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세미나] 신원하 교수

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신원하 교수 – 심화 세미나 (샬롬의 방해물: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악)

1. 신원하 교수님, 안녕하세요, 미주 코스타에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을 위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어린시절 거의 늘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새벽마다 들으며 자랐습니다. 남들보다 신앙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란 셈이지요. 이런 영향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목사가 되고 싶었고 결국 신학교를 갔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이후 줄곧 신학교로 부름을 받아 지금까지 16년 동안 기독교 윤리학과 관련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7-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 등에 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 분야에 나름대로 글도 써 왔고 비중있게 가르쳐 오고 있습니다. 코스타 초청을 받고 이번에 참석하게 되어 기쁘고, 기대가 큽니다. 

2. 이번 세미나 강의의 주제가 ‘샬롬의 방해물: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악 (Vandalism of Shalom: The Seven Deadly Sins)’입니다. 일곱가지 대죄는 복음주의권에서는 좀 생경한 개념인 것같습니다.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일곱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의 목록-교만(pride), 시기(envy), 분노(anger), 나태(sloth), 탐욕(avarice), 식탐(gluttony), 정욕(lust)-은 4세기 말 사막 수도사들로부터 중세 교회를 거쳐 주로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 전해 내려온 목록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끊어버려야 할 큰 악으로 규정한 죄들의 목록이지요. ‘오직 성경’의 구호를 내세운 개신교회는 이것들의 성경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대죄론을 소홀하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이후 개신교회들이 부쩍 이 주제에 관심을 고조해 오고 있습니다. 복음주의권의 목사들의 강단에도 환영 받는 설교주제가 되었습니다. 이 주제는 싸우고 버려야 할 죄의 목록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갖추고 입어야 할 덕(virtue)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환언하면 이번 강의의 주제는 기독교인이 갖춰야 할 덕, 성품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덜 강조되고 경시되어온 측면이 많은 이유가 기독교인의 성화보다 일차적인 구원에 지나친 관심을 가진데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이신칭의를 강조한 개신교회가 덕(virtue)사상을 강조하면서 믿음보다 행위 그리고 성품을 중시하는 이 교리를 그다지 강조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핵심교리라는 것에 대한 반감도 또한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4. 한편, 어떻게 은혜를 강조하는 관점과 기독교인의 덕을 강조하는 관점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조화될 수 있을까요?

사실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기독교 윤리는 직설법과 명령법의 역동적인 관계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직설법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즉 그 명령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성경적 프레임이 분명해진다면 덕을 갖추는 삶은 은혜를 강조하는 것과 결코 모순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지요. 오히려 은혜로 죄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자원하여 덕스러운 삶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시 119:32). 

