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준]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하나님의 자녀에게 낯선 땅에서의 유학생활은 그 분의 특별한 은혜의 시간인 거 같습니다. 매일의 치열한 삶의 터전에서 지치고 상한 나로 하여금 그 은혜에,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이겠지요. 지금까지도, 어쩌면 평생 계속될 지도 모르는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부르심’ 이란 단어로 요약될 듯 합니다. 힘들고 바쁘다 보면 이 단어가 희미해 지기도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연약함과 불순종에 관계없이 항상 나를 향한 그 분의 신실하신 사랑과 부르심’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 같아요. 나를 향한 부르심이 어떠한지 깨닫는 것과 어떻게 그 부르심에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에게 한결같은 고민일 것입니다.


Texas에서 이 곳 Virginia로 옮겨오는 가운데 있었던 작년 여름의 코스타는 새로운 곳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곳곳에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이 바로 ‘제자의 삶’ 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도록 그 분께서는 코스타 기간 내내 역사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곧 내가 어떤 환경에 누구와 함께 있던지, 그 말씀에 내가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삶이고, 이는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모습으로 표현됨을 그 분께서 다시 확인시키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보내신 캠퍼스의 현실이 차츰 눈에 들어오면서, 제가 처음 느꼈던 것은 당황스러움과 답답함 이었습니다. Texas의 제가 있던 곳은 전형적인 한국 대학원 유학생들이 넘쳐나는 곳이기에, 자연스레 저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는데, 새로운 캠퍼스에서의 한국 대학원생 유학생들은 정말 소수였고, 함께 제자 삼는 비전을 품을 동역자는 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교회의 저를 향한 기대 (참 감사하지만..) 역시 ‘어, 이건 아닌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지요.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부르심에 대한 회의’와 싸우는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바로 맨땅에 헤딩한다고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의지할 그 무엇이나 누구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분은 제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셨고, ‘하나님.. 한 명만 주세요..’라는 절박함이 기도가 되어 지난 여름을 보냈습니다.


