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순종 (Obedience)

 

 

어렸을 적에 교회에서 배운 말씀들이 참 중요한 것 같다. 나는 교회 안에서 자라면서 어렸을 적부터 많은 설교들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중에 아직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목요일 저녁 어린이 예배 시간이었는데 지금 한국에서 목회하시는 김원교 목사님이라는 분이 그때 우리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그림을 잘 그려오셔서 설교를 해주시고는 하였다. 그 날도 도화지에 색 연필로 두 장의 그림을 가져오셔서 설교를 해 주셨는데 그 그림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바위 위에 지은 집이었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설교의 주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릴 때 보았던 그림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한 것은 왠일일까?

 

달라스 월라드 교수는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서 바로 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바위 위에 지은 집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일상적인 순종과 실천이 산상 강화의 마지막 주제이다. 그 분이 최선의 길을 아시고 일러주신 일들을 한사코 행하지 않기 위해 상상 가능한 모든 일들이 시도 되리라는 것을 그분은 분명 미리 내다 보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도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의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얼마 전에 스타트 목사님의 The Living Church라는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이 많은 도전과 확신을 주었다. 특히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부록으로 목사님이 80 생신 때에 나눈 말씀이 있는데 도전이 되었다. 그의 사역 가운데서 가지 중요한 것을 나누었는데 중에 하나가 순종에 관한 것이었다. 요한 복음 14: 21 (나의 계명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이고 나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내가 그에게 나타내리라) 에서 있듯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말을 목사님은 이렇게 표현하셨다. 사랑의 진정한 시험은 순종입니다. 진정한 사랑에 대한 보상은 그리스도가 자기를 나타내심입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순종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마음에 다았다. 우리가 말로 백번 사랑한다고 해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예수님이 멀리 계시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아마 순종하지 못할 , 혹은 순종하기를 주저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순종은 예수님과 친밀한 동행을 위한 열쇄이다.

 

내려놓음으로 많은 관심을 끌고있는 이용규 박사가 북경코스타에서 강의를 마치고 한 자매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 수 있지요?” 라고 질문하였을 때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길 원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가진 안테나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들을 수 없는 거죠. 안테나를 세우는 한 가지 방법을 말씀드린다면 주님, 제가 말씀해 주세요. 제가 듣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에 100%순종하겠다는 결단 없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백지 수표를 주님께 온전히 넘겨 드리기 전까지는 주님의 뜻을 듣고 순종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순종을 강조한 말씀이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받고 특히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고 남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조금씩 잘 해가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아는 것 뿐만 아니라 또 잘 가르칠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 분야는 여전히 어렵고 남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잘 가르치지만 나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는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말로는 쉬운데 행동으로는 여전히 어렵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진리들을 가르치시고 나서 제일 마지막으로 이 비유의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가 좋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 말씀이 머리의 지식으로 끝이 나고 행동으로는 다르게 행동하게 될까봐서 마지막에 강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적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가 영적 지도자로서 많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주님께 지도자 자신이 순종하는 것이다. 월라드 교수는 말하기를 그 분을 라고 부르거나 심지어 그분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행해도 그것이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다.”  특별히 나의 경우에 선생된 자로써 무거운 책무를 느낀다. 알지나 못하고 또 남에게 가르치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만 머리로는 잘 알고 남에게는 잘 가르치면서도 실제 나의 삶 속에서는 그 진리의 말씀 대로 살지 못하여 그 참된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에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심판 받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야고보의 권면이 생각난다.

[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다니엘의 하나님 (Kingdom of God)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시고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우리 주님의 사역의 핵심 사상이요 관심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신약적인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오류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시리시는 분이심을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은 창세기부터 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자로써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신학적인 사상이다. 구약 중에서도 다니엘서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여러가지 차원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신약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서 흐르고 있는 주된 주제이면서 또 신약 시대에 주님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하나님 나라를 예언적으로 암시해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서 특히 다니엘서를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깊다.

