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성]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과 각자 현실에서 맡고 있는 제자의 삶을 옆에서 볼수 있는 것이 감동이었습니다.”

홍진성
2011 Atlanta gpKOSTA 후기

 

2011년 3월 24일부터 26일까지 애틀란타에서 gpKOSTA가 열렸습니다. 2박3일간 30여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하나님 나라와 제자의 삶에 대해서 배우고, 소화하고, 고민하면서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작년 시카고 코스타 엑스포에서 gpKOSTA 개최를 희망하며 애틀란타 지역에 압정을 꽃아던게 엊그제 같은데 그 작은 바램이 이렇게 현실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몇몇 지체들과 이 모임을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큰 기대와 동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각자의 삶 때문에 간간히 모임을 준비하면서 점점 처음 원동력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에 시작은 기쁘게 했지만 점점 어떻게 해야될지 잘 모르겠고, 기도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gpKOSTA 시작하는 날 큰 기대가 없었던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준비도 부족하고, 인원도 적고, 심지어 어떤 모임인지 오해하고 온 지체들도 있었지만 첫 시간부터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큰 은혜였습니다. 찬양, 강의, 예배, 조모임, 식사 등 모든 시간이 너무 자연스럽고 문제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점점 참석한 지체들이 기쁨으로 하나가 되어 예배하고 배우고 나누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그것을 진행하셨습니다.

강의로 하나님의 나라와 제자도를 배우고, 조별 모임을 통해 각자의 가치관과 생각들을 나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실제적인 배움은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과 각자 현실에서 맡고 있는 제자의 삶을 옆에서 볼수 있는 것이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확신하신다는 한 믿음의 선배의 고백과 삶의 이야기는 제 기억에 앞으로 여운으로 계속 남을 것 같습니다.

gpKOSTA를 마치고도 계속 만났던 분들과 연락을 하면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부분이 사람들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 정신없이 강의 듣고, 예배하고, 조모임하면서 친해져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마 우리는 각 지체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이루어갈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강사님들과 간사님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만난 형제자매들 모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김진영] gpKOSTA에서 행복한 기억 (2011년 gpKOSTA-Atlanta를 다녀와서)

gpKOSTA에서 행복한 기억
 


먼저 다른 좋은 간증과 후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소한 후기가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러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gpKOSTA에게 감사 드린다.


이곳 Atlanta에 온지도 6개월이 다 되어간다. 한국에서는 지체들과 함께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은 내게 익숙했고, 예배의 자리는 늘 찾기 쉬웠다. 오히려 많은 예배와 모임으로 인해 치여서 불평할 때도 있었다. 항상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자리에서 난 하나님을 찬양했고, 반주했었다. 기대함은 있지만 ‘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은 없었다. 사실 몰랐었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 


그러나 gpKOSTA에서 처음으로,‘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사모하는 이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고, 찬양 한 곡으로도 서로 모르는 지체들간의 마음을 열게 하였으며, 우리 모임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gpKOSTA를 기대하면서, 마음 속으로 바랬던 것 중 한 가지는 이곳에서 좋은 지체들, 그러니까 나의 마음을 나눌 수 있고, 주를 향한 열정을 가진 지체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포커스를 맞춘 나의 조금은 피상적인 나의 기도를, 예배를 통해 마음을 공유하고 서로 안의 고민들을 나눔으로써, 각 사람의‘고민과 갈등, 그리고 중심’을 깊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셨다. 늘 그렇지만,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넘치게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도 갑작스럽게 섬기게 된 반주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갈망했었고, 그 감격과 열정이 너무 벅차서 찬양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찬양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그 시간이 내게는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 정말 중요한 보물을 되찾은 것 같아서 너무 감사했다.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도 주님을 찬양하는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시간이었다. 또한 여러 사람들의 나를 향한 진실되고 값진 고백들이,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닌, 나의 영혼을 위로했고 그래서 더 감사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컨퍼런스와 다르게, 이곳에서 내가 가장 기억이 남는 이유 중 하나는‘혼란스러움’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가기 전부터‘소명’ 책을 읽게 하시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셨던, 바로 내 인생의‘소명, 혹은 비전’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무역회사에서 일에 재미를 붙였던 나는, 영어공부를 더 해서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희망하는 바람과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 반주자가 필요하다는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어떤 100%의 확실한 목적은 없었지만, 나름 괜찮은 이유를 가지고 왔는데, 역시나 그러한 나의 인간적인 생각들은 점점 거품이 되기 시작했고, 정말로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난, 그때 주신 것에 감사하며,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지, 나 자신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하고 계획해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고민과 함께, 강동인 집사님의 말씀을 통해, 소명은 단순히 직업관이 아닌, 그것을 휠씬 뛰어넘는 예수그리스도만이 비전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세상에서의 숫자논리에 가려진 잘못된 세계관에 관해서 확실하게 꼬집어 주셨고, 그렇기 때문에 내 삶 가운데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그 세계관 역시 조목조목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것들을 하는 작업을 통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또한 그러한 잘못된 세계관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등등의 혼란스러움이 느껴졌고, 이곳에 괜히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첫째 날 들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집사님께서는 그 혼란스러움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옳다고 말씀해주셨고, 그 강의를 이어서 안상현 목사님을 통해서, 내가 힘써야 할 것은, 어떠한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이다.‘에덴동산’그것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바로 하나님과의‘관계’의 회복이라는 것을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좇아 기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크게 힘이 되었던 것 중 하나는, 질의응답 시간에, 정말 겸손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계신 문상호 교수님을 통한 것이었다. 한 사람이 주 앞에서 서 있는 그 모습이, 내게 어떤 것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향력을 주고 계시다는 것이 그 분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고, 나 역시 그분과 같은 삶을 살고자 도전이 되는 시간이었다. 

