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능력


8. 하나님의 의
바울이 사용한 하나님의 의(義)라는 말은 법정적인 용어로서, 불의(不義)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불의는 곧 죄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도덕성이나 선행으로, 즉, 자신의 의로써 나아가 보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선(善)을 의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자기 의”가 불의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의에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 나님의 의는 죄가 전혀 없는 무흠의 완벽한 상태, 즉, 거룩으로서의 의를 말하며, 이것은 곧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입니다. 따라서 이 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기준입니다. 곧, 하나님의 완벽한 의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말은 결코 인간들에게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들에게는 슬픈 소식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슬픈 소식으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바울을 비롯하여 구약 성경을 알고 있던 당시의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어떠했는지 좀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9. 조건 언약으로서의 율법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율법이 갖는 기능 혹은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27:26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그 누구도 만일 이 율법을 항상 모두 지키지 못한다면 율법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저주 혹은 진노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저는 크리스천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명기 28장 초반에 나오는 축복의 내용을 본문 전체의 문맥을 잘 살펴보지 않고 그냥 좋은 말씀이라고 좋아만 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본문의 내용들을 좋아하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28장 1절 서두에 나오는 조건 부분입니다. 즉, 어떤 조건을 만족시킬 때에만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1) 28:1의 서두를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라는 조건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5절 이하부터 그 나머지 절들과 그 다음 장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모든 명을 순종치 않을 경우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과 저주의 내용들을, 그 끔직한 상황들까지 포함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0. 율법과 하나님의 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 11항에서 좀더 다루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하나님 율법의 모든 내용들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율법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을 봅니다.“그래도 열심히 지키다 보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든지, 혹은 예수님 당시 어느 젊은 청년의 대답처럼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함으로써 종교적 형식으로서 율법을 이해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2)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고 있으며 엄격하고 엄중한 언약서입니다. 거기에는 에누리가 없습니다. 이 언약은 조건 언약으로서 하나님 수준의 의에 이르기 위하여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든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저주를 받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불행히도 하나를 어기면 전체를 다 어기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 언약의 결과는 축복 아니면 저주인데,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듯이 죄인들 편에서 본다면 축복보다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을 확률이 월등히 높습니다. 물론 제사제도를 통하여 회개하는 백성들을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역사 속에서 회복을 이루셨지만, 율법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에게는 죽음의 선포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죄인들에게는 무서운 신적 계약서입니다.


하 나님의 복음은 바로 이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 있는 율법서에서부터 시작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이 거룩한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항상 다 지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 율법서의 메시지입니다. 에베소서 2:3에서 바울이 명확하게 말해 주듯이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혹은 인류에게 진노하시는 것으로 끝나기 위함은 아닙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도리어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당신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조건언약인 율법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구원이 율법과 연관하여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하여서 점진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본 글의 목적입니다.)


11. 율법의 목적과 기능
신명기로 다시 돌아가서 31장 16절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 모세의 죽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 이방신들을 좇으며 하나님을 배신할 것을 미리 예견하십니다. 20절에서도 이스라엘이 배부르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 역시 31장 2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같은 말로 전합니다. 모세가 생존하였을 때에도 끊임없이 여호와를 거역했던 백성들이 모세가 죽은 뒤에는 오죽하겠느냐는 내용으로 모세가 걱정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31:29 역시 참조).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언약을 체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순히 진멸하시기 위해서 함정에 빠뜨리신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받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이스라엘의 타락성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셨을까요? 둘 다 아닙니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이러한 조건적 언약체결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무조건적 언약체결, 곧 그분의 전적인 자비/은혜에 대한 복선입니다.(3) 그러면 조건 언약인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지, 그 목적을 다음에 계속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1) 신명기의 내용은 계약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 당시 속국과 종주국의 왕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당시 모세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언약의 형태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일반적으로 종교적 사고구조에 익숙하다 보면 사람들은 종종 마태복음 5장 48절의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의 말씀을 오해하여 자신도 모르게 율법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 다음에 좀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3) 조건언약인 율법을 옛언약(구약 Old Testament)이라고 부르며, 앞으로 설명할 무조건적 언약을 새언약(신약 New Testament)이라고 합니다.

[김철수]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능력”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능력”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복음의 능력)


