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규]2004년도 그룹 성장 계획 세우기 (Vision Making) & Spiritual Transformation

Q: 2004년도 그룹의 성장을 위해 어떻게 계획을 세우면 좋을까요? 



A: 4가지 기본 평가/계획 시스템과 2가지 응용 프로 그램을 이용해 보세요.



먼저는 그룹의 존재 목적(Mission Statement)을 기록해 보세 . 그리고 두 번째는 그룹이 올해 꼭 이루고자 하는 것 (Vision/Goal)이 무엇인지를 결정하세요. 그리고 그 결정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사들을 어떻게 할 것 인지를 기본적으로 3가지 적으세요. 더 나아가 그룹이 영적으 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부분은 어느 부분인지를 정하세요.



매년 연말과 새해가 되면 모든 그룹들이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출발하게 된다. 이곳 저곳에서 모임을 갖고 지난해를 평가한다. 그리고 내년도 계획을 세우고 새 출발을 다짐한다. 아마도 새 날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부합한 아름다운 모습이리라. 하지만 실상 지난해를 평가해 보려 해도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내년도 계획을 세우려고 하면 정작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접하게 된다. 주로 그 평가의 기준은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는가 못했는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혹은 진행이 잘되었느니 못되었느니, 혹은 결론적으로 숫자가 늘었는가 아니면 줄었는가를 가지고 평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내년도 계획은 보다 ?성숙하게 되는 그룹, 건강한 그룹, 선교하는 그룹? 등등의 표어를 세워서 이전보다 더 강하게 홍보하고, 행사를 다양하게 하여, 보다 많은 참여를 결의하고 다짐한다. 물론 이 방법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이 방법은 조금 추상적인 면이 강하다. 그러다보니 주먹구구식으로 행사를 위한 행사들을 만들어 땜질하게 되기도 쉽고, 또 뒤돌아보며 이루어지는 평가 자체도 애매 모호하게 되기가 쉽다. 그런 면에서 보다 구체적인 평가 시스템과 계획 시스템을 리더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초 시스템들을 통하여 평가도, 계획도 보다 구체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초시스템들 위에 필요한 응용 프로그램을 첨가함으로 인해 더욱 영적으로 성숙하게 그룹을 인도할 수 있는 계획과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데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과 기준이 리더 나름대로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그 다양한 방법중의 하나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신년 계획의 출발점과 평가를 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초 시스템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먼저 기본적으로 그룹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현실 점검(Check-up) 4가지 시스템 확인 해 보자.



1. 작년도 우리 그룹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우리 그룹원들이 아는가? 기록해 보라.



2. 작년도 우리 그룹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이었나? 그 목표를 그룹원들이 알고 있었나? 기록해 보라.



3. 작년도 우리 그룹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세운 분명한 전략 3가지를 써 보라.



4. 작년도 우리 그룹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여 구체적으로 그 훈련 을 하고자 하였던 것은 무엇이었나?



4가지 그룹 성장 계획의 기초 4가지 시스템을 확인(check-up) 해 본 결과는 어떠한가?



94년도 3월 군목으로 입대해 장교 기초 군사교육을 영천에 있는 삼군 사관학교에서 12주 동안 받은 적이 이었다. 이 과정을 거친 후 각 군목들이 육군과 해군/해병대, 공군으로 발령이 난다. 그런데 12주 동안 이루어지는 교과 과정중 전쟁론에 관한 과목이 있었다. 여기서 제시된 내용 중 하나는 클라우스비치의 전쟁의 10원칙 이었다. 그에 의하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들은 첫째 목표를 정하는 것. 둘째는 화력을 집중하는 것. 셋째는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분명한 목표물(Tarket)이다. 목표물이 분명하지 않고서는 전쟁에 승리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목표물을 선정한 이후 가지고 화력(weapon)들을 집중하는 것이다. 만약 화력이 집중되지 않고서는 산발적인 공격을 통하여서는 목표물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가용한 화력 무기 사용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조직으로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클라우스비치 전쟁론은 우리들에게 그룹을 운영하는 면에서와 함께 신년도 계획을 세우는데 중요한 기초적 방향성에 대한 다양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클라우스비치의 전쟁이론과 앞에서 물어본 4가지 기초 확인 시스템을 비교 해 보자. 기초 평가 계획 확인 시스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 그룹의 존재 목적의 확인과 목표의 설정은 클라우스비치의 첫번째 이론, ?목표(Target)의 설정?의 부분에 해당한다. 즉 기초 계획 평가 시스템의 존재 목적, 그리고 분명한 목표, 그 자체는 그룹으로 하여금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 전쟁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또 이것은 마치 자동차를 운전할 때 분명한 이정표는 우리로 하여금 길을 잃지 않고 곧바로 앞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존재 목적의 확인과 목표의 분명한 설정은 우리 그룹이 무엇을 해야할 지 분명한 내용을 보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소그룹이 헤매지 않고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한다는 말이다.



기초 평가 계획 확인 시스템의 세번째 질문,?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세운 분명한 전략 3가지를 써 보라?에 관한 질문은 클라우스비치의 두 번째 세 번째 이론, 화력집중과 화력 집중을 위한 조직(System)에 관한 질문이다. 그룹의 목표를 세웠으면 그 구체적인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이 부분에서 실패를 많이 한다. 즉 어떠한 추상적 목표는 세웠는데 이를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을 세우지 않거나 이 구체적인 실천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조직을 갖추거나 세우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서 연중 계획은 다시 두리 뭉실하게 변화되어 버리고 모든 행사 자체도 화력 집중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곳 저곳에서 그저 개인적으로 뻥뻥 터지는 산발탄이 되어 버리는 적이 허다하다. 아무도 책임자가 없고, 아무도 계획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리더는 그저 때가 되면 시기적으로 급해 행사를 치르는데 급급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효과적인 그룹의 양적, 영적 성장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룹의 분명한 정체성 확립과 목표(vison)설정, 그리고 그 목표의 구체화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클라우스비츠의 전쟁론과 같은 이론과 기초 계획 평가 시스템을 응용해서 어떻게 우리 스몰 그룹의 질적, 영적 성장을 위해 내년도 목표와 그 실천사항을 구체적으로 세울 수 있을까? 이제 2004년도 스몰그룹의 성장 계획을 실제적으로 세워 보도록 해 보자.



 



첫째 단계! 우리 그룹의 존재 목적(Mission Statement)을 쓰라.



모든 조직은 그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존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 존재 목적이 있다. 많은 목적들 가운데 분명한 한가지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여 구원의 은총을 얻도록 하며, 더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사역을 보다 잘 감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 중 하나가 스몰 그룹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섬기고 있는 스몰 스룹은 분명 그 존재 목적이 있게 되어 있다. 만약 그것이 대학생 그룹이면 그 존재 목적은 분명히 초점을 대학생에 두고 그들을 전도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 그들로 예수님의 제자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만약 그 대상이 청년부라면 청년들을 전도하여 그들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의 삶을 살도록 하는데 있다. 결혼한 부부 가족을 위한 스몰스룹이든, 싱글 그룹이든 마찬가지로 분명한 목표 대상을 가지고 그 그룹이 존재하게 된다. 만약 그 대상이 어느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세 진 테스크(Task) 중심 그룹이라고 하면 그 그룹은 특수한 테스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어느 특정한 부분을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는데 그 존재 목적이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그룹은 그 존재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있고, 그 존재 목적을 글로 분명히 정리한 것을 ?Mission Statement”라 할 수 있다.



자 그럼 우리 그룹의 존재 목적을 제일 먼저 생각해 보자. 왜 우리 그룹이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진 이후에 비로서 우리 그룹의 모든 구체적 목표와 그 실천 계획이 나올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모든 계획의 제일 중요한 첫 출발은 바로 우리 그룹의 존재 목적(Mission Statement)이다. 물론 이것은 일년 후에 돌아보면서 그룹을 다시 평가하는 평가의 잣대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 한번 웍샾을 해 보자. 한번 써 보라






우리 그룹의 존재 목적은(Mission Statement)?

 



둘째 단계!



우리 그룹이 이루고자 하는 내년도 목표(Vision/ Goal)를 정하고 이를 문장으로 쓰라.



목표라고 하면 우리가 ?어느 주어진 기간내에 되어지고자 하는 목표 지점(Goal)?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을 비전(Vision)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내년도 우리 그룹이 이루고자 혹은 되어지고자 하는 분명한 어느 지점을 의미한다. 2004년도 우리 그룹이 되어지길 원하는 구체적인 어떠한 모습이다. 그러면 어떻게 2004년도 우리 그룹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Vision/Goal)을 만들 수 있을까? 계시를 통해서? 물론 계시가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것은 개인적 소명이기도 하기에 목표를 만들어 내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지만 계시는 특정인에게 한정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면 그 계시가 없었던 사람은 목표(Vision/Goal)을 만들 수 없는가? 보다 보편적인 방법은 없을까? 나는 여기서 몇 가지 보편적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2004년도 목표를 정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방법은, 작년도 행사의 내용들을 아래의 필요성과 참여도의 좌 표에 집어 넣어 보는 방법이다.



 



위의 도표에서 A 부분은 필요성은 많은데 참여도가 적은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리더나 그 행사들을 주관했던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감정적 결과는 실망(Frustration)이다.



도표의 B 부분은 필요성도 적고 참여도도 적은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리더나 그 행사들을 주관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행사들을 보는 사람들은 지루함(Boring)을 느끼게 된다.



한편 C 부분은 필요성은 낮은데 참여도가 많이 이루어진 부분이다. 행사는 잘 치루어졌지만 참여자들로부터 들려오는 평가는 회의적(Sceptical)이다. 이 행사를 통해서(SO WHAT?) 의미를 찾지 못하고 그저 행사로, 소모만 했다고 하는 여운이다. 어떤 행사는 비록 소수였지만 소중한 의미를 주는 행사가 있는 반면, 어떤 행사는 겉만 번지르르 했지 실상 결과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것들이 있는데 바로 C부분의 행사들이 주로 그렇게 될 확률이 많이 있다.



그러나 D부분은 필요성도 많았고, 참여도도 높았던 부분이다.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부분(Inspired)이라 할 수 있다. 참여 후에는 주관자나 참여자나, 모두 성취감과 감동, 의미를 발견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행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지난해 행사를 넣어 본 다음 하는 것은 분석이다.