 

토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 어떤 사람도 그가 가진 종교보다 높이 올라선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영적인 역사는 어떤 종교도 그것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 이상 커 본 적이 없다고 말하여 주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하여 교회 앞에 가장 중대한 질문은 항상 하나님 그 자신이었다.  어떤 시점에 그가 말한 것이나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의 깊은 마음 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비밀스런 법칙에 의하여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Knowledge of the Holy, p. 1)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지가 우리 삶에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러면 다니엘은 과연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할까? 그의 삶과 사역 그리고 그가 남긴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제시하고 있는가? 다니엘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매우 다양한 이름과 표현을 쓰고 있다. 연구에 의하면 다니엘은 약 26가지의 다른 칭호를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많이 나오면서 그의 하나님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표현이 지극히 높으신 자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자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다스리시는 주권자, 즉 왕이시라는 뜻이다.  다니엘은 그의 경험과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로 부터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자이고 모든 자 위에 주권자라는 사상을 펼치고 있다.

 

다니엘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은 개인의 삶 속에서 주권자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삶의 여러가지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결국 다스리시는 자이심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로 하나님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 속에서도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을 개인의 주권자로 모시고 있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삶 가운데에서도 결국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자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위기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줄로 믿었지만 동시에 그리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주권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풀무불에 던지움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그들 가운데 보내어서 그들을 지키시고 결국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다. 세째로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지 않고 있는 세상의 왕의 삶에서도 주권자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느브갓네살왕은 자신이 당시의 초대 강국의 왕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왕이고 주권자이고 자신 마음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짐승처럼 광야를 배회하기를 3년하는 경험을 통하여 사람을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시는 이는 바로 다니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은 신앙인들 속에서만 주권을 발휘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는 세상도 실상은 그에 속하였고 그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이다. 네번째로 다니엘은 왕의 꿈의 해석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증거한다. 인간의 왕국들의 흥망 성쇠가 지속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모든 인간의 왕국들을 대체할 날이 올 것임을 두 가지의 꿈을 통하여 예언하고 있다. 결국 다니엘의 하나님은 개인과 공동체, 세상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자, 왕이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니엘서는 다니엘에 관한 책이 아니라 다니엘의 하나님에 관한 책이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주권자로써의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다니엘은 예수님 오시기 전 수 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믿고 그에 합당하게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 의식을 가지고 살았고 신앙의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되심을 고백하고 살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하나님이 주권자되심을 알아갈 수 있게 하였고 역사의 주인도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선포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왕되심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삶을 산 것이다. 이런 모든 면에서 가장 핵심되는 것은 우리도 하나님을 주권자로 왕으로 생각하는 가이다. 우리의 개인의 삶의, 그리고 우리 공동체 삶의,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도 고백하지도 못하는 세상 속에서도 아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인류의 역사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삶과 입술로 고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다니엘서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도전이다.

 

2008 코스타가 이제 눈 앞에 다가오고 있다. 올해는 이 시대에 바른 길로 주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주제로 열리게 된다.  이번 집회를 통하여 다니엘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발견하고 고백하는 집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신선묵] “영적 지도자의 고독과 침묵”

최근에 한 교수님과 대화를 하던 중에 자신이 그 전에 수업을 듣는데 달라스 월라드 교수가 특강 강사로 오셨는데 얼마나 차분하고 조용하면서도 편하게 하시는지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나도 월라드 교수의 글을 직접 읽어보니까 아마도 하나님 안에서의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충분히 갖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영성 훈련으로써 고독침묵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하던 일을 멈추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걱정과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홀로서서 침묵하면서 하나님께 촞점을 맞추는 것이다. 월라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독 하기란 장시간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취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손을 떼는 것이다. 고독 하기에서 걸음 나아가서 우리는 침묵하기를 배운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고요함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독과 침묵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께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의 그분의 소유로 족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영혼이 있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며 세상이 아버지의 세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세상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힘들지만 시간 속에서 고독하고 침묵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에서도 우리는 분주하게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인가 말을 주고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고독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촞점을 맟추기보다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침묵 속에 거하기 보다는 많은 말로 시간을 채우려는 때가 있다. 하나님 안에서 고독의 시간을 갖기보다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고 우리를 내려놓음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여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하시는 일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의 임재 속에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것이 고독이요 침묵이다.

