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홍] 동사와 형용사

미국으로 유학와서 공부하는 중에 한국에서 공부하던 것과 참 다르다는 것을 느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아무때나 자유롭게 질문하던 것을 보면서 일종의 질문권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것이 미국의 수업에 있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정행위가 거의 없는 것도 색달랐습니다. 강의계획안(syllabus)이 그대로 지켜지는 것도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과제물을 제출할 때, 내용도 내용이지만 포맷과 스타일을 엄격하게 따지는 것도 한국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멋진 형용사들을 늘어놓은 일반적인 진술(general statements)에 내려지는 혹독한 평가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멋있게 썰을 풀어놓으면 어느 정도경우에 따라서는 꽤 좋은학점을 받고는 했으니까요. 지금은 물론 많이 달라졌겠지요.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던 교수 가운데 한 분은 학생들이 설교에서 전문용어(그분의 표현으로는 “Big Word”)를 쓰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만약 설교 중에 은혜라든가 경건이라든가 거룩이라든가 종말적같은 말들이 적절한 설명이 없이 등장하면 가차없이 지적하곤 했습니다. 제 식으로 그 분의 뜻을 옮겨보자면 그런 말들은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listener-friendliness”라고나 할까요)가 부족해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설교자나 그와 많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지(심지어 그런 사람들끼리도 같은 말을 다른 내용으로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날 처음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과는 거의 그 내용을 소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커다란 단어들은 많은 내용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아주 조심스럽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빈 말잔치로 끝날 위험이 큰 것같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려하면 많은 것들을 살펴야 하고, 더 명료한 생각에 이르를 때까지 자신의 두뇌를 괴롭혀야 하고, 그러려면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설교학자로서 유명한 크래덕(Fred B Craddock)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경험을 가끔 소개합니다. 설교학 시간에 앞에 나와 설교하는 학생들이 가끔 이런 식으로 설교한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만난 분은 정말 놀랍도록 경건하고 신실하며 사랑에 가득찬,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닮은 분이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반응은 이렇다는군요. “그만 입 다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말하게. 그 이가 얼마나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인지 느끼는 것은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가 느낄 일이야.” 사실 신실, 경건, 그리스도를 닮음, 이런 것들은 구체적이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중에 듣는 사람의 마음에 자연히 떠오르는 말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부질없는 부사나 형용사를 될수록 삼가고 동사를 많이 사용할 일입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형용사는 빈약하고 동사가 압도적으로 풍부한 말이라는 것도 생각해 봄직한 일입니다.


 