이런 제 기도에 그 분은 당신의 귀한 자녀들을 저 혼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보내 주셔서 일단(?)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또 다른 ‘고민’ 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저와 살아온 문화나 현재의 고민들까지도 비슷한, 그래서 제가 ‘익숙하게’ 느껴졌던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저와 ‘참 다르다’고 느낄 만한 지체들과 함께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부가 여기 학부생들이고 어릴 때 이민 왔거나 미국에 온 지 최소한 몇년씩 된 지체들이었으며, 나이 차도 적게는 5년 많게는 10년 가까이 나는, 대부분이 자매들인 지체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한국에서 대학시절까지 보내고 미국 온 지 불과 몇 년 밖에 안 된 대학원 유학생 형제인 저에게 결코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임은 일단 은혜로 시작되었고 꾸준히 지속되는데, 저와 여러 면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 속의 영적 갈증들을 파악하는 것은 참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아무리 나와 다르더라도 날마다 은혜가 필요한 영혼이란 점은 나랑 똑같을 텐데. 그렇다면 이들 속에서의 영적 갈증은 무엇일까. 이런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참 오랫동안 씨름 했었습니다. 여러 동역자들에게 조언도 구해보고, 여러 접근법들도 시도하면서 나름대로는 몸부림을 쳤지요. 그러는 가운데 제 속에서 또 계속되는 영적 전쟁은 ‘거봐. 넌 여기에 적합지 않다니깐! 어떻게 저 얘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겠어?’하는 부르심에 대한 도전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점점 증가하는 박사 공부의 부담들도 저를 압박했지요. 이렇게 한 학기 정도를 제 안과 밖에서 씨름하면서 보냈던 거 같습니다. 그 때 제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번째로 깨닫게 된 진리는 새삼스럽게도 ‘본질은 똑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나 이들 역시 똑같이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야 할, 죄인’ 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영적 본질이었습니다. 환경과 자라온 배경이 다르지만,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해야 하는 죄인들이고, 그래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2:20)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본질’ 은 저나 이들이나 동일함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요한복음을 한장씩 보면서 집중하려고 몸부림쳤던 영적 부담감은 요한이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그 말씀 –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모임이 계속되면서 ‘사람의 지혜’에 대한 유혹들도 참 집요(?)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5)’ 이 말씀은 ‘진짜’였습니다! 영적 본질에의 집중은 곧 영혼에 대한 담대함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한명 한명의 마음 깊숙한 상처와 눈물과 갈증들을 서서히 보게끔 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은 이들을 향한 당신의 타는 듯한 사랑이 어떠한지, 한명 한명이 그분에게 얼마나 존귀한 자들인지 조금씩 느끼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이 한 명 한 명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타는 듯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 느껴질 때마다, 그런데 내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과 행동’ 들로 표현되는 죄성을 여전히 보게 되고 이런 죄와 연약함 속에 있는 ‘그 때에’ 이미 그 사랑을 확증하셨고 값없이 누리도록 주셨음을 깨달을 때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 질문이었던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에 대한 응답 역시 지극히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8). ‘사랑하면 되는구나’하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가 사실 그리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이것은 곧 적어도 4가지 –시간, 물질, 관심, 그리고 기도- 에 대한 구체적 행동이자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 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지만, 그러나 내게 있는 것 – 나에게 허락하신 시간과 물질과 관심과 기도로 사랑할 수는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제가 섬긴다고 했던) 이들을 통해서 오히려 저를 위로하시고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만지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이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제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기 원하셨던 거 같습니다. 시험 기간에 지쳐서 힘들어 할 때, 저희 그룹 한 지체가 여기서 차로 2시간 가량 떨어진 Washington D.C. 에서 한국 음식을 사서 제가 있는 곳 까지 직접 운전해 와서 힘내라면서 내미는 모습 속에서 저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4:12)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서 동역하는 귀한 지체들의 섬김과 기도가 정말 큰 감사제목입니다. 제가 속한 KBS 라는 공동체는 지리적으로 Washington D.C. 를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서 매번 D.C. 까지 오가며 교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또한 없던 모임을 새로 시작하는 거라서 섬기는 저부터 쉽게 지치고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지요. 정말 ‘아무도 없다’ 는 느낌이 가장 힘든 시험 중에 하나인데, 늘 기도와 격려로 함께하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매주 기도제목을 업데이트 해 주는 지체로부터, 얼굴도 모르는 저희 그룹 지체들 이름을 매주 불러가며 기도하시는 분들, 가끔씩 D.C.를 갈 때마다 저와 저희 그룹 지체들을 가족같이 반갑게 챙겨주고 섬기는 분들까지. 비록 떨어져 있지만 모두가 한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임을 너무나 귀한 동역자들로부터 참 많이 도전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이 곳으로, 제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사람들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특별히 ‘제자의 삶’ 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의 삶은 제가 말씀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오히려 그 분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주신 현장에서 주신 사람들 속에서 ‘제자의 삶’ 으로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어떻게 제자 삼을 것인가? 이 질문은 곧 ‘어떻게 내가 순종할 것인가?’라는 말과 같은 뜻임을 이 곳에서 더 깊이 느낍니다. 매일 말씀 앞에 나를 죽이고 삶의 전 영역에서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제자됨임을.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필요한 곳에 내가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보내시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날마다 죽는 삶이라는 것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일3:16 )


[김한준] 말씀 읽기와 묵상 훈련 /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이코스타 2004년 6/7월호


