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변화를 가져오기 (Change Dynamics)

 


우리가 일을 하면서 어떤 조직 속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자신이 그 기관의 책임자일 수도 있고 또 우리가 그 속에서 하나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기관이나 조직이 이상적 이지 않고 건강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 사실은 그럴 확율이 더 많다. 그럴 때에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첫째 반응은 그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노력한다. 그런데 그 때에 주로 우리는 지도자가 변화되기를 혹은 지도자를 바꾸기를 원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건강한 조직 속에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변화를 위하여 지도자에게 도전하고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면 지도자는 지도자  나름대로 자신을 방어를 해야하고 그래서 갈등이 발생하고 결국에는 지도자에게 반발을 일으킨 사람은 적절하지 않은 때에 그 조직을 떠나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 조직이나 개인에게 준비되지 않은 지도력 이양(Leadership Transition) 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조직이나 그 개인에게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경우이다.


 


둘째 가질 수 있는 태도는 조직에 대하여 기대를 버리고 그저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을 챙기는 식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다. 변화할 수 없는 것을 변화시키려고 무리하게 행동하기보다는 그저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조직 속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조직에 대한 기대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지도자라면 변화를 이끌어 볼텐데 자신이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지도자를 인정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마 그 조직 속에 있지만 기회가 되면 다른 조직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적극적으로 다른 조직을 찾고 그러는 동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사실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변화를 할 수 없고 지도자를 바꿀수도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느껴질 것이다.


 


세째는 변화의 대리인(Change Agent)이 되기로 자처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지도자가 아닌데 그 조직 속에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가능하고 조직이나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해야하는 일이다. 내가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설사 그 조직의 지도자가 되어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조직에 변화가 필요할 때 지도자를 바꾸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변화의 대리인이 꼭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개인에게는 중요한 이슈일찌 몰라도 그 조직의 변화에 꼭 필수적이지는 않다.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가 지도자이건 아니면 일원 중에 하나이건 그 조직에 대한 바른 비젼을 본는 것이 중요하다. 그 변화의 끝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찌에 대하여 분명한 그림을 가지고 그것을 향하여 움직여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조직을 향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비젼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분명하다면 지도자이건 아니면 조직의 한 일원에 불과하건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혜롭게 그런 조직이 되도록 움직여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 변화의 대리인이 변화를 유도해 낼 때에 조심해야 한다. 좋은 의도이지만 그 과정이 잘못되면 그 조직에게 도리어 해가 되고 사람들을 분리 시킬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인정받기 위한 것이나 자신이 그 결과로 인하여 어떤 상급을 받으려는 욕구가 앞서서는 않되고 그 조직 속에 있는 기존 질서를 잘 인정하고 그 속에서 움직여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꼭 지도자가 아니어도 조직 속에 변화를 이끌러 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건강하지 않은 조직 속에 있을 때에 우리는 조직이나 지도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자신의 무책임성에 대하여 혹은 자신의 분노에 대하여 합리화하기 쉽다. 그러나 변화는 외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분노하고 조직을 쉽게 떠나 버리는 일이나 조직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직을 사랑하지도 않고 냉소적이고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나 다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조직의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외부의 변화를 요구하기 이전에 지도자의 변화나 교체를 요구하기 이전에 나의 태도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지도자가 안바뀌어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일은 이루어 질수 있다. 내가 꼭 지도자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질 수가 있다. 우리가 촞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움직여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미국 신학교 총장을 역임하셨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하였다. 당신이 더욱 좋은 자리 큰 자리로 움직여 가고 싶습니까? 현재 당신이 있는 자리를 그런 자리로 만들어 버리십시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가 있는 자리에 불만족하면서 불평하고 있다. 그러면서 더 좋은 자리로 가기를 구하면서 현재 있는 조직의 변화의 주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아마 그 총장님은 우리 자신의 변화를 먼저 요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런 태도의 기초 위에 변화의 대리인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현실에 대한 바른 직시가 필요하다. 현재 상황을 바로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를 보기를 회피해서도 않되고 그렇다고 문제를 과장해서 보아도 않되고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둘째 변화의 결과에 대한 분명한 그림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면 어떤 것이 잘된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없이 불만만 가지기 쉽다. 변화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변화의 결과에 대한 완벽하고 구체적인 그림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세째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변화란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때문에 그 조직 속에 있는 사람 혹은 그 조직속에 없지만 변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관련된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호응도도 파악해야한다. 네째, 전체 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조직은 그 조직의 외부 환경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체 환경 즉 Macro Context 에 대한 바른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다섯째, 변화를 위한 자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에 여러가지 로 도움이 될수있는 자원들을 인식하고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행동 계획들이 필요하다.


