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영]지역 코스타와 학생사역

이코스타 2007년 1월호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 온 것이 2001년 1월. 보스턴에서 청년부모임을 통해 청년사역과 자매사역이라는 비젼을 품고 달려 왔던 이곳. 하지만 보스턴 모임과는 달리 이곳 샬롯에 오니 너무나 다른 환경이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 하면 적막하다고나 할까? 섬기게된 교회의 특성상, 청년부 모임도 할 수 없었고, 일하고 있는 학교에서마저 함께 할 수 있는 성경공부 모임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 왜 이 곳에 있게 오게 되었는지 기도하던 중에 우연히 학교 성경공부 모임에 대해 기도하던 지체들을 만나 작게나마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렇게 5년이 흐르게 되었다. 그 세월동안 나에게도 변화가 있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양육하게 되었다.


그 5년간의 일을 돌아보며 미래를 생각해본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 처럼 몇몇 뜻이 맞는 사람들과의 모임으로 시작한 이 성경공부 모임이 그 규모가 조금씩 커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학생들만의 모임으로 시작 되었던 이 학교 성경 공부 모임이 예상과는 달리 조금 다른 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이 성경공부 모임이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모이는 한글어 성경공부 모임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관심 있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픈 되어졌고 지역 성경 공부의 양상을 띠?된 것이다. 예로, 교제와 말씀에 목말라 아이를 데리고 성경공부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자매, 언니 집에 방문하러 이곳에 와 단기간 머무르는 동안에 함께 했던 자매, 군대 제대 후 학교 복학 하기 전에 미국여행 와서 만났던 형제, 청년들에게 마음이 있어서 간식으로, 물질로 섬기셨던 집사님 등등. 나이도 형편도, 그리고 하고 있는 일도 모두 달랐다. 나이차가 어떨땐 30년 이상이 나기도 했다. 이 다름 아닌 다름은 지체들을 모으고 함께 하는데 약간의 어려움들을 갖게 하였다. 학생에 촛점을 맞출 수 만도 없고 그렇다고 학생이 아닌 지체들에게 촛점을 맞출 수도 없었던게 사실이었다. 더우기 지역적인 상황때문에 나에게 주어져 있는 상황과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 마저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많이 나를 힘들게 하였다. 그래서 인지 처음엔 왜 이런 상황에 내가 있어야 하냐고 하나님께 많이도 따져 물었던 것 같다. 늘 학생들에게 만 관심을 기울이던 나에겐 참으로 새로운 경험이긴 하였지만 지금까지 내가 섬겨오던 성경 공부의 모습과는 또 다른, 즉 나와 비슷한 상황의 지체들하고만 했던 성경공부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좋은 경험이었다 라고 지금은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땐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처럼 불편했던 것을 고백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게 하나님께서 만든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인데 말이다. 가난한자와 부유한자, 배운자와 배우지 못한자, 나이가 어린자와 나이가 많은자, 모두가 함께 어우러 질 수 있는 곳, 천국이란 곳… 다시 돌이켜 보면 학생이라는 작은 단위에 집중하다가 정말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시며 나누라 하시는 것을 잃어버릴 뻔 하기도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스턴에서의 청년모임처럼 같은 또래들과의 교제를 갈망했던 나에게 한 경험을 허락 하셨는데 그게 바로 2003년 노스 케롤라이나 gpKOSTA 였다. 이 지역 코스타를 통해그린스보로와 랄리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만나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네트워크를 그리고 있던 나에게 내가 있는 곳만 지엽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곳과 같이 힘들지만 말씀으로 제자 삼고 격려하는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가끔 지체를 섬기고 말씀공부 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 다른 곳에서 비슷한 상황에 힘들지만 꿋꿋이 말씀 공부하며 섬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생긴다. 지역 코스타 이후로 매년 같은 곳에서 노스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학생들이 모여 수양회를 열어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말씀으로 새로워지니 더욱 감사하다. 이제는 나에게 주어져 있는 이 모든 것이 축복인 것을 조금은 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이 나누어지는 곳에선 그 어떤 배경도 상황도 포함하여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경험하였다. 때로는 비슷함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오히려 다른 상황과 지체들을 생각하며 큰 그림을 보며 학생들과 함께 하는 것이 나중에 우리 지체들간에 더 유익이 있음을 믿는다. 학생사역을 통해 더 크고 넓게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안에 있게 됨이 감사하다.


현재 나에게 주어져 있는 상황에 더욱 솔직해 지면 젊은 학생들과 그리고 특히, 자매들에게 마음이 있었던 나에게, 결혼과 아이 양육의 큰 변화는 사역의 모습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교에서 일하며, 아이를 양육하며, 그 전에 섬겼던 모임과 사역을 똑같이 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임의 지체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고 격려하며 기도해 주었지만, 내 안엔 늘 안타까움과 아쉬움들이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모임도 그 전과 같이 자주 나가기가 어렵고, 섬기는 일도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이런 저런 모양으로 끊임없이 만나게 하시는 지체들을 위해 개인 성경공부나 만남으로 권면하고 기도로 섬기고 있다. 내가 있는 곳, 나를 있게 하시는 곳, 그곳에서 주신 영혼을 위해 함께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것이 나에게 주시는 비젼이고 소명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김인수 장로의 ‘자녀교육’

이코스타 2007년 1월호

이 글은 2001 KOSTA/USA에서, 고 김인수 교수님의 세미나를 녹취한 것입니다. 영원한 코스탄 고 김인수 교수님!! 그 분의 살아있는 자녀 교육에 대한 강의에 귀 기울여 봅니다.


김인수 교수
1938년 일본 동경 생으로 국제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로 일하는 한편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 실행위원, OMF 이사장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일찍부터 가정 사역에 관심을 보여서 기독교가정사역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거시조직이론’, ‘치우침 없는 걸음으로’ 등의 책을 펴냈다.


첫번째, 두번째 시간에는 부부가 어떻게 화목하게 가정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부부가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네 사람이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와 내 속에 있는 유치한 어린 아이, 내 배우자와 그 속에 있는 유치한 어린 아이, 네 사람이 결혼생활을 합니다.


제가 코스타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정신없이 상담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여러 가지 상담제목이 있지만, 제일 많은 것이 부부간의 갈등의 문제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두가지 경우 예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부부가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갈등을 합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의 차이가 보완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나하고 다른 상대방에 대해서 계속해서 인간적으로 요구하고 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돕는 배필로 살라고 했죠. 바라는 배필로 사는 한 그 결혼생활은 깨지게 마련입니다.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볼때마다 내가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준비해서 감사하고 기쁨을 누리면 가정은 멋있게 달라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두 사람을 붙여서 가정을 만들도록 설계하신 데에는 돕는 배필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식으로 살면 망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실 때 실수 안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아내를 보면 어쩌면 저런 여자를 만나서 사냐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지만, 가장 좋은 여자를 제게 주신 겁니다. 제 아내에게도 가장 좋은 남자를 주신 겁니다. 문제는 누구를 잘못 만나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잘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가정생활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상식대로 하면 안됩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도 설명서를 읽어보고 그대로 조립을 하고 작동을 시켜야 제대로 소리가 나는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의 삶을 살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설명서를 읽어보고 그대로 작동을 시켜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상식대로 제멋대로 작동시키면 거기서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두번째 시간에는 부부가 아름답게 살기위한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자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남자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자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감성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평생동안 계속해서 사랑을 확실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어제는 자녀교육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기업입니다. 이것은 부모로서 절대 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다른 것은 전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지만, 자녀양육은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보다도 더 중요하고 우선순위가 가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적인 양육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양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부모가 실패하는 것이 정서적 양육에서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그 아이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정신적인 양육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그 전에 정서적인 양육과 관련해서 한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성격을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보면 두 변수를 가지고 사람을 분류하면 백가지가 넘습니다. 외향적/내성적, 적극적/소극적 등등 100가지 넘게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A타입 성격/B타입 성격입니다. A타입은 빈틈없고 뭐든지 열심히 하지만 안절부절하는 성격입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기특한 성격입니다. B타입은 반대의 성격입니다. 성격좋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부모가 다루기 힘든 성격이기도 하지요. 예를 들면 아침에 깨워서 학교 보내기도 힘들고, 방도 잘 치우지 않구요.