 

달라스 윌라드 교수는 사람들이 홀로 있기와 침묵 하기를 어렵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인상깊게 읽었다. 그가 파스칼의 팡세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물 없다는 가지 사실에서 비롯된다. 연약하고 유약한 인간 조건으로 타고난 빈곤으로 너무 비참해서 깊이 생각하면 아무것도 위로가 안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대신에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끄럽고 바쁜 것을 지독히 좋아한다. 그래서 고독의 즐거움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다른 은밀한 본능, 원래 좋았던 본성의 잔재가 있어서 실제로 행복이란 바쁜데 있지 않고 오직 안식에 있음을 알고 있다. 본능이 앞에서 말한 분산 욕구와 충돌하고, 그로 인한 생각의 혼란 때문에 사람들은 흥분 속에서 안식을 얻으려 한다. 그리고 닥쳐오는 난관을 모두 이겨냄으로써 안식의 문이 열려야만 지금 내게 없는 만족을 얻을 것이로 생각한다. 말들을 쉽게 표현하면 사람들은 안식을 구하면서도 안식을 주는 고독하고 침묵하기를 두려워하고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 안식을 구하고 있기에 바쁜 일들을 빨리 극복하고 다음에 안식을 갖겟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있으면 다른 바쁜 일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고독의 시간을 갖고 침묵하고 있는 사람은 어찌 보면 공동체와 사람들과의관계를 피하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회피하는 사람같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이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안에서 참된 평안을 소유하게 된다. 이렇게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정한 관계와 의사소통을 만든다. 아이러니컬하지만 고독할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누릴수있고 침묵할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

 

첫째, 우리는 고독을 선택함을 통하여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 있기를 배운다. 우리는 고독을 통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고독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가 모든 껍데기를 벋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진실되게 만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고독하여 자신을 직면할 때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게 되고 만나게 된다. 고독할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관계를 맺을 수가 있다.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을 갖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만날 있다. 자신 안에 안식과 평안이 있기에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있는 힘과 용기가 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대하고 만날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고독 속에서 대면하지 못한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감당할 힘이 없기에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만 머문다. 홀로 있을 없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없다.

 

둘째, 우리는 침묵을 선택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한다. 우리는 침묵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 속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가 하는 중에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말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침묵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말을 발견한다. 우리는 자신의 말이 정리되었을 때에 비로서 하나님께 대화로 나아갈수가잇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다. 침묵을 통하여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정확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나와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침묵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있고 말의 표현 배후에 있는 마음을 이해할 있다. 스스로 침묵할 없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유와 마음이 없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자신의 말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마음 속에 품어진 뜻까지 아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대화란 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마음의 소리를 주고 받을 있어야 한다.

 

고독과 침묵 믿음의 선배들이 많이 실천하였던 영적 훈련인데 우리 교회안에서 많이 잊혀진 훈련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하면서도 실천하기 힘든 영적 훈련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사람들과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란다.

[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우리를 직접 다스리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워졌다. 이것을 우리가 복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왕으로써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글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심의 네 가지 의미와 그에 합당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 본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 각 개인의 삶의 왕이시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왕이 되고자 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려는 많은 유혹의 세력이 있다. 때로는 반대로 우리를 위협하면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려고 다가오는 세력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참 왕이 될 수가 없다.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궁극적인 해를 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모든 약속도 그 모든 위협도 허상에 불과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 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실 수 있고 또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최고의 충성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세력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참 왕으로 인정하고 그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러한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삶, 남을 지배하기보다는 섬기는 삶,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복되게 여기는 삶,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삶 등, 역설적인 진리을 주셨다. 역설이란 그냥 보기에는 모순된 것 같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 속에 참 진리가 있는 것을 역설이라고 한다. 우리는 세상의 그럴듯한 피상적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참 모습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씀 대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진정한 영원한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왕만이 우리에게 참 행복을 줄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공동체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속에서 결코 외로운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만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무리들을 다스리신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궁극적인 충성을 드리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가 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고 하나님을 진실되게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나라의 일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늘 혼자가 아니라 우리이다.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때로는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를 실망시킨다. 또 외형적인 교회가 반드시 진정한 하나님 나라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한 지역 교회들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담은 그릇이다. 우리가 때로는 서로가 다르고 또 서로가 부족하여서 서로를 힘들게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모두 한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충성하고 살아가는 한 백성이다. 그래서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섬기면서 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세째,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고백하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지으셨고 모든 것이 그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그런데 많은 무리들이 아직도 참 왕을 모르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아직도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허락하시기를 원하시고 지금도 그 일을 하시고 계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 다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동역자로 사용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또 이 일에 헌신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삶과 말을 통하여 전하기를 원하신다..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들의 삶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좋으심을 함께 누리게 된다.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들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이 왕이심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그들도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그의 다스리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

