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총] 묵상 몇점

이코스타 2003년 11월

讀者前 上書


잘 지내고 계신지요?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그렇듯 늘 만사형통하지는 않아도 세상이 줄 수도 살 수도 없는 그 평강으로 인해 안녕(安寧)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곳 토론토에서 아홉 번째 안편지(內簡)를 드리는군요. 요 몇 달 새 제 영혼 안팎의 풍경들과 어우러진 묵상 몇 점을 그려내 보도록 하지요.


전태일은 과연 자살하였는가?


아, 이 어쩐 일인가. 생활고를 비관한 주부의 투신부터 현대 정몽헌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까지 조국에서 들려오는 도미노 식 자살 소식은 탄식을 절로 나오게 한다. 가히 자살공화국이라 할 만 하다. 혹자는 정몽헌 씨가 자신과 회사 안팎에 얽힌 문제들을 다 끌어안고 간 점 때문에 그 아버지인 정주영 씨로부터 시작된 현대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일종의 영웅비극에 비하기도 하고, 나아가 어떤 이는 우리 사회에 자살이 영웅시된 것으로 전태일의 분신을 예로 거들먹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전태일의 경우는 자살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세상의 무게에 굴복하고 허무에 몸을 내어맡긴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 것에 가깝다. 바울의 예리한 통찰처럼 사랑이 없이 그렇게 하는 이들도 많다. 이를테면 영웅심에서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보다 더 지극한 한국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도 알고 보면, 정신적으로 자식과 미분화된 상태에서 자식을 통해 정체성을 획득하고 자기실현을 해보려는 이상야릇한 심리적 병폐에 기초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태일은 그의 일기나 삶이 증언하듯이 사랑으로 자기 몸을 불사른 경우이다. 그것은 근본/복음주의자들이 쉽게 내뱉듯 조물주가 준 삶을 자기 맘대로 내팽개친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그의 분신(焚身)은 그와 동료 노동자들이 처해 있던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 겪어보지 않은 이라면 어림하기도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농담(濃淡)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고 말도 안 되는 불의한 상황을 고발하는 강렬한 몸짓인 것이다. 물론 혹자는 그러한 공의와 사랑에 대한 강렬함을 꺼뜨리지 말고 묵묵히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면서–비록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 일 뿐이고 전혀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애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참한 노예 노릇 중에 부르짖었어도 하나님은 모세가 태어나고 준비되기까지 80년을 그 상태로 두셨듯이 주께서 더디게 역사하시는 것을 오래 참고 기다려야지 인간적으로 너무 서두른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여지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자살을 했으니 당연히 지옥행이라고 입빠르게 단죄하기 보다는, 극한의 상황에서 저지른 방법적 실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를 향한 그의 중심을 헤아리셨을 것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복음주의자들은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반성하기보다는 정죄하기에 재빠른 족속들이라는 점이다. 전태일의 지옥행을 당연시하기 전에 지옥에 있을-만약 그들의 생각대로 됐다면-그와는 견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희박한 소자(이 사회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낱 별 볼 일 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공의에 대한 갈증을 참회하는 것이 마땅한 순서가 아닐까?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다면 결단코 천국에 가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놓고 두려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닐까? 이럴 때에만큼은 전태일은 혁명가가 아니라 기독교인이었다고 발뺌할 것인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목회적, 실천적 외연(外延)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내가 몸담은 종파, 교단에서 아무리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심으셨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속한 종파와 교단의 장점을 자랑스러워하며 그것을 잘 살려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우주적인 차원에서-를 기름지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교회도 완전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다양한 교회를 주셨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준이단이니, 기독교장로회 교회의 목사들은 다 정치꾼이고 심하게는 빨갱이라는 식으로 욕하던 것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도리어 우리가 허약했던 부분인, 영성과 실천을 두 교회가 보완해왔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 근본/복음주의는 고개 들어 다른 종파와 교단을 보고 고개 숙여 배우지 안 된다. 알만한 사람은 1200만 성도라는 치수가 잔뜩 부풀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90년 이후로 한국교회 역시 서구교회처럼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알고 있다. 이곳 토론토의 아름다운 예배당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고급 콘도나 도서관으로 개조되는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정통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는’근거 없는 자만에 의한 뿌리 깊은 배타성부터 내려놓고 허리를 동여 다른 자매(혹은 형제) 교회를 향해 가르침을 베풀어 주소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갈가리 찢어진 교회가 하나 되는 길은 그저 나보나 남을 더 낫게 여기라는 단순명료한 말씀을 교회 차원에서 실천하는 것에 있다.


근본/복음주의가 다른 자매 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허다하다. 예를 들어 산업화된 나라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소비문화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건만 근본/복음주의권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자신이 처한 시대의 영과 싸워야 함을 가르치는 기독교세계관을 논의하면서 이 부분을 다루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복음주의권에서는 로날드 사이더와 리차드 포스터 등이 단순한 삶에 역설하기는 했지만 탁월한 논의는 단연 가톨릭 측이 돋보인다. 소비문화사회에서 그리스도 따라가기(Following Christ in a Consumer Society)를 쓴 존 카바놔(John Kavanaugh)나 장 바니에와 헨리 나웬의 뒤를 이어 토론토의 영성을 지켜가고 있는 메리 조 레디(Mary Jo Leddy)를 읽어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문익환 목사님이 두루마리를 입고 마치 남북을 다 끌어안을 듯 두 팔을 넓게 벌려 강연을 하는 그림이 깔려있다. 오지랖 넓은 해민이는 압바 공부하는 거 간섭하려고 내 곁에 왔다가 문목의 사진을 볼 적마다”압바, 무니칸 목짜님!”하면서 뭘 안다는 듯이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마다 나는 내놓으라 하는 교계 목사님들이 네 살배기 아해보다 속이 좁아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얘기가 잠시 딴 곳으로 샌 것 같다. 토론토의 살림살이로 돌아가도록 하자.


꽃에 얽힌 옛날이야기


전번에 저희가 방갈로(작은 단층 주택)로 이사 왔다는 얘기까지 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집 얘기를 드리는 것에 앞서 옛적에 저희 집에 살았던 사랑스러운 두 사람에 대해 얘기할까 합니다.


옛날 토론토의 한 오두막에 한 남자와 그의 엄마가 정겹게 살았더랬습니다. 그 어머니는 꽃을 무척 사랑해서 그의 정원을 갖은 화초로 에웠습니다. 초춘(初春)부터 만추(晩秋)까지 꽃이 끊어지지 않고 쉬임없이 피도록 살뜰한 배려 하에 갖가지 여러해살이 꽃(perennial)을 정원 곳곳에 심어두었습니다. 그 결과 이른 봄이면 수선화와 튤립으로부터 시작해서 포도 히야신스와 시베리안 스퀼이 차례로 피어나고 늦봄에는 붓꽃이 뒤를 이어줍니다. 여름으로 들어서면 화려하기 그지 없는 작약과 샛노오란 중국 나리가 뜰을 가득 채워주고, 장미와 프록스는 여름 내내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가을로 접어들면 집 옆과 앞을 두른 국화가 추정(秋情)을 돋워줄 겁니다. 새들도 이집 뒤뜰을 좋아해서 모이를 뿌려놓으면 참새와 홍관조(cardinal), 어치(bluejay) 등이 와서 지저귀는데, 한 번은 일흔 두 마리의 참새가 동시에 왔다 간 적도 있다고 하네요. 지렁이와 달팽이 및 민달팽이 등은 정원의 터줏대감들이고, 청설모와 미국너구리 같은 짐승들과 나비, 꿀벌, 무당벌레, 메뚜기, 풍뎅이, 잠자리 따위의 벌레들은 뒷마당에 자주 마을 오는 손님들입니다.


그 남자의 엄마는 오래 전에 하늘나라로 갔고, 그 남자 역시 늙고 병들어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와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우리 옆집의 짐 할아버지가 얼마 전 그 엄마가 심었던 오십 년 된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요양소를 찾아가서 이번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정원을 잘 가꾸고 있다고 전했더니 아주 좋아했다고 하는군요. 그 얘기를 들으니 왠지 코끝이 찡해지며 그 분을 한 번은 꼭 만나 뵈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그 두 사람이 그토록 정성스레 가꾸어놓은 꽃밭을 더 가멸게 하기 위해 우리는 구석구석 빈 공간에 씨를 더 뿌렸습니다. 눈을 위해서는 나팔꽃과 해바라기, 코스모스, 금송화를 심어 꽃물결을 한결 더 일렁이게 하였고, 코를 위해서는 타임과 민트, 버질 등의 허브를 키워 영혼에 닿도록까지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기도 합니다. 입을 위해서는 세 종류의 토마토와 오이, 상추, 노랑피망을 가꾸어 우리 식탁도 맛나게 하고 이웃들과도 나누어 먹습니다. 참, 그리고 늦가을걷이를 위해 이틀 전 배추와 알타리무도 심었습니다. 이번 참에 뒤뜰에 살고 있는 관목과 꽃, 허브와 채소를 찬찬히 다 세어보니 무려 47가지나 되더군요.


꽃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도 있듯이 공부는 뒷전에 두고(^^) 꽃밭만을 지성으로 돌보고 살폈더니 이제는 공부를 하다가 뒤뜰로 나와 둘러보자면 오감이 다 흐뭇합니다. 이웃들은 이웃들대로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면서 뒤뜰에 있는 저를 볼 때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뜰을 갖게 되어 행운이라며 이웃 모두의 정원이니 잘 가꾸어달라고 약간은 엄포가 담긴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노오란 해바라기와 보랏빛 나팔꽃이 어우러지는 요즈음에는 옆집 짐 할아버지와 매일 같은 시각에 개를 몰고 나오는 미셸과 켄 부부로부터 이 동네에서 가장 예쁜 정원이란 칭찬을 듣기도 했지요. 이웃들이 우리집을 지나가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그래서 밭일이 이웃사랑의 한 실천이 될 수 있다면 앞으로도 곱게 가꾸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해민이 역시 농사꾼인 제 아빠(해민 왈, “압바, 또 농사지으러 가?”)를 거들다 보니 지렁이나 민달팽이, 쥐며느리 등을 아무렇기도 않게 손에 올려놓고는 장난을 칠 정도로 흙과 친해졌습니다.


손에 초록물이 들도록 텃밭을 가꾼 다음 땀과 흙으로 버무려진 몸을 뜨거운 욕조에 담그는 것은 제가 이곳에서 누리는 가장 큰 호사입니다. 해민이도 뒤질세라 압바 뒤를 따라 장난감 배를 안고 욕조에 텀벙 뛰어듭니다. 둘은 물고기 배에 들어간 요나, 바다 위를 건너신 예수님, 폭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등의 성경 이야기를 구현하며 그렇게 놉니다.



죽음의 소식이 두 번 나를 두드렸을 때


지 난 오월 초부터 유월 초까지 한 달간 나는 아끼는 세 사람을 잃었다. 날벼락 같던 두 건의 사고 소식은 내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오월 초에는 한국에서 같은 교회의 절친한 지체였다가 캘거리 근교로 이민 간지 정확히 1년 만에 송문규 형과 그 아들 시온이가 맞은편에서 중앙선을 침범한 차량에 의해 소천(召天)했고, 한국에서 개척교회 시절 아끼는 제자였던 기한이는 유월 초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홀아버지와 누나만을 남겨 놓고 우리 곁을 떠났다.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흐느끼다가 눈물을 씻기 위해 겨우 캘거리에는 다녀왔지만 한국에는 다녀올 수가 없었다. 이름 있는 백댄서였던 기한이를 위해 평소 절친했던 가수 채리나 양이 강타를 비롯한 여러 후배 가수들을 모아 추모공연을 열어 수익금을 가난한 기한이네 가족에게 건넸다고 하는 소식을 들으니 연예인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누가 죽음에 대한 슬픔은 겪을수록 익숙해진다고 했던가! 죽음의 소식은 결코 낯익을 수 없는 존재이며, 그것이 내 영혼을 자주 두드릴수록 놀람과 아픔의 파동도 강렬해진다. 해민이가 내 곁에 앉아 장난을 치며 얄밉도록 사랑스럽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시온이를 잃은 경아 누나의 아픔을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런 자식을 말도 안 되는 사고로 잃어버린 가슴은 대체 얼마나 갈가리 피눈물로 엉겨 있을까!