A부분의 행사들은 필요성도 많았는데 왜 참여도가 적었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홍보 때문이었는지, 목회자의 무관심이었는지, 시기의 문제였든지 등등. 그러면 내년도에는 어떻게 참여도를 높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어떻게 가장 바람직한 D 부분으로 끌어 올릴 것인지? 아니면 그 행사를 없앨 것인지? 를 결정하는 것이다.



B부분은 필요성도 없고 참여도도 낮은데 그대로 나두고 있는지? 없애면 문제가 되고 지원하자니 필요성이 없고 그런 것인지? 앞으로 그대로 내 두어 자연스럽게 차체적으로 없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바람직하게 양육하여 D 부분으로 끌어 올리도록 전략을 세울 것인지? 등등을 결정하는 것이다.



C 부분은 필요성은 적었는데 왜 참여도가 많았는지? 이 행사들을 없앨 것인지? 아니면 이 부분을 보다 개발하여 그룹의 성장에 중요한 도구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D 부분으로 창조적으로 끌어 올리도록 전환시킬 것인지?



등등을 분석 판단하면서 2004년도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스몰 그룹의 4가지 기본적 기능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는 방법이다.



 



스몰 그룹의 기본적인 4가지 기능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은 제자 양육, 예수님 안 믿는 사람 전도, 공동체 멤버들에 대한 돌봄, 그리고 서로 혹은 대내외적인 봉사가 그 기본 내용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번에는 이 4가지 기능 안에서 지난해 우리 그룹에 제일 잘해 왔던 부분 혹은 가장 중점을 두고 해왔던 부분이 무엇인지, 그룹내에서 제일 소홀했던 부분이 무엇인지를 평가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현재 우리 그룹에 제일 필요로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그룹은 지난해 아주 잘 모이기는 했는데, 제자 삼는 것은 아주 약하였다고 분석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내년도에는 제자 삼는 것에 보다 더 초점을 두고 스몰 그룹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제자 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스몰 그룹을 1년간 운영할 수 있을까?



만일 지난해 매 모임을 2시간씩 가졌다고 가정 해 보자. 지난해 모임이 시작되면 주로 1시간을 친교에 두었다면 새해는 모임의 1시간은 제자 양육(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체계적 훈련)에 할애를 하고, 나머지 1시간을 가지고 전도 20, 친교 20, 봉사 20분 이러한 방식으로 시간을 배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일년 단위로 나누어 1년을 100% 가정한다면 일년 모임의 40%는 제자 양육에 초점을 두고, 전도, 돌봄, 봉사에 각각 20%씩 분배를 해서 운영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도입할 경우는 매년 한 기능씩에 초점을 두도록 함으로써 4년 차 장기 계획이 수립될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방법은 그룹 멤버들과의 인터뷰를 통한 방법이다.



그래서 멤버들 개인 개인을 만나 그들에게 지난해 평가를 듣고, 또 그들이 스몰 그룹에 거는 기대가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보는 가운데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는 방법이다.



 



네 번째 방법은 설문 조사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설문 조사의 전문성이 없으면 편협하게 되기 쉽기에 전문가가 아니면은 쉽지 않은 방법이다.



기타 전문기관을 이용하는 방법, 혹은 좋은 모델을 채택, 적용해 보 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혹 위의 여러 가자 방법을 조합해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다양한 방법중 중요한 것은 우리 그룹에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그룹에 맞는 방법으로 고쳐서 혹은 조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 우리 한번 웍샾을 해 보자. 한번 써 보라






내년도 우리 그룹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Vision/ Goal)?



세 번째 단계!



그 정한 목표(Vision/ Goal)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룰 것인지 구 체적 행사(Activity) 3가지를 쓰라.



보통 두 번째 단계, 그룹의 목표를 정하고 나면 그룹 성장 계획 작업을 여기서 멈추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목표를 이루게 하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이다. 흔히 우리가 무시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목표를 설정하면 마치 그 다음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실상 그렇지 않다. 클라우스비츠가 그의 전쟁론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전쟁에 이기려면 목표물을 선정한 이후,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다. 만약 비행기와 항공모함, 그리고 육군들이 공격하고 포위하여 진군하지 않는다면 전쟁의 목표지점을 구체적으로 탈환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목표를 선정했으면 구체적으로 전략적인 무기들을 결정하고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 이 무기들에 의해서 우리가 되어지고자 하는 혹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비전에 도달하게되는 실제적 다리(Bridge)가 생가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목표 설정에 이어지는 단계는 그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방법(Activity), 다른 말로 하면 구체적인 행사들에 의해서이다. 그 방법은 3개에서 4개 정도가 좋다. 3개가 되면 4개월에 한번 이 되고 4번을 만들면 각 분기별에 한번씩 된다. 각 그룹이 형편에 따라서 결정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번 웍샾을 해 보자. 한번 써 보라






우리 그룹의 이루고자 하는 목표의 구체적 방법(Activity) 3가지?

 



4번째 단계!



누가(who) 이 구체적인 방법을 책임질 것인가를 쓰라.



모든 것을 리더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역의 분담은 보다 효과가 크다는 것을 기억하라. 갑작스럽게 한 사람을 지목하여서 일을 부탁하면 일에 대한 중요성도 떨어지고, 내용의 질도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책임자를 세우면 그를 통해서 미리 준비되어지기에 보다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한 가지 일에 한 책임자, 일명 한 행사에 한 챔피언씩 있으면 그 행사의 성과는 80-90%의 성장된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행사를 계획해 놓고 한 사람의 챔피언을 세우지 않을 경우는 주로 50%의 효과에 그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챔피언을 통하여 그 행사의 준비 스케쥴 (Time Schedule)을 짜게 하라. 물론 홍보 기간, 준비 기도회, 준비팀 구성까지 다 포함해서 말이다. 이 준비 기간을 통해서 비록 행사는 1년에 3-4번 이라 할 지라도 그 준비 기간을 통해 평상시 화력이 집중되는 것이다. 많은 행사들보다 보다 집중되어 있는 행사들은 생각보다 더 좋은 양적 질적, 영적 결과들을 가져 오게 된다. 생각보다도 더 훌륭하게 챔피언들이 그 사역을 이룰 것이다. 더 아나가 그 사역을 통하여 새롭게 발굴되는 챔피언들과의 동역, 미래의 팀 사역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의 선정과 더블어 각 방법들의 챔피언을 세우는 작업은 그룹 성장 계획을 보다 목표 지점에 다가가게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면 우리 한번 웍샾을 해 보자. 한번 써 보라







그 구체적 3 가지 방법의 각각의 책임자는 누구?


 



다섯 번째 단계!(응용 프로그램)



올해 우리 그룹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여 훈련되어지기를



원하는 부분(Spiritual Discipline)이 무엇인지를 쓰라.



우리 그룹이 특별히 영적으로 성장함에 있어 약한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 그룹 멤버들이 교회는 오래 다녀 대략의 성경 지식은 가졌지만 성경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부족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설명 못한다든지, 아니면 기도하는 부분이 약하다든지, 아니면 성경 통독이 약하다든지, 전도가 약하다든지, 개인적 QT가 약하다든지, 봉사가 약하다든지, 인간 관계가 약하다든지, 공동체성이 약하다든지 등등,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방해가 되거나, 성숙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이때 리더의 역할은 그룹원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것이 어느 부분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한 부분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2004년도에 그룹 내에서 그 약한 부분을 보충 강화시킬 수 있는 훈련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초점 있는 훈련을 통하여 매년 그 그룹 멤버들이 영적으로 성장한다. 물론 그룹원 개인도 자신이 성장하는 모습을 느끼고 고백하게 된다.



이 응용 프로그램 계획 역시 앞에서 계획을 세웠던 방법을 이용해서 하면 같은 방법으로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 한번 웍샾을 해 보자. 한번 써 보라






우리그룹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부분은? (Spiritual Discipline)

구체적목표는


구체적 방법 3가지는?


 



여섯 번째 단계!(응용 프로그램)



올해 우리 그룹이 신앙 성장을 위해서 읽을 책 1권은?



모든 책이 의도적으로 독자를 몰아가려는 저자의 한계는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모든 책이 그 저자를 통해 여러 가지 새로운 안목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양하고 신선한 안목(insight)이 독자에 의해서 발견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그룹 성장을 위해 신앙 서적 한 권을 선정한다면 현실 적으로 신앙 서적 한 권도 잘 읽지 않는 초신자나 기존 신자의 경우에는 참으로 좋은 영적 성장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열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그룹의 영적 성정을 위한 계획에서 좋은 책 한 권의 선정은 대단히 그룹원들의 영적 성장에 좋다.



먼저 책명을 정하라, 책을 정할 때 그룹 내에서 영적 훈련을 하기를 원하는 초점과 맞추는 것도 좋은 방법중 하나이다.



둘째는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정한다. 매주 한 과씩 읽고 토론하는 방법을 정할 것인지? 아니면 누가 한 과씩 읽고 요약하고, 문제 제기를 2-3가지해서 토론할 것인지? 등등 그 읽는 방법을 정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우리 한번 웍샾을 해 보자. 한번 써 보라






우리 그룹이 신앙 성장을 위해서 읽을 책 한권은? 1. 제목 2. 저자 3. 읽을 방법? 4. 책임자 누구?

이와 같이 4가지 기본 평가/계획 시스템 과 2가지 응용 프로그램 테두리 안에서 그룹의 성장 계획을 세우는 방법은 보다 그룹 성장에 있어 양적, 질적, 영적 효과적인 열매들을 가져오게 만드는 소중한 도구(Tool)이다.



2004년도 그룹 성장 계획을 세우셨나요?



 



4가지의 기초 평가/계획 시스템을 이용 하세요.



1. 내가 속한 그룹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써 보세요.



2. 2004년도 그룹이 되어지고자/ 혹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세요.



3.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3-4가지 정하세요.



4. 그리고 그 사역을 맡을 사람을 정하세요.



 



그리고 2가지의 응용 프로그램을 이용 하세요.



5. 그룹내에 영적 훈련이 필요한 것을 정하세요.



6. 우리 그룹이 신상 성장을 위해서 읽을 책 1권을 정하세요.



 



우리의 부지런한 섬김을 통해 우리 그룹과 멤버들이 길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보다 지난해와는 다른 양적, 질적, 그리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열매 맺는 2004년도가 될 것입니다.


[장이규]다이내믹한 그룹 토의와 Spiritual Transformation

Q: 어떻게 다이내믹한 그룹토의를 인도할 수 있는지요? 그리고 그룹토의가 영적인 변화와 연관이 있는지요?