나 역시 포기하지 않고, 나의 중심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그 혼란스러움은 점점 정리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그 시간들을 통해서 나의 허상과 또한 미혹될 만한 것에서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다른 말씀들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내 머릿속에 들어오셔서 하나하나씩 정리해나가시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주시고, 위로가 필요한 부분 또한 놓치지 않고 일하셨다. 

 지금까지 Atlanta에서의 시간들이, 어쩌면 세상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듯한 경험이었고, 앞으로의 예배에 어떤 마음으로 나와야 하는지도 돌아보게 되었으며, 이전에 몰랐던 예배의 더 깊은 가치를 알게 하셨고, 그럴 때에 드리는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는 지 또한 경험할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없어 봐야, 그 마음이 가난해 봐야 늘 있던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 되는 것 같다. 또한 마지막으로 세심하게 프로그램과 광고, 무엇보다도 너무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해주신 gpKOSTA 동안 섬겨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김운학] 2010 NC-gpKOSTA를 참석하고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는 분께

 

벌써 3주가 지났네요.  3월 11일부터 13일까지 있었던 NC-gpKOSTA에 참석한 것이 말입니다.  2004년부터 코스타에 참석했으니 벌써 여섯 번이나 다녀왔네요.  매년 코스타에서 돌아오면 변화되지 않은 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하지만, 그때마다 저를 변화시키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사는 저를 사랑하시기를 멈추지 않는 당신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수난일입니다.  2000년 전 당신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당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당신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제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며 그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를 결단하는 마음으로 제가 2박 3일 동안 집회에서 받았던 은혜들을, 그중에서 제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강의들을 중심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강의였던 섬김의 리더십과 성경적 세계관이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첫 번째 강의는 신명기 17장 14절부터 20절 말씀을 배경으로 이루어 졌는데 요점은 Leadership Transformation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세계관으로 본 리더십은 to do good이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리더십은 to be well 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to do good 에서 to be well 로 가는 것이 Leadership Transformation 이고 그것은 4가지 단계로 나누어진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Innovation 이고 두 번째는 Integrity 이며 세 번째는 Influence 그리고 네 번째는 Incarnation 입니다. 

 

Innovation

이것은 내면의 끊임없는 변화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에서 말한 인식/초점의 변화가 이것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에서 정녕 죽으리라.  인식의 틀이 회복되는 것, 더 이상 육의 제한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대하게 버리고 온전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리더로 거듭나는데 절대로 필요한 변화가 아닐까요?

 

Integrity

이것은 치우침 없는 양심입니다. 현혹된 인식이 회복되면 이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정욕의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강의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치우침 없는 양심은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다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내가 참으로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안에서 발견되기 위한 것입니다. 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언제나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Influence

이것은 지시보다 마음의 감동입니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인간들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지배하려고 하고 이웃을 사랑할 대상이 아닌 경쟁해야 할 상대, 즉 내가 밟고 일어나야만 하는 상대로 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속적인 리더들은 권력을 사용하여 명령으로 사람들의 몸 움직이려고 하지만 성경적인 리더는 사랑으로 이웃에게 감동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저는 언제쯤 세계관이 회복되어 사람들을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력이 아닌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Incarnation

이것은 완전한 자기부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마음이 진정한 자기부인입니다. 

