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1, 2006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본 세미나는 김원기 목사가 KOSTA/USA 2002에서 복음 입문을 강의한 내용을 녹취한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도 살펴보고 개인적으로 복음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내 삶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 간증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Gospel이 헬라어에서 나왔는데,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소식이 나에게 어떤 상관이 있는가? What does Gospel mean to me? 아무리 좋은 사상, 이론이라고 해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복음은 십자가의 도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The message of Cross입니다. 1세기에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요즘 우리에게는 electric chair라고 할 수 있어요. 사형 집행 도구입니다. 아주 극악한 범죄를 한 사람, 특히 국가에 위협을 가져왔던 사람들에게 다시는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공포심을 일으키는 사형입니다.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죽기까지 사흘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저렇게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데, 그리고 부활을 했다는데, 교회에서 그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 message of cross 그것이 인류의 혁명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의 영향이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어요. 어떤 종교가 시작되었는데, 그 교주가 법을 어겨서 전기 의자에서 죽었습니다. 혹은 가스실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범죄자가 죽었는데 거기에 어떤 파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같이 다니던 사람이 그 메시지를 막 전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세상에 존경할 사람이 없어서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존경해야 하느냐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교주가 죽었는데, electric chair에서 죽었는데, 그것을 찬양하고 electric chair를 그려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보면 십자가에 대한 메시지 때문에 사람들이 두 가지 부류로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한쪽에서는 그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다 이렇게 말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에 대한 메시지를 들을 때 한쪽은 그런 미련한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관 중에 하나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의지가 없으니, 의지가 약하고 자기 혼자 인생을 개척하기 힘든 사람이 무언가 의지하고 싶으니까 교회에 다니면서 신을 의지한다 이런 것이죠. 들어가서 보면 별게 없다는 거에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부활했다, 그리고 창조했다 뭐 이런 것이고요. 교양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들은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느냐. 종교는 마약이다, 무식한 사람들이 먹고 한번 마약에 중독되면 계속 먹어야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 대한 영향력을 체험한 사람들,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십자가 사건에 수제자인 베드로도 새벽이 오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다음에 사도행전 처음에 나오는 베드로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있습니다. 다시는 예수에 대해서 말하면 십자가에 대해서 전하면 너를 죽이겠다는 협박 앞에서 그는 나는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배신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가 죽었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순교하는 사람으로 변했냐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종교는 교리가 아니고, 이론이 아니고, 신학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선하게 살면 갈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하면 갈 수 있지 않으냐, 고행을 하면 갈 수 있지 않느냐, 내가 나를 벗어나면 갈 수 있지 않느냐 이렇게 접근을 합니다.
전기에 대한 비유를 들어보면 전기 이론을 공부한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전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기등을 설명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론은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이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들어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제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어떤 사람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전기가 뭔지 몰라요. 설명을 합니다. 전기라는 것이 있는데, 전구를 끼고 스위치를 켜면 불이 들어온다고 말하면 수긍을 안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이 power of God 그런 것이죠.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사실 그렇죠. 가장 쉽게 말씀 드리면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의 그룹을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율법주의자였어요.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이라는 사람 밑에서 공부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살다 보니 갑자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말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인 거 전혀 쓸모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런 알아 들을 수 이야기나 하니까 뭐 모르는 사람들, 여자들, 어린이들 따라 다니는 겁니다. 사울이 보기에 이것은 사회를 좋지 않는 쪽으로 끌고 가는 독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죠. 교회를 없애는 것에 헌신하니까 다메섹이라고 하는 도시에 가서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올라가다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그 신앙을 자신이 소유하면서 자기가 핍박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갖고 추종자가 되니까 그 사람의 친구들이 얼마나 눈꼴 사납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야기 할 수 있고 제가 잠깐 소개는 하겠지만, 복음의 핵심은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탄생할 때도 천사들이 전한 메시지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말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데, 그것을 만졌고 느꼈고 체험했고 그것을 증거할 수 있다.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체험했습니다. 복음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personality입니다. 그분하고 내가 만나는 거에요, 그 만남을 통해서 reality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1954년 제가 태어나기 전에는 김원기라고 하는 person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난 다음 죽기까지 김원기라는 인격이 존재합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는 제 인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거듭난다라는 말을 써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질문 했는데,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문이 막히는 거에요, 거듭나다니, 당시에 공부를 많이 한 니고데모라는 분인데, 이해하기 힘든 거에요.
나1976년 8월 13일, 저는 기억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김원기는 옛사람입니다. 이후의 김원기는 그전의 내가 아니에요. 내가 태어나자 마자 울자마자 처음 본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이었겠죠. 인격을 가진 어머니를 만났어요. 제가 거듭난 후에는 인격을 가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 있어요? 어머니가 없으면 제가 없겠죠. 그런데 제가 거듭났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믿지 못해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을 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셨죠. 성령이 하시는 일도 그렇다. 성령이 지나고 나면 성령의 바람이 분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네가 어떻게 그것을 믿냐, 하나님을 보았냐, 그러나 세상에서 보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와요.
목사들은 말만 하면 하나님 만났다고 하더라. 그것이 사실이냐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알고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압니다. 마치 그렇게 비겁했던 제자들이 목숨 걸고 순교했던 것처럼,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건 아니건 something happened 이건 인정할 수 있겠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기쁜 소식이냐? 복음이라고 하느냐? 그전에는 나쁜 소식이 있었다는 거지요. 우리는 범죄했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나누는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다리가 없습니다.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거리입니다. 골짜기가 우리의 죄악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아서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배드뉴스라는 것입니다.
굿뉴스는 뭐냐. 내가 범죄 했고 그 범죄의 대가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죽고 난 후에 영원한 멸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값입니다. 내가 살인을 하는데 한명을 죽였던 열명을 죽였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니님이 보실 때 나를 구원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구원하려면 나를 대신해서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 생명을 바칠 사람이 의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의인이 있으면 대신 죽어줄 수 있는데 그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 누군가 속죄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을 찾아보아도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죄짓지 않은 사람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되어 있던 식민지 총독도 그랬습니다. 왜 너희들이 이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구속하시고 나를 속량하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redeem,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신문, 잡지 이런 거 보면 쿠폰이 있죠. 갖고 상품 살 수 있습니다. redeem한다고 하죠? 그거 가져가면 돈 깎아줍니다. 그걸 할 때 redeem,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죽으시고 우리들에게 쿠폰을 준 것입니다. 그 쿠폰에 영생, 죄사함 이렇게 써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시고 나에게 그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예수님이 주신 영생을 하나님께 드리면 redemption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구원 salvation, 영생 eternal life, 죄사함 forgiveness of sin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이고, 기독교에서 가장 어리석은 소리, 그러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쿠폰을 받으면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쿠폰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속량해주마, 구원을 주마, 죄사함을 주마 이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펄쩍 뛰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려면 순서대로 해야지, 착한 사람에게 먼저 영생을 주고 상을 많이 줘야지,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벌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죠. 기독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저꼴이 아니냐고 그렇게 비난을 합니다. 조금 지각이 있는 사람이 교회를 보면 비난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너무 당연해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당연합니다.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고 복 받는다 이렇게 가르쳐야지 이렇게 말하는 거지요. 쿠폰을 바꾸는 과정을 믿는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뭘 믿는다는 거에요? 나는 쿠폰에 적혀있는 대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애들을 갖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애들 키우면서 보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아요. 여기 있는 형제는 아주 못됐다고 합시다 근데 제 아들이에요, 그리고 옆에 있는 자매님은 아주 착하다고 합니다. 비하면 30배는 더 착해요. 그런데 둘다 문제를 저질렀어요. 누구에게 더 관대할 것 같아요. 제 아들에게 입니다. 자식하고 사이가 좀 안 좋잖아요? 누가 더 잘 것 같습니까? 아버지가 더 잘못 잡니다. 자식을 야단친 게 더 속상합니다. 너희들이 잘 살아서 오면 내가 주는 게 아니고 너는 내 자식이기 때문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는 순간 뭔가 신비로운 것이 발생합니다. 이론이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체험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하나 더 봅시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람들이 말하는 말 중에 어디를 가든 꼭대기만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똑 같은 산을 오른다는 가정이 있지요. 만약 다른 산을 오르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정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복음이 유일한 길이냐 이런 논쟁을 할 수 있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체험한 것을 증거할 때는 내가 아는 것을 말할 수 있겠죠. 다른 종교에는 그 종교가 추구하는 결론에 다다를 수는 있겠죠. 그런데 제가 아는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지는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굉장히 중요한 바울의 고백 이에요.