출애굽기 18 1절부터 12절까지에서 모세는 그를 맞으러 나온 장인 이드로에게 하나님이 모세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말합니다. 이드로는 이방 종교의 제사장입니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모세는 장인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일, 곧 바로와 이집트 사람에게 하신 모든 일과, 그들이 오는 도중에 겪은 모든 고난과, 주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건져 주셨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였다 (8).” 성경은 이드로의 반응도 전합니다. “그러자 이드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시려고 베푸신 온갖 고마운 일을 전하여 듣고서, 기뻐하였다. 이드로가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와 바로의 손아귀에서 자네와 자네의 백성을 건져 주시고, 이 백성을 이집트 사람의 억압으로부터 건져 주셨으니, 주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분일세.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교만히 행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치신 것을 보니, 주님이 그 어떤 신보다도 위대하시다는 것을 이제 나는 똑똑히 알겠네.’ 그리고 나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하나님께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쳤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도우셨는가를 자세히말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언사는 오히려 그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이드로의 입에서 나왔습니다(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모세의 자세한 이야기는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않도록 깊은 생각을 거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저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신 이야기를 대충 말하고는 온갖 형용사를 늘어놓으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어땠을까요? 이드로로서는 사위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마지못해 맞장구를 쳤을망정, 왜 하나님이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분인지 마음으로부터 깊이 공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공감은 강요하거나 쥐어짜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모세가 공과 힘을 들인 것은 하나님에 대해 형용사를 동원하여 찬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일을 자세히기억해내어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자세하고 구체적일수록 하나님의 위대함은 자연히 드러나게 마련이었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이 겪은 일에 대한 감동이 그 자신에게 먼저 생생했기 때문일 터이지만, 그 감동을 남에게 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과 이스라엘을 위해 보존하려고 해도 사건 자체를 낱낱이 기억해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출애굽 사건 뿐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은 대부분 사건 자체에 대한 자세한 기록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신 일에 관한 기록일 것입니다. 얼마 안되는 시간에 일어난 일을 복음서가 가장 공들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번화한 항구 도시 고린도에 사도 바울이 전도자로 도착했을 때 속으로 다짐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집중할 것, 멋들어진 말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애쓰지 말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 자체에, 그리고 그 자체에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자세히 전하면 하나님이 왜 찬양받을 분인지 자연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많은 형용사가 동원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 자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 빈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화려한 수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게으름과 안일함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이야기는 많은 기적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출애굽 뿐이겠습니까? 한 영혼이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빠져 나오는 데는 반드시 엄청나게 놀라운 일들이 있는 법입니다. “놀라운 일들이 꼭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신생아를 돌보는 것을 배우기 위해 어느 대학병원에서 한 달동안 일할 때 한 교수가 강의 중에 한 말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치유될 수 없던 병이 나으면 기적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한 아기가 정상적으로 태어나는 것이야 말로 기적이라고 느낍니다. 배우면 배울 수록 아기가 잘못 될 수 있는 단계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정상아가 하나 태어나려면 그 모든 과정이 다 정확히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이게 바로 기적이 아닌지요.” 아이 하나가 태어난 과정을 자세히살펴볼수록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가 그만큼 더 드러날 테지요. 한 영혼이 거듭 나는데 육신적인 출생보다 그 신비와 놀라움이 덜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말할 것 없이 우리 각자가 출애굽하는데도 틀림없이 많은 놀라운 손길이 개입되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말했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C S 루이스, 우찌무라 간조, 김교신, 그리고 누구보다도 바울 사도 같은 이들은 많은 공을 들여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이 중에 바울이나 어거스틴 같은 분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만난 일이나 아이들이 놀면서 하는 말을 따라 로마서를 펼쳐보게 된 일같은 신비로운 일때문에 회심한 것처럼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훨씬 더 공을 들여 기록한 것은 그 이전의 긴 기간 동안 자신의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특히 7장은 그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일어난 일이라든가 로마서를 펼쳐보게 된 일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마지막 손질 같은 것입니다. 그들 주변과 내면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간섭하시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통해 그들이 마침내 어떤 상태에 이르렀을때 행하신 마지막 손질(finishing touch)이지 그것들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도, 오직 그 사건들 때문에 그들이 돌아설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뿐 아닙니다. 로마서 11장 끝부분의 장엄한 송영 같은 것은 또 어떻습니까? 바울 사도가 로마서 1-11장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자세히살펴본 뒤에 그 속에서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온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세히살펴볼 때 하나님의 지혜, 그 분의 주권, 그 분의 은혜와 그 분의 자비가 드러났고, 그랬을 때 그는 바로 이드로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며(로마서 11:3-36) 바로 그 하나님께 바칠 제사(로마서 12:1)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소위 신앙의 위인들에게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베푸셨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한 영혼이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오는데는 참으로 세밀하고도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업적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하나님의 업적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9).” 이러한 하나님의 업적을 선포하되 자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업적을 자세히 선포할 때 하나님을 더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저는 앞서 말한 사람들이 위대한 신앙인이라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만한 것이 있었다기 보다 자신의 이야기(사실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그처럼 자세히 들여다보고 기억해냈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빌려쓰는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에 큰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쓴 글이 적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Everyone has a story to tell.”