지 난 2006년 7월 시카고 휘튼 대학에서 모였던 코스타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8, 9, 10장을 중심으로 복음을 공부하였습니다. 이제 약간 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면을 통하여 이 동일한 복음을 로마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로 마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거룩한 무리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복음 설명 및 적용 서신입니다. 본 지면에서는 로마서 본문의 모든 내용을 다 다루지는 못하지만, 로마서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고 또 복음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본 글의 가장 큰 목표가 됩니다. 저와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기 위해서 독자들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한글과 영어 성경 본문을 면밀하게 잘 읽는 것입니다.
  2. 먼 저 로마서 1장 1절에서 17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이 왜 이 서신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길이 여러 번 가로막혔습니다. 그 동안 바울도 복음 안에서 성장하면서 처음 이해했던 복음보다는 훨씬 더 성숙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또는 복음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로마 제국 이방 사회에서 핍박 받고 있던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서 로마로의 여행을 여러 번 시도했었습니다. (11절의 “신령한 은사”라고 번역된 말의 뜻은 “영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바울의 언어입니다. 원문을 보아도 그렇게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신령한”과 “은사”라는 말들에 대한 오해들이 많아서 정확한 원의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길들이 막히자 그는 결국 서신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길이 막힌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오늘 우리도 동일한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 러므로 본 서신의 목적은 그가 경험한 “신령한 은사” 즉,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본 서신 전체의 문맥상 물론 이 하나님의 영적 선물은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 서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1:1), “그의 아들의 복음” (1:9), 혹은 심지어 “내 복음” (2:16) 등으로 표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복음은 성경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객관적인 약속(고전 15:1-8)일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갈 2:20).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dunamis)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복음에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바울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서 전체의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신구약 성경 전체 문맥(context)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꽤 많은 경우에 성경의 용어들이 독자의 선입견으로 부정확하게 해석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말도 그런 듯싶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외적인 표적 (sign 또는 performance) 혹은 은사에서 찾는 경향이 많은 사람들은 16절을 읽으면서 “복음”을 외적 은사나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능력”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6절 문장의 문맥이 보여주듯이 여기서 능력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러한 종류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이라고 하는 내용에 비추어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왜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바울은 말하고자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로마서 1장 이하를 차근히 읽게 되면,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잘 계시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믿음”이라는 개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이 내용들을 1장 17절 이하에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 그러면 로마서 본 서의 핵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1장 17절의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16절까지 인사 및 본 서 기록의 의도 등을 언급한 뒤, 17절에서 바로 복음의 핵심을 말해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 절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뜻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의인”의 정의입니다. 이제 첫 번째 개념부터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 첫 번째 내용을 롬 3:21에 비추어 본다면, 복음 외에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씀에 의할 때에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도 나타났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의”가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이해한 “의”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흔히 이해하고 있는 죄와 구원의 개념들도 이 의의 개념을 이해할 때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6. 그 러면 롬 1:17에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선 먼저 간단히 결론적인 답부터 내리고 차후에 더욱 차근히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의라는 헬라어 말은 dikaiosune인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말은 구약의 개념을 전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구약의 히브리 말인 Tzedeq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의” 혹은 “공의”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31:1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혹은 시편 35:24에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 . . “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 31:1은 Martin Luther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이 자기의 의에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켜 준, 즉, 그의 종교적 패러다임을 신앙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시켜 준 계기가 된 구절이기도 합니다. 루터가 깨달은 것은 자신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달려 있다는 진리였습니다. 이제 이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7. 하 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학자들 간에는 이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자비/은혜(hesed)라는 말과 동의어인 것으로 보는 이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위의 시편 31:1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의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3:6에서 사랑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한 데에서도 나타나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곧 의로우심과 항상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속성을 하나님의 자비/사랑이라고 하는 본질적 속성(요일 4:8, 16 참조)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비록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분리되어 나타나지는 않지만, 복음을 우리 수준에서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속성을 먼저 구약의 빛에 비추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적 속성인 사랑이 어떻게 당신의 의로우심과 함께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논의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바울이 사용한 법적인 용어로서의 “의”의 개념을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김철수] 히브리서 9, 10장 강해


히브리서 9장 강의
율법의 완성/성취: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영단번(once for all)의 완벽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첫 언약인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것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의에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의 성질 때문에 율법은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간을 구원해보려다가 안되니까 새언약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특별한 목적을 갖고 주어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제사장의 직분은 백성들의 죄사함을 중재해주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이스라엘의 종교의식의 중심인 성소/성전에 상징적으로, 가시적인 방식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있는 지성소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대표하여 죄사함을 받고 나오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죄사함을 받으면서 관계를 (혹은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러한 종교적 삶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예표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인 제도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제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를 전달해주는 “문화적 형식 (cultural forms)”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은 특별한 종교 형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종교제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신 사랑과 은혜를 경험함으로써 오직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신약시대와도 같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여 아무리 완벽한 종교제도가 주어졌다고 해도 그 종교제도 자체가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죄성을 다룸에 있기 때문입니다.

(2) 이제 예수님은 율법의 제사제도를 좇아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인류)을 대표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12절; 24절). 상징적이며 오직 그림자일 뿐인 지상의 성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대표하여 하늘에 있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 선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다함은 인류를 대표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두번째 아담으로 오셨다는 내용과 상통합니다 (롬 5:12-19; 고전 15:22). 첫번째 아담이 불순종으로써 하나님과의 가장 첫번째 언약을 파기함으로 죄가 들어오고 그 결과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온 것에 반하여,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첫번째 아담과는 달리 완벽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구원받은 새인류의 머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즉, 그분이 그렇게 해주신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신뢰하기만 하면) 그분이 이루신 의가 “전가(transference)”되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토큰인 “하나님 수준의 의”를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에서 “의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라는 뜻입니다 (롬 1:17). 오직 은혜로만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러한 두 번째 아담은 동시에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인하여 구약의 율법의 규례대로 우리의 죄를 우리가 아닌 다른 속죄제물에 전가(transference)시킴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해줄 사명으로 우리에게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인간 (레위) 제사장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그의 족보나 계열의 다름이라기보다는, 속죄제물이 바로 죄와 흠이 없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 간의 죄성은 그 어떤 선한 율법도 결코 다 지키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영적 무능력 상태에서 자기의 의에만 만족하여 불행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완벽한 의인이 대신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주어야만 합니다. 그 길은 율법에 이미 예표로 나와 있었습니다. 율법의 제사 제도에 의하면 완벽하고 흠없는 그 누군가가 죄인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서 피를 뿌리고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만 합니다. 즉, 대속의 희생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흠없는 의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인간 세계에 오셨고,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바 로 하나님 자신이(성자께서) 두번째 아담(인간)이 친히 되셔서 의로운 희생을 치루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제사제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18에서처럼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가 바로 예수님의 대제사장 및 속죄제물되심의 결론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제사는 “영원 가운데 오직 한번으로” (영단번, once for all) 완벽한 제사입니다. 율법의 모든 그림자/모형은 이제 예수님에 이르러서 다 성취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 (요 19:30)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3) 그러므로 이제 죄사함을 얻기 위한 땅에서의 모든 종교적인 의식들은 불필요해졌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의 가책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가 약해짐으로써 죄책감에 끌려 죄사함을 위한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려 한다면, 바울에 엄중한 경책과 경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 .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14)”