저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외가는 불교를 열심히 믿었고 아버지는 무신론자셨어요. 내가 중학교 시험을 칠 때, 당시 불교에서 제일 유명한 성철스님이란 분을 찾아가서 절을 3만번도 하시고 그랬어요. 나이가 들면서 종교 생활이 없어졌죠. 중학교 2학년 중간에 여러 가지 이유로,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인생의 밑바닥에 빠져버렸습니다. 마치 열차가 고속도로 달리다가 부딪혀서 산산조각 난 것처럼, 그런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어요. 아마 그 당시에 갑자기 우울증이 심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냥 삶이 무너져버렸어요. 빛 가운데 있다가 아주 삭막한 어둠 속에 들어간 것처럼.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심각하게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학교 생활 잘 했었지만, 완전히 그만 두었고, 술독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학교에는 형식적으로 가고 학교 끝나면 곧장 술집으로 가는 게 삶이었습니다. 술 마시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더 심해지니까, 점점 방황이 심해지는 것이지요. 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삶이 깊은 염세주의로 빠져들게 되었어요. 사춘기의 방황보다 훨씬 심하게. 내가 누구냐, 나는 어디서 왔나,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런 문제죠. 일반적인 사춘기에 하는 고민이 아니라 완전히 염세주의에 빠져서 술 마시고 약도 손을 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왔는데요. 그때 미국은 한참 반전운동이 많고 히피가 많았는데, 제가 그냥 자연스럽게 히피가 되 버렸어요. 히피가 생각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고민과 아주 비슷했거든요. 히피라는 게 전쟁 이후에 배부르다 보니까 나온 갈등들이었지요. 부유하게 살던 젊은이들이 정신적인 방황을 하는 거지요. 세월이 갈수록 방황이 더 커지는 거지요. 마약을 하면서. 아무리 생각을 할수록 대답이 안됩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책도 그런 것만 보고 결국 세월이 갈수록 나는 자살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언제 하느냐 이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대학교 3,4년 때 그렇게 생각했죠. 어느 날인가 나는 자살하고 죽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보다 1년 먼저 신앙생활을 하던 동생이 나에게 찾아와서 전도를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내 삶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는데, 이번에 내가 부서지는데 이때는 좋은 부서짐이었어요. 나를 뒤집어 싸고 있었던 껍질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염세주의에 빠져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것은 좋은 부서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빛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었어요. 조그만 성경 공부 시간이었는데, 성경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설교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도 안 나요. 다만 어떤 예화였고 지금 생각하면 그 예화는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것인 것, 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느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제 마음 속에 아주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원기야 너를 위해서 내가 죽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너를 위해서다.’ 이런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 정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요 이런 마음이 들며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이때 한 5분 사이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한 8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문제가 해결되어버렸어요. 어둠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이 흐르는데 주체할 수가 없어요. 내가 얼마나 소중하면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내가 어디서 왔나, 어디로 가나,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이제는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위해서 산다. 1976년 8월 13일 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러나 저는 알지요. 제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지요. 주위에 보는 사람들이 다 내가 변했다고 하지요. 체험한 것이 뭐요 하면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요. 내 마음 속에 있지요.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요. 어떻게 아나요, 제 마음에 알지요.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요. 내가 목사이지만 교인들을 위해서 죽을 자신은 사실 없지요. 그러나 내 자식을 위해서 죽을 자신은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내 마음 속에 있지요.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느냐, 영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영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세요.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눈으로 봐야만 실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한 번도 바람을 보지 않지만 바람을 부인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영혼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붙잡고 바울을 붙잡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복음이 뭔가요. It’s the power of God.
내가 알기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기 위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가 부모 밑에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었어요. 내 자식이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에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redemption coupon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는 선물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정리해서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나쁜 소식이 있었어요.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Eternal condemnation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 생명이 멸망에서 생명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다음 질문은 Did you receive it? 생각 중에 있습니다. 아직은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영생이 있다, 아들이 없는 사람은 영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하나님을 만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감사합니다. 참석한 형제 자매들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접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찾아가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Jun 1, 2006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이 글은 2004년 KOSTA/USA에서 양희송 실장의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세미나를 편집부에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 복음주의 개관
(1) 복음주의 용어정리
흔히 사용되는 복음주의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부터 정리해 보자. 우선 evangelicalism과 evangelism의 사용이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각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자. ‘복음을 전하다’는 의미 evangelize에는 두 가지 명사형이 있는데, 각각을 살펴보면,
Evangelism : 이것은 ‘주의(-ism)’이라가 보다는 그냥 evangelize(복음을 전하다)의 명사형이다.
Evangelization: 복음화. 단순한 개인전도의 의미를 넘어서 복음의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두 단어의 구분은 74년도 로잔언약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되었는데, John Stott는 로잔대회 기조연설에서 “Mission에는 evangelism(개인전도)과 sociopolitical engagement(사회참여)가 있다.”라는 말로 두 단어를 분리해서 사용하였다. 또한 evangelize의 형용사형에도 두 가지가 있다.
Evangelical: 복음주의적
Evangelistic: 복음 전도적 (개인전도에 관련되어서)
예를 들어, evangelistic preaching은 전도설교라 할 수 있고, evangelical preaching은 복음주의에 근거한 설교를 뜻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복음주의를 evangelism으로 오해하면, 그저 ‘전도하자’는 정도로 오해할 수 있는데, 사실 복음주의는 evangelicalism으로 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이다.
(2)역사적 기원
복음주의라는 말은, 70 80년대의 Billy Graham과 Christian Today라는 잡지의 등장, 그리고 미국 Jimmy Carter 대통령이 자신이 스스로 거듭난 기독교인임을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 보편화되었다. 복음주의는 미국적인 특수한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며, 또한 20세기 초반의 Christian fundamentalism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복음주의는 7 80년대의 미국적 상황을 포함하지만 그 이상의 것임을 인지해야만 한다.
복음주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1. 지리적 분포: 복음주의는 영어권 지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비영어권에서는 복음주의라는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사용되는 evangelish라는 용어는 루터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자를 지칭한다. 즉 독일에서 복음주의하면 ‘개신교’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에 루터교도 점차 자유주의로 흐르게 되면서, evangelical이라는 용어가 영어에서 역수입되어 사용되게 되었고, 결국 개신교를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evangelical이라고 하면, 카리스마틱 교회를 지칭한다. 또한 영국에서 evangelical이라고 하면, ‘나는 카리스마틱이 아니고, 또한 자유주의도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복음주의라는 말은 일관성 있게 전세계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라, 영어권 기독교를 주 배경으로 하고 사용되는 용어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유럽의 영어권과 북미의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복음주의라는 의미도 조금 다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국에 알려진 복음주의가 미국을 중심으로 들어온 것이기에, 유일한 복음주의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그 특성에 맞게 복음주의를 받아들였듯이 한국도 우리의 정황에 맞추어 받아 들여야 한다.
2. 현상적 특징: 영국의 데이빗 베딩턴이라는 역사학자가 언급한 복음주의의 특징을 크게 4가지로 요약했다.
Activisim: 전체적으로 활동적으로 움직인다.
Biblicalism: 성경을 강조
Conversionism: 교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회심해야 한다.