[박길홍] 자신과의 절교

의사로 일하다 보면 담배나 술을 끊지 못해서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적지 않게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분들을 위한 프로그램들도 많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술을 끊는 것을 돕는 데는 AA(Alcoholics Anonymous)라는 프로그램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 방지회라고 번역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후레드릭 뷰크너라는 소설가면서 목사인 분이 이 프로그램에 대해 언급하면서 교회의 모습이 바로 AA 같아야 하지 않을까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무척 공감이 갔습니다.


이 모임은 물론 술을 끊기 위한 모임입니다. 모임의 이름이 말하는 대로 자신의 이름을 감춘 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모입니다. 수련의 시절에 견학을 갔는데 누구에게나 참석이 허용된 모임이 있고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모임이 있다더군요. 저는 물론 그 모임에 참석할 허락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것도 피상적인 것이고 어쩌면 잘 못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임을 소개하려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니만치 양해해 주시고, 제가 잘 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고쳐주시는 분이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이 모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보다 큰 능력(higher power)을 가진 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있네 없네 하는 논쟁은 이곳에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힘만으로는 술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수 없이 확인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끼리의 협력만으로도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들 모두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술은 끊어야 한다는 간절함과 절실함은 있는데 그것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되지 않는 일인 것이 분명할 때 그들이 동의한 것은 자신들보다 큰 힘을 지닌 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모여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서로간에 자신들의 경험을 말하면서 다른 이들이 술을 끊는데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이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물론 없습니다. 자기가 참석하는 모임이 다른 모임들에 비해 더 유명한 사람들이 오느니 어쩌니 하면서 내세우는 일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이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이오히려 수치스러울 망정 무슨 자랑할만한 일이 못됩니다. 자신이 술을 끊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술을 끊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거나 흉볼 여유를 가진 사람은 이곳에 오지 않겠지요. 이 모임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문제 때문에, 자신이 술을 끊어야겠으니까 어쩔 수 없어 올 뿐입니다.


자신들의 모임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사업 구상 같은 것은 여기서는 거론될 이유가 없습니다. 모임에 대한 의논은 물론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의논은 피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것뿐입니다. 의논도 극히 실제적입니다. 어떻게 모임을 조직하면 서로 도우면서 술을 끊는데 유익하겠는가 하는 데 촛점이 늘 모아져 있습니다. 이 모임으로 덕을 보아 성공적으로 술을 멀리하고 있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이 모임에 대해 알리며 권하는 것은 물론 있겠지요. 그러나 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자신의 모임을 더 다양한 목적을 가진 모임으로 발전시킨다거나 더 유명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술을 끊는 것입니다. 그만치 자신의 문제가 절실하고 술을 끊으려는 마음이 간절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문제가 절실한데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온 공감과 동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훌륭한 강사의 말을 들으려고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필요하다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는 각자가 술을 끊고 건강한 삶을 얻는 것뿐입니다.


 


저는 지금 먼젓 글에서 잠깐 언급했던 개혁이라는 것을 말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도 있지만 그저 지금보다 발전하고 나아져야 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개혁이라고 부를만한 변화가 필요한 것이 한국교회, 또는 한인교회의 현실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저도 심심치 않게 만나곤 합니다. 교회의 모습이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물론 저도 하고 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교회의 모습은 답답하리만큼 잘 바뀌지 않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도대체 어째서일까요?