 


내가 소속된 조직은 건강하고 만족스러운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건강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비젼을 가지고 움직여 나가고 있는가? 우리가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변화의 대리인이 될 수가 있으며 이런 경험을 통하여 나중에 우리가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되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http://lead2serve.tistory.com/

[신선묵] “평신도 사역의 진정한 의미”

              요사이 우리 기독교 교회에서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평신도 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평신도라는 주로 전문 기독교 사역자에 반하여 종교를 직업으로 갖지 않은 신앙인들을 지칭할 때에 쓰는 말인것 같다.  현대 교회에서 이들 평신도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재평가 하는 일과 더불어서 평신도들이 교회 사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하는 많은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평신도들에 대한 재평가와 그들을 적극적으로 사역에 관여하게 하고 또 교회 안에서의 지도력의 위치에 설 수 있게 하는 경향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적극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들의 삶과 사역 그리고 지도력에 대하여 좀 더 깊은 본질적인 의미의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 이 글을 적어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평신도들의 참다운 가치는 소위 말해서 교회 안과 종교적인 일들 속에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비종교적인 일 속에서 그 참다운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김진홍 목사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식당을 운영하는 성도님을 심방하러 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큰 식당을 잘 운영하시는 분이신데 목사님의 심방을 받으면서 목사님의 손을 꼭잡고 하는 말이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한 일이년만 더 식당하고 그 다음에는 다 접고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지금 하고 계시는 이 식당 일, 이 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여 주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라고 반문 하였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상 우리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언어 중에 바로 이 성도와 같은 것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종교적인 일이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한 선교 단체의 사역자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 분들은 한국의 유수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각 분야에서 탁월한 학자, 교수, 그리고 전문가들이었다. 그 분들이 그런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을 모아서 성경 공부를 시키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정말로 이중으로 탁월한 분들이셨다. 그런데 수업 중에 그 분들에게 자신들의 사명과 사역과 은사를 정리하게 하는 숙제를 드렸는데 그 분들이 (엄격하게 말하면 사이드로 하는) 종교 사역만을 쓰고는 자신들의 직업 분야에 관하여서는 별로 영적인 사명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은사가 탁월한 분야이고 그들의 대부분의 시간과 열정을 쓰는 분야이고 상당히 가치가 있는 일들이지만 그 일들 속에서 영적인 사명 의식을 표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사역자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있는데 반드시 건강하다고만 생각되지는 않았다. 물론 세상 속에서 자기 분야에서 탁월하던 사람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문 종교인도 될 수가 있지만 그것이 신학적 선교학적으로 세상 속에서 하는 일 (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자체에 영적이고 선교적인 의미를 충분히 부여하지 못해서 오는 것이라면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 종교적인 일만이 영적인 가치가 있고 비종교적인 일 속에서는 종교적인 일과 상응하는 영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신도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그들을 사역으로 이끌려는 많은 노력들이 현대 교회에 있다. 그런데 그 경향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주로 종교 전문인들이 교회 사역을 독점하던 것에서 평신도들도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옹되는 것 같다. 주로 평신도들이 종교 전문 사역자의 보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이 있는 일들로 봉사하는데 이런 평신도 사역은 평신도들의 인력을 세상으로부터 교회 안으로 더욱 끌어들리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평신도들을 적극적으로 종교 활동에 끌여 들인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보다는 도리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는 부정적인 영향도 있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세상 속에서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쓰는 그들의 직업 (비종교적인 일)은 교회와 종교적인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평신도의 회복은 교회성장을 위한 인적 자원 동원이라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지만 온전한 평신도들의 진정한 가치 회복이라고 볼 수 는 없다.