5.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삶의 불일치, 신앙과 사회적 책임의 불일치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같 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에 관련하고 계신데요, 한국기독교 공동체가 사회적 역할을 잘 하기 위해서 어떤 점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기윤실의 접근보다 좀더 급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한국 기독교인의 신행불일치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찍이 한미준(한국기독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통계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교인의 윤리의식과 불신자의 그것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이 너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같은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일반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자기들과는 다른 뭔가 고상한 삶을 바랐지만, 지금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 상태인듯합니다. 천주교회는 국민으로부터 점점 신뢰를 받고 교인도 늘어가는데 개신 교회는 그와 정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가 신뢰를 얻으려면 교회다운 모습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권력, 돈, 성공에의 욕망이 교회의 짠 맛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힘없음, 약함은 교회가 추구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신약 초대교회의 예수 운동, 제자운동은 철저히 십자가, 낮아짐, 힘없음을 추구한 운동이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따르고 ‘지적인 제자훈련’ 만 위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 할 때입니다. 현재의 모습에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사회적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윤실도 어쩌면 느리게 가는 길인 것이지는 모르지만 다시 교회의 본질회복 운동, 신뢰회복 운동, 정직 운동 등에 다시금 강조를 해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볼 때 이것이 다소 개인적 미시적 접근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급진적(Radical)인 방법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사회적인 이슈문제에 대해 여전히 관심을 갖고 여론을 만들어가고 윤리 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계속해 가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6. ‘전쟁과 정치’를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집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있습니다. 신학자로서 이런 모습에 대해서 어떤 평가와 대안을 제시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대표적 지성이며 양심이라 할 수 있는 이만열 교수는 현재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는 정교분리 모습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교 일치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지난 참여정권 때 복음주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부쩍 시청 광장과 장충체육관 등지에서 십자가와 성조기를 펄럭이며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많이 해왔습니다. 그리고 현 정권에 들어와서는 정반대로 친정부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전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너무나 조용했고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말리곤 했습니다. 어떤 신학적 근거로 시민 광장에 나와서 교회가 교회이름을 걸고 소리를 발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특정 정권을 편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설명이 없는 것이지요. 이런 신학적 성찰 없는 정치적 행동에 많은 의식 있는 목사들과 학자들은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이면에서 복음주의 교회의 신학자들과 40-50대의 중견 목사님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지요. 한국교회개혁연대와 같은 의식 있는 목사님들의 활동들이 좋은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7.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개인적인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람들은 자기가 자라온 지역, 문화, 환경의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경상도 남자가 서울여자를 만나 깊이 사귀다 보면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마련입니다. 서울여자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자신을 살피고 진단해보게 되는 것이지요. 연애의 성공여부를 떠나서 타자의 관점에서 자기를 보게 되면 그만큼 유익이 크지요. 교과서만 줄줄 외우고 문제집만 푸는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들어간 뒤 시대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치며 그것들을 다룬 뛰어난 소설/또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벅찬 희열, 기억하시는 지요? 마치 눈이 열리는 듯하고, 새로운 의식의 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지요.  이때까지 여러분들이 익숙해져 있는 현실, 가치의 세계, 그리고 추구하는 목표가 진정 가치 있고, 젊음을 바칠만하고, 그리고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여러분은 알 수 없습니다. 그것과 다른 가치, 세계 그리고 그것의 빛을 통해 비춰볼 때 비로소 그것들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쟁이를 핍박하는 일에 열심이었던 철저한 유대주의자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뒤 그의 삶과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집혀져 예수를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이제 기독교 신앙, 가치, 세계관에 자신을 열고 한번 활짝 자신을 노출해 보기를 권합니다. 이번 코스타 모임에 친구의 권유로 왔든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왔든지 이번에 기독교 복음의 세계에 한번 흠뻑 자신을 적셔보는 그런 구도자가 되어 보시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코스타 보이스 2009 – 강사 인터뷰] 정민영 선교사