Cross-centralism: 십자가를 강조
또한 영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인 John Stott는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으로 ”Bible people and gospel People”이라는 두 가지로 설명했다. 또 영국의 Allister McGrath는 복음주의를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공동체, 복음전도”라는 크게 6가지 중요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복음주의에 대한 언급들은 특성을 묘사한 것 뿐이지, 본질을 묘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최근에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복음주의가 운동인가 신학인가?” 하는 부분인데, 점은 John Stott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즉,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런 현상에서 ‘무엇을 믿는가’하는 신학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유명한 복음주의 학자인 버나드 램이 스위스에 있는 칼 바르트의 밑에 있으면서, ‘나는 복음주의의 겉만 만졌던 것이지 실제적인 내용을 채우지 못했다’고 고백한 일이 있다. 그러면서 복음주의가 전략과 운동은 있지만 신학이 부재하다고 통탄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복음주의를 신학적으로 정리할 필요들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2. 역사 속에 살펴본 복음주의
복음주의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다시 베딩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복음주의의 특성을 activism, biblicalism, conversionism, cross-centralism으로 크게 볼 수 있다면, 복음주의를1970 80년대의 미국적 상황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복음주의가 20세기의 일이 아니라면, 보통 18C 부흥운동이나 16C 종교개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John Stott는 복음주의의 근원을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4세기의 니케아신조에서 이야기하는 삼위일체를 믿는 믿음이 바로 복음주의 전통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기독교되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삼위일체의 신앙으로 부터 시작한다. 사실 니케아 신조가 처음 만들어 질 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나누어 졌다. 동방교회는 세 분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성령님을 더욱 강조했고, 반면 서방교회는 하나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도 성령에 대한 좋은 연구들이 동방교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4세기에 “그리스도 중심적 (cross-centalism)” 이라는 개념이 정리된다는 면에서 복음주의의 뿌리를 거기서 찾는다.
종교개혁의 흐름에 “성경중심 (biblicalism)”의 사상이 나타났고, 더불어 루터가 벼락 맞아 죽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로마서를 통해 회심하는 과정을 거치는 중에 “회심 (conversionism)”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다. 이런 복음주의의 흐름은 18 19세기의 영미의 부흥운동으로 이어진다. 영국의 잔 웨슬리, 조지 휫필드나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표되는데, 그 특징 중의 하나가 “회심운동”이다. 예를 들어, 웨슬리같은 경우 옥스포드에서 방법주의(Methodist)라고 불리 울 만큼 경건 훈련을 강조하는 Holy club에 열심이었지만, 구원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 Holy club에서 아메리칸 인디안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 되어 미국으로 가던 배 안에서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웨슬리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던 반면, 모라비안들은 놀랄 만큼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을 보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 후 웨슬리는 미국에서의 선교에 실패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모라비안과의 교제를 가지게 되는데, 그 때 모라비안의 한 집회에 참석해서 로마서 강의를 듣는 중에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 그의 일기를 보면, ‘나의 마음이 이상스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서, 부흥운동에서는 “행동주의 (activism)”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책만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웨슬리같은 경우는 1년에 1000번, 즉 적어도 하루에 3번 이상씩 설교를 할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웨슬리와 휫필드가 주로 했던 사역방법은 순회전도였다. 웨슬리의 경우 말 안장 위에서 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순회전도를 다녔다. 이런 일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영국 성공회의 경우 목사들이 담당 지역의 교구를 맡아서 정착 사역을 했었지만, 웨슬리와 휫필드는 광부들을 좇아 다니며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선교에 대한 강조를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윌리암 케리, 허드슨 테일러, 캠브리지 세븐, 건초더미 기도회, 학생자원자 운동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그들이 강조한 것 역시 회심중심, 십자가중심, 성경중심이며 상당히 활동적이라는 점에서, 그들에게도 복음주의의 흐름이 존재했슴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복음주의는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이 발달하게 되고, 그에 대항해서 근본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사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미국적인 현상이었지만, 자유주의 신학의 분리주의적이고 상호 비판적인 문제점에 반대해서 복음주의(Evangelicalism)이 등장하게 된다. 반면 영국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모습으로 복음주의를 준비해 오게 된다. 신정통주의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말하는데, 그는 정통적인 신학의 모습을 많이 회복시키기는 하지만 방법론은 성경 비판 등에 열려 있어서 신정통주의 (Neo-Orthodoxy)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는 미국에서는 배척을 받지만, 유럽에서는 학생 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거, 마이클 그린 등이었다. 그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들을 지적이지 못하다고 비아냥거리고 있었는데, 위에 언급한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육 받은 지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 복음주의의 흐름이다. 특히 마이클 그린의 경우는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었는데, 그의 전도를 받았던 사람 중에 현재 영국 복음주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알리스터 맥글래스와 같은 사람이 있다. 맥글래스는 한 때 막스즘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다.
반면, 미국의 복음주의는 빌리그래함과 크리스챤 투데이, 그리고 풀러신학교로 대표된다고 하겠다. 이런 흐름 가운데, 늘 소수에 머물렀던 복음주의가 7 80년대에 이르러 기독교의 주류가 되고, 다수파가 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를 두고 복음주의 르네상스라고도 부른다.
20세기의 복음주의는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면, 앞으로 21세기 복음주의는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이제는 수적으로도 많아졌고, 훌륭한 학자도 가지게 되었으며, 재정적으로도 풍부해서 해외에 선교사도 파송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복음주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맥락에 관해 현재 복음주의권에서 크게 이슈가 되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복음주의 통합?
복음주의는 계속 통합되어 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작은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갈 것인가?
(2) 복음주의의 성공 이후에 생기게 된 파생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Post-evangelicalism이라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복음주의를 계승하면서도 단절하는 행태로 나타나는데, 그들이 주로 복음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은 보면, 복음주의가 물량주의적이고, 대사회적으로 소극적이며,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비일관적이라는 점을 비난한다. 한편 미국의 impowered evangelical은 post-evangelical과 같은 복음주의에 대항하는 흐름은 아니지만, 비슷한 성향을 띤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미국의 Vineyard church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제삼의 성령운동으로 불린다. 첫번째 성령운동은 오순절 운동으로 ‘방언은 곧 구원이며 구원 받으려면 자신에게 와야 한다’는 분리적 성향이 강했다. 두번째 성령운동인 카리스마틱 운동은 분리주의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뚜렷한 신학 없이 성령을 많이 강조했다. 그에 반해서 Vineyard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제3의 성령운동은 그 신학적 기반을 복음주의에 두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카리스마틱에 반하는 개념으로 impowered evangelical이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Vineyard church에서 impowered evangelical에 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제임스 패커가 그 서문을 썼다는 것이다.
(3) 복음주의 신학의 구도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중에서 경계 밖으로 나가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중심 지향적 접근), 다른 사람들은 복음주의의 중심을 두고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은 허용해야 한다(경계지향적 접근)는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3. 복음주의권의 쟁점들
(1) 성경관:
“성경의 무오성 vs. 성경의 권위”.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는 반면,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 말씀을 삶의 최종권위를 더 강조한다.
(2) 성경해석의 방법론과 전제:
“성서비평을 수용하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성경해석이 최종적(final)인 것이냐 아니면 잠정적(provisional) 것이냐에 대한 논쟁도 있다. 이런 문제는 동성애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를 해석하는데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3) 복음전도와 사회개혁: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사회참여와 개인구원이라는 낭만적인 대립구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19 20세기에 유행했던 고전적인 의미의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복음주의를 고전적인 자유주의의 반대하는 모습으로 연상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참여와 복음전도를 더 이상 대립구조로 보지는 않는다. 당연히 사회참여와 복음전도는 함께 가야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이 구조에 대해 지나친 논쟁을 겪어 오지 않女?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 신학적 방법론과 전제들:
기존의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고백과 이해들에 대해 수정을 가하는 입장들이 많이 나왔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지옥관 – 다시 말해 영혼 멸절설에 대해 John Stott같은 학자는 지옥이 영원히 불타는 곳에서 영원히 형벌 받는 곳이 아닐 수 있다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또 하나의 예는 예정론이다.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하나님은 다 아신다’라는 입장에 대해, ‘하나님 스스로도 미래에 대해 열어 놓으셨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또 하나는 신정론 –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 는 점인데, 만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다스리시는 분 이시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와 고통의 궁극적인 책임도 하나님께 있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고통 받지 않으신다’는 기존에 입장에 대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자신도 고통 받으셨다’는 이론들이 소개되고 있다.