저는 우선 제가 방금 쓴 표현을 한 번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교회의 모습이라는 표현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하는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교회가 달라져야한다고 하는데 동의하는 듯하던 분들이 막상 어느 선에 이르면 그만!”을 외치던 일들이 기억에 떠오르면서 입니다. 어느 선이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자기 자신의 생각과 모습이 바뀔 것을 요구하는 선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개혁 또는 갱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또는 어떤 모습으로 교회가 바뀌어야 하느냐 하는데 대해서 가진 생각들이 많이 다를 뿐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자신의 생각이나 태도가 바뀔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우선 그 대상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저는 그것이 교회가 교회답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함이 없어서 열심이 부족해진다는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열심을 품는 것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 자신의 모습이나 생각까지 살펴볼 수 있는 열린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다와지는 일이 정말 꼭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며 그 일을 위해서는 내가 불편해지고 고통스러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되어야 할 일이라는 절실함이 있을 때라야 자신의 부족함이나 편견이나 고집이나 자존심 같은 것들도 제대로 살펴볼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해 품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우리의 눈길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꼭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교회 개혁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로서는 무엇보다 간절한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일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바꿔 놓으려고 하시건 바로 그것이 우선 나 자신에게 가장 복된 일인줄 믿고 순종하는 태도를 늘 훈련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눈길을 교회로부터 하나님과 나 자신으로 돌릴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김교신 선생의 글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 이 소수의 우인이야말로 나의 지상 생애의 전소유요, 전영광이요, 전위로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근친에게 버림이 되고 신앙으로 인하여 교회의 조롱거리가 될 때에 지상에서 힘될 것은 오직 이 소수 우인의 통찰이 있을 뿐이다. 친구들아, 나의 냉정함을 책하기 전에 우선 나의 주위를 살펴보라. 나는 결코 우의를 경시하여도 가한 처지에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우의에 심히 냉박(冷薄)한 자인 것을 자인치 아니치 못하니 이것이 비통한 사실이다. 친구들은 전월의 우의, 전년의 우의, 혹은 10년 전의 우정으로 대할 때에도 나에게는 월전의 우의를 기억치 못할 뿐인가, 어제까지의 자아를 신뢰하지 못한다. 나는 날마다 자기를 향하여 절교를 선언하는 자요, 매월 성조지를 발송할 때는 절연장을 보내는 마음으로 투송하지 아니치 못한다. 실로 비통한 일이나 어쩔 수 없이 한다. 전달까지의 찬동자가 이달에도 협동자일 것을 나는 기대치 않는다. 나는 성구를 해석할 때에 우인의 신앙에 조화시키며 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할 여유가 없다. 다만 표적을 향하여 발사하여 볼 뿐이다…”


여유가 없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성서를 따라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너무도 절실하고 간절하기 때문에 혹 친구를 잃는 고통을 겪게되는 한이 있더라도 성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밝혀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어제까지의 자아를 신뢰할 수조차 없다며 스스로를 개혁의 대상으로 여길 때 그렇다면 개혁의 주체로는 누구를 바라볼 것입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다면 그런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 역시 불안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이 누구의 마음에 들어야 하겠습니까?


 


시편 19편을,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어렴풋이나마 그 내용을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시인은 이 시를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 이것이 시인의 기준이었습니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불신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기 잘못을 낱낱이 알겠습니까?”


그나마 자신이 깨달은 것조차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이 죄를 끔찍하게 여기며 그것을 벗어버리고 싶어하며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마음이 간절할 수록 오히려 그런 선한 마음이 자기 스스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손아귀가 자신을 장악하곤 하는 것을 더 분명히, 더 고통스럽게 발견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주신 말씀에 뭔가 부족한 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찰하고 연구하여 (김교신 식으로 말하자면 박물공부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보다 더 분명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물론 주님의 교훈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는 자신이 그리 미덥지가 못합니다. 자신의 열심이 부족한 것을 한탄하는 것도 아니며 손쉽게 자신의 한계를 내세우며 그것으로 자신의 허물에 스스로 면허를 내리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힘써 주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인다고 하면서도 미처 보지 못하는 것도 있고, 애써 눈을 돌리려하는 것도 있으며, 보았으면서도 고의로 자신의 편견이나 고집이나 욕심이나 욕망을 따르기도 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보게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자신을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그것을 구합니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기도는 간절함과 절실함이 없이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루터가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신앙 양심이 걸려있는 자리에서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달리 할 수 없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했을 때도 자신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뜻을 추구하되 결국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은 자신의 양심이나 용기나 성경지식이나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아니라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 유일하신 분께 달려있음을 고백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회 개혁의 필요가 있다면 그 가장 큰 부분이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하든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어서 진리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절실함과 간절함이 없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이 교회개혁을 꿈꾸며 성취하는 것이라기 보다 주님의 교훈으로 경계를 받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간절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혹시 주어지는 선물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박길홍] “열 여덟해 동안이나”