이렇게까지 낮아지고 섬기는 것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의 참 의미가 아닐까요?

 

변화는 기도, 양심은 순종, 영향은 겸손, 그리고 자기부인은 섬김입니다.

 

Leadership and world view transformation이라는 과정은 말씀으로 시작되어서 말씀으로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변화의 시작도 말씀이고, 내 양심을 지켜 주는 것도 말씀이며, 내 마음의 감동을 주는 것도 말씀이고, 섬김의 본질도 말씀이라는 것을 이번 집회를 통해 알게 되어서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제 이것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일만 남았군요.

 

6년 전 무더운 한여름 밤 자정에 아무도 없는 제 방에서 조용히 성경을 읽다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 자신을 Spiritual Cinderella라고 부릅니다.  12시 전에는 세상의 화려한 자녀였지만 12시 후에는 초라한 당신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저를 사랑하시기에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알게 된 그날을 돌아보면 지난 6년을 돌아봅니다.  그동안 걱정도 많이 시켰고 불효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붙잡아 주시는 당신.  이번 코스타에서 내린 결단은 이 과정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당신이 제 손을 놓지 않으시는 한 저도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호적에서 파버리시고 아들이 아니라 부인을 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이 글을 맞추고 나면 저는 벚꽃 놀이를 하고 있겠죠. ^^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와 지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이 가고 꽃 피는 봄이 왔듯이

D.C.에 벚꽃이 피듯 N.C.에 하나님의 나라가 피기를

차가운 마음의 겨울도 가고 따뜻한 봄이 오기를

떨어지는 꽃입처럼 제가 낮아지기를

 

아들됨과 채찍질하심을 같이 받기를 사모하는 자가


[김주혜] ’06 gpKOSTA-MO를 마친후


2006 Kosta에 오르던 나의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캔사스 선교교회에는 담임목사님이 계시지 않은지 이미 8개월이 지난 상태였고, 청년부도 그와 동시에 와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코스타에 대한 준비와 기도보다는 담임목사님의 청빙과 청년부의 부흥에 대한 염려뿐이었다. 코스타에 참석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마음은 내가 먼저 지역과 교회를 섬기는 화해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엑스포 기간에 늘 지나치던 gpKosta 사역팀 보드앞에 서게 되었고, 우리 Missouri 지역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는 그리고 그분의 마음에 합한 리더들이 세워지길 소원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압정을 꽂게 되었다.


코 스타 끝무렵에는 안고왔던 두가지 염려를 중보기도팀에 기도제목으로 올려드리고 다시 지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불과 2개월 사이에 기도응답을 주셨다. 한국과 미국 각지에서 새로운 청년들을 보내주셨고, 그리스에서 선교로 헌신하시던 목사님을 우리 교회에 보내주셨다. 청년부의 새로운 리더로 내게 세워지게 되었고, 함께 헌신하게 된 지체들과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 안에 이 새로운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리더십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 러던 중 gpKosta가 Missouri 지역에서 열리기로 결정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준비위원으로 섬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고민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교회 안에서도 맡겨진 일이 이미 포화 상태였고, 학교 공부도 너무 벅찬 상태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yes 였다. 기대하는 마음과 동시에 걱정하는 마음도 많았지만 등록담당으로 섬기게 되었는데, 내게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갑 상선 항진으로 인해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하고, 학교 수업도 채워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업도 철회하고 나 자신을 추스릴 수 없는 실망 가운데 일에 대한 부담감이 밀려왔다. 땡스기빙이 다가올수록 그간에 열릴 gpKosta에 참석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조차 밀려왔다. 그러나 일을 진행하시는 간사님과 다른 준비위원들의 도움으로 마음의 부담을 먼저 덜어주셨고, 주변의 도움으로 몸도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시는 마음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이었다.


gpKosta 가 시작되었고 하루하루가 너무나 벅차고 감사했다. 내가 일에 매여 소홀해 했던 중요한 것들, 말씀과 기도에 대한 중요성과 나의 올바르지 못한 세계관들을 바로 보게 하셨고, 어떠한 마음으로 공동체와 내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섬길지 확실히 알려주셨다. 준비위원이라 바빠서 집중하지 못할까 염려했던 것과 달리 시간마다 집중할 수 있었고, 조별모임을 통해 더 깊은 나눔을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했다.