토대주의(foundationalism): 사실(fact)이 있고 그에 대응해서 가치가 창출되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라면, 한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포스트 모더니즘에 근거해서 복음주의적 신학을 해보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실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우리는 상징들을 가지고 말할 수 있고 가치를 창출해 내면서, 실제의 유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포스트 모던니즘에 기초해서 복음주의 신학을 해보려는 흐름들이 있다. 그들은 복음주의 좌파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4.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한국 복음주의는 이런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 제기와 고민을 스스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살펴보면, 사실 서로가 잘 알지 못해서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실상, 전체적인 신학적인 스펙트럼으로 보자면, 한국의 진보적인 기독교는 보수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1990년대에 들어서 민중신학 자체가 사라졌슴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민중교회에는 신학자만 있고, 실제 민중은 존재하지 않게 된 현실이다. 또한 사회 부패에 대해 대항하던 세력들이 이제는 정부로 대거 들어가 있을 뿐 아니라, 캠퍼스의 진보운동도 거의 사그러지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 한국 기독교에는 사회참여를 등한시했던 보수적인 세력만이 남게 되어서, 복음 전도를 주장하는 사람들만의 모임으로 비춰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남아 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사회 참여적 혹은 대사회적인 임무에 대해 등한시하게 되다면, 한국 기독교는 사회에 무관심한 세력으로 취급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살펴보면,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정치적으로는 우파”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는 한국사회가 청산하고자 하는 바로 그 가치라는데 아이러니가 있다. 만일 한국교회가 2 3년 내에 의미 있는 몸짓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런 청산의 흐름에 휩쓸려서 아무도 관심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는 입장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은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실제 한국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과 청년들은 그와는 사뭇 다른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기독교를 대표해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의견이 실제적인 교인들이 가진 생각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 구성원들은 심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이제 복음주의에 대한 많은 자원들을 모아서, 누군가는 모든 기독교가 현재 사회에서 비판 받은 바로 그 모습만은 아님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런 노력들이 건강한 복음주의권에 있는 사람들이 애써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Jun 1, 2006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본 글은 2000년 KOSTA/USA 김경수 목사의 세미나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 강의는 ‘복음주의’, ‘학생운동’, ‘한국사회’라는 무거운 주제를 복음주의라는 연결고리 가운데 다루고자 한다.
대학의 위기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건전한 사회’에서 ‘한 사회가 건강한가는 “학교”, “교회”, “법원”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을 돌아보면, 이 세가지 모두 좋지 않은 상황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의 대학의 상황은 더욱 문제가 있는데, 그 예로 서울대의 위상이 이웃 나라인 일본이나 중국의 대학들과 비교해서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대학의 현 상황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3가지를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다.
대학생 스스로의 정체성 인식의 변화이다: 과거에 대학생들은 적으나마 스스로 엘리트라는 의식이 있었으나, 최근의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유에는 교육부에서 평생교육이라는 기치 하에 대학교육을 보편화 시키고자 했던 정책이 있었다고 하겠다.
대학 문화의 변화이다.: 예전에는 이념이 대학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면, 현재 대학은 스스로 상업화하고 있고, 경쟁 중심의 문화로 변화하였다.
이단 단체와 민족 종교의 침투이다: 과거 대학 신입생들 중에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일 종교를 가진다면 어떤 종교를 가지기를 원하는가?’는 설문 조사를 하면, 기독교와 천주교가 다수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최근의 조사를 보면 민족종교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대했슴을 알 수 있고, 더욱이 대학 내 기독교는 이단들에 의해 시달리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이런 세가지가 한국 대학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지 않나 싶다.
학생운동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학생운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학생운동’하면 주로 정치적인 데모를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 ‘학생운동’은 정치적 운동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다. 첫째, 학생운동은 주체가 학생 스스로이어야 하며, 또한 그 대상도 학생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둘째, 학생운동은 정치, 문화, 종교의 영역에서 주로 나타난다. 한국 대학의 경우에는 정치적 학생운동은 더할 나위없이 활발했고, 문화 학생운동도 한 때 ‘탈춤반’이나 ‘샹송반’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그리고 종교적 학생운동은 CCC, IVF, YWAM과 같은 선교단체로 대표되어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이런 세가지 형태의 학생운동은 90년대 들어 상호의 영역을 넘나 들면서, 그 특징을 구분 짓기 어려워졌다. 그 예로 ‘기독 총학’을 들 수 있는데, ‘기독 총학’이란 각 대학의 기독 연합회에서 총학생회장의 후보를 배출함으로써 정치적인 영역에 참여하려는 시도이다. 비록 이런 시도는 성공 사례와 더불어 많은 비난도 받으므로, 시도 자체에 대해 회의을 남기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학생운동’이란 ‘학생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운동’이라 하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의문이 떠오르는데, ‘현재의 간사중심의 선교 단체들은 간사들이 주로 최종 결정권이 가지지 않는가?’하는 점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현재의 선교 단체들의 운동을 학생운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간사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라는 점에서 간사운동 혹은 조직운동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영국 옥스포드 신학부 교수인 Alister McGrath가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라는 책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6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다음 여섯 가지에 우선점을 두는 특징을 지닌다.
성경의 절대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
성령의 주권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
복음전도의 우선성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
복음주의란 어떤 하나의 교파나 단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특정한 믿음의 관점’이라 하겠다. 그 예로 천주교나 자유주의 신학 가운데서도 복음주의자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주의에 대한 용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evangelism은 ‘복음 전도’, evangelization은 ‘복음화’, 그리고 evangelicalism을 ‘복음주의’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evangelicalism이라 불리는 ‘복음주의’는 복음을 전하는 ‘복음화’와는 구분되어 사용되어야 한다.
복음주의의 역사
복음주의의 역사를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제 1세계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독일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조지 뮬러가 다녔던 학교가 할레 대학이라는 곳인데, 이 학교는 프랑케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할레 대학을 다녔던 사람 중에 진센도르프 백작이 있었는데, 그가 만든 겨자씨 모임을 통해 선교사들이 파송되었고, 그 겨자씨 모임으로 모라비안이 생겨나게 되었다. 최근에 많이 행해지는 선교방식이 ‘전문인 선교’인데, 그 당시 모라비안들은 벌써 자신의 전문 직업을 가지고 선교지로 나가는 전문인 선교를 행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학생운동의 역사는 영국이다. 영국의 학생운동에서 요한 웨슬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 웨슬레는 감리교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감리교를 웨슬레가 창립한 것은 아니고, 후에 그의 추종자들이 만든 것이다. 사실 영국의 학생운동을 살펴 볼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은 챨스 시므온(1759 1836)이다. 이 분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 널리 행해지고 있는 귀납법적 성경공부나 강해 설교의 방법을 처음 사용했다는 점이다. 챨스 시므온은 대학 졸업 후에 약 30년을 대학에 남아 교목과 비슷한 역할을 하며,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후, 영국에는 캠브리지 세븐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885년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7명의 선교사가 배로 한 달이 넘은 거리인 중국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 일곱명의 선교자 중에 CT 스터드(Stude)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스터드는 당대 크로켓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진 스포츠 스타였기에 영국 전체가 그들의 선교사 파송을 크게 다룰 수 밖에 없었다. 캠브리지 세븐의 배경을 살펴보면, D L 무디 (Moody)가 있었다. 1882년에 캠브리지에서 D L 무디의 집회가 일주일간 열렸는데, 별 반응이 없던 집회는 마지막 날 열기가 오르게 되었고, 무디가 초청을 하였다. 그 날 D L 무디의 집회에 캠브리지 학부 학생의 약 절반이 참석했고, 그 중에서 200명 이상이 회심을 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에 C T 스터드가 있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캠브리지 세븐이 파송된 이후 1886년 마운트 헐몬에서 D L 무디의 집회가 열렸었다. 그 집회에 89대학에서 251명이 참석을 하는데, 그 중에 100명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사실 이 무디의 집회는 로버트 와일러가 총무로써 주관을 하게 되는데, 와일러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1945년까지 각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교사로 초청하는 일을 하게 된다. 1886년부터 1945년까지 대학생 중에서 무려 20500명이 해외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이 기간은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시기이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바로 이 20500명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1886년부터 약 2년간 와일러가 방문한 대학은 약 162개에 이르는데, 그 방문 기간 중에 챨스 스터드가 선교보고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스터드가 방문한 학교는 코넬(Cornell) 대학이었는데, 그 집회 가운데 존 모트 (John R. Mott)가 있었다. 존 모트는 학생운동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존 모트는 SVM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단체가 아이러니 하게도 WCC이다. 존 모트가 1895년 WSCF (국제 기독학생회)를 창설하는데, 그 후 1990년도 초 WSCF와 현재의 복음주의 계열이 분열을 겪게 된다. 그 분열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 중의 하나가 자유주의의 침투였다. 존 모트는 감리교 평신도로서, 전 세계를 다니며 학생 집회를 열어, 선교사를 헌신케 하는 탁월한 mission mobilizer였다. 존 모트의 집회는 일본에서도 열렸었는데, 그 집회에 참석한 유일한 한국 사람이 윤치호였고, 그 집회의 영향이 한국에도 미치게 된다. 1945년에 SVM은 막을 내리지만, 곧 이어 1946년에 Urbana 대회가 시작되게 되었다. 이 얼바나 집회를 모방해서 한국에서 열린 집회가 다름 아닌 ‘선교한국’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전체적인 학생운동은 ‘선교’와 관계하면서 진행되어 왔슴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제 1세계의 학생운동의 특징은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전통 복음주의 신앙을 대학 안에서 발견하고 계승시켰다.