자식은 A타입도 있고, B타입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B타입이고 아이가 B타입인 경우에는 부모가 자식을 야단치면서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B타입이고 아이가 A타입인 경우에는 어떻게 저런 아이가 태어났느냐면서 감탄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A타입이고 자식이 A타입인 경우 역시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A타입이고 자식이 B타입인 경우가 가장 문제인데, 부모가 자식을 견디지 못합니다. 저는 전형적인 A타입인데 우리 아이 중에서도 전형적인 B타입이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비틀었는지 모릅니다. 20년을 비튼 후에 제가 내린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제가 그 사실을 알았으면 그렇게 비틀지 않았을텐데, 그냥 B타입으로 자랄 수 있게 해주었을텐데 말입니다. 20여년간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정리한 것입니다. B타입 자녀를 보거든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36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를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A타입이 좋을까요, B타입이 좋을까요? 일견에는 열심이고 자기 일 잘 하는 A타입이 좋아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B타입은 사람을 끌어안는 재주가 있습니다. A타입은 자기만큼 해내지 못하는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는 반면에, B타입은 못난 사람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A타입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수련을 통해 B타입처럼 부드럽게 바뀌지 않는 한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여담이지만 A타입은 B타입에 비해서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도 4배가 높고, 발병 후 치사율도 2배가 더 높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B타입 아이를 마냥 놓아두어야 할 것입니까? 조금은 훈련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은사가 참 많지만, 음악의 은사는 없습니다. 만약 제 부모가 음악가여서 저 역시 음악가로 만드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천부적인 소질 없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훈련받았더라면 성가대원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슷한 원리로 어떻게 버릇을 고쳐갈지 이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막내 아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이불을 개고 나가는 적이 없었습니다. 훈련은 아버지의 책임이기 때문에, 제가 이불을 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눈깜짝할새에 도망을 나가버립니다. 그러면 아내가 이불을 개서 올려놓습니다. 타이르다가 안되어서 규칙을 정했습니다. 한번 이불을 개지 않으면 다섯번 이불개고 펴는 것을 반복하도록 하는 규칙이었습니다. 결국은 35번까지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불 개지 않는 습관을 고쳤습니다. 청소를 잘 못하는 습관도 청소하는 날을 정하고 검사받는 식으로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훈련 이외에는 자녀의 천부적 성격을 인정해주고 바꾸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각각의 자녀들은 모두 다른 인격체이기 때문에, 각각의 아이에게 주어진 은사를 인정하고 각각 다르게 키워야 합니다. 첫째 아이에게 적용했던 방법을 둘째, 셋째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아이가 가진 가장 좋은 점을 살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적이 일률적인 기준이 된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정신적인 훈련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조금 전에 중년의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코스타에 처음 오신 분인데 어떻게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갈라질 수 있느냐면서 깜짝 놀라셨습니다. 조별모임에서도 남녀문제가 심각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날 신세대의 문제는 인내심의 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부모로서 자녀를 강하게 키우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언제 자녀가 강해지는가? 고생을 해야 강해집니다. 자녀를 고생시키세요. 저는 가난 때문에 고생하면서 자랐는데, 지금은 그것을 감사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두렵기보다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심할 것이 있다면 고생을 하면서 성격이 굽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사랑으로 편하게 키우면, 성격이 곧기는 하지만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고생을 시키되, 사랑을 베푸십시오. 사랑을 많이 주면서 고생을 시키십시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나중에 독립된 개체로서 어른의 역할을 할 때에,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 책임질 수 있는 체질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체격만 좋아졌지, 정신력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계속 부모에게 의존하는 어린아이 말입니다. 인내심의 부족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저는 하교 때에 승용차에서 기다리면서 아이들을 데려가는 부모는 정신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압구정동에 사는 어머니의 아들이 해병대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진해훈련소에 면회가서 아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밤새도록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 부모들이 한국 부모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징병제도가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오늘날 같이 먹고 살기 쉬운 사회에서 자식 고생시키기가 쉽지 않은데, 군대만큼 고생시킬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이상의 환경을 만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자식을 참으로 사랑하거든, 훈련시키십시오.


저도 미국에서 공부한 아들이 있지만, 영어를 잘해도 카투사 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선에서 죽을 고생하되, 죽거나 많이 다치지는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 아이들의 불평이 있다면, 오히려 힘든 일을 겪고 와도 집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좋아하고 동정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아들은 눈이 나빠서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고 실망하는 부모는 우리 집밖에 없을 거라고 불평했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보충역 중에서 가장 고생하는 송추 방위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일선의 정규부대가 무너졌을 때 서울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는 부대입니다. 저는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 5시반에 일어나서 버스 두번 갈아타고 송추까지 가야 겨우 8시에 들어갑니다. 11시까지 자던 아이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첫날 다녀오더니 아빠가 좋아할 일이 생겼다고 이야기해서 무슨 일인가 물어봤더니, 대포에는 트럭이 끄는 대포와 사람이 끄는 대포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람이 끄는 대포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자기에게 걸렸다고 했습니다. 매일 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이겨내면 강한 사람이 됩니다. 동시에 격려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 고생만 시키면 외강내강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많이 먹으면서 고생하면 외유내강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왜 들어쓰셨을까요? 40년간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40년동안 광야에서 죽을 고생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육과 고생의 의지력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자식 사랑한다면 일부러 고생 시키십시오. 저는 아이가 서너살만 되면 한겨울의 추운날에 가게 심부름을 보냅니다. 안 나가려고 하면 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보내면 어쩔 수 없이 갔다 옵니다. 다녀오면 그때부터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일석이조 아닙니까? 하나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또하나는 아이에게 고생을 주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어느 학부모께서 제게 긴 편지를 쓰신 일이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딸의 이야기입니다. 엄마가 공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을 대신했습니다. 처음에는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는데, 결국 아이가 모든 일에 온갖 투정을 다 부려서 제게 배운 것을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대신에 아무것도 안하는 날은 밥을 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설겆이와 청소를 시켰습니다. 아이가 울면서 설겆이와 청소를 했는데, 엄마가 시키니까 하는데 친구들한테는 이런 거 한다는 이야기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가 엄마를 실망시켰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한 일이 아이가 보기에는 하찮고 창피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고생을 시켰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가 학원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청소하고 설겆이 끝나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더니, 다 끝내고 학원 버스 타고 학원을 갔다왔습니다. 그리고나서 옛날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자기에게는 공부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고마움을 그때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은 아이를 망치는 길입니다. 그것은 자기 멋대로 살게 내버려두는 것인데,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에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내심을 심어주십시오. 그래야만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바람직한 균형을 잡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이먼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회과학자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의사결정(decision-making), 즉 선택에 의해서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의사결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프로그램된 (programmed) 의사결정, 또 하나는 프로그램되지 않은 (non-programmed) 의사결정입니다. 프로그램된 의사결정은 너무 자주 해서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오는 결정입니다. 양치질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가는 것이라든지, 아이가 아침에 학교가는 것도 프로그램된 결정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왜 삶에서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가? 말씀이 내 속에 프로그램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 프로그램되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바람직한 행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간구하는 것보다 말씀이 프로그램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프로그램되면 엎어지든 넘어지든 제대로 행동하게 되어있습니다. 반면에 프로그램되지 않은 의사결정은 한번도 안했거나 별로 안해보았기 때문에 프로그램되지 않은 결정입니다. 어느 학교에 갈까, 누구하고 결혼할까, 어떤 직장을 택할까, 또는 코스타에 갈까 말까와 같은 것이 프로그램되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의사결정이 두 가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실(fact)과 가치관(value)이 그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규범을 넣어주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가치관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선봤다고 합시다. 용모가 준수한 여자, 순하게 생긴 여자, 부유한 장인의 무남독녀, 지성적인 여자, 착하게 생긴 여자. 이것은 여자를 보고 알게 된 사실(fact)입니다. 어떤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는 가치관(value)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제가 왜 코스타에 강사로 왔을까요? 코스타에 이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가치 때문입니다. 우리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원칙 중에 하나가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절약해서 열심히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것인데, 어려서부터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규범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서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가?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들어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의 가치가 나를 지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갖 능력을 다 한다고 해도 별볼일 없습니다. 빼어난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는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일일이 찾지 않고 어떻게 살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마련입니다.


