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나]제자의 삶…

이코스타 2006년 10월호

제자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지도 못한 제가 이런 글을 부탁 받아서 무척이나 고민했습니다. 변변치 못하지만 제가 겪은 얘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전 캠퍼스 성경공부에 관심이 많았지만 정작 아리조나에 오게 된 후로는 지역 교회 중심으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달 전 까지만 해도 좀처럼 하나됨이 느껴지지 않는 청년부 공동체 안에서 갈등하며 거의 이년 동안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상처들과 오해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져가는 공동체를 바라보며 기도할 때마다 화도 나고, 때론 마음이 저려오며 눈물이 났습니다. 뿔뿔히 흩어진 마음으로 감동이 없는 찬양과 메마른 교제와 예배를 생각하면 속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보실 때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년 예배 때 찬양이 시작되어 들어서면 스무 명쯤 되는 청년들이 긴 벤치에 한명씩 다 흩어져 앉아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듯해 보였습니다. 어쩜 두명조차도 함께 앉아 있지 않을까…? 힘이 빠졌습니다. 그저 명목상의 예배였고 모두 굳은 얼굴로 서로 눈치를 보며 빨리 끝나기 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예배 후 소그룹 성경공부 시간이 되면 시작하기도 전에 한 형제가 말하기를, “빨리 끝내고 집에 가죠.” 그럽니다.


하나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상처 받고 분노하고 극복하려 발버둥 치기를 반복하며 멤버들은 고사하고 리더들 마저 그렇게 지쳐갔습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막막했고 제 자신도 지쳐감을 발견했고 저 조차도 교회 가는 것이 힘이 들고 교회가도 웃음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교회를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제껏 교회는 사람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고 가는 거라고 외쳐왔기에 옮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혜도 없고 뾰족한 수도 없고 막막함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이런 상황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기도하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보이실 거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 제 기도는 무척 단순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기도하던 중 하나님은 지쳐있던 리더들을 한 자리에 모아주셨고 함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습니다. 더 이상 불평을 할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조금씩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리더뿐만 아니라 멤버들도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며 의논하며 구체적인 새 계획을 세워갔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리더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셨고 새로운 계획과 마음으로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되어갑니다. 저에게는 이 변화가 하나님의 손길로 이루어 진 것임이 확실합니다. 한가지 뚜렸하게 달라진 점은 사람들의 표정입니다. 많이 밝아졌고 이젠 예배 후에 하는 성경공부를 한 시간 안에 끝내 달라고 당부해도 꼭 한시간 반씩 끄는 조가 한둘이 아닙니다. 아직도 해야 할 숙제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얼 믿고 자꾸 우리에게 새로운 영혼을 보내 주시는 지…새 학기가 시작하고 두 달이 다 되어가는 10월 중순인데, 저번주 청년부에 세 명 더 왔습니다. 사랑과 지혜로 그리스도의 몸을 잘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선묵]영적 지도자와 은혜 (Grace-Driven Leadership)

풀러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을 할 때에 설교학 과목을 이완 왙슨이라는 교수님께 강의를 들었다. 아주 좋은 강의로 기억에 남아 있는데 그 분이 설교에 관하여 가르쳐준 기억에 남는 교훈 중에 하나는 설교 내용을 구성할 때에 “복음”과 “적용”을 7:3의 비율로 하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설교의 내용 중에 성도들이 실제 삶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적용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져야하는데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지 선포하는데 70%를 먼저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설교의 메세지 뿐만 아니라 기독인의 삶의 전 분야에 해당되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우리가 많은 경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아갈 능력과 힘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점도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의 근원이 된다는데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자라고 더 깊은 은혜속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일반적인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중요하다. 영적인 지도력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 지도력이란 섬김의 지도력(Servant Leadership)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잘 섬기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다. 잘 섬기기 위하여 능력도 갖추고 잘 섬기기위하여 여러가지 지술과 지식도 필요하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보면 많은 지도자들이 도중에 탈진하고 탈락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왜냐하면 섬기다가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게 되는 것이다. 힘이 바닥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지도자에게 있어서 특별히 효과적인 섬김의 사역을 위해서 무엇 보다 우선되는 과제는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나아가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를 체험하고 그 속에서 얻은 힘으로 사역을 감당할 때에 지속적으로 섬김의 사역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 지도력의 또 다른 이름을 “은혜로 추진되는 지도력(Grace-Driven Leadership)” 이라고 하고 싶다.