몇해 전, 코스타에서 다시 뵙게 된 한 은사로부터, 학교에서 하고 있는 연구가 성경 공부 및 묵상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관한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연구에 사용된 방법들은 성경 말씀을 체계적으로 묵상하고 깊이 이해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고, 반대로 성경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방법론들은 논문을 찾아 읽고 분석하며 종합하여 새로운 연구 주제로 연결시키는 일에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는 경험적 통찰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그 모습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우리의 믿음은 말이나 생각으로만 그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삶과의 분명한 연결고리를 가지는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성경 말씀의 ‘원리’가 매일매일의 삶과 만나 ‘적용’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말씀이 온전히 이해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자라나는 일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삶의 의미를 분명하게 세워주는 신앙, 그리고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삶의 상호 역동적인 관계의 열쇠가 말씀 묵상과 기도를 바탕으로 한 주님과의 깊은 교제에 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사람은 교회 예배나 부흥 집회, 또는 인터넷에서 듣는 설교로부터는 곧잘 은혜를 받지만 매일매일 스스로 말씀 안에서 삶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부족함을 보이기도 하며, 다른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를 살피는 일에는 잘 훈련이 되어있지만 숲 전체를 보는 일을 더러 놓치기도 한다. (사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 자신의 일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우리 모두가 일생을 두고 이루어가야 할 신앙 성장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 순간에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다만,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과정 자체와 방법론에 관한 고찰이 혹 깊은 묵상을 이루는 데에 우선적으로나마 도움을 주는 부분이 있다면 그러한 측면들을 한 번쯤 고려해 보는 일도 의미없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책을 읽는 방법론에 관한 고전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How to read a book?” M.J. Adler & C. van Doren 저)”라는 책은 나름대로의 유용성을 제공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어떻게 정보의 습득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이해를 위한’ 독서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지식의 증가에 그치는 것이 아닌 ‘마음을 자라나게 하는’ 독서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단계별로 책 읽는 방법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상위 단계가 하위 단계의 측면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 책에 제시된 네 가지의 분류는 서로 다른 ‘종류’가 아니라 상호 연관성을 갖고 발전하는 ‘단계’를 표현한다:




  1. 기초적 읽기 (Elementary reading)
  2. 관찰적 읽기 (Inspectional reading)
  3. 분석적 읽기 (Analytical reading)
  4. 합적 읽기 (Syntopical reading)

첫 번째 방법인 ‘기초적 읽기’는, 주어진 문장이 무슨 뜻인지, 본문의 이야기와 비유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미 그 자체를 파악하는 단계이다. 이는 마치 외국어를 번역할 때 원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과정과 같다.


첫 번째 단계에서 이룬 문장과 단락의 문자적 이해를 바탕으로, 두 번째 단계인 ‘관찰적 읽기’ 에서는 문법과 문맥에 주목하면서, 본문이 가지는 전체 구조를 보다 ‘구조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전후 문맥 상에서 현재의 문장 또는 문단과 그 앞뒤를 이어주는 이야기의 흐름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은 어디까지나 글의 이야기 전개 과정을 충실히 따라가며 ‘새겨듣는’ 것인 만큼 저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독서 방식이라는 점에서 다음 단계인 ‘분석적 읽기’와는 구별된다.


세 번째의 단계인 ‘분석적 읽기’의 경우는, 반대로, 나름대로 생각의 틀을 가진 독자 스스로가 읽기를 주도하는 독서 방식이다. 두 번째의 읽기가 어느 정도 정해진 시간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세 번째의 형태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즉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읽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읽으면서 수시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본문 안에서 답을 찾아보기도 하며, 이미 알고 있었던 일들과 연계하여 스스로 답을 달아보는 가운데 때로는 비평가의 입장에 서기도 하면서 글을 재구성 해보기까지 하는 적극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책을 읽는 경우에 관한 한 가장 높은 수준의 읽기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인 ‘종합적 읽기’는 세 번째의 단계가 여러 권의 책에 적용되어 비교 분석 및 통합을 이루는 과정이다. 따라서, ‘종합적 읽기’는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이루어졌던 ‘분석적 읽기’의 방법론이 여러 책들에 창조적으로 확대 적용되는 것으로도 (i.e., “How to read two books?”) 이해할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독자가 새로운 관점을 창조적으로 도출해 내기도 하므로 고유성(originality)을 지닌 논문을 쓰는 연구 과정에 비견되는 독서이기도 하다.