이번 일로 너무 놀랐던 것일까. 이제까지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면서 오로지 연민만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공포가 느껴졌다. 연민과 공포는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감정일 것 같지만 고전적인 미학범주론에 의하면 그것은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비극 관람 중에 극중 타자의 불행을 접하면서 도출되는 감정인 점에서는 양자가 공히 일치하지만 그러한 재앙이 내게는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면 연민이, 내게도 그런 일이 덤벼들 수 있다고 느끼게 되면 공포의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사실 이번 일을 겪지 전까지는 하나님이 나를 그런 식으로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이 있었다. 안해와의 연애시절, 걸핏하면 헤어지자고 하는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안해가 보는 앞에서 자동차가 질주하는 6차선 도로를 눈 딱 감고 지나가는 호기를 부린 것도 다 그런 믿음 아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닫는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나를 그런 방식으로 불러올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조금은 나이를 먹은 것일까. 몇 년 전부터는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시나브로 내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실까 물으신다면 흔쾌히 “예”할 수 있다. 그것은 삶이 유난히 힘겹거나 유학생활이 고달파서가 아니다. 내남이 인정하듯이 나처럼 삶을 즐기면서 사는 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감, 즉 내가 지고가고 있는 이 십자가의 중량을 차차 실감해가면서 그만큼 더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남은 가족의 슬픔을 생각하면, 더구나 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안해의 말을 떠올리면 지금 죽어서는 안 되겠다 싶지만, 인지상정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문규형을 생각하면 축구를 좋아해서 그 긴 다리로 즐거이 축구장을 누비던 모습. 내가 골을 넣을 수 있게 패스해주고는 “어시스트 멋졌지!” 하며 해맑게 웃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서로의 집이 수원과 성남으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가끔 마실가서 밤늦도록 놀면서 얘기꽃 피우던 일들도 모락모락 피어난다. 이 둔한 사람이 지금에서야 깨닫는 것이지만 한국에 있을 때부터 문규형이 나를 얼마나 아꼈던가! 병상에 누워 있는 경아 누나의 첫마디가 “우리 문규씨가 총이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지?”였으니 말이다. 형은 캘거리 근교에서 학업을 하면서도 틈틈이 가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을 생활비에 보태라며 내게 보내주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자주 “총이보다 더 잘 살질 못하는 것 같다”고 하며 늘 자신을 채찍질했다고 하니 그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하물며 형과 함께 하늘나라에 간 시온이, 해민이에게 친구의 대명사였던 그 아이에 대해서는 지금 무슨 말을 더 쓸 수 있으랴.


기한이의 경우도 나를 한없이 가라앉게 한다. 기한이는 홀아버지 아래에서 사랑에 주리며 자라나 조금만 잘해줘도 곧잘 감동을 받고 하던 녀석이었다. 단비교회에 발을 들이고 지체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진한 사랑을 맛보았으리라. 특히 녀석은 춤꾼이 되고 싶어했지만 기존 교회에서 곱게 보지 않는 점을 늘 부담스러워했었다. 나는 기한이에게 사람들의 갈채 앞에서 춤추더라도 그 중심만큼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춤추면 된다고 격려하면서 낮은울타리의 성준형에게 부탁해 당시 랩과 댄스를 곁들인 CCM으로 인기를 모으던 dc Talk(현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얼터너티브 락 밴드로 활동 중)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주기도 하고 춤과 음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전통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제이, 유승준 등의 백댄서로서 제법 인기를 모으기도 하며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춤을 추던 녀석은 오토바이 사고로 우리를 두고 떠났다. 지금 그 누나로부터 기한이가 단비교회에 다니던 시절을 제일 행복했었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미어진다.


이제는 두 사람과의 별리(別離)를 인정해야 한다. 영겁을 살 우리이기에 이별이 비록 찰나라 하더라도 분명 두 사람은 내 곁에 없다. 문득 볼프강 보르헤르트가 이 시대의 우리를 ‘이별 없는 세대'(Generation ohne Abschied)라고 했던 것이 떠오른다. 참된 ‘만남’이 없으므로 ‘이별’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말이지 이별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문규형, 기한이와 이별할 만한 ‘해후’를 가졌었는가? 다행히 그렇다.


작별을 맛본지 두세 달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간혹 슬픔이 토할 듯이 울컥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에라도 시온이와 문규형이 지금 이 시각 낙원에서, 우리집 냉장고에 붙어 있는 사진에서처럼 환히 웃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이없는 위로가 된다. “예수는 몸소 하나님 나라”라고 한 초대 교부 오리게네스로부터 게할더스 보스, 헤르만 리델보스, 조지 래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나라에 대한 수다한 논의를 접해왔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살아왔지만, 그 모든 신학적 논의에 앞서 그저 천국이 있다는 ‘그토록’ 단순한 사실에 대한 해민이 차원의 믿음이 ‘이토록’ 큰 의미가 된다는 것을 이번 일을 겪기 전까지는 잘 몰랐다. 반대로 제자였던 기한이에게 분명한 회심의 체험이 없었다는 점과 단비교회가 없어진 뒤로는 교회와 떨어져 생활했던 것을 감안해볼 때 그가 구원받았을까 하는 불안감은 계속 내 영혼의 평안을 갉아먹는다. 부디 이 불안감이라는 것이 내가 회심의 체험 및 중생의 확신을 강조하는 근본주의/복음주의의 구원관에만 익숙한 연유이기를 바랄 뿐이다.


성인력(聖引力)


뒤 뜰 얘기로 시작했으니 수미상관법에 따라 뒤뜰에서 바람 쐬는 얘기로 글을 맺을까 한다. 가끔 저녁을 먹고 뒤뜰에 펴놓은 의자에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 느긋하게 시원한 저녁 바람을 쐬며 편안한 웃음을 나누곤 하는데 그 시간이 참 좋다. 살랑살랑 이는 바람을 맞고 있으면 이 바람이 어디서부터 왔을까 생각해본다. 북경 시내를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서는 거대한 폭풍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바람이 한국에서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일본의 호시노 도미히로 선생의 글에 홍순관 님이 곡을 붙인 노래가 생각난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무에 일면 녹색바람이 되고, 꽃을 보듬고 가면 꽃바람이 되건만 방금 나를 지나간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라는 노래다. 나 역시 예수에게 생명을 받았으니 적어도 주를 만나기 전 죽은 사람이었을 때 마냥 시체 썩는 냄새는 나지 않을 것이다. 그치만 샤론의 꽃내음이 나야 할 텐데 여전히 죄 냄새나 풍기고 다니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물도 매한가지다. 물은 무형(無形), 무색(無色), 무취(無臭)하지만 물이 풀에 들면 풀물이 되고 꽃에 들면 꽃물이 되고 시내에 들면 시냇물이 된다. 예수님에게 들면 생명을 담뿍 머금은 목마르지 않게 할 생명수가 되련만 내게 들면 ‘속물’이 되지는 않는지, 죄 썩은 물이 고인 고약한 침전수가 되는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래도 요즘 뒤뜰에 퇴비를 만들면서 기쁨으로 깨달아가고 있는 것은, 지금은 악취가 나고 파리가 들끓는 썩은 잡초, 음식 쓰레기 등도 시간이 지나면 기름진 두엄으로 변하듯이 한 때 냄새가 나서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나 같은 사람도 나중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가멸찬 두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뒤뜰에 앉아 모여드는 새와 나비를 보자면 중세 가톨릭의 영성가인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of Bingen)의 명구(名句)가 생각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의 글에 곡을 부친 사뭇 신비적인 음반을 듣고 있는데, 그가 한 번은 “거룩한 사람은 땅의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는 정말 인상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리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도 인력이 작용해서 거룩함이 남다른 이는 다른 존재들을 흡입하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나는 그것을 성인력(聖引力)이라 부른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받음직하게 살았던 때에는 사람들이 내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이 세상에서 대체 누가 나를 미워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때에는 나와 사귐을 갖는 이들이 내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안의 주님께로 이끌리는 것을 나부터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이 조금은 남아 있어서인가. 지금도 많은 경우 사람들은 나와 우리 가족을 가까이 할뿐더러 선대하고 귀히 여기며 아낌없이 자기의 것을 베풀어주기까지 한다.


성인력은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성 프란체스코에게 새들이 친근하게 날아든 것처럼 사람을 두려워하는 피조물조차도 거룩한 사람은 알아보고 모여든다. 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보암직하게 살았던 때에는 나비와 잠자리까지도 나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디에선가 날아온 곱디고운 나비의 날개를 가까이 보고 싶어서 주님께 달아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아무리 바싹 얼굴을 들이밀고 보아도 나비는 미동도 하지 않고 풀잎 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자리와 입맞추고 싶어서 묘목을 지탱하는 말뚝 위에서 내려앉은 한 마리에게 다가가 입술을 내밀면 그 잠자리는 내가 뽀뽀하는 동안에는 물론, 입맞춤을 받고도 한참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초록으로 보이는 듯 여치나 무당벌레 등이 날아와 내 몸에 앉은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내가 예전처럼 임재의 우산 속에 그 분과 나란히 걷지 않기 때문일까? 뒤뜰에 이만큼 모이를 자주 주었으면 동네 새들이 타성에 젖어서라도 느긋해질 법 한데, 내가 인기척만 내면 소스라치듯 놀라 달아난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토론토에서는 좀처럼 나무들과 얘기를 하지 못해서 나무들이 나를 꺼려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조금은 우울해지곤 한다. 더욱이 뒤뜰에서 일하다가 토마토 열매를 크게 보기 위해 아래에 붙은 잔잎을 따주거나 주위에 돋은 성가신 잡초를 뽑거나 하면 여전히 팔 안쪽으로 풀독이 올라 가려운 것도 속상한 대목이다. 물론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를 적으로 보고 독을 내뿜는 것이야 풀들에게 있어서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마는 아무튼 이런 일들이 바로 요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나의 이러한 경험에서도 확인되듯이 땅이 악인을 토해낸다는 성경의 말마따나 거룩하지 않은 이는 확실히 피조물과 평화롭게 살 수 없는 법인가 보다. “잠시 산이 나로 꽉 차 있다”고 한 신대철 시인처럼 내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꽉 차 있을 뿐 아니라 바람과 흙과 나비와 새도 나로 꽉 차 있는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순 없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요즘 내게 회복에 대한 세 가지 간구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을 썼던 로렌스 형제처럼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선명한 임재 의식 속에서 그 분과 행복하기 이를 데 없던 사귐을 나누었던, 도무지 말로는 표현할 길 없는 예전의 그 기쁨과 평안을 회복하고자 하는 기도이다. 그때에는 이 죄 많은 세상을 보며 근심하시던 주님께서 얼마나 내 안에서 쉬시기를 즐거워하셨으며 그로 인해 노을빛 물결이 내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출렁였었던가! 하나님이 가장 머물기 좋아하는 장소는 사람의 가슴속이란 말을 그때처럼 체휼한 적도 없었다. 둘째는 우리 안해를 하루라도 기쁘게 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밀월일기 시절처럼 안해를 철없이 눈멀게 사랑하고자 하는 기원이다. 내가 안해를 그토록 살갑고도 애틋하게 사랑했을 때 내 영혼이 얼마나 날아갈 듯 사뿐했던가. 길가의 꽃들조차 순순히 내 손에 꺾이기를 다투어 바라고 안해에게 안겨지기를 사모하지 않았던가! 셋째는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잊지 않고 내가 스쳐 지나치는 모든 이웃을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전철을 타면 건너편에 앉아 졸고 있는 이이도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 날카로운 눈매가 좀체 가까이 하기 어려워 보이는 저이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 이유 없이 나를 무시하는 듯한 얼굴로 쳐다봤던 그 사람도 내가 품고 사랑해야 할 사람임을 되새겼던 그 때의 그 눈길을 회복하고 싶다. 주위의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화나게 해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떠올렸던 그때의 그 마음을 되찾고 싶다.

[박총] 제로섬 게임이냐 윈윈 전략이냐

이코스타 2003년 10월


가을걷이철입니다. 한국은 올 여름 내내 비가 잦고 또 태풍의 피해도 커서 흉년이 될 거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접하는 소식마다 단조(短調, minor)풍의 우울한 얘기가 많아 한국에서 하듯 거의 매일 같이 조국 걱정을 합니다.


저 희집 올 농사는 풍작이었습니다. 특히 토마토, 방울토마토, 오이는 풍성한 소출로 제법 많은 교회 식구들 및 동네 이웃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내년 농사를 위해 지금은 한창 씨앗을 받고 있습니다. 해민이랑 하얀 편지 봉투에다가 나팔꽃, 금송화, 토마토, 해바라기, 코스모스 등의 씨를 모아서 이 또한 원하는 이웃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참, 그리고 뒤뜰 베란다에 널어둔 박하(薄荷, peppermint)도 거의 다 말라갑니다. 건조가 끝나면 박하잎을 가루로 만들어 예쁜 통에다가 담아둔 다음 겨우내 따뜻한 박하차를 마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즐겁습니다. 몸만 가까이 있다면 오셔서 차 한 잔 함께 들자고 하고 싶습니다.


