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1, 2005 | 삶과 신앙/생활 속의 기독교 윤리
이코스타 2005년 6/7월호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복음과 민족 1
미국에 이민 온 1.5세나 혹은 2세 그리스도인들이 미국 땅에 살면서 꼭 돌아보게 되는 질문이 있다. 미국유학 후 미국에서 취직할지 아니면 한국에 돌아갈 지를 결정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장기적으로 당면하게 될 질문이 있다. 한국 땅에 살면서, 혹은 외국생활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을 제기하면 어떤 사람은 당연한 것을 왜 새삼스럽게 묻느냐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복음의 보편성을 넘어서 쓸데없는 민족주의를 자극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분들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이나 선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느 하나의 입장을 취하게 되면 반드시 논쟁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오랫동안 내가 고민해 온 주제일 뿐 아니라 또 앞으로 내가 사역하고자 하는 방향과도 관계되기에, 독자들도 기존의 선입관을 내려 놓고 기초부터 함께 생각해 수 있기를 바란다.
성경에는 모든 신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한 하나님에 속한 자임을 말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롬 10: 12),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한 마디로 모든 신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이 사실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이 땅에서의 신분이나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란 한 특정 민족을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얻게 될 구원의 한 모델로 선택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 그 특수성은 사라지고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임할 구원의 복음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국가와 민족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국가간의 분쟁이나 이해관계에 있어서 전쟁의 위험을 무릎쓰고 그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는 것인가?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한국인이 된다는 것이나 미국인이 된다는 것이나 일본인이 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 동일한 것이 아닌가?
사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고 나 역시 한 때는 이런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읽다 보면, 미묘한 부분들이 발견된다. 바울은 주안에서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한 바로 그 로마서에서 자신의 민족과 혈육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들을 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2) 그는 얼마나 자신의 동족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하고 있다고 자신의 양심을 걸면서 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로마서 10:1에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나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복음안에서 한 자손임을 믿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골육과 친척에 대한 우선적 책임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당위적 명령이 아니라 바울이 가졌던 애정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곧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구절들을 가지고 ‘민족주의는 성경적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실(IS)에서 당위(OUGHT)를 추론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도 바울이 그랬다는 것은 우리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 수는 있다.
그러면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말하는 직접적인 명령은 없는가? 사실 성경, 특히 신약에서 이 부분에 대한 명시적인 구절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시사해 주는 구절을 찾을 수는 있다. 바울은 과부나 나이 든 부모를 봉양할 우선적 책임이 그 가족과 친족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즉 신자일수록 자기 가족과 친족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이 있으며 더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족과 친족에 대한 의무는 구약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것이다.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 25:25) 즉 형제가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으면, 그의 친척이 그것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심지어 형의 아내가 과부가 될 경우에는 동생이 그 형수와 그 재산을 책임질 의무까지 부여하고 있다(신 25:5-10). 이러한 친족에 대한 의무는 바울의 말을 통해 신약에 와서도 형태는 다소 변해도 신자의 공동체 내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가족이나 친족은 기본적으로 혈연적 관계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만 유효할 뿐 하늘나라에 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제도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결혼제도 자체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천사와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마 22: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족이나 친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땅에서만 유효한 제도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확장하면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민족과 국가는 엄밀히 말하면 동일하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처럼 단일민족 국가에서는 동일시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족과 친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이 있다면, 그 관계가 가족보다는 상대적으로 느슨해 졌을 지라도 민족과 국가도 혈연적 유대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한,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도 우선적 책임을 가진다. 적어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면,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좋든 싫든 한국민으로 살아야 하며 동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여러 사람가운데서 일차적으로 부모를 전도할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동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것은 성경적인 정신이 부합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국가와 개인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각 개인들은 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면 국가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함께 가지는 공동체적 운명을 갖는다. 