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혜]캠퍼스 사역

이코스타 2007년 3월호

저는 미국에 온 후 계속 필라델피아 근교에 살면서 음악을 공부 했습니다. 한 학교에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부도 했고 일도 하면서 몇 년 전부터는 후배들과 음대 안에서 작은 말씀 나눔 모임을 만들어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제가 섬기고 있는 캠퍼스 사역을 통해 배우고 있는 일들에 대해 짧은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앞에서 언급 했듯이 짧지 않은 시간을 한 학교에서만 있다보니 어느새 새로온 유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학교생활에 도움을 줄 얘기를 해 줄만한 여유도 생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늘 식사시간에 모여 앉으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화거리들이 있습니다. 연습, 숙제, 시험, 진로, competition, audition 등 음악과 학문에 관한 얘기들을 주로 나누게 되고 그러면서 마음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교회와 신앙 생활에 대한 얘기들도 자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가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이기 때문에 한인교회도 많다 보니 20명이 넘는 음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얘기를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각기 다른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예배를 위해 필요한 반주자와 지휘자, 악기 연주자와 soloist 들이 크고 작은 교회로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 입니다. 음대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이 크고 작은 한인 교회에서 음악쪽 사역을 돕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우리 학교 음대생들은 매주일 교회에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대생들은 교회에 가면 음악의 전문성을 통해 실질적으로 예배를 돕는 자리에서 섬기게 됩니다(대부분의 교회들은 사례비를 지급하지요). 이들 중에는 신앙생활을 우선순위에 두기 보다는 교회의 음악을 도우면서 자신의 경제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교회를 나가는 학생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많은 학생들은 어릴때부터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며 자라와서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후배들과 많은 얘기를 하다보니 신앙이 있다 하는 학생들 중에서도 (청년부나 또래 그룹 모임이 없는 작은 교회에서 반주/지휘/솔로이스트로 섬기기 때문에) 예배 외에는 말씀을 공부하며 나눌만한 적절한 모임이 없어 영적으로 열악한 환경가운데 있는 것이 음대 많은 학생들의 현실임을 알수 있었습니다.