영적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지도자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바닥이 난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바닥이 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지도자는 결국에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샘솟는 힘을 공급받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속에서 자라는데 힘을 써야 한다.


지도자들에게 늘 부담이 되고 압력이 되는 것은 결과를 산출해 내야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에 의하여 자신의 지도력이 판가름 나기 때문에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늘 노력을 한다. 그리고 더 많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외부로부터는 압력을 또 내부로부터는 더 많은 일을 위한 유혹을 받게 된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는 결과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나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경험하면서 능력이 솓아나고 그 힘으로 여러가지 일들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결과에만 집중하면 당장에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능력이 고갈되고 만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누리는 일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서는 그가 허락하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가 없다. 특별히 영적인 훈련으로 자발적으로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그 형식과 틀은 다르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하여 하나님께 퀄러티 있는 헌신된 시간을 드리고 그 시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깊이 발견하고 체험해 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에 결과를 산출해 내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시간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 시간이라도 더 뛰어야지 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시간을 온전히 드릴 때에 당장에 무엇이 발생하지는 않지만 그런 시간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생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고난을 통과할 때에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 모든 고난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절대자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앞에서 그 문제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원망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럼으로 인하여 더 깊은 고난과 문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는 문제를 대할 때에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인내할 것은 인내하며 그 모든 것을 계기로 하나님께 더 나아가고 인생에서 하나님 그 분을 목적하고 그 분으로 인하여 만족하고, 또 그 분과 함께 함, 그 분께 순종함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임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고난은 우리를 깊은 친밀감으로 인도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목적하고 하나님을 진정 기뻐하기를 배우게 된다.


영적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나아가고 더욱 큰 은혜를 받고 또 은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은혜 속에서 자라라”고 하셨고 야고보도 그의 서신 가운데 “더욱 더 큰 은혜를 사모하라”고 권면하셨다. “하나님의 은혜” 그것이 영적 지도력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 적극적인 의미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친밀감 훈련을 통하여 부정적으로는 고난이라는 인생의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을 직면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 김원기 목사

본 세미나는 김원기 목사가 KOSTA/USA 2002에서 복음 입문을 강의한 내용을 녹취한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도 살펴보고 개인적으로 복음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내 삶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 간증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Gospel이 헬라어에서 나왔는데,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소식이 나에게 어떤 상관이 있는가? What does Gospel mean to me? 아무리 좋은 사상, 이론이라고 해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복음은 십자가의 도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The message of Cross입니다. 1세기에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요즘 우리에게는 electric chair라고 할 수 있어요. 사형 집행 도구입니다. 아주 극악한 범죄를 한 사람, 특히 국가에 위협을 가져왔던 사람들에게 다시는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공포심을 일으키는 사형입니다.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죽기까지 사흘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저렇게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데, 그리고 부활을 했다는데, 교회에서 그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 message of cross 그것이 인류의 혁명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의 영향이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어요. 어떤 종교가 시작되었는데, 그 교주가 법을 어겨서 전기 의자에서 죽었습니다. 혹은 가스실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범죄자가 죽었는데 거기에 어떤 파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같이 다니던 사람이 그 메시지를 막 전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세상에 존경할 사람이 없어서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존경해야 하느냐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교주가 죽었는데, electric chair에서 죽었는데, 그것을 찬양하고 electric chair를 그려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보면 십자가에 대한 메시지 때문에 사람들이 두 가지 부류로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한쪽에서는 그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다 이렇게 말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에 대한 메시지를 들을 때 한쪽은 그런 미련한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관 중에 하나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의지가 없으니, 의지가 약하고 자기 혼자 인생을 개척하기 힘든 사람이 무언가 의지하고 싶으니까 교회에 다니면서 신을 의지한다 이런 것이죠. 들어가서 보면 별게 없다는 거에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부활했다, 그리고 창조했다 뭐 이런 것이고요. 교양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들은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느냐. 종교는 마약이다, 무식한 사람들이 먹고 한번 마약에 중독되면 계속 먹어야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 대한 영향력을 체험한 사람들,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십자가 사건에 수제자인 베드로도 새벽이 오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다음에 사도행전 처음에 나오는 베드로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있습니다. 다시는 예수에 대해서 말하면 십자가에 대해서 전하면 너를 죽이겠다는 협박 앞에서 그는 나는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배신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가 죽었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순교하는 사람으로 변했냐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종교는 교리가 아니고, 이론이 아니고, 신학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선하게 살면 갈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하면 갈 수 있지 않으냐, 고행을 하면 갈 수 있지 않느냐, 내가 나를 벗어나면 갈 수 있지 않느냐 이렇게 접근을 합니다.