나는 내가 목회를 하기 전 한 때 철학을 공부하면서, 코넬대에서 박사후 과정으로 집단윤리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 집단윤리의 핵심은, 국가와 같은 집단은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을 넘어선 어떤 공동체이며, 이 집단의 행동에는 그 구성원들 모두가 함께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이나 일본이 이웃나라를 침략했다면 그 집단행동에는 그 나라 모든 국민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으며, 따라서 모든 국민들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행동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국민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에 대해 책임있게 결정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국가 전체적으로 범죄할 때는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징계의 채찍을 그 국가 전체에 함께 내리셨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행동을 했을 때, 비록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40년동안 광야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 유다왕국의 말기에 예레미야나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은 그 자신은 비록 의인이었을지 몰라도 국가 전체적으로 범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도 국가에 대한 징계의 현실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국가 전체의 책임을 묻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경제적 위기나 전쟁의 채찍을 맞는다면, 비록 그 가운데 의인이 있고 참 신앙인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사람도 그 운명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 책임은 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국가적 형벌의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국가와 개인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국가와 민족에 대해 더더욱 우선적 책임감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더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라와 민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니 신앙인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나라와 민족을 보면서 안타까와 하며, 울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인들을 찾고 계신다. 예레미야나 다니엘처럼, 나라와 민족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회개하고 금식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우리 모두 이러한 부름에 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Feb 1, 2005 | 삶과 신앙/생활 속의 기독교 윤리
이코스타 2005년 2월호
희랍신화에 보면 야누스란 신이 나온다. 이 신은 앞과 뒤에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신체적 특성에 맞게 도시나 집의 출입구 등 문을 지키는 수문장 신이 되었다. 그런데 문은 일반적으로 시작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야누스 신은 또한 출발점의 신이라 생각되었고, 신들 가운데 최고의 지위가 주어졌다. 모든 시작은 언제나 그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으로 여겨져서 12개월 가운데 1월은 ‘야누스의 달’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래서 1월은 야누스의 달이라는 의미에서 라틴어로 ‘Januarius’라 불렸고, 여기에서 1월을 의미하는 영어 ‘January’가 나오게 된 것이다.
영어 January처럼,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나 상표 가운데 많은 것들은 희랍신화에 그 기원을 가진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카시오페아, 안드로메다, 오리온 성운 등 모든 별자리 이름들은 희랍신화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희야신스 등 상당수 꽃이름들도 또한 희랍신화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제품이름들도 상당수가 희랍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예를들면, 박카스는 로마신화의 술의 신 박카스(희랍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에서, 무기 가운데 발칸포는 로마신화의 대장장이 신 불카누스(희랍신화에서는 헤파이스토스)에서, 타이탄 트럭은 희랍신화의 힘센 거인족 티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문학작품과 예술작품들이 이 희랍신화에서 그 소재를 빌어오고 있다.
오늘날 희랍과 로마의 신들은 더 이상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현대인들은 희랍신화에 대해 그다지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만 해도 이 종교는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었고, 복음전파에 큰 지장을 주었다. 행 19장에서는 아데미 여신(아르테미스)을 섬기는 에베소 지역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란 사람이 자신들의 신을 경홀히 한다하여 바울을 핍박한 적이 있었다. 또 루스드라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쓰스(제우스 신)와 허메(헤르메스 신)라 하여 섬기고자 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인들이 이 희랍신화에 대해 완전히 경계를 풀 일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러한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1월은 야누스의 달이라 January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것을 성경적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알파요 오메가며 처음과 나중이라고(21:6)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생각하면 야누스가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시작의 신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1월은 야누스의 달이 아니라 예수님의 달이 되어야 한다. 즉 January가 아니라 Jesuary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만 그 언어를 이렇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미적으로는 그렇게 되게 할 수 있다.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하는 달이 된다면 1월은 곧 Jesuary, 즉 예수님의 달이 되는 것이다. 1년 가운데 첫 달인 1월을 맞으면서 이 달이 예수님의 달이 되도록 해보자. 예수님과 함께 시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시작하며, 예수님의 주신 힘으로 시작해보자.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1월은 내용적으로 예수님의 달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1년을 예수님의 달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달로 마칠 수 있도록 해보자.