후배들과 몇번의 이런 대화들을 통해 내 마음 가운데 내가 음대 안에서 이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하게 되었고 기도하면서 마음으로 준비를 하다가 몇 년 전 처음으로 몇 명의 후배들과 함께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몇 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지역 교회와 kosta 등의 모임에서 소그룹 리더로 섬겨왔었기 때문에 그 당시만 해도 학교 안에서 후배들과 모임을 시작 하는것에 대한 큰 부담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이 아닌 음악을 공부한 사람이 교회를 벗어나 학교 안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이 학교 사람들 눈에 이상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모임을 시작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사람들을 모임에 오게 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함께 말씀공부 하자고 말 해야겠다.. 하는 생각에 학기 초에 연습실 에서 마주친 성악하는 후배에게 성경공부 함께 하자 했더니 돌아 오는 말은 “저는 전도사님이나 목사님 아니면 함께 성경공부 할 맘이 없습니다” 하는것 입니다. 그날 그 후배의 대답이 속된말로 “언니.. 언니가 하는거 그거 ‘야매’로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는 소그룹 인도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지만 교회 건물을 나와서도 같은 일을 하려는 제가 그 후배의 눈에는 새삼 자격 미달자로 미덥지 않게 보였던가 봅니다. 함께 하겠다는 사람도 없고 바라보는 시선도 야릇하던 처음 모임을 시작하던 그때, 가끔 이렇듯 라이센스 없이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취급을 받으면 꼭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 하고 있는 것 맞나요?” 그러나 이런 생각이 늘 오래가지 않았던 것은 지난 수년간 소그룹 나눔 안에서 제자 삼는 일로 나를 훈련 하시고 인도해 오신 하나님께서 (어쩌면 내가 해야할 숙제같이) 이 캠퍼스에서도 나에게 제자삼는 일을 계속 하시길 원하시고 인도하실 것 이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졸업을 앞둔 세명의 후배들과 함께 이렇게 나는 음대 안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마음을 먹게 되고 모임을 시작 할때는 이 일이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게 되었지만 어쩐지 내 마음은 추운 겨울에 코트도 한 벌 없이 길거리로 나가는 사람의 심정 이었습니다. 역시‘라이센스’ 없는 사람 인지라 유년 주일학교 때부터 성경공부 해 왔어도 신학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지식도 없었고 그렇다고 누구를 사랑으로 품을 자신도 없었기 때문 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아보면 음대 안에서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하던 그 해 내 마음은 참으로 궁핍하고 외로웠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몇 명의 후배와 둘러 앉아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기를 시작한지 어느덧 일년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궁색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모임을 인도했던 것 같지만 일년이 지나다 보니 그런 느낌마저도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방학이 되어서 여름 코스타를 참석해서 처음으로 학원사역에 관한 세미나를 신청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 세미나를 가면 나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미나를 인도하시던 집사님께서도 본인이 실제로 현재 캠퍼스 사역을 하고 계신 분 이었고 power point presentation 을 하시면서 자신이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겪었던 은혜와 노하우를 나눠주셨는데 참 많은 위로와 은혜를 받은 시간 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세미나를 생각하면 생생하게 생각나는 집사님의 간증 같은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내용을 짧게 옮겨보자면, 그 집사님께서 어느날 말씀 공부 모임을 생각 하시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캠퍼스를 걷다보니 한국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답니다. 그 집사님 마음에 저 학생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살다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학생들의 영혼이 불쌍하고 그 캠퍼스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견딜수 없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런 마음으로 캠퍼스에서 말씀을 나누었고 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학원 사역자들이 이렇듯 영혼을 바라보며 마음 아프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 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 말씀이 다른 사람들에겐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간증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씀이 내겐 음대 안에서 처음 모임을 시작하고 지난 일년동안 왜 내 마음이 그렇게 궁핍하고 추웠는지 말해 주는 것 만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안타까와 하시는 그 마음을 알지 못했기에.. 한 영혼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성경공부는 내가 해야할‘일’이라는 의무감이 내 맘을 더 많이 채우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공들여 말씀공부를 준비하고 모임을 위해 노력했던 지난 일년 이었지만 내 마음은 늘 춥고 궁핍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정말이지 그 후배의 말처럼‘야매’로 말씀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학기에 함께 말씀을 나누던 후배들이 졸업과 함께 대학원 진학, 한국으로의 귀국을 하면서 모두 흩어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성경공부 모임은 다시 텅 비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함께 성경공부 할 지체들을 찾아 모임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제 내겐 더 이상 자신이 없었습니다. 소그룹 모임을 인도해본 지난 몇 년의 경험도, 다른 사람보다 학교 생활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상황도 별로 내 마음에 힘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난 아직 캠퍼스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은데.. 이렇게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되면 내 맘이 또 춥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모임을 내 맘대로 없앨수 없었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지요. “ 하나님, 이제 우리 성경공부 모임에 아무도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연습실에서 만나는 새로운 후배들은 나이가 많이 어리고 아직 그들과 개인적인 교제도 제대로 나눠본적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아직도 캠퍼스를 보면 눈물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직도 제가 이 모임을 계속 하길 원하시면 한 명의 동역할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래 주신다면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줄로 알고 계속 모임을 이끌어 가겠습니다.” 아직도 잃어버린 영혼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신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데는 자신이 없었지만 그날은 그렇게 기도 드렸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못남과 부족한 모습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마치 내가 낙심 할까 걱정이라도 되셨다는듯이 기도를 한 그 날로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날 오후 다른 학교에서 transfer를 해온 새로온 후배에게 말씀 공부 얘기를 했더니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눈을 반짝 거리면서 “언니, 우리 교회에는 청년부도 없고 저는 교회가서 그냥 반주만 하는데, 저 누구랑 말씀 공부하고 그런거 너무 해보고 싶었어요” 하는게 아닙니까.. 제 기도 응답이 된 그 후배와는 지금도 2년째 한 주도 빠짐 없이 말씀을 공부하고 나누는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 학기에 말씀공부와 나눔을 통해.. 참 귀한 배움과 은혜를 경험 했습니다. 더 이상의 인원은 없이 그 후배와 단 둘이 말씀을 나눴지만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 묵상과 그 후배와의 교제를 통해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후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제 마음에 알게 해 주심으로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갈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나의 귀한 동역자이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후배와 한 학기의 말씀 공부를 통해 나의 메말랐던 마음에 주님의 은혜의 샘물이 다시 흐르게 되었습니다. 몇 학기를 더 지나면서 말씀 공부 고정 멤버가 조금 더 늘어났고 기도와 나눔은 더욱 풍성해 졌습니다.


아직도 저는 마음이 차갑고 부족해서 캠퍼스를 바라보며 더욱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갖길 갈망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으로 옷 입혀주시고 내 안에 채워주시는 은혜로 지금은 더 이상 마음의 추운 겨울 안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보여드렸더니 빈 마음을 보시고 그곳을 은혜로 채워주셨습니다. 나의‘일’을 내려놓게 하시고 주님의‘은혜’가운데로 불러주셔서 나를 생명을 살리며 제자 삼는 곳에 함께 동참 시켜주셨습니다. 오늘도 저는 주님께서 불러주신 말씀 공부라는 모임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주님을 배워가며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진용진]제자로서의 나의 일상 생활