아 직은 아직도 부족한 내 자신이지만, 연약한 부분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린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의 작은 소원 하나도 이미 아시고 나의 작은 기도를 통해 이루시는 분이심을 또 한번 알게 하시니 내안에 넘치는 감사를 이루 말할 수 없다.

[황보영] Arizona gpKOSTA를 참석하고


gp Kosta가 애리조나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마치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예비해 두셨던 일인 것처럼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 Kosta를 통해 저에게 보이고, 들려주시려는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분명하게 들었고, 이런 기대와 설렘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로 이어졌습니다.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은 평소에 암송을 여러 번 해서 늘 외우고 있었지만, 이번 gp Kosta를 통해서야 저는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다른 누군가에게가 아니라, 바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 했지만, 여러 가지 핑계들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명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피하려 했던 부끄러운 저를 고백하며, 이렇게 제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주시고, 잘못된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 는 크리스천으로서 교회를 성실히 섬기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면서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믿으며 제 삶에 만족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라 제가 기뻐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했지만, 정녕 제가 왜 지혜로워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는 지극히 이기적이었으며 어리석었습니다.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제 마음 한구석에는, 지혜로워져서 사람들에게 칭찬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저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간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런 저에게 하나님은 여러 강사님들의 강의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첫 날 있었던 최원영 교수님의 강의에서, 성공적인 삶은 창조주의 의도를 잘 파악하여 그 의도대로 살아가는 삶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잘못되었던 제 중심적인 삶을 회개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자 하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묵상을 통해 하나님은 저에게 전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셨고, 저는 묵상 적용을 하기 위해 원투원 사역에 대한 small group discussion을 선택하였습니다. Discussion을 하면서 전도하기 위해 제가 준비하고 훈련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앞으로 닥쳐 올 수 있는 어려움은 어떤 것들인지, 또 그러한 어려움들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원투원 사역에 얼마나 큰 인내가 수반되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에게 절실하게 다가온 것은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이었습니다.


저 는 인내도 부족하거니와, 사랑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영접하지 않은 친구를 인도할 때에 한두 번 시도해 보고 안 되면 ‘나 아니고도 다른 사람이 인도하겠지. 하나님이 계획하신 또 다른 사람이 있겠지.’ 라는 교만하고 나태한 생각으로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는 저에게 불편한 기분을 표시하는 친구들에게는 ‘그러다가 나중에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You deserve it.’ 이라는 못된 생각으로 전도 하려는 노력을 중단한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 마음이 하나님께서 영혼 하나하나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닮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리고 강동인 간사님의 성경적 직업관 강의를 통해 역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은 제가 하는 공부가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쓰일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과, 단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만큼 제가 성장되어 있어야 쓰임 받는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었고 학업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더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결단들을 놓고 과거의 저의 모습을 떠올리면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능력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저에게 약속하신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기억하며, 다시 용기와 희망을 얻습니다. 2006년의 시작을 코스타와 함께 하는 축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과 수고하신 강사님, 준비위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시 만날 때에 더욱 더 신실한 하나님의 제자가 되어 있을 저와 여러분들을 기대해 봅니다.

[심성은] 나에게 하나님은…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소그룹 모임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난 항상 ‘글쎄.. 모르겠어..‘ 아니면 교과서 적인 깨달음 들을 털어 놓았던 것 같다.


내가 느끼는 그분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왕’이시다. 


모태 신앙 덕에 배운 그분의 존재 명칭은 내가 느끼는 하나님을 ‘왕’이라는 언어로 격하지 않으면서도 내 심정을 고스란히 설명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 분은 머리를 조아려서 보이지 않는 왕처럼 나에게는 멀고 또 거리가 있는 분이었다. 세상에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믿어져서 믿는 사람, 믿어져도 안 믿는 사람, 안 믿어 져서 안 믿는 사람, 그리고 안 믿어 져도 믿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나는 그 네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라고 하는 것과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에서 허공에 대고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향해 기도하는 것은 장단 없는 음악에 춤추라는 것처럼, 참으로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더 구나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고 나를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셔서 아버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로는 정답을 컨닝 하는 수험생 마냥 그렇게 다른 사람의 믿음을 곁눈질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저 그분의 존재만으로도 무조건의 믿음을 내어 놓은 크리스찬들이 내 눈에는 그저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심성은’이라는 인간의 항변