1. 정민영 선교사님, 안녕하세요. 코스타에 참석하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정민영 선교사입니다.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www.wycliffe.net) 한국지부(GBT: www.gbt.or.kr) 소속으로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말로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고, 현재는 국제위클리프 부대표로 비서구 선교운동을 촉진하고 돕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2. 오늘 설교의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설교 제목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평안” (빌 4:4-7)입니다. 평안(Shalom)은 구원의 본질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결과 이웃(세상)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안(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이지 환경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상황적이 아니라 역설적입니다. 마치 아가페의 사랑이 “OO 때문에”(because of)가 아닌 “OO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인 것과 같습니다. 감옥에 갖힌 바울이 밖에 있는 빌립보 교회에게 기뻐하라고 격려하는 역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권합니다. 진정한 ‘가진 자’의 여유인데,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3. 이번 코스타 주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생각하시거나 느끼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음의 본질과 직결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역설적입니다.상황을 초월한 전천후 평안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구별되는” 참된 평안입니다. 바울은 “염려”와 “기도”를 대조하면서 상황(역경)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권합니다. 처방은 우리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을 바꾸기보다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바꾸시는 것이지요: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Hudson Taylor는 말합니다: “진정한 평안은 고통의 부재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이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역설적 기쁨, 전천후 평안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설명하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4. 근래 한국 기독교에 대해 반성하면서 기존의 선교방식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선교사님은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가요.
Christianity Today라는 기독교 잡지는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2007년 발생한 세계교계 및 선교계의 제1대 사건으로 꼽았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 선교운동의 당면현안과 과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한민족 선교운동이 단순히 열정만 앞세우기보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면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할 필요를 깨우치셨다고 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민족 선교운동의 청지기 시대가 도래하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5. 타문화/타자를 존중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 성품 등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단연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호전적 접근, 즉 십자군의 방법을 경계하시고 친히 십자가를 지시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전도와 선교가 “영적 전쟁”인 건 사실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호전적이고 무례한 기독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은 십자군이 아닌, 십자가의 도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감옥에 갖힌 바울이 권하는, 겸손하고 온유한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도록 권합니다. 금년 코스타의 주제인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 역시 호전성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차별화(거룩)을 의미합니다. 전도와 선교의 동기는 사랑인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코스타 보이스 2009 – 기획기사]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용기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용기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자신들이 믿는 삶의 방식에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이다. 예수님처럼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 사람의 가치를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 원수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보다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을 해나가겠다는 강한 신념이자 행동이다. 그러나 이런 용기있는 행동에 세상은 흔히 무시되고 만다. 겉으로 보기에 약한 자의 모습을 띄는 그리스도인들이 용기를 소유할 있는 근원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부활 세상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그의 메시지를 부인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시킴으로 예수의 복음의 진실성을 변호했고 그를 참된 주로 인정하셨다아울러 부활은 새창조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사망을 이긴 사건은 땅에서 그분의 새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장엄한 사건이다. 예수는 부활할 모든 육체의 열매가 되신 것이며, 그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창조물임을 선언한 것이다.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 옳은 것임을 있고, 그분이 남기신 약속이 성취될 것을 확신할 있다. 동시에 부활로 시작된 새창조의 삶에 믿음으로 동참할 있다. 이원론적인 태도를 넘어서 창조질서의 회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용기를 가질 있다.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발전이 더디어 보일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 4:26-28) 천국운동의 시작은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이뤄진다는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천국은 시작이 조용하고 비밀스럽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있는 그런 형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겨자씨 알이 밭에 심겨졌다는 것은 이미 천국이 땅에 임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내적 성장과정을 거친 천국운동은 마침내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게 되는데, 마치 겨자씨가 자라나서 다른 나물보다 크게 되어서 공중새들이 가지에 깃들이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속성을 알려줄 아니라 나라의 발전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있게 해준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 예수님이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점차 발전하여 이땅에서 완성되어 간다. 종국적으로새 하늘과 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다. 완성될 하늘과 ’, ‘새예루살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시던, 하나님, 인간, 모든 만물 간에 창조질서가 완성된 모습이다. 우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의도하셨던 완성된 평화’(Shalom) 거할 것을 믿을 있다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질 있을 것이다.

약한 곳에 거하시는 (Tabernacling) 성령 마르바 던의 설명에 따르면 약함 속에서 강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하나님은 약함 가운데 거하시고 (dwelling/residing) 그들과 관계를 맺으신다. 그리고 약함을 통하여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고, 약한자의 약함을 통해 세상의 권력의 강함, 그리고 그들의 부정의를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들의 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약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용기를 가질 있다.

[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상담실] 교회 및 캠퍼스 사역


코스타 상담실에서는 많은 코스탄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가상의 코스탄과 멘토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실린 의견은 멘토님 개인의 의견이며 코스타와 소식기관의 의견은 아닙니다.

교회 및 캠퍼스 사역

“멘토님, 교회 생활이 힘듭니다. 공동체 내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좋은 점도 있지만, 힘든 점도 많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생활에 간섭하는 경우도 많고, 다른 성격의 사람들간이 이유없는 갈등, 심지어 질투와 질시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소그룹 성경공부만 하면 안 될까요? 신앙생활을 교회에서 꼭 해야할까요? 다른 생각과 다른 나이, 다른 문화를 가진 작은 교회에서 성숙한 신앙 생활을 하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까요? 소그룹 성경공부에만 나가려난 후배에게 어떻게 조언하면 좋을까요?”

