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영적충전에 집중하라

이코스타 2006년 6월


작년 여름, LA 근교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능력 있고 헌신적인 젊은이들이 교회 봉사를 하다가 오래 버티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아주 유능한 청년 한 명이 있었는데 너무 지쳐서 섬기던 교회를 나와서 지금은 조그마한 교회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고 합니다.


얼 마 전 타 교회 평신도 한 분과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 사역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요. 그 집사님은 교회에서 성가대 총무와 구역장을 맞고 있었습니다. 성가대 악보 복사까지 혼자 다 하셔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려해도 일이 너무 많아서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제자 훈련 받는 일까지 겹쳐서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일의 분량이 너무 많아 좀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년도에는 그만 두려고 마음먹고 담당 목회자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봉사를 그만 두면 신앙 성숙이 멈춰버리니 그만 두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John Stanko는 “Life is a Gold Mine”이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1985년 John Stanko라는 청년이 교회에서 풀타임 스태프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혼자서 너무나 많은 일을 감당했어야 했기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문제는 일은 산더미 같이 많은데 이 일에 헌신하는 교인들이 너무 부족했던 것입니다. 모든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자 한 청년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 가 이 프로젝트에 함께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무엇인가 교회 봉사를 해야 한다고 부르신 것 같긴 한데 솔직히 고민이 됩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 또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결국 volunteer를 포기 했지요”


좀 다른 경우를 봅시다. 윌로우크릭 교회는 발런티어가 많기로 유명한 교회입니다. 해마다 6-7가지의 거대한 컨퍼런스가 이 교회에서 열리는데 각각의 컨퍼런스마다 수 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섬깁니다. 올 여름에 다녀온 아트 컨퍼런스에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등록했는데 여기에도 700명 정도의 발런티어들이 헌신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많은 발런티어들의 얼굴빛입니다. 단 한명도 불평과 불만에 찬 어두운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모두들 기쁨과 밝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 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나중에 Bill Hybels가 쓴 책인 “The volunteer Revolution”이란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윌로우크릭 교회 담임목사인 빌 하이벨에게 그 교회의 새로운 스텝이 질문을 했답니다. “목사님은 이미 많은 일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발런티어로 교회 사역하라고 권면하는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나요?” 빌 하이벨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아니오! 저는 사람들을 우리교회의 자원봉사자로 초청하는데 단 한번도 죄책감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단 한번도…” 왜냐하면 빌은 그들이 발런티어 사역을 통해 엄청난 축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자원봉사는 영적인 특권이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빌 하이벨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 리는 평신도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도록 초청합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자신이 미처 깨닫지도 못했던 은사를 발견하게 되고, 우리는 이를 개발시켜서 자라가도록 돕습니다. 이를 통해 저들이 용기를 내어 하나님 나라에서 한 단계 높은 책임의식을 갖게 되며, 이것은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넘쳐나는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통해 다른 사람을 touch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 봉사자들이 양 극단을 달리고 있습니다. 봉사를 통해 신앙을 따라가는 것과 신앙을 통해 봉사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경우입니다.


전 자의 특징은 과중한 부담, 피곤, 바쁨, 지침, 탈진, burn out, 영적 침체 등으로 헉헉댑니다. 후자의 특징은 균형감, 기쁨, 열정, 감격, 쉼, 열매, 변화, 성장 등으로 보람 있는 사역을 해냅니다. 물론 바람직한 봉사는 후자의 경우이죠. 이것은 사역의 우선순위, 또는 사역 철학에 따라 좌우됩니다. 한 교회가 추구하는 사역의 핵심이 교회 봉사에 있느냐 생명을 낳는 일에 있느냐에 따라 결국 커다란 차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 셀 사역, 가정교회, 소그룹, 전도, 양육 등과 같은 사역은 생명을 직접적으로 낳는 사역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핵심(core) 사역입니다. 교육, 예배, 지원, 섬김, 나눔 등은 생명을 낳도록 돕는 사역입니다.