 

            둘째로 좀 더 열려진 자세로는 평신도 사역이라고 했을 때에 평신도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 나아가서 역할을 하도록 가르친다. 즉 선교적인 삶을 살 것을 도전한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가능하면 종교적인 일들을 하도록 훈련시키고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것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신도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사업체를 하지만 그 속에서 손님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어야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직장 속에서 예배를 보고 신우회를 만들고 교회가 아닌 세상, 즉 직장 속에서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동료들에게 전도한다. 앞에 것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평신도 사역인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태도는 평신도를 새로이 평가하고 또 그들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 그 자체를 종교적인 활동과 동일한 선상 위에서 보지 않고 있다.  이런 태도에 비하여 나는 평신도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과 일, 그 자체가 교회 안에서 혹은 밖에서 하는 종교적인 일과 동일한 영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을 종교적인 역할과 활동에 더 많이 끌여들이는 것보다는 도리어 세상 속으로 더 많이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은 종교적인 일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 속에서 담당한 역할 자체에 충실한 것이 선교적인 삶이라는 의식을 갖게 해야 한다. 오해 말 것은 앞의 두 가지 의미에서의 평신도 사역을 가치가없다거나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가치가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평신도들의 중요한 가치는 가치는 그들의 세상 속에서의 삶 속에서 주워져야 하는 것이다. 선교란 종교적인 일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종교적인 일들을 바른 영적인 자세를 가지고 감당할 때에 선교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기독인들이 세상 속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들을 진실되게 감당할 때에 그들이 도리어 기독교의 진리에 매료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영적으로 세상 속에서 기능하는가가 중요한 선교적인 이슈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하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명 의식을 갖게 하고 세상 속에서 하는 일도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의 삶을 드린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는 의식으로 하게 하는 것이다. 평신도의 삶과 일에 대하여 이런 의미를 부여할 때에 평신도는 더 이상 덜 헌신된 그리고 앞으로 진짜 헌신해야 할 (다시 말해서 전문 종교인이 되어야 할) 이등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아니라 전문 종교인과 동등한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전문 기독교 사역자와 평신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역할과 기능의 차이이지 가치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평신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하여 꼭 종교적인 활동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영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 평신도들이 교회 공동체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또 힘을 얻지만 교회 속에만 머물러있는 나약한 신앙인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겠고 세상 속에서도 종겨적인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분야와 일터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적어본다. (lead2serve.tistory.com)

 

 

[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하나님과의 친밀함

나는 영적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가장 먼저 질문을 하곤 한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배우자와 맺고 있는 관계의 친밀함에 1점에서 10점 사이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두번째는 당신이 신앙인으로써 주님과 당신의 친밀함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점수를 줍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 즉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와 동행하는 것은 모든 삶과 사역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근원이자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첫째, 주님과의 친밀함은 우리 삶과 사역의 출발점이자 능력의 근원이다. 지도력이란 영향력인데 일반 지도력과 영적 지도력의 근본적인 차이는 세상 지도력과는 달리 영적 지도력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반을 지도력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하나님께 모든 것이 귀속되는 것이 영적 지도력이다. 그래서 클린톤 교수는 영적 지도자로써 집중된 삶을 살아가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나님 자신께 집중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친밀함에 깊이 나갈 때에 영적 지도력을 발휘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은 예수님의 속에서도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을 수가 있다.