(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의 공로에 힘입어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내용이며, 우리에게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9의 내용은 우리에게는 적용적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담력”이라는 말은 “자신감”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parresia인데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편안한 관계나 상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confidence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엡 3:12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하나님께 나간다고 풀어 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 위치입니다. 예수의 피의 희생제사가 가져다 준 결과는 바로 이렇게 완벽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회복인 것입니다.


(5)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약입니다. 그분의 깨끗하신 성결의 피 때문에 우리가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지, 우리의 그 어떤 종교적인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담력, 혹은 자신감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구원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영원토록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때문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우리가 다시 넘어지는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토록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분의 피로 우리의 본질이 바뀌어진 연고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코 다시 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cf. 롬 8:31-39).


(6) 그리고 바로 이 은혜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히브리서 10:23-25는 이러한 구원의 결과가 자연스럽게 신앙의 공동체로 나타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값으로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가치는 예수의 피값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롬 3:22). 바로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하며 그 값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이러한 인식에 의하여 우리의 세계관은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10:24-25의 말씀은 진정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강의
완벽한 구원
그리고 새언약의 삶의 원리 (확신!)


이 미 앞 강의에서 히브리서 10장에서 하여야 할 메시지는 이미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시 재반복하면서 옛언약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리스도의 영단번 제사의 효능을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확실하게 일어난 일들을 다시 정리하여 우리의 확신을 더 다져보고자 합니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지금까지 강의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우리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더욱 분명하게 해보고자 합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지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나갈 수 있고, 그 어떤 도전에도 흔들림 없이 우리의 신분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 10:1-9에 의하면 예수님은 옛언약을 폐하러 오셨다기보다는 새언약의 모형/예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옛언약/율법의 원형으로 오셔서 (당신이 친히 대제사장과 제물이 되셔서) 옛언약을 성취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 더욱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혜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성취하기] 하려 함이로다” (마 5:17).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매우 놀라운 결과가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2) 먼저 10:10에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그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룩함”이라고 하는 말은 역시 구약의 레위기의 주제로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하여야만 한다는 율법의 요구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레 11:44-45; cf. 레 18:5).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질 수가 없음을 우리는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이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져야만 되는 것으로서, 여기서 “거룩함”이란 말은 바울이 말하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 (칭의, justification)”과 같은 맥락의 개념입니다 (롬 3-4장). 신적 의를 우리의 죄와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고후 5:21)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불공평한 거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감격스럽게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3) 히브리서 10:14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영단번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케”라는 단어는 “완벽하게 하다”(teleioo)라는 동사의 현재완료형입니다. 즉,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써, (믿는)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용어대로 하면, 의롭다고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또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완벽하게” 하셨으며 그 효능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영원한 직분입니다 (히 7:24; 히 8:1). 다시 말해서,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의로운 자로서 완벽하게 영원토록 세우신 것입니다.


(4) 이것을 바울의 용어로 바꾼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롬 8:1-2; 갈 3:10-13; 갈 4:5; cf. 습 3:14-17). 예수님의 십자가는 또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갈 3:10-13). 그 결과 믿는 우리들은 결코 죄의 권세에 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몸이 연약하고 아직 우리의 몸이 구원받지 못하여서 시험에 들 때가 많지만, 우리의 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 아래로 더이상 끌고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넘어져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넘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롬 6:14).


(5)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자유는 방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슴을 주님의 가슴에 맞추어 책임있게 살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전에는 죄의 힘이 너무 강하여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도 죄책감과 육신의 정욕때문에 그러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가슴에 변화가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주님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함, 곧 영적 능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지키는 투쟁은 끊임없이 우리 삶 속에서 경험되는 영적전쟁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자유는 결과적으로 사탄의 권세와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의 힘으로부터도 자유하는 능력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6) 우리가 영적인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영역들은 바로 우리를 안팎으로 도전하는 세상 안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0:32-39에서 성도들을 격려하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핍박도 하고 유혹도 합니다. 사탄은 세상 뒤에 숨어서 세상 문화와 철학과 종교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끊임없이 기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문화관과 전통적인 가치관에 안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알려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탄과의 전쟁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전쟁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이 어떠한 특권이며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테스트할 수 있는 필연적인 영역이기도 합니다.


