간의 죄의 고백과 나눔, 그리고 삶의 섬김이 있는 공동체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이끌어 오시는 방법이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헌신의 순간 결코 주저하지 않았고, 또 어려움이 있어도 그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좌절하지 않았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처럼, 지금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에 작은 공동체를 위해 무릎 꿇고, 내 자신의 시간과 물질까지 내어놓을 순종의 자세로 작은 헌신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내게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함께 걷는 순례자 – 이훈 목사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캐나다 위니펙에서 공동체 사역을 하시고 계신 이훈 목사를 통해, 공동체성이 회복된 진정한 교회에 대해 들어보자. 이훈 목사의 공동체에 관한 다른 글들은 www.christiantimes.ca의 ‘함께 걷는 순례자’라는 칼럼을 통해 볼 수 있다.


1. 목사님의 소개와 하시고 계신 사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10년간 한국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하다가, 96년에 공동체를 배우기 위해 캐나다로 왔습니다. 현재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에 소속되어 위니펙과 런던과 밴쿠버에 있는 다민족 공동체 교회가 잘 세워져 가도록 돕고 있고, Multicultural Leadership Education 프로그램을 돕고 있습니다.


2.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에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일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특별히 공동체성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이유가 있으신지요?


한국에 있을 때, 소외층을 돕는 사역을 할 때 함께 더불어 살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 대형교회에서 사역하며 공동체 회복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3. 왜 현대교회에 이토록 공동체성이 상실되어 가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무엇보다 비교와 경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 즉 어느 누구 하나도 특별하지도 않으며 초라하지도 않고 모두가 동일하게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그 나라는 경쟁이 아니라 조화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4. 공동체성이 회복된 ideal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수평적 관계: 그리스도 외에 모든 사람은 서로 형제와 자매로서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수직적인 구조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머리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  작은 것의 가치: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깊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역보다 관계가 소중하며, 숫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만족하기 보다는 상처와 소외와 분열을 피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성공과 발전이라는 그럴듯한 목표 때문에 ‘생명’과 ‘사람’과 ‘관계’라는 더 중요한 가치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  나눔의 정신: 물질을 포함하여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정신이 필요합니다. 삶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계획과 결정의 모든 과정도 충분한 의견 수렴과 대화라는 나눔의 가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  섬김의 정신: 그리스도의 몸은 서로 섬기며 또한 세상을 섬길 때, 가장 그리스도를 닮습니다.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이기적이 되기 쉽고 배타적이 되기 쉬움을 기억하고, 스스로를 깨워서 servant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 그렇다면, 그런 교회를 위해 현실적으로 어떤 일들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교회의 수직적인 구조와 관계를 수평적으로 바꾸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대화와 나눔을 모든 모임에서 장려해야 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타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자발성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6. 현재 하시고 계신 사역이, 그런 ideal한 공동체적 교회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또 현재 한걸음 더 나가기 위해, 애쓰시고 계신 일들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보다 이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메노나이트 형제 자매들은 위의 가치들을 충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우리 한인 크리스천들이 그런 정신을 갖도록 격려하고 실험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목회자직에서 벗어나 한 형제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서로 수평적인 관계를 세우기 위해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을 직분이나 직위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선택을 했습니다. 목회자로 사역할 때도 사람들은 저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작은 선택이 공동체를 향한 작은 한 걸음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7. 바른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정말 힘든 문제 혹은 장애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요?


많은 다른 민족들도 그렇지만 단일 민족, 단일 문화권의 사람들이 갖는 약점이 있습니다. 인연이 특별하다는 것과 집단적인 정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대개 수직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각 문화를 형성해 오는 데 도움도 되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상치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장애물이 됩니다.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인연의 끈을 교회라는 공동체는 반드시 끊어야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와 자매냐?”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공동체에 어떤 특권도 없습니다. 그리고 각 지체는 개인적으로 홀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결코 자기 편을 만들려고 하거나 집단적인 파워나 영향력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홀로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 정직하면서도 배려하는 마음, 세상을 본받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살리려는 마음이 각 사람에게 있다면,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인내한다면, 어떤 장애물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8. 성경적인 공동체를 가꾸어 가고픈, 유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어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지십시오. 그것은 남보다 앞서는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며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 되는 열매맺는 삶입니다. 빠른 속도와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는 시대에 인내를 배우기란 어렵습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한적한 곳으로 향하는 삶, 반성과 고민과 기도가 있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수용력을 키우십시오.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의 가장 기초는 수용력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받아 이기 어려운 사람을 적극적으로 품고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마음을 배웁시다. 무엇보다도 비교하지 말고 자신이 되십시오. 그리고 제한하지 말고 열린 마음과 실험정신으로 사십시오. 한가지 덧붙인다면 지구촌의 아픔을 알고 살리는 인생을 살아갑시다.