전기에 대한 비유를 들어보면 전기 이론을 공부한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전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기등을 설명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론은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이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들어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제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어떤 사람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전기가 뭔지 몰라요. 설명을 합니다. 전기라는 것이 있는데, 전구를 끼고 스위치를 켜면 불이 들어온다고 말하면 수긍을 안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이 power of God 그런 것이죠.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사실 그렇죠. 가장 쉽게 말씀 드리면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의 그룹을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율법주의자였어요.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이라는 사람 밑에서 공부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살다 보니 갑자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말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인 거 전혀 쓸모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런 알아 들을 수 이야기나 하니까 뭐 모르는 사람들, 여자들, 어린이들 따라 다니는 겁니다. 사울이 보기에 이것은 사회를 좋지 않는 쪽으로 끌고 가는 독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죠. 교회를 없애는 것에 헌신하니까 다메섹이라고 하는 도시에 가서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올라가다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그 신앙을 자신이 소유하면서 자기가 핍박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갖고 추종자가 되니까 그 사람의 친구들이 얼마나 눈꼴 사납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야기 할 수 있고 제가 잠깐 소개는 하겠지만, 복음의 핵심은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탄생할 때도 천사들이 전한 메시지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말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데, 그것을 만졌고 느꼈고 체험했고 그것을 증거할 수 있다.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체험했습니다. 복음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personality입니다. 그분하고 내가 만나는 거에요, 그 만남을 통해서 reality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1954년 제가 태어나기 전에는 김원기라고 하는 person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난 다음 죽기까지 김원기라는 인격이 존재합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는 제 인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거듭난다라는 말을 써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질문 했는데,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문이 막히는 거에요, 거듭나다니, 당시에 공부를 많이 한 니고데모라는 분인데, 이해하기 힘든 거에요.


나1976년 8월 13일, 저는 기억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김원기는 옛사람입니다. 이후의 김원기는 그전의 내가 아니에요. 내가 태어나자 마자 울자마자 처음 본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이었겠죠. 인격을 가진 어머니를 만났어요. 제가 거듭난 후에는 인격을 가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 있어요? 어머니가 없으면 제가 없겠죠. 그런데 제가 거듭났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믿지 못해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을 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셨죠. 성령이 하시는 일도 그렇다. 성령이 지나고 나면 성령의 바람이 분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네가 어떻게 그것을 믿냐, 하나님을 보았냐, 그러나 세상에서 보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와요.


목사들은 말만 하면 하나님 만났다고 하더라. 그것이 사실이냐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알고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압니다. 마치 그렇게 비겁했던 제자들이 목숨 걸고 순교했던 것처럼,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건 아니건 something happened 이건 인정할 수 있겠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기쁜 소식이냐? 복음이라고 하느냐? 그전에는 나쁜 소식이 있었다는 거지요. 우리는 범죄했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나누는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다리가 없습니다.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거리입니다. 골짜기가 우리의 죄악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아서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배드뉴스라는 것입니다.