(7)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하여야만 영적전쟁터인 우리의 현실/삶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담대함(parresia)과 인내와 믿음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32-39절). 이 세가지 덕목은 모두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감격의 결과요 열매들입니다. 나는 그동안 이슬람의 확신과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여 왔습니다. 영적인 전쟁이라고 해서 과격분자들처럼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영적전쟁은 내면의 전쟁이며 확신의 대결이요, 결국 사랑의 대결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나의 가치를 가장 경멸하는 사람들, 그래서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들을 찾아가며 심지어 저들이 원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찾아가서 그들과 대화하고, 그 대화와 만남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 선교입니다. 이러한 선교적 삶은, 히브리서를 통하여 확인했듯이, 진리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의 삶이 현존할 때에 비로소 세상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철수] 예수의 복음: 새언약의 성취, 화평의 완성 (히브리서 8-10장 강해) 1

KOSTA/USA 2006 아침 성경 강해를 진행해 주셨던 김철수 선교사는 앞으로 eKOSTA를 통해 코스탄을 만날 것이다. 그 준비를 위해, KOSTA 집회 기간에 행했던 김철수 선교사의 성경 강해를 2회에 걸쳐 요약하려고 한다.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는 예수가 역사 속의 다른 어떤 영적인 인물들이나 혹은 우주의 그 어떤 영적 존재들보다도 왜, 어떻게, 얼마나 더 우월하신지에 대한 논의로 서신을 시작합니다. 결국 히브리서 기자의 논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진정한 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인데, 그의 제사장 되심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계열을 뛰어넘어, 마치 율법이 미처 주어지기 전인 아브라함 시대의 멜기세덱과도 같은, 율법 위의 신적인(divine) 계열로 오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요점은 모세의 율법에 지정된 제사의 법으로는 영원한 구원이 불가능하며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7:19) 오직 예수의 제사장 역할만이 율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8장에서부터 10장까지는 예수의 오심이 구약(옛언약)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하여 예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는 확실한 보증이 되신 것인지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공부하게 되면 다음의 중요한 성경의 (신학적) 개념들을 심도있게 파악하게 됩니다. (히브리서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구약의 모세의 오경(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약의 로마서 역시 매우 중요한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다음의 개념들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복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1. 율법(모세의 율법, torah)은 무엇인가? 2.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 및 대제사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3. 옛언약(구약)과 새언약(신약)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4.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언약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5. 결국 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6. 결과적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연구의 질문들(research questions)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8, 9, 10장을 탐구하고 묵상하며 가슴에 복음진리의 말씀들을 새겨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8장 – 구약(옛언약)/율법의 기능과 구원


(1) 구약에 있어서의 제사장의 역할을 먼저 생각하여 보십시다. 제사장의 위치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제사장이 필요하였습니까?


-  제사장의 위치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입니다. 즉, 중재의 역할이 제사장의 가장 큰 임무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자신을 창조하시고 주인되신 그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선택된 백성의 특권을 갖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반드시 누군가의 중재를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12지파 외의 특별한 지파/부족을 하나님은 따로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레위 지파이며, 이 가문은 남성 전부가 제사장의 직무만을 수행하여야만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세의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참조해주셔야 합니다)


-  제사장의 임무는 히브리서 7, 8, 9, 10장에서 거듭 설명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신분을 유지하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짐승의 희생의 피를 뿌림으로써 “대속 (대신 속죄)”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사함은 오직 피뿌림의 희생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히 9:22).


-  제사장들 가운데 최고 대표자로서 대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 (Day of Atonement)”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그들의 죄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성소의 맨 뒤에 있는 “지성소 (Holy of holies, 또는 Most Holy Place)”에 홀로 들어가 그동안 제사제도가 다 망라하지 못한 남은 죄들의 사죄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레 16:29-34; 히 9:1-10)


-  결국, 히브리서 7-8장이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속죄를 위한 언약인 율법의 제사제도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보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오히려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2) 그럼 Torah 혹은 율법(Law)은 무엇입니까? 그 기능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율법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음의 구절들은 이를 명확히 해줍니다. (행 15:10; 롬 3:20, 28; 롬 4:15; 롬 7:6; 롬 8:3; 롬 10:4; 갈 2:16; 갈 3:5, 10-14, 21, 24; 갈 5:3-4; 딛 3:5; 히 7:11-12, 18-19, 28; 히 8:7; 히 10:1)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부터 “구출/구원”된 이후에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을 위한 방편이 아니라 구원하신 분과 구원 받은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covenant)입니다.


-   율법은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1. 하나님의 성품, 혹은 하나님의 의를 계시해줍니다.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 서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완벽하게 깨끗하며, 흠이나 죄가 없으며,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의 본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피조물과 온전히 구별된 신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불의에 대해서는 의로우심으로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하면 불의와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세의 오경을 비롯해서 오경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은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말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2.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될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의입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성에 기초하여 모든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로 그렇게 살 수 없음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끊임없이 율법의 의를 요구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 수준의 의로움”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마태복음서에서 예수님 자신이 강력하게 설파하신 주제입니다.



    -  마 5:17-20 – 당시의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성이 강한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숭상하였고, 예수님이 그들의 유대전승을 따라서 율법을 “종교적”으로 지키지 않음을 보면서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당사자로서 율법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해주시고 있습니다.

    -  마 5:21-47 – 신학적으로 antithesis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예가 6가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구약의 율법의 말씀의 원래 의도를 왜곡하여 가르쳤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율법의 의도는 “신적 요구”입니다. 즉, 인간이 신의 요구 앞에서 불의함을 적나라하게 봄으로써 (심지어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구원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러한 의도를 가진 율법의 요구를 유대 지도자들은 종교적 도덕 수준으로 그야말로 “종교적 율법”으로 타락시켜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율법을 주신 분으로서 “저자 직강”을 통하여 이 점들을 신랄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  마 5:48 – 예수님의 결론은 유대인들이 (나아가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20절) 결국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즉 “완벽하심 (perfect)”과 같이 완벽해야 한다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만큼 의로와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메시지입니다.

