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 2018 D2] 저녁 풍경

[KOSTA 2018 D2] 저녁 풍경

저녁 식사를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찬양팀을 위해 중보기도 용사들께서 뜨겁게 기도해 주십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만난 예수님을 증거한 동준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용감하게 나아가는 모습에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성경봉독 시간입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 아닌겨?”  (불만있능겨? 라고 말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화종부 목사님께서 “은혜가 왕 노릇하는 나라”라는 제목으로 마태복음 19:30-20:16을 말씀 전해주셨습니다. 설교의 일부를 아래에 올립니다.

우리 구주의 첫번째 메세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입니다. 그 뜻은 이미 그 나라가 와서 가까이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의 세상과 다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 나라가 얼마나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않다면, 이미 온 그 나라를 우리는 누리지 못 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첫째가 꼴찌되며 꼴찌들이 첫째가 될것이다”라고 말씀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구조입니다.

오늘의 말씀엔 세 부류의 일꾼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아침 6시에 온 일꾼들은 1데나리온을 약속받고 왔습니다. 두번 째, 9시 12시 15시에 온 일꾼들은 상당한 금액을 약속받고 왔습니다. 마지막 17시에 온 사람들은 구체적인 임금에 대한 약속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이들에겐 묻지않은 질문을 하셨는데 이 질문과 대답을 통해 이들은 노동시장에서 외면당해 남아있는 자들이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V7). 그러나 문제는 바로 다음 발생합니다. 늦게 온 자들 부터 품삯을 받기 시작했는데 모두 같은 1데나리온을 받은 것입니다. 가장 먼저 온 일꾼들의 불평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그 불평은 많이 일한 사람이 많이 받아야하고, 적게 일하면 그만큼 적게 받아야하는 우리가 말하는 “정의”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정의”와 하나님의 나라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조금만 일해도 큰 임금을 받는 나라, 능력이 많아서 많이 한다고 상급이 커야하는 그런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한 분량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부요한 품성을 따라 풍성한 삯을 받는 나라입니다. 물론 결코 우리는 새벽에 온 일꾼도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건과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넘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보내심도 이와 같습니다. 죄로 가득찬 이 곳에 구주가 오심으로 열어둔 하나님의 나라는 상상도 하지못할 세상과는 다른 질서를 보여줍니다. 세상의 무한 경쟁의 궤도 속에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 은혜의 질서가 있습니다. 계속 쉼없이 달려가는 성취와 소유, 성공을 향한 욕망이 갖지 못한 것에대한 불평과 원망이 되어 내 주변의 은혜는 정작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눈 앞의 성취가 행복을 보장하는 듯 보여도 그것을 향해 달려가 이루었을 때 그 기쁨은 잠시, 또다른 걱정과 불안, 두려움이 몰려오는 우리를 쉽게 발견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땅에 있는 것들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자격과 행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같은 자격없는 자들을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따라 채워주시는 그 주님을 바라볼 때에, 자신으로부터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나 스스로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쉼없이 달려가는, 잠시의 기쁨과 더 큰 두려움의 굴레 속에 나 스스로의 종이 되는 삶에서 벗어나 생수의 강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기독교는 과연 나를 깨어지게 하는지, 나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도구인지 돌아봅니다. 땅에 있는 것들의 질서(즉 자아실현, 성공, 두려움)보다 은혜의 새로운 질서가 더 커보이는 삶! 믿는 구석이 되시는 하나님에 의한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손해본 일꾼은 없습니다. 늦게 온 일꾼의 품삯을 똑같이 줌으로서 가장 손해본 사람은 결국 주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은혜의 근거입니다. 주인의 희생에 근거하여 일한 것이 없는 종들도 혜택받는 다른 구조. 그 근거는 십자가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집니다. 창조주의 아들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에 희생에 근거한 그 은혜가 자격없는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신 새로운 질서, 그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복음과 기독교의 심장과 같은 은혜가 아닌, 세상보다 조금 나은 도덕성으로 세상에 편승했기에 우리가 욕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아는 자로, 그 은혜가 왕 된 나라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이어지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전해진 말씀을 찬찬히 다시 곱씹는 시간입니다. 듣고 흘려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소화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입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 새겨진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

 

 

 

 

[KOSTA 2018 D2] 유치부 풍경 (포토 스케치)

[KOSTA 2018 D2] 유치부 풍경 (포토 스케치)

유치부 아이들이 선생님의 인도를 받아 물놀이를 하러 갑니다. 선생님 손 대신 링을 꼭 잡고 조별로 갑니다.

90도를 넘는 무더운 날씨인데 습도까지 대단합니다. 이럴 때 시원한 물놀이는 사막의 오아시스입니다.

 

 

 

[KOSTA 2018 D2] Youth 아이들 (게임 풍경)