이코스타 2007년 3월호

일단 감사합니다. 참 감사합니다. 생활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를 허락하시고, 그 안에서 잘못된 부분, 작지만 소중한 부분, 들려 주시려는 하나님의 음성, 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을 보게 하시고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들을 생각해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지난 달인 12월 말 즈음에 시작하여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깊은 생각을 하며 한 해를 정리하고 새 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심에 감사합니다.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글을 부탁하시는 말씀을 들었을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내 평소 생활을 생각하면서 써보면 어떨까’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깊은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득, 하지만 선명하게 들었던 생각은 ‘제자가 자신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써야지 ‘제자로서의 삶’이지, 제자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생활을 적어보면 그건 ‘제자의 삶’에 대한 글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직도 자신있게 ‘나, 제자입니다’ 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빡세게’ 기도 한번 하고 잘 써보자’라는 생각도 들고,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한 달㈏?시간이었습니다. ‘제자의 삶’이라는 것을 ‘제자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내지는 ‘제자의 삶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라는 글이 아닌, 제 생활을 돌아보면서 어떤 삶이 제자의 삶인지 생각해 본 것을 짧게 나눠보고 싶습니다. 제자의 삶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은 이미 eKOSTA게시판에도 여러 좋은 글들이 있고, 많은 신앙의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이 많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저기에서 인용해서 다시 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제자의 ‘삶’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긴 시간과 많은 분량으로 다가와 부담이 든 나머지, 부끄럽지만 저는 제자로서의 일상의 생활이 어떤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생활하는가, 제 생활을 생각해 보면서 나누겠습니다.


약 3년 반 전에 결혼을 하고, 저의 하루하루의 생활은 어느 정도 단조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보통 우리들이 살면서 겪어보지 않을 수 있는, 그리고 그렇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는, 그런 힘든 일들도 그 짧은 기간에 여러 차례있었습니다만…) 저의 생활에서의 주 활동 반경을 생각해 보면 크게 가정, 직장, 그리고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캠퍼스 정도가 되더군요. (사실, 교회가 집에서 좀 멀어서 거의 주일에만 교회를 가고, 유치부 교사로 섬기는 일 외에는 여러 주 중의 다른 활동에 참여가 많지 않아 주 활동 반경에 포함하기는 조금 힘듭니다. 요즘 들어서 많이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골3:23)


제가 늘 마음에 두는 말씀들 중의 한 구절입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California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Thousand Oaks라는 곳에 있는 Amgen이라는 한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학부 때 전공이 Biochemistry여서 동부에 살 때는 주로 Lab안에서 조용히 일을 했는데요, 이 회사에서 IT쪽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그것도 management쪽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환경 가운데에 있습니다. 지금은 IT Project Management Consultant로 일하고 있구요. 사는 곳이 Southern California이고 다니는 직장이 Biotech에 IT라 그런지, 회사안에서의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이 꽤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도인 인도인들인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꽤 있어서 가끔 성경의 한 부분들을 나눠보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주로 금요일 성경공부를 위해 준비하는 본문의 말씀들을 금요일 성경공부 전에 또는 후에 주변 사람들과 나눠보기도 합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성경공부 준비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씀을 들여다 보는 시간도 있고, 본문 말씀이나 다른 자료들을 프린트해서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옆에서 그걸 본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고 물어보기도 하고 (한국말로 써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말씀을 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참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다가가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말씀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생각해 보게 되고, 또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그러면서 함께 일하는 부분들이 좀 더 자연스러워지더군요. 문득, 어느 날 제 마음 한 켠에 두려움이 급습을 한 날이 있었는데요, 이제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제가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크리스챤으로서,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생각하는, ‘잘 할 것’을 저한테 기대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사실, 그것을 알게 된 후에 더욱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조심하게 되고 하는 일에도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더군요. 저는 솔직히, 너무 제 안의 교만함이 많아서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잘 될 때, 많은 주변의 사람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좋게 평가하며 함께 나누었으면 할 때, 너무나도 무서운, 평소에 늘 있으나 제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제 안의 무서운 점을 보게 됩니다. 그 때 마다 늘 골로새서 3장23절의 말씀을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 그리고 저에게 주어진 일 을 할 때 조심합니다. 저는 또한 개인적으로 제 일에서 만족을 누리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지금하고 있는 일이 나한테 정말 맞는 일인가 묻는 경우도 꽤 있기는 한데요, 그러면서도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이유는이제는 제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이 직장에서의 제 생활이 제 자신안에 형성된 하나님의 디자인을 발견하는 의미있는 사역의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떤 자리로 어떤 모양으로 인도하실지는 모르지만 이런 직장과 이런 일에 저를 허락하실 때에는 그 위에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심을 확신합니다. 만족이라는 것이 일을 성취할 때의 희열이라던지, 나의 시간과 노력과 노동을 투자한 후에 얻는 금전적 또는 정신적 보상 등의 것으로도 물론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심으로 헌신과 정열을 다해 할 때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그런 작은 일이지만 그 일을 하고 있는 나와 하나님께서는 함께 해 주신다는 감사함이 들 때 꽤 깊은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눅17:10)