  

둘째, 주님과의 친밀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듣고 싶어한다. 그런데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선행되어져야 하는 것이 있는데 관계이다. 우리가 가운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있는 것은 서로 친밀한 관계 속에 있을 때이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있고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음성의 내용을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삶을 거는 모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관계가 두터울 때에 우리는 굳이 입으로 말로하지 않다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어서 말이 필요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도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말씀을 하시라고 절박하게 간구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하게 있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실 수도 우리는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은 단지 순간의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사소한 일부터 꾸준히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작은 위기와 오해를 거쳐가면서 점차적으로 깊어져 가는 관계이며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확실하게 들을 있는 것이다. 달라스 월라드는 그의 하나님의 음성에서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우리 가운데서의 그분의 임재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 분의 생명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이해 할 만하고 믿을 만한 인생의 현실이 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올바른 장을 제공한다.” 

 

세째, 주님과 맺고 있는 친밀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이해하게 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감 속에서 그의 마음을 알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사명이란 어디서 뚝 떨어지는 명령이 아니라 친밀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고 그의 목적과 관심사를 이해하게 될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지 않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비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비젼을 받을 수가 없다. 나 홀로 나의 비젼을 세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만 주워지는 것이다.      

 

네째, 주님과의 친밀함은 그 자체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삶과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별세 신학으로 알려진 이중표 목사님은 그의 골방 기도에 관한 다음의 글에서 이 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주님의 골방의 깊은 기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원하기 때문에 골방을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흥의 위해, 능력받기 위해 기도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주님과의 대화가 행복하기에 골방의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주님과의 대화가 행복하기에 골방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헨리 블랙커비는 그의 책 영적 리더십에서 하나님은 리더들에게 당신 대신 큰 꿈을 꾸라거나 당면한 문제를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다만 당신과 친밀하게 동행할 것을 요구하신다라고 이 점을 강조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였던 베드로를 찾아와서 회복시키시는 모습이 나온다.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를 지으실 때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기에 그가 스스로 많이 괴로워하였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베드로가 부인했던 숫자 만큼) 물으시고 베드로의 긍정적인 대답에 내 양을 치고 먹이라고 사명을 주셨다. 이 성경 구절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단 한 가지를 물으시고 사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사명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명의 짐으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괴로워 할 때가 있다.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불안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가이다. 내가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궁극적인 질문이다. 주님과의 친밀함은 사역을 위한 근원이자 수단인 것을 넘어서 그것 자체가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풀러신학교의 로버트 클린톤 박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둘만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말한다. 이 관계 속에서 서로의 애정을 느끼고 관심을 나누고 하나님과의 경험의 축척으로 하나님과 점증하는 친밀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관계는 다음과 같은 친밀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을 통하여 생겨난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순간, 진리가 계시되는 순간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보여주시거나 나누실 때, 하나님으로부터의 확인의 시간,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데스티니가 실현되는 순간, 믿음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헌신의 시간들, 회개, 갱신 등의 모습들로 나타난다.” 구약에서는 다윗이 그의 시편들을 통하여 볼 때에 하나님과 깊은 친밀감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누려야할 친밀함의 모습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또 그 관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친밀함이란 관계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 끝이라는 것이 없다. 우리가 삶 가운데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더욱 깊은 친밀감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고 나아갈 뿐이다. 이런 관점 속에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의 모든 경험들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다가서게 만든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 갈수록 더욱 깊은 친밀함을 사모하는 것이 영적 친밀함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짐 파이커의 말이 우리를 도전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에서 많은 장애가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장애는 우리 자신의 성장에 안주하고 더 이상 열심히 주님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주님과의 맺고있는 관계의 친밀함에 몇 점을 주겠는가? (lead2serve.tistory.com)

[신선묵] “영적 지도자의 저널링”

 

 

기록의 힘은 참 크다. 한번은 학생 한 분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였다. 3년전 쯤에 단기 선교를 함께 갔다가 왔는데 그 날짜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혹시 아는가 하고 물었다. 내일 학교에 가서 서류를 살펴서 알려 주겠다고 하였더니 내일 아침 이른 시간에 관공서에 그 기록을 가지고 가야한다고 급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던 중에 갑자기 나의 소식통이 생각이 났다. 한 달에 한 두번씩 지도력에 관한 글을 적고 나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과 기도 제목을 적어서 사람들에게 이 메일로 보낸 것이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3년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그때 갔던 단기 선교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었다. 이런 기능으로 사용할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였는데 기록해 둔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였다.