좋은 질문 입니다. 귀한 질문을 대답하기 이전에 저는 먼저 왜 유학을 왔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만나 교제하는 지체들에게 그같은 질문을 자주 하곤 합니다. 그들이 가장 솔직할때 이렇게 대답하는것을 듣습니다. “교수님, 저는 유명한 교수가 되러 미국 왔습니다!” “저는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좋은 대학의 학위를 따러 왔습니다.” “교수님, 저는 시집 잘 가고 싶어 미국 왔습니다!” 이같은 대답 이외 제 관찰에 의하면 놀기 위해 유학온 지체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너무 좁고 답답해서 미국까지 놀러 온것이지요. 또 나이든 어떤 이들은 직장생활로 인해 너무 지쳐 미국으로 안식하기 위해 유학왔다고 하기도 합니다. 

유학의 목적이 학위 획득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위한 발판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경우, 유학지에서 신앙 생활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것 같습니다. 그같은 경우 교회에서의 여러 활동, 책임, 섬김 등은 큰 부담으로 느낄 수 있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방해적인 요소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같은 생각을 가진 청년의 경우 성격 및 의견 차의로 인한 갈등이 교회안에서 발행하면 쉽게 교회를 뿌리치고 나오기 쉽고, 자신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모인 소그룹 활동만을 찾는 다던가, 인터넷을 통해 잘 알려진 교회의 목사님 설교로 예배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이런 청년은 또 자신의 소그룹에서 지체들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소그룹을 떠나게 되고, 인터넷의 설교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교회의 목사님 설교를 쇼핑하게 됩니다. 이렇게 떠돌다가 결국 하나님 마쳐 떠나 버리는 청년들을 볼때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학생들은 유학을 신앙훈련으로 간주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들은 학위도 중요하지만, 나의 학문/전공을 통해 지금 내가 서있는 곳과 또 앞으로 보냄 받을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샬롬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 합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려는 청년은 교회에서의 예배를 매우 중요시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더 나아가 더욱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를 삶의 가장 중심에 두고 살고자 애씁니다. 이같은 청년들은 예배와 신앙생활을 교회를 중심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여러 영역에서도 삶의 예배를 드리려 애씁니다.

칼빈신학대학의 플랜팅가 교수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의 명령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시민이라고 하였고, 또 그 명령을 열정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을 그 나라의 일등 시민이라 말한적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땅에서의 샬롬을 뜨겁게 갈망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였지요.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일등시민이 되고자 하는 기독 청년들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성격 차이의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격는 경우 결코 교회를 떠나거나 문제를 피해서 소그룹에 숨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문제를 놓고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싸움도 하고 상처도 받곤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가져 갈줄 알고, 또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들은 이같은 갈등과 어려움을 통해 하늘나라의 일등 시민으로 다듬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본인에게 상처를 주는 지체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사 하늘나라의 일등시민으로 만들기위해 예비해 놓은 유격훈련 조교중 하나 라는 사실로 상황을 받아 드립니다. 이들은 또한 그 어려움을 가져다준 상대에게 자신들이 그들의 귀한 훈련관이 됨을 어렴풋이 나마 깨닫 습니다. 개울가의 돌과 돌들이 오랜동안 서로 부딛치면서 서로가 서로를 매끄러운 돌로 만들 듯, 우리는 관계의 어려움을 통해 일등 시민의 성품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그 몸들이 그렇게 묶였을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중 빼어 놓을 수 없는것이 관계이고 사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코이노니아(사귐)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일 뿐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 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imago dei)발견하며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진리안에서의 사귐은 서로에게 치유, 회복 및 성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것이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샬롬이 임한다는 것이지요. 위로는 하나님, 좌우 옆으로는 지체들과의 사귐이 있는곳이 교회 입니다. 그래서 교회란 어느 장소의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무리 (회중)을 말하는 것이지요.