사실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이기적인 합리주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더 당하기 때문에, 더 당하지 않기 위해 합리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통규칙을 어기거나 음주운전을 하다가 잡히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통규칙을 지키고 마시고 싶은 술도 안 마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행동을 하면 칭찬해 주고, 잘못을 하면 댓가를 치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 처벌이 무서워서 잘못된 행동을 피하다 보면, 그것이 버릇이 되고, 성품을 형성시킵니다. 프로그램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 집의 원칙이라면, 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 그에 대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현대의 부모들은 그런 체벌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었지요. 사실 이렇게까지 아이들을 내버려 두게 된 것은 최근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세대만 해도 부모님께 많이 야단 맞고 지냈으니까요.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얼마나 악동으로 놀았었나요. 그것이 악한 줄도 모르고 잘못을 했으니까요. 그런 것을 부모가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바로 잡아줄 수 있을까요?


첫째, 잔소리는 훈계가 아닙니다. 왜 부모들이 잔소리를 할까요? 자신이 자랄 때 부모들이 자기에게 잔소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잔소리를 하는 부모를 보면, 아이는 가만히 있는데 부모는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 댑니다.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잔소리는 훈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잔소리는 훈육성이 없는 충동적인 행동이면,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부모의 판단과 생각이 중심이 된 것이지,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잔소리는 아픔이 없습니다. 부모가 고민해 보지 않았으니까요. 잔소리는 희생이 없습니다. 부모가 인내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고민해 보지 않았으니까요. 잔소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아이를 좌절하게만 만드니까요. 잔소리는 희망이 없어요. 아이에게 길을 제시해 주지 않으니까요. 잔소리는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아이를 불안하게 만드니까요. 잔소리는 훈계가 아니라, 아이들의 열등감만 늘어가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을 보면,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도둑질을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야단을 치면, 아이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왜 재수없게 걸렸지? 다음에는 더 교묘하게 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 훈육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훈계의 목적은 ‘선한 양심’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충동적으로 야단을 치게 되어서 고함을 지르거나 주먹이 먼저 나가게 되면, 선한 양심을 가지게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훈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합니다.


훈육에 대한 제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충동적으로 야단을 친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게 훈계를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잘못을 한 경우에는 제 아내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직접 야단치지 않고, 메모를 해 놓고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집에 들어와서 잘못한 아이에게 ‘애야 안방으로 들어와’합니다. 야단은 반드시 단 둘이 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자존심이 많이 상하게 되니까요. 안방에 들어오게 하고는 묻습니다. ‘네가 이렇게 잘못했니?’라고 묻습니다. ‘네’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이런 이유 때문에 잘못되었고, 그것이 이렇게 큰 잘못이란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기준은, 우리 집의 원칙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 타이르고 보냅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그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 프로그램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또 다시 잘못을 하게 되면, 다시 안방으로 불러 잘못을 지적하고 타일러 돌려 보냅니다. 세번째 잘못을 저지를 때도 말로 타일러 보내는데, 그 때는 새로운 약속을 하나 합니다. ‘네가 세번째 똑같은 잘못을 했다. 너는 말로 해서는 못 알아 듣는 것 같으니, 다음에 또 잘못을 하면 회초리는 세대 맞는 것으로 하자. 괜찮겠니?’. 그래도 그 아이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되지요. 이제는 다시 방으로 불러서 ‘네가 지난 번에 다시 잘못하면 매를 맞겠다고 약속했지?’라고 하고 회초리를 때립니다. 그리고는 꼭 안아주고는 ‘네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너를 잘 양육해야 할 필요가 있단다. 그래서 때리는 거야. 너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도록 하렴’하면서 달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가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고, 그 이후에도 아이를 꼭 안고는 그 아이의 얼굴이 완전히 밝아질 때까지 사랑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아이를 때리려면, 평소에 아버지가 아이에게 충분히 사랑을 확인 시켜주었어야만 합니다. 평소에 시간적으로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사랑을 확인시키지 못한 부모는 아이를 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는 가능하면 때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큰 아이는 별로 때리지 않았지만, 막내는 조금 때렸던 것 같습니다. 대신 막내에게 얼마나 사랑을 확인 시켜 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확인 시켜 주기 위해,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저의 예를 들어보면, 제가 유학할 때 – 정말 바쁜 시기였는데 – 저녁 때면 아이들과 야구나 축구를 함께 하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매일같이 반복했습니다. 그리고는 7시면 잠자리에 들게 했죠. 여름 같은 경우는 7시면 아직 밖이 환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기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원칙으로 지켜왔습니다. 엄마 아빠가 바쁜 중에도 아이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 아직도 우리 아이들은 그 때를 이야기합니다. 아이들과 오래 있는 것도 좋지만, 있는 동안에 무엇을 함께 해 줄 것인가도 무척 중요합니다.


또 한가지 이야기를 해 보죠. 제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막내 아이가 3학년 때었던 것 같습니다. 한창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막내가 갑자기 ‘아빠 공기 해’ 그러더라고요. 한참 논문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공기 놀이라니요. 하지만, 그 10 20분이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잠깐만 기다려. 컴퓨터 세이브해 놓고’라고 하고는 아이와 공기놀이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지나서는 ‘아빠 공기 재미없다. 고무줄 놀이하자’ 하더라고요. 고무줄을 한쪽 끝은 책상에 묶고, 한쪽 끝은 내 발에 묶고 껑충 껑충 뛰더니만, ‘아빠 밖에 나가서 하자’ 그러더라고요. 낮에 집에서 일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는 판에 밖에서 아이와 고무줄 놀이하는 아빠라니요. 그래도 밖에 나가서 열심히 함께 뛰어 놀았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막내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빠 고마와요. 공기 놀이 해 주고, 고무줄 놀이 해주고…’. 그런 추억은 평생 갑니다. 이렇게 평소에 아이에게 사랑한 사람만이 아이를 야단칠 수 있습니다. 그저 잔소리만하고 고함만 치는 것은 너무 좋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간디가 쓴 우리를 파괴하는 7가지 죄라는 글이 있습니다. 간디가 쓴 인간이 저지르는 아주 잘못된 죄의 목록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2. 양심이 결여된 쾌락
  3. 성품이 결여된 지식
  4. 도덕이 결여된 사업
  5.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6. 희생이 없는 종교
  7. 원칙이 없는 정치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여러분이 아이들을 양육하실 때, 자녀가 어디를 가더라도 이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참석자 질문: 형제들이 자주 싸웁니다.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요?
김인수 답변: 형제 간에 싸웠다는 것 만으로 양쪽을 모두 야단치는 것이 좋습니다. 한쪽이 분명히 잘못한 경우에라도, 형제 간에 싸웠다는 것만으로 야단을 치고, 그 이후에 억울한 아이를 따로 불러 ‘내가 억울한 것을 안다’고 설명해 주는 편이 좋습니다.


참석자 질문: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 언제까지 도와주는 것이 좋을까요?
김인수 답변: 아이들에게 너무 늦게까지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아이들이 빨리 경제적으로 도와 줄 필요가 있지요. 만일 커서도 아이들이 경제적 도움이 필요하다면, 받을 생각하지 말고, 돈을 꾸어주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어째든 갚아야 할 돈이라고 생각할테니까요.