California에서 살게되면서 UCLA에서 UCLA학생들, 또는 말씀을 함께 공부하고 싶어하는 UCLA주변의 자매님들, 형제님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3년여가 지난 지금은 LA서쪽의 Santa Monica에 있는 Santa Monica College(SMC)라는 Community College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시는 많은 지체들과 각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열정과 계획을 갖고 참여하는 지체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도전을 받습니다. 성경공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성경공부를 통해서 만나게 된 여러 자매님들, 형제님들과 교제를 나누며 삶의 많은 부분들을 배우기도 하구요. 성경공부를 함께 하다보면,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지체들의 숫자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고, 저를 포함해서 성경공부 식구들이 나름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듯 하다가 멀어지는 듯 하기도 하고, 멀어지는 듯 하다가 가까이 나아가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서, 믿음이 잘 성장하는 경우도 있고, 안타깝게도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아서 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구요. 함께 성경공부를 통해 섬기시는 간사들 가운데에 저는 딱히 UCLA에 소속을 두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서, 지금은 옆 동네 학교인 SMC에서 섬길 수 있는 특권도 누리고 있는데요, 이 성경공부 모임은 이제 막 (2006년 가을 학기부터 시작) 시작한 모임이라, 서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나누기를 소망하며, 그런 날이 올 것을 믿으며, 서로 ‘모이기에 힘쓰는’ 모임입니다. 캠퍼스를 섬기며 갖게되는 작은 소망은 이런 저런 작은 모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일꾼들이 길러지는 하나님의 귀한 캠퍼스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살에 미국에 와서, 처음에 영어에 익숙하지 않고,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아 적응이 쉽지 않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에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신앙의 선배님들의 보살피심이 있어서, 쉽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고생스럽지 않게 적응할 수 있는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캠퍼스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함께 발견하고, 또 발견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바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이 정말 쓸모 없는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조용히 사라져 또 어느 곳으로 옮기실 지는 모르지만 그 준비를 겸손하게 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곳을 향하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거룩함과 겸손함과 순종함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여러 곳에 여러 모양으로 흩어져서 곳곳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한 마음을 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계속하여 세우시고 성령의 끈으로 연결시켜 주시는 그 일에 계속 동참하고 싶습니다.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전9:9)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신 6:5-7)


저는 제 아내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UCLA에서 공부를 하는 중이어서, UCLA학생 아파트에서 약 3년 정도 살다가 지금은 LA에서 약 30마일 정도 떨어져있는, 제가 다니는 회사로는 좀 더 가까운 곳에 있는 Calabasas라는 꽤 시골 분위기가 나는 조용한 곳에 살고 있는데요, 제 아내가 공부를 해서 그런지, 아직 아이가 없어서인지 집안 분위기는 꽤 조용하고 차분한 편입니다. 항상 서로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고 하고요. 매일 금요일에 있는 성경공부를 서로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경공부가 있는 금요일 전 후로 그 주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도 하구요. 제가 좀 TV를 오래 보거나 잠깐 졸려고 하면 가차없이 지적을 (꽤 부드러운 표현입니다만) 하기도 하구요. 사실 결혼을 하면서 전도서 9장 9절의 말씀이 새삼 감사하게 받아들여 졌습니다 –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사는 동안에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라는 말씀. 이 구절, 사실은 저희들의 주례설교를 해 주셨던 목사님께서 주신 칼라 성경책에 빨간색 밑줄이 쫙 그어져 있는 구절이거든요. 꽤 오랜 기간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해서 그런지, 전 제 아내를 많이 사랑합니다. 제 아내도 저를 많이 사랑하구요. 저의 생활의 다른 주된 공간인 직장에서나, 성경공부를 하는 캠퍼스에서 힘든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내와 함께 있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쉼을 허락하실 때에 참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들을 함께 나눌 때도 물론 그렇구요. 그런데, 전도서 9장 9절의 말씀이 전도서라는 책의 본문의 위치나 앞 뒤의 내용 구조를 볼 때, 그리고 또 그 때에는 아내와 더불어 즐기는 것이 아닌 다른 첩들 내지는 다른 방법으로 즐기는 것들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에서 나오는 잠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내가 원하는대로, 이 한 구절 말씀만으로 ‘가정에 대한 의미를 ‘힘든 삶 속에서의 쉼터’, 내지는 ‘아내와 즐기는 곳’으로 한정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는 믿는 사람의 가정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당연하게 매우 기본적이며 또한 당연히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서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다른 부분들을 생각할 때,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바로 그 도를 전수하는 터이며 (신4:9-10, 신 6:5-9),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행10:2), 바로 ‘부부’라는 두 사람이 동역하며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사역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7)


제 생활의 주된 부분의 단면들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며 제가 하고 있는 생각들입니다. 이런 생활을, 이런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많은 것들을 제 삶에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별 큰 어려움이 없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원하시고 바라시는 점들이 있음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들 마저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제가 ‘잘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 표현임을 깨닫게 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그 사랑의 바탕위에서, 직장에서 진실되게 충성하기를 원하시고, 저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에서 거룩하고, 겸손하고,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시고, 제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며, 헌신하는 사역의 출발점이 되도록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를 데려가실 때에 디모데후서 4장7절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늘 원합니다. 그리고 밑에는 제가 참 좋아하는 찬송, 434장입니다. 1, 2, 3절 다 감사하고 좋은 데요, 1절 만 적습니다. 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중간 중간의 말 뜻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던 때 부터 좋아하던 찬송이라, 어른들께서도 이상해 하셨던 기억이 있는데요…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항상 인도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배선영]지역 코스타와 학생사역