Dec 1, 2004 | 삶과 신앙/생활 속의 기독교 윤리
이코스타 2004년 12월호
유학생 사회에 있어 보면 유학생들이 겪는 여러 가지 애환들을 목격할 수 있다. 공부에 대한 중압감, 경제적 어려움, 건강상의 문제들, 딸린 가족들에서 생겨나는 어려움들, 공부를 마치고 난 뒤의 진로 문제 등… 이 와중에 사고라도 당한다든가, 논문통과가 안된다든가, 그 학교에서의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옮겨야 된다든가 하는 일들이 생기면 이러한 어려움들은 더욱 가중된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
우리는 극심한 고통가운데 있을 경우에는 이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절망과 탄식으로 자포자기 하거나 혹은 그것을 다른 누구의 탓으로 전가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겸비하게 그것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아는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아는 또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에는 다 뜻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까 하는 이유를 찾다 보니, 그 이유가 단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6가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경우는 어떤 사람의 죄를 회개하게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시는 경우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 그로 하여금 회개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채찍을 주신다(히12:6).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풍랑을 주시고 또 급기야 고기에게 잡아 먹히는 어려움을 당하게 해 주셨다. 바로 그를 회개시키고 다시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과거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학생이 있다. 그는 시험시간에 컨닝을 하다가 적발된 학생이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용서를 구하기에,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먼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므로 일주일 동안 회개기도하고, 나에게도 잘못했으므로 반성문을 써 보내라 그러면 다른 방도를 찾아 보겠다’고 말했다. 그 뒤 반성문을 보내 왔는데, 그 반성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내용인즉, 자기도 평소에 컨닝은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자기 옆에 친구가 책상에 글을 쓰는 것을 보고는 불안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책상에 몇 자 적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보지도 못하고 걸렸고 자기 친구는 보고도 안 걸렸기에 처음에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 옆의 친구는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다음에도 또 똑같은 죄를 지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바로 이러한 처벌 때문에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편지를 보고는 이 학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처벌이 참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죄를 짓고도 처벌당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것을 죄로 알지 못하고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처벌이 있을 때, 죄를 죄로 알게 되고, 그 죄를 회개할 뿐 아니라 고치려고 하게 된다. 나도 교통신호를 어겨 경찰로부터 딱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처벌을 받기 전에는 무심코 행동을 했다가 딱지를 받으면서 부터 ‘이게 잘못이구나, 조심해야 겠구나’하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다.
이처럼 처벌은 죄를 죄로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어려움과 고통을 주신다. 이런 고통의 순간에 사람들은 고통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회개하기 앞서 먼저 그 고통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안된다. 먼저 그 죄를 내어 놓고 하나님앞에 토설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실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유해 주신다.
두 번째 경우는 죄가 전혀 없는데도 그 사람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욥이나 아브라함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욥은 의인이었고 흠이 없었지만,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그의 믿음이 테스트당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상황이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반응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토스카 중에 보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남을 해친 일을 한번도 없소, 제단에 꽃을 바쳤소, 그런데 왜 이리도 어려워야 합니까?’ 라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당신을 위해 많은 것을 했는데 왜 이러한 고통을 주십니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욥처럼 고통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또 아브라함처럼 그 고통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믿음은 바로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그 믿음이 진짜인가 아닌가가 드러난다. 이럴 때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위대한 신앙인이다. 그리고 이 고통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그는 반드시 욥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더 큰 축복을 받을 것이다.
세 번째 경우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하고 큰 능력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그에게는 하나의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이 가시는 늘 바울에게 고통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간혹 어떤 신앙의 가정에 보면 신앙도 좋고, 직장도 좋고, 하는 일도 잘되고, 다 좋은데, 자녀가 문제가 있다든가, 혹은 다른 것은 다 잘 되는데, 어떤 하나가 문제가 되어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가운데는 간혹 그 사람을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문제를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문제가 없다면, 나태해지기 쉽다. 그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의 능력과 힘으로 사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으면 겸손하게 되고 또 기도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그리고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나 보다 하고 감사하면서 나가야 한다.
네 번째 경우는 그 사람을 연단시키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일 정도 걸리는 블레셋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의 길을 40년 동안 가게 하셨다. 신 8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들의 믿음을 연단시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 때로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신다. 욥도 그의 고난 후에 그의 믿음이 더욱 연단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 적어도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이처럼 영적인 연단과 승리를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
어떤 곤충학자가 나비 애벌레가 고치를 깨고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을 보고는, 그 발버둥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칼로 구멍을 내고 쉽게 나오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나비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가 새로이 발견한 것은, 고치를 깨고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바로 그것이 그 나비를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준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지나면서 얻어진 힘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영적 전쟁을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이 된다.
다섯 번째 경우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경우이다.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면서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때문 입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9:3) 그리고 실제로 그를 고쳐 주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셨다. 이 소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는 고난을 겪은 것이다.