이 곳 온타리오주는 동성결혼 합법화 문제로 한창 시끄럽습니다. 이번 달에는 동성애 얘기로부터 시작해 윈윈 전략에 관해 쓴 다음, 공포와 사랑에 관한 글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뜬금없이 웬 윈윈 전략이냐구요? 읽어보시면 알 겁니다.^^


동성애자 친구 만들기


그 러보니 벌써 11년 전의 일이다. 대학교 3학년 때 학교 후문 쪽에서 자취를 하는 후배네 집에 하룻밤 묵으러 갔다가 일종의 문화 충격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는 너무나 놀란 적이 있다. 내가 이미 잠든 줄로 안 후배는 같은 과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이런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괜찮았지? 걔네 부모님이 다 여행가셨잖아. 그래서 남자애들 셋이랑 여자애들 셋이랑 모여서 놀았지. 나는 그 기집애랑 잤는데 처음엔 흥분이 안 되는 거야. 근데 걔가 빨아줘서 겨우 세웠지. 난 여자애들하고 노는 것보다 남자애들이 더 나아.”


겨 우 스무 살이 갓 넘은 아이들이, 그것도 매일 학교에서 부딪히는 후배 녀석들이, 게다가 버젓이 교회를 다닌다는 놈들이 그렇게 성적으로 추접하다는 사실에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말로만 듣던 동성애자가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놀란 가슴을 수습하며 그 후배를 위해 기도하던 나는, 다음날 아침에 기회를 보다가 어렵게 용기를 내었다. 내가 엿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잠이 들지 않은 상태에서 어젯밤 통화내용을 듣게 되었다며 조심스레 입을 뗀 것이다.


성 경을 잘 모르던 그 후배는 성경에서 동성애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은 줄 알고 있었던 데다가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선천적 동성애자의 경우 이해받을 수 있는 소지가 많다는 내 얘기에 자신은 어릴 적부터 도무지 이성에 대해 관심을 느끼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내가 보기엔 좀 더 새로운 성적 자극과 모험을 찾아 남녀 가리지 않고 붙어먹는 쾌락적 양성애자(bisexual)에 불과했다.


다 음날 나는 동성연애에 관해 당시에 접할 수 있었던 견해 중에서 뛰어나다고 판단했던 리차드 포스터의 『돈, 섹스, 권력』과 존 스토트의 『현대 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을 건네주었다. 동성연애에 대해 근본주의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었던, 그리고 복음에 대한 열정만 후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박하던 일이년 전이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그 후배를 인간쓰레기 취급하듯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서 본문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충실하면서도 동성애자들에 대한 깊은 공감을 보여준 포스터와 스토트의 영향을 받았기에 그 후배를 향한 안타까움을 갖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죄에서 벗어나라고 권할 수 있었다. 그 뒤로 후배를 위해 계속 기도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서로가 어색해져버린 뒤라 쉽지가 않았다.


그 로부터 5년이 훌쩍 지난 97년 한 여름날, 대학원에 다니다가 몸이 너무 좋질 않아 집에서 쉬면서 군입대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지금의 안해랑 만나서 밤늦도록 도란도란 얘길 나누다가 자정이 조금 지나서 집 앞 버스정류장에 닿았다. 집으로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짐을 들던 한 남자를 발견하곤 집에까지 옮기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너무 고마워서 그러니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한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손사래를 치다가 하도 간청을 하기에 잠시 앉았다가 가기로 했다. 얘기를 꺼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 많던 그는 한 교회의 지휘자였다.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무척이나 동안(童顔)인 나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그는 “선생님이 참 좋은 분인 것 같아 제 고민을 하나 털어놓으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하더니 대뜸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그리고는 교회의 제자이자 현재 성가대원인 예쁘장한 청년과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오럴 섹스를 잘 해주는지, 그 젊은 애인이 얼마나 황홀해하는지, 한 번은 한 시간을 넘게 계속 빨아준 적도 있다는 얘기 등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랑스럽게 꺼내놓았다. 5년 전 그날 밤 경악을 금치 못했던 그 기분이 쭈삣 일어서서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섹스 실력을 뽐내던 그는, 근데 동성애가 죄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당 시에 숨겨진 죄가 얼마나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책과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나는, 그 교회에 달려가 당장이라도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나를 믿고 말을 꺼낸 사람에 대한 배려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다과를 나누며 복음주의권의 이른바 ‘공감적 비판’ 입장에 대해 소개한 다음, 5년 전 그 후배에게 주고 나서 재구입한 그 책들을 그에게도 건네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내 이야기를 경청하기는 했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그 때에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도 높아졌고 개인적으로도 다양한 동성애 담론을 접하는 동안 주님께서 내 포용력의 울타리를 넓혀준 까닭에선지(그래도 계간지 『리뷰』나 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온 책들을 펼 때 당시 유명했던 게이지식인 서동진의 이름이 눈에 띄면 썩 기분은 좋지 않았다), 5년 전에 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었고, 그래서 집으로 불러 교제를 나누기까지 했던 것 같다. 게다가 동성연애자라면 질겁을 하고도 남을 순복음교회 신자인 우리 어머니에게, 그 사람에 대한 여하한 정황과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을 소상히 설명한 결과 정죄 대신 이해를 얻어내었고, 그 결과 어머니도 그를 초대하도록 허락하였으니까 말이다. 할 수 있다면 그와 계속 만나고자 하는 바램도 있었지만 군대를 가면서 그와의 만남은 더 이상 이어지질 못했고, 결혼 후에는 부모님 아파트를 찾아뵐 때마다 건너편 동에 사는 그를 찾아가고픈 마음도 들곤 했지만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그의 집 창문만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희 한하게도 다시 5년이 지난 지난해, 토론토에 와서 나는 다시 동성애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우리 학교에서 나랑 가장 친한 친구인 에이미(Amy)와 나타샤(Natasja)였다. 친절하고 상냥했던 에이미는 오리엔테이션 첫날부터 나랑 얘기가 통하더니 이후로 우리 식구들과 내가 토론토 생활과 학교 공부에 연착륙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나와 가장 많은 시간 얘기를 나누었던 동무가 에이미였고 식사와 차를 가장 여러 번 함께 했던 벗도 에이미였다. 우리집에 제일 먼저 초대해서 저녁을 먹었던 것도 에이미와 나타샤였다. 두 사람 역시 자신들의 아파트에 맨 처음으로 우리 가족을 초대했었다.


그 러다가 나는 에이미의 생일날이던 한 겨울날, 두 사람이 연인사이이고 동거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두 사람이 학부 시절 칼빈에서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던 친구 사이라 여기에서도 룸메이트로 지내는 줄로 알았다. 근데 나타샤랑 결혼할 거라는 에이미의 말에 나는 너무나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밝혀두지만 나는 좀체 감정을 얼굴 뒤로 빼내지 못한다. 에이미는 나의 당황하고 놀란 표정에서 상처를 받았는지, 아니면 그것은 옳지 않다는 내 말에서 아픔을 느꼈는지, 내가 나타샤랑 얘기하는 사이 밖에서 울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왈칵 들어 에이미를 안아주며 눈물을 닦아줬다. 그리곤 여전히 너희를 사랑한다고, 생일날을 망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두 사람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한 것처럼, 그런 일이 있은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두 사람을 참으로 좋아한다. 두 사람은 온타리오 주에서 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반면 나는 두 사람이 결혼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여전히 에이미는 가장 친한 내 친구이다(해민이 역시 에이미를 무척 좋아한다). 에이미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우리 사이는 각별했다. 에이미는 우리집에 와서 안해와 서로 한국말과 영어를 배웠고, 문규형이 죽었을 때나 안해가 유산했을 때에는 나의 멘토인 실비아 선생님에게 재빨리 알려서 나를 도우려고 했다. 나 역시 요즘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에이미를 돕기 위해 영어 개인지도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주는 등 늘 에이미를 챙겨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동성애자와의 세 번째 해후에서야 나는 그들을 내 친구로 삼게 되었다.


보 수교단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나는 동성애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믿는다. 복상의 독자라면 상당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동성애자 친구를 둔 필립 얀시와 토니 캠폴로가 각각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천이 다루기 힘들어하는 20가지 뜨거운 감자』에서 보여준 동성애에 대한 탁월하고도 감동적인 이해를 여기에다가 다시 풀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낙태와 동성애 얘기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처럼 간주하는 북미 보수교회의 풍토만큼은 다시 짚고 넘어가고 싶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단정한 음란함, 우상숭배, 간음, 탐색, 도적, 탐람(the greedy), 술취함, 후욕(중상모략), 토색(남의 것을 거짓으로 속여 빼앗음) 하는 자들을 왜 동성연애자와 같은 강도로 정죄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따르면 미국 목회자 중 절반 이상이 인터넷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어서 목회자 역시 목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너무나 당연한 얘기인데 새삼스럽기는!)는 개탄이 나오고 있는 실정인데 왜 목회자들 자신에게는 동성애자들에게처럼 지옥행이라는 냉혹한 판결을 내리지 않고 있는가. 『라이프액션』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남성 70% 이상이 성적불순 이슈에 관련되어 있고 그중 유혹에 말려 실제로 혼외정사에 연루된 남성이 90%나 된다고 하는데, 미국인 대다수가 간음죄로 인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왜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가. 성공과 돈에 대한 집착, 쇼핑과 명품에 대한 중독, 섹스와 외모에 대한 탐닉은 분명한 우리시대의 우상인데, 이에 빠진 대부분의 교인들은 과연 천국행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미국인들은 힘없는 나라를 악랄하게 착취하면서 말도 안 되는 부유한 생활을 무궁히 지속해가려고 반면 미국인들의 안락한 삶의 대가를 대신 치르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한 나라 페루에서는 태어난 어린이의 반이 5살이 되기 전에 죽고 있다. 동성애자에게 지옥행 티켓을 발부하기 전에 자신들이 그 어린 것들의 피값을 치를 수 있겠는지 따져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동성결혼 합법화 반대 집회를 스케치하며


이 미 한국에서도 보도되었듯이 캐다나에서 동성간의 결혼(same sex marriage)이 합법화될 것으로 보인다. 개신교 보수교단에 속한 교회는 죄악이 합법화되고 있는 것을 경악하며 서명을 하고 집회를 하고 정치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동분서주하고 있다. 비록 늦었지만 보수교회가 해주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로마 가톨릭 교황도 캐나다 연방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 정치인들의 신앙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 의원의 말대로 이미 신앙과 정치전략 사이에 계산이 다 끝난 상황이라 뒤집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제 해민이가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와서 “압바, 왜 브래드네 엄마 아빠는 둘 다 남자야?”라고 물어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사 실상, 개인의 자유와 절대시되고 기독교가 변방의 한 목소리로 치부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동성결혼을 막을 합당한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에이미와 나타샤처럼 선량하게 살면서 세금 납부 등 국민의 의무를 다 이행한 사람들이 동성커플로서 자녀를 입양했을 경우, 이성부부 자녀에게 주어지는 모든 혜택이 그들 자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독신도 입양이 가능하기 때문에 법적 부부가 아닌 경우에도 자녀에 대한 교육이나 의료보험 등은 제공된다), 나라가 국민에 대해 할 바를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 현실론자들은 국민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주되 결혼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동성애 커플들은 경제적 혜택 외에도 결혼의 그 상징적, 사회적 의미까지 얻어내고자 한다.)


이 러한 상황 속에서 지난 9월 6일(토) 토론토 중심부인 퀸즈 파크(Queen’s Park)에서는 ‘도시 속의 예수’(Jesus in the City)라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도심을 행진하면서 예수님이 토론토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이 행사는 국제찬양페스티벌이 주최하는 것으로서 토론토에 복음을 전파하고 백인교계와 소수민족 교계의 화합의 자리를 마련할 목적으로 매년 열려져 왔다. 아마 한국의 대학 캠퍼스 내에서 예수전도단에서 주도하던 ‘예수대행진’ 같은 행사를 떠올려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5번째를 맞은 올해는 동성결혼 합법화 반대 집회의 성격이 더해짐에 따라 중국교회, 한인교회 등 이민교회의 참여가 증가했으며 행사 이전부터 시민들의 큰 관심을 받아왔었다


행 사 당일은 하필 학교 재학생과 신입생의 교제를 위한 하루수양회(day retreat)가 있던 날이어서 그쪽으로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복상 토론토 특파원으로서의 투절한 기자 정신(^^)을 저버릴 수 없어 퀸즈 파크로 발걸음을 돌렸다.


퀸 즈 파크 전철역에서 내리자마자 동성결혼 합법화 반대 피켓을 든 이들이 삼삼오오 계단을 올라가는 등 사뭇 분위기가 후끈거렸다. 장소에 도착하니 엄청난 인파가 모여–나중에 언론 보도에 의하면 2만 5천명이 참석했다고 한다–한 흑인 여가수의 인도 하에 찬양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만국기가 나부끼는 하늘 아래에 흑인과 황인과 황인의 삼인종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은 100개 이상의 민족이 살아가는 토론토가 아니면 보기 힘든 풍경일 것이다. 내가 본 국기만 해도 헝가리, 필리핀, 자마이카, 중국, 한국, 브라질, 이스라엘 등 각양각색이었다. 게다가 오순절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등 온 교파가 함께 하여 하나됨의 의미를 더해주었다.