이코스타 2007년 1월호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 온 것이 2001년 1월. 보스턴에서 청년부모임을 통해 청년사역과 자매사역이라는 비젼을 품고 달려 왔던 이곳. 하지만 보스턴 모임과는 달리 이곳 샬롯에 오니 너무나 다른 환경이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 하면 적막하다고나 할까? 섬기게된 교회의 특성상, 청년부 모임도 할 수 없었고, 일하고 있는 학교에서마저 함께 할 수 있는 성경공부 모임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 왜 이 곳에 있게 오게 되었는지 기도하던 중에 우연히 학교 성경공부 모임에 대해 기도하던 지체들을 만나 작게나마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렇게 5년이 흐르게 되었다. 그 세월동안 나에게도 변화가 있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양육하게 되었다.


그 5년간의 일을 돌아보며 미래를 생각해본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 처럼 몇몇 뜻이 맞는 사람들과의 모임으로 시작한 이 성경공부 모임이 그 규모가 조금씩 커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학생들만의 모임으로 시작 되었던 이 학교 성경 공부 모임이 예상과는 달리 조금 다른 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이 성경공부 모임이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모이는 한글어 성경공부 모임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관심 있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픈 되어졌고 지역 성경 공부의 양상을 띠?된 것이다. 예로, 교제와 말씀에 목말라 아이를 데리고 성경공부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자매, 언니 집에 방문하러 이곳에 와 단기간 머무르는 동안에 함께 했던 자매, 군대 제대 후 학교 복학 하기 전에 미국여행 와서 만났던 형제, 청년들에게 마음이 있어서 간식으로, 물질로 섬기셨던 집사님 등등. 나이도 형편도, 그리고 하고 있는 일도 모두 달랐다. 나이차가 어떨땐 30년 이상이 나기도 했다. 이 다름 아닌 다름은 지체들을 모으고 함께 하는데 약간의 어려움들을 갖게 하였다. 학생에 촛점을 맞출 수 만도 없고 그렇다고 학생이 아닌 지체들에게 촛점을 맞출 수도 없었던게 사실이었다. 더우기 지역적인 상황때문에 나에게 주어져 있는 상황과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 마저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많이 나를 힘들게 하였다. 그래서 인지 처음엔 왜 이런 상황에 내가 있어야 하냐고 하나님께 많이도 따져 물었던 것 같다. 늘 학생들에게 만 관심을 기울이던 나에겐 참으로 새로운 경험이긴 하였지만 지금까지 내가 섬겨오던 성경 공부의 모습과는 또 다른, 즉 나와 비슷한 상황의 지체들하고만 했던 성경공부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좋은 경험이었다 라고 지금은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땐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처럼 불편했던 것을 고백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게 하나님께서 만든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인데 말이다. 가난한자와 부유한자, 배운자와 배우지 못한자, 나이가 어린자와 나이가 많은자, 모두가 함께 어우러 질 수 있는 곳, 천국이란 곳… 다시 돌이켜 보면 학생이라는 작은 단위에 집중하다가 정말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시며 나누라 하시는 것을 잃어버릴 뻔 하기도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스턴에서의 청년모임처럼 같은 또래들과의 교제를 갈망했던 나에게 한 경험을 허락 하셨는데 그게 바로 2003년 노스 케롤라이나 gpKOSTA 였다. 이 지역 코스타를 통해그린스보로와 랄리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만나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네트워크를 그리고 있던 나에게 내가 있는 곳만 지엽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곳과 같이 힘들지만 말씀으로 제자 삼고 격려하는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가끔 지체를 섬기고 말씀공부 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 다른 곳에서 비슷한 상황에 힘들지만 꿋꿋이 말씀 공부하며 섬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생긴다. 지역 코스타 이후로 매년 같은 곳에서 노스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학생들이 모여 수양회를 열어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말씀으로 새로워지니 더욱 감사하다. 이제는 나에게 주어져 있는 이 모든 것이 축복인 것을 조금은 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이 나누어지는 곳에선 그 어떤 배경도 상황도 포함하여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경험하였다. 때로는 비슷함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오히려 다른 상황과 지체들을 생각하며 큰 그림을 보며 학생들과 함께 하는 것이 나중에 우리 지체들간에 더 유익이 있음을 믿는다. 학생사역을 통해 더 크고 넓게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안에 있게 됨이 감사하다.