참석자 질문: 아이가 두세 살이라서 아직 어립니다. 이런 경우에 아이들은 훈계는 어떻게 하나요?
김인수 답변: 어리더라도 원칙에 따라서 훈계를 시작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 버리면, 그 패턴을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예들 들어, 아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다른 아이를 부르고 할 경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회초리를 들 필요가 있겠지요.


참석자 질문: 아이가 잘못은 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야단을 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야단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중에 야단을 쳐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인수 답변: 야단을 치는 경우는, 잘못을 한 상황과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이가 잘못한 일과 야단 맞는 것의 연결을 잘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참석자 질문: 아이들이 서로 싸웠을 때, 원인을 알기 위해 다른 집 아이에게 ‘왜 싸웠느냐’고 물었더니, 그 집 부모가 당혹해 하더라고요.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김인수 답변: 아이들에게 왜 싸웠는지 이유를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에 대한 답변을 이미 다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왜 싸웠는지를 다그치는 것은 아이에게 거짓말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싸운 이유를 묻기 보다는 싸웠다는 것 자체로 야단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참석자 질문: 낮에 엄마하고 있을 때 잘못한 일을, 저녁에 아빠에게 이야기 해야 하나요? 때로는 아이가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할께요. 아빠에게 말씀하지 마세요’라고 그럴 때가 있거든요.
김인수 답변: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는 너에 관해서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엄마가 아빠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고자질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 모두가 너에 대해 다 알고 더 사랑하기 위한 것임을 잘 설명해 주면 됩니다.


참석자 질문: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말썽을 부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냥 야단을 치자니, 아이들의 기가 죽을 것 같은데요.
김인수 답변: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원칙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기 죽을까 봐 중요한 것을 놓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독교 신앙과 지성, 그리고 학문하는 삶 2-장성준

이 글은 2006년 미주 코스타 장성준 교수의 ‘기독교 지성’ 세미나를 녹취한 것입니다.



장성준 교수: 미국 올바니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현재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의 사회학과 부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5여편의 논문을 미국사회학, 범죄학, 사회복지학, 그리고 심리학 학술지에 발표하였으며, 현재 미국전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성(spirituality)과 영적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미국 대학생선교회 (Campus Crusade for Christ)의 Christian Leadership Ministries로 부터 2002년도 Erick Nilson Achievement Award and Grant를 수상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지성적인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서 만든 인간도 지성적인 존재다. 그래서 지성적인 부분을 신앙생활에서 배척하거나 무시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온전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별嚥【?너희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을 때 영어로 perfect인 단어가 원문에서는 balanced라고도 번역이 됩니다.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전인격,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과 지성과 감정 등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교회, 가정, 직장, 자녀를 키우는 일, 공부하는 일 등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기독교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오해가 많은 부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절대로 반지성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지성적인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잘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thinking christian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 신앙 생활은 온전한 신앙생활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자유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함이 있게 됩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불안함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서 교회 안으로 도망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신앙과 지성은 물과 기름의 관계가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것을 분리시킬 때는 불안전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관계가 아니라 떨어져서는 안되는 관계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성경을 먼저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올바른 기초없이 기독교 세계관을 쌓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은 성경을 바탕으로 정리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관 공부를 했을 때 우리가 지성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세계관 공부는 성경공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는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만 해서 전도하다가 크리스챤은 왜 저렇게 무식하지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자연계, 물질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할 때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관들도 일련의 가정을 내용으로 하는 믿음 체계가 있습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과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도 어떤 믿음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는데 그 믿음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기독교인들만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이 세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믿음체계를 출발점으로 사물을 보고 관찰하고 설명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설명이 있을 때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그런 비기독교적인 믿음체계를 바탕으로 한 설명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풀어서 분석하고 비판하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적인 체계를 논리적으로 지성적으로 변호하는 것이 기독교 변증입니다. Christian apologetics가 성경적인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갖고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물어볼 때마다 잘 설명하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줄 수 있도록 예비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이러이러한 것이고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지, make sense한지 차근차근 설명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부분에 훈련이 거의 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으로 나가기 보다는 교회로 도망가는 경우가 많죠.


하나님은 무궁무진하게 풍성하신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절음발이 신앙생활하느라 힘든 거에요. 전도하다가 싸우게 되죠. 삐딱하고 뺀질대니까 화를 내게 되지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온전한 모습을 다 훈련받지 못해서 그렀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번에는 학문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기독교 학문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합시다.
제가 이 세미나에서 기독교 학문이 아닌 것을 먼저 말합니다. 첫번째 것은 spiritualizing하는 것을 기독교 학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영해하는 것이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성경적인 용어로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유럽 공동체가 유럽 연합으로 만들었잖아요? 그것을 성경의 계시적인 얘기로 열 마리의 짐승이 모여서 연합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해석해서 성경에서 미리 얘기하는 것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부 맞는 해석은 아니지만 전부 틀린 것도 아니죠. 그런데 여기서 기독교 학문이라고 하는 얘기는 그런 영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범죄학을 연구하는데, 범죄를 왜 저지르느냐 했을 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맞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범죄학자로서 미국범죄학회에 가서 인간의 범죄는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라고 말하면 나가라고 얘기합니다. 신학적인 context에서 말하면 괜찮아요, 그러나 그 아이디어를 전하는 모습이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됩니다. 영해가 틀린 것은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학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simplistic fundamentalism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쓰신 편지에요. 일종의 글이란 말이에요. 글을 읽을 때 어떤 부분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하는 부분이 있고 어떤 부분은 비유로 쓰는 부분이 있죠. 그것을 구별을 못해서 성경에서 예수님이 독을 마셔도 죽지 않을 것이요 라고 하셨다고 독을 마시고 죽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영생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에요. 어떤 부분은 비유로 해석해야하고 문자로 해석해야하는 부분이 있어요. 애들이 말 안 들으면 집 나가라고 말하죠. 그때 아들이 집을 나가면 안 되요. 거기서 집 나가라는 말은 속이 상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직역하면 좀 모자른 행동입니다. 성경도 직역해야하는 부분이 있고 비유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Simplistic fundamentalism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부분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극단적인 태도가 있어요. 그것은 기독교 학문이 아니에요.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미팅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미국 범죄학회같은데 크리스챤 미팅이 있어요. Prayer meeting도 있습니다. 서로 교제하고 격력합니다. 크리스챤들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격력하는 크리스챤 활동이 아닙니다.