A: 물론입니다. 소그룹 모임에 있어서 다이내믹한 그룹토의는 영적 성숙과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다리(bridge) 입니다. 그리고 다이내믹한 그룹토의 인도 방법은 토의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토의의 내용(content) 과 더불어 관계성(relationship)의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몇 교회의 초청으로 2박 3일간의 셀 그룹 리더를 대상으로 한 지도자 세미나를 인도하게 되었다. 세미나의 내용은 리더의 역할과 자세, 그룹내의 영적 전환 계획, 그리고 영적 은사를 통한 그룹 인도 운영과 선교 전략에 관한 내용 등, 주로 리더의 역할과 그 효과적인 그룹 운영에 관한 내용이었다. 세미나는 각각 1시간 30분씩으로 진행이 되었고 그 시간은 약 40분 강의, 30분 웍겼, 20분 강의 10분 질문과 토의 등으로 세미나 시간이 분배되었다. 웍걼 시간에 주어진 토의 내용은 주로 4가지 정도였고, 그룹은 5명 정도로 나누고 그 가운데 한 명을 임시 토의 리더로 세웠다. 동일한 방법으로 2박 3일 동안 웍걼 때마다 임시 그룹 토의 진행 리더를 바꾸면서 진행하였다. 이렇게 진행된 세미나 웍걼 시간에 나는 이 그룹 저 그룹을 방문하면서 토의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 가운데 리더들의 다양한 유형의 토의 진행 모습도 또한 지켜 볼 수가 있었다.


첫 번째 나타난 토론 진행 리더는 ‘핵심 책크 형’ 리더이었다.


마치 학력고사 준비 마무리 단계에서 각 질문에 맞는 핵심 답만을 꼭꼭 찾아서 집어주는 마지막 ‘총 정리’ ‘문제 와 그 해답’처럼 그 리더는 핵심을 꼭꼭 찌르면서 신속하게 토의 진행을 하였다. 얼마나 신속하게 그룹 토의의 답을 정리했는지 20분 토의 시간에 무려 발표하기까지 10분이나 남았다. 그리고는 너무 일찍 끝나 더 이상 그 그룹 원들끼리 할 말이 없어, 서로 서먹서먹하게 앉아 다른 그룹의 토론만 듣고 시간을 보내며 전체 시간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둘째 나타난 토론 진행 리더의 유형은 “릴리리야 릴릴리아 니나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거의 ‘노세 노세 젊어 노세’ 수준이었다. 그 그룹은 너무 재미있어 웃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일찌감치 모임을 즐기려는 자세로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첫 번째 토론 주제를 꺼내고는 다른 이야기들로 모임을 재미있게 이끌었다. 물론 주제에 관해 토론도 서론에서 끝나고 말았고, 옆 그룹은 소음 공해로 진행이 무척 산만한 모습이었다.


셋째 유형은 ‘소피스트’ 형으로 토의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안경을 만지며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짊어진 것 같은 심각한 모습으로 경직되어 그룹토의를 인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 그룹은 리더가 제일 심각하고 철학적인 분위기의 어투를 가지고 자꾸 어려운 말로 토의 주제를 대화하려 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심각하지 않았고, 그 리더의 심각성에 잘 동감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대다수의 그룹 원 들은 슬금슬금 보이지 않게 옆 그룹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거나 할 이야기가 없이 리더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보니 토의 분위기가 쳐져서 대다수가 충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네 번째 유형은 그룹 원 들의 생각이나 의견에 대해서 리더가 하나 하나에 자신이 “그것은 ” 하면서 답변(answer)을 해 주는 스타일이었다.


그 리더는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그냥 넘어가지를 못했다. 꼭 무슨 대답을 해야만 하는 의무감이 있는 것처럼 상대방의 의견마다 해답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발표한 그 멤버는 리더의 단순한 개인적 답변이 합당하지 않아 또 다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려고 주거니 받거니. 그러다가 장황한 상황 설명과 더불어 다른 이야기에로의 꼬리를 무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그룹은 주로 리더와 한 두 명의 논쟁으로 토의 전체가 흘렀고, 결국 그룹원들 전체가 이야기를 다 해보지도 못하고 토의 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다섯 번째 토론을 이끄는 리더의 유형은 그룹 원 들과 토의도 잘하고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와 상관없이 전체 발표 때에는 리더 자신의 결론으로 그룹 토의의 결과를 냈다. 그렇게 되자 토의 내용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에는 리더의 발표와 상관없이 그 그룹에 있는 멤버들이 자신의 생각을 또다시 별도로 이야기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토의의 결과가 리더를 통해 잘 전달되지 않고, 잘 표현되지 않은 경우였다.


여섯 번째 그룹 인도 유형은 리더 자신이 이야기를 하느라고 다른 그룹 원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 여유를 주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따발총 같았다. 쉴새없이 말이 술술 나왔다. 한사람 시키고는 그사이를 못 참아 또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세 명 정도하고 나머지는 이야기도 하지 못 하였다. 그러다 보니 한 마디도 참여하지 못한 그룹 원은 그저 관망하며 대화의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만 있었다.


일곱 번째 유형은 토론 시 혼자서 말을 많이 하는 멤버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끊어주지를 못해 주어진 토론의 내용을 잘 진행 지키지 못하는 ‘관망형’스타일 이었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으로 그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듣고 있었고, 리더의 상황적 대처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2. ‘가장 다이내믹한 그룹 토론 진행 방법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어떠한 특정한 모델을 취하기는 실제로 쉽지 않다. 모든 토론 진행의 스타일도 각기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설교도 그렇다. 어떠한 설교 방법이 ‘정석’이냐 이야기 하기는 쉽지 않다. 설교가 끝난 후 이야기를 하다보면 은혜를 받은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이때 들어보면 어떤 사람은 ‘재미있었던 예화’에서, 어떤 사람은 설교와 전혀 상관없이 ‘목사님의 제스처’에서, 어떤 사람은 ‘설교의 서론에서’, 어떤 사람은 설교에서 주어지는 ‘좋은 많은 정보’ 속에서, 어떤 사람은 설교에서 제기된 ‘도전’과 ‘복음’에서 등등 다양하게 은혜를 받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평가에는 판단의 기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원리에서 토론 진행의 방법을 ‘다이내믹하다’ 혹은 ‘다이내믹하지 않다’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측면에서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한 가지 다이내믹한 그룹토의의 기준은 ‘영성'(spirituality) 이다. 신앙 공동체로 모인 그 토의 그룹이 지향하고 있는 분명한 목표는 ‘영적인 성숙'(spiritual mature) ‘영적인 도전'(spiritual challenge)을 통한 영적 변화 (spiritual transformation) 이기에 그 그룹 토의를 통하여서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영적인 도전을 받지 못하여 영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이내믹한 그룹 토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그러한 역할을 못하는 신앙 공동체 그룹은 그룹의 정체성(identity)을 상실했다고 까지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모임에 온 이유 자체를 봐도 영적 진리에 대한 발견, 영적 성숙, 영적 도전, 그리고 영적 변화를 위해서 온 것이지 단순한 사귐과 재미를 위해서 온 경우는 사실상 지극히 작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록 처음에는 재미나 사귐의 단순한 목적으로 그 신앙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다 할 지라고 시간이 가면서 그 그룹에 대한 정체성 이해와 기대는 ‘영적 진리에 대한 발견’과 ‘영적 성숙’ ‘영적 도전’ 그리고 ‘영적 변화’에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그 그룹의 모임이 아무리 재미있다 할 지라고 이 ‘영성’이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 과 같아 그 그룹의 맛을 잃게 된다. 단순한 사귐과 재미는 교회의 그룹이 사회의 그룹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 그럴 경우 사회 그룹에 더 재미가 있는 모임이 생기면 떠나고 만다. 하지만 사회보다 교회 그룹이 재미와 사귐에 있어서 떨어진다 할 지라도 사회의 재미있는 모임 시간에 신앙 공동체 그룹을 선택하는 이유는 바로 신앙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그 신비한 ‘영성’, 그 ‘맛'(taste) 때문인 것이다. 그 신비한 ‘영성’이 멤버들로 하여금 덜한 재미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우선권(priority)을 신앙 공동체에 두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은 다이내믹한 토론의 핵심적인 평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이내믹한 그룹토의의 평가 기준이 되는 ‘영성’은 어떻게 구축(build-up) 되어지는가? 그리고 토론을 인도하는 리더의 스타일에 따라서 어떠한 영향을 받게 되는가?


소그룹 내에서의 ‘영성’은 그룹 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내용'(content) 과 그 토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신비한 인간적, 영적 ‘관계'(relationship)를 통하여 구축(build-up) 된다.


영성(spirituality) = 토의 ‘내용'(content) + 인간적 ‘관계성'(relationship)


소그룹 모임에 있어서 그룹토의는 이론적인 신앙의 이론이 우리 개인의 구체적인 삶으로 적용되게 만드는 변화(transformation)의 중요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지식이 우리의 삶에 내재화(internalize)되도록 하는 중요한 순간이 바로 그룹토의 시간이요, 이 순간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말씀(Konwing about God)이 육신(Knowing God)이 되는 결정적 순간을 창조하는 단계이다. 이전에 수동적으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객관적인 제 3자의 입장에서 주체적인 1인칭의 내 삶, 내 신앙, 나의 결단, 내 가치관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왜 그룹 토의 가운데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가? 바로 그 토의 가운데 우리의 갈등, 아픔, 죄의 현실이 드러나고 우리의 신앙 고백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체면, 가식과 같은 껍데기들이 말씀과의 만남 가운데서 벗겨지면서 그 동안 외부적으로 감추어져 있던 ‘나'(being)를 언어로, 감정으로, 혹은 외부적 표현으로 드러내게 된다. 실로 ‘나의 표현’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언어에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로 피조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시고 그 표현 그대로 그렇게 되도록 하셨다. 반면에 잘못된 표현은 잘못된 결과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도록 하셨다 (사 30:27, 약3:5-8). 결국 표현은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도록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소중한 도구임을 성서는 우리들에게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바로 고백도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창조의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로마서에서 고백이 우리로 구원을 받게 하는 능력임을 말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롬 10:9-10: 현대인의 성경/ cf. 마태 10:32; 요9:22; 요일 2:23, 4:2) 그러한 변화의 능력인 고백이 바로 소그룹의 토의 시간에 일어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소그룹의 토론 시간은 그룹 멤버들로 하여금 객관적인 참여자에서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하나님 앞에서의 주체자로 변화를 일으키도록 만드는 다리(bridge)요, ‘자신을 표현'(고백) 하는 순간인 것이다. 이 시간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주어진 토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의견, 자신의 경험, 토의 주제와 관련된 상처와 의심, 감격 등 많은 요소들이 표현/고백되어 지고, 그 가운데 성령님이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세우시는 역사가임하고 경험되어지게 된다.