현재 나에게 주어져 있는 상황에 더욱 솔직해 지면 젊은 학생들과 그리고 특히, 자매들에게 마음이 있었던 나에게, 결혼과 아이 양육의 큰 변화는 사역의 모습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교에서 일하며, 아이를 양육하며, 그 전에 섬겼던 모임과 사역을 똑같이 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임의 지체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고 격려하며 기도해 주었지만, 내 안엔 늘 안타까움과 아쉬움들이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모임도 그 전과 같이 자주 나가기가 어렵고, 섬기는 일도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이런 저런 모양으로 끊임없이 만나게 하시는 지체들을 위해 개인 성경공부나 만남으로 권면하고 기도로 섬기고 있다. 내가 있는 곳, 나를 있게 하시는 곳, 그곳에서 주신 영혼을 위해 함께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것이 나에게 주시는 비젼이고 소명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임혜진]What Do You Want from Me, Lord?

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유학생으로 미국 땅을 밟고 지낸 7년, 그리고 직장인으로 2년 남짓 보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나와 내 가정에게 참으로 많은 축복을 내려주셨다. 무엇보다 하나님 안에서 꿈꾸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 비전을 붙잡고 기도하게 하셨다. 나의 내딛는 한발 한발을 주의 친절한 팔로 이끄신 곳은 이 곳, 테네시 주립 대학이다.


처음 교수라는 직분으로 이 곳에 왔을 때, 나는 온통 기쁨과 감사,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쓰임받겠다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코스타에서 뵈었던 교수님들의 모습, 캠퍼스에서 제자 삶기에 열심이셨던 그 분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나도 그렇게 되리라 기대하고 기도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또 나를 다지시길 원하셨다.


교수로서 일을 시작하며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가르치는 학부 학생들, 주로 미국인 학생들과의 관계였다. 젊은 동양인 여교수가 수업을 가르칠 때 반응은 두가지였다. 호의 아니면 무시.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서툰 영어라도 나올 때면 의례 주늑이 든 나 자신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때가 더 많았다. 학생들 눈빛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한 번씩 무례한 행동을 하는 학생에 대해서는 며칠을 끙끙 앓아대며 내심 ‘어떻게 혼내줄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교회 기도 모임에 가면 기도 제목은 늘 똑같았다. “실력있는 교수가 되어서 teaching 에 자신감을 갖게 해주세요.” 그러나, 수업과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님, 여기까지 보내셨을 때는 능력과 지혜도 함께 주셨어야죠.” 어느새 내 기도 속에 불만이 베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학기, 여전히 실력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하는 중, 성령께서 문득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이 주신 대답은 간단했다. “사랑하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실력있는 교수가 되기 보다 먼저 학생들을 사랑하는 교수가 되길 원하셨다. 그 후로,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의 반응이 아니라, 이 수업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업인가에 촛점을 맞추었고, 행여나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는 학생이 생기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도록 기도했다. 나의 기도는 ‘실력과 지혜’가 아닌 학생들과의 relationship building 로 바뀌었다..


그렇게 얼마가 흐른 후, 하나님께서는 ‘통하는’ 길을 보여주셨다. 수업 중 학생들의 반응에 가슴 졸이는 것에서 해방되었고, 학생들이 내게 마음을 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학생은 ‘당신이 얼마나 이 수업을 위해 애쓰는지 알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라는 이메일을 보내주었고, 수업에서 늘 불만을 얘기하던 한 인도 여학생은 인도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초대해 주기도 하였다.


연말이 되면 꼭 학생들에게 주는 숙제가 있다. Vision Project. 그 과제를 통해 나는 학생들이 미래를 좀 더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그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또한 이 과제를 주며 나는 학생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을 찾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지난 해 이 과제를 제출한 학생들 중에는 그들의 인생 계획 중 ‘mission’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의 사역의 방향을 ‘한국인’에게 너무나 고정시켜 놓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서 있는 이 미국 땅에서 외국인들에 대해 마음을 쏟게 하신다. 나의 하루 24시간 중 삼분의 일을 함께 하는 이 학생들에게는, 왜 내 마음이 그토록 강팍하였을까? 이제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relationship을 쌓고, 또 그들과 하나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선생이 되기를 기도한다. 좋으신 선생님이었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한나]제자의 삶…

이코스타 2006년 10월호

제자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지도 못한 제가 이런 글을 부탁 받아서 무척이나 고민했습니다. 변변치 못하지만 제가 겪은 얘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전 캠퍼스 성경공부에 관심이 많았지만 정작 아리조나에 오게 된 후로는 지역 교회 중심으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달 전 까지만 해도 좀처럼 하나됨이 느껴지지 않는 청년부 공동체 안에서 갈등하며 거의 이년 동안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상처들과 오해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져가는 공동체를 바라보며 기도할 때마다 화도 나고, 때론 마음이 저려오며 눈물이 났습니다. 뿔뿔히 흩어진 마음으로 감동이 없는 찬양과 메마른 교제와 예배를 생각하면 속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보실 때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년 예배 때 찬양이 시작되어 들어서면 스무 명쯤 되는 청년들이 긴 벤치에 한명씩 다 흩어져 앉아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듯해 보였습니다. 어쩜 두명조차도 함께 앉아 있지 않을까…? 힘이 빠졌습니다. 그저 명목상의 예배였고 모두 굳은 얼굴로 서로 눈치를 보며 빨리 끝나기 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예배 후 소그룹 성경공부 시간이 되면 시작하기도 전에 한 형제가 말하기를, “빨리 끝내고 집에 가죠.” 그럽니다.