크리스챤 스쿨에서 가르치는 교육내용도 아닙니다. 성경 클래스가 있습니다. 진화론 같은 것을 가르칠 때 창조론을 바탕으로 비평하는 것을 가르치던지. 일종의 패러럴리즘입니다. 세상에서 가르치는대로 가르치고 교회가 가르치고 싶은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종교학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신학적인 이론이 기독교 학문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기는 한데, 그것을 가르켜서 기독교 학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학문의 정의는 무엇인가? Working definition입니다. 각학문 분야의 근본적인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성경의 기본 원리, 성경의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개념을 계발하고 발전시켜 주요 학술지에 발표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연구의 부분과 교육의 부분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얘기하는 기독교 학문이라는 것은 성경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얘기하는 원리를 각자 공부하는 학문의 분야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원리 중에 하나가 인간관이 있습니다. 인간관에는 기독교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만들었죠. 성악설과 성선설이 있죠.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Empirical investigation이 아닙니다. 성악설은 인간이 원래 이기적인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가정하고 그 위에 이론을 만듭니다. 범죄학 이론에서 성악설 이론에 바탕으로 한 것이 social control이론이 있습니다. 범죄는 사회 통제가 부재하거나 비효과적일 때 범죄가 결과로 나온다고 합니다. 만약 성악설을 출발점으로 범죄를 설명하면 원래 인간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악한 그런 동기를 갖고 태어났다면 인간을 통제하지 않으면 무슨 결과가 벌어지겠어요? 온갖 나쁜 일들이 벌어지겠죠. 그게 범죄입니다. 범죄가 많은 지역은 사회통제가 낮은 통제입니다. 싱글 패어런츠 가정의 청소년들이 비행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면 부모님이 혼자밖에 없을 때는 가정내에서 사회통제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이 예에서 보면 성악설이라는 가정에 기초해서 범죄를 설명했어요. 그러면 성선설, 루소 같은 사람의 주장,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났다고 봅니다. 교육학에 큰 영향을 미쳤죠. 루소는 우리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은 순수하고 퓨어하기 때문에 출발은 innocent했다고 합니다. 왜 범죄가 있냐는 것은 사회의 여러 제도나 문화적인 것이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켰다고 봅니다. 사유재산제도가 사회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루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회의 제도나 환경이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그 결과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어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해답입니다.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수단으로서 제시한 것이 교육입니다. 그래서 루소의 철학이 현대 교육에 영향을 많이 미쳤습니다. 크리스챤 가운데 교육학을 공부하는 분들은 루소의 철학을 비판한 위에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쪽이 성경적인 원리인가요? 둘다 성경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성악설이 맞는 것같기도 합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나는 선한 일을 하고 싶은데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일을 행한다고 괴로와합니다. 성선설도 맞는 것도 같네요. 우리의 마음에 선한 일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성경적인 가정은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여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성경적인 인간관은 인간이란 원래 선하게 만들어졌으나 built in flaw 삶 속에서 선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이룰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선하고자 하는 소원과 그 소원하는 것만큼 선하게 살지 못하는 딜레마에 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실제 보면 인간이 사는 모습을 보면 성악설, 성선설보다는 성경적인 시각이 옳은 것같습니다. 기독교적인 학문의 기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지성을 바탕으로 가르치는 것. 실증적으로도 분석하고 인간의 영성을 실증적으로 측정한다는 말입니다. operationalize하고 empirically measure해서 analysis하면 relation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이 거부감을 가질 것이지만 성경적인 아이디어를 실증적인 이론체제와 개념 용어를 통해서 소개하면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문을 왜 해야하는가 생각해봅니다. 고등학교까지 교회 잘 다니다가 대학가서 절반 이상의 크리스챤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경험적으로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노르망디에서 상륙하는 군인들이 마치 고등학교까지 교회생활 잘 하던 학생들이 대학교 캠퍼스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캠퍼스에 발도 못딛고 죽은 숫자가 엄청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렸을 때부터 성경공부 시키고 여름 성경공부시키고 중고등학교 잘 해서 보내도 대학교에서 살아남는 숫자가 많지 않아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하는 것을 기독교 학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 이유는 대학교 캠퍼스에 갔을 때 학문이 비기독교적인 학문들입니다. 그리고 비기독교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아주 그럴듯한 틀 속에서 그럴듯한 과학적인 실증적인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교회에서 성경공부는 좀 했고 성경구절은 암송했지만 생각하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 오히려 중고등학교 때 사고가 발달하는데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해요. 그런데 질문하면 미움받아요. 선생님이 대답하기 보다는 본인도 생각을 안 한 것을 물어보니까 당황스럽겠죠. 그런데 교회의 분위기가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이슈에 관해서 지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훈련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대학교에 가면 실패할 수 밖에 없는거에요. 캠퍼스에 발을 대자마자 다 죽는거에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아이큐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게 맞는 얘기같습니다. 진화론을 가르치면 그게 절대적으로 맞는 것같습니다. 살아남는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그렇게 젊은 지성들이 대학교에 가면서 신앙을 떠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독교 학문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같습니다.


미국의 교육계가 특히 대학이 완전히 세속 세계에 넘어갔어요. 그것의 근원이 60년대 70년대 문화적인 운동, 히피운동, 성혁명, 여권운동 등이 있었습니다. 문화적인 변동이 많았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학문적인 비판이 노골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미국의 교회들이 학문적인 과학적인 지적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도망갔습니다. 교회, 크리스챤 스쿨 등으로 도망갔습니다. 과학자,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니까 그쪽으로 가는 것을 죄악시했습니다. 그래서 60년대 70년대에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 비기독교인이었습니다. 크리스챤들은 학문을 반기독교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언론, 미디어, 연예에서 기독교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저널리즘에서도 후퇴했습니다. 교회 안으로 도망갔습니다. 교회 안에서 뜨거운 예배와 찬양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을 완전히 놔두고 교회로 간 것입니다. 그 결과로 20, 30년 후에 대학 캠퍼스가 완전히 불신자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지성의 관점에서 학문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장터를 다 내준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당연합니다. 대학교뿐 아니라 문화의 주요 장에서 모두 빠져 나왔습니다. 이미 세상이 모든 영역을 장악했어요. 그래서 그 결과를 지금 맛보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들이 교회를 나가기는 하지만 지성적으로 리버럴한 것이 그때 시작된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과 편하게 볼 영화가 없는 것이 그때 시작된 것입니다. 기독교 학문은 매우 의미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도 비슷합니다. 제가 답답한 것이 한국에 그렇게 교회가 많은데 문화가 변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미국의 문화의 주요 요소가 반기독교적이냐는 것입니다. Pure art보면 아주 황당한 것 많습니다. 예술과 문화 분야가 포스트 모던 분야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사회학, 심리학, 영화, 언론 등에 영향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 학문에 소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교회에서 토론되고 어떤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교는 다음 세대를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다음 세대를 결정하게 됩니다. Change the universitie, you change the world이런 말이 있습니다. 2차대전에 나찌 정부가 유대인들을 학살했죠. 극소수의 사람들이 살아남았습니다. 빅터 프랭클린은 나찌의 죄악이 독일 나찌 정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독일의 대학교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허무주의, 실존주의, 다윈의 진화론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히틀러는 책을 많이 안 읽었는데, 다윈의 진화론과 니체의 책을 탐독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정치적 사상을 형성하고 유대인 600만명의 학살을 추구한 것입니다. 우월한 종이 있고 열등한 종이 있습니다. 열등한 종은 도태되어야 하고 우수한 종은 남습니다. 진화의 법칙을 써포트 하기 위해서 열등한 종을 없애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니체의 철학에 따르면 신이 죽었기 때문에 인간이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권위체계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결정할 수 없어요. 인간 중에 파워를 갖고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리면 파워만 남아요. 진리를 중시하는 사회는 파워가 있어도 진리가 우선시됩니다. 진리, 기독교 학문을 다시 부활시켜야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학자들에게 있는 엄청난 소명입니다. 기독교 학문이 교수들이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여기에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문화적 대사명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잘 다스리라는 명령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의 각 분야에서 하나님의 원리를 나타내는데 노력을 해야합니다. 지금 미국교회에서는 문화적 대사명에 대한 강조를 합니다. 많은 한국 교회에서도 큰 호응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를 잘 연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이즈에 대해서 여러가지 얘기하지 않습니까?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을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이 성을 만들었을 때 그 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잘 누리면 깊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데요, 그 디자인을 어겼을 때 그것이 성병으로 나타나건 낙태로 나타나건 무질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발견하는 원칙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 공예학자들이 보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색깔의 조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자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 역사학자 한 분이 책을 썼는데요,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기독교 신앙을 얘기했는데, 앨럼나이 신문에 기사가 났는데, 많은 편지가 왔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뭔가 하나님을 대변하면 세상을 반발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면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을 드러내는 것을 언제 해야하는가 하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테뉴어를 받기 전에 할 것인가 테뉴어를 받기 후에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테뉴에를 받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루이지아나로 옮겼습니다. 테뉴어에서 짤렸습니다. (웃음) 그러나 그때 제가 speak up하지 않았으면 제가 지금도 하고 있지 않았을 것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잘못된 이원론, 미국의 학계가 자연주의적 관점이 지배합니다. 자연주의 관점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바로 낙제입니다. 자연과학 연구를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하지 않으면, intelligent design을 얘기하면 원서를 받지도 않습니다. 지성적으로 보아도 매우 폐쇄적입니다. Methodological naturalism이죠. Intellectual criticism입니다. 진리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듣기 좋은 얘기를 하도록 합니다. Pluralism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다원주의가 잘못된 것은 multi-cultural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다 동등한 것으로 하자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anti-intellectual하다는 것이에요. 다른 문화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상반된 주장을 하는데, 비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문을 할 때 중요한 것이 지성적인 이슈이고 영적인 이슈입니다. 도덕적, 문화적 상대주의가 큰 문제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절대진리의 거부의 문화가 있습니다.