한 동안 찬양과 기도를 하고, “예수님은 토론토의 주님이시다”(Jesus is the Lord of Toronto)를 외친 다음 드디어 행진을 시작하였다. 항상 춤과 음악에 버무려진 삶을 사는 흑인들이 역시 앞장서서 행진을 흥겹게 주도하였다. 대형 트레일러 위에서 밴드와 합창단이 노래를 하는 모습과 다른 트레일러 위에 가설무대를 꾸며 각종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모습은 역시 흑인들이라는 감탄을 나오게 했다. 행진의 맨 끝은 칠천명명이나 모인 중국인들이 맡았다. 이들은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결혼을 재규정하는 것을 반대한다!’(No redefining marriage!)고 적힌 배너를 들고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물결을 이루며 행진하였다. 중국 교회도 트레일러를 수대 마련해 밴드를 꾸렸지만 흑인들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점잖은 편이었다. 중국 교우들은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주님 당신의 사랑의 빛’ 등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곡을 주로 불렀다. 각별히 아름다웠던 장면은 흑인들이 중국인들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이었다. 천여명 가량이 참석한 한인들은 중국인들 속에 묻혀서 행진하였다.


사 실 나는 오늘 행사를 앞두고 적잖이 걱정을 했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게이-레즈비언들이 그들의 인권 옹호를 외치며 행진할 때에 섬뜩한 보수기독교인들이 보여주었던 증오심과 “Go right into hell”과 같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오늘 토론토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살벌한 정죄와 적대의식이 혹시나 표출되지는 않을까, 또 그로 인해 게이, 레즈비언들과 충돌하지는 않을까 자못 염려되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내가 취재를 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간혹 동성애자들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을 자극하려는 듯 선정적인 의상을 하고 거리에 나와 비난의 말들을 쏟아내기도 했지만 맞받아치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 지만 우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으로 흡족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대의 목소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늘 상기해야 한다. 그날의 행사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성애자들을 위한 것임을–비록 그들은 억압이라고 생각할지라도–의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외치는 동성결혼 반대의 목소리가 사랑으로 품어야 할 동성애자들보다 더 중요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사실 허다한 문제가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잊게 될 때에 발생한다. 풍부한 영적 감수성만으로도 내가 최고의 작가로 뽑기를 주저하지 않는 켄 가이어는 『영혼의 창』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준 비하는 식사가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보다 더 중요해질 때, 나는 바퀴가 떨어져 나가려 한다는 것을 안다. 내 일이 그 일의 수혜자인 가족들보다 더 중요해질 때. 내가 주장하는 말이 그 말을 듣는 사람보다 더 중요해질 때. 이런 것들이 내가 고정 축을 잃었다는 증거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할 때. 다른 사람, 특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내 가족의 성스러움을 느끼지 못할 때.


다 알다시피 록 허드슨이 AIDS로 죽은 20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동성연애가 뭐지?” 하며 낯설어 했는데 이제는 법이 그것을 보장해주는 상황이 되었으니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동성애뿐이던가. 많은 나라에서 낙태가 여성의 권리로 보장되었고, 포르노와 마약이 허용되었고, 성관계 경험이 없는 고교생들이 매력 없는 애들로 조롱을 받게 된 지 오래되었다. 필립 얀시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충분히 공감하며 지적했듯이 세상이 이처럼 엄청난 속도로 교회에 대해 적대적이 되어가면서, 보수교회 역시 세상에 대해 방어적이 될 뿐만 아니라 호전적으로 변해갔다. 나 역시 보수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그러한 정황을 십분, 백분 이해한다. 위협을 느낄 때에 공격적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그 러나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대감이 우리를 갖고 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성애자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패배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승리가 곧 그들의 승리임을 알려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승리를 독점하려고 하지 않고 나누려고 할 때 놀랄만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제로섬 게임이냐, 윈-윈 전략이냐


마 르틴 루터 킹 목사는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깨달음을 온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알고보면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에 대해 열매는 없이 대적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상대에게 패배를 가함으로 승리를 쟁취하려고 하는 우리의 전략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킹의 위대함은 상대에게 패배를 가함으로 승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나의 승리가 곧 적들의 승리도 된다는 점을 적들에게도 알렸다는 데에 있다. 킹의 트레이드마크인 비폭력저항도 실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킹의 연설 중 한 부분을 옮겨본다.


“우 리들의 집에 폭탄을 던지고 싶으면 던져라. 우리들의 어린 아기들을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우리들은 그대들을 계속하여 사랑할 것이다…끝까지 참고 견디는 우리의 사랑의 투쟁은 반드시 이기고 말리라는 것을 확신해 달라. 어느 날엔가 우리는 자유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의 자유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날, 그것은 곧 당신들의 승리로 되는 이중의 승리가 될 것이다(이것이 바로 진정한 윈윈 전략이다! – 필자 주). 그 날까지 우리는 계속하여 당신들의 양심에 호소할 뿐이다.”


킹 에게 백인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흑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백인들 역시죄악에 눌리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흑인들에게도 해방이 필요했지만 백인들에게도 해방이 필요했고 흑인들에게 승리가 필요하지만 백인들에게도 승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간파했다.


따 라서 단언하건대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의 근본적인 차이는 폭력과 비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제로섬 게임(zero-sum, 게임의 이론 등에서 한 쪽의 득점이 다른 쪽에 실점이 되어 한쪽의 득점과 상대의 실점을 합하며 제로가 되는 게임)이냐 윈윈 게임(win-win)이냐에 있다. ‘너의 승리는 나의 패배’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상대를 패퇴시키는 데에 급급할 뿐이지 상대를 감동시킬 순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윈윈 전략에 기초한 것이다. 원수 된 우리들을 진노로 무릎 꿇린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짐으로써 우리를 죄로부터 승리케 하시고 그 결과 우리 스스로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 그 분을 내 삶의 진정한 승자로 인정하게 하신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일개 사단의 천사를 소집하여 자신을 못 박으려는 자들을 응징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멋도 모르고 자신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붙여주신 그 사랑으로 이뤄진 것이다. 뻔한 얘기지만 예수는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세상을 사랑으로 무릎 꿇렸다.


윈 윈전략이 통용되어야 할 것은 통일문제도 마찬가지다. 육이오 전쟁과 이후의 각종 도발로 인한 상흔이 채 아물질 않아서인지, 아니면 군사정권 연장의 도구로 오용된 레드 콤플렉스의 여파가 남아 있는 건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북측을 굴복시켜서 승리의 쾌감을 누리려고 하는 그 마음씀씀이가 문제다. 자신을 패배시키겠다는데 어느 누가 순순히 백기를 들겠는가? ‘남측도 승리가 곧 북측의 승리가 되고, 북측의 패배가 곧 남측의 패배가 되는’ 윈윈 전략으로의 발상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통일은 지난한 과제일뿐더러 통일이 되더라도 그 후유증으로 인해 안함만 못하다는 말이 두고두고 나올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뭐라 말하든 간에 적어도 우리 기독인들만큼은 우리 남한이 아닌 북한을 위해 통일이 이루어지지기를 바래야 한다. 흔히 말하는 가엾은 북한 인민들을 위한 통일을 말함이 아니다. 그들을 착취하고 억누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위시한 소수의 절대지배층을 위한 통일 말이다. 개방에 대한 공포, 체제붕괴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는 통일이 바로 그들의 승리가 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자 연을 경작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윈윈 전략이 요청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땅이 엉겅퀴와 가시를 내어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서구인들처럼 자연을 이기고야 말겠다는 태도가 피조물로 탄식을 내뱉게 한다. 내가 늘 하는 얘기이지만 문화명령의 다스림이란 바로 피조물들을 섬기고 가멸게 하는 다스림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그것이 바로 자연을 승리하도록 돕는 것이고 우리도 이기는 것이다.


문 화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문화 변혁 모델이야말로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임임은 분명하지만, 사탄이 대중문화를 선택해서 온통 마성(魔性)을 들여놨으니 주의 군사가 되어 악한 문화를 초토화시키겠다는 식은 곤란하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그 때부터 악한 영들의 원수가 되는 것이고, 예수 믿는다는 것에는 그 분의 친구, 제자, 종, 자녀, 양, 동역자 등이 되는 것과 동시에 그 분의 군사가 되는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주의 군사가 되는 것이 홍위병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문화사역이 문화혁명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러한 공격일변도의 태도는 개혁주의자들로 하여금 변혁을 투쟁으로만 이해하게 만들고 세상에 대해 호전적인 마음을 품게 만든다. 그러니 변혁의 대상으로 ‘찍힘’을 당한 이들은 죽고살기로 우리에게 덤벼들게 마련인 것이다. 그럴수록 세상은 교회를 해방자가 아니라 억압자로 인식되고 만다.


월 터스토프가 『정의와 평화가 껴안을 때까지』(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에서 뼈아프게 지적한 대로 칼빈주의는 본디 내가 남보다 낫다는 승리주의(triumphalism)적 성향을 타고 났다. 이런 태생적 약점은 우리로 하여금 제로섬 게임에 더욱 몰두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말씀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건만 내 교회와 교단과 교파가 다른 데보다 낫다(특히 그 지긋지긋한 ‘장자교단’ 소리!)는 지극히 반성서적인 확신은 타교회 타교단 타교파가 내게 맞출 것을 요구하게 되고 이런 곳에 윈윈 게임은 들어설 자리가 대체 없다.


내 가 믿기로 교회의 제로섬 게임 애호는 무엇보다도 믿음과 사랑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내 안의 믿음이 바깥세상의 위협에 대해 여유 있게 맞설만하지 못하면 우리의 속은 좀팽이처럼 좁아져서 바늘 하나 찔러도 들어갈 틈이 없는 그런 기독교인이 되고 말 것이다. 앞에서도 인용했던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 33)는 예수님의 선포는 환난을 당해도 세상에 호전적이 되지 말고 사랑으로 세상을 이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품으라는 것으로 읽힌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에야 우리는 모진 세상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고 나를 치려는 상대의 형편까지 염려해줄 수 있는 사랑을 품을 수 있게 된다.


그 러므로 나 자신이 적대감에 휩싸이게 되고 호전적으로 변할 때마다 내 믿음이 겨자씨 하나만도 못하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만약 우리 믿음이 겨자씨만하기만 하다면–이 험한 세상에서 그 작은 씨앗이 싹이나 제대로 틔워 자라랴 싶겠냐마는–놀랍게도 그 작은 믿음은 나중에는 씨앗을 주워 먹는 새들, 즉 우리를 삼키려는 세상을 이기고 나무가 되어 종내에는 새들에게 가시를 내어 찌르며 앙갚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쉴 곳을 제공해주는 나무가 된다. 나무는 항시 이렇듯 자신도 승리하고 새들도 승리하게 하는 것이다. 새들이 무지 좋아하는 해바라기씨를 밭에 뿌려놓으면 씨앗들은 부리를 피해 겨우 싹을 틔우지만, 훌쩍 자라 여름이 되면 장미처럼 새들에게 가시를 내지 공격하는 대신 새를 향해 환히 웃을 뿐만 아니라 가을이 되면 그 맛난 씨앗을 얼굴 가득 채워 새들을 먹이곤 한다. 내게 겨자씨 비유는 이렇듯 윈윈 전략에 관한 것으로 읽힌다. 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하늘나라 그 자체가 바로 모두가 이기고 즐거워하는 곳이 아니던가?


공포가 우리 눈을 멀게 만들 때


위 에서 세상에 대한 근본/복음주의 교회의 적대감 및 분리 정책이 세상의 급속한 세속화에 따른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한 바 있거니와, 두려움과 공의 간의 관계를 밝힌 가톨릭 신학자 매튜 폭스(Matthew Fox)의 통찰은 근본/복음주의 교회의 치명적인 결함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는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공포에 거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격정에만 몰두되어 있어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한 것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바로 근본주의 교회가 왜 그토록 정의와 불의에 관해 무관심한지 잘 설명해준다고 꼬집는다. 그는 공의와 불의가 근본주의 교회 설교자들의 어휘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성서에 의하면 사랑을 행하는 것이 공의를 행하는 것이고, 에크하르트(Eckhart)에 의하면 공감이 곧 정의(Compassion means justice)라고 덧붙인다.


근 본/복음주의자들은 지난 세기 내내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는 입을 싹 닦았기 때문에 매튜 폭스의 지적은 실로 뼈아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무서워지더라도 세상을 향해 사랑이 아닌 두려움을 갖게 되면 그시로부터 교회는 세상에 대해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입장을 갖게 되고 약자의 아픔에 대해서는 눈멀게 되고 만다. 세상과의 전쟁을 결연히 선포하면서 대형 전투에만 모든 전력을 집중시키는 교회는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간과하게 되고 나아가 사회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는 유물론의 세례를 받은 사회학자들의 얘기일 뿐이라고 회피하게 된다. 이제 선지자적 사명은 쓰레기통에 던져지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고 악을 쓰는 막가파식 모습뿐이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얼굴보다는 사탄의 모습에 가깝다.