 

클린톤 교수는 성경 속에서 느혜미아를 관찰하면서 느혜미아서가 하가랴의 아들 느혜미아의 말이라라고 시작되는 데에서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일반적으로 다른 성경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예언자에게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라는 식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느혜미아는 선지자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적어놓고 있는데 그것들이 성경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클린톤 교수는 저널링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삶에 발생하는 일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또 하나님의 관점 속에서 모든 일들을 기록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클린톤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저널링의 중요성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저널링을 날짜를 기록해두면 하나의 벤치 마크가 될 수가 있다. 삶에서의 중요한 성장 혹은 쇠퇴 등을 볼 수 있다. 둘째는 기록을 해두면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것들을 기억할 수가 있다. 저널을 가끔 되돌아 보는 것도 중요한데 하나님을 새로이 찬양할 수 있게도 하고 그가 이전에 하신 것들을 되돌아서 기억할 수도 있게 해 준다. 세째는 저널링을 하다 보면 우리의 생각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우리가 배운 것들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네째는 저널링은 우리로 하여금 갱신하고 회복하게 도움을 준다. 우리 신앙 생활이 점점 더 나태해질 수 있는데 그럴 때에 저널링이 우리를 일 깨운다. 우리가 자라나는 젊은 지도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수가 있다. 다양한 종류의 저널링은 다른 이들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우연한 기회부터 저널링을 시작하여 지난 5-6년에 걸쳐서 저널링을 하고 있다. 나는 저널링의 여러가지 형태 중에서 주로 개인적인 묵상과 기도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적는 편이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운동, 아내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그 외의 식구들과의 관계, 강의, 멘터링, 행정, 배움, 글쓰기, 그리고 사람들에게 지도력에 관하여 글을 보내는 소식통 등의 저널을 하고 있다. 이런 저널링을 통하여 내가 배운 또 하나의 진리는 저널링을 하면서 관찰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수영을 배우면서 저널링을 하고 있는데 매일 몇 가지씩 깨달은 점을 적는다. 그런데 저널링을 하면서 그 날의 배운 것을 되돌아보고 복습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배울 때에도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개념화 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냥 놓쳐버릴 수 있는 것들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소식통을 적으면서 지도력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 주제에 대하여 끊임없이 글을 쓰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모아진 글들이 지도력에 관한 나의 글의 많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글도 그런 관찰들이 모아져서 된 글이다.

 