하나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상처 받고 분노하고 극복하려 발버둥 치기를 반복하며 멤버들은 고사하고 리더들 마저 그렇게 지쳐갔습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막막했고 제 자신도 지쳐감을 발견했고 저 조차도 교회 가는 것이 힘이 들고 교회가도 웃음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교회를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제껏 교회는 사람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고 가는 거라고 외쳐왔기에 옮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혜도 없고 뾰족한 수도 없고 막막함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이런 상황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기도하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보이실 거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 제 기도는 무척 단순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기도하던 중 하나님은 지쳐있던 리더들을 한 자리에 모아주셨고 함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습니다. 더 이상 불평을 할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조금씩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리더뿐만 아니라 멤버들도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며 의논하며 구체적인 새 계획을 세워갔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리더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셨고 새로운 계획과 마음으로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되어갑니다. 저에게는 이 변화가 하나님의 손길로 이루어 진 것임이 확실합니다. 한가지 뚜렸하게 달라진 점은 사람들의 표정입니다. 많이 밝아졌고 이젠 예배 후에 하는 성경공부를 한 시간 안에 끝내 달라고 당부해도 꼭 한시간 반씩 끄는 조가 한둘이 아닙니다. 아직도 해야 할 숙제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얼 믿고 자꾸 우리에게 새로운 영혼을 보내 주시는 지…새 학기가 시작하고 두 달이 다 되어가는 10월 중순인데, 저번주 청년부에 세 명 더 왔습니다. 사랑과 지혜로 그리스도의 몸을 잘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김은혜]한 영혼 이야기

이코스타 2006년 9월호

자매님,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한 자매님이 다른 자매님께 다가가며 숙소와 이름을 확인하고 가방을 함께 들며 인사를 나눕니다.
“ 네..에, 안녕..하세요? … 일찍.. 오셨네요?”
“ 조장님들은 하루 일찍 와서 조장수련회를 하고 이렇게 조원님들 맞이하는 거라고 배웠어요. 저도 처음이라서 아는 게 없답니다, 호호호! 아, 그런데 얼굴이 많이 피곤해보이시네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이렇게 대화가 시작되고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하게 된 두 자매님은 침대에 걸터 앉습니다. 조장 자매님이 다른 자매님의 무거운 어깨를 잡아주며 얘기가 계속되자 이 자매님은 벌써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못 참고 힘든 말문을 열어 마음을 나눕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에서 오는 아픔과 분노와 갈등이 자매님을 괴롭히고 있었고, 결혼하고 겪는 이런저런 현실과 예수님을 잘 모르는 양가 가족들 사이에서 이제 막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새댁의 자리는 그 자매를 충분히 혼란스럽고 지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현실을 안고 – 아직 딛고 일어서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 있는 모습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께 작정하고 한번 여쭈어 보려고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착한 첫 날, 처음 만난 조장언니가 한국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환하게 맞아 주어서 긴장했던 마음이 확 풀리고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쏟아졌다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쉽게 얘기하고 그러는 사람이 아닌데 마음에 걸었던 빗장을 이렇게 빨리 연것이 참 신기하다고 하며 눈물을 닦고 이제서야 작은 웃음을 보입니다.


2004년 코스타 화요일 저녁 집회에서 이 자매님은 예수님의 구원의 초청에 결단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인정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주님의 위로하심이 말씀 속에서 날마다 계속되고 기쁨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참으로 살아계시고 선하신 분이심을 증거하게 됩니다. 지금 이 자매님은 하나님이 주신 아이와 남편과 모든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의 씨앗을 뿌리시는 신실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읽으시면서 이미 아셨겠지만 그 조장이란 사람이 부끄럽게도 바로 저랍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한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조장수련회 마치고 숙소에 가서 조원님들을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앞세워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가장 먼저 오신 그 자매님을 맞이한 것 뿐이었습니다. 제 얼굴이 그 자매님 어머니와 비슷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후에 결혼식 사진을 보았지요, 참 미인이셨어요), 어머니처럼 나이를 지긋이 먹은 사람도 아니고요 (제가 비록 세파에 시달려 좀 주름이 가긴 했지만요), 뭐든 말하세요 다 들어 드릴께요 – 그렇게 감히 말씀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제 자신 또한 그 자매님과 하나 다른 바 없는 답답하고 절실한 상황에서 첫 문을 두드린 코스타 였으니까요.