세 상 만물이 보여주는 섭리와 아름다움을 바라볼 때면, 그분은 정말 살아계시고 대단한 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고단할 때가 많다. 내 삶에 대체로 만족하며 감사하기는 하지만, 아담이 저지른 죄 때문에 땀 흘리고 종신토록 수고해야 소산을 먹을 수 있는 현실 말고도, 아픔과 고통, 贊?허무가 가득 찬 이 세상이 고단한 것은 (모든 것을 이 지면에서 설명할 수 없지만,)난 내 삶을 통해 고스란히 겪은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혹은 고통의 내용가운데 평안을 달라고,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은 전능하고 뱀을 주는 아버지가 아니니까, 떡덩이 대신 돌을 주는 분이 아니니까 구하라고, 두드리라고 그러면 내 아버지가 주신다고, 나는 다른 기독인들과 같이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많은 경우 기도를 통해 일어났다고 간증하는 내용을 보면 정말 거짓말처럼 불행이 전화위복이 되어 감사한 것 아니면 그 내용은 고스란히 떠 않았지만, 위로의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내용이 전부이다. 말하자면 누구에게는(또는 어떤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누구에게는 (또는 어떤 때는) 그저 위로하는 나약한 하나님으로써, 세상에서 벌어지는 형통한 일에 대해서는 그 전능과 선하심에 대해 찬양을 받으시면서,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때는 그저 거기서 위로하셨다는 내용으로, 혹은 인간의 죄나 세상에 관영 하는 사탄의 행패로 그 책임과는 관계없다는 설명을 들을 때 나는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을 넘어 이해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나는 내가 기도한 대로 그분이 들어주시지 않은 사건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시간이 흘러 내가 죽을 것처럼 여겼던 문제들이 적절한 시기에 해결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믿으려 해도, 도대체 일관성이라고는 구약 내에서 (전능하신)혹은 신약 내에서(위로하시고 함께하시는)도 찾기 힘든데 하물며 내 삶을 통해서는 더욱 알 수 없는 그분의 섭리 기준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 런 분이 창조 섭리아래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하나님을 온전히 감각할 수 없는 죄의 유전자를 타고난 나에게 사랑과 신뢰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분을 독재하시는 왕으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역사와 수천의 증인들의 말을 믿고 인간으로 지음 받은 존재 목적에 충실 하라고, 로보트가 아닌 존재로 창조했다면서.. 사랑과 신뢰라는 것이 일방적 일 수 없는 것 아닌가..


많 은 사람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싫어도 떨쳐낼 수 없는 모태신앙인들의 책임감- ‘믿어야 하느니라’ 에 나는 정말 노력했었다. (물론 내 기준에서) 나의 멘토분과 이야기도 해보고, 또 다른 기독인들과도 상담을 해보았다. 세뇌 적 진단- 기도와 말씀으로 모든 현실의 문제 해결책을 내어놓는 교육에 의해 나를 자책해 보았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믿음이 생기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는 뭔가.. 심지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있었던 것 같다. 교회를 내 집처럼 드나들고 소위 영빨이 센 집회에 가도 내 종교적 감흥의 유통기한은 짧기만 하고, 어떻게 해서든 ‘믿어 보려는’ 의지조차 방전되어가고 있었고 냉소적인 나의 마음은 그분에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미국여행 그리고 KOSTA


그 즈음 스스로의 자질에 실망한 8년여의 직장생활에서도, 내 어깨에 얹어진 책임감, 의무감에서도 벗어나 쉬고 싶었다. 그래서 홀로의 미국여행을 무작정 계획했다. 우습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미국으로 여행 간다고 떠벌리고 다닌 것이 민망해서라도 가야했다.


여 건과 환경이 순조롭지 않았다. 사직서를 내고 서른 넘은 딸이 갑자기 미국으로 여행을 가겠다고 하니(그것도 6개월이나) 가족들의 질타는 두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친척들의 잔소리까지 들어야했다. (뻔한 시집이나 갈 것이지..의 종류와 신변의 걱정) 이 문제를 놓고 기도 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 같은 건 들을 수 없었고 환경의 인도하심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가지 말아야 한다는 쪽으로 환경이 만들어져갔다.
건강도 안 좋아졌고 계획적인 스타일을 좋아하는 내가 구체적인 여행계획도 공부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허락을 겨우 받고 전화로만 만났을 뿐 한번 도 만난일 없는 Atlanta에 계신 목사님과 Iowa에 친한 선배가 ‘오라’ 는 말에 대책 없이 무조건 티켓을 끊었고, 하루전날 짐을 꾸역꾸역 꾸려서 공항으로 갔다.