때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최근에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이지선 자매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자매는 꽃다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어 전신이 이지러지는 아픔을 겪었다. 어떤 여자분은 쌍꺼풀 수술이 잘못되었다고 자살하기도 하는데, 젊은 여자가 얼굴 뿐 아니라 온 전신이 완전히 이지러졌으니 얼마나 큰 고난이었겠는가? 그러나 이 자매님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그것을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어떤 목사의 설교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큰 감명을 주었다. 이 자매로 인해 고난받는 많은 사람들이 큰 위로를 얻었고, 또 모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고통은 자매에게는 너무도 큰 아픔이었지만,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 우리도 이런 고난을 당한다면 나의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 경우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다. 옛날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 역사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몰수 당하기도 하고, 감옥을 가기도 하고, 급기야는 죽임까지 당한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다. 그야말로 복음과 함께 당하는 고난이다.
우리도 내용과 정도는 다르지만,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다 보면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왕따당하기도 하고, 재정적 손실을 보기도 하고, 승진에 손해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직장에서 쫒겨나기도 하고, 집안에서 학대받기도 하고….
이처럼 믿음을 지키려다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는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상이 그 만큼 크기 때문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려다가 손해를 보고 힘든 고난을 당할 때는, 우리 앞에 놓인 상을 바라 보자, 그러면 고통을 참을 수 있다. 예수님도 장차 다가올 영광을 보고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에는 한가지 만의 상황이 아니라 적어도 여섯가지 경우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대해 각기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욥처럼 그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질책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일 것이다. 반대로 죄를 지어 책망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욥의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위로 한다든가, 믿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처럼 하늘의 복을 운운한다면 이것도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각각의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
물론 성경속에는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여섯가지 가운데 두 세가지가 한꺼번에 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욥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믿음이 더욱 연단되는 결과를 얻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된 까닭은, 그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범죄한 것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면서, 또한 그들을 겸비하게 하고 연단하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고난을 받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너희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약 5:13)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이 경우들 가운데 어떤 것인지가 불확실하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생활이 나태하고 범죄하고 있는데도 그것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고난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낫다. 아무런 고난없이 믿음이 나태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더 큰 축복이기 때문이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 71)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나아갑니다’(찬 503장)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 한가지를 명심하자. 모든 고난에는 뜻이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는 복을 얻게 해 주는 축복의 통로다!
Aug 1, 2004 | 삶과 신앙/생활 속의 기독교 윤리
이코스타 2004년 8월호
내가 알던 어떤 후배 가운데 신앙이 좋은 약사 자매가 한 명 있었다. 그 자매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새로이 약국 일을 시작하기 위해 기존의 다른 약국을 그대로 인수하기로 하고 대금을 치렀다. 마침 그 약국의 전 소유주도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모든 매매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인수인계를 하던 중, 약국과 관련된 업무를 하던 관공서에서 어떤 공무원이 조사를 나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업무가 끝났는데도 가지 않고 계속 서성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자매는 처음 이런 일을 경험하는지라 ‘왜 그럴까’ 하고 의아해 하고 있는데, 전 소유주가 저것은 이른바 떡값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이 자매는 ‘내가 왜 뇌물을 주어야 하냐!’ 하면서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전 소유주가 ‘만일 다니엘처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면,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적당히 돈을 주어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면서 아직도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이 자매를 위해 대신 돈을 집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비단 이 자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일일 것이다. 뇌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막상 세상 속에 들어가 살다보면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고민하던 사람들도 점차 순수성을 포기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게 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뭐니 뭐니 해도 손해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금전상이나 혹은 다른 불이익이 가장 두려운 것이다. 두 번째는 나 하나 잘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느냐 하는 패배의식이다. 세 번째는 오늘 예에서 나온 것과 같은 ‘완벽하지 못할 바에야 적당하게 살자’는 자포자기 의식이다. 나는 특별히 이것을 ‘다니엘 콤플렉스’ 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이것에 대해 좀 말해보고 싶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었던가 하는 것이 잘 소개되어 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해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3-4)