세계 선교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
성경공부와 기도운동이었다.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요한 웨슬러의 경우만 보더라도, 조지 뮬러보다 고아원을 더 많이 설립할 정도로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제 3세계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살펴보자. 제 3세계의 학생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나게 된다. 일본의 경우는 개화가 일찍 되는 까닭에 다소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 삿포로 농림학교에서 윌리암 클락의 영향으로 1878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우찌무라 간조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우찌무라 간조의 제자로는 김교신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 한국 교회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중국의 경우, 문화혁명 전에 북경대학의 IVF에 소속된 학생 숫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을 정도로 활발했다. 다시 말해, 제 3세계의 학생운동은 접목되고 이식되었다는 측면이 강했다.
한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크게 3세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1945년 이전, 해방 이후, 그리고 1980년 이후가 바로 그것이다. 해방 전에는 Y운동으로 불리는 YMCA가 주도를 했고, 해방 이후에는 초교파 선교 단체들이 주도를 하게 된다. 1980년 이후에는 초교파로써 연합하고 협력하는 운동들이 많이 생겼다. 코스타도 그런 흐름 중의 하나라 하겠다. 한국 YMCA의 간사 1호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상재 선생이 60세에 YMCA의 평간사로 일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1세대 운동은 민족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2세대의 초교파 단체의 운동은 성경공부와 해외선교에 중요한 영향이 미쳐왔다. 3세대 학생운동은 네트웍 운동으로 연합과 협력을 이루어 오고 있다. 코스타도 그 예라 하겠다.
제 2세대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2가지 면에서 평가해 보자. 긍정적인 면은 경건생활, 복음 전도, 제자 훈련을 강조하고, 방법론 강조했으며, 조직 의식화된 기독교 지성을 배출하게 된다. 문서운동이 활발하였으며, 영적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또한 선교의 붐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면은 서구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고, 자신만의 색깔을 너무 많이 가지고 섹트화되었다 점이다. 신앙적으로도 너무 편향적이다. 즉 다소 근본주의에 가까운 경향이 있다. 또한 약하거나 왜곡된 교회관을 가지고 있고, 미흡한 상황 문화 변형력이 적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한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정리해 보면, 해방 이전에는 김교신 이상재 선생같은 분에 의해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역할을 했고, 해방 이후 유신 정권까지에는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의 학생운동은 공명선거 위원회와 같은 모습으로 한국 사회에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도하는 운동
제자를 양육하는 운동
기도를 강조하는 운동
성경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운동
철저한 성경연구 운동
효과적인 그리스도 학자들을 배출하는 운동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운동
선교하는 운동
생활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활동하는 운동
창조적인 기독교 사상 문서운동
학생의 책임에 위탁하는 학생의 운동
민족적 지도력에 위탁하는 운동
위에 열거한 12가지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경우에 학생운동이 위축되는 경향이 있어왔다.
새 시대의 복음주의
그렇다면, 새 시대에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역할과 과제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그 첫째는 ‘선교’에 대한 역할이다.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의 선교는 상당히 활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연합 운동이다. 존 모트의 경우도 학생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네트웍킹하고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예를 살펴보면, 1996년도 ‘복음 민족 역사’ 집회를 위해 작곡된 고형원씨의 ‘부흥’이란 곡이 기존 교회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1997년에는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을 학생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시작했고, 한달 만에 3억 5천만원이 모이는 일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일반 국민에게까지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이 퍼지게 되었다. 이렇게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기존의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또한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 되어야 하겠다.
만일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느 곳을 다니실까? 아마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캠퍼스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캠퍼스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은 역사에서 거름과 같아서 눈에 띠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뿌려진 씨가 결실을 맺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에게 캠퍼스에 관심을 가지고 씨를 뿌리라고 도전하고 싶다.
May 1, 2006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이 세미나는 2001 KOSTA/USA에서 뉴저지 지구촌교회 김두화 목사님의 강의 내용을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이 세미나는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갖느냐라는 주제의 세미나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주제가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 Gospel이라고 하는데요.
먼저 세상에 있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죠. 세상에서 기쁜 소식이라는 어떤 것이냐, 공통적으로 다 일시적이고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애기를 갖는다는 것, 매우 기쁜 일이죠. 우리 교회에 애기를 기다리다가 갖게 되는 경우 아주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얼마나 갑니까? 밤잠 못자고 짜증나서 어떤 때는 아기도 집어 던지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연애시절 너무 좋죠. 결혼하면 허니문 기간이 얼마나 가나요? 여기 와서 고생하며 학위를 땁니다. 학위를 따면 기쁘죠. 그러나 얼마 안 갑니다. 새로운 차, 새로운 집, 잠깐 지나면 또 다른 집, 또 다른 차가 나옵니다. 진급했다, 샐러리 올랐다 기쁩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갑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이 어떤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어떤 부분적인 것이 아니고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흘 만에 죽은 후에 갑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때 반가움도 있었지만 서운함도 있었습니다. 주님 왜 이제 오셨습니까?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사흘은 혹시 모르지만 나흘은 너무 늦었습니다. 왜 더 일찍 오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섭섭함이 있었습니다. 그가 앞으로 부활할 것은 알지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시면서 ‘나는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기독교의 핵심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을 믿는가가 확실한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지 분명해야지 막연하게 교회 왔다갔다하면 되리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백 속에서 I’m sure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내가 이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할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는 이 몸을 떠날 때 죽음 저편에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저는 이 확신을 의외로 갖고 있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뭔가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교회에 대한 배경도 많이 있는데,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내가 죄사함 받았는지, 내가 죽으면 천국갈 수 있는지, 주님이 오늘 오시면 들림받을 수 있는지 불확실한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교회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저부터가 그랬었습니다. 저는 원래 교회 다니는 집안이 아니고 다양한 신을 섬기는 집에서 자랐습니다. 제사가 다달이 있었고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굿하고 복 나간다고 못하는 일도 많은 그런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제사 안 지내면 집에 액운이 있다고 두려워하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뭔가 그곳에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진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제가 보니 교회 나가시는 분들이 뭔가 다른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교회에 나가자마자 교회 생활에 충실히 했습니다. 교사생활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교회 행사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제 일주일 생활이 교회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새벽기도 한번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를 만나서 ‘학생, 지금 예수님 오시면 들림 받을 수 있어요’ 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매우 불쾌했습니다. ‘물론이지요’ 그러나 돌아서 오는 마음에 뭔가 의문과 두려움이 있었어요. 왜 이런 두려움이 있는가? 왜 아직까지 흔들림이 있는가? 신비한 체험도 있었고 경험도 많았는데 왜 이런가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처럼 표현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런 혼란 속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이 그런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시기 바라고 주위에 이런 분들이 많이 있을텐데 이런 분들을 여러분들이 도와 주실 수 있는 지식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받은 것 같은데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구절을 인용했는데, ‘나는 부활이다’ ‘죽어도 산다는 것’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의 문제에 해답을 주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가 죽습니다. 그런 육체가 부활함을 얻게 됩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 것입니다. 썩지 않을 육신을 갖고 다시 살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을 믿는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에 대한 확신을 성경적으로 갖게 되길 바랍니다.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겠습니다. 거듭남, born again, 다시 태어난다, 중생, 회심 이런 단어들이 사용됩니다.