 

네째,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왕이시다. 하나님은 오늘만 왕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왕이시다. 과거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역사는 인도하셨고 현재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미래 인간의 역사도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우리가 삶의 한 순간을 볼 때에 하나님이 왕이심을 의심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께 충성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면서 살아가지만 우리 삶의 경험적인 차원에서 많은 시련과 부정적인 경험을 당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회의하고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시는 왕이시기 때문이다. 인간 역사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 진행되어지고 그의 뜻이 성취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진리가 어리석어 보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이 복된 삶 같이 느껴지는 현실 속에서도 다시 말해서 칠흙과 같은 암흑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아무리 밤이 어두워도 결국은 밝은 아침이 오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결국은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런 소망이 중요한 이유는 이로 인하여 오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더욱 찾고 순종하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을 확신하는 우리는 오늘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은 신실하게 구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소망을 다른 것에 두지 않고 오직 왕되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두고 살아간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거하는 것만이 유일하고 궁극적인 가치인 것이다.

[신선묵] “영적 지도자의 배움의 자세”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있는 분들을 관찰하여 보면 나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배우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배움의 자세는 자신의 현재 상태에 안주하거나 과거의 것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이다. 우리 월드미션대학교의 임동선 총장님도 연세가 많으시고 그 동안의 연륜이 풍부하셔서 그저 옛날에 공부하신 것과 본인께서 경험하신 것을 나누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도 한번 설교를 위하여 또 한번 세미나를 위하여 늘 연구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 내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은 늘 메모하시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일상의 대화 중에서도 배움의 가치가 있는 것은 곧 메모지를 꺼내어 적으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 두번은 이렇게 하기가 쉽지만 꾸준히 배우는 자세로 메모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효과적인 지도자는 늘 배우는 자세를 갖는다.

 

우리는 배움이라고 하면 꼭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과 학위를 위하여 공부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배움의 전당인 학교에서 학위를 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최선의 배움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독서를 통하여, 주위에 여러 선배들과 동료들을 통하여, 혹은 후배와 제자들을 통하여, 또 우리의 삶을 관찰하고 살펴봄을 통하여 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가 보다는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 열정과 열려진 마음이 있는가이다.

 

최근에 한 목사님의 온유함에 대한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목사님은 온유함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면서 배움에 열려 있는 자세가 온유함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에 Selective Listening을 한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에 많은 문제가 생긴다. 부부간에 대화를 할 때나 설교나 강의를 들을 때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을 걸러 듣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열려진 자세로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온유해야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는데, 첫째로는 나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의식을 갖고, 둘째로는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열려진 자세를 가져야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Selective Listening의 반대는 Teachability이다. 배움에 열려 있는 자세인 것이다.