굿뉴스는 뭐냐. 내가 범죄 했고 그 범죄의 대가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죽고 난 후에 영원한 멸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값입니다. 내가 살인을 하는데 한명을 죽였던 열명을 죽였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니님이 보실 때 나를 구원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구원하려면 나를 대신해서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 생명을 바칠 사람이 의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의인이 있으면 대신 죽어줄 수 있는데 그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 누군가 속죄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을 찾아보아도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죄짓지 않은 사람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되어 있던 식민지 총독도 그랬습니다. 왜 너희들이 이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구속하시고 나를 속량하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redeem,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신문, 잡지 이런 거 보면 쿠폰이 있죠. 갖고 상품 살 수 있습니다. redeem한다고 하죠? 그거 가져가면 돈 깎아줍니다. 그걸 할 때 redeem,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죽으시고 우리들에게 쿠폰을 준 것입니다. 그 쿠폰에 영생, 죄사함 이렇게 써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시고 나에게 그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예수님이 주신 영생을 하나님께 드리면 redemption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구원 salvation, 영생 eternal life, 죄사함 forgiveness of sin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이고, 기독교에서 가장 어리석은 소리, 그러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쿠폰을 받으면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쿠폰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속량해주마, 구원을 주마, 죄사함을 주마 이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펄쩍 뛰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려면 순서대로 해야지, 착한 사람에게 먼저 영생을 주고 상을 많이 줘야지,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벌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죠. 기독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저꼴이 아니냐고 그렇게 비난을 합니다. 조금 지각이 있는 사람이 교회를 보면 비난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너무 당연해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당연합니다.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고 복 받는다 이렇게 가르쳐야지 이렇게 말하는 거지요. 쿠폰을 바꾸는 과정을 믿는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뭘 믿는다는 거에요? 나는 쿠폰에 적혀있는 대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애들을 갖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애들 키우면서 보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아요. 여기 있는 형제는 아주 못됐다고 합시다 근데 제 아들이에요, 그리고 옆에 있는 자매님은 아주 착하다고 합니다. 비하면 30배는 더 착해요. 그런데 둘다 문제를 저질렀어요. 누구에게 더 관대할 것 같아요. 제 아들에게 입니다. 자식하고 사이가 좀 안 좋잖아요? 누가 더 잘 것 같습니까? 아버지가 더 잘못 잡니다. 자식을 야단친 게 더 속상합니다. 너희들이 잘 살아서 오면 내가 주는 게 아니고 너는 내 자식이기 때문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는 순간 뭔가 신비로운 것이 발생합니다. 이론이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체험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하나 더 봅시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람들이 말하는 말 중에 어디를 가든 꼭대기만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똑 같은 산을 오른다는 가정이 있지요. 만약 다른 산을 오르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정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복음이 유일한 길이냐 이런 논쟁을 할 수 있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체험한 것을 증거할 때는 내가 아는 것을 말할 수 있겠죠. 다른 종교에는 그 종교가 추구하는 결론에 다다를 수는 있겠죠. 그런데 제가 아는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지는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굉장히 중요한 바울의 고백 이에요.