탁월한 업무 능력에 성실성, 그리고 순수성을 겸비한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직장인의 모습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일에 능력이 있으면서도 아무런 흠잡을 일이 없이 정직하고 완벽하게 모든 일을 행하는 이러한 다니엘의 모습이야 말로 모든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 이 다니엘은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잘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다니엘의 훌륭한 모범이 때로는 반대의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은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별종의 사람처럼 인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을 읽으면서, ‘나도 다니엘처럼 살아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 보다는 ‘다니엘이니까 그렇지, 나 같은 사람이야 뭘’ 하는 의식으로 대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이 다니엘의 모범은 나의 삶의 모델이 아니라 거꾸로 나의 현실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앞에서 제시된 자매의 사례는 그것을 단적으로 잘 보여 준다. 그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있어서, 다니엘의 모범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표준이 아니라 거꾸로 그 모든 노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니엘처럼 완벽하게 모든 법과 규범을 지킬 수 없다면, 아예 포기하고 적당히 뇌물을 주면서 살자.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과 타협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의식, 즉 ‘다니엘 콤플렉스’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경험하는 심리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비가 와서 질퍽한 길을 신발이 젖지 않도록 애쓰면서 걷는 사람이 있다. 조심스럽게 걸어왔지만 그러나 곧 한쪽 신발이 진흙 속에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그는 나머지 한쪽이라도 지키려고 하기 보다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일부러 두발을 다 진흙 속에 넣어 버린다. 그러면서 점차 진흙 속에 걸어가는 것을 즐기게 된다. 그와 더불어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흙탕물을 뿌려 억지로 자기처럼 되도록 만들고자 한다.
이것은 많은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점차 세상과 타협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처음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 속에 들어갔을 때는 신자로서 깨끗하게 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곧 일부의 순수성이 무너지면서 자책감에 빠지게 된다. 그와 더불어 ‘에라 모르겠다, 나는 어차피 다니엘처럼 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 속에 오래 있으면서 이제는 그것을 즐기게 되고, 좀 더 심한 경우는 다른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을 보면 억지로라도 자기처럼 만들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점점 세속화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니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완벽하지 못함에 대한 절망이 다른 극단으로 흘러버리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는 다니엘처럼 완벽하게 법을 지키면서도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대다수의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과연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있다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영역을 좀 더 좁혀서 세상의 법과 규범에 한정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다니엘처럼 완벽할 수 없음을 처음부터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 주님도 우리가 완벽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죄를 전혀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지은 죄를 고백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주님이 그것을 이해하고 계신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가 올바로 살도록 노력하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 자포자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삶에의 노력으로 이어지려면, 주님은 우리가 연약한 가운데서도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대하시기 보다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올바로 살도록 노력하는 것을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올바로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네 번째,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그것을 숨기려 하거나 혹은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 절망하지 말고 그것을 회개하고 곧바로 올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의 죄를 짓고 그것을 숨기려고 하면, 그보다 더 큰 죄를 계속 지을 수밖에 없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불륜을 숨기려다 결국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게 하는 더 큰 죄를 짓고야 말았다. 만일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뇌물을 준다거나 다른 부정한 일을 한다면, 그는 그것이 또 다른 올무가 되어 점점 더 개미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더 큰 죄로 이어지기 전에 그 죄를 회개하고, 때로는 법적인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볼 때 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를 하면 그를 다시 받아들이려는 수용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가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솔직히 고백하기 보다는 그것을 숨기려고 계속 다른 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고백했을 때 오게 될 비난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간혹 언론에 어떤 사람의 과실이나 범법사실이 알려지면, 지나칠 정도로 그 사람에 대한 극심한 돌팔매질이 이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과실이 언론에 공개된 후 거의 사회적으로 매장되다 시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 잘못을 숨기려고 제 2, 제 3의 범죄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잘못을 보았을 때, 정말 습관적이고도 악의적인 범죄가 아니라 실수에 의한 것일 때는 그 죄는 미워하고 분별하되, 나도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사람들 가운데는 100가지 일 가운데서 99가지 일을 다 잘 하다가 한 가지를 잘못해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 100가지 가운데서 10가지의 잘못을 저지르고도 알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10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1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그러므로 내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면 다른 사람의 완벽하지 못함에 대해서도 다소 이해심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나는 기독교세계관을 비교적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성경말씀대로 올바로 살려고 노력해 왔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그것을 완벽하게 다 지킬 수 없음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도리어 그것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로마서의 말씀과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일수록 ‘고백록’이니 ‘참회록’이니 하는 책들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연약함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길은, ‘all or nothing’식의 다니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서 연약함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일 것이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함이 나타날 때에는, 그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그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이런 자세로 임한다면, 좀 더 이해심 있으면서도 함께 밝아지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May 1, 2004 | 삶과 신앙/생활 속의 기독교 윤리