‘공동체성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 최영기 목사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1. 목사님의 소개와, 하시고 계신 사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원래 목사였던 사람은 아니고,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Silicon Valley에 있는 회사에서 1977 85년까지 근무하다가, 41살에 신학교에 가서, 44살에 늦은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93년에 지금의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고요. 저는 예수님을 대학원 때 영접했는데, 그 때 성경을 읽어가면서 갖게 된 갈등 중의 하나는 현재의 교회와 성경에 나타난 교회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가정 같았는데, 현재의 교회는 왜 그렇지 못할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그 이유가 초대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루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에 부임하여 23 개의 목장(개별 가정 교회의 명칭)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목장 숫자가 약 130개 됩니다. 분가가 자주 있어서 정확한 숫자는 잘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증가가 기신자의 수평 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신자 전도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작년도 저희 교회에서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 영어 장년부와 중고등부를 합쳐서 약 280명입니다. 한 주에 약 5명 꼴로 침례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2000년도 인구 조사 통계에 의하면, 이곳 휴스턴의 한인 인구가 10,300명이라는 데 한국 사람이 가주나 뉴욕처럼 많이 않은 곳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라고 주위 목회자님들이 말씀해 주십니다.



가정교회에 관해서 배우고 싶으신 목회자들을 위해서,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5박 6일 간의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은 공부를 가르쳐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보여주고 나눔으로써 제자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제자를 만드는 일이 2 3년간은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가정교회에서는, 부부 싸움했던 얘기, 화났던 얘기들을 솔직히 나누고,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갔는지는 함께 나누면서 제자가 되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세미나에서도 보고 배우는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목자의 집에서 민박을 하면서 보고 배울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처음 예수님을 믿는 분들을 위한 성경 공부인 ‘생명의 삶’을 속성으로 가르쳐 드리고요, 목자들의 간증을 들려드림으로써 이론이 아닌, 살아 있는 현장을 소개하려 하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 사역에 있어서, 예배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세미나에 참석하시 분들이 주일 예배에 꼭 참석하고 가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2. 가정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 양육이 아닌, 삶을 통한 양육을 지향하신다면, 성경공부 교육은 따로 진행이 되는지요?



그렇습니다. 매주 화요일에 “삶 공부”라고 이름을 붙여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은 분들을 위한 ‘생명의 삶, 다음 과정인 13주‘새로운 삶’, 다음 과정 13주‘경건의 삶’이 같은 날 동시에 제공됩니다. 이 밖에도, ‘부부의 삶’, ‘부모의 삶’, ‘교사의 삶’등 실제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코스가 제공됩니다. 이 모든 과정들은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평신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고요. 그리고 ‘쎌 교회 지침서’를 저술하신 랄프 네이버 목사님이 쓰신 6주 짜리 “매일 영적 성장 가이드’를 우리가 번역해서 사용했었는데 최근에 정식으로 NCD에서 출판했습니다. 이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교재로 해서 가정 교회 차원에서 1대 1로 교육시킵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가정 교회 모임인 목장모임이 있고요, 주일에는 목장의 리더인 목자들의 모임인 ‘초원모임’이 있습니다. 초원모임도 원칙적으로는 목장모임과 동일하게 진행되지만, 목장모임이 나눔과 교제가 주제라면, 초원모임은 목양이 주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삶을 나누고 보이면서 제자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장모임의 목표이기 때문에, 12명이 넘으면 반드시 분가하도록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규모가 너무 커져서 진정한 삶을 나눈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저희 교회에서 목자가 수료해야 할 삶 공부 5 과목을 다 수료하지 못한 사람을 대행 목자라고 불러서 목장을 책임지도록 하는데 이들 중에는, 빠른 경우엔, 예수를 영접한지 7개월 만에 대행목자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좀 빠르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목자는 가르치는 리더가 아니라 섬기는 리더이기 때문에 가능하고요, 또 삶을 보여주면서 양육하는 것이기에, ‘전에 본 대로만 하라’로 권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그러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초원모임’을 통해 묻고 함께 기도할 수 있기에, 7개월이라는 신앙경력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귀납법적인 성경공부는, 주일 예배 설교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인 전체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이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습니다. 주일 예배에서도 새로 믿은 분들이 적응하기 쉽게 배려하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성경은 표준 새번역을 사용함으로써 개역성경의 어려움으로 인해 오는 거리감을 없애려고 하고있고요, 찬송도 같은 것을 반복해서 부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로 오신 분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고요, 설교도 가능한대로 교회용어가 아닌 평상어를 사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믿는 분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면 다른 교회에 가서 섬기시라고 하고 등록을 허락지 않는데요, 이것 또한 새로 오시는 분들이 더 쉽게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3. 왜 현대교회가 이토록 공동체성이 상실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교회에 공동체성이 상실되었다고 하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이 흐려졌다고 하는 편이 나을 듯 싶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3위 하나님께서 공동체셨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아담-하와의 셋이서 하나되는 가정을 공동체로 세우셨고,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셨지요.