예 배사역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무대 위와 무대 아래입니다. 무대위에 서는 예배사역자들은 항상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에 늘 긴장감이 있습니다. 자신이 먼저 받은 은혜를 나누어주고, 퍼주는 사역입니다. 자신이 준비되지 않으면 고갈되는 사역입니다. 무대 밑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은 뒤에 있지만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환경을 위해 최상의 테크니컬 퀄리티를 유지하고, 지원해야 하는 긴장이 늘 존재합니다.


양 쪽 모두 영적인 생명의 충전이 없이는 탈진하고 맙니다. 물론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영적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소 일상적인 크리스천 라이프 속에서의 영적 충전이 항상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주 일 예배를 통한 영적 충전이 1주일에 한번의 특별 외식이라면, 평상시 셀이나 소그룹을 통해 받는 영적 충전은 하루 3끼 식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사역자들이 지역교회에서 균형 있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양육 받고 양육하는 몸에 반드시 동참해야 합니다. 생명을 낳는 일에 우선순위에 둠으로써 사역 때문에 탈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유정] 거룩한 영적 낭비

이코스타 2006년 4월

2006 년 코스타에서 자주 들었던 문구 중 하나가 “영적 낭비”이다. 30명이나 되는 많은 강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영적 포텐셜에 비해 일주일 동안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주강의 한번, 또는 강의 몇번에 상담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것도 사례를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비, 가족 등록비까지 책임지고 자비량으로 섬기는 것이다. 언듯 보면 일리가 있는 말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 연변,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달려 오신 강사들의 경우는 거의 10일 가량이 강의 몇 번을 위해 낭비(?)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이것을 낭비가 아닌 거룩한 투자로 본다. 사도행전 8:26이하를 보면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신다. 명령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는 사막길로 무작정 떠나라는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고 있었고,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졌고, 아직 회심 이전의 사울은 보이는 교회마다 파괴하고 성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기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의 복음전도 사역은 점점 확장되고 있었으나,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세워야 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대의 위기였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사막 길로 무작정 떠나는 것은 시간낭비는 물론, 뻔뻔스러운 도피로 보일 수도 있다. 태풍으로 교회가 침수되어 정신없을 때 교회의 지도자가 갑자기 성령께서 지시하신다고 먼 시골로 떠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빌립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다. 사막 길에서 당시 에디오피아 여왕 밑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큰 권세를 지닌 내시를 만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까지 주게 된다. 이 내시는 분명 에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평신도 선교사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를 깃점으로 빌립도 나타나, 카이사랴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에서 복음을 전한다. 때때로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에 못미친다. 이사야 55:8,9에서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고 했다. 코스타에서는 4번의 저녁집회가 있다. 미주에서 경험하기 힘든 천여명의 예배자들이 드리는 감격의 예배의 향연이 매일 저녁 드려진다. 1,000여명이 뛰면서 드리는 열정적인 찬양과 선포되는 복음의 메시지를 상상해보라. 그 안에는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직업과 소명, 평신도와 목회자, 교파와 교회, 세대 간의 문화를 초월한 진정한 찬양과 예배의 축제가 드려진다. 다음 세대를 짊어질 진정 천국의 모형 아닌가? 이 예배를 통해 올해도 100여명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200명 넘게 2년 이상 단기선교에 헌신했다. 그뿐이 아니다. 성인 참석자 반이나 되는 500여명의 학생들이 강사들과의 1:1 상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는 최고의 상담실이 코스타 내내 운영된다. 우리 인간 편의 ‘낭비’가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결실’로 바뀌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 유학생들의 영적 부흥을 위해 이처럼 1세대가 자신의 재정과 시간을 낭비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눈물과 땀과 사랑을 투자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포기하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미지의 땅을 향해 회중의 5분의 1이 자리를 박차고 무대위로 나아가는 그 장엄한 광경을 상상해보았는가? 2006년 현재 전세계 16개 지역 즉, 남미, 러시아, 남유럽, 북유럽, 토론토, 벤쿠버, 시카고, 인디아나 폴리스, 북경, 상해, 동북차이나, 일본, 대만, 뉴질랜드, 호주, 필리핀에서 이 ‘거룩한 영적 낭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21년 전, 이처럼 말도 안되는 ‘영적 낭비’를 감히 꿈꾸고 이를 실행에 옮겼던 우리의 1세대 영적 선배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영적 축제는 지금까지 이땅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 그분들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이유정] 태풍 속에서 경험한 예배