이러한 독서 방식들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첫 세 방법들에 대해서는 점과 그래프의 관계로 한 번 표현해 보았다(아래). 여기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네 번째의 읽기는 ‘분석적’인 그래프가 여러 개 겹쳐있어 어떤 경향을 표현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읽기의 단계들과 방법들을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첫 번째 읽기는 우리가 어떤 본문을 처음 읽을 때라면 언제나 해당되는 방법이다.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이후 모든 단계의 기초가 되는 만큼 그 중요성이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한 번 두 번 성경을 반복하여 읽으면서 익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그 본문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기초적인 읽기’를 무시하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에, 묵상은 매너리즘에 빠지고 본문으로부터는 아무런 새로운 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익히 알고 있는 본문일지라도 그 말씀들을 다시 대할 때에는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서 ‘기초적 읽기’부터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 오늘 주신 말씀 앞에 겸손함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귀납적 성경 공부나 QT시간에 우리는 본문 말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놓치는 것 없이 받아들이고자 많은 시간을 기울이는데, 바로 이 때가 두 번째 읽기 과정에 해당된다. 여기서는, 문맥과 문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놓쳤을 수도 있었을 성경의 의미를 건져올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장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의 문법과 문맥을 자세히 짚어보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란 건물이나 조직, 또는 기관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 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본문 말씀에 대한 관찰은 곧 읽은 말씀에 대한 해석과 묵상으로 이어지는데, 세 번째 읽기는 바로 이 단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읽기에 충실했을 때,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알게 되며, 이야기 뒤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말씀의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독서는 주어진 본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복음서, 서신, 역사서, 예언서, 시편 등 다른 장르의 글들에 대하여 각각에 알맞은 다양한 접근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분석적 읽기’의 한 예를 들면,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주신 대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를 만나신 예수님은 그에게 다른 말씀 없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한 질문만 세 번을 반복하셨다. 겸손하게 대답하는 그에게서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으신 후에는 역시 다른 말씀 없이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는 말씀만 세 번을 반복하여 하신다. (특별히, 공동번역 성경에는 위의 말씀으로 세 번을 동일하게 대답하신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전후의 정황 및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함께 떠올리고, 여기서의 일들을 나 자신에 대한 적용과 연관지어 묵상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깨닫게 된다. 먼저,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히 여기시는 것 한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삶의 구제적인 표현은 그분의 양들, 즉 ‘영혼들을 잘 돌보는 일’이어야 함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 원하는 나에게도 오늘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분의 음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 해야할 일들과 오늘 결정되어야할 사항들은 이 묵상을 염두에 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네 번째 읽기에 관련한 말씀 묵상은 개인적인 신학이 수립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부시대에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기까지는 아마도 이러한 읽기와 묵상의 결과들이 축적되고 적용되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개념은 성경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는 언급되지 않지만 곳곳에서 그 의미가 묻어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때에 따라 어떻게 역사하셨고 그들은 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나 자신의 삶에 나타나는 패턴들과 오버랩시키면서 스스로의 신앙의 현주소를 되물었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두고 구축해가는 이러한 개인의 신앙과 신학은, 마치 오랜 시간동안 바닷가를 다니면서 손수 주워 모으고 닦고 다듬은 하나하나의 조개껍질들을 한데 엮여서 만든 목걸이와도 같다. 이 과정의 읽기와 묵상에 눈을 뜨고 거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 우리의 신앙은 점차로 깊은 뿌리를 더하여갈 것이며, 우리는 주변 상황에 덜 좌우되는 신앙 인격을 연마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영적 세계로의 여정은 그 깊이가 끝이 없는 과정이라고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런 깊은 세계에 대하여, 부족한 영성과 경험을 가지고서 방법론을 표현해보고자 하다보니 매우 어설픈 글이 되어버린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게 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문을 열 때에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께서 비로소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잡수시는 것을(계 3:20) 생각할 때, 말씀을 받고 이해하는 자리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올바른 방법과 단계적인 접근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매일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현장에서의 문제들이 비록 어제까지는 희미하게 보였을지라도 오늘 삶의 한 영역에서 만큼은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이 온전히 깨달아 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매일 임하기를 소망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정정합니다]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통하여 묵상하는 예수님의 고난” 글의 각주 8) 번에서, 해슬러(Hassler)의 원곡은 요한수난곡에서 ‘도입 합창’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중간 삽입곡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강동인] 코스타 2004를 기대하며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2003년 코스타 준비가 막바지로 가던 일년 전 이 즈음 코스타 2004 주제를 위한 모임이 있었다. 2003년에는 “세상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함을 촉구했다면, 2004년에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전세계적으로 흩어져있는 한국인 학생 디아스포라에게 어떤 메세지를 주시기를 원하실까? 미국 전역에 있는 한국인 학생들의 상황과 시대적인 상황을 가지고 뇌폭풍(브레인 스토밍)을 하는 가운데, 몇가지 주제들이 희미하게 드러나고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먼저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2001)” ,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 치유되는 자아(2002)”, “세상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2003)”으로 이어지는 주제들이 한결같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신앙의 바탕 하에 ‘우리’를 돌아보아야한다는 마음을 주셨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 집단적 반목과 살인 등은 세상의 권세잡은 자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군중’으로 세상의 가치를 좇으며 서로 살리기보다는 서로 죽이는 삶으로 끌려다니고 있는 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을 때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시기보다 스스로 고난을 지심으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고난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함께 질 것을 명하셨다. 이러한 바탕 가운데서 올해의 주제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가 잉태되었다.