내가 하는 저널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저널링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쌓아 나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을 드린다는 것과 저널링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하나님께 드린 구별된 시간 만큼 쌓인다면 동시에 기록해 둔만큼 쌓이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글로 적으면서 생각이 많이 정리되는 스타일이다. 기도하다가도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할 수 없을 때에도 글로 나의 마음을 쏟아내다 보면은 어느샌가 하나님의 임재가 분명하게 느껴지고 또 하나님의 뜻이 하나씩 실타래 플리듯 구별되는 경험을 하고는 한다. 또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도 나의 확신이 흔들릴 때가 많이 있는데 물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분별하였으면 얼른 바꾸어야겠지만 그렇지 않고 나의 내면의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확신을 흔들릴 때에는 이전에 기록한 기도를 보면서 재확신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마 나에게 있어서 영적 훈련 중에서 가장 중요한 틀 중에 하나는 저널링이 아닌가 싶다. 저널링을 통하여 나는 더욱 나 자신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지난 학기에 학생들에게 교수법을 가르키면서 이론적으로 공부한 뒤에 학습 토론을 위하여 “Freedom Writor” 라는 영화를 함께 보았다. 한 백인 젊은 교사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Inner city 에 있는 학교에 부임하여 아이들을 교육하는 이야기이다. 폭력과 인종간의 갈등으로 물들고 교육가들조차 포기해 보린 아이들 속에서 학생 자신들의 이야기를 찾게해주고 서로의 이야기를 말하게 하고 듣게 해줌으로써 소망이 없던 아이들에게 그들의 버려진 삶을 회복하고 서로간에 참을성을 배우고 세상을 변화해 가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 속에서 교사 Erin Gruwell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게 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저널을 쓰게 한다. 교사가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아무런 부담없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 나아가면서 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영성 생활 속에서도 때로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기 쉬운 때가 많다. 그러나 저널링을 통하여 나 자신의 참 소리, 갈등, 내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친밀감이 깊어지는 경험을 한다. http://lead2serve.tistory.com/

[신선묵] 지도자의 선택과 양육

내가 섬기는 우리 월드미션대학교는 영적 지도자의 양성의 비젼을 가지고 1989년에 시작한 학교이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래도 이민 교회 지도자들이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정식 신학교를 세울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비젼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 월드미션 대학교가 꾸준히 발전해 오고 있다. 풀러 신학교의 클린톤 교수에 의하여 효과적인 지도력을 산 지도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가 미래의 지도자를 선택하고 훈련시킨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 자신만 영향력있는 삶을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을 배출하는데 관심을 쏟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세우는 것이 그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기독교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한 영적인 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사역 가운데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그 중에 세상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사역은 아마도 지도자들을 선택하여 그들을 훈련 시키시는 것이었다. 지도자를 선택하시기 위하여 미리 기도로 준비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훈련시키시고 일을 맡기시고 그들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떠나면서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부탁하셨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교 대사명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8:19-20절 말씀은 교육 대사명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제자를 삼아서 가르치라고 주님께서 마지막 명령을 하고 계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열심히 여러가지 사역을 하셨지만 그가 중요시 여긴 것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었다. 디모데나 실라 그리고 디도를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 사역을 하고 훈련을 시키신 것을 볼 수가 있다. 또한 그가 삶의 마지막에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말하였다. 이 성경 구절 안에는 한 구절이지만 네 세대가 들어 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친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것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긴 안목을 가지고 복음의 말씀이 앞으로 몇 세대에도 지속되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육이란 중요한 것이다. 우리 교회는 지도자들을 선택하고 배출하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나 사역의 현장 속에서 우리는 준비된 사람을 찾아서 사용하려고만 하지 사람들을 키우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필요한 사람을 찾는데 일꾼이 부족하다고 한탄 한다. 그리고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을 사용하다가 힘든 일을 당한다. 그러나 사람을 사용하려고 찾기 이전에 사람을 찾아서 양육시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특별히 지도자는 이런 일에 미리 관심을 갖고 전략적으로 시간과 정성을 투자 해야한다. 사람을 사용할 소모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개발시켜 줄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용하기만 하려고 하는 조직은 당장에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결국에는 인재가 고갈되고 조직은 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투자하는 조직은 결국은 그 사람들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

요사이 많은 교회들이 교회 안밖으로 지도자들을 세워 나가는 일에 열심인 것을 보게 된다. 구체적으로 미래의 지도자들을 세워가는데 어떤 일들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해 나아가야 할까? 