의과대학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정신과를 돌고 있었으니까 아마 4학년때였을 겁니다. 계단식 강의실에 수련의들과 저희 학생들이 앉아 있고 잠시 후 교수가 환자와 그 어머니와 함께 들어옵니다. 어머니는 저기 옆으로 가서 앉습니다. 교수가 그 환자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의학 교육의 한 장면입니다. 정신과 환자들의 대답은 엉뚱할 때가 많습니다. 교수가 물어봅니다. “만약 길을 가다가 우체통 옆에 우표가 붙은 편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환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거 청와대로 가는 편지지요?” 이런 문답이 몇 번 오갑니다. 자리에 앉아있는 학생들과 수련의는 킥킥대고 웃습니다. 교수는 차분하게 문답을 계속합니다. 그런가하면 그같은 어뚱한 대답을 들으며 한 옆에서 눈물을 닦아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환자의 어머닙니다. 수십년전의 일이 성경을 보면서 떠올랐습니다.


 


누가복음 13 10절에서 17절을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18년 동안 병마에 시달려 허리가 굽은 채로 지내야 했던 여인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본 회당장이 분개하며 반발하여 무리더러 말합니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그가 그렇게 분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합니다. 이 여자는 이미 18년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단 하루를 더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겠습니까?


어쩌면 회당장뿐아니라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 아니 심지어 그 여자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18년 동안이나 이렇게 지냈는데 뭘.” 회당장은 종교적인 이유로, 다른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그 여자는 포기한 심정으로 말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다음 날 만나서 고쳐주시기로 그 여자와 약속을 하고 그날은 그냥 가르치는 일만 계속하셨더라면 그 여자는 그 하루를 오히려 반신반의 가운데서도 설렘과 기쁨으로 지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었던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에게 떠오른 생각도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18년 동안이나!” 그러나 18년 동안이나 그 여자가 그렇게 고통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다른 이들에게는 거기서 하루를 더 기다린들 무엇이 그리 큰 일이겠느냐는 이유가 되었던 반면, 그에게는 그 꼭같은 사실이 오히려 하루라도 더 기다릴 수 없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이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한때 해방신학이라는 것이 유행이 되다시피 한 적이 있었고 아직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이 공부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제가 받은 인상으로는 해방신학의 이름으로 행해진 운동이 오히려 근본적인 해방에 대한 이해를 약화 내지는 왜곡시킨 면이 있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아마 많은 교회가 자꾸만 근본적인 해방만을 되뇌이면서 인간의 사회 경제적인 질곡을 외면하는데 대한 반발이 작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지 사탄에게 매여 있는 사람들을 예수께서 풀어주신다는 의미에서라면, 또 그런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에서라면 해방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절실한 주제일 것입니다. 그 해방의 시작은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예수의 마음(“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을 본 받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께는 이 여자가 귀한 만치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이 절실하고 그로부터 놓아주는 일이 긴급하게 여겨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열 여덟해 동안이나하는 말씀에는 얼마나 참된 사랑이 담겨있습니까? 여기에서라야 참 개혁(회당장의 안식일에는과 주님의 안식일에라도”)도 나옵니다. 자기 자신과 남을 아브라함의 자녀로 여기는 훈련은 언제나 절실하며 긴급한 일입니다. 그것이 결핍된 순간 종교라는 것이 우리(나 자신을 포함한)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얽어맴을 강화하며 연장시키게 된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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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홍은 1954년생이다. 워싱턴주 벨뷰에서 가정의와 침례교 목사로 일하고 있다. 아내 윤경원과 두 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