‘우리’라는 단어는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근한 단어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와 한국인이 생각하는 ‘우리’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만이 궁극적인 이유요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이다. 나머지는 자유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는 ‘우리’ 외의 사람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요 ‘살리기’ 위한 ‘우리’이다. ‘우리’ 외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우리’가 아니라, 섬기고 긍휼히 여겨야 하는 ‘우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도록 격려하고, 희생하며, 섬기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이다. 하지만 한인 학생 디아스포라는 유학 또는 이민의 상황에서 소수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이웃을 품고 동역하고 고난을 지기보다는 ‘우리’ 외에는 무관심하고,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며,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만든 ‘우리’ 안에 갇혀서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코스타 2004는 진정한 ‘우리’에 대한 성경적 인식을 제공하고, 함께 ‘고난’을 받기까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우리’의 모델을 제시할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고난’을 지고갈 동역자들과 믿음의 선후배와의 만남을 제공할 것이다. 코스타 2004 연차 수련회를 통해 우리는 지역적으로 흩어져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만들어내는 지역을 초월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코스타 2004는 연차 수련회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다. 코스타 2004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기까지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일년 내내 이루어 나가는 삶으로 드리는 제사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우리’의 섬김과 순종을 통해 지역을 초월한 ‘고난받는 공동체’를 경험하게 할 것이요,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교회, 캠퍼스, 일터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질 것을 꿈꾼다.


해가 더할 수록 코스타 사역을 통해 각 지역에서 영혼들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주께 감사드린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이득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영혼들을 섬기기를 기뻐하는 제자들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리고 그러한 제자들로 말미암아 또다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배태되고 움을 틔울 것이다. 전국에 있는 많은 한인 학생들이 이 거룩한 대열에 함께 참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우리’가 되기를 기대하며, 함께 ‘고난’을 받기까지 성숙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안상현] 2004 cKOSTA를 기대하며