더 나아가 그 고백과 더불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은 영적인, 그리고 육적인 인간 관계(relationship)의 형성이다. 일반적으로 그룹 멤버들이 서로 친밀하게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그룹 성경 공부에 있어서 성경의 ‘지식,’ ‘사실'(fact) 혹은 질문에 대한 ‘정답'(right answer)을 이야기 할 때이다. 사실 정답을 말하고 나서는 아무런 다른 이야기를 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정답을 찾은 후에는 또 다른 결과가 파생을 하는데 그 중 하나는 그 답을 모르는 사람이나 그 답을 잘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소외감(isolation)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혹은 다른 사람의 정답 맞춤은 그 답을 못 맞춘 사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보다 왜소하게 (smaller) 만드는 것 같아 그 그룹 안에서 부끄러움(shameful)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일어난다. 결국 그들은 그러한 부끄러움을 피해 바쁘다는 핑계로 소그룹에 더 이상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그룹 토의 시간에 참여한 자신의 표현/고백은 자신이 그룹의 멤버임을 확신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그룹에 대해서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자신의 고백은 다른 멤버들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시키게 만들고 친밀하게 만든다. 이해 못하는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마음을, 혹은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사모하는 마음 등등을 그룹 멤버들이 알게 되면서 그들로부터 더욱 친밀함과 영적 육적 격려를 얻게 된다. 위로를 얻게된다. 함께 기도하게 된다. 자신과 같이 그러한 고민가운데 있는 형제 자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 가운데 그들의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되어갔는지, 어떻게 주님이 그 문제들을 인도하셨는지 등 구체적인 해결책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이들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웃이요, 내 옆에 있는 실질적인 도움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더욱 인간적인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영적으로 더욱 성숙된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영성은 토의시간에 나누어지는 자신의 구체적인 표현/고백인 ‘내용’ 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 의해서 구축(build-up)되어 진다.


3. 그렇다면 이제 앞에서 제시된 7가지 다른 유형의 그룹토의 진행 스타일을 영성 = 내용 + 관계라고 하는 기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해 보도록 하자.


 












































토론을 인도하는

리더의 유형


내용적 측면

에서(고백/경험)


관계적 측면

에서


영적 성장에 미치는 영향


유형 1.

핵심 첵크형


1. 정답만을 찾다 보니 개인의 고백이 빠지게 됨


2. 말씀에 대한 나의 삶의 적용이 없다.


1. 정답은 깊은 인간적 관계 형성을 못 시키고


여전히 외부적 체면의 껍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관계 형성에 머무름


2. 정답을 찾지 못하거나 한 마디도 못한 다른 사람을 부끄럽게 함


1. 지식은 정리하나 (knowing about God) 나의 하나님(knowing God)으로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2. 공동체를 통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기 어려움


유형 2

노세 노세 형


1. 그룹모임이 재미는 있으나 시간이 갈수록 공허해 진다


2. 개인적 고백 시간이 빠짐으로 인해 영적 변화 경험의 기회를 가지지 못함


사람과의 관계는 가까워지는 것 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피상적인 외부적 차원에 머무는 경우가 많고 깊은 삶의 차원에서의 문제를 나누거나 삶을 나누지는 못해 늘 관계가 겉돈다.


1.영적인 성장이 오기 이전에 공동체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한 회의가 온다.


2. 삶의 시간 배열에 있어서 신앙공동체가 늘 두 번째 자리, 즉 시간 날 때 참석하는 자리가 된다


유형 3

소피스트 형


1. 모임이 지루하게 됨


2. 너무 철학적. 구체적 현실과 잘 부딪히지 않음


3.이성의 차가움만을 일으키고 개인 고백을 통한 성령의 감동을 경험시키지 못함


1. 서로 가까워 질 기회를 갖기 어렵다


2. 주로 서로에 대해서 비관적인 대화와 비판적인 인상을 많이 심어 주게 된다


3. 피곤한 관계가 되기 쉽다.


1. 문제에 집착하다 보니 영적으로 비판주의나 회의주의에 빠지기 쉽다


2. 신앙 공동체의 역동적인 영적 경험에 다가가기 어렵다


유형4.

그것은 형


1.리더의 단답식 단순한 대답은 고백한 사람의 경험을 무시하게 만들어 마음을 오히려 닫게 만든다.


2. 이야기 한 멤버는 믿음의 고백을 하기보다는 자신을 이해 시키려고 논쟁에 빠지기 쉽다.


1. 논쟁으로 갈 위험성이 있다


2. 관계의 구축보다는 대화 가운데에 오히려 상처를 남기기 쉽다


3.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1. 마음이 닫혀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2.오히려 이야기한 자신에 대해 자존심의 상처와 더불어 영적으로 침체된다.


유형 5

내가 결론인 형


개인적 의견이나 말씀의 적용이 잘 이루어진다.


1. 결론적으로 개인의 의견을 무시한 리더에 대해 감정이 상하게 된다.


2.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는다.


시작된 영적인 변화에 마무리 단계에서 영적 단절을 가져온다


유형 6

리더 주도 형


1. 리더의 장황한 이야기에 다시 한번 설교를 듣는 것처럼 지루함을 느낀다.


2. 리더의 주도적인 의견 때문에 말씀이 나의 삶에 적용될 여지가 없다


1. 리더의 이야기에 집중되어 멤버 모두가 객관적 관망자가 된다


2.자신의 표현이 없음으로 멤버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1. 리더의 영적 경험이 이루어 질 수 있을 지라고 직접적인 멤버 자신의 경험이 되지는 못한다(just knowing about God).


유형 7

관망 형


1. 다른 사람의 고백만 듣게 되다보니 주관적인 자신의 말씀 적용 기회를 잃는다.



1.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2. 절절하게 인도 못하는 리더의 리더십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된다.


3. 말을 많이 하는 사람에 대해 경계하게 만든다


주어진 토론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지 못한다.

 


4. 그러면 어떻게 다이내믹한 그룹 토의를 통해 그룹의 멤버들에게 영적 성숙, 영적 도전을 통한 영적 변화를 보다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리더는 그룹 토의 시간을 성령이 임재하시고, 그룹 멤버들이 은혜에 바다에 마음껏 헤엄칠 수 있도록 영적인 환경을 잘 만들어 주어야 한다. 역동적인 그룹 토의에서 그룹 리더의 역할은 다리(bridge)의 역할이요, 그 다리를 잘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우미(helper or facilitator) 이다. 리더는 섬김을 통하여 그룹 멤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을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요, 리더는 그룹 멤버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방해되는 장애물들을 치워주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토론 가운데 표현되어지는 개인적 느낌과 생각의 고백을 통해 각 개인에게 성령이 임재 하셔서 그들을 새롭게 빚으시고, 날마다 차고 넘치도록 새로운 능력을 공급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풍성히 받도록 하는 다리요 도우미가 바로 리더의 역할이다.


더 나아가 리더는 그룹 멤버들이 토론시간에 생기게 되는 관계성(relationship)을 통하여 영적 성숙과 도전 그리고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토론의 흐름이 원활하게 흘러가도록 지혜롭게 도와와 한다. 어느 누구도 이야기의 독점이 되지 않도록 하고, 어느 누구도 그 토론 가운데서 소외되지 않도록 잘 돌아보아야 한다. 그룹 토의 가운데서 관계(relationship)에 상처가 생긴다면 그 토론이 가져다주는 영적 성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리더는 보다 성숙한 영적 성장을 이루는 토론 진행을 위해 효과적인 다리(bridge)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첫째 리더는 그룹 토의 시간 관리를 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한 사람 당 이야기 할 때 3분 이상을 넘지 않도록 처음부터 토론진행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한 후에 다시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분배한다.


둘째는 ‘핵심체크’ 토의 리더 스타일 경우는 그 토의 내용의 정답이 어떻게 내 삶에 도전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에 변화를 요구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인지를 나누도록(share) 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에서 끝나지 않고 삶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정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정답 없는 질문들을 토론의 내용과 연결해 던짐으로 토론에 참여시키도록 하는 것이 좋다.


셋째로 ‘노세 노세’ 토의 리더 스타일 경우는 재미와 더불어 그룹 토의 내용에 맞추어 각 멤버 자신의 삶 적용 부분이 구체적으로 나누어지도록 시간을 잘 배분하여야 한다.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그 그룹 멤버들의 근본적인 마음은 영적 갈증을 가지고 있고 영적 성숙을 갈망하고 있음을 리더는 보아야 한다.


넷째로 ‘소피스트’ 토의 리더 스타일 경우는 자신이 인도하는 토론이 가라앉거나 추상적, 혹은 비판적으로 끝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리더의 역할은 멤버들이 영적 성숙과 경험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도우미 역할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격적으로 차분한 것과 비판적인 것과는 다르다. 성격적으로 사색형과 회의적인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비록 리더의 성격이 소극적이라 할 지라도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자신이 가진 성격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그룹 멤버들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에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부딪힐 수 있는 다리의 역할을 잘 창조하라.


반면에 멤버 중 누군가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대화로 이끌어 가는 경우가 있다. 이때 리더는 그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의 이야기의 표면을 보지말고 그 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경우는 ” 그런 경우 누구 형제/ 자매님은 어떻게 해결 하셨어요?” 하며 그 문제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그 당사자의 이야기가 보편적이거나 납득이 되는 경우는”저도 그러한 느낌을 가졌던 경험이 있어요”하며 공감을 나타내어 격려해주고, ” 그런 경우 누구 형제/자매님은 어떻게 해결 하셨어요?” 하며 역시 그 문제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대화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라. 성령의 하나님은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섯 번째로 ‘이것은 ‘ 토의 리더 스타일은 듣는(listening) 연습이 필요하다. 말을 더디 하라. 그리고 토론 시 리더의 역할은 표현하도록 돕는 역할이지 답(answer)을 주는 자는 아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이야기하는 개인의 경험을 잘 알지 못하면서 리더의 성급한 편견이나 판단으로 답을 주려하는 태도는 오히려 이야기하는 이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어 영적 성장에 장애물이 된다. 침착하게 듣기를 연습하라. 그리고 인정할 내용은 “정말 그러셨어요?” 하며 공감을 표현해 주라. 혹 Big question이 있을 경우는 small answer를 주지 마라. 예를 들어, 왜 이 땅에 악이 있나요?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지요?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나요 존재하신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요? 등등. 이러한 경우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의 의도를 생각해 보라. 그러한 경우는 주로 그 질문과 관련해 마음의 상처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그의 상처를 이해하고 그것을 돌아보아 주는데 관심을 가지라.