정신없는 몸과 맘을 이끌고 미국에 온지 한 2개월이 지났을 때.. NW gpKOSTA 준비위원 이었던 선배의 무조건적인 등록과 협박(?)에 NW gpKOSTA에 참석하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선배 때문에 참석한 NW gpKOSTA에서 처음에는 자비량으로 사역하시는 강사 분들의 헌신과 구체적인 강의내용에 조금 놀랐었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배낭에 침낭을 둘러메고 하나둘씩 모여드는 유학생들의 모습에 더 놀랐다.


KOSTA의 어떤 내용이 좋았노라고 나는 딱히 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허공에 대고 태어남을 저주했던 욥에게 그가 항변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시면서 감동을 주시던 그 모습처럼, 하나님은 나에게도 그렇게 다가오셨다.
NW gpKOSTA가 끝나고 한 이틀쯤 지난날 밤에 한 강사님과 하루에 성경을 3장씩 읽기로 약속한 것이 생각나 성경을 읽던 중.. 어떤 가시적인 현현도, 청각을 통한 음성도 아니었지만,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믿음이 생기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는 뭔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 모든 것은 전적인 그분에 은혜라는 사실이다. 그분이 주신 은혜가 아니면 나는 그분을 고민할 수도 하나님을 부를 수도 없고 성경의 인쇄된 글자 하나라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셨다.
내게 작게나마 믿음이라는 것이 생겼다면 그것은 온전히 그분에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인 거다! 노력하는 마음도 그분의 은혜라는 것.


그 은혜의 흔적이 더욱더 분명해질까 하는 기대로 WA gpKOSTA를 참석하려는 마음을 주심으로 교과서적인 깨달음에 지쳐있던 오랜 내 갈망과 답답함에 하나님은 그렇게 응답하셨다. 


그 리고 KOSTA와 여행을 하며 만난 많은 좋은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홀로 다닐 때 마다 일용할 양식이상으로 나를 축복하시는 그분을 느끼게 해주셨다. 수만 가지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게 하시며 결국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정보를 담은 어떤 칩 같은걸 마치 마음속에 심기라도 하시는 것처럼..


에베소서 2장 8절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면..


솔 직히 그 깨달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얻고 싶은 대답들이 있고, 사람의 죄도 하나님의 선이나 악으로 판단할 수 없는 회색지대에 대한 회의는 남아있다. 아직도 먼듯하지만, 나를 다듬어 가실 그분을 믿는다. 이 글에 대해 내게 회자되어 돌아올 사람들의 반응들이 눈에 선하다. 나의 신앙에 대한 답보에 대해 불같은 성령의 힘으로 인생을 180도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언젠가는 너도 하나님의 감격에 겨워 살 거다”라는 등의 아래를 쳐다 보는듯한 태도- 확언컨대, 그러한 태도는 받아 볼 만큼 받아봤다. 정말이지 왜 울음에 묻혀 겨우 새어 나온 ‘하나님’ 한마디가 그 어느 분들의 유창한 백 마디로부터 쓴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신앙적 충고를 듣지 않으려는 교만한 마음으로 밀어내는 저항이 아니라, 믿음이나 은혜가 같은 돌이라도 누구에게는 반석이고, 누구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는 그 천차만별의 다름을 이해 받기를 바라는 소망을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켠 이 글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그러한 동정 아닌 동정이나, 어떤 집회가 나에게 좋았으니 당신들도 가보라는 상업성 멘트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나와 동일한 고민과, 같이 힘겹게 답을 얻고자 수고하고 애쓰고 그리고 돌아서서 울고 있는 그 어떤 이들에게 나도 그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노라고, 같이 걸어가자고 내어놓고 싶은 마음에 답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셨듯이 오늘날에도 나와 함께 걸어갈 어깨 쳐진 형제자매들 뒤에서 함께 해 주시지는 않았는지 뒤돌아보는 마음과 함께….


내가 알기로 구원의 길은 믿음이다. 끈질기게 기다리되 너무 많은 회의로서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야 말로 구원으로 통하는 믿음의 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