 

최근에 다산 정약용에 관한 책을 읽다가 좋은 도전을 받았다. 신유한이 사신을 수행해 일본에 갔다가 견문한 일을 적은 해사견문록 이라는 책을 읽고 다산 정약용은 매우 안타까워 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으면 일본인들이 원나라 세조의 10만대군을 물리칠 있었던 군사 제도나 한옥보다 밝고 따뜻한 주거제도 등을 살펴서 것이지 그러지는 않고 일본 사람의 복식이 얼마나 야만스럽고 그들의 문화가 어찌나 해괴하며 조선 사신의 행차에 굽신대며 그림과 글씨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극성스러운지에 대한 것이나 적어와서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정약용은 그의 글에서 공연히 일본 사람을 얕잡아 보고 그들을 야만이라 헐뜯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자랑이 되고 보탬이 되겠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일본에 이르면 저들은 모두 새 배를 건조하여 돌려 보내 주었다. 그 배의 제도가 절묘하였는데 배가 이 곳에 도착하면 우리는 왜놈이 만든 배는 재수없다고 모두 부쉬버려 그 방법을 옮겨 오려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 하였다. 기회를 갖고도 배움의 자세를 갖지 못하여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지적한 것이다. 한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도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도 배움의 자세는 중요하다. 배움의 자세에 대하여 몇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면,

 

첫째, 우리는 주위에 탁월한 사람이 있으면 겸손하게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남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배우기 보다는 남의 단점에 집중하여 그를 무시하고 우리 자신은 그저 나태하게 있으려 한다. 장점보다는 단점에 집중하여 무시함으로써 우리가 배우고 성장해야 하는 의무를 태만히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어떤 사람을 극복하고 보다 앞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사람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훌륭한 점을 따라서 배울 때에 진정한 의미로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겸손히 배우려기보다는 일단 비평을 먼저함으로써 배워도 이유를 먼저 찾는 같다. 사람의 훌룽한 점을 깍아내림으로써 혹은 사람의 훌륭하지 못한 점에 집중함으로써 사람을 이기고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무시하고 깎아내림으로써는 피해갈 있을 절대로 사람을 진정한 의미로 극복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구를 극복하고 보다 앞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사람의 좋은 점과 훌륭한 점을 찾아서 인정해주고 겸손하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오직 배움을 통해서 성장을 통해서만 남을 극복할수 있다.

 

세째, 우리는 과거의 학업적 성취와 능력에 집착하고 현재에 새로운 배움에 대하여 열려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나이와 지위와 성취가 아니라 배움에 대한 열려진 자세이다. 우리의 쓸데없는 자존심, 비교 의식, 그래서 배움의 자세를 갖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진정한 의미의 만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있을 때에 다른 사람에 대한 건강한 존중을 있다. 내가 오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배우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생각하고 그들에게서 훌륭한 점을 찾아 존경하고 배움의 자세를 가져하겠다.

 

풀러 신학교의 Robert Clinton교수는 성공적인 삶을 산 지도자들을 연구하여 일곱 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효과적인 지도자들은 전 삶을 통하여 배우는 자세를 견지한다 (Effective leaders maintain a learning attitude throughout life)”는 것이다. 70노인이라도 배움에 온유하게 열려있는 사람은 30대 청년이고 30대 청년이라도 배움에 열려있지 않고 귀를 막아버리는 사람은 70노인이다. 우리가 일생을 늘 살면서 배움에 열려진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 같다.

[신선묵] 영적 지도자와 진실성 (Integrity)

최근에 함께 일하는 직원한 분과 함께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하나만 든다면 무엇일까? 함께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Integrity라는데 동의하였다. 지도자가 진실하지 못하면 다른 모든 활동이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에게 있어서 지도자의 진실함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 정직한 , 일관성이 있는 , 투명한 사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와 동일하게 행동하는 사람, 남이 보던 안보던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진실된 사람이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눈을 먼저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다. 