현대 교회는 너무도 개인 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식이 상실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문제를 ‘기독교가 불교화 한다’고 하곤 하지요.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너무도 중요합니다만, 그것만을 강조함으로써 함께 하는 신앙을 무시하면 문제가 됩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경우에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공동체성의 상실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현재 가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 중에서도, 가정교회를 또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생각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기존 교회에서의 구역은 교회 내의 하나의 조직이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가정교회는 그 자체가 local church이고, 그 가정교회가 모인 것이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성이 상실된 교회는 원론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4. 공동체성이 회복된 ideal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세상에 ideal한 교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도 벌써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형태의 모습이 이상적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교회의 바른 모습의 기준은 형태라기 보다는 spirit입니다.



첫째는, ‘영혼을 구원해서 제자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영혼 구원에 집중하여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의 Great commission이라고 할 수 있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에서, 실제로 명령형은 ‘제자를 삼아라’뿐 입니다. 다시 말해, 영혼 구원해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둘째는, ‘기쁨’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기쁨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 가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저희 교회라고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만은, 많은 경우에 ‘이 교회에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5. 그렇다면, 그런 spirit을 가진 교회가 되기 위해, 현재 애쓰시고 계신 일들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희 교회가 지난 10년간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지역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일해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간은 세계선교를 향해가고, 그 다음 10년은 지역사회 봉사를 위해 가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느낌이라고 말씀 드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늘 Vision과 leadership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어 왔습니다. 교회의 미래 계획이라던가, 비젼이 뭐냐고 물어오면, 별로 할 말이 없었고, 리더십에 관해서도 내게 특별한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전이 아니라, ‘순종’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들은 음성에 순종하다 보니 가정 교회가 성공적으로 정착이 되었고, 가정 교회를 통하여 지역 사회 영혼 구원에 집중하다보니, 타지역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도 신경이 쓰여서, 작년에는 12팀이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에는 장기 기획위원회같은 모임도 없습니다.



6.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정말 힘든 문제 혹은 장애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요?



(1) 목회자의 의식구조가 문제입니다. 가정교회 세미나를 들으러 오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가정교회를 교회를 부흥시키는 테크닉정도로 생각하거나, 조직의 일부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가정교회 사역이 실패하게 됩니다. 가정교회를 도입해서 성공하시는 분들의 경우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나도 예전부터 같은 생각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몰라서, 혹은 기회가 없어서 못했다’고 하시는 분들이고, 둘째는, ‘이것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렇게 의식 구조가, 기존 교회가 가진 틀을 깨야만 진정한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공동체를 향해 가다 보면, 목회자들 스스로가 포기해야 할 부분이 참 많거든요.



(2) 교회 지도자들의 저항입니다. 장로나 안수집사님 같은 분들이, 가정교회를 받아들이다 보면, 다스리는 위치에서 섬기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 받아들이기에 힘드신 경우가 꽤 있습니다.