  3. 그렇다면 누가 과연 이러한 신적 의를 가질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러한 의를 가질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롬 3:10; cf. cf. 14:1). 율법은 오히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성질은 죄성이라,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결코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율법은 보여줍니다. (롬 8:3, 7-8절의 “육신”은 바울의 용법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성/죄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또한 율법 내의 내용에서도 이미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8장 이하 31장까지를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신 31:16, 20, 27, 29).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전체 문맥에서 읽지 않고 “복받고 싶은 심리”에서 엉뚱하게 읽는 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부분이 또한 신명기 28장 1-14절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전체와 특히 28장 본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맺는 “계약” 부분입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계약입니다. 즉, 율법은 조건 계약입니다. 오직 “만일 . . . . 하면” 기록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의 계약부분은 저주 부분에 비하면 지극히 적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을 가리켜 모세의 율법 혹은 옛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cf. 출 19:5).

  4. 그러므로 율법, 즉 옛언약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죄인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옛언약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혹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의 문제를 “대속”을 통하여 해결하여 함을 율법은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자체가 처음부터 한계를 전제하고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는 이러한 율법/제사장의 역할이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5. 율법은 따라서 인간의 종교적 의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인간이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대신 “신적 의”를 가져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이 신적 의를 대신 가져다 줌으로써 우리를 죄인의 낙인에서 벗겨주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알고 싶으시다면 고린도 후서 5장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cf.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 결론
결국 율법으로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흠이 있거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때문입니다.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죄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종교적인 노력도 인간을 죽음의 문제에서 구원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킴으로써 인간은 또다시 자신의 의를 세우는 교만의 죄에 빠집니다 (롬 10:1-3).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롬 4:15). 죄(죄성)가 기회를 타서 율법의 계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속이고 그것으로 자신을 죽였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롬 7:10). 그것은 인간의 죄(죄성)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죽을 지경으로 만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롬 7:13).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본성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즉,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 앞에 우리는 지극히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율법 외에 그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조경호]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구약의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봉사할 때 신발을 신지 않았다. 발은 땅을 밟고 몸은 여호와를 섬겼다. 맨발의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성하는 땅과 하늘,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다.


‘ 순결’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삶에서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선택하는 ?거부와 선택?의 투명성을 뜻한다.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성 그리고 말과 생각과 행위에서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거룩, 곧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순결과 세속화란 단어는 오늘도 서로를 적대감으로 마주보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서로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나 사렛대학교 백위열 총장은 “…어느 독일 작가는 유대인 학살이 시작됐을 때 위대한 독일교회는 침묵을 지켰다고 저술했습니다. 곧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존립 가치와 합리성을 잃었으며 결국은 흉포한 히틀러 독재에 의해 통치되는 힘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계의 교회는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를 드리거나 시간과 물질의 바탕이 없이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걸까요? 교회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일부분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만 충실한 나머지 세상의 고통과 공포는 외면한 채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잊고 있는지 진실로 반성하지 않으면 세상과 타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평화로운 내일을 위해 각 개인의 적합한 역할을 찾아서 반성하고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라고 크리스천 논단에서 교회의 세상에 대한 책임을 쓰고 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조롱받는 괴상한 단체가 되어버렸다.


순결은 거룩성이다


순 결은 세상에 대한 의도적인 고립이 아니며 술과 담배…등 원시적 도덕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순결?은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4-16) 말씀하신 구원의 부르심을 자아 실현하는 삶으로 ?거룩의 실현?에 있다.


초 대교부였던 제롬은 “거짓된 거룩함은 두 배로 악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인은 이중적이다. 자아 속에도 이중세계를 갖고 있으며 (옛사람과 새사람, 육과 영..) 살아가야 할 삶의 세계도 이중적이다 (죄와 하나님, 세상과 하나님나라..).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삶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주님께서도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지적하셨다. 하나를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를 경멸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거룩은 버리는 능력이다.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죄와 세상과 세속적 사욕을 버릴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해야만 한다. ‘거룩’은 ‘하기오스’ 구별하다, 세속적이고 비 신앙적인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구별되다 는 뜻이다. 구별은 버리는 능력이다.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탈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24:3-6). ‘누구며..누군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중심진리를 깨닫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버리는 능력’을 찾아내야만 한다.


싱 가포르 리관유 전 총리는 “중국을 막기는 이제 어렵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에 와서 장학금 받으며 공부하는 중국 유학생들이 각 학교에서 수석과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중국의 잠재력과 고도성장과 국세확장이 더 거세질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이미 11%.. 한국의 4배에 달한다. 2002년 자동차 생산은 한국을 추월하여 세계5위 자리를 빼앗았으며, 철강과 조선 업도 위협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지난 4년 반 동안 계속 낮은 수치의 성장을 계속하면서 뒷걸음질치고, 청장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정부는 경제재건을 위해 진실하게 고민하고 바른 정책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로마서 강해


2003 년 미국 코스타 오전 성경강해 시간에 로마서를 강해한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 로마서는 복음의 교과서였다. 로마서엔 거룩에 이르는 복음의 바른 정책에 대해 논리적인 교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알지 못하고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와 하나님의 이중 세계 속에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롬6:10-11)를 만드시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  SEX. 첫째 시간의 주제는 도덕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성적문제는 도덕성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을 버린 인간을 심판하시는 죄의 유배지가 ‘성적욕구와 열등감’이었기에 우리는 먼저 죄의 본질적 속성부터 이해 할 필요성이 있었다. 구원과 순결을 말하면서 먼저 성적욕구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정체성, 문화의 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에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  SIN. 로마서의 중심주제인 죽음과 부활의 교리는 죄와 하나님의 이중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죽음과 부활, 죄와 하나님. 4개의 단어의 관계와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께 대한 부활 신앙이 인격화된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 세상 속에서 세속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  SUCCESS. 세상은 성공주의에 지배되고 있다. 세상 속에서의 진정한 성공에 대한 가치관 회복과 성공을 이루어 가는 제자의 자아상을 원리적으로 제시했다. 죽음과 부활, 나와 그리스도 그리고 육과 영의 복음의 전개를 이해해야만 한다.