저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외가는 불교를 열심히 믿었고 아버지는 무신론자셨어요. 내가 중학교 시험을 칠 때, 당시 불교에서 제일 유명한 성철스님이란 분을 찾아가서 절을 3만번도 하시고 그랬어요. 나이가 들면서 종교 생활이 없어졌죠. 중학교 2학년 중간에 여러 가지 이유로,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인생의 밑바닥에 빠져버렸습니다. 마치 열차가 고속도로 달리다가 부딪혀서 산산조각 난 것처럼, 그런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어요. 아마 그 당시에 갑자기 우울증이 심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냥 삶이 무너져버렸어요. 빛 가운데 있다가 아주 삭막한 어둠 속에 들어간 것처럼.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심각하게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학교 생활 잘 했었지만, 완전히 그만 두었고, 술독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학교에는 형식적으로 가고 학교 끝나면 곧장 술집으로 가는 게 삶이었습니다. 술 마시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더 심해지니까, 점점 방황이 심해지는 것이지요. 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삶이 깊은 염세주의로 빠져들게 되었어요. 사춘기의 방황보다 훨씬 심하게. 내가 누구냐, 나는 어디서 왔나,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런 문제죠. 일반적인 사춘기에 하는 고민이 아니라 완전히 염세주의에 빠져서 술 마시고 약도 손을 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왔는데요. 그때 미국은 한참 반전운동이 많고 히피가 많았는데, 제가 그냥 자연스럽게 히피가 되 버렸어요. 히피가 생각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고민과 아주 비슷했거든요. 히피라는 게 전쟁 이후에 배부르다 보니까 나온 갈등들이었지요. 부유하게 살던 젊은이들이 정신적인 방황을 하는 거지요. 세월이 갈수록 방황이 더 커지는 거지요. 마약을 하면서. 아무리 생각을 할수록 대답이 안됩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책도 그런 것만 보고 결국 세월이 갈수록 나는 자살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언제 하느냐 이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대학교 3,4년 때 그렇게 생각했죠. 어느 날인가 나는 자살하고 죽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보다 1년 먼저 신앙생활을 하던 동생이 나에게 찾아와서 전도를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내 삶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는데, 이번에 내가 부서지는데 이때는 좋은 부서짐이었어요. 나를 뒤집어 싸고 있었던 껍질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염세주의에 빠져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것은 좋은 부서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빛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었어요. 조그만 성경 공부 시간이었는데, 성경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설교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도 안 나요. 다만 어떤 예화였고 지금 생각하면 그 예화는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것인 것, 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느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제 마음 속에 아주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원기야 너를 위해서 내가 죽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너를 위해서다.’ 이런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 정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요 이런 마음이 들며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이때 한 5분 사이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한 8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문제가 해결되어버렸어요. 어둠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이 흐르는데 주체할 수가 없어요. 내가 얼마나 소중하면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내가 어디서 왔나, 어디로 가나,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이제는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위해서 산다. 1976년 8월 13일 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러나 저는 알지요. 제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지요. 주위에 보는 사람들이 다 내가 변했다고 하지요. 체험한 것이 뭐요 하면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요. 내 마음 속에 있지요.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요. 어떻게 아나요, 제 마음에 알지요.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요. 내가 목사이지만 교인들을 위해서 죽을 자신은 사실 없지요. 그러나 내 자식을 위해서 죽을 자신은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내 마음 속에 있지요.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느냐, 영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영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세요.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눈으로 봐야만 실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한 번도 바람을 보지 않지만 바람을 부인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영혼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붙잡고 바울을 붙잡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복음이 뭔가요. It’s the power of God.


내가 알기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기 위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가 부모 밑에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었어요. 내 자식이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에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redemption coupon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는 선물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정리해서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나쁜 소식이 있었어요.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Eternal condemnation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 생명이 멸망에서 생명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다음 질문은 Did you receive it? 생각 중에 있습니다. 아직은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영생이 있다, 아들이 없는 사람은 영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하나님을 만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감사합니다. 참석한 형제 자매들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접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찾아가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장이규]지도자의 자기 관리와 성장 (8)

여덟번째 질문, 올해 내가 주님의 사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 Ministry Goal

이 질문은 지도자의 자기 관리와 성장에 있어서, 리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은사들(spiritual gifts)을 발견하고, 이를 적절하게 관리하여 효과적으로 신앙 공동체 가운데 그의 은사를 사용하고 극상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는 질문이다.


리더가 자신의 은사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관리를 잘 하면, 이를 통하여 리더는 한 해 동안 공동체 가운데 그의 섬김을 가장 효과적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섬기는 과정에서도 공동체 가운데 부족한 부분, 연약한 부분을 리더의 은사가 채우는 모습을 보면서, 섬김 속에서 지속적인 창의력과 열정이 생겨남을 경험한다. 동시에 리더로 하여금 섬김 가운데 오는 영적 탈진도 방지하게 되고 리더 역시 이를 통해 오히려 더욱 깊은 영적 경험의 자리에 섬을 경험한다.


하지만 만약 리더가 자신의 은사 사용에 대한 관리를 잘 하지 못한다면, 섬김의 열매는 리더의 노력과는 반대로 부진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더 나아가 리더는 섬김의 탈진을 경험하게 된다. 왜 그런가? 이는 리더의 순수한 신앙의 부족문제 때문도 아니고, 리더의 섬김에 대한 열정과 헌신의 부족 문제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목표 없는 전쟁을 치루는 군인처럼, 리더의 육체적 건강과 시간이, 분명한 목표 없이 분산되어 사용되는 가운데 가져온, 리더의 은사 관리에 대한 영적 지혜의 문제인 것이다.