지도자가 진실해야 추종자들의 신뢰성을 얻고 영향력을 끼칠 있다. 창세기 19:14절의 롯의 이야기를 보면 롯이 그의 사위들에게 다가 심판을 경고했을 때에 그들이 농담으로 여겼다고 하였다. 이것은 평상시에 롯이 그의 사위들에게 신임을 얻을 만한게 진실한 태도를 가지지 못한 증거라고 있다. 그가 진실을 추구하기 보다는 타협하는 사람이었기에 위기의 순간에 진실을 이야기해 주는데도 그의 사위들이 롯의 말에 신뢰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진실함을 포기하면 당장에는 성취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진정한 의미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지도력의 법칙이다. 진정한 의미의 영향력은 진실함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진실성이 있는 지도자들을 사용하신다. 지도자가 많은 능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진실해야 한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연구한 풀러신학교의 클린톤 교수는 지도자들이 삶과 사역에서 도중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는 사역의 기술적인 이유나 전략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영성이 이유라고 하였다. 삶과 사역의 초반부에 진실성에 따라 사는 자세를 분명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결과라는 것이다. 사역의 후반부에 오는 실패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주로 처음부터 이런 진실성의 면에서 타협하고 넘어온 것의 산물일 뿐일 경우가 많다. 진실성을 타협할 때 즉각적으로 힘든 일이 발생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지도자로써 영향력을 잃게 된다.



진실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지도자를 반드시 사용하신다. 성경에 나오는 진실성 있는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과 다니엘이다. 요셉은 지도력의 중요한 자질인 꿈도 있고 또 실력도 있는 사람임에 분명하였지만 그 보다도 그는 우선 진실된 사람이 었다. 부정한 유혹 앞에서 넘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동을 하였다. 다니엘도 진실된 사람이었다. 자기의 신앙 양심을 쉽게 타협해 버리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신의 신앙 양심을 고수한 사람이었다. 다닐엘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가 진실함을 가졌을 때에 즉각적으로 구원해 주시고 그의 영향력을 넓혀주셨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에는 그가 진실되게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행동한 이 두 사람 모두를 귀하게 사용하셨다. 진실을 선택하는 순간은 힘이 들지만 또 때로는 즉각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진실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신다. 우리가 진실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때에 우리를 들어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2 20-21절에서 권면하기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라고 하였다.



내가 진실성에 있어서 경험한 하나의 좋은 예를 보여주겠다. 우리 월드미션대학교가 미국에서 기독교 대학 연합체의 회원학교이다. 이 단체에 가입하기 위하여 우리 학교가 오랜기간동안 여러가지 과정을 거치고 특히 감사(Team Visit)를 받았다. 이 단체에서 학교의 회원학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Integrity이다. 때로는 학교가 아직 모든 면에서 성숙하지 않았어도 앞으로 그런 부족한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움직여 나아가는 모습이 있으면 학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고 감사를 할 때에도 심판하여 떨어뜨리려고 하는 자세보다는 도와주고 세워주어 어떻게던지 회원학교가 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도와주고 부족하더라도 세워주려고 하지만 하나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Integrity을 갖지 않을 때이다. 학교가 행정을 하면서 속이던지 혹은 어떤 면으로던지 진실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절대로 회원학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학교 운영에 있어서도 Integrity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진실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닐수도 있다. 진실성은 근본적으로 건강함이다. 우리 자신이 진정한 의미로 건강할 때에 우리가 진정한 의미로 자유함 속에서 진실할 수가 있다. 진실함은 우리의 인격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갖춘 모습이다. 우리의 인격이 깨어지고 문드러지고 왜곡되지 않고 건강할 때에 진실함은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격의 건강함이 필수적이다. 진실함이란 어떤 문자나 글짜에 충실한 율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진정한 의미로 자유하고 건강하고 풍성할 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진실되게 행동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인격이 건강해야 한다. 우리 인격이 왜곡되지 않고 건강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죄의 저주로 부터 진정한 의미로 자유함이 있을 때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죄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힘을 발휘하지 않을 때에 우리 자신이 진정한 의미로 건강해지고 진실해 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진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연스런 산물이다.



진실함은 효과적인 지도력의 근원인 동시에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할 모습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이는 하나님을 닮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을 위하여 부르셨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은 거룩함을 추구하게 된다. 우리를 부르신 자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 가운데서 때로는 성취를 위하여 진실함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성공과 성취도 진실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워런 위어스비는 말하기를 아무리 많은 명성도 그것이 진실함을 대신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4:16절에서 고백한다.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궁극적으로 설 것을 의식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꺼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