오 전 성경강해는 행위 적이고 도덕적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복음의 능력. 복음의 근본 원리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다. 독일의 변증 철학자 헤겔은 삶의 인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끊임없이 교양을 채우고, 깊은 사색을 반복하면, 인식의 진보는 마지막 종착점으로 절대정신에 이르게 된다. 인식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 자기 계발이다.“ 로마서를 개인적으로 공부하며 복음의 절대정신에 이를 때까지 반복해서 학습과 깊은 사색을 반복할 필요성이 있다.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에게 첫 사역의 기회를 제공한 도시였다.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8-10)에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작된 첫 번째 교회였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 번 방문했다. 신학자 사우는 “이 서신은 바울 사도 자신의 가슴에 달린 창문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자신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그의 창문을 통해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신학자 본 소든은 “우리는 이 서신을 읽으면서 매우 거룩한 땅을 밟게 된다. 빌립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의 마지막 친서이다”라고 빌립보서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빌립보서를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한 적극적인 생활과 인격을 배울 수 있다.


제1장. 중심주제: 복음


우 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으며(롬1:16), 세상 한 가운데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거룩한 삶을 연출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며 완성인 복음에 대해 새로운 삶을 연출하는 자세가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작이다. 빌립보서 1장에 ?복음?에 대한 세 가지 생활방식을 가르치고 있다.


-  1: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1. 복음의 교제(1:3-11) 그리스도의 심장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 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1:3-5).


빌 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기쁨과 즐거운 추억을 남긴 교회였다. 바울은 10여 년 전을 되돌아보며 미소짓고 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뻐했다. ‘생각’ ‘므네이아’ 즐거운 회상을 뜻한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은 ‘첫날부터 이제까지’(5절) 복음 안에서 지속적인 교제를 나눴다.


“너 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6-8).


그 들의 교제는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7절)에 서로의 사역과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동참하는 교제였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동정- 동역?의 협력의 교제를 가졌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동정하고, 소망을 주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았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빌립보 교회와의 지속적인 교제 때문이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를 섬겼다.


헨 리 나우엔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일정한 가치에 따라 판단된다. 고용자는 피고용자를 지식과 기술과 능력으로 판단한다. 은행과 상점은 신용에 따라 사람을 대우한다. 친구는 공통된 관심사를 기초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부모가 자기 자식의 지능지수가 40이라고 해서 다른 자식과 맞바꾸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회가 버린 사람들 곧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 창녀들의 친구이셨다.


사랑과 순결의 방정식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 “사랑이 계속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자신이 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내 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11).


바울은 세 가지를 위해 기도했다.
① 사랑이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해지도록 기도했다.
② 사랑으로 위선된 삶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했다.
③ 사랑으로 의의 열매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진실하여’ ‘밀칠 하지 않은’ 고대사회는 도자기 산업이 성행했다. 가장 좋은 제품은 두께가 얇은 도자기였으나 굽는 동안 가는 금이 생기곤 했다. 가는 금이 간 도자기를 밀초로 몰래 칠해놓고 도자기를 파는 상점들이 많았다. 햇빛에 비춰보아야 장사꾼이 밀초로 틈을 메웠는지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심장만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능력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2. 복음의 진보(1:12-26). 그리스도의 이름


바 울은 14년 동안 3차례 전도여행을 다녔으며, 7년 간 감옥생활을 했다. 바울은 전도자로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야 했다. 예루살렘에서의 불법적인 체로, 로마의 반역자로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항해, 로마의 투옥..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감옥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진보’ ‘프로코페’ 앞서가며 길을 만들다, 뒤에 따라오는 군대를 위해 길잡이 표적을 세워 놓는 것을 뜻한다.


미 션 인디아 존 데브라스 회장은 인도 땅에서 자행되는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으로 오히려 수천의 인도인들이 하루 3천 여 명씩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핍박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중생과 헌신의 부흥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흥분했다.


바 울이 로마 감옥에 갇힘으로 감옥에 있었던 로마 시위대 안에서와(13절), 시위대 밖에서 복음의 진보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바울을 보초 섰던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었을 뿐 아니라 시위대 밖에서는 두 부류의 반응이 더욱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① ‘투기와 분쟁,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외모로’ 복음을 전하는 파벌의 전도자들이 있었다(15,17절). 교회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명성과 영향력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② ‘착한 뜻..참됨과 사랑..’ 바울에 대한 동정심과 복음전파의 동역자 정신으로 바울의 빈자리를 채워준 전도자들이었다.


세계선교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모든 종족마다 자기 언어로 된 성경이 번역되어야 한다. 전 세계 7천여 다양한 언어 가운데 아직 3천여 종족은 성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선교사가 없어도 자국어 성경만 있으면 토착교회설립이 가능하고 건강하게 부흥할 수 있어서 성경번역은 매우 중요한 선교사역이다. 선교사 파송과 함께 성경번역을 위해서도 중보기도와 필요한 은사와 자질을 갖춘 사람들의 헌신이 요구된다.