여섯 번째 ‘내가 결론인 형’은 사람들의 의견을 잘 수용하고 전달해 주는 발표 연습을 하라. 특별히 이러한 스타일은 적극적이면서 자신의 의견이 강한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표현과 그 전달은 그 그룹 멤버들로 하여금 마음이 열려, 보다 효과적인 영적 경험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된다.


일곱 번째 ‘관망형’ 토론 인도형은 토론이 한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도록 적극 개입해야한다. 멤버들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끊고 자신이 하기가 쉽지 않음을 기억하고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대화가 골고루 나누어지도록 하라. 만일 너무 혼자서 많은 이야기/ 혹은 주장 을 하는 멤버가 있을 경우는 자연스럽게 ” 누구 자매/형제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하며 토론이 흘러가도록 지혜롭게 처리하다.


여덟 번째로, 그룹토의 마무리는 반드시 기도로 끝나도록 한다. 그리하여 토론가운데 임재하신 성령의 역사를 찬양하며 그 인도하심에 용기 있게 응답할 수 있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마무리하라. 성령의 능력이 임하실 것이다.


우리들은 소그룹에서 어떠한 스타일의 토론 인도자인가?


다이내믹한 그룹토의는 강력한 영적 도전과 영적 진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가져다 주어 영적 변화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그 영적 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는 ‘자신의 생각, 느낌, 자신 삶의 드러냄’을 통한 구체적인 고백 내용(content)과 토의 가운데 신비하게 흐르고 있는 관계성(relationship)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리더는 토론 가운데 자신들의 삶을 드러내는 표현/고백이 멤버들 가운데 소외되는 사람 없이 잘 분배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잘 만들어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대화 가운데 흐르고 세워지는 신비한 성령과 개인의 관계, 개인과 개인들의 영적·육적 관계성에 민감하게 리더는 반응하면서 지혜롭게 대화의 흐름을 이끌어 다이내믹한 그룹토의 인도를 통해 멤버들로 하여금 영적 변화로 인도해야 한다.



[장이규]SPIRITUAL TRANSFORMATION

Q: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천주교처럼 한 지역에 하나씩만 있으면 될 텐데요. 그리고 왜 그렇게 교인들이 싸움을 많이 하나요? 교회 다니면 무언가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A: 1. 질문자의 겉을 보지말고 그 마음가운데 있는 상처를 돌보아 주세요.
2. 그리고 할 수 있는 적절한 대답을 해 주세요. 그럴 때 영적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기회가 열려지게 됩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우리 집의 첫째 아이 하일이를 학교에 데리고 가야 하는 분주한 가운데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한국에 계신 아버지로부터의 전화였다. 전화 소리는 다급한 마음이셨다. “미국에 전쟁이 났다며? 너는 괜찮냐?” 갑작스런 아버지의 염려 전화로 어리둥절한 나는 “여기 전쟁이 안 났는데요?” “무슨 소리야. 아니 지금 한국 TV는 미국에 전쟁이 나서 계속 방송이 되고 있는데…”


한국에서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에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해 어리둥절한 나는 TV를 켰고, 그때서야 World Trade Center가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비행기와 함께 부딪히는 참담한 현장을 보게 되었다. 너무 어이가 없고, 실감나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한 비행기가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World Trade Center로 날아가 부딪히는 장면을 보게 되었고, 그러더니 잠시 후 이번에는 World Trade Center가 폭삭 무너져 내렸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참사의 현장과 피와 눈물, 두려움으로 가득한 두려워하는 뉴욕 시민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실감나지 않는 현실이었다. TV로 방영된 빌딩을 향해 날아드는 민간 항공기의 모습, 빌딩과 부딪히면서 비행기가 빌딩 안에 들어가 터지는 모습, 빌딩이 얼마나 큰지 비행기가 돌진하여 부딪힌 그 자리가 그저 자그마한 칼의 흠집처럼 조금 찢어진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검은 연기, 그러더니 갑자기 빌딩이 어이없이 재처럼 그냥 푹석 내려않는 모습… 시카고에 살고 있는 내게, TV를 통해 보는 장면이 정말 실감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다이하드’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그러던 가운데 또 다른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였다. ‘오늘 저녁에 특별한 예배를 드린다고… 그리고 그룹 멤버들에게 전화하여 함께 추모와 시국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게 하라고…’


그 날 저녁 특별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문명, 종교, 테러, 목적, 인간, 생명, 삶 등등 다양한 삶의 현장 문제들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는 만일 이 순간 내가 예배를 준비했다면 이러한 참사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예배를 준비할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쉽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회에 도착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큰 예배당 밖에까지 회중들로 가득 메워진 가운데 예배가 시작되었다. 특별 예배는 담임 빌 하이빌스 목사를 중심으로 2명의 교육목사들과 함께 3단계 예배로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상담의 예배였다. 먼저 3-4명의 옆 사람과 함께 World Trade Center 가 무너지던 그 시간에 어디에 있었는지, 그 참사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는지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제 옆 사람과 함께 그때의 느낌을 나누려고 할 때 사실 나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다이하드’의 한 장면과 같았다고 할 수 도 없고, 그저 나는 “이것이 사실인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그룹에 있는 다른 3 사람 모두 다 너무 너무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한편으로는 분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와 너무나도 다른 반응의 모습이었다. 예배는 이렇게 자신의 분(anger)과 아픔을 나누도록 하고 함께 이 아픔에 대한 주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두 번째 20여분은 교육의 예배로 이어졌다. 내용은 한 마디로 “자녀들 앞에서 말조심하라” 는 것이었다. 오늘 일어난 테러와 참사에 대해서 우리가 어른으로서 혹은 부모로서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자녀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미래와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지혜의 가르침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들에게 만일 단순히 회교권에서 이 참사를 일으켰다고 이야기하면 그들이 회교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원수처럼 적대시 할 수 있는 미래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언어에 조심성과 그 영향력을 생각하도록 교육했다.


세 번째 20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리더의 자세와 역할에 대한 예배였다. 이제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가면 믿음이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기독교와 회교의 종교 전쟁 아니냐?” “종교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 종교의 아집이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 아니냐?” “이렇게 자기 종교를 위해 전쟁하다 죽으면 순교냐?” “이러면 구원 얻는 것이냐?”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저 죽은 가족들은 가만있어야 하는 거냐?” “믿어도 광신적으로 믿으면 안되지 않느냐?” “보복은 하나님 손에 있다고 하는데 보복해야 하냐, 아니냐?” 등등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 개인의 신앙이 성숙 하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땡땡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질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인의 대표자가 될 것이고, 이러한 비판이 섞여있는 가시 같은 물음을 사람들이 제기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응답을 하겠느냐는 것이 이 예배의 내용이었다. 여기서 주어진 권고는 “비판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의 질문 겉 표면을 보지말고 그 뒤에 있는 상처를 보라” 그리고 “치유하는데 더 초점을 맞추라”였다.


이 1시간의 예배 후 돌아 나오는 나의 마음은 깊은 감동으로 솟아 오른 기쁨이 가득 하였다. 내가 이러한 참사의 현장가운데 서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그리고 앞으로 내가 처신을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행동해 나아가야 할 지를 알게 해 준 안내자의 예배고, 동시에 나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숙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한 영감 있는 예배였다.


이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내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방향성’ 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영적 성숙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좁은 의미에서의 리더, 넓은 의미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역할 중 하나는 ‘방향을 잡아주는 것’ 이었다. 주어진 오늘의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 속에 혼돈 되어 있거나, 근심 속에 쌓여 있거나, 아니면 편견 속에 쌓여 있거나, 믿음의 삶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주어 바른 길을, 주님이 주시는 축복된 은총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며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가슴 벅찬 영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천주교처럼 한 지역에 하나 씩만 있으면 될 텐데요. 그리고 왜 그렇게 교인들이 싸움을 많이 하나요? 교회 다니면 무언가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는 제기된 물음을 9.11 윌로우 크릭 특별 예배가 던져준 영감을 토대로 이 문제 해결에 접근해 보자.


일반적으로 위에서 제기된 질문처럼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의도적인 가시의 물음을 던지는 주체가 교회에 전혀 다니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마음에 그들의 이야기를 웃고 지나가면서 무시(ignore)해 버리거나, 반대로 반박을 하면서 논쟁 할 준비가 되어 있거나 상대방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물음을 던지는 주체가 교회에 갈 마음은 전혀 없으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들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교회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거나 편견 속에 갇혀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이미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그의 마음에 무엇인가 상처로 그 문제를 경험하고 있거나 그러한 문제를 경험한 후 그 문제가 해결점을 찾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 제기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고 처신해야 할까?


첫째는 그들의 상처를 돌아 보라.


문제 제기를 하는 대상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이미 그들 마음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나쁜 이미지 와 편견, 그리고 상처 경험은 믿음에 있어서 일종의 ‘바이러스’라 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점점 그들을 영적으로 병들게(distort) 만든다. 그리고 나서 그 영적인 병이 서서히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공격적이고, 비판적 가시를 가진 문제제기로 나타난다. 만일 비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공격을 하면 원래 믿음이 없으니까, 혹은 아직 모르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리더를 가장 당황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 좋았던 사람들이 그리고 공동체에서 아주 성실했던 사람들이 그러한 질문을 가지고 나오는 경우이다. 실제로 그들의 문제 제기가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 파장이 얼마나 큰 지 모른다. 그런데 더욱더 큰 문제는, 대다수 비판적 질문을 던지거나 가시 있는 물음을 가지고 공격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자신이 경험한 상처는 드러내지를 않기에, 리더들이 이 문제 제기의 핵심을 빨리 파악해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가정이 장시간의 자동차 운전을 하고 시카고로 여행을 와서 우리 집에 며칠 머무르게 되었다. 며칠 즐겁게 머물고 돌아가려는 날 아침에 그 형제가 갑자기 허리가 아프고, 힘을 전혀 허리에 주지 못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화장실을 가려해도 허리에 힘을 줄 수 없어 가서 앉을 수도 없었다. 마사지를 해주면서 시간이 가면 조금씩 좋아지겠지 하고 지켜보았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볼수록 점점 악화만 되어 갔다. 그래서 아는 의사에게 연락을 해, 오늘 아침 갑자기 몸이 이렇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의사가 이야기하기를 “모든 병은 갑자기가 없어요. 이미 그 전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 밖으로 이제 나왔을 뿐 이예요” 라고 하였다.