이코스타 2004년 5월호
사회이론 가운데는 유기적 조화를 중시하는 이론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대립과 투쟁을 중시하는 이론이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전자의 전형적인 예라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이 후자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조화는 사회적 안정과 효율성을 가져다 주는 장점이 있지만, 때로는 사회의 문제가 있어도 그냥 덮어주게 되어 발전의 가능성이 약해진다. 반대로 대립과 투쟁은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개혁하는데는 강점이 있지만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든다. 이것은 개인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과의 인화성과 관계성을 중시하면 그의 잘못에 대해서도 그냥 덮어두고 지나치기 쉽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다 보면 그의 문제를 고치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와의 관계는 나빠지기 쉽다. 혹은 심한 경우에는 문제를 고치기는커녕 분쟁과 감정다툼만을 일으켜 상태가 더 악화되는 수도 있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관계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덕을 세우는 비판이 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떠한 잘못을 지적할 때 그 내용만 고려하기 쉽다. 나는 진리를 선포했으니 당신은 알아서 들으라는 식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이유는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한 정확한 지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잘못을 고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그 내용의 잘잘못 이외에도 몇가지 다른 요소들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what)을, 어떻게(how), 왜(why) 지적하느냐 하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동일한 내용도 이러한 요소들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어떤 잘못을 지적할 때 ‘누가’ 그것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적으로 권위가 있고 그 삶이 성경적으로 인정되는 사람이 그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그 자신의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 들이는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간혹 목사님들 가운데는 교회의 잘못에 대한 지적에 대해 마음을 닫아 버리는 분들이 있는데(물론 이러한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이유 가운데는 그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다. 교회 내에서 별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교회에 별로 기여하는 바도 없는 사람들이 뒤에서 교회가 하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그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비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비판이 얄밉게 보일 것이다.
또 간혹 교회가 썩었다고 떠드는 사람가운데는 그 자신이 바로 교회를 썩게 한 장본인인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남의 잘못을 지적한답시고 뭐라고 떠들 때 주님이나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그러므로 단순한 선포를 위한 비판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잘못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을 지적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영적 자질 향상은 물론이고 교회를 위해 먼저 봉사와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사랑 어린 지적과 조언을 할 때 그들의 지적은 더 의미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 덕을 세우는 지적이 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요소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 잘못을 지적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동일한 내용도 언제 그것을 말하느냐에 따라 분명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상대방이 한창 화가 나 있다거나 다른 문제로 한창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는 아무리 그 내용이 옳고 진실한 마음으로 말했더라도 그 지적은 좋은 결과를 얻기가 힘들 것이다. 오히려 그 좋은 충고가 역효과만 낳게 될 수도 있다.
예수님도 한창 흥분된 마음으로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 ‘이 여자를 돌로 치리이까’ 하고 물어 온 군중들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대답없이 땅바닥에 글만 쓰셨다. 아마도 그 상황에서 말한 대답은 그들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흥분이 다소 가라앉았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고, 그 말씀은 큰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어떤 잘못을 지적하고자 할 때는 언제 그 말을 해야 할 것인가를 잘 분별해야 한다. 주식을 사고 팔 때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하지 않는가!
3. 어떤 ‘장소’에서 그 잘못을 지적할 것인가 하는 점도 때로 대단히 중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개인적 잘못을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혜로운 행동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공동체의 문제점을 공동체 내에서는 지적하지 않다가 다른 모임에 가서 수근수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또 남편이나 아내의 잘못을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크게 꾸짖는 것도 남편이나 아내의 권위, 그리고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없다.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조용히 만나 말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것은 그 문제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갈 2장 11절에 따르면, 바울은 대사도인 베드로가 외식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다. 이것은 베드로의 외식으로 인해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행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개인적인 문제를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부부간의 잘못에 대해서는 밤에 잠자리에 들어 부드럽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서로간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을 구한다면 가장 효과가 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므로 그 시간과 장소를 잘 선택하는 것도 덕을 세우는 지적이 되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들이다.