정의를 내려본다면 구원이란 죄인이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전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걸어가다가 삶을 살아가다가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런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것이 죄의 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십자가가 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삯인 사망을 대신 지불해주시고 죄값을 지불했다는 증거로 못자국과 창자국을 가지고 부활하셔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확증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비우셨습니다. 육체를 가지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에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그분을 그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회개와 함께 하나님을 벗어간 길을 걸어가던 피조물이, 양처럼 그릇되어 가던 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사건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과 Personal and wholesome relationship을 갖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한 마디로 줄인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처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더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가 되었다, 구원받은 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사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인간적인 선행이나 지식이나 종교적인 행위나 의식이 아니에요. 그것을 다 내려놓고 십자가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할 때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번째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나옵니다. 죄사함을 받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받을 것이 아니며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을 보면 우리는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고 내가 볼 때는 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완전히 의롭게 된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 “진실로 내 말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도 의미하지만 지금 내가 하나님의 생명과 교제하는 생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personal relationship을 갖는다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교제하는 삶이 영생이고 그것을 영원히 갖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를 보면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었고 누구든지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네번째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지으시고 인격을 주실 때 지정의를 주셨습니다. 지는 진리를 추구하고 정은 미를 추구하는 부분입니다. 의는 의지의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 하나님의 숨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는 순간 산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순간 그들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사탄과 인간과 대립하는 순간이 있죠. 인간에게 와서 말합니다.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만은 먹지 말아라, 이것은 사랑의 약속입니다. 먹는 순간 죽을 것이다. 그날 죽는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900년 동안 살았죠. 그러면 이때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살았다는 것, 죽었다는 것은 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한 것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조직적, 구조적 죄만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죄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 자체입니다.
그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영접한다고 할 때는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영으로 들어오십니다. 성령으로 들어오십니다. 이것은 마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듯이 바람이 어디에서 어디로 부는지 모르는 것같이 거듭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성령이 내속에 들어와서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령의 세례 baptism of holy spirit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요, 성경적으로 제가 볼 때는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신비하게도 하나님의 몸의 일부가 되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기적이에요. 어떤 사람은 드라마틱한 느낌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냉정한 가운데 의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내가 신앙하는 순간 내 안에 들어오시고 그 때부터 영원히 내 안에 계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인격체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내 안에 들어오시고 성령이 얼마나 나를 지배하느냐를 볼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7, 고린도전서 3장 16절 이런 구절을 통해서 이미 나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예배당의 빌딩이 거룩한 성전이 아니에요. 성전은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순간 내 몸은 성전이 되는 거에요.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죄사함을 얻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령이 거하십니다.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새로운 피조물로 보시는 거에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나는 새것이 되었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 가졌던 개성, 지성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보아주시고 그렇게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못 볼 때 혼동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하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네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의 외적 증거, 성령의 내적 증거, 성도들의 외적 내적 증거, 성별된 삶의 외적 내적 증거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성경말씀이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고, 구원을 받은 자는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씀인데. ‘너희가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을 모른다면 너희는 버리운 자니라’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 저는 그 말씀에 망치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솔직하게 나는 ‘모른다’고 생각하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 25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썪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다’
요한일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들에게 … 영생을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지금 내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말씀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는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얻었나 깨달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영생을 갖고 있나, 중생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성령의 내적 증거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거하시고 그 성령이 증거해주십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6장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요한일서 3장 24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이분이 우리에게 주관적인 증거, 개인적인 내적인 주관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도들의 내적 외적 증거입니다. 크리스챤의 삶이 기쁨의 삶이에요. 즐겁고 좋은 날씨에만 기쁜 것이 아니라 먹구름 아래서도 기뻐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성도들 간의 교제가 즐거워집니다.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해 내가 달라집니다. 진정 구원을 받으면 성령을 통한 교제가 이루어져서 그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4, 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런 성도간의 교제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 요한일서 4장를 보십시요.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은 나와는 다르지만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변화를 점점 느끼는 것입니다. 주관적 객관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네번째가 성별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성별된 삶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전에는 행동이 아주 쉬웠어요. 이제는 내가 뱉은 말, 행동 이런 것들 지나치지 않을까 조심해야지 하면서 변화되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변화가 구체적으로 조금씩 생긴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옛 성깔 ‘내가 왜 이래’하는 것이 아직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이 지체가 아직 나를 괴롭혀요. 나의 자아가 점점 주님을 닮아가면서 작아져가는 거에요. 그러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지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아직 변화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면 이것을 계속해서 벗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 이하에 그 의미가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거짓말을 그만 두는 것뿐 아니라 진실된 말을 하는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분을 낼 수가 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풀어야 합니다. 모르고 있는 것조차도 서로 고백해야 합니다. 화해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구체적인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삶을 다스릴 때 이런 변화가 하나 둘씩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에게는 용서와 화해가 아주 중요합니다. 도둑이 도둑질을 멈춘다고 도둑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행동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삶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런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는 이런 변화가 조금씩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번째 특별한 경험을 추구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이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구원받는 것이 뭔가 특별한 경험이 있어야하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파에서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데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디모데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는 모를 수 있지만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있다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히 경험, 기적이 구원의 증거가 아니고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의 증거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서서히 깨달아 가는 수가 있습니다.
앞에 기차가 가는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뒤에 따라오는 기차는 믿음입니다. 앞에 나아가는 팩트를 믿을 때 감정이 따라갑니다. 사실, 믿음, 그리고 감정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앞세울 때 뭔가 된 거 같다가도 또 생각이 바뀌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 인격적인 삶의 현장에 왔을 때는 불확실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세요. 말씀을 바탕으로 이지적으로 복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증거하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방황 속에서 교회를 떠나서 세상에서 찾다가 마지막으로 조이 선교회에 영어를 배우러 나갔습니다. 영어를 배우면서 사람들이 뭔가 다른 것을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시도해보겠다 하고 마지막으로 수양회에 따라 갔습니다.
들어가면서 나는 절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이렇게 결심하고 들어갔습니다. 이때 저는 자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마지막이다 하고 따라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평화를 되찾는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메시지를 들으면서 저를 많이 되돌아보겠습니다. 허물에 사함을 받고 정죄함을 받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에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저는 아니다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날 왜 죄인인 줄 알았습니다. 1970년 1월 예수님을 거듭하면서 저는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때는 사실 저는 울지도 않았습니다. 영접하고 나서 내 인생이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 나를 얼마나 학대했는지 몰라요. 공손하게 종교인으로 살고 있었지만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이 너무 싫었어요. 공부해서 뭐하겠는가. 가와나리 야스나리 설국이라는 책을 쓴 작가, 자살했어요. 일주년 추도식에 그 소설을 읽던 한 학생 또 자살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도 자살하고 정치인도 자살했습니다. 자살을 각오했을 때 굉장히 비판적이고 냉정하게 있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주님이 알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는 것 그것을 모르고 아직도 뭔가를 더 보탤려고 하고 있는 것이 그날 처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불신 자체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까지 그저 도덕적인 삶, 윤리적인 삶 추구하고 회개하고 다시 실패하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험은 개인적입니다. 경험 위에다 신앙을 쌓으려고 하면 경험이 바뀌어질 때마다 교리가 바뀌게 됩니다. 말씀을 우선시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경험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 자체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본 천국, 이 책이 잘못된 성경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경험은 점진적입니다. 기는 애가 있고 뛰는 애가 있는데요, 기는 애가 뛰지 못한다고 실패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경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이 그것으로 증거가 된다는 것은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극동방송 상담실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5시간 상담하는데 4시간 동안 저에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리고 나서 잠깐 제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 그러시더니 주체를 못하고 우시는 겁니다. 제가 주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비로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접할 때 깊은 감동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조용한 가운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깨달음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그 불신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길이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고 사람을 죽인 자도 살인입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자이고, 실제로 간음한자도 간음자에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지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내가 누구인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죄를 깨달을 때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불신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믿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죄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은 구원 후에 올 수 있습니다. 일단 사랑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점점 그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합니다. 커가면서 알게 되지요. 나중에 부모가 되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구원받고 나서 이 사랑이 너무 감격하고 고마운 거에요. 성화라는 것은 죄를 더 깨닫고 죄를 더 미워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깊이 깨닫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십자가를 깊이 깨닫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자신의 믿음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구원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 큰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어떤 믿음을 가져야하는가. 구원받을 때 큰 믿음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열 가지 재앙 중에 마지막 재앙이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이죠. 어떤 사람은 문설주에 피를 아주 많이 발랐습니다. 다른 사람은 적당히 발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많이 눈에 확 띄게 발랐습니다. 믿음의 사이즈가 한 사람은 좀더 크고 다른 사람은 작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크기가 구원에 영향을 주었나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린 양의 피를 의지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믿는 믿음이면 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산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우리가 믿는 믿음은 어쩌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믿음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의 보혈을 의지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피를 의지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네번째 자신이 내린 결정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살펴볼 때 결심이 작심삼일이었고 또 지나니까 그냥 그렇고 그래서 구원에 확신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결심은 우리를 상대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날 때 하나님과 함께 내리는 결정입니다. 내가 의지했던 분은 하나님입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죄를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에 믿음을 두는 한 나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의지함으로 나는 구원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받은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만일 죄를 범하면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불순종할 수 있으나 구원이 취소되고 아들 딸 된 것이 취소되느냐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패한 죄로 정직하게 고민하는 것, 죄 때문에 갈등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서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앞에 설 수 있는 그 사랑이 너무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들딸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제가 막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거듭나지 못하는 경우에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 신분 자체를 변화가 없는 것이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그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에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비추어 내가 거듭났다면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경 두 곳을 찾아보고 마무리 짓겠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10장 17절, 주님께서 나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셨고 영원히 기억지도 아니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 29절,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요 또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다.’