우리가 볼 때에는 갑작스러운 것처럼 보였던 그 육체적 병의 문제도 이미 그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그 의사의 이야기처럼 영적으로 가시의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의 문제 역시 이미 그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곯은 상처가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를 제기하는 대상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간에 그 표면적 문제를 응답하기 전에 그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먼저 손을 뻗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일까?


1 단계는 기본적으로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부부 싸움에 있어서 대화를 안 하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상담 가들은 경고를 한다. 따라서 부부 싸움을 해도 말하면서 싸우도록 권하다. 말하지 않는 가운데 갇혀 있으면 성령이 역사 하실 공간이 없다. 리더의 역할은 바로 그 상처받은 심령 가운데 성령이 역사 하실 공간을 만들어 드리는 중간 다리 (bridge)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제 제기자가 말하는 가운데 성령이 치유하시기 시작한다. 문제 제기자가 이야기를 하다보면 실제로 속에 담아 놓았던 이야기를 충분히 하게 된다. 이때는 리더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그의 이야기 가운데 성령이 역사 하신다. 답변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충분하게 들어 주라. 하지만 만일 내가 그 사람의 이야기와 상처를 들어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거나 공격한다면 그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 하실 수 있는 자리를 내가 막아 놓게 됨도 기억하라.


2 단계는 그 이야기에 공감을 표현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아픔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함께 그 상황을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나도 처했다면 충분히 그렇게 상처를 혹은 그런 반응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공감의 표현이다. 그런데 많은 부분에 있어 이 부분에 리더들이 실패를 한다. 일단 상대방이 믿음의 문제, 혹은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하면 리더는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분이 상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리더십과 혹은 자신의 공동체의 명예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심하면 어떤 사람은 들으면서 얼굴까지 상기되고 가슴에서 불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이야기는 들어도 무엇인가 상대방의 이야기의 모순이나 허점을 찾는데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는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대부분 논쟁으로 빠지게 되고, 결국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더 이상 내 놓지 않도록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눈을 잘 쳐다 보라. 그리고 대화의 중간 중간 공감의 표현을 해 주라. 예를 들면 “정말 힘들었겠네요” “정말요?” “저도 가슴이 답답하네요” “저도 느껴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되었어요” “그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풀어야 할 부분이에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가 책임을 느껴요” 등등.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 그리고 상대방의 이야기 속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나 혹은 과장하여 표현하는 것이 있어도 넘어 가라. 왜냐하면 그 과장의 초점은 문제를 강조하는데 있기에 그 문제를 치유하기 시작하면 그 문제도 사그라지고 만다. 왜 그것을 과장 하냐 하고 파고들면 오히려 더 상황을 악화시키게 된다.


3단계는 그/그녀의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기도하라. 그리고 그/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주님께 드리라. “저도 느껴요” “제 마음도 참 아프네요” 등등의 공감을 표현한 후에 만약 상황이 허락을 한다면 “ 괜찮으시면 제가 잠시 기도해도 될까요?” 하고 물어보고 상대방의 상처를 놓고 기도하라. 예를 들면 “주님, 누구 형제/자매 님의 아픔이야기 들으셨죠? 이야기로 나누지 못한 저의 마음 한가운데 있는 많은 아픔들 하나님 아시지요? 간절히 소원하옵기는 저의 아픈 가슴을 치유해 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일어나 승리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끄러운 모습, 저 자신부터 비로소 변화시키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세요. 오늘 우리의 만남을 주님이 계획해 주셨음을 감사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두 번째로,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비판적 문제 제기에 대한 처신은 적절한 응답을 통한 영적인 성숙으로의 안내이다.


가능한 적절한 응답은 믿음의 갈등을 많이 해소 시켜 줄 뿐 아니라 새로이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한다. 기독교 교육학자 존 웨스터 호프 3세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성장 단계가 기본적으로 4단계로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단계는 경험적 단계이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 이 교회를 다니는지. 이 교회 목 사가 설교는 잘하는지, 성가대가 잘하는지, 나를 알아주는지 등등 교회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단계이다. 교회 좌석으로 본다면 맨 뒷줄에 앉아 교회를 쳐다보고 탐색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둘째 단계는 귀속적 단계이다. 교회의 맨 뒷줄에 앉아 교회와 목사, 성가대, 사람들을 탐색하면서 나쁘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맨 뒷줄의 좌석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와 앉게 되고, 교회 부서든, 아니면 활동자리에 참여를 하게 된다. 심지어는 임원까지 맞아 적극적으로 섬기게 된다. 교회가 익숙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셋째 단계는 이성적 단계이다. 이렇게 교회에 익숙해져서 여러 모양으로 참여하여 섬기다 보면 외적, 내적이든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개인적인 삶의 문제와 더불어 영적인 시험이 찾아오게 된다. 예를 들면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이 지고, 열심히 하면 할수록 책임감을 가지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와서 사람들이 불평만 늘어놓을 때, 지도자가 격려에 인색할 때, 기획 안이 지도자에 의해서 거절될 때 등… 이러한 외적 문제와 더불어 개인적 삶의 문제까지 겹치면서 영적인 시험이 찾아오게 되고, 그리고는 근본적인 신앙의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정말 구원의 확신이 있어 이렇게 열심히 섬기는 것인가?” “믿음이 무엇인가?” “교회 섬김이 믿음인가?” “교회가 그럴 수 있는가?” 등등 수없이 많은 신앙의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그런데 웨스터 호프 3세에 의하면 미국 교회의 젊은이들이 이 단계에서 대답을 얻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 현재 미국교회는 허리 없는 호리병의 모양과 같은 교회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넷째 단계는 고백적 단계이다. 그러면서 웨스터 호프는 이 이성적 단계에 교회가 응답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믿음은 근본적인 믿음의 회의 질문의 단계를 지나 이제는 적어도 주위 환경으로 인해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에 흔들리지 않는 고백적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웨스터 호프 3세의 이론은 수없이 많은 신앙의 성장 이론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사람들의 신앙성장 변화가 그의 이론처럼 다 동일할 과정을 거치게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고백적 단계에서도 여러 가지 신앙적 단계가 나타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기초적으로 그의 이론은 초신자들이 교회에 적응해 적어도 환경으로 인해 근본적인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신앙의 기초 단계로의 변화 과정을 체계화하는 점에서 어느 정도 타당성을 주고 있다.


존 웨스터 호프 3세가 그의 이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성적 질문은 그 문제 제기자의 신앙을 한층 더 성숙한 길로 인도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거나 반대로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하는 신앙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리더는 제기되는 가시 같은 질문들에 대해 피하거나 대적(against) 하기보다는 겸손하면서도 적절한 응답(confrontation)을 할 준비도 필요하다. 상한 마음을 돌아보는 데서 한 발자국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 응답을 통한 영적인 성장(spiritual transformation)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성적인 단계의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질문에 답을 줄 때 정확한 답을 줄 수 있는 문제도 있는 반면에 너무 큰 문제 (big question)들 일 경우는 답을 주어도 답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왜 그리스도인이 잘 되어야 하는데 고통을 받나요?” “ 왜 새벽기도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나요?” “왜 선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악을 만드셨나요?” 그런 면에서 리더는 그 질문이 어느 범주 안에 들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한다. 가장 기초적으로 이 질문이 상처에서 나온 질문인가? 둘째: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인가? 셋째: 대답을 해 주어도 답이 시원하게 되지 않는 질문인가? 등의 간단한 범위 안에서 판단을 해야한다.


중요한 것은 상처 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상한 마음의 상처를 안아주고, 어루만져 주고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해답인 경우가 많다. 이때의 응답은 오히려 변명으로밖에 혹은 상처난 사람이 잘못 이해했다는 변론밖에 결과가 나오지 않게 된다. 그럴 경우 상처를 더 깊게 만들게도 한다. 만일 제기한 질문이 간단한 지식적 문제일 경우는 명확한 답을 주면 쉽게 해결이 된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르는 경우는 “나도 그 질문이 궁금했는데… 하면서 나도 물어봐서 알려 주겠다”고 대답하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알려주면 된다. 그런데 만일 제기된 질문이 대답하려 해도 대답이 되기 어려운, 대답을 해 주어도 납득하기가 쉽지 않은 큰 질문(big question)일 경우는 “Big Question 에 Small Answer를 준다고 해서 그 답변을 채워 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럴 경우는 지극히 개인적 입장에서의 내가 개인적으로 그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경험 이야기를 간증으로 하는 편이 더 낫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천주교처럼 한 지역에 하나씩만 있으면 될 텐데요…” “왜 그렇게 교인들이 싸움을 많이 하나요? 교회 다니면 무언가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질문들을 분석할 때 어느 범주에 드는가? 상처가 있는 질문인가? 간단히 정보를 요구하는 궁금해하는 질문인가? 아니면 대답해도 대답이 시원하게 들리지 않는 큰 질문인가? 사실 이러한 질문은 상처가 있는 질문인 동시에 대답도 어렵고, 대답해도 납득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상처를 안아 주는 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나 자신이 그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경험과 간증으로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좋다.


나의 경우는 이렇게 대답을 하곤 했다. 나 역시 그러한 질문을 신학교 다니고 있던 86년도에 가지게 되었다. 그때 당시 한참 잠실과 가락동의 아파트 단지들이 개발되고 있었을 때 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다가 밤에 산책을 나와 주위를 돌아보는데 조금 과장해서 근 100m 안에 빨간 십자가가 14개가 있었다. 심지어 어느 교회는 1층 교회 2층 다른 교단의 교회 그리고 지하는 유흥업소였다.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집에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고는 얼굴이 상기가 되어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때 아버지가 가만히 듣고 계시더니 말씀을 하셨다. “이규야! 너는 신학생으로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 너는 이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대학가 앞에 가득 메워있고, 그것도 모자라 늘어만 가는 유흥업소와 창녀촌에 대해서는 한번도 비판을 한 적이 없었어. 지금 네가 비판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 된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지, 만일 교회가 교회된 사명을 잘 감당하면 그러한 교회는 이 땅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냐?”