실제 예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노르트 데임 대학의 철학자 애번 프랜티카 교수님, Christian theist이십니다. 데이빗 랄슨, 듀크 대학에서 정신분석학, 종교의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하고 프로이드의 종교는 나쁜 영향이 있다 것이 주류 견해였는데, 그러한 견해가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필립 존슨, 유씨 버클리 법과 교수였는데, intelligent design에 대해서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양쪽의 논리적 주장을 듣고 진화론과 intelligent design에 대해서 연구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고 지적 설계를 적극 지지하고 계십니다. 마이클 힉, 과학적 시각에서 본 진화론의 문제점, irreducible complexity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이런 분들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학문적 과제에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기독교적 개념적 모델을 설명하고 마칩니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 기독교적 세계관, 물질론적 세계관이 있습니다. 어느 관점이 맞는 것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자연주의적 이론, 기독교적 이론도 어떤 믿음 체계에서 출발한 것에서 동일합니다. 믿음체계에서 출발한 것 자체는 문제가 없어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관찰의 결과들이 어떤 세계관이 더 일관성이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과학은 증명하지 않습니다. 통계적으로 어떤 것이 더 나은가를 설명하기만 합니다.


어떤 정책을 토론하거나 지성적인 문제를 얘기를 할 때 성경책을 들고 토론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혼전 동거하면 결혼을 안정적으로 만드는가? 인본주의적, 자연주의적 견해에서는 동거해서 트라이해보고 결혼하면 더 안정적이지 않겠는가? 이혼율을 낮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관점에서는 커미트가 없는 동거는 사람들의 이혼율을 높이게 됩니다. 여기서 과학적 데이터를 동원해서 두 집단을 비교해보면 이혼율이 높게 나옵니다. 기독교적 설명이 맞다 라고 주장할 범위가 찾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계속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태형 목사의 ‘자녀교육’

이코스타 2007년 1월호

이 글은 2006년도 KOSTA/USA에서 고태형 목사의 ‘자녀교육’ 세미나를 녹취한 것입니다.


고태형 목사는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 신학대학원, Drew University에서 신학석사를 Union-PSCE에서 교육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현재, 미국 LA소재 선한목자 장로교회 담임목사이며 “말씀과 함께”라는 미국장로교회 성경공부 시리즈 이사야서, 출애굽기, 및 빌립보서, 골로새서의 저자이다.





요람속의 고향이라는 이야기에서 시사하는 바는 자녀양육에 신경쓰지 않으면 어느새 자녀들은 다 자라서 여러분 곁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너무나 빨리 갑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에는 아이들이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금방 아이들은 부모의 곁을 떠나갑니다. 저희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아들을 대학에 내려놓고 와서 슬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을 해서 집근처에서 직장을 잡아 와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의 자녀를 향한 여러 꿈중에 하나는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아이들에 대해서 꿈을 가질만한 여유조차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McDonald에 가면 Happy meal을 많이 사는데 그것이 맥도널드 매상의 40%정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 통계는 아이들을 이겨낼 부모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Happy Meal을 먹으며 행복해 하는 광고를 보면서 그냥 자녀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자녀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녀양육의 목표로 하는 것을McDonald식 자녀교육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땅에 살아가면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다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부모의 슬하에 있을 때에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녀양육할 때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실까 성경말씀 로마서 8:29을 함께 읽어보며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가길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기를 꿈꾸고 계십니다. 우리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화하는 것은 자녀가 행복하기는 바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양육의 목표가 된다면 자녀들을 향해 하는 모든 일들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많은 부모들이 우선순위에서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사기 2:7 말씀을 보면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함께 어려운 시간을 거쳤을 때에는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써있습니다. 마치 미국 1세대가 이민초기에 고생고생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10절에 보면 그 후에 일어난 세대들은 하나님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전수가 안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모르것 뿐만 아니라 1절을 보면 바알, 풍요의 신을 섬겼습니다. 요새 이민교회들을 보면2세들이 고등학교까지는 교회에 잘 나오지만 대학교 가면서 교회에서 멀어집니다. 그리고 풍요의 신을 쫓아 갑니다. 신앙교육이 잘 못되면 자녀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다고 했습니다. 부모님들 어느 누구도 자녀들이 재앙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소홀하다 보면 자녀들 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자녀의 activity를 우선하게 되니까 교회에서 봉사, 헌신들이 뒤로 갑니다. 특히 주일날 오전에 많이 activity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님들이 부추기는 때가 많습니다. 코스탄들은 우선순위를 제대로 세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무엇이 성공적인 삶이라 생각하십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95%가 좋은 부모가 되는것, 90%가 행복한 결혼생활, 12%가 부자가 되는 것, 8% 명예를 얻는것 순서였습니다. 다음에 당신은 무엇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냅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95% 돈버는 것, 90% 명예를 얻는 것, 20% 행복한 결혼생활, 7%만을 좋은 부모가 되는 것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시간이 행복한 자녀교육이라는 강의인데 사실은 좋은 부모되기 시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여야 하고 그래야 좋은 부모가 되어서 좋은 자녀양육을 할 수 있습니다. Mrs. Doughtfire라는 영화를 보면 부부생활과 자녀양육에 대한 좋은 insight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와 아이를 셋낳고 양육하다가 별거를 해서nanny로 가장해서 들어가는데 아내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왜 혼자 살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wonderfully different였는데 terribly different로 됬답니다. 이런 내용을 이전에 남편과 이야기해 본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혼자 울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부부간에 대화가 없다고 합니다. 서로의 차이에 대해서 대화가운데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제 부모로서의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깊은 유대감을 형성해야 합니다. 관계의 법칙은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깊어 질수록 자녀는 부모의 신앙과 가치관을 더 많이 받아들입니다. 관계가 소원해 질수록 가치관을 전수하려 해도 자녀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비결 여덟가지.