처음 등록한 코스타에서 기혼조 싱글( 결혼하신 상태이고 이번 코스타에는 혼자서 오시게 된 분) 자매님들 조의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물론 조장신청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누리라고 이끌어 주셔서 조장이 되었답니다. 그때는 참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당시 저에게 열심으로 이메일을 보내주셨던 간사님께 이제야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왜냐구요? 제가 다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오타를 연발하고 backspace를 눌렀지만 남은 흔적은 피할 수 없는 아픔이 되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지 믿음 밖에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 스스로를 차갑고 어둡고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내버려 두었고 하나님은 그런 저를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히브리서 11장 6절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믿음의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믿음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 선포하고 영혼의 파멸을 차처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씀으로 나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을 느끼기 시작하고 수면위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신 일이 바로 처음 코스타 조장을 감당하면서 였습니다. 나는 여전히 자신없고 부끄럽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를 먼저 말씀 앞에 드러내며 만나게 하시는 조원들과 나의 연약함을 나누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셨던 것을 보게 하시고 서로가 서로에게 참여하게 되는 은혜를 나누게 하셨습니다. 부끄러운 나의 약함을 통해 주님의 강하신 능력이 모두에게 임하는 통로로 사용하심을 감사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수면위로 올라와 숨을 쉬니 참 좋더군요. 오랫동안 잊고 지낸 햇살을 다시 마주하며 흉터는 남아도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감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코스타를 통해 받아 마신 한 바가지의 생수는 저를 살리셨고 다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 생수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처럼 남들의 시선을 피해 한낮에 물 길러 나온 저에게 생명수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의 고통 앞에서 세 번이나 주를 부인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결국 그는 그렇게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베드로가 회개할 때, 주님을 사랑한다고 다시 고백할 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누가 뭐래도 담대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벧전4:8). 그리고 여호와의 궤를 멘 젖 나는 어미소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로 향하던 것처럼 저에게 충성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삼상 6). 나에게 허락하신 분깃에 감사하며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강한 용사로 훈련시키시는 대장되신 예수만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오클라호마 gp코스타에서 귀납적 성경묵상을 시작하게 되고, 2005년 어린이 코스타에서는 아들 영광이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며 위로하시고 자유함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시애틀 gp 코스타에서 follow-up 할 자매를 연결시켜주시고 한 영혼을 품으시는 아버지 마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Korean Bible Study에 조인하게 하시고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원투원 제자양육할 자매를 만나게 하셔서 처음 원투원을 하면서 오히려 제가 하나님께 원투원 제자양육을 받습니다. 아리조나 gp 코스타에도 성령님의 섭리하심으로 잠깐 다녀오게 하시고, 2006년 코스타에서 3지역 코디로 기도하는 자리에 이끄셨습니다. 온라인 조장훈련과 조장코스타를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저를 향하신 그 시선에 참 많이 황송하면서도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나를 회복시키셔서 존귀한 자로 다시 일으켜 세워시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동역자로 여겨주심이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에 묵묵히 서로를 받치고 서 있는 지체들을 허락하신 것은 더 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부르심을 알고 있었지만 응답하지 않았고 나를 사용해달라고 하면서도 훈련은 거절하는 교만과 불순종의 시간들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려고 하기보다 내 눈에 선한 것을 더 앞서 취해버리는 그런 믿음 없는 삶 속에서 메마른 진통을 겪으며 텅 빈 영혼과 마음과 육신이 소름끼치도록 싫어서 오히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스스로 포기하는 저를 찾아오신 주님은 저를 먹이시고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힘주시고 사랑磯鳴?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코스타는 저의 로뎀나무가 되었고 저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는 처음과 마지막 이유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토록 나를 참아주시고 오래 기다려주신 주님과 절대 손을 놓치 않고 날마다 동행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학생 신앙운동의 나눔터에 미주 학생 사역의 현장 보고를 생생하게 나눌 내용이 제게는 없습니다. 이곳에 감히 부탁 받을 자격도 없는 제가 원고부탁을 받고 순종은 했지만 사실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다 이렇게 저희 가족이 이 산골마을 샤이엔 와이오밍에 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 떼쓰며 여쭙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캠퍼스 개척을 위해 보내주실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한가지 깨닫게 하시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제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제가 주님을 닮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목마른 제 영혼에 한 바가지의 생수가 되어 주셨던 것처럼 저도 한 영혼에게 그분이 주신 한 바가지의 물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마른 펌프에 힘을 실어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 올리게 되는 그 시작이 되고 싶습니다.


여기 한 영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길 가처럼 버려진, 고집 부리 듯 깊이 박힌 돌덩이 가득한, 손길이 멈춰진 땅에 덤비듯 솟아있는 가지덤불 같은 이 황량한 땅, 한 영혼에게 다함이 없는 사랑과 자비로 인내하신 주님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 한 영혼임이 참으로 은혜입니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도록 믿음 주신 일도 감사 드립니다. 한 영혼과 씨름하는 그 현장에 바로 주님이 오신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한 영혼의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눅19:10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