4. ‘무엇’을 지적할 것인가 하는 점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그 지적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인지를 여러 가지로 객관적으로 검증해 보아야 한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어떤 일에 대한 평가나 해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공적인 문제제기를 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사람들의 객관적 검증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한쪽의 관점만을 고수한다든가 혹은 소수의견에 의한 마녀사냥을 하게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이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때는 그 경중과 또 당시 상황을 다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 부정적인 측면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것 때문에 전체를 비판한다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될 경우에는 지엽적인 것은 버려두고 가장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것저것 다 건드리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희석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5. 어떤 잘못의 지적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말로 할 것인가 아니면 글로 할 것인가? 언론매체를 동원해 공개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교계 내에서만 알 수 있도록 교계의 채널을 이용할 것인가? 팻말이나 플랭카드를 사용하는 시위적 방법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기도를 통한 영적 방법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방법들을 동시에 사용할 것인가? 이 역시 문제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날 것이다.
일반적으로 글보다는 말이 더 직접적이기 때문에 그 상대방에 전달되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글로 문서화되는 것이 더 장기적으로 더 큰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또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같은 가까운 분들의 문제점을 직접 말로 표현하기 힘들 때는 편지를 씀으로써 큰 효과를 얻은 경우들도 있다. 그러므로 사안에 따라서 적절한 방법을 잘 선택해야 한다.
또 말이나 글로 표현할 때, 표현의 방식이나 표현의 강도도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잘 선택해야 한다. 어떤 내용을 농담조나 냉소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무리 중요한 내용이라도 좋은 결과를 내기 힘들 것이다. 반대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나치게 일방적이고도 높은 강도로 정죄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완전한 굴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 의도와는 반대로,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 그럴 경우,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키거나(강한 성격의 소유자) 아니면 그 사람을 극심한 스트레스와 절망속(여린 성격의 소유자)으로 집어 넣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표현의 강도와 방식도 적절히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기도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거기에는 사랑과 기도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잘못을 지적하고자 하는 그 대상들을 위한 기도가 없다면 이는 성경적인 방식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와 교회의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서는 더욱 기도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6. 성경적 지적을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왜’ 라는 요소이다. 왜냐하면 어떤 잘못을 지적하는 동기와 태도야 말로 그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더구나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만일 사랑으로 하지 않는다면 분명 그들을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공격형 비판은 비판하는 사람에게 자기만족과 스트레스 해소를 가져다 줄지는 모르나 결코 비판받는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 없다. 설령 그 내용이 진리라 하더라도 그 사랑이 없는 진리는 형제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많은 비판들이 이러한 사랑의 동기가 없음으로 인해 덕을 세우기 보다는 결과적으로 분쟁과 반발만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흔히 목도하는 일이다. 특히 스스로 입바른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엇이 옳으냐 하는 것에만 치중함으로써 도리어 덕을 세우기 보다는 다툼과 분쟁만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한국교회를 개혁하려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다.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은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아파하면서 자기의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그러한 비판을 해야 한다.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은 마치 그 부패한 교회의 밖에 있는 의로운 선지자인양 자처한다면 이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나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면서도 그 민족의 죄를 바로 자신의 죄로 알고 금식하면서 회개하였다. 그들은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정직한 자신을 부패한 이스라엘 민족과 동화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어떤 잘못의 지적이 성경적인 것이 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과거 여러 교회들에서 기독교세계관을 강의하면서 교회나 사람들의 잘못들을 많이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주님께서는 그러한 나의 지적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셨다. 그 때 깨달은 말씀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고전13:1) 라는 말씀이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외치는 천사의 말일찌라도 아무런 의미없는 소음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만일 그것이 진정 사랑의 동기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면, 함부로 남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자. 우리가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유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을 고치게 하는데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잘못을 지적받는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자.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이를 수용하고 고칠 수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더구나 상대방이 위에서 말한 6가지 요소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비판해 올 때도 겸허히 그것을 수용하고 자신을 고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다. 만일 별로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 대중 앞에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비판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그 자신을 고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공개석상에서 새까만 후배인 바울에게 책망을 받고도 그것을 겸허히 수용했던 베드로야말로 진정한 위대한 신앙인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