  1. 조건없는 사랑. 착하게 하면 이뻐하고 말안들으면 미워할거야라는 말은 좋지 않은 말입니다. 어떤 조건에서도 부모님이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2. 계획된 시간을 자녀와 가져야 합니다. 가족과의 시간을 일정표에 넣어야 합니다. 아이들과의 약속도 지도교수와의 약속보다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나 가족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면 안됩니다. 아이 여럿이 있을 경우에 각자와 일대일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관계를 좋게 만드는 좋은 방법입니다.
  3. 집중된 관심. 아이가 필요한 이야기하고 요구할 때에는 다른 일을 중단하고 눈마추면서 아이들에게 집중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반대로 부모님께서 아이들에게 필요한것을 요구할 때에도, 심각성을 알려주어야 할 때에도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4. 지속적인 의사소통. 아이들에게 세계중심이 너희가 아니고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려 주어야 합니다.
  5. 육체적인 접촉. 연구에 의하면 어린 딸이 아버지의 적절한 관심을 받지 못하면 다른 남자에서 관심을 찾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6. 함께 즐기기. Monopoly, jenga등등 게임을 하면서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합니다.
  7. 놀이뿐만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플 때에 하나님께 기도해주고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아플 적에도 아이들이 기도하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때 축복하고 기도해주는 것이 참 좋습니다.
  8.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가르치는것뿐만 아니라 보고 듣고 배우게 되있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녀들은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알면 부끄러운 것은 숨기지 말고 하나님앞에 내려놓고 고쳐 가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직업이라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교육하는 것을 기쁘게 감당하도록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시간은 금방 흐르고 자녀양육을 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들의Multiple intelligence을 고려해야 합니다. 학교교육은 논리수학적인 지능에만 포커스를 하지만 과연 자녀가 어느 능력이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느 사람은 Word smart, 언어능력이 뛰어나고 다른 사람은 Space smart, 공간능력이 뛰어납니다. 디자이너는 원단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다른사람은 Body smart, 운동능력이 뛰어납니다. 어떤사람은 Music smart, 음악능력이 뛰어납니다. People smart, 타인의 관점을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Self smart, 생각의 정리를 잘하고 직관력이 있는 사람으로 조언을 잘 해 줍니다. Nature smart, 자연물을 보고서 좋아하는 사람으로 연구를 하면 좋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어떤 것에 뛰어난지 관찰을 하고 격려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중문화권에서 사는데 어떻게 교육해야 하나 생각하실 텐데 자녀들의 언어교육면에서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는 bilingual 이 built-in되면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와의 대화단절이 되지 않습니다. 한가지 혼돈하기 쉬운 것은 미국문화가 모두 성경적 문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하는 것, 아이들이 하는 것이라고 그냥 그대로 다 따라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잘 모르면 신실한 미국인 기독교인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미국의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guide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학교에서 volunteer할 때에 영어가 서투르다고 겁먹지 말고 자율적으로 참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질수 있도록 문화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체벌에 관해서 살펴보면 어떤 부모는 상처때문에 사랑을 전혀 베풀지 않는 분이 있고 훈육은 없고 사랑만 있는 분이 있습니다. 훈육을 전혀 하지 않는 부모도 있고 독재적인 훈육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사랑은 없이 훈육으로 교육하는 sound of Music의 폰트랩 대령처럼. 약물중독된 부모의 경우처럼 무관심한 부모도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훈육이 있으면서도 사랑이 있는 부모입니다. Correta Henderson라는14살짜리 딸의 엄마가 딸이 매일 지각하고 만안들어서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activity를 시키지 않겠다고 하고 큰길거리에 board를 들고 함께 서있기로 했다는데 나중에 완전히 바뀌었다고 합니다. 체벌은 목적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체벌은 목표가 파멸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고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징계에 대한 성경말씀은 잠언 10:17을 보시면 됩니다. 징계때에는 명확한 경계선을 그어주어야 합니다. 징계때에 말을 하셨으면 지키셔야 합니다. 마음이 아프다고 그냥 넘어가면 징계의 효과가 없어지게 됩니다. 징계의 결과는 단기적 아픔보다도 장기적 유익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조한상] 2006년 12월에 읽은 다섯 권


2007/1


지난 달 (2006년 12월)에는 5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모두가 조금은 오래된 책들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늘 이렇게 고전만을 선호한다고 생각지는 마라.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인터넷 서점의 신간 코너를 찾으며 사니까.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스탠리 하우어워스, 복있는사람


스 탠리 하우어워스 (Stanley Hauerwas) – 이 책의 뒷면에는 그를 ‘<타임>이 선정한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나는 그를 존 하워드 요더 (John H. Yoder)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신학자로 알고 있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이름을 아무리 검색해도 한 권도 찾을 수 없어 늘 아쉽던 차에,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는 책 제목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추천인이 김회권 목사, 김기현 목사, 신원하 교수였으니, 책을 구입하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부산 수영로 교회 김기현 목사의 간결한 서평이 실려져 있다. 김기현 목사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책이 한국에 거의 소개가 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 개인의 판단으로는, 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심장부에서 자라나 재세례파인 존 요던 (John, H. Yoder)의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자(pacifist)인 점, 그에 더하여 미국과 자유주의 양자에 대해 전투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실천적 성향, 거기다 자연신학?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칼 바르트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수주의를 닮은 데가 있는지라, 진보/보수 양 진영 모두에게 두루두루 통하는 것이 도리어 약점이 됨으로써 딱히 절대 지지층이라 할 만한 이들이 없는 것이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더 없이 절실하지만, 동시에 삼키기에는 쓰디 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 탠리 하우어워스는 우리가 늘상 쉽게만 해 오던 주기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심도있게 다루면서, 주기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기도한다면, ‘기도함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되고, 이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다’고 한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또 그 기도를 살아낸다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를 도전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 자체가 상당한 도전이었슴에도 불구하고,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를 고려할 때, 찐한 아쉬움이 남는 것 왜일까. 그의 교회관이나 윤리관이 명확히 드러났다고 하기 어려울 뿐더러, 그의 색깔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 책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첫 번째 번역판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좋았지만, 그만큼 아쉬움이 더했던 책. 이제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다른 책들을 기대해 본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Howard Snyder, 생명의 말씀사


참 된 복음은 어떤 경우에도 식상한 것이 될 수 없다. 복음 그 자체로 늘 새 포도주이고, 우리는 그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한다. 1981년에 초판이 나온 책이니까, 벌써 25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책을 구입한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25주년을 기념해서 개정판이 나왔다. 내가 구입한 것은 정말 예스러운 필체와 대단히 어색하게 번역된 사람 이름이 눈에 많이 거슬리는 책이었다.) 하워드 스나이더 – 최근 나의 관심을 온통 빼앗아 가 버린 메노나이트 계열의 신학자 존 하워드 요더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고, 이미 ‘참으로 해방된 교회’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꽤나 친숙한 저자이다. 더구나 최근 신간 목록에는 IVP에서 나온 ‘교회 DNA’라는 책으로 계속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어 전혀 낯설지 않은 저자이다.


하 워드 스나이더는, 책에서 현대 교회가 담을 새로운 부대로 소그룹을 제안한다. 이미 소그룹에 대한 논의가 지나칠 정도로 활발하게 진행된 지금에 이 책을 볼 때, 그 제안에 대한 감동이 조금 덜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성 세가지, 다시 말해, 무언가 거룩한 성전을 세우려고 하고, 신에게 제물을 드리려고 하며, 또 신 앞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이기에 중간에 매개인을 세우려하는 단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성전되셨고, 스스로 제물되셨으며, 또 스스로 제사장 되심으로 이 세가지를 모두 만족 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성이 자꾸만 이런 종교적 성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런 문제의 해결책으로, 소그룹을 통해 구성원의 은사를 잘 활용할 수 있게 하여 진정한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아이디어는 성전이 아닌 성막으로 유동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므로, 기존의 건물을 능가하는 유연한 공동체를 만들라고 한다. 모두 14개의 장을 통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교회에 대한 주장은 현대 교회가 여전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귀한 이야기들이다.


 “C.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 루이스 마르코스, 복있는사람


이 책을 구입한 것은 2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C.S. 루이스의 책들을 읽으면서 동시에, C.S. 루이스에 관한 책들 또한 재밌게 읽고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루이스 vs 프로이트’나 ‘반항적인 회심자 C.S. 루이스’같은 책들을 통해, 제 삼자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루이스를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던 시점에서 ‘C. 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이 출판된 것을 보고 바로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읽지 않았을까. 그냥 그렇게 상당기간을 서재에 꽂혀있었다.


내 가 섬기는 두개의 성경공부 모임 중, 토요일 오전에 모이는 모임에는 유난히도 무신론자가 많이 있다. 그 중 한 형제의 경우는 모태신앙으로 평생을 교회를 다니다가 갑잡스레 회의가 들어, 무신론자를 자처하며 지낸 지 어언 몇 년이 흘러 버렸다. 무신론자로 돌아선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 한가지가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시는 것 같은데, 자신은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렇게 열심히 찾았는데도 만날 수 없었던 하나님이라면, 다른 사람이 만난 하나님도 모두 착각일 가능성이 높을테니까. 그렇게, 그 형제가 우리 모임에 참석한지 8개월정도 지났다. 그리고, 몇 주 전의 일이다. 조금씩 마음을 열던 그 형제가 신의 존재를 고백하게 되었다. 짧은 휴가 기간 동안 C.S. Lewis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때마침, 오랫동안 공부하던 창세기를 마치게 되었고, 다음에 공부하기로 한 히브리서를 시작하기 전에 얼마간의 시간을 그 형제가 깨닫고 경험한 C.S. Lewis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 공부를 준비하는 가운데, 전에 읽지 않았던 ‘C.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고, 다음 모임을 기대하며 읽어 내려갔다.