따 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최종 승리는 주님께 있음을 믿고 세상보다 더 통 큰 마음으로 여유를 머금은 포용의 자세를 갖고 세상을 껴안을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처럼 자신을 적대시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모두가 자신을 좋아하고 따르던 주위 분위기가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돌하는 상황에서도 전혀 분개하지 않고 도리어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그들을 품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가슴에 진하게 판박이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 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하마스와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용감무쌍해보이고 더 이상 영웅적일 수 없는 자폭테러의 장면 역시 공포에 눌려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근본주의 종교와 독재 정치는 바로 이러한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종교와 정치라는 다른 영역에 속해 있지만 ‘공포’를 먹고 자란다는 점에서는 이란성 쌍둥이와 같다. 예를 들어, 버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가 자신의 나라에서 발악을 하는 독재 군사 정부를 보면서 일찍이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겉으로 보면 사람이기를 포기한 독재군사정부가 권력에 대한 집착 때문에 저렇게 비인간화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사탄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웃즈바르트는 돈이든 권력이든 핵무기든 기술문명이든 모든 우상숭배의 종말은 공포이고, 종국에는 공포심 때문에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이 연출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근본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우 리는 기독교의 여러 지류 중의 하나로 근본주의를 언급한다. 더구나 다수의 한국 교회가 근본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는 근본주의가 곧 기독교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담하건데 사랑 대신 공포에 기초한 근본주의는 기독교가 아닌 그 자체가 하나의 구별된 세계관이다. 그것이 이슬람으로 스며들어가면 이슬람의 외피를 입은 근본주의적 회교도를 낳고 기독교로 침투하면 기독교의 탈을 쓴 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을 잉태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근본주의는 참된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독재적 기독교 혹은 파시즘적 기독교이다. 박정희 독재와 한국 근본주의가 그토록 궁합이 잘 맞아서 양자가 고루 양적인 발전을 해가며 수명을 연장해왔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로 설명이 된다. 독재정부와 근본주의 교회가 공히 공산주의를 사탄의 정치적 현현(epiphany)으로만 이해하는 것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포를 이기는 첫 번째 길은 증오심을 불태우는 것이었고(증오는 두려움의 대상을 작게 보이게 하는 착시 현상을 일으키지 않던가!), 둘째는 미친 듯이 자신의 몸을 불려 크기로 적에게 맞서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경제개발과 교회성장이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말 이 나왔으니 말인데, 한국 가정의 권위주의 역시 같은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세대차가 큰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두려워하게 되고, 나아가 아이들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면 그 때부터 독재적인 부모가 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가부장제의 탈을 쓴 권위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없는 부모는 아이들의 항변을 끝까지 듣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나니


이 제 다소 길어진 글을 맺어야겠다. 고백하건데 나는 여태껏 사랑 안에는 공포가 없다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에 와서야 그 그윽한 말뜻을 조금은 헤아릴 것 같다. 이제 근본/복음주의 교회와 한국의 근본주의 사회는 이 말씀을 삶에 녹여내야 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쫒나니” (요일 4.18)


後記) 원고를 보내고 나자마자 연방의회에서 이성결혼만이 합법적이라는 안을 5표차로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4년전에는 216-55로 압도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 머지 않아 이성간의 결합만이 유일한 결혼의 모습이 되지는 않을 것 같네요.

[박총] 적음직한 날들, 나눔직한 이야기들

이코스타 2003년 9월

고백컨대, 저는 삶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입니다. 쓰는 것이 생활에 큰 분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님과 함께 또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엮어지는 매 순간순간이 하나 같이 가슴 벅찰 정도로 행복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꼬박꼬박 적어두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스란히 잊어버릴 정도로 흥겹고 신나는 일들이 차고 넘치는 것이 바로 저의 삶입니다. 말하자면 적음직한 삶이지요. 그런 재미난 일들의 연속이기에 제 삶에는 권태란 없습니다. 아내도 저의 이러한 점을 늘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살아온 시간들을 부지런히 이야기로 변환하는 또 다른 까닭은 “시간은 이야기로 엮일 때 비로소 인간적 시간이 된다”고 말한 리쾨르(Paul Ricoeur)에게 십분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인간적인 시간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 형태가 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니, 학업과 가정의 돌봄이라는 이중고가 있음에도―복상에 원고를 게재하는 여부를 떠나―쉼 없이 글을 쓰는 것은 제 삶이 조금은 나눔직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올 연초부터 이어진 적음직한 날들과 나눔직한 이야기들 중에서 몇 가지를 뽑아 보았습니다. 읽는 모든 분에게 적음직하고 나눔직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1월 3일 어제부터 내린 눈이 제법 수북이 쌓였다. 이번엔 엄청난 눈이 올 거라고 한다. 이곳은 눈도 많은데다가 나무도 많고 낮은 주택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파트숲인 한국에서는 설악이나 한라에서만 볼 수 있는 멋들어진 설경을 창 밖에서도 비스므레하게나마 맛볼 수 있다. 날이 춥다는 핑계로 해민이를 겨울 내내 좁다란 집에만 가둬두는 것이 대체 미아내서 오늘은 옷을 차려 입히고 같이 베란다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었다. 작다란 베란다에 고인 눈만으로도 눈사람 하나를 낙낙히 만들 수 있었다. 눈사람이 형태를 갖추자 해민이는 제 엄마한테 당근을 달라고 한다. 책에서 본대로 당근을 꽂아 빨간 코를 만들려는 심사다. 브로콜리로 초록색 눈을, 바나나 껍질로 노랗게 웃는 입을 만들고는 드럼 스틱으로 팔을 꽂은 다음 털장갑을 걸고 목도리를 둘렀더니 정말 근사한 눈사람이 되었다. 녹기 전에 사진기에 담아두었다.

평소에는 15불이 넘는 왕립온타리오박물관(Royal Ontario Museum) 관람이 금요일 오후 4시 반부터는 무료이기 때문에 해민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참 잘 해놨다는 말이 절로 나왔고 그 규모만큼 볼거리도 엄청났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것들을 실물로 보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해민이도 신기한 게 많은지 계속 “압바, 엄마, 이것 좀 봐요!”라는 말을 줄곧 해댄다. 이어 박물관 근처에 사시는 박윤만 목사님/황윤정 사모님 댁에 저녁 먹으러 갔다. 차려놓은 저녁도 맛났고 오가는 얘기도 기름졌다.

1월 5일 오늘부터 성산교회 한글권 중고등부를 맡아 첫 설교를 했다. 신학생 출신들도 전도사 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는 가만히 서 있는 내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놀면 뭐 하냐. 예서도 양을 먹여라”고 기회를 가져다주신 경우다. 이를 두고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약간은 재정적인 도움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배운 것을 고여 두면 썩을까 저어하여, 목양을 해가며 책을 펴야 현장에 붙박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하여 사역을 하기로 결정했다. 또 이참에 이민 교회와 이민 사회라는 것을 좀 더 깊이 경험하고 배우고 싶다.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많은 통찰과 화두를 던져줄 것이라 믿는다. 오늘 첫 성경공부 시간에는 창세기 강해를 하고,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설교를 했다. 오랜만에 양장(洋裝)을 하니까 몸이 죄이는 것이 꽤나 불편하다. 그나저나 우리 아내는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사모님 소리를 듣게 됐다(으~ 닭살).

1월 7일(禍) 다른 학교로 옮길 것인가, 전공을 변경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멘토(mentor) 교수인 아드리엔느(Adrienne), 학장(dean)인 밥(Bob), 교직원인 팸(Pam), 위클리프(Wycliff)의 브라이언(Brian), 그리고 학교의 여러 친구들까지… 그러고 보니 오늘 참 많은 이의 소리를 들었다. 이런 낱소리들이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찾는데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공부길을 바꾸고자 하는 심사가 내 욕심의 소리인지, 아니면 주님의 진실한 음성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세상에는 갖가지 소리가 있다. 들을 줄 아는 이에게 이 소리는 선물이다. 오감에 민감한 나이기에 보통 소리에 대한 반응도 아내보다는 내가 더 세심한 편이라도 믿어왔지만 간혹 아내가 나보다 소리에 더 민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시내나 바다가 아닌 화장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예쁘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은 아내였다. 물소리가 듣고 싶은 밤이면 그래서 일부러 세면대에 마개를 막고 수돗물을 아주 살짜기 틀어서 물방울이 오륙초에 한 번씩 똑똑 듣게 만들어놓거나 세면대에 수돗물을 가득 받은 다음 마개를 약간 헐겁게 꽂아서 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내게 하기도 한다. 그렇게 점점 물소리에 익숙해지면 차가운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르고 뜨거운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온 누리에 60억이 넘는다는 그 사람들의 목소리 중에서 아내의 소리를 찾지 못하는 적은 없다. 무리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아내의 목소리는 헤맴 없이 착착 내 귓바퀴를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느냐로 친밀도를 측정하고, 상대가 내 목소리인지 기연가미연가하면 대번 서운해 하는 것이다. 살다보면 오늘처럼 주님의 소리를 감별치 못할 때가 있다. 그것이 내 육신이 낸 소리였는지, 주님의 음성인지 헷갈릴 적이 있다. 그럴 땐 참으로 당혹스럽다. 얼마나 주님과 가깝지 않았으면 주님의 목소리를 감별하지 못할까? 자기 목소리를 못 알아본다고 삐치는 연인처럼 주께서도 섭섭해 하지 않으실까?

“나의 영혼아, 잠잠하라. 바람과 물결은 이 땅에 내려와 자신들을 다스렸던 그분의 음성을 아직 기억하고 있도다.”(카테리나 폰 슐레겔, ‘나의 영혼아, 잠잠하라’ 중에서) 바람과 물결도 이 땅에 내려와 자신을 다스렸던 그 분의 음성을 기억하고 지금도 순종하고 있건만, 나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날마다 나와 교제하시기 위해 오늘도 기꺼이 나만큼 낮아지신 그 분의 소리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니 연기독(戀基督, 그리스도를 연모한다)이라는 우리집 가훈 첫 줄이 새삼 무색해진다. 더구나 때로는 아무도 없는 듯한 느낌이 드는 타지에 나와 변두리의 삶을 꾸려가면서 그 분의 음성조차 변별치 못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캄캄하고 섬뜩한 일인가?

1월 17일 오늘은 체감기온이 30도라는데 평소처럼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서 브라이언 월시(Brian Walsh)의 Guided Reading 수업에 들어갔다. 영하 24도까지 내려가던 날도 자전거를 탔으니 뭐 대수랴. 온 몸을 옷가지로 완전무장 해서 칭칭 감은 채 얼굴만 살짝 드러내놓고 자전거를 모는데 그 옷차림이 얼마나 웃긴 줄 모른다(사진기로 박아놓지 않은 것이 아쉽다. 내년을 기대하시라, 하하). 아내는 박장대소를 하며 일명 ‘토론토 패션’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자전거를 타고 온 걸 보고는 브라이언이 “You’re crazy!”라며 놀란다. 이번 학기 읽을거리는 브라이언의 원고로 그 아내 실비아와 함께 쓴 것인데 조만간 출판될 예정이라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삶의 세계관을 골로새서를 모색해본 것인데 재미있어 보인다. 집에 오는 길에 크리스티 고아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자르고, 블로어 정육점에 들러 고기를 샀는데 마침 현찰이 모자라서 학생증 맡기고 외상으로 사왔다. 집에 오는 길은 정말 너무 추웠지만 사랑하는 두 사람이 환하게 맞아주자마자 몸이 단번에 다 녹는 기분이다.

2월 11일 혹시 화면보호기 편지라고 들어보셨나요? 연초부터 아내는 6월에 있을 간호사 시험 준비에 열심이다. 내가 데스크탑을 장악하고 있는 관계로 아내는 대신 화면까지 깨진 늙은 노트북을 켜서 한컴사전으로 단어를 찾아가며 차근차근 연습문제를 풀고 있다. 그런 아내가 기특하고 어여뻐서 어케 격려를 해줄까 궁리하다가 화면보호기 편지를 착안하였다. 화장실을 간다든지 하는 이유로 노트북을 5분 이상 쓰지 않으면 자동으로 화면보호기가 뜨는데 거기에다가 짧은 편지를 적어 넣은‘움직이는 텍스트’를 가동시키면 내 편지가 한 자 한 자 눈앞을 지나가게 되고 상대는 “어, 이게 뭐야?”하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하여 이런 내용의 글을 남겼다. “순영, 살림하랴 공부하랴 힘들쟈? 당신이 늘 우리와 함께 있어주고 단 마음으로 섬겨주는 것이 요샌 한결 더 고맙게 느껴지네. 늦게사 철이 드나?^^ 당신은 참 좋은 내 짝이자 동지야. 내내 우리 집 ‘안’의 환한 ‘해’로 남아줘요. 나도 당신만을 올곧게 사랑할 테니” 신혼 초엔 갖은 방법으로 아내를 기쁘게 해주었는데 간만에 풋풋한 방법으로 아내에게 사랑을 전했다.