신앙 공동체에 있어서 섬김의 자리는 끊임없이 필요하고, 또 끊임없이 창조된다. 그러나 늘 필요하고, 해야 할 일이 한 없이 많다고 해서, 한 리더가 이를 다 감당 할 수 는 없다. 이를 잘 조절하지 못하고, 한 사람이 많은 것을 감당 하는 것은, 제한된 인간으로서 리더의 육체적, 영적 시간적, 문제를 야기시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세우도록 하셨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각각에게 다른 은사들을 골고루 허락하여 주신 것이다: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 (고전 12:8절 이하)


그런면에서 리더는 자신의 제한된 육체적 건강과 시간속에서, 가장 적절한 그러면서도 효과적인 섬김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자신의 헌신을 지혜롭게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가장 적절하면서도 효과적인 섬김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나의 섬김 사역을 결정할 수 있을까?


첫째, 나의 열정(passion)을 찾으라.


열정의 확인은 평상시 신앙 공동체에서 늘 나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 거슬리는 것(passion)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라. 예를 들면, 왜 이것을 이렇게 하지? 이렇게 하면 좋을텐데. — 등등. 남들이 보지 못하는 단점들이 나에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나의 열정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는 내가 채우라는 성령님의 부르심(calling)이다.


다음은 나의 열정을 찾아 볼 수 있는 기본적 목회 사역의 예들이다. 어디에 나의 마음의 관심과 열정이 가는가?




  1. mid-week child care ministry
  2. marriage ministry
  3. men’s ministry
  4. women’s ministry
  5. business & professionals small group
  6. single adult ministry
  7. sports ministry
  8. children, youth ministry
  9. cancer support group
  10. divorce recovery
  11. grief support group
  12. connection ministry
  13. spiritual discovery ministry
  14. neighborhood small group
  15. senior small group
  16. seeker small group
  17. welcome ministry
  18. food pantry group
  19. production team
  20. event-support team
  21. decorating team
  22. web page developer and artistic designer team
  23. music ministry
  24. drama ministry
  25. welcome ministry
  26. hospitality ministry

둘째, 나의 은사(spiritual Gifts)가 무엇인지를 찾으라.
예를 들면, 이것을 내가 섬기면 쉽게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등


셋째, 사역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라
무슨 사역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열정이 가는 사역 분야나 그룹 모임을 알아보라


넷째, 그 사역 공동체를 방문하라.
아 이 그룹에서 이 사역을 이렇게 하는구나.


다섯째, 그 사역을 단 기간 동안 섬겨 보라.
2주일에 한번 씩 혹은 3주에 한번씩, 한걸음 한 걸음 걸어보라.


여섯째, 헌신하라.
만약 그 사역이 나의 열정과 은사에 맞는다면 헌신(commitment)하라. 그러나 만약 그 사역이 나의 열정과 은사에 맞지 않는 다면 또 다시 첫번째 단계에서 시작하여 다른 사역에 참여해 보라.


이러한 사역 결정의 과정을 통하여 올해 결정된 섬김 사역은, 헌신하는 가운데 내게 공동체와 개인적인 영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영적 열매들이 함께 주어지게 된다. 그 구체적인 7가지 열매는




  1. 교회에서 내가 서야 할 자리를 알게 된다.
  2.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성숙하게 된다.
  3. 섬김의 시간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효율적으로 쓰게 된다.
  4. 나의 은사(spiritual gifts)를 확인하고 사용, 개발 하게 한다.
  5.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게 된다 (Honoring God)
  6.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돕게 된다(Help those around you)
  7. 앞으로의 지속적인 나의 섬김의 소명 (calling)을 발견하게 된다.