교회생활이 힘들다고 했습니까? 훈련이 결코 쉬울 수 없습니다. 쉬운 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천국의 일등시민은 안일한 훈련으로 그냥 만들어 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활에 간섭한다고 했나요? 그럴땐 훈련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졌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훈련이 그렇게 이루어 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유 없는 갈등,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 편에서 결코 거룩치 못한것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부터 그같은 성품의 찌꺼기들을 제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가져오는 상대와 씨름 하려 마십시오. 대신 그 사람의 그같은 죄성과 본인의 죄성에 대항하여 맞장 뜨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악한자 일지라도 우리는 사람을 미워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와 그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죄성을 미워해야 하고, 또 본인의 죄성과 싸워야 합니다. 

소그룹 성경공부만 하면 안되느냐 라는 질문에 John Stott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해 보려 합니다: “무력한 신앙인들은 댓가를 지불하기를 두려워 한다.” 쉽고 편안한 신앙생활로 자신의 안락지대 (comfort zone)에 머물지 마시고, 서로 부딛치고, 상처받고, 부둥켜 안고 울며, 함께 회개하는 도전있는 신앙 생활을 선택하십시오. 즉 성장을 위한 댓가를 지불하며 살라는 권면 입니다. 신앙생활은 꼭 교회에서 해야 되냐는 질문에 오히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되 묻습니다: “만일 교회가 아니라면 그같이 거룩한 훈련을 어디서 받을 것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함” (엡 1: 23)이 있는 곳입니다. 훈련과 함께 따르는 그 분의 충만함을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소그룹 성경공부에만 나가려는 후배에게도 지금까지 나눈 우리의 대화를 들려 주십시오. 그리고 함께 히브리서 10장 25절을 읽으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추측컨대 그때도 지금처럼 모이기를 싫어하고 혼자 조용히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나 봅니다.

제한된 지면에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할 수 없었지만 제 대답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22:37)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 라” (마 22:39)고 우리들에게 명하십시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도, 공부할 때에도, 지체들과 교제할 때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유학생활중 가장 중요한것은 훌륭한 예배자로 훈련되어져서 세상에 으로 보냄 받을때 우리가 가는곳 마다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 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댓가를 지불하는 유학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코스타 8지역 조장 멘토
이영길 (캠퍼스 및 청년사역. 칼빈 신학대 교수)

[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세미나] 김범석 목사


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김범석 목사 – 와우! 북한 탈북자 현장 바로 보기

1. 김범석 목사님, 안녕하세요, 올해 다시 코스타를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을 위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코스탄 여러분 안녕하세요.여러분들을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저는 열매나눔재단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무총장 김범석 목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청년 목회에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저만 주장하지 하나님과 다른 분들은 아니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저의 자리가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인 탈북자와 빈곤 여성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번 코스타를 통해 우리 청년들도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를 찾아가고 그 귀한 달란트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2. 기독교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개인적인 신앙간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모든 사람은 그냥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태어나서 그냥 살다 갔다면 너무 허무 하지 않습니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보면 결론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無(무) 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을 살아 가라고 하면 참 가치 없는 인생 같습니다. 그러면 정말 가치 없게 살고 말 것 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無(무)’가 아닙니다. ‘有(유)’ 입니다. 분명 어떤 목적이 각자에게 주어 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정해집니다.그 정해진 목적 즉 각자의 그릇,달란트를 빨리 발견하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예전에 이것을 몰랐습니다. 1997년 IMF 당시 집이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부도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니는 중간 이였는데 학비와 차비가 없을 정도로 망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과일 장사를 4년간 했습니다. 하나님이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저는 신학 대학원을 가야 하는데 저는 유학을 가서 신학 교수가 되어야 하는데, 장사를 하게 되니 제 꿈이 완전히 틀어진 줄 알고 하나님에 대해 원망을 참 많이 했습니다. 돈으로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한 저는 그 뒤 저의 삶의 목표는 돈이 되었습니다. 즉 저의 삶의 목적은 잘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잘 사는 것이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 열심히 죽도록 일했습니다. 시장에서 과일 도매업을 했는데 그때 참 많은 돈을 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생기면 잘사는 줄 알았는데 잘 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 마음에 돈만 있지 평안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장사를 끝나고 아내에게 적금 이야기를 하는 중에 아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 요즘 돈만 이야기해’‘ 난 당신이 돈만 이야기 하는게 싫어’ 그 한마디는 저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히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그 뒤 일주일 만에 저는 모든 사업을 접고 쪽방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돈이 있었던 시절 보다 쪽방에서 가난한 분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던 지난 10년이 더 잘살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창조주 하나님이 저를 창조한 목적을 발견하였고 그 목적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돈은 없지만 지금 참 행복합니다. 돈이 있어 평안이 없던 때 보다 돈은 없지만 평안한 지금이 너무 좋습니다.저는 지금 너무 너무 잘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을 받는 것은 바로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가치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삶은 참 행복하고 즐거운 삶입니다.평안한 삶입니다. 고난과 고통도 우리의 이 행복은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코스탄 여러분 모두가 이번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평안과 비젼을 발견하길 기원합니다.