2월 15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가시화되자 토론토에서도 반전집회가 열렸고 우리 가족도 반전의 목소리에 가세하기 위해 자리에 함께 했다. 다운타운인 던다스 스퀘어(Dundas Square)에는 낮 기온이 15도에 체감기온 30도임에도 8만명이 운집했다. 우리는 피켓이 없어서 누가 두고 간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앞면에는 “Canadians say, No to War!”, 뒷면에는 “Stand up to the Empire before it’s too late!”라고 씌어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바로 밑에 캐나다 공산당(Communist Party of Canadian)이라고 적혀 있는 바람에 엉겁결에 공산당원이 되었다(^^ 혹자는 어케 공산당의 피켓을 들 수 있느냐고 따질지도 모르겠지만 자유총연맹의 피켓을 드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해민이는 혹한 데모 3회의 경력자답게 꿋꿋이 잘 버텼지만 아내가 너무 춥다고 야단이었다. 1시간 가량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다가 무등을 탄 채 해민이가 잠든 것이 안쓰러워 오늘은 이만 접고 전철역 안으로 피한(避寒)하였다. 아내는 실제로 손이 벌겋게 얼어서 한동안 굽혀지지가 않았다. 때마침 해민이가 쉬가 마렵다고 해서 항상 상비하고 다니는 쉬통(일명 휴대용 화장실)에다가 쉬를 뉘였다. 노란색 액체가 차 있는 물통이 좀 엽기적이긴 하지만 따끈한 것이 손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전철 안에서도 이곳 캐나다 사람들이 설마 이것을 오줌이라고 생각이나 하랴 싶어 아내와 나는 계속 쉬통을 주물럭거리며 손을 녹이는 대담함을 과시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거대한 쇼핑몰인 이튼 센터(Eaton Centre)에 가자 아내는 언제 힘들었냐는 듯 눈요기(window shopping)를 하느라 룰루랄라 아주 신이 나서 돌아다닌다. 근데 사람들이 우리를 흘낏흘낏 쳐다보는 것이 심상치가 않다. 알고 보니 다음 집회 때 또 쓰려고 피켓을 들고 다녔는데 바로 그 공산당 라벨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이었다. 공산당 라벨을 떼고 반전구호만을 남기자 그제야 쳐다보는 이들의 시선이 우호적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도 공산당은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 집에 가고 싶은데 아내는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다. 이튼 센터 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애들 마냥 오르락내리락 하며 재미를 본 다음, 식원(食園, food court)에서 그리스 음식으로 배를 채운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3월 19일(?) 썩을 놈의 부시와 그의 제국(Empire) 때문에 전운은 고조되고 있다. 몇 개월째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대체 잠이 안 온다. 지난주 가정 예배 시간에 이라크 국민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마음이 내 안으로 들어온 다음부터 말할 수 없는 탄식이 터져 나오고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은하가 이라크로 갔고 영신이 누나도 뒤를 이었다. 조국의 보수교단이 친미 기도회를 여는 꼴불견을 연출하는 마당에 두 사람이 너무나 귀하고 고운 결단을 내려주어서 고맙고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복음주의권에서 자라난 자로서 이 땅과 이 나라에 앞에서 늘 송구스러움만을 느낄 뿐이었는데 두 이 덕분에 이 민족 앞에서 조금은 덜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부디 우리의 기도와 응원을 씩씩하게 즈려 밟고 가길 빈다. 영신이 누나와는 막역한 사이인데다가 양쪽 집 애들이 같이 어린이 뮤지컬을 본 적도 있어 가족을 두고 떠나는 누나의 마음이 중량감 있게 느껴진다. 나 역시 한국에 있었다면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터져 나온다. 아내 역시 한국의 처형과 통화를 하면서 해민 압바는 맘만 먹으면 처자식을 남겨두고라도 갈 사람이라고 한다. 영신이 누나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누나, 잘 다녀와요!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이라크로 떠난다고 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던 요즈음, 누나가 날 대신해서 떠난다고 생각하니 한결 기쁘네. 몸 성히 다녀와요. 임마누엘이라는 단어가 여정 내내 살 속 켜켜이 스며들도록 기도할테니… 토론토에서 총

기독교 우익과 시온주의의 입김 아래 석유 에너지의 확보, 침체된 군수산업의 활성화, 중동지역 재편 등의 노림수, 아니 삼척동자도 다 아는 야욕을 위해 추진되고 있는 이번 전쟁이 만약 터진다면 미국은 필히 몰.락.의.길.을.걸.을.것.이.다. 열방이 야웨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교만해질 때 그 분의 심판을 자초했듯이 미국 역시 저러한 교만으로는 패방의 선봉밖에 되지 못함을 잠언은 확실히 밝히고 있다.

4월 8일(逢) 아내랑 만나지 5,000일째 되는 날이다. 이럴 수가 있나. 인간 박총이 이런 날을 깜빡하고 말다니… 하루가 거의 맺어가는 시점에서야 아내가 보여준 미소로 알게 되었다. 선물도 아무런 축하 의식도 나누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사랑해’라고 5000번 말한 편지를 썼다.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나의 恩海, 순영! / 우리 만난 지 5000일을 만나 그저 주님께 감사드려요. / 그 오천일 동안 참으로 우리를 괴여 주셨지요. / 우리의 사랑은 그동안 얼마나 자랐는지… / 어찌보면 많이 큰 것 같지만 달리 보면 첫날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깜빡 하고 챙기지 못한 나를 이해해줘요. / 요샌 1일1건 사랑 표현도 거의 못(안)하고 있지만 / (결혼 5년차면 자연스러운 건가? 이벤트보다는 삶에 배인 사랑?!) / 그래도’날’을 챙기는 거야 내 전공이라 생각했는데 / 막상 이렇게 되니 미안한 마음이 자못 큽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순 없어서 뜨거운 동품을 한 후에 이렇게 이메일을 띄웁니다. / 우리가 만난 뒤로 최소한 하루에 한 번 정도 이상은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 적어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믿기에 사랑한다는 말을 5천 번 써봅니다.

짐작하다시피 일일이 다 쓴 것이 아니고 복사 기능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 당신 역시5천 번을 소리 내어 ‘사랑해’라고 읽을 필요까지는 없어요. / 그러나 최소한 10번 정도는 소리 내어 ‘사랑해’라고 읽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복사 기능을 사용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늘려간 것처럼 / 우리 사이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한다는 생각과 말이 습관처럼 ‘자동화’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 오천 번의 ‘사랑해’라는 글은 복사 기능을 사용했지만 / 실제 삶에서의 사랑은 복사 기능이 없는 일일이 손을 사용해 수고로이 쓴 것이기를 바랍니다.

나도 이제 곤해서 자야겠어요. / 그럼,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중략)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 참, 자정이 넘었으니 한 번 더 써야겠네.

“사랑해.”

4월 16일 어제와 오늘 이틀 간 토론토 근교 오렌지빌(orangeville)에 위치한 생태수양관(ecology retreat centre)으로 피정 다녀왔다. 외국에 와서 처음으로 수양관을 와 봤고 생태수양관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야트막한 야산 사이로 냇물이 흐르는 골짜기에 세워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매번 평평한 곳에서만 지내다가 이른 아침 산이라고 부름직한 곳을 거닐다보니 한결 기쁨이 컸다. 그렇지만 토론토에 온 뒤로는 아직도 나무들에게 한 마디도 듣지를 못했다. 한국에 있을 적에는 나무들의 또렷한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땅이 악인을 토해낸다는 말씀도 있듯이 내 삶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다보니 나무들이 나와 대화하기를 꺼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4월 19일 같은 동네에 사는 실비와와 브라이언 선생님 부부가 다 감기에 걸려서 두 딸 메들린과 리디아를 데리고 나와 해민이랑 오후 내내 놀았다. 먼저 시데베일(Cedarvale Park)에 가서 축구를 좀 하고 우리집에 와서 장난감 갖고 놀았다. 역시 애들은 말이 안 통해도 잘 논다. 배가 고플까 싶어 간식을 좀 먹였다. 리디아는 새우깡이 맛있다며 봉투째 제집에 갖고 가서 먹었다. 해민이 녀석은 사내애들하고 놀다가 성이 날작시면 막 치고 박기도 하더니만 누굴 닮아서인지는 몰라도 여자애들한테는 늘 신사적이다.^^

4월 22일 해민이 난날이다. 아침에 짜잔~하고 놀래켜 줄려고 아내랑 밤늦도록 풍선불고 카드 쓰고 했더니 피곤하다. 4번째 출일(出日)이라 열네 개의 풍선으로 벽에다가 4자를 만들어 달고 토토로 엽서에다가 축하한다고 썼다. 어제 산 꼬마 케익에 불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엄청난 규모의 중고품 백화점인 밸류빌리지(value village)에서 각각 3불과 1불을 주고 산 농장과 목욕용 배, 그리고 달러마트에서 2불을 주고 산 농장동물세트를 선물로 건넸다. 낮에는 아내가 미역국을 끓여줘서 맛나게 잘 먹었다. 해민이는 늘 우리의 기쁨이요, 감사 제목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토록 사랑스러운 자녀를 주셔서 주님께 늘 고마울 따름이다.

4월 23일 1월달부터 해민이는 뒤뜰과 연못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동시집 <꽃씨 안이 궁금해>를 보다가 연못 그림만 나오면 갑자기 숨이 가빠지면서 물고기랑 올챙이가 헤엄치고, 개구리랑 오리도 같이 사는 연못이 있는 집에 살았으면 좋겠단다. 연못 주위엔 돌멩이도 가지런히 놓여 있고 큰 사과나무가 있어서 사과도 따먹고 나무 위엔 나무집도 지어서 거기에 올라가 잠도 자고 놀았으면 좋겠단다. 아직은 장난감밖에 좋아할 줄 모르는 네살배기가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간절한 바램이 그대로 내 가슴녘에 와 닿는다. 하루는 눈빛을 반짝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연못 타령을 하는데, 이젠 그 소원이 내 마음까지 움직여 함께 기도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해민이의 기도가 응답되어 어제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하우스(한국으로 치면 단독주택)로 간다. 우리 아파트 관리인인 데이빗과 마우이의 집인데 주께서 두 부부에게 은혜를 입게 해주셨다. 돈보다는 집을 잘 관리해달라며 아파트와 거의 같은 임대료만 받기로 했다. 지금 사는 아파트보다 250불 인상된 1100불이 다소 부담스럽기도 한 것이 사실이나 그만큼 값을 하리라 믿는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에서도 주님은 늘 후하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 신학을 하지 않은 내가 전도사가 된 것도 기적이라고 하던데 어떤 이들은 10년 이민 생활을 해도 살지 못하는 하우스에 10개월도 안 되어 들어가 사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신비한 일이라고들 한다. 가만 헤아려보면 우리네 삶에는 신비로운 일들이 많다. 단돈 60만원만 갖고 결혼한 것도 신비한 일이요, 유학 와서 이토록 넉넉하게 지내는 것도 신비로운 일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아내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나 10년을 줄곧 사귄 것도 신비요, 결혼해서 이제껏 애틋하게 살고 지고 해온 것도 신비요, 해민이와 같이 사랑스러운 이를 아들로 갖게 된 것도 신비다. 내 인생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부터가 신비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숲에서 만난 발자국>의 저자 톰 브라운의 말마따나―조금은 다른 의미로 한 말이지만―인간은 자기 앞에 놓인 신비를 먹으면서 세상을 사는 법이다.

이제 해민이가 집안에서 뛰어다녀도 아래층 울린다며 주의를 주지 않아도 되고, 화분만 몇 개 키우던 나는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너른 꽃밭과 텃밭도 가꿀 수 있게 됐다. 아내는 살림하는 사람답게 집에 세탁기가 있어서 너무 좋다며 야단이다.