(3) 성도들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을 꺼려 하는 경우입니다. 가정교회를 하다 보면, 삶을 서로 오픈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삶이 노출 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있고요, 또 기존의 교회 전통이 편해서 변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4) 기존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두고, 가정교회 같은 공동체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려는 하는 경우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공동체성은 본질의 문제이지,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7. 성경적인 공동체를 가꾸어 가고픈, 유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소속된 교회에서 목사님만 이해해 주신다면, 청년부는 가정교회로 전환하기에 참 좋은 모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는데 주의하실 부분은, 청년들이 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지적인 성향때문에 모임이 자꾸만 지성화만 추구하게 되기 쉬운데, 이런 성향을 극복해서, 섬김의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고, 가르쳐서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줌으로써 제자를 만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듣는 것보다는 말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고, 사고보다는 느낌 중심으로 살며, dogma보다는 관계성 중심으로 산다고 들 하는데, 이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가정교회에 더 잘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commitment가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어른들 기준의 그런 헌신의 모습이 없을 뿐, ‘이거다’싶으면 더 없는 commitment가 나오기 마련이죠. 기존 교회 내에 가정교회의 모임이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양해만 있다면, 청년부 내에서 그런 공동체를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조근상] 무제

이코스타 2004년 2월


찬 양이 찬양되게 하는 것은 찬양 안에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전에 나누었던 것처럼 물론 예배를 준비하는 찬양인도자의 준비가 중요하지만 예배에 참석하는 회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찬양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찬양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유로 말하기도 한다. 즉 전통적으로 예배와 찬양을 드리거나 드리지 않거나 하는 문제와 또한 그것이 익숙하지 않다고 할 때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사실 요즘 우리가 드리고 있는 찬양 대 부분은 몇 년 전만 해도 사실 교회에서 불려지기 어려운 곡들이 많다. 장르 역시 다양해져서 이전에는 발라드와 칼립소의 빠른 비트(찬송가의 빠른 곡들)를 가진 것이 전부였었지만, 이제는 세상음악과 경쟁이 가능하게 된 것이 현대 찬양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많이 부르는 찬송가 역시 과거에는 그러한 대접들을 받아 왔다.


과 연 이렇게 뭔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찬양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 만일까? 솔직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음악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졌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 갈급한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찬양인도자로서 그리고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있었던 사람 다윗의 고백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마음이 어떤가에 대해서 잘 나타내고 있다. 고라자손의 그 유명한 시편 42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오 래 전에 부산에서 찬양인도를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은 나에게 아직도 예배인도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기억나게 한다. 한 번은 일주일 내내 찬양인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같이 찬양인도를 담당한 형제가 갑자기 불평 아닌 불평처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 내내 첫 찬양이 목마른 사슴인데 이제는 너무 지겨워서 하기가 싫다고 말이다. 그 말을 하기까지 나 역시 몰랐었지만 일주일 내내 첫 찬양을 아니면 중간에라도 목마른 사슴이라는 찬양을 했었던 것이다. 그 때 후배에게 해 주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목마른 사슴이라는 노래를 부르지 말고, 네가 목마른 사슴이 되도록 노력해 봐라. 그러면 찬양의 지겨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사실 그렇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노래로 표현한다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계속해서 새로 나오는 찬양들이 어떨 때에는 은혜 받기가 어려울 수 있다. 요즘의 찬양을 듣고 있으면 음악적인 센스는 뛰어나지만 오히려 뭔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무엇인가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양에 대한 편협 적인 생각들 역시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찬양이 단순히 노래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기에 단순한 노래하는 것으로 묶어 버린다면 아쉬운 일이다. 우리는 찬양하면서 기도할 수 있고, 또한 찬양하면서 영적인 전쟁을 할 수도 있다. 모르는 노래가 나오기 때문에 찬양하지 못한다고 하지말고,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 역시 요즘 영어권 Youth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시험거리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사랑한다면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찬양은 하나님이 대상이지만 그 대상을 향하는 우리 역시 중요한 것이다.


찬 양의 다른 표현은 묵상이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이 하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찬양의 또 다른 방법이다. 때로는 침묵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조용히 듣는 것 역시 찬양의 한 방법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연 묵상이다. 석양의 지는 해를 보고 있을 때에는 이 세상 최고의 아티스트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바다에 출렁이는 소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표현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 역시 지저귀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고 있다. 우리가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번에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24시간이라는 거리를 운전하면서 가는 동안 지나면서 각양 각색의 바위들과 돌을 보면서 하나님의 섬세하심, 그리고 광대하심을 경험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 오랜 거리를 지나는 동안(물론 하나님께는 짧지만) 하나도 똑같지 않는 모양의 바위들, 풍경들이 나로 하여금 절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었다.


그 러나 역시 하나님은 우리의 직접적인 찬양을 원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한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 갈급함을 원하신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혹시 여러분은 오늘 찬양을 대할 때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를 지으시고 만드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