저 자가 서문에서 언급하듯이, 이 책은 C.S. 루이스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삶과 정신 그 자체를 다루었다기 보다는, 루이스의 사상을 기초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는 C.S. 루이스의 생각들을 일반화 시키기 위해, 그가 살았던 시기의 특징과 그의 삶을 짧게 돌이켜 본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근대주의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다윈,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등의 영향으로, 물질적인 것으로써 영적인 것을 설명하려는 세대에 살고 있었다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모더니즘의 도전을 극복해 가기 위해 루이스는 어떻게 투쟁했고, 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들이 묻어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뜨끔했던 부분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소 딱딱한 필체의 글들을 선호한다. 시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조금은 철학적인 접근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근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우리들은 언어를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 언어가 지닌 형이상학적인 위상에 대해 비 우호적이기 쉬워지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계몽주의의 견해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다고 한다. – 그럼 내가 지닌 지금의 글읽기 성향이 계몽주의의 영향 때문은 아닐지… 최근에는 계속 이런 도전을 주는 글들을 접하게 되니, 더 부담이 된다.


 “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인가”, James Sire, 이레서원


‘How to read slowly?’ – 몇 년 전 기독교 세계관 책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더구나 개혁주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James Sire의 책인지라,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꼭 봐야지’하고 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에 폭풍이 불어 몇일 동안 도시의 대부분이 정전이 된 적이 있었다. 이틀을 전기 없는 집에서 보내고는, 결국 삼일째는 친한 선배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때, 그 집의 책꽂이에 있는 이 책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리고 ‘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이가’를 참으로 빨리도 읽어 버렸다. 이 책이 왜 ‘세계관’ 분야에서 추천되는지는 명확하다. 어떤 책을 읽던 간에 그 책의 문자적 정보만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읽어가면서 저자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를 발견해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신을 믿는지??? 이런 세계관 탐색적 독서가 논픽션 뿐 아니라, 시나 단편/장편 소설을 통해서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다. 그리고는 작품에 삽입되고 영향을 미치는 전기적, 문학적, 역사적, 지식적인 문맥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책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도 간략히 설명한다.


책 을 많이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식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논픽션만을 선호하는 나와 같은 경우는, 시와 소설을 통해 세계관을 탐색한다는 사실이 좀 부럽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했다. 이제 소설도 좀 읽어야 할텐데…


James Sire가 이 책에서 권하는 ‘세계관 탐색적 독서법’을 들어보자.



  1. 빨리 읽으려고 하지 말라. 평소에 읽던 속도대로 읽으라. 아니면 더 천천히 읽으라. 속독은 유용할 수도 있지만, 세계관 탐색적 독서에는 쓸모없을 공산이 크다.
  2. 필기 도구를 가지고 읽으라. 저자가 중점을 두고 있는 단락이나 개념, 비유에 밑줄을 그으라. 주제문이나 논증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편리하다.
  3. 기사나 에세이가 아니라 단행본을 읽고 있다면, 서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소개 글들을 먼저 읽으라. 그런 류의 글들은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알려 줄 것이며, 저자의 가설들, 그가 선택한 방법들을 알아보는 통찰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
  4. 이해가 가지 않는 단어와 개념을 찾아볼 수 있도록 백과사전이나 여러가지 사전을 활용하라. 단어 위에다 용례를 적어 두는 것도 어휘력을 배가시키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5. 첫째, 둘째 등 중요한 편제를 말해 주는 단어에 밑줄을 그으라. 논증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논의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중요한 매듭이 있을 때마다 여백에 번호를 매겨 두고 싶을 수도 있다. 글쓰기의 스타일은 각양각색이게 마련이어서 글 하나하나마다 거기에 맞는 여백 활용법을 찾아야 한다.
  6. 책 전체나 하나의 장을 읽은 뒤에는, 곧바로 내용을 다시 검토하고 제목을 붙여 두라. 논제가 들어 있는 대목은 전체 내용을 단순 명료하게 요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책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핵심을 짚어 준다. 그런 대목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논제를 적어 보라.
  7. 여백에 책이 말하는 개요를 거칠게나마 구성하여 적어 두라. 이것은 필자가 주장을 펴나가는 방식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필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필자가 왜 타당하다고 믿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단행본의 경우, 목차의 순서를 조금이라도 유념해 본다면 책의 일반적인 유형을 구별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8. 읽고 있는 글의 장르를 판단하라. 물론 수필을 읽고 있는지 시나 소설, 희곡을 읽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1인칭으로 쓰여진 시만 하더라도 자전적인 작품인지 아니면 등장인물을 앞세우고 쓴 글인지 알아봐야 한다. 아울러 필자의 진술 태도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9. 필자가 어떤 가정 아래서 어떤 방식으로 목표에 도달하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라. 필자는 무슨 증거를 끌어대고 있는가? 인용된 내용은 믿을 만한가? 비판할 만한 점은 없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가 예상하고 있는 반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도 논박하고 있는가? 어떻게 논박하는가?
  10. 필자가 최고의 실재, 즉 참으로 진실한 존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파악하라.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신과 비슷한 것은 무엇인가? 신은 인격적인가, 비인격적인가? 무한한가, 유한한가? 신은 하나인가, 아니면 여럿인가? 신은 우주, 인간사(人間事), 사람들, 그리고 저자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11. 필자는 외부 세계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물질뿐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영혼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도 아니면 물질과 영혼의 결합이라고 생각하는가? 근본적으로 질서 정연한 것, 아니면 혼돈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무엇이며, 사건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12. 필자가 말하는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인간은 인격적인가, 아니면 비인격적인가? 사람은 기계인가, 유기체인가? 그게 무엇이든, 인간과 동물(또는 다른 동물들)을 구별짓는 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가, 아니면 사람의 모든 행동은 이미 결정되어 있거나 프로그래밍되어 있는가? 하나님과 우주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가정이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오늘날 어떤 곤경에 빠져 있는가?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한 인간에게, 사회적으로는 인류 전체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가? 인류가 처한 곤경에는 해결책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그 해결책이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13. 필자는 인간의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는가? 인간은 완전히 소멸되는가, 아니면 변형되는가? 변형된다면 무엇으로 변형되는가? 사람은 언제 태어나는가?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의 끝은 죽음인가? 아니면 다시 육체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가? 어떤 상황 아래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14. 필자에 따르면,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가치를 지지하는가?”라고 묻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도덕성은 모든 가치의 뿌리다. 개인의 도덕성만이 가치 있는가? 사회 전체의 윤리가 중요한가? 아니면 초월적인 하나님의 도덕률인가? 절대선은 존재하는가? 가치가 서로 충돌할 때, 갈등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15. 필자는 역사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역사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계획인가? 역사의 의미는 어느 한 개인이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와 같은가? 아니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여하는 의미의 총계인가? 역사는 직선적인 궤적을 따라 뻗어나가는가, 또는 순환하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겪는 사건들은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는, 또는 영원히 재발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것인가? 시간이란 정말 의미 있는 단위인가? 아니면 실제 사건들은 초(超)시간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는가?
<본문 74-79쪽에서>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Ronald Sider, IVP


‘그 리스도인의 양심선언’과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요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로날드 사이더의 1996년도 책이다. 이 책은 로날드 사이더의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이 드러나게 마련이며, 사회 참여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핵심이 아닐까 싶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1장 이었다. 현대 기독교의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할 뿐,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고, 우리를 귀히 여기셨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상태가 오죽했으면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것은 반쪽만의 기독교일 뿐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