전도의 순결성


바 울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경쟁심이나 하찮은 시기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열등감과 시기심은 영적인 능력을 파괴한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 그리스도께 바쳐진 삶이 순결하다. 세상을 향해 복음전도의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이 순결하다. 전도는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생명의 사역이다. 세상에 복음을 증거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역은 없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그리스도의 목표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날마다 전진해야 한다. 복음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전진해야 한다.


캐 나다의 약사 엔드류 스타렛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무관심의 죄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예수께서 재림하셨을 때 약 팔고있을 자신의 모습 생각하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사업과 집을 정리하고 수단내륙선교회에 기증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친척들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다는 짤막한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결혼과 안식년도 포기하고 41년 간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았다. 전도의 열정이 그의 삶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모든 부족에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일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기회가 된다면 죽는 것은 더 나은 기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중간지대에서 바울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그의 순결의 영성을 우리에게 자세하게 고백하고 있다.


“나 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0-24).


죽 음은 위대한 모험 “기독교 신앙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우리는 핵심을 잃게되며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주변의 것에 불과하다” 존 스토트의 말이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 고정된 삶을 살았다. “살든지 죽든지..” 삶과 죽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 외에 어떤 삶의 계획도 없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삶 전체를 점령하셨다. 최상의 순결과 능력의 삶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모든 것이 되셨고 모든 것을 지배하고 계셨다.


“죽 는 것도 유익함이라” ‘유익’ ‘이익, 소득’ 죽음은 완벽한 이익이었다. 그리스도와의 영광스럽고 완전한 연합으로 가는 기회의 문으로 여겼다. ① “살든지” 감옥에서 석방된다면 주님과 세상을 위해 열매맺는 삶을 살 것이다. ② “죽든지” 죽음은 위대한 모험이며 여행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거할 소망 때문이었다. 바울은 ‘죽음이 훨씬 좋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벵겔도 고백했다. “나는 무엇을 살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


제18 회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 2연승을 했던 에티오피아 아베베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무명의 선수였다. 마라톤 경기 한 달 전 급성맹장염 수술을 하고도 그는 초인의 힘으로 우승을 이뤄냈다. 아베베의 연습장소는 산과 들이었으며, 운동화도 없는 맨발로 연습을 했었다. 도쿄올림픽 후 그는 11회나 우승을 했으나 자동차 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았다. “두 다리는 잃었지만 나는 아직 건강한 두 팔이 있습니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장애인 올림픽 썰매경주부분에서 또 다시 우승을 이뤄냈다. 오늘 우리도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천할 수 있는 강한 복음의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3. 복음의 신앙(1:27-30)


‘오 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라’ Manner of Life. 생활방식을 가져라. 너희의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서약한 사람답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폴리테스’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행동해야 한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들은 로마시민처럼 라틴어로 말하고, 라틴 풍의 옷을 입고, 로마인 신분에 집착했다. 로마시민이 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였다. 로마시민으로서 완전한 충성을 바치는 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다.


“오 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1:27-28).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이다. 바울은 일치와 협력을 열망하며 복음의 신앙을 위해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에게 싸움과 고난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참된 일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는가?”

[조경호] 빌립보서 1장. 복음 안에서의 생존 전략


8 월14일 오후 4시. 미국 뉴욕과 남동부, 캐나다 토론토를 중심으로 한 북동부 지역에 사상 최악의 정전사태로 대도시가 호흡을 멈췄다. 교통, 통신..등 도시가 대혼란에 빠져 5천여 만 명이 암흑의 고통을 겪었으며 7조원의 피해를 가져왔다. 최첨단 시설 위에 세워진 도시에서 후진국형 대형사고가 터진 셈이다.



그 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빛이 꺼지면 세상은 암흑의 고통에 빠진다. 암흑은 모든 삶을 정지시키고 고통과 절망을 가져온다. 고통의 게헨나 ‘흑암’을 몰아내는 것은 오직 빛뿐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빛의 사명보다 소금의 사명이 먼저 요구되었다. 소금의 순결한 삶이 우선될 때 빛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휠라 코리아 윤윤수 대표이사는 최고경영자에겐 세 가지 3S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Speed. 정보의 즉시성,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Strong. 강력해야 한다. Smart.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고객과 임직원을 섬기며 부드러운 열린 경영을 해야한다. 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동일한 3S 덕목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된다. 세상 속에서 도덕적인 모범이 되어야 한다.



빌 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에게 첫 사역의 기회를 제공한 도시였다.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8-10)에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작된 첫 번째 교회였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 번 방문했다. 신학자 사우는 “이 서신은 바울 사도 자신의 가슴에 달린 창문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자신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그의 창문을 통해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신학자 본 소든은 “우리는 이 서신을 읽으면서 매우 거룩한 땅을 밟게 된다. 빌립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의 마지막 친서이다”라고 빌립보서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빌립보서를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생활과 사역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복음의 세 가지 삶의 방식


독일의 변증 철학자 헤겔은 삶의 인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끊임없이 교양을 채우고, 깊은 사색을 반복하면, 인식의 진보는 마지막 종착점으로 절대정신에 이르게 된다. 인식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 자기 계발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순결한 삶을 살려면 ‘복음에 대한 절대정신’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으며(롬1:16), 세상 한가운데서 복음을 중심으로 거룩한 삶을 연출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서의 생존과 능력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복음의 절대정신을 소유하기 위해 바울의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빌립보서 1장엔 복음에 대한 세 가지 생활방식을 바울이 자서전적인 고백을 쓰고 있다.