3. 요즘 열매나눔재단이라는 곳에서 일하시고 계신데요, 하시는 일과 재단의 비젼이라든지,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를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열매나눔재단의 영문 명칭은 Merry Year Foundation 입니다. Merry Year 라는 뜻은 기쁜 해,즉 희년이란 뜻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희년이란 기독교의 50년제를 기념하여 수고하고
축 적된 부의 재분배를 통한 빈부의 재편,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구제의 관습이었습니다. 열매나눔재단은 이러한 희년의 정신을 계승하여 우리 사회에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여 이 시대 속에 잃어버린 기독교 신뢰를 회복하고자 만들어 졌습니다. 빈부의 재편을 통한 희년 정신의 실천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은 그 출발부터 우리 사회에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즉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선 설립 주최가 된 교회부터 가진 자의 권리를 포기하길 하나님은 원하셨던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많은 기독교가 선 성장 후 복지 선교를 외치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전도와 선교를 포기 하고 모두가‘보이는 성전 건축’에 수많은 자금을 투입하고 매달렸을 때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 하나님은 높은뜻 교회에 진정한 성전의 개념을 알려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이 가있는 곳 그곳은 먼 예루살렘이 아닌 가까운 우리 이웃들이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있었던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린 이를‘보이지 않는 성전’이라 칭하여‘보이는 성전 건축’을 포기하고 가난한 이웃을 자활 자립 시키기 위해 재단을 건축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재단의 비전은 잃어버린 한국 교회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회복하며 이를 통해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모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며 목표입니다.