이코스타 2006년 2월


2004년 초가을에 불청객 태풍 아이반을 기억하십니까? 당시 저는 워싱턴DC에서 노스 케롤라이나(North Carolina)의 그린스보로를 향해 막 출발하던 46인승 United Airline 여객기 속에서 아이반 때문에 2시간 이상 이륙을 못하고 비행기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무더위가 지난 초가을임에도 엄청난 태풍이 올라온다는 경고를 뉴스에서 들었기에 다소 긴장이 되었습니다. 창 밖에는 어마한 검은 구름비가 비행장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상층의 거대한 검은 구름으로부터 공항에 흩어져 있는 여객기들 위로 쏟아져 내리는 시커먼 빗줄기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마녀의 날카롭고 갈라진 혀가 비행기들을 핥고 지나가는 듯 음산한 모습이었습니다. Dulles International Airport내에 막 이륙하려던 40여대의 비행기가 꼼짝없이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태풍 아이반(Ivan)의 영향권이 북버지니아까지 미친 것입니다.


비 행기 안에 있는 승객들은 이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며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며 핸드폰으로 연락하고 사진을 찍는 등 다소 긴장된 분위기였습니다. 내 옆의 한 미국 아줌마는 “내 평생에 이렇게 심각한 상황은 처음”이라며 흥분된 어조로 전화에 여념이 없었지요. 조종사의 안내 방송에 따라 승객들은 때론 한숨을, 상황이 조금 좋아지면 환호성을 지르는 등 초조한 기다림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3시간가량 지나서야 감금상태는 풀어졌으나 안타깝게 비행기 운항은 취소되었습니다. 도착지의 성가대 수련회에서는 예정된 강의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난리였습니다. 담당 목사님은 만약을 대비해 다음날 프로그램을 당겨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공항 대합실에서의 또 다른 4시간 대기상태 끝에 새벽 1시에서야 그린스보로를 향해 출발했고 새벽 3시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나 중에 확인해보니 태풍 아이반의 규모는 역대의 어떤 태풍보다 위협적이었습니다. 시속 250㎞가 넘는 최고등급 허리케인입니다. 뉴스에 의하면 루이지애나 등 4개주 주민 190만여 명에게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습니다. 특히 해수면보다 3미터 낮은 저지대인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지역에 40년만의 최대 피해를 우려해서 120만 명에 대한 대피령이 떨어졌습니다. 재해대책본부 관계자는 태풍이 도심을 정면으로 강타하면 5만 여명이 익사하고 도시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만개의 시신용 백을 마련하기도 했답니다. 1년 후 작년 여름 태풍 카트리나가 이 우려를 재현했지요. 만일 아이반 당시만큼만 재해대책본부가 준비했어도 뉴올리언스가 그토록 처참해지지는 않았겠지요.


아 이반 태풍으로 인해 공항에 갇혀 보낸 7시간 동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40여대 안에 갇혀 있는 수천여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를 포함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중요한 약속과 스케줄들이 대자연의 심술로 인해 한 순간 깨져버린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 약속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깨뜨려 버린다면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천재지변에 대한 대다수의 반응은 수용적입니다. 거절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 감히 반기를 들지 못합니다.


로 마서 1장 20절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대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우리는 일종의 경외감을 갖습니다. 어렴풋이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경험합니다. 단 1시간이건, 10시간이건 자연의 힘 앞에 선 인간은 잠시 자신의 능력, 경험, 삶의 패턴을 일시적으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저 넋 놓고 그 초월적인 힘(power)앞에 자신의 시간을 내어맡기게 됩니다.