이사를 이틀 앞두고 있는 오늘, 우리 부부가 한 몸 이룬 후 첫 둥지였던 서울 독산동 공군 부대 철매아파트에서 가졌던 그 마음, 장기복무자에게만 지급되던 그 우풍 심하던 아파트가 우리에게 주어진 다음에 “주님, 이 집은 저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소서. 지치고 힘든 이들이 와서 밥을 먹고 쉼을 누리고 기쁨과 힘을 얻어갈 수 있는 곳이 되도록 이 집을 모두에게 열어놓습니다.” 했던 그 마음, 그래서 교회의 후배들과 제자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던 그 시절 그 마음을 다시 지니게 된다. 이제 5월이면 날도 따뜻해질 것이고, 우리집에서 교회 중고등부 아이들과 같이 먹고 놀고 삶을 나누며 그렇게 어우러지고 싶다. 더불어 이웃들과 학교 친구들 등에게도 편안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우리집이고 싶다.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

[박총] 아내의 안식년을 챙겨주는 유학을 꿈꾸며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저희는 지금 유학(留學) 중입니다. ‘유학’ 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지요? 1990년대 들어 조기유학, 단기유학 같은 말이 등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는 유학이라는 말이 담아내고 있는 의미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유학’ 하면 대개는 한 남자가 한국에 돌아가 교수가 되기 위해 학위를 따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지요.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이름 있는 학교에 입학해야 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죽어라 공부해야 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뒤따릅니다. 남편이 거의 모든 시간을 책과 씨름하는 동안 여성 배우자 역시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살림하고 애들 키우면서 나름의 고생을 하게 됩니다. 부자가 아닌 이상에야 유학 기간 내내 돈에 쪼들리면서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유학 기간을 즐기기보다는 할 수 있는 한 빨리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덕이 되고 말지요. 대충 이러한 몇 컷의 스틸 사진들이 유학 생활의 스테레오 타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색깔이 다르기에 유학의 빛깔도 가지각색일 겝니다. 아무리 각박하고 버거운 유학 생활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나름의 여유와 멋이 없을 리 없지요. 하지만 유학에 대한 전체적인 틀은 확고 불변하며 좀체 끄덕하지 않습니다. 저희 가족의 유학 역시 다른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같은 틀에서 나온 변주(變奏)가 아니라 다른 틀을 지닌, 어찌 보면 약간은 파격적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저희 가정의 조금은 다른 유학 생활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앞날에 매이지 않는 유학(幼學)


제 지인(知人)들이 제가 공부하러 토론토에 온 것까지는 아는데 재미있게도 제가 무얼 공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더라구요. 저는 지금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에서 철학적 미학(Philosophical Aesthetics) 석사과정을 밟으러 왔다가 제가 생각하던 것과는 아귀가 다소 맞지 않는 면이 있어서 신학에 토대를 둔 학제학적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로 전공을 변경해서 수학하고 있습니다. 학부시절부터 저의 일관된 관심사가 세계관(또는 종교, 혹은 신학) 및 문화(‘대중문화’라고 할 때의 문화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양식 전체를 가리킬 때의 ‘문화’)의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신학(종교학, religious studies)과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그리고 철학이 버무려진 비빔밥식 공부에 아주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오늘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신학’하는 실비아 키이스맛(Sylvia Keesmaat)과 브라이언 월쉬(Brian Walsh) 부부를 저의 멘토(mentor)로 삼아 공부하는 것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일입니다.


지금 하는 공부를 마친 다음에는–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일반학교로 적을 옮기거나 우리 학교를 포함한 기독교 계통의 학교 또는 신학교에서 문화와 관련된 공부(문화이론, 문화철학, 혹은 문화신학)를 하거나 방향을 조금 바꾸어서 영성신학이나 가정상담학도 상당히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학부부터 시작해 석사과정, 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따로국밥식 전공을 하려는 것에 대해 저를 아끼시는 몇몇 분들은 공부를 마친 다음의 일을 염려하시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전공의 변경으로 인한 불이익을 이름이지요. 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 더구나 박사 실업자가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 전공을 바꾸는 것은 장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다소 무모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략에서라면 모를까 지위나 생계를 위해서 어떤 자리에 연연하는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무슨 공부를 하든지 앞으로 이어질 학문의 모든 여정을 그 분께 내맡기는 유목민적 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저는 더디 가고 에둘러 가더라도 이미 주어진 레디메이드 학문이 아닌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유목민적인 공부를 해서, 인문학다운 인문학(人文學), 즉 사람(人)과 문화(文)를 살리는 학문(學)을 하고 싶습니다.


소제목에 사용한 유학(幼學)이란 한자는 본디 고려 및 조선 시대에,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儒生)을 이르던 말인데 저도 이처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내키는 대로 공부하고 있으니 저의 유학 생활을 지칭하는 말로 이보다 더 좋은 말이 또 있는가 싶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나가자면, 박사학위를 받아오면 전부 다 강단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식적인 생각’이 얼마나 지식인들과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가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를 지식인들에게 가해지는 일종의 폭력으로 봅니다. 물론 교수라는 폼나는 자리에만 연연하는 대부분의 박사 학위 소지자 자신들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유학 갔다 오면 당연히 교수가 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패배자로 간주하는 집단무의식적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웬만한 내공으로는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학위를 받고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지천으로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부담감이 현장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막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엄청난 손실을 빚어내고 있는 실정이지요.


대학 주위에는 강단의 빈자리를 뚫으려는 사람들이 ‘박사실업자’라는 호칭을 달고 버글거리는 반면 ‘현장’에는 전문가가 부족하다며 볼멘 소리들을 하더군요. 박사님들 역시 “내가 이걸 따느라 얼마나 많은 돈과 정력을 들였는데…”하는 ‘본전생각’만 버린다면 창조적인 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을 텐데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물론 제 취향이긴 하지만 학위를 받고 학자연(然)입네 하는 것보다 시민단체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더 폼나지 않을까요? 예를 들자면, 월드컵 4강을 이루었던 히딩크 사단의 체력담당관이 박사 출신임은 내남이 다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제가 언제까지 공부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저를 심으신 이 땅과 이 시대에 사람과 문화를 살리는 데 한몫 거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기실 공부를 마친 다음에 제가 가장 하고픈 일은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농사입니다. 4시간 밭을 일구고(피조계와의 사귐) 4시간 공부하고(삶과 문화를 배움) 4시간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이웃을 섬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훗날 이곳 캐나다에 머물지 고국으로 돌아올지 그 역시 님의 뜻을 따르겠지만, 만약 한국에 돌아온다면 갯살림, 들살림, 산살림이 고루 가능한 천혜의 공간인 변산(邊山) 같은 곳에 가서 태평농법(泰平農法)으로 태평하게 농사지으며 농촌과 지역 사회를 기름지게 할 하며 살 수 있다면 대만족이겠고, 외국에 남는다면 켄터키(Kentucky)에서 농사짓는 괴짜 노인이자 기독교 작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와 버몬트(Vermont)의 숲 속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다 간 니어링 부부를 따라 캐나다의 대평원(prairie) 같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북미에 사는 이들 및 이곳의 기독인들, 그리고 이민 온 한인들을 소박하게 섬기며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흡족할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有學)


지난 가을학기는 공부만을 놓고 봤을 때 가장 버거운 한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언어의 문제도 큰데, 전공 변경이라는 이중고까지 겹쳐서 호락호락하지 않더군요. 게다가 아무리 질박하고 소박한 삶을 영위하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현대 사회에 얽혀서 살다보니 토론토 정착과 관련된 굵고 자지레한 일들이 첫 학기와 두 학기 내내 적지 않은 시간을 뺏어갔습니다. 더구나 작년 6월 편도선 수술로 인한 몸의 변화와 뒤따른 세 차례의 출혈로 인한 체력 저하로 인해 두 세 시간만 앉아서 공부를 해도 더 이상 집중을 못할 정도로 눈이 아프고 지치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설마 제가 한 학기 내내 한숨만 푹푹 쉬며 살았으리라 생각지는 않으시겠죠? 만만치는 않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특유의 여유와 낙관으로 늘 웃으며 지냈더니 군대 동료들이 그랬듯이 여기 와서도 학교 사람들이 저를 해피맨(happy man)이라고 부르더군요.


가족에게로 눈을 돌려보자면, 제가 늘 보살펴야 할 사랑하는 두 사람 역시 꽤 많은 시간을 가져갔습니다. 저 역시 유학 첫 학기인지라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두 사람 역시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첫 발을 내디딘지라 말은 꺼내지 않아도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달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공부만 놓고 보자면(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그렇게 분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안팎으로 우환이 겹친 격인데, 다행히도 제게는 크게 고민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고민이라는 것이 대개는 확고불변하지 못한 원칙에서 비롯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철저하게 학업보다 가정을 앞에 두는 것을 제 유학 생활 전체를 관통할 몇 가지 원칙 중 하나로 삼았거든요. 물론 당장 내야 할 과제물이 있을 때는 양해를 구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평소에는 상당한 시간을 가족과 더불어 보냈습니다. 이를테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찍 귀가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기회가 닿는 대로 장도 같이 보고 세탁소도 같이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유학 와서 공부에 전무하기 보다 가족을 먼저 챙겼다고 하니 어찌 보면 자랑은 아니지만 당장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울 아내가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백방으로 알아보았고, 토론토 지역 소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채널을 열어주었고, 학교 친구 에이미와 상호한미교습(서로 한국말과 영어를 가르쳐 주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해민이 난날(生日)도 아내랑 더불어 지성으로 챙겨주고, 집에만 있는 해민이가 심심해하지 않도록 귀갓길에 중고가게를 헌팅하여 장난감도 자주 안겨주고 관심 있어 하는 책과 비디오도 검색해서 끊어지지 않게 대어주었습니다. 동네도서관과 지역문화센터에서 무료로 혹은 저렴하게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을 찾아 데려가고, 가족과의 나들이를 꿈꾸며 매월 토론토의 가족관련 소식지를 챙기고, 해민이와 아내의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토론토의 가볼 만한 곳과 먹을 만한 곳이 담긴 책–Toronto: The Family-Tasted Guide to Fun Places 또는 Toronto with Kids와 같은 책들–은 동네 도서관에서 죄다 가져다가 읽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관계’가 ‘성취’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가족은 항상 공부보다 한 발 앞서 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제출해야 할 과제를 어떻게 마쳐야 할지 캄캄한 지경이라도 해민이 침대에 나란히 앉아 그림책과 성서이야기책을 읽어주지 않고 잠자리 뽀뽀(goodnight kiss)를 한 적이 없습니다. 서 있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지칠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어도 밥 먹고 설거지는 했습니다. 아내가 그냥 두라고 하면 “밤에 10분만 늦게 자면 되는 걸, 뭘.”하며 고무장갑을 끼곤 했지요.


이번 소제목에 달린 단어 ‘유학'(有學)은 원래 불교 용어로서 불가에 귀의하여 진리를 인식하였으나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하여 항상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닦는 불제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저 역시 공부에 전념하러 여기 왔으나 가족에 대한 번뇌를 끊지 못하여 늘 가족에게 마음을 두고(有) 공부(學)를 하니 유학(有學)이라 한들 뭐 그리 틀린 말도 아닌 듯 합니다.


생활을 즐기며 삶을 통해 배우는 유학(遊學)


유학(遊學)이란 타향에서 공부한다는 뜻으로 우리 어릴 적 시골 출신 선생님이 우스개로 “이래봬도 내가 도시에 유학 다녀 온 사람이여”라고 하면 어린 학생들이 “하하, 선생님. 도시에서 공부하는 것도 유학입니까?”라고 웃을 때의 그 유학입니다(실은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유학과는 한자가 다르지요). 그런데 하필 배울 학(學)자 앞에 정반대의 의미인 다닐/놀 유(遊)자를 썼을까요? 읍내에만 가도 눈이 휘둥그래지는 시골 출신의 학생에게는 장안을 다니며 보고 겪는 모든 것도 다 공부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저처럼 보고 겪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겨우 하루에 8시간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자는 것이 목표인 저 같은 사람에게는, 유엔에서 무려 다섯 해나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국제적인(cosmopolitan) 도시로 선정한 이곳 토론토에서 오만가지 문화를 겪으며 배우는 인생 공부를 더 즐기는 사람에게는, 외국에 유학 갔다고 할 때의 ‘유학'(留學)보다는 ‘유학'(遊學)이 더 맞을 겁니다.


작년 여름 토론토에 닿자마자 이 도시를 사랑하고자 기도하였고, 그 기도가 응답이 되어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처럼 진실로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하면 알고 싶어진다고 이곳을 알아가기 위해 늘 잡스러운 노력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토론토의 역사와 개관에 관한 책을 읽어가면서 토론토의 과거의 현재, 미래에 관한 전체적인 모양새도 슬슬 머리에 담겨지고, 길과 동네 이름의 유래도 차차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그 덕에 이곳에서 오래 사신 분들도 모르는 것들, 이를테면 1792년 온타리오의 수도로 지명되었을 당시 단지 12채의 집이 있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토론토란 지명이 원주민 인디언들에게서 유래한 것인데 그 뜻이 만남의 장소(the place of meeting)라는 것 등을 저보다 더 오래 사신 분들에게 문제로 내기도 합니다.