주님이 이 손을 잡았습니다. 주님이 잡았고 여러분이 주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로마식 인사였습니다. 가끔 여러분은 이 손을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손을 영원히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놓을 수가 있어요, 확신을 잃어버릴 수가 있어요. 그러면 다시 잡으면 됩니다.
이것까지도 십자가로 용서해주심을 감사하고 다시 잡으면 됩니다. 신앙이 자라면서 이 횟수가 줄어들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이 멈출 때가 있겠죠. 이 몸을 벗어날 때입니다. 영원히 보장된 구원이에요. 힘있게 잡는 것입니다.
내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Apr 1, 2006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다음 강의는 2003 KOSTA/USA ‘기독교 세계관’ 세미나에서 서강대 강영안 교수가 한 ‘피자와 짜장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니다.
저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강영안입니다.
오늘 제목이 ‘피자와 짜장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니다.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죠. 형편대로 피자가 있으면 피자 먹고 짜장면있으면 짜장면 먹으면 되겠죠.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피자나 짜장면을 따질 수 있는 것은 선택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부부사이에 한 사람은 짜장면 먹고 다른 사람은 피자 먹자고 할 때 어떻게 설득하겠습니까? 맛있으니까, 피자가 맛있으니까 혹은 짜장면이 맛있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맛있지만 나는 맛이 없다 이럴 수 있기 때문에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피자보다 짜장면이 맛있다고 할 때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음식 문제뿐만 아니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할 것인가, 혹은 주거 형태 – 아파트에서 살 거냐 주택에서 살거냐- 이런 문제까지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뿐아니고 결혼을 하면 어떻게 결혼할 거냐, 타인종과 결혼할 거냐, 결혼식을 하고 살거냐, 결혼식하지 않고 동거형태로 살 거냐, 유럽의 경우는 동거도 가능하고 동거자들도 결혼한 사람과 같은 법적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변호사를 통해서 재산 등록하죠, 헤어질 때 재산문제 생기지 않도록 하고 있고, 심지어는 동성애자들도 결혼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가서 네덜란드의 경우 입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자 여자 결혼 한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피자와 짜장면이라고 하면 지금 뭘 먹을까의 문제, 음식의 취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황상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까지도 선택할 문제가 된 거에요. 나아가서 종교에 관련된 문제에도 여러가지 종교들 간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과거에 유럽에서 기독교는 주도하는 종교였습니다. 1052년 기독교가 분열된 적이 있죠. 동방교회와 분열되었고 서방교회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개신교가 생겼죠. 개신교 안에도 수없이 많은 종파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다원주의문제가 서양의 전통에서는 종교적 분열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었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 30년 전쟁이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서 종식되고 이때 각 지역에 각각의 종교를 인정한다는 원칙이 정해졌습니다. 이렇게 루터란도 인정되고 칼빈주의도 인정되었습니다. 하나의 카톨릭이 지배하던 보편교회, 코푸스 크리스찬이라는 보편교회가 없어졌습니다. 기독교가 더 이상 주도적 종교가 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지금 무엇을 먹을거냐하는 것은 취향 taste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김치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쇠고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죠. 야채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먹을 갖다대며 폭력을 이용하여 고기를 먹게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각자의 취향을 인정해야겠죠. 취향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아라라는 금언이 생겼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취향의 문제는 어떤 음식이라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어떤 옷을 입는다는 지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은 어떻게 살것이냐 하는 문제, 어떤 방식으로 살것이냐, 동거 상태로 살거냐 제도권 안에 들어가 결혼을 하고 살거냐 이런 것도 일종의 취향이 된 것입니다. 정치적인 취향도 공화당을 찍을거냐 민주당을 찍을거냐는 문제도 정치적 취향의 문제로, 요즘은 당보다 개인에 대한 선택, 종교도 하나의 취향의 문제로 인정되는 상황입니다. 왜 그런가에 대한 질문없이 취향의 문제다라는 풍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의 의도는 이런 다원주의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가를 고민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야할까에 대한 강의는 아닌 것이죠.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과거와 달리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이런 것에 대한 기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실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문제가 된 사건 가운데, 김인규 교사라는 서천에 있는 중학교 미술교사가 자신의 아내와 찍은 누드 사진을 자기의 홈페이지에 걸어둔 것이 문제가 되었고 학부모들이 문제를 삼았는데 본인은 거부를 했고 사이버경찰수사대에 신고되어서 그 분을 구속하였습니다.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었고, 검찰이 기소하니까 교육청에서 직위해제를 하였습니다.
혹시 보신 분 계십니까? MBC에서 100분 토론에서 토론하자고 해서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대표로 나가면서 알아보게 되었는데요, 저는 사진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5년 전 사진인데, 제왕절개 수술한 표지까지 다 보이고 가슴도 다 드러나 보이고 전혀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고 성적 자극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교사는 예술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술가로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과 교육의 영역이 있는 것이고, 예술가로서 기대하는 방식이 있고 교육자로서 기대하는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의 충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검토하면서 한국 사회가 그 사이에 엄청나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이버 투표를 했거든요. 교사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투표가 더 많이 나왔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대화를 해보았을 때는 반대의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교사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지 않겠다 이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미적 영역이고 옳고 그름은 윤리적 물음인데, 요즘 그런 구별이 많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옳고 그름이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성경말씀으로 이사야서 5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을 흑암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으며 쓴 것을 단 것으로 삼은 자는 화가 있을진저’
이렇게 완전히 가치를 뒤집어 버린 사람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시켜보면, 그리스도인은 악은 악하다고 하고 선은 선하다고 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특별히 그리스도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0절을 보면 주께 합당하게 행하라, 빌립보서 1장 27절을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리고 에베소서4장 2절을 보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라.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가치에 어울리도록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당하다는 말이 악시옴인데, 여기서 axiom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Axiom 그리스도인의 가치에 어울리도록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이런 위치에서는 이럴 수 있고 저런 상황에서는 저럴 수 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그리스도인이 상대주의자는 될 수 없습니다. 가치 상대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는 우리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라들도 있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있고 간혹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할까, 이 문제가 바로 다원주의의 문제입니다. 다른 생각, 다른 방식, 다른 세계관이 공존하는 상황이 될 때, 다른 세계관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다원주의가 문제가 됩니다.
먼저 다원주의가 뭔가를 생각해보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생각해보죠. 다원주의를 영어로 무어라고 합니까? Pluralism이라고 합니다.