그 런데 하나님은 이 초월적인 자연보다 더 초월적인 분입니다. 아이반의 영향권은 북미 동남부지역에 국한합니다. 제 아무리 큰 태풍이라도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크기와 비교하면 바닷가의 모래 한 알에 있는 원자 하나도 안 되는 미미한 것입니다. 우리 은하계가 태양과 같은 별들이 약 1천억 개 모여 만들어진 별들의 집단이며, 다시 우리 은하계 같은 은하들이 1천억 개가 모여 전체 우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상상 해보세요. 현대 천문학의 연구결과 빛의 속도로 150억년을 달려가야 우주의 끝이라고 합니다. 이 우주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인간의 작은 두뇌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예 배야 말로 바로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갑자기 닥친 초월적인 존재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진행 결과에 자신을 내어 맡기듯, 주일마다 예배 가운데 나아가는 회중들은 대 자연의 그 어떤 초월적인 힘과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전능하심을 높이 찬양하고, 경배하며, 그분이 나의 아버지 되신 것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대자연의 심술의 결과는 파괴요, 상처요, 엄청난 피해이지만, 초월적인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는 구원과 치료, 어마어마한 하늘의 축복임을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정] 변화를 두려워말라

이코스타 2005년 12월


해마다 8월 중순이면 저는 뉴욕뉴저지 찬예사(찬양과 예배사역 연합모임, 대표 박규태 목사)가 주최하는 예배 컨퍼런스를 다녀옵니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입니다.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는 주일 오후 5시 경, 아내가 섬기고 있는 God’s Image 아이들과 스텝 60여 명을 태운 대형 버스, 그리고 미니 밴과 Jeep 한 대가 함께 출발했습니다. 목적지는 뉴욕에서 서쪽으로 2시간 떨어진 로잔데일이라는 소도시의 산중턱에 있는 수양관이었습니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운전기사의 착오로 1시간을 헤매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벽 한 시 즈음 겨우 위치를 찾았습니다.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가는 비좁은 산길을 올라가다가 갑자기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것은 눈앞의 진흙길에 버스 앞바퀴가 빠져버렸습니다. 최근의 홍수로 인해 도로가 진흙 밭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1톤이 넘는 대형 버스의 앞바퀴는 진흙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아직도 1마일 정도는 더 가야 하는데 칠흑 같은 밤중에 지쳐있는 60명의 아이들에게 무거운 짐 가방까지 들고 걸어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미국인 기사는 더 이상 나아가면 버스가 그 진흙 속에 가라앉는다고 난리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늘에서는 억수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진퇴양란입니다. 마침 진흙길 위쪽에는 차를 돌릴 만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새 벽 두 시, 겨우 연락이 되어 급하게 불려나온 미니 밴들이 도착했습니다. 아이들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진창이 되어 깊게 파인 진흙길을 걸어 올라가 미니 밴에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의외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8시간 넘게 버스 안에서 지쳐있어야 할 어린이들의 얼굴에는 짜증도 없었고 불평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생동감과 흥분된 미소를 보았습니다. 새벽 2시 반, 수양관에 도착하여 짐을 찾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도 여전히 밝았습니다. 의문점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 제 딸에게 그 당시 아이들의 반응에 대해 물었습니다. 대답인즉슨 아이들은 너무 오래 버스 안에 있어서 오히려 심심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비록 불편했을지라도 그들에게는 오히려 활기를 준 모양입니다.


아 이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변화를 즐깁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변화를 불편해합니다. 새로운 시도를 싫어합니다. 이미 신앙생활을 오래 동안 해 온 신자들도 신앙의 타성에 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도전보다는 현재에 만족하여 안주하는 경향이 커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적인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때로는 마치 개벽과 같은 엄청난 변화를 기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자라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생명이 들어가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변화의 시작입니다. 고후 5:17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고 했습니다.


예 배사역에도 끊임없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현대 예배라 해도 구태의연한 자세는 또 다른 구세대적 전통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그래서 예배사역에는 평가가 필요합니다. 사역 평가를 포기하는 것은 예배갱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미 드린 예배를 평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예배를 위해 어떻게 하면 더욱 정련된 사역이 가능할지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한 번 드린 예배를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드린 예배는 정죄해서도 그 자체를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받으신 예배를 우리가 도마 위에 올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 사역은 반드시 평가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욱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을지 프로그램과 시스템적인 접근, 즉 사역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변화를 포기하면 우리의 예배사역은 생명을 잃습니다. 더 나은 예배 사역을 위해 변화를 기대합시다. 그 변화를 통해 우리의 삶에도 구체적인 변화가 시작되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