첫째, 우리는 앞으로 기독교적인 신앙과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미래의 일꾼들을 선택하고 양육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신앙과 전문성을 갖춘 다음 세대의 젊은 이들을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교회가 세상 속에서 건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좋은 기독교 대학을 세우고 우리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고 또 개별적으로 전문인들이 멘터를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로, 교회의 미래의 지도자들을 배출하기 위하여 신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을 양육하는데 많은 투자를 해야한다. 앞으로 교회의 미래는 우리 자녀들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교회 지도자들을 어떻게 세우는가에 따라서 앞으로 우리 교회가 강해지고 약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교회 시설을 갖추는 것도 좋지만 또 좋은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는 것도 좋지만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지도자들을 선택하여 양육시키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모든 신앙인이 전문 기독교 사역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좋은 자질과 가능성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을 도전하여 기독교 전문 사역에 헌신하게하고 훈련시켜야 앞으로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세째, 교회 안에서도 평신도들을 더 이상 수동적인 사역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사역하는 지도자들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전문인 사역자 한 두 사람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전체에 달려있는 것이다. 평신도들을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들의 은사를 개발하여주고 사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개발과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지도자가 평신도들과 사역을 함께 나누는 이런 비젼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한 민족과 한국 교회는 그 누구보다도 지도자들을 선택하고 양육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래서 아무런 자연 자원이 없는 한국이 빨리 성장하고 또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가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도 더욱 이런 귀한 일에 기도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lead2serve.tistory.com

[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개인적인 사역

국민학교 때부터 대학원에 졸업하기까지 수많은 선생님들을 거쳤다. 교회에서도 많은 목사님 그리고 전도사님을 거치면서 신앙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생각나는 선생님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학교 선생님 중에서 특히 생각나는 분은 중학교 일학년 때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무엇인가 도와 드리고 우리 학생 두 서너명에게 선생님이 빵 집에 가셔서 수고 했다고 빵을 사주셨던 생각이 난다. 중학교 2학년때 선생님 사모님이 돌아가셔서 우리 학생들을 대표하여 집에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 때에도 많은 교수님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기억에 남는 분은 년초에 세배하고 집에 가서 밤을 새우고 놀고 온 우리 학교 선배 교수님이 생각난다. 미국에 와서도 한국에 다니러 가면 그 교수님 댁을 찾아 뵙고는 하였다. 미국에 와서 신학교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교수님을 만났지만 집에 초대해주시고 개인적으로 식사를 함께 하고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신 클린톤 교수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다. 클린톤 교수님은 많은 지도자들을 연구하시고 내린 결론 중에 하나가 효과적인 지도자들은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사역의 수단이자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가르침에 있어서 비공식적인 관계와 만남이 교육의 중요한 통로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러하였고 사도바울의 가르침도 그러하였고 오늘날에도 많은 훌륭한 교사들이 그러하다.

내가 학교에서 학교의 사역을 평가하는 연구를 담당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학생들이 교수님들에 대하여 얼마나 가깝게 느끼는가 얼마나 개인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가를 연구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교수님들과 친밀하게 느끼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교수와 학생간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에 교육의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수님들에게 학생들의 기도 제목을 받아서 기도해주도록 권면하기도 하고 식대를 대주어서 학생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도록 권장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관계는 효과적인 사역의 수단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학생부 전도사로 사역할 때에 나는 작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기 때문에 늘상 아이들에게 라이드를 주고는 하였다. 토요 성경 공부 시간이던 주일 예배 시간이던 아이들에게 전화를 하고 집으로 데리러 가는 것이다. 그러면 차 안에서 교회를 오 가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신학적이거나 신앙적인 중요한 애기들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을 통하여 아이들과 친밀하여 지고 아마도 아이들에게는 주일날 내가 열심히 준비하였던 설교들보다 차안에서 나와 함께 한 시간들이 더욱 기억에 남을 지도 모른다. 지금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면서 어떻게 우리 학생들과 비공식적인 개인적인 관계들을 맺어 갈 수가 있을까를 다시 한번 고민하면서 어쩌면 나의 가르침의 사역이 교실 안에서의 강의보다도 그런 관계들을 통하여 더욱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몇 가지만 살펴본다.