주님의 사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나의 열정과 은사에 맞는 사역을 찾아 섬기라. 그리고 나의 제한된 시간과 물질, 열정과 지혜, 지식의 화력을 집중하라. 이를 통해 보다 효과적인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섬김의 열매들과 리더의 개인적 성장, 그리고 리더의 지침을 방지하게 될 것이다

[김철수] 히브리서 9, 10장 강해


히브리서 9장 강의
율법의 완성/성취: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영단번(once for all)의 완벽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첫 언약인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것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의에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의 성질 때문에 율법은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간을 구원해보려다가 안되니까 새언약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특별한 목적을 갖고 주어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제사장의 직분은 백성들의 죄사함을 중재해주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이스라엘의 종교의식의 중심인 성소/성전에 상징적으로, 가시적인 방식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있는 지성소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대표하여 죄사함을 받고 나오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죄사함을 받으면서 관계를 (혹은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러한 종교적 삶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예표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인 제도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제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를 전달해주는 “문화적 형식 (cultural forms)”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은 특별한 종교 형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종교제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신 사랑과 은혜를 경험함으로써 오직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신약시대와도 같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여 아무리 완벽한 종교제도가 주어졌다고 해도 그 종교제도 자체가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죄성을 다룸에 있기 때문입니다.

(2) 이제 예수님은 율법의 제사제도를 좇아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인류)을 대표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12절; 24절). 상징적이며 오직 그림자일 뿐인 지상의 성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대표하여 하늘에 있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 선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다함은 인류를 대표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두번째 아담으로 오셨다는 내용과 상통합니다 (롬 5:12-19; 고전 15:22). 첫번째 아담이 불순종으로써 하나님과의 가장 첫번째 언약을 파기함으로 죄가 들어오고 그 결과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온 것에 반하여,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첫번째 아담과는 달리 완벽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구원받은 새인류의 머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즉, 그분이 그렇게 해주신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신뢰하기만 하면) 그분이 이루신 의가 “전가(transference)”되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토큰인 “하나님 수준의 의”를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에서 “의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라는 뜻입니다 (롬 1:17). 오직 은혜로만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러한 두 번째 아담은 동시에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인하여 구약의 율법의 규례대로 우리의 죄를 우리가 아닌 다른 속죄제물에 전가(transference)시킴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해줄 사명으로 우리에게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인간 (레위) 제사장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그의 족보나 계열의 다름이라기보다는, 속죄제물이 바로 죄와 흠이 없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 간의 죄성은 그 어떤 선한 율법도 결코 다 지키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영적 무능력 상태에서 자기의 의에만 만족하여 불행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완벽한 의인이 대신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주어야만 합니다. 그 길은 율법에 이미 예표로 나와 있었습니다. 율법의 제사 제도에 의하면 완벽하고 흠없는 그 누군가가 죄인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서 피를 뿌리고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만 합니다. 즉, 대속의 희생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흠없는 의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인간 세계에 오셨고,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바 로 하나님 자신이(성자께서) 두번째 아담(인간)이 친히 되셔서 의로운 희생을 치루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제사제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18에서처럼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가 바로 예수님의 대제사장 및 속죄제물되심의 결론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제사는 “영원 가운데 오직 한번으로” (영단번, once for all) 완벽한 제사입니다. 율법의 모든 그림자/모형은 이제 예수님에 이르러서 다 성취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 (요 19:30)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3) 그러므로 이제 죄사함을 얻기 위한 땅에서의 모든 종교적인 의식들은 불필요해졌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의 가책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가 약해짐으로써 죄책감에 끌려 죄사함을 위한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려 한다면, 바울에 엄중한 경책과 경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 .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14)”

(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의 공로에 힘입어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내용이며, 우리에게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9의 내용은 우리에게는 적용적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담력”이라는 말은 “자신감”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parresia인데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편안한 관계나 상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confidence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엡 3:12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하나님께 나간다고 풀어 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 위치입니다. 예수의 피의 희생제사가 가져다 준 결과는 바로 이렇게 완벽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회복인 것입니다.


(5)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약입니다. 그분의 깨끗하신 성결의 피 때문에 우리가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지, 우리의 그 어떤 종교적인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담력, 혹은 자신감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구원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영원토록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때문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우리가 다시 넘어지는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토록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분의 피로 우리의 본질이 바뀌어진 연고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코 다시 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cf. 롬 8:31-39).