  • 1: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1. 첫 번째 삶의 방식. 복음의 교제(1:3-11)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1:3-5)


빌 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기쁨과 즐거운 추억을 남긴 교회였다. 바울은 10여 년 전을 되돌아보며 미소 짓고 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뻐했다. ‘생각’ ‘므네이아’ 즐거운 회상을 뜻한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합동신학대학원 교장이셨던 김명혁 목사는 “인 생에 필요한 것은 만남이다. 구원도, 목회도, 선교도 만남이다. 우리의 삶이 복음적 삶이 되기 위해서는 만남의 확장이 필요하다. 유학시절, 도서관에서 공부가 전부인줄 알고 생활하다가, 만남의 축복을 깨달았다. 주말엔 사람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피크닉과 운동회를 가지면서 만남의 축복을 더욱 깊이 누리게 되었다. 사마리아 여자도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었다.”고 칼럼을 쓰셨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빌립보교회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복음 안에서의 교제는 끝까지 지속되는 만남이다.


교제의 중요성(1:6-8)



“너 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6-8)
첫 번째 중요성(6절) ‘시작’과 ‘이루심’은 양끝을 의미한다. 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이다.
“내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그 일을 그분의 은혜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바울은 10년 전 빌립보교회가 회심했을 때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의 일을 완전케 하실 것을 주님이 보장하신다고 말한다. 복음 안에서의 참된 교제를 통해 주님께서 ‘선한 일’ 곧 구원과 인생의 완전함을 성취해 가신다.



‘ 나홀로 족’으로 주를 섬기는 사람들은 결국 플라스틱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주님은 ‘따스한 관계’ 안에서 일하시고 역사 하신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세상 속에서 고립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순결이 아니다. 도피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따른 지 수년이 지나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다. 그들은 세상과 격리된 채 살아간다.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 바깥에서 숨어사는 신자들일 뿐이다. 바울과 빌립보교회에서 보여준 우정을 세상에 보여주는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 헨리 나우엔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일정한 가치에 따라 판단된다. 고용자는 피고용자를 지식과 기술과 능력으로 판단한다. 은행과 상점은 신용에 따라 사람을 대우한다. 친구는 공통된 관심사를 기초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자식의 지능지수가 40이라고 해서 다른 자식과 맞바꾸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회가 버린 사람들 곧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 창녀들의 친구셨다.



두 번째 중요성(7절) 빌립보 교회는 ‘다 나와 함께 참예한 자들’ 이었다. ‘매임, 변명, 확정함’은 모두 법률적인 용어다. ‘확정’은 계약이 법적으로 유효함은 보증하는 것을 말한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마음에 있었다.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전도사역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과 좌절을 함께 나눈 교회였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동정- 동역?의 협력의 교제를 가졌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동정하고, 소망을 주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았다. 오늘 교회도 세상에 대해 동정하고, 소망을 주고, 함께 고난을 받을 때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 자살 바이러스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 자살자 숫자도 1991년 6,593명에서 2002년 1만3,055명으로 10년 사이 2배로 증가했다. 연세대 황상민 심리학교수는 “자살하는 사람은 쉽게 죽는 방법을 선택한다. 고층아파트와 고층빌딩 밀집이 음독자살하기 위해 약을 사야하는 시간이 필요 없는 투신자살을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투신자살 현상을 해석했다. 또 다른 교수는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투신자살을 하게된다”고 분석했다. 카드 빚을 견디지 못하고, 직업을 구하지 못해 좌절하다가 막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는 1시간에 1.5명이 자살하는 현 사회에 대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세상 속에서의 순결한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굿 모닝시티 분양 사기 사건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대형사고였다. 자본금 7억으로 9천억 짜리 사업 프로젝트를 사기치는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투자자 3천여 명의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 평생 모은 돈을 다 잃어야 했다. 그리고 그 돈의 일부인 4억2천만 원이 민주당 정대철 대표에게 대통령 만드는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국민들을 실망하게 한 사건이었다. 대선 자금 절반 이상이 돼지저금통에서 나왔다던 대통령의 말도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기 사건의 주범 윤창렬씨는 기독교인이었다.



세 번째 중요성(8절) 바울과 빌립보교회의 교제는 고품격의 교제였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만들어지고 성취된 우정과 사랑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극진한 사랑으로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기독교의 본질과 생명과 거룩함은 사랑이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술과 담배. 영화보기.. 도덕적 기초수준이 아니라 세상에 흉내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심장’의 사랑이 기독교인의 윤리이며, 삶의 스타일이어야 한다.



화 가 이중섭 선생은 앓고 있는 친구 문명을 가면서 “미안하네, 벌써 찾아오려 했는데 빈손으로 오기도..” 하며 말을 흐리자, 친구는 “빈손이면 어떤가, 자네 형편 다 아는데..” 이중섭 화가는 들고 온 물건을 친구에게 건네주며 “자네 주려고 가져왔네. 이걸 가져오느라 좀 늦었지. 복숭아 그려왔다네.. 복숭아 사줄 돈이 없어서, 그려만 왔네..” 이중섭 선생의 따뜻한 우정은 친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그 그림은 그의 심장으로 그려온 따뜻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과 교회에 대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챔버스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중 제일 좋은 것을 다시 드리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 그분의 사랑을 다시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면 복음의 첫 번째 삶의 방식인 ‘복음의 교제‘야말로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추구해야할 복음의 절대정신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