4. 노숙자라든지, 새터민(탈북자)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 해오시고 계시는데요, 이런 활동 속에 기독교 신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성경을 보면 두 가지 종이 있습니다. 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입니다. 이중 충성된 종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발견하고
그 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어디서 받을까요.기도를 통해서도 받고,자연 계시를 통해서도 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가장 큰 말씀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명령이 있습니다. 성경 66권을 다 짜 보니 그게 바로 마 22장 34-40의 ‘사랑’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여기서 내 이웃은 우리 가족도 포함되지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소외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우리 사회에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누구일까요? 그분들이 바로 저에게 있어서는 노숙자와
독거노인과 탈북자 들이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그 명령을 잘 따르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기독교인 이라고 하면 그 분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이 충성된 종의 역할이라 생각하기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5. 이런 활동 중에 인본주의적인 접근보다 기독교적인 통전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같습니다. 이런 다양한 활동 가운데 기독교 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경험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보고 측은한 마음을 담아 구제하는 사역은 어느 종교도 다 하고 있습니다.아니 사실 우리 기독교 보다 더 잘하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종교와 우리의 사역을 비교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이 다르기때문입니다. for(위하여) 과 with(함께) 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가난한 지역에서 노숙자와 쪽방 주민을 섬기다 보니 참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수년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프로포절을 넣어 설날에 쪽방 주님들에게 모두
5만원권 상품권을 나누어 준 적이 있습니다. 사전에 쪽방 주민을 조사하여 총 2천 700장을 받아 2,700명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설날이 끝나고 상품권 사업을 종결할 시점에 상품권을 받지 못한 몇 사람들이 찾아와서 상품권 달라고 횡포를 부리며 저희 센터의 유리 창을 깨고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른 적이 있습니다.그 때 참 죽을 뻔 하다 살아 났습니다. 또 한 번은 상품권을 주지 않는다고 제가 퇴근할 때 골목에서 각목으로 저의 머리를 쳐서 머리가 깨진 적이 있습니다.그 때도 이제 죽는 구나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너무 화가 났고 가난한 분들이 너무 증오스러웠습니다. 나는 자기들을 돕기 위하여(for) 왔는데 .. 나는 지들을 살리기 위하여(for) 왔는데… 라며 원망하고 쪽방 사역을 그만두고 싶어 몇 번을 고민한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왜냐하면 그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예수님은 죄인된 저를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함께(with) 하기 위해 오셨는데…. 십자가를 생각하며 무섭고 떨리지만 사역을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우리의 사역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니 그 무섭고 힘들게 했던 그분들이 지금은 나의 친구 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저를 통해 쪽방에 들어온 숭의교회 청년들은 쪽방 사역을 누구 누구를 위하여 봉사하지 않습니다. 우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분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자 이 일을 합니다. 이와 같이 불쌍해서 봉사하는 다른 종교와 그 근본이 틀린 출발점(With)을 우리 기독교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마음.우리와 함께 하셨던 그분의 마음. 그것이 다른 출발점입니다.

6.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삶의 불일치, 신앙과 사회적 책임의 불일치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같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사회적 책임을 좀더 하기 위해서 어떤 점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회개 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는 개인적 회개가 필요 하듯이 우리 기독교도 사회에 침묵하고 무관심한 일에 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이란 틀에서 사회 정치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달려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책임은 사회 전반에 책임적 존재로서 기독교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고 함께 하는 것은 기독교의 책임적 사명이였습니다. 우린 선 성장 후 선교 논리에 매달려 그 들을 외면했습니다. 경제적 논리 속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묵인 되었습니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이웃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에 대하여 기독교는 침묵하였습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기독교 공동체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개인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회개 없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없다고 봅니다. 각 공동체의 깊이 있는 회개만이 우리를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7. 진로를 계획하고 고민하는 코스탄들이 많습니다. 사회적 선교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젊은이들에게 강한 도전 한번 해주시죠.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을 변화 시킬 한 사람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체 속에 모든 사람들이 다 그 한사람이 될 순 없습니다만 부분으로는 각자 역할에서 충분히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동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엔진입니다. 그러나 엔진만 있다고 자동차가 가진 않습니다. 엔진을 받쳐 주는 수천 가지 . 부속의 결합이 있어야 그 엔진의 역할이 엔진다워 집니다. 성경을 보니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금 그릇의 달란트 어떤 사람은 은 그릇의 달란트 어떤 사람은 질 그릇의 달란트를 가집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금 그릇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 그릇이 최고다 라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모두가 다 금 그릇이 되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선 그 각자의 역할이 틀린 것이지 모두 한 그릇으로 소중한 그릇입니다. 우리 코스탄들이 내가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그릇의 역할을 다 한다면 그게 바로 그 세계 속에 하나님이 찾는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회선교를 너무 크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잘하는 공부 접어 두고 투쟁가나 선교사가가 되면 세상은 참 힘든 세상이 될 것입니다. 저는 개인 적으로 코스탄 여러분들이 현재 있는 각자의 위치에서 소외된 우리 이웃들을 돌보고.세상의 거짓에 대해 아닌 것은 당당하게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그것이 바로 사회선교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다 금 그릇은 될 수 없지만 모두 사회 선교사는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진로를 결정할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진로의 결정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금 그릇과 질 그릇 모두다 소중한 그릇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 앞에선 그게 바로 금 그릇이며 또 그게 바로 사회선교사 입니다. 세상 속에 모두가 다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사회선교사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