이코스타 2004년 6월호

이코스타의 독자들이 이 글을 보는 즈음이면 올 해의 화제작, “The Day After Tomorrow”가 이미 개봉을 했겠네요. 지구 온난화로 지구 곳곳이 상상도 못할 기상이변을 겪게 된다는 바로 그 화제의 영화말입니다. 이 영화의 극본을 쓴 사람중의 하나인 제프리 나흐마노프는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비정상적인 환경을 극복하는 보통 사람들의 드라마”라고 얘기하더군요. 저의 관심을 끌던 한 마디는 바로 “Where will you be?” 라는 부제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사사기 21:25)의 말씀처럼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 시대에 과연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모략”, 그리고 “마음의 혁신” 등을 저술한 달라스 윌라드에 의하면 이 시대의 기독교 혹을 기독교인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Consumer Christianity, 혹은 “consumer Christian” 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단어의 뉘앙스에서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한, 희생보다는 유익에 관심이 많은, 고난보다는 즐거움에 관심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자신의 모습도 그런 시대의 흐름에 자의반 타의반 몸을 맡기고 구해줄 사람도 없이, 빠져 나오려는 의지도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라는 주제로 두번째 칼리지 코스타를 준비하면서 과연 얼마나 많은 이 땅의 대학생들이 ‘고난’과 희생에 대하여 고민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봅니다. 부의 복음, 건강의 복음, 기도 응답의 복음 이전에 우리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은 바로 고난의 복음이 그 본질이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내 삶의 근본적인 목적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결국 우리를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여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은 타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로 하여금 완벽성과 불멸성의 환상속에서 벗어나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고 깨지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한길 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임을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짊어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며 그분을 우리의 주되신 그 분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당할, 그리고 당해야 할 고난의 영적 지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고난받아야 하는 인자”(막 8:31)로 스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도 아닌, 엘리야도 아닌 고난 받아야 하는 인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막 8:32)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의지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의지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노력이 없이는 고난의 제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 역시 요원한 일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의지적인 고백은 구체적인 섬김을 통하여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각인되도록 보여 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고난을 받아야 할 인자로 자리매김하신 것은 곧 “죽임을 당하시게 될 것”(막 8:31)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그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단순히 말의 향연이 아닌 구체적인 희생을 품어야만 그 모습이 온전해지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 그 고난은 십자가에서의 고통이셨으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신”(막 10:45)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의 성취요 완성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유목민’의 삶이라고들 표현합니다. 유목민의 삶이 무엇입니까? 바로 축적이 아닌 “경험”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축적이 아닌 경험은, 바로 그 고난의 경험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보여 주었어야 할 모습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고난받기를 자처하기 보다는 피하려 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꾸짖으신 예수님(막 8:32 33—“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이 어쩌면 오늘의 베드로인 우리를 향하여 또한 동일한 말씀으로 꾸짖고 계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축적(사람의 일)이 아닌 고난의 경험(하나님의 일)을 즐거워 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상상은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가지셨던 상상이었을 것입니다. 이 상상은 바로 기대감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주저함이 없이 기꺼이 받아들일 그 거룩한 책임 말입니다. 왕되신 주님은 종의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이것이 바로 고난과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풍요나 풍성함과는 정반대로 “예수의 나라에서는 순종이 곧 풍요함”이라는 진리를 우리 모두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 순종은 바로 고난과 함께해야만 하는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인, 고난받는 공동체 저 너머에 있는 거룩한 영광을 꿈꿔 봅니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이란 고작해야 집, 자동차, 연봉 정도이겠지만 우리가 꿈꾸는 것은 바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 가운데 기쁨으로 손흔들며 춤추고 있는 바로 나 그리고 우리들입니다. ‘Where will you be?’ 라는 질문앞에 당당히 우리의 자리를 선포할 수 있는 공동체말입니다.


그 고난너머의 거룩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득한 칼리지 코스타를 기대하며 또 기도합니다.




(참고서적)
1.’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존 스토트.
2. ‘한 길가는 순례자’, 유진 피터슨
3. ‘하나님의 모략’, 달라스 윌라드
4. ‘마음의 혁신’, 달라스 윌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