이 말씀을 하시는데 나는 그 순간 이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신촌 로터리를 중심으로 있는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 홍익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는 신수동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 동네는 유흥업소와 창녀촌, 그리고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우리 동네 가정집을 사서 룸 살롱으로 바꾸고 있는 상태였다. 아버지의 말씀은 나의 마음에 내 편견을 볼 수 있게 만드신 설득력 있는 답변이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러면 왜 그렇게 교인들이 쌈을 잘 하냐? 차라리 세상 사람들은 싸움을 하더라도 술 먹고 바로 푸는데… 교인들은 한번 터지면 끝이더라!” 하면서 다시 공격을 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오늘 교회도 죄인을 위해 있는 것이야. 교회는 죄인의 공동체지. 사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도 없어. 그리고 사실 성질이 더러워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든 도둑이든 강도든 그들이 교회에 마저 올 수 없다면 어디서 그들의 삶이 변화 될 수 있겠니?” 하셨다. 그리고는 “그런데 죄인들이 교회에 찾아오자마자 바로 바뀌면 그것처럼 좋은 것이 없지만 어디 그러냐?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돈 만원을 쓰지 못하고, 칼로 사과를 깎지 못하듯이 시간과 때가 필요한 거야. 성령께서 그들에 맞게 때에 따라서 새롭게 하시지.”


아버지의 이러한 적절한 답변은 당시 신학생인 나의 비판적 고민을 새로운 영적 성숙의 길로 인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거나 그와 같은 문제를 이야기했을 경우 아버지와의 대화에 대한 나의 간증은 정답은 아니었을는지 몰라도 실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했던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가운데 알게된 분명한 것은 그룹 원들이든 믿음의 경험이 없던 사람이든, 혹은 상처 난 그리스도인이든 그들이 제기하는 비판적인 질문들은 성령께서 그들을 새로운 영적인 성숙의 자리로 도약하도록 허락하여 주신 기회임을 리더는 보아야 한다. 이때 리더의 할 역할은 바로 그러한 성령이 새롭게 만지시고 빚으시고 계시는 그 환경을 겸손히, 지혜롭게 잘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 형제/자매로 하여금 새로운 영적 차원의 자리에 서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적인 변화와 성숙은 모든 순간에 일어난다. 예배를 드릴 때도 기도를 드릴 때도, 말씀을 공부할 때도, 부흥회에서도, 등등 성령의 역사는 어느 순간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것은 영적 성숙을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어느 순간에 “날카롭고, 가시 같은 비판성 질문을 가진 형제나 자매가 다가올 경우는 오히려 그들을 불편해 하고, 마치 불평분자인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존 웨스터 호프 3세의 지적처럼 이 단계는 새로운 영적 성숙을 위해 누구든지 지나야 하는 관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성령께서 그 형제/자매를 영적으로 더욱 굳게 세우셔서 동역 하시려는 계획이요, 그 다리(bridge)로 나를 선택하여주신 축복의 기회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나의 복음의 동역 자로 붙여주셔서 나의 복음의 사역을 더욱 열매 맺게 하시는 기회주심을 보아야 한다.


지금 누군가 날카로운 그리고 가시 있는 비판의 질문을 던지고 있나요?
1.문제의 분별을 위한 영 분별의 능력을 위해 기도하세요
2.상처 난 마음의 문제는 상한 마음을 안아 주세요. 아픔을 같이 하세요. 그리고 그 상처를 주님께 드리는 기도를 드리세요.
3.간단한 지식의 문제는 분명하게 그 근거를 찾아 알려 주세요. 만일 현재 모르면 “나 도 그 질문이 궁금했는데…” 하면서 나도 물어봐서 알려 주겠다고 대답하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알려 주세요.
4.Big Question에 Small Answer를 주지 마십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간증이 보다 효과적입니다.
5. 이 모든 이성적 질문들이 그 형제/자매에게 성령께서 주신 영적 성숙을 위한 기회임을 잊지 말고 소중히 다루세요. 그 가운데 변화의 영적 변화의 경험과 동시에 리더의 좋은 동역자를 얻게 될 것입니다.

[장이규] 8월의 윌로우 크릭 스몰 그룹 코우치 이야기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Q: 나는 순수히 섬기는데 이웃이 날 이용해요! 그 사람이 싫어졌어요!
    어떡하지요?
A: 창조의 3가지 차원 Balance 저울을 Check up 하세요.


한 싱글 자매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그 사람이 정말 싫어 졌어요.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 순수하게 이제까지 끊임없이 도와주고, 나누어 주었는데, 그 사람은 끊임없이 저를 이용만 해요. 이제는 그 사람이 부담스러워 자꾸 피하게 되요. 이렇게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벌써 그렇게 되었는데 어떡하죠?”


전화에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섬기다가 지친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철면피같이 양심 없는 사람들에 질린 듯 했다. 하지만 그래도 착해야 하고 복음은 전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감 때문에 답답하고 억눌린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려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이후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늘 가득 차 있었던 한 자매가 유학을 오게 되었다. 그 자매에게 있어서 이 유학은 공부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선교사로의 파송 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유학을 와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 어떤 이웃을 만나게 되면서 이 자매는 전도의 목적을 가지고 지속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에 함께 나갈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2년이 지나도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자매에게서 미안해 하지도 않고 도움을 부탁하였고, 당연하다는 듯이 필요한 정보를 뺏어 갔다. 그러면서 항상 이 자매에게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간주했다. 반면에 그 자신의 것은 전혀 나누지도, 아니 나눌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이 점점 많이 흘러가면서 이 자매에게 결국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피하고 싶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경우는 전화 통화를 한 그 자매의 경우만은 아니다. 오히려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는 그리스도인 들이 삶의 현장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복음 선포의 열정을 잃고 오히려 상처 받아 무능력하게 그 자리에 주저 않게 된다. 이 자매의 경험과 비슷하게 심지어는 이러한 경우도 있었다.


결혼 한 한인 유학생 가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기숙사에 살고있는 한 유학생 자매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음식을 만들면 같은 층에 사는 한인 이웃과 나누고 이웃의 아이들이 자신의 집에서 놀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개방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부터는 늘 당연히 여기고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을 보내는 이웃들이 이 자매에게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공부에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제출해야 할 페이퍼도 정상적으로 끝내는데 어려움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나도 공부하는 유학생인데 자기들은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아이들을 보내고, 나는 공부도 못하고…”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이웃이 더욱 불편한 존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 불고기’ 먹는 것도 부담되었다. 무엇을 하면 늘 나누었는데 오늘은 특별히 불고기해서 냄새가 나는데 안 나눌 수도 없고, 나누자니 마음이 무겁고…


성격적으로 내성적인 그녀는 결국 말 못하고 답답한 상황가운데 스스로 억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이웃이 싫어지고, 이웃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싶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려 해도 기도가 안되고, 이웃을 만나도 반갑지 않게 되고… 결국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섬기다가 사람에 실망하고 상처 입어 주저 앉게 되는 경우를 경험하거나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혹은 우리 주변에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 착하고 순진하게 섬기는 좋은 그리스도인을 많이 보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할렐루야! 너무 좋다. 참 잘한다.’ 하는 칭찬인가? 아니면 ‘좋은 사람 만나야 하는데’, ‘이용당하지 않아야 할 텐데’ 혹은 ‘지혜롭게 해야 할 텐데’, ‘너무 착해만 가지고도 안 돼’ 하는 염려인가? 아니면 칭찬 반 염려 반인가?


그리스도인 이라 하면 모두가 이 두 자매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순진하게 사랑하고 섬기면서 복음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이 자매들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한편으론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칭찬과 염려가 교차해 가는가?


그것은 순진한 그리스도인이 접하게 되는 현실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은 비단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00여년 전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도 그러했음이 분명하다. 그러했기에 예수님도 12 제자들을 양육하여 세우시고 그들을 삶의 현장으로 파송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마10:16a) 예수님은 세상을 ‘이리’로 표현하신 반면에 상대적으로 제자들을 양으로 표현 하셨다. 물론 ‘이리’의 이미지는 여러 방면으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바로 그러한 곳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아마 제자들이 접하게 되는 세상이 어떠한 지를 단 적으로 알려주신 말씀일 것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그 이리와 같은 세상을 접할 제자들은 양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음을 지적하여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이리’와 같은 모습을 만났을 때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전쟁에 있어서 적을 알면 그 싸움은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이 ‘이리’와 같다는 것을 알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2000년 전의 세상이나 오늘의 세상이나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현실은 다를 바 없기에 아마도 그러한 양처럼 순진한 그리스도인 들이 접하는 세상의 쉽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해 2003년 USA 코스타 (KOSTA) 주제도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 인’으로 선정되었으리라!


그러한 세상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어지는 제자들에게 2000여년 전에 이렇게 당부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b).


바로 예수님은 ‘이리’와 같은 세상 속에서 ‘양’ 같은 제자들이 승리하는 전략 2가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것이다. 첫째는 뱀같이 ‘지혜’로워야 하는 것이요. 둘째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앞에 ‘지혜’가 먼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지혜를 먼저 가지고 난 다음에 순결한 모습으로 살아라 하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식당에서 음식이 손님에게 나올 때 음식과 그 음식을 담은 그릇이 하나가 되어 나온 것과 같다. 음식과 그릇을 떼어서 놓지 못하듯이 말이다. 음식을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비유한다면 그 음식을 담은 그릇은 ‘뱀처럼 지혜로움’ 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뱀과 같은 지혜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는 균형 잡힌 모습으로 세상에 내어 놓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이리’와 같은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전략 2가지는 오히려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이 하나로 붙어있는 셈이다. ‘순결’이 그 승리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지혜’는 승리로 이끄는 방법론인 것이다. 결국 이기는 전략은 하나! 야구공 던지듯이 지혜로 감싼 순결의 볼을 던지는 것. 이것이 양 같은 제자들이 바로 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인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둘기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뱀과 같은 지혜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는 균형 잡힌 모습으로 세상에 내어 놓여질 수 있는가?