 

첫째,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한번은 클린톤 교수님의 강의를 통역하고 일부는 내가 직접 강의를 하였다. 85 가량의 학생들이 수강하였고 학생들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 나는 중에 구룹 (박사과정학생들 18 가량) 지도하였다. 강의 마지막날 그룹 지도자들과 식사하는 도중에 갑자기 클린톤 교수님께서 자기 그룹 학생들의 이름을 다섯명씩 대보라고 도전하셨다. 어떤 사람은 다섯명의 이름을 대고 어떤 사람은 대지 못하였는데 나도 4명까지 밖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가지 핑계가 있지만 결국 많큼 학생 한사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이야기다. 한편으로 부끄럽고 교수생활에 익숙해 지면서 초심을 잃어가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둘째로, 학생들의 숙제에 정성이 들어있는 피드백을 주어야 한다. 학교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페이퍼를 자주 내도록 숙제를 내고 있다. 숙제를 내면 받아서 피드백을 주어야하는데 시간에 쫒겨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마음에 깊은 부담감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숙제를 정성껏 내면 피드백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알면서도 많은 일들에 쫒겨서 일을 감당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요사이 우리 아들 정민이가 학원에 다니면서 매일 일기를 적어서 내는 숙제를 해야한다. 매일 저녁에 일기를 쓰도록 도와주는 일도 쉽지않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이 어떤 분은 정민이의 일기 숙제를 정성껏 고쳐주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선생님은 그냥 했다고 스마일만 표시해주는 선생님이 있다. 정민이 엄마가 선생님의 반응을 보면서 정성껏 해주는 분을 좋아하는 같다. 나도 물론 그렇고 교사가 사람으로써 반드시 가져야할 태도라고 생각된다. 말로만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다고 것이 아니라 숙제 하나하나를 정성껏 읽어주는 실제적인 도움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세째, 학생들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교사는 여러명의 학생들을 대하기때문에 일률적으로 대하기가 쉽지만 학생 한사람 한사람은 다르다. 학생들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교육을 해야한다. 오늘날 교육학계에서 배움의 스타일 이론이 많이 부각되고있다. 사람마다 배우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이다. 정민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에 교생실습을 하던 대학생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하나씩 맏아서 한학기동안 관찰하고 학생의 배움의 스타일에 관하여 리퍼트를 하였다. 그래서 정민이에 대한 리포트를 받아보았는데 나의 아들이지만 객관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학생듸 독특성을 고려한 교육이 되어야하지 일률적인 방법과 기준에 따른 교육은 때로 학생들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좌절시킬 있기때문이다.

 

네째, 학생들을 사랑해야 한다. 특별히 기독교 교육에서는 학생이 교회의 성도님이건 학교에서 학생이건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자에게 맡겨주신 양들인 것이다. 우리 사역자의 첫번째 그리고 마지막 궁극적인 의무는 그들을 주님께서 사랑하셨듯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목적으로 대해지고 사랑해야 한다. 그 학생들을 사랑하는 것이 궁극적인 교육사역인 것이다. 최근에 이중표 목사님의 책을 읽었는데 말씀하시기를 영적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젖을 먹일 때에 자신을 먹이는 것이 듯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가 골방에서 사랑을 나누고 유방으로 아이들을 먹이듯이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사랑으로 충만하여 영적 자녀들인 성도들에게 자신을 주는 사랑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가 성도들을 정말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지적하기를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목사의 행복이란 교인들에게 자기 존재 전부를 내어줄 때 맛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가 양들에게 지금 무엇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진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목회 현장에 가보면 진짜 어머니의 심정으로 목양하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자신이 나름대로 교인들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무리를 맏은 자에게 주어지는 진지한 도전이 아닐수없다.

 

다섯째, 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사랑의 시작이자 궁극적인 표현이다.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시고 또 그들에게 최선을 허락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에 또한 우리는 학생들의 이름도 기억할수있게되고 학생들을 이해하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학생들을 사랑하게 될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맏겨진 양무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