학교와 집을 오갈 때에도 가능하면 낯선 길로 다니면서 이곳 저곳 눈요기를 하고,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한국에는 없는 가게가 있으면 일부러 들어가 한 번 들러봐도 되냐고 묻고는 낯설고 진기한 것들을 살펴보고 구경합니다. 전세계 장신구들을 모아놓은 가게,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문화상품을 취급하는 가게, 인도산(産) 선물용품으로 가득 채워진 가게, 겉보기에도 묘한 기분이 드는 오컬트샵(occult shop), 네덜란드식 아이스크림과 얼린 요구르트를 파는 가게, 카리브해 먹거리만 전담하는 수퍼마켓, 캔디와 생일용품 등을 파는 캔디스토어가 바로 그런 곳들이지요.


제가 워낙에 풀꽃나무를 사랑했기에 토론토의 자연과 벗하고 싶어하는 마음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 『토론토의 계곡』(Torontos Ravines: Walking the Hidden Country)이라든지 『토론토 주변을 산책하기 위한 온타리오 하이킹 가이드』(The Hike Ontario Guide to Walks around Toronto) 같은 책을 들여다보며 일주일에 한 번은 아내랑 해민이와 함께 하루여행객(daytripper)이 되기 위해 대중교통으로 갈 만 한 곳의 목록을 뽑아놓기도 합니다.


저는 의식주를 통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위에서 언급한 것들에 더해 정치 사회, 자녀 양육, 학교 교육, 지역 사회, 가정의 제도와 의료 체계, 여가 및 놀이, 뒤뜰 가꾸기, 자전거 타기, 거라지 세일(garage sale) 등 이곳 생활의 모든 부스러기들로부터 ‘삶’을 배우고 ‘신학’하기를 원합니다. 제 컴퓨터에 ‘삶과 글’이라는 디렉토리 아래에 ‘토론토 생활 잡동사니’라는 꾸러미를 만들어놓고는 토론토에 사랑하는 이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스크랩한 것도 이미 적지 않은 분량이 되어 갑니다. 아마 이렇게 살다가 한 몇 년 지나면 “토론토 100배 즐기면서 영어 배우기” 뭐 이런 제목의 책이라도 쓰게 될지 모를 일이지요.


저는 늘 기도하기를, 학교 수업과 제 전공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저의 이러한 성향을 통해 타국 생활의 전 기간 동안 삶 전체로 배우고 공부하며 그것을 글로 녹여낼 수 있기를 빕니다. 말 그대로 살림을 통해 ‘신학’하며 ‘문화 연구’를 하는 이가 되기를 빕니다.


더디 가도 함께 가는 유학(留學)


저는 오래 전부터 이번 유학이 저만의 유학이 아닌 저희 가족 모두의 유학이 되도록 기도해왔습니다. 흔히 볼 수 있듯이 남편은 죽어라고 공부하느라 집을 하숙집처럼 여기는 사이에, 아내는 유모와 가정부로 전락하여 영어 한 마디 못하게 되는 그런 비인간적인 유학이 의외로 많습니다. 게다가 어린애들이 둘 셋 있는 집은 정말 한숨밖에 안 나오죠. 하루 하루가 얼마나 정신 없고 피곤할지 환합니다.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죠. 애들한테 매달리다보면 하루는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데가 있다고 해도 갈 엄두가 나질 않고 외국 친구를 만드는 건 꿈도 못 꿉니다. 게다가 주변에 한국사람이 없으면 말벗조차 없어 외로움과 답답함은 점점 깊어가지요. 이민 온 사람들처럼 상대적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가끔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기분 전환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한국처럼 대중교통도 여의치 않은 곳에서 애들 데리고 밖에 나간다는 건 좀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지요.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빨리 학위 따서 돌아가는 게 상책이다 보니, 유학생 부인들은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분노는 풀릴 길이 없어 마침내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마는 뻔한 시나리오가 의외로 자주 현실화된다는 것은 염연한 사실입니다. 애들은 애들대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결함을 안게 되고, 정체성의 문제로 인한 혼란스러움과 가난에 대한 스트레스 등을 부모 발음을 놀리는 재미로 해소하는 식이 되고 말지요. 그러다 보니 가정은 무너지고 어찌 어찌 해서 겨우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이는 만약 배우자와 자녀들의 한결 같은 동의가 있을 리도 없겠거니와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이는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담보로 한, 좀 심하게 말하면 가족의 삶을 착취하면서 이뤄진 학위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학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단 첫 번째 시기는 제가 먼저 시작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일단 준비가 되어 있는 제가 3년 간 ICS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저의 소명을 위해 전념하는 ‘유학 1기’입니다. 그 시간동안 아내는 살림과 육아를 감당하면서 영어를 익히는 등 자신의 소명을 틈나는 대로 차근차근 준비할 것입니다. 또 하나 이 기간에 주님이 허락하시면 해민이 동생을 가질 생각입니다. 이어 ‘유학 2기’인 이후 3년 간은 제가 집으로 들어와 살림을 하고 아내가 간호사로서 공부하고 일을 하든지 혹은 다른 소명을 품게 된다면 그에 맞는 공부나 일을 할 계획입니다. 아내 자신의 소명을 위해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지요. 이 세 해 동안 저는 아내 뒷바라지를 하면서 애들을 키우고 공부하며 글을 쓸 것입니다. 다음 ‘유학 3기’ 시기는 두 사람이 다 자신의 소명터에서 전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해민이도 즐겁게 학교에 다닐 것이고 둘째 아이 역시 제 형 또는 제 옵바 손을 잡고 유치원에 나가겠지요. 적어놓고 보니 그야말로 장밋빛 계획에 다름 아니군요. 말이야 쉽지만 실제로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만 그의 나라에서는 ‘성취’보다는 ‘관계’가 항시 먼저임을 늘 되새기면서 조금 더 힘들고 시간이 들더라도 가족과 더불어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을 착취하면서 얻어진 공부는 다른 이웃들에게도 영향력이 없음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론토에 오고나서 계획이 좀 변경되었습니다. 사실 아내가 한국에서 간호사 자격증을 따기는 했지만, 병원 근무 경험이 전무한데다가 전공을 살릴지 다른 공부나 일을 할지 아무 것도 결정한 것이 없이 왔고, 따라서 온타리오 간호사 자격 취득 관련 정보 같은 것은 전혀 알아보지도 않고 왔는데, 저희가 이곳 변두리 아파트에 둥지를 틀기도 전에, 아니 시차 적응도 채 되기 전에 간호사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아내 역시 몇 년간의 직장 생활 후에 어렵사리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됐지만, 해민이 키우느라 배운 것을 묻어두기만 했는지라, 이 참에 온타리오 간호사로 일하고픈 마음이 자연스레 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여름날 해민이를 데리고 RN(Registerd Nurse, 정규간호사) 준비 학원이니 취업설명회니 온타리오 간호협회니 해서 여기저기 다리품 좀 팔고 다닌 결과 본디 계획을 조금 수정하여 온타리오 간호사 준비에 지금부터 시동을 걸어놓기로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온갖 서류를 준비하여 온타리오 간호협회에 RN 등록을 위한 자격 조회를 했더니 간호사 등록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시험과 영어만 해결되면 되는데 그게 한 2-3년은 족히 걸린다고 하는군요. 혼자 준비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비용이 6,750불이나 하는 학원은 엄두를 못 내고 대신 RN Prep Guide 책을 구입해서 혼자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은 저한테 영어 못한다고 구박을 받아가며 꿋꿋하게 혼자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첫 학기가 힘들다고들 하지만, 아내가 간호사 준비를 안 한다고 해도 영어 배우러 다니는 시간 정도는 내주려고 전부터 맘을 먹고 있었으니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었는데, 솔직히 3년 뒤에 할 일을 당겨서 준비한다고 하니 제 코가 석자인 입장에서 조금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을 뜨기 전 지난 1년 반 동안 저의 유학 준비를 위해 아내가 처갓집에 들어가 식모살이에 준하는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까짓 거 정말 필요하다면 제가 파트타임 학생으로 등록해서 아내를 팍팍 밀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회가 되어 유학 2기로 예정되어 있던 아내가 시간을 먼저 갖기 위해 나랑 자리바꿈을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요즘 여성들이 조선시대처럼 합의되지 않은 인고의 세월을 감내할 리도 없거니와–그것이 옳지도 않으니 당연히 반대해야 하겠지만–자녀들 역시 아빠의 학위 취득을 위해 평생을 위한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를 볼모로 잡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학위가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서 가정 불화, 자녀 가출, 주부 우울증, 파경, 이혼 등에 이르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ICS에서 함께 공부하는 한 형으로부터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유학왔던 한 가정이 있었는데, 남편은 죽어라고 10년을 공부만 해서 신학박사가 됐지만 부인은 결국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는 얘길 들으니 속이 어찌나 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내는 교수님 사모님 소리 듣는 걸로 치유가 될까요? 그 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한국 유학생 가정 뿐 아니라 북미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는군요. 그리하여 수많은 석박사과정 학생들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 이유는 관계지향적이기보다는 성취지향적인 오늘날의 문화에 편승하는 대부분의 남자들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는 가정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몰고가는 오늘날의 대학의 시스템에 있을 겁니다. 겉보기에는 폼나고 멋져 보이는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알고 보면 학술지 기고, 무슨 학회발표, 각종 강연, 수업 평가 등 데드라인으로 거미줄 쳐져 꼼짝도 못하는 자리라고 하는군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료 교수들에 비해 승진이 느려지고 그러면 자존심을 구기게 되니 슬슬 놀아가며 할 수도 없고요. 그러나 간혹 일부 교수들은 가정이나 다른 더 큰 가치를 위해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천천히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바로 그런 사람들이 희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공부한다는 유학(留學)이라는 것이 원래 거할 류(留)자를 써서 외국에 머무르며 공부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이곳에 오래 거하더라도 더디 가도 함께 가면서 하는 저희의 유학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유학의 의미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나 싶네요.


아내의 안식년은 남편이 챙겨주자


불행인지 다행이지 몰라도 아내는 지금 당장은 제게 계획을 다시 세우자는 얘기를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살림과 육아를 해가면서 영어공부에다가 간호사 시험 준비를 하나 더 병행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2004년 5월은 우리 가족에게 아주 중요한 때입니다. 이 달은 아내가 결혼해서 전업주부 생활을 한 지 만 6년이 되기 때문에 안식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시기가 딱 떨어지는 것은 제가 2004년 4월이면 2년 간에 걸쳐 수업과정(coursework)을 다 마치기 때문에 아내가 안식년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년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1년 365일 일하는 전업주부는 어떻게 안식년을 가질까 하는 문제였는데, 저희는 시쳇말로 ‘아다리’가 딱 맞아떨어져서 뜻을 이루게 됐으니 아주 고마운 일이지요. 보통 안식년이 그동안 몸담았던 곳을 떠나 미래를 위한 준비에 투자되듯이 아내 역시 지금으로는 자신의 안식년 기간을 이곳 대학에서 간호사가 되기 위한 4-6개월 과정의 재교육(refresh)을 밟을 생각입니다. 토플 성적표를 제출해도 되지만 아내가 워낙 시험에 약한 데다가(^^) 재교육을 수료하는 것이 버겁긴 해도 영어 실력 증대나 실습을 통한 현장능력 배양 등 모든 면에서 더 이롭다 게 저희들 판단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전업주부(專業主婦가 아니라 專業主夫, househusband) 자리를 꿰차고 집에 들어앉아 공부하느라 스트레스 받을 아내를 착실히 내조하며 애들 키우고 살림하고 텃밭 가꾸면서 틈틈이 논문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물론 늦어지기야 하겠지만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더디 가도 같이 가면 되지요. 집에서 애들이랑 놀면서 화분에 물을 주고, 퇴근할 아내를 위해 저녁을 차리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저를 즐겁게 합니다.


이상은 물론 저희의 계획일 뿐이지요. 실상 우리는 한치 앞도 못 보는 근시안이 아니겠습니까? 어쨌거나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제 공부만 10년은 잡는다고 하고, 더디 가도 가족과 함께 갈 것이기 때문에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또다시 우라질 놈의 돈 문제를 꺼내듭니다. 1년도 쓸 돈을 갖고 와서 10년 공부를 한다고 하고, 또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을 하겠다고 하면, 언뜻 봤을 땐 어불성설일지 몰라도 그 분을 따르는 이들의 삶은, 제가 늘 감탄하며 읽는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표현을 빌자면, 예수를 따르는 우리네 삶이란 불가능성에 뿌리내리는(Life is rooted in impossibility)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저희 가족의 유학이 앞날에 매이지 않는 유학(幼學),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有學), 삶 전체로 공부하는 유학(遊學), 천천히 머물면서 더디 가도 함께 가는 유학(留學), 거기에다가 할 수 있다면 아내의 안식년을 챙겨줄 수 있는 유학이 될 수 있도록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간곡히 기도했듯이 유학에 대한 저희들의 진리 실험이 성공을 거두어서 하나만을 위한 유학이 아닌 모두를 위한 유학의 오솔길을 낼 수 있기를 오롯이 빌 따름입니다.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