그것은 영적인 차원 (Spiritual Dimension), 육체적 차원 (Physical Dimension), 그리고 감정적 차원 (Emotional dimension)의 균형(Balance)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셨을 때 우리에게 영(Spirit)만 주시지 않았다. 영과 더불어 우리의 육체(Body)와 우리의 마음(Heart)도 만들어 주셨다. 영(Spirit)과 관계된 부분을 영적인 차원(Spiritual dimension)으로 본다면 육체(Body)는 육체적 차원(Physical dimension)이요,마음/감정(Heart)과 관계된 부분을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으로 볼 수 있다. 이것들 각자 각자가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 다른 역할을 하지만 이들은 또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도록 만드셨다. 그래서 서로에게 긴밀하게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먼저 영성 차원(Spiritual dimension) 을 보자 .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날아갈 것(up) 같은 아니 할렐루야가 터져 나오는 감정적 차원의 감격과 사랑, 용서와 같은 내적 변화가 일어나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주님과 동행의 확신으로 인해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지는 육체적 차원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육체적 차원(Physical dimension)을 보자. 육체가 힘이 들어졌거나, 약해지거나, 혹은 병이 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감정적 차원이 처지게 된다(down). 교회에 가는 것도 그리스도인 들의 섬김의 자리에의 참여도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진다. 무엇이든지 귀찮고 일단 쉬고 싶어진다.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을 보자. 누군가와의 관계가 감정적으로 상하거나 불편한 관계가 되면 어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부담이 된다. 가는 길목에 그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돌아서 가고 만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사람과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지 싫어진다. 더욱이 그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일 경우는 찬양과 기도가 막히게 됨을 경험한다. 부부가 싸워도 기도가 막힘을 경험한다. 애인과 싸워도 찬양이 막힘을 경험한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 차원과 육체적 차원, 그리고 감정적 차원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중 어느 하나를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세 차원의 밸런스(balaence)가 잘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한 쪽으로 인해 다른 기능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웍샾(Workshop):

이 그림들에 자신의 현재 영적, 육체적, 감정적 저울을 확인해 보라.
셋 다 정상적 인가?어느 저울이 가장 떨어져 있는가?
왜 떨어졌는가?어떻게 그 떨어진 저울을 정상적으로 올릴 것인가?

자!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차원 (Three Dimension) 창조의 원리와 그 균형의 지혜를 가지고 이 글을 시작할 때 제기된 자매들의 경우들을 다시 한번 첵업(Check up)하면서 문제와 그 해결 방법을 찾아 보자.


첫 번째 싱글 자매의 경우를 첵업(check-up) 해 보자.


이 자매의 경우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나눔을 통해 전도의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섬겨 왔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 들은 누구나 되어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이다. 이 자매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자매의 마음을 훨씬 전부터 읽어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그 자매의 생각은 모른척하고 그 자매 이용하기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이를 위해 섬기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바울도 권면하기를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갈 6:9a)했던 것 아닌가!.


결국 이 자매의 상태는 상대방의 인격적 관계 (I-Thou)가 아닌 이용의 관계(I-It) 에서 개인적으로 낙심하게 된 상태이다. 그 동안 쌓아 놓은 관계도 무너지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미움까지 생긴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이 자매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전에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과거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가 더 중요한 문제다.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까?


창조의 3가지 차원과 균형의 저울로 돌아가자. 이런 상태에서 이 자매는 무엇보다도 감정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에서 많이 다운(down)이 된 상태이다. 이 감정이 더 이상의 상대방에 대해서 물질적 나눔과 도움을 피곤하고 지치도록(육체적 차원) 그리고 무의미(meaningless)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선한 의도를 악용하는 것에 미움으로 반응(영적인 측면)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이 자매는 현재 관계가 어그러졌다 할 지라도 관계회복을 위해 의무적으로 노력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감정적 쉼이 필요하다. 관계의 회복은 내가 회복이 되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양적으로 다시 관계가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할 지라도 사람은 지극히 영적인 감각을 가지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내가 회복되지 않은 외양적 관계의 회복은 더 깊은 상처를 두 사람 관계에 가져오게 만든다. 이것이 사탄의 계략이다. 성령의 거룩한 부담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착해야 하고 관계가 좋아야 하고 용서해야 하는 의무감을 자꾸 주어서 부담을 가지게 만들어 결국 깨지고 무너뜨리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것은 내적부터 우러나오는 근본적 자유 함과 억눌림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이지 외양적 겉치레의 관계회복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상대방이 바로 느끼게 된다. 사람이 속으로는 “너 이놈 두고 보자, 잡아 먹을 꺼야” 하면서 겉으로는 웃으며 개에게 “누렁아 이리와” 해 봐라. 꼬리를 살랑거리며 오나. 으르렁 거릴 뿐이다. 하물며 사람이 그것을 모르겠는가?


내 마음이 먼저 회복될 때까지 어그러진 관계 그대로 놓고 쉬어라. 그러면 성령께서 내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기 시작할 것이다. 그 자매의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 주님이 이미 알고 계신다. 주님이 얼마나 자매를 사랑하시겠는가! 만일 어느 제자가 스승의 영광과 그 영광의 나눔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을 때 어느 스승이 그 제자를 미워하겠는가?


똑같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하는 모든 일들을 다 보시고 기뻐하고 계신다. 주님이 우리의 중심까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의 지침과 상함을 만지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쫀쫀하신 분이 아니다. 걱정 마라. 푹 쉬라. 그리고 아픈 가슴 상한 감정 그대로 가지고 주님 앞에 울고 또 울라. 내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이때 성령님이 이 자매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실 뿐 아니라 한층 더 그리스도안에 성숙하도록 이끄신다. 이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성령님은 이 기회를 더 귀하게도 사용하신다. 이제껏 이 자매의 사랑과 섬김을 이용했던 상대방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돌이킬 수도 있게 만드신다. 혹은 이러한 불편한 관계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이 자매에 대해서 조심하게도 만드신다. 이 자매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만드신다.


그런데 만약 그 불편한 사람과 피할 수 없는 자리에 할 수 없이 함께 있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친절한 관계만 유지를 하고, 말조심을 하라. 감정 표현에 있어서 조심을 하라. 그리고 내가 회복될 때 까지 가능하면 잠시 바쁜 것처럼 지혜롭게 일대일 자리를 피하라. 성경의 말씀대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은 지혜로운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두 번째 결혼한 자매의 경우도 창조의 세 가지 차원에서 그 균형을 첵업(Check up) 해 보자.


이 자매 역시 첫 번째 싱글 자매와 비슷한 경우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본이 된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를 원해 음식을 나누고 아이들을 위해 집을 개방하였다. 기숙사의 누구에게도 좋은 이웃이 되었다. 영적 측면(spiritual dimension) 에서 잘 자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 자매 역시 이웃들의 이기적인 모습들에 상처를 받기 시작했다(감정적 차원: emotional dimension). 그런데 이 자매의 경우 잘 생각해 보면 감정적 차원의 상처를 받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원인이 되었던 것은 자신의 학업의 관리 (management) 문제에서 비롯되었음을 보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놀러 오는 이웃집 아이들에 대해서 내성적인 그녀의 성격이 오지 말라고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 차마 이웃집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덕스러움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이야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시간을 조절(time manage)하는데 실패하게 되었고 이것은 자신의 학업의 불성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육체적 측면: physical dimension). 이러한 스트레스는 결국 영적인 차원(spiritual dimension)과 감정적인 차원(emotional dimension)을 상처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웃이 보내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이웃들의 행위를 이기주의로 보도록 만들었고, 그들과의 관계가 불편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사랑의 음식을 나누었던 것들이 이제는 의무감이 되어서 부담이 되었다. 더욱이 그녀의 내성적 성격은 더욱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표현하는 것을 억눌렀다. 이러한 억눌림은 영적 차원에까지 미쳐 기도가 막히고 결국 이웃이 싫어지게까지 되었다. 급기야는 이사까지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의 피해 속에 갇히게 되어 우울증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자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 차원의 관리가 잘 되지 않은 것이다. 육체적 차원에서의 무너짐이 결국 감정적 차원과 영적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인간 관계와 주변의 일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자신을 피해자의 인생으로 몰아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자매는 육체적 차원의 밸런스(Physical dimensional balance)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 시간 관리를 되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녀들과 놀 시간, 공부 할 시간, 밥 먹을 시간, 등등 의 시간표를 짜라. 그리고는 이 스케줄에 맞추어서 이웃집 아이들이 놀러 올 경우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놀 수 있으니까 그때 오라고 이야기를 해서 자신의 시간을 관리해야 한다. 학업이라고 하는 것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라면 그녀에게 별로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어진 시간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니 만큼 그에게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이것을 보완하려고 밤에 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려 한다. 하지만 육신은 육신인지라 쉼이 필요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또 졸기까지 하게 만들어 보완이 안 되는 적도 많다. 입술을 악 물고 밤에 잠을 줄이고 공부를 한다 할 지라도 역시 낮에 피곤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육신이다. 몸이 피곤하게 되면 만사가 귀찮게 된다. 이웃집 아이들 때문에 쉬지 못해 화가 나고, 누군가를 만나야 하면 피곤한데 이야기해야 하니 피하고 싶고, 심지어는 교회 가는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하는 강한 부담감 때문에 교회에도 가기 싫어지거나 가더라도 한 두 시간 섬기는 것을 굉장히 부담을 가지게 된다. 결국 육체적 차원의 균형을 잃어 버리면 영적, 감정적 차원의 균형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지게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네 마음(감정적 차원: heart)을 다하고 정성(영적인 측면: soul) 을 다하고 뜻(육체적 차원: mind)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말씀을 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세 가지 측면 모두가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던 우리의 열정에 혹은 주님을 위한 우리의 섬김에 이상이 생겼는가?


첫째는 창조의 세 가지 차원, 즉 영적인 차원, 감정적 차원, 육체적 차원의 균형을 첵크 해 보라.


둘째는 어느 차원의 어떠한 원인 때문에 그 이상이 왔는지 그 근본적 원인을 진단하라.


셋째는 이상이 생긴 차원의 균형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라.


넷째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이 다 아심을 기억하고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 그리고 담대 하라.


다섯째는 하나님은 그렇게 째째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한없이 넓고 사랑이 풍성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열정과 섬김에 문제가 생겼나요?


3 가지 창조 원칙 저울의 균형을 첵크 업 하세요.


p.s. 개인적 신앙의 문제가 있거나 소그룹을 인도할 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메일 주세요. 이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름의 비밀은 보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