어떤 한 개념을 알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개념과 반대되는 개념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Pluralism의 반대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형이상학적으로 Monism 또는Uniformism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plural이란 문법에서 복수를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복수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조금 쉬운 말로는 many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onism은 희랍어로 Monus에서 나온 것인데 one이니까 형이상학적으로 단일주의, 유물주의에서는 오직 물질만 존재한다, 또는 Spiritualism 정신주의에서는 물질은 정신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정신만 존재한다 이렇게 주장하면 monism이 됩니다. 정치형태에서 정치형태는 하나만 존재한다고 할 때 monism 다양한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할 때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숫자를 생각해보면 무, 하나, 여럿, 또는 모두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정치제에서 Monarchy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고 몇 사람이 다스릴 때 aristocracy, 많은 사람이 다스릴 때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스리는 것을 democrac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수주의는 여러가지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다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많다는 것이 나쁠 때가 있습니다. 양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종류가 많다는 것이죠. 음식이 많으면 좋겠죠. 색깔같은 것은 많을 수록 좋겠죠. 성도 남자만 있지 않고 남자와 여자가 있다는 것이 좋겠죠. 각각의 종류대로 여러가지를 지었다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세상에 많은 종류가 있는 것이 창조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신학자 중 God dislikes uniformity 하나님은 다양하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잘못된 결론으로 흑백이 일부러 하나로 되어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정당화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하나님이 지은 세계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세계이고, 다양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미국에서 놀란 점이 반샌 노블에 가보면 영어책만 있습니다. 저는 유럽에서 공부했으니까 서점에 가면 영어책, 불어책, 독어책, 화란어책 등 다양하게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용하고요.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렵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획일적인 것보다는 많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 이렇게 많아졌는가, 이것을 생각해보죠. 예를 들어보죠. 노량진에 100년 한 아가씨가 있었다고 생각해봅니다. 한 아가씨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아마 십중팔구 노량진에서 태어난 대로 부모 밑에서 살다가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고 그렇게 살았겠죠. 지금 노량진에 살고 있는 한 아가씨를 생각해보면, 그 아가씨가 선택할 여지가 아주 많습니다. 결혼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도 선택할 것이고, 결혼하면 어떤 사람과 할 것인가도 알 수없고, 공간적으로도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 무엇을 할 지도 모릅니다.
다원주의라는 것은 선택 가능성이, 옵션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아파트가 없었지만 지금은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것이죠. 수없이 많은 직업도 사라지고 생겨나고 있죠. 선택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15세기 한국에 살았던 사람이 선택할 종교는 무속 또는 불교나 유교가 될 거에요. 지금 와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불교신자가 될 수도 있고 기독교 신자도 될 수 있고, 한창 한국에서 전도 많이 하는 증산도 신자도 될 수 있고요. 선택의 가능성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촉진하고 기술적 발전으로 선택가능성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의 생각해봐야하겠습니다. 여기서 기본적인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 16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몇 가지를 다원주의와 관련된 몇 가지를 이야기 해보죠. 성에 관한 문제, 정치적인 성향의 문제, 종교적인 문제, 즉 신앙의 차이와 관련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크게 세 가지를 알 수 있는데요, 첫번째로 ‘너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 바울 사도가 살던 시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비슷한 정도로 다원주의의 시대입니다. 우리시대만 다원주의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테네는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던 곳입니다.
아테네 이야기 데살로니가에 가기 위해서 잠시 머문 곳이에요.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왜 아테네에서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의문이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무른 것으로 나옵니다.
도시를 둘러보고 거기에 우상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 가서는 유대인들과 아고라에 가서 아테네 사람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과 에피큐리안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에피큐리안들은 쾌락을 즐기되 작은 자연적 쾌락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친구들과 담소하고 소박하게 삶을 즐기며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은둔주의자였습니다. Hidden Garden에서 조용히 은둔하는 삶을 이상으로 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면서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다양한 사상과 접촉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다는 것은 말했습니다. 여러분 주로 삼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또 어떤 것의 주인입니까. 어디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입니까? 가장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삶의 주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삶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추상적인 질문이 되겠지만 삶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하는 것은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일터로 나가거나 학교로 가거나 공부하거나 말하거나 일하고 물건 사고 팔고 결혼한 사람은 부부생활하겠죠.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기뻐하고, 이런 삶의 주인이 그리스도이다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라는 것이 어떤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성의 주인, 우리의 노동의 주인, 우리의 삶의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는다, 먹고 마시는 것이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 욕심대로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대로 바라시는대로 산다는 것이지요. 내가 생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대로 한다라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내가 아내와 성생활을 하는데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성을 감사히 누리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즐기는 것도 옳지 않고 너무 금기시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입니다. 잠자는 것, 음식을 먹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는 것은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누리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첫번째로 삶의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감사하면서 그것을 누리는 것 그것이 Lordship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베드로서가 말하는 두번째의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어떤 태도로 하면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유라는 말은 원어로는 logos입니다. 영어로 logic의 어원입니다. 그 이유라는 뜻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도록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대답이라는 말이 apologetic, 변론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신자가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성에 대한 너의 태도가 왜 그런가 하고 물었을 때 그 것에 대해서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왜 기독교인이냐 라는 질문에 대답할 태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이번 주제인 다원주의와 관련된 것인데, 베드로서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영어 성경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시면 한번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RSV에서는 With Gentleness and Respect이라고 번역하고 있죠. 그러니까 아주 젠틀하게, 온유하게 그리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강연을 할 때 대학교 1학년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카톨릭, 불교 신자에게 어떻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단의 종교를 믿는 사람을 어떻게 존경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서강대에 있으니까 개강 미사가 있거든요. 지금은 개신자 신자들은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만 초창기에는 미사에 참석을 했어요. 사실 저는 유럽에서 공부할 때 미사에 참석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곧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미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같이 참여하는 것이 서로 이렇게 힘든 것 같습니다. 역사를 보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큰집과 같은 것인데요, 물론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교황무오설이니 무오수태설 이런 것은 사실 200년도 안 된 것입니다. 그렇더라고 사단의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도 불교가 사탄의 종교인가 이것 잘 모르겠어요.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견성성불이거든요. 내가 깨달아서 구원을 얻어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인간의 방법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방법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불교철학을 공부해보면 그 생각이 참 깊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파고들면 결국 파악이 되고 이해가 되요. 성경말씀은 그렇지 않거든요. 결국 불교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종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한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죠. 성경 말씀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때로는 논리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가 성육신인데, 요한복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보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고통을 당할 수 있냐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인데,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꺼리는 것이 된다고 했는데, 사람의 생각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
헤겔이 그리스의 종교 사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 “고통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이런 뜻인데요, 그만큼 신앙을 갖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 핵심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는 기본적은 논리적 구조로 되었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논리를 뛰어넘는 거에요.
그런데 불교 교인을 대할 때 힘으로 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입니다. 가서 주먹쥐고 대할 수 있는가, 아니거든요.
동국대에 있는 교정에 있는 불상을 훼손해서 소란이 난 일이 있었죠. 노량진에 장승을 베어버린 사건이 있었고, 단군상을 부셔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신소속 장로인데, 교단 소속 목사님, 관련된 목사님이 감옥에 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데, 논리적으로 따져서 그것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지적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것은 Gentle한 방식으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존경할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온유와 존경으로 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져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 영어 성경 한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SV에 따르면 Pursuit peace with everyone 하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라는 것이고, 두번째가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품이나 삶이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로서는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종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같은 생각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거룩함을 요구하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요즘 박진영이라는 가수가 얼마전에 6집을 냈는데, Sex is Game이라는 곡을 발표를 했습니다. 지난 2,3주 미디어에서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기윤실을 아예 지목을 했습니다. 결혼 전에 섹스를 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에 어디에 있냐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상물 등급위원회에 18세 이하 판매 금지를 주장했는데, 기각 당했습니다. 이 조직은 업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업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매운동을 인터넷을 통해서 하고 있거든요.
불신자들에게 그렇게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다만 문제는 대개 음반 소비자들이 중학생들이거든요,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고 즐길 수 있는 것이지만 박진영이라는 가수가 주장하는 것은 왜곡된 성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에 가장 친밀성을 주는 것이거든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성적 관계보다 더 친밀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없거든요. 다만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는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사들에게 얘기하는데, 세상과의 관계에서 꼭 이기겠다고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권유했습니다. 젠틀하게 그리고 왜곡된 인격이지만 그 인격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진영을 한번 불러다가 이야기를 해보자, 박진영을 위한 기도모임을 만들자, 그래서 좋은 음악, 좋은 글을 만들 수 있도록 하자,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른 생각,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되야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우리의 확신은 분명하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확신을 갖되, 다른 믿음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행동할 때는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젠틀한 방법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다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