(6) 그리고 바로 이 은혜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히브리서 10:23-25는 이러한 구원의 결과가 자연스럽게 신앙의 공동체로 나타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값으로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가치는 예수의 피값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롬 3:22). 바로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하며 그 값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이러한 인식에 의하여 우리의 세계관은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10:24-25의 말씀은 진정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강의
완벽한 구원
그리고 새언약의 삶의 원리 (확신!)


이 미 앞 강의에서 히브리서 10장에서 하여야 할 메시지는 이미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시 재반복하면서 옛언약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리스도의 영단번 제사의 효능을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확실하게 일어난 일들을 다시 정리하여 우리의 확신을 더 다져보고자 합니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지금까지 강의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우리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더욱 분명하게 해보고자 합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지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나갈 수 있고, 그 어떤 도전에도 흔들림 없이 우리의 신분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 10:1-9에 의하면 예수님은 옛언약을 폐하러 오셨다기보다는 새언약의 모형/예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옛언약/율법의 원형으로 오셔서 (당신이 친히 대제사장과 제물이 되셔서) 옛언약을 성취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 더욱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혜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성취하기] 하려 함이로다” (마 5:17).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매우 놀라운 결과가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2) 먼저 10:10에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그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룩함”이라고 하는 말은 역시 구약의 레위기의 주제로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하여야만 한다는 율법의 요구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레 11:44-45; cf. 레 18:5).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질 수가 없음을 우리는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이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져야만 되는 것으로서, 여기서 “거룩함”이란 말은 바울이 말하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 (칭의, justification)”과 같은 맥락의 개념입니다 (롬 3-4장). 신적 의를 우리의 죄와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고후 5:21)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불공평한 거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감격스럽게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3) 히브리서 10:14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영단번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케”라는 단어는 “완벽하게 하다”(teleioo)라는 동사의 현재완료형입니다. 즉,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써, (믿는)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용어대로 하면, 의롭다고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또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완벽하게” 하셨으며 그 효능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영원한 직분입니다 (히 7:24; 히 8:1). 다시 말해서,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의로운 자로서 완벽하게 영원토록 세우신 것입니다.


(4) 이것을 바울의 용어로 바꾼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롬 8:1-2; 갈 3:10-13; 갈 4:5; cf. 습 3:14-17). 예수님의 십자가는 또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갈 3:10-13). 그 결과 믿는 우리들은 결코 죄의 권세에 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몸이 연약하고 아직 우리의 몸이 구원받지 못하여서 시험에 들 때가 많지만, 우리의 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 아래로 더이상 끌고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넘어져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넘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롬 6:14).


(5)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자유는 방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슴을 주님의 가슴에 맞추어 책임있게 살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전에는 죄의 힘이 너무 강하여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도 죄책감과 육신의 정욕때문에 그러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가슴에 변화가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주님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함, 곧 영적 능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지키는 투쟁은 끊임없이 우리 삶 속에서 경험되는 영적전쟁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자유는 결과적으로 사탄의 권세와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의 힘으로부터도 자유하는 능력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6) 우리가 영적인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영역들은 바로 우리를 안팎으로 도전하는 세상 안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0:32-39에서 성도들을 격려하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핍박도 하고 유혹도 합니다. 사탄은 세상 뒤에 숨어서 세상 문화와 철학과 종교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끊임없이 기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문화관과 전통적인 가치관에 안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알려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탄과의 전쟁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전쟁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이 어떠한 특권이며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테스트할 수 있는 필연적인 영역이기도 합니다.


(7)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하여야만 영적전쟁터인 우리의 현실/삶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담대함(parresia)과 인내와 믿음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32-39절). 이 세가지 덕목은 모두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격의 결과요 열매들입니다. 나는 그동안 이슬람의 확신과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여 왔습니다. 영적인 전쟁이라고 해서 과격분자들처럼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영적전쟁은 내면의 전쟁이며 확신의 대결이요, 결국 사랑의 대결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나의 가치를 가장 경멸하는 사람들, 그래서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들을 찾아가며 심지어 저들이 원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찾아가서 그들과 대화하고, 그 대화와 만남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 선교입니다. 이러한 선교적 삶은, 히브리서를 통하여 확인했듯이, 진리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의 삶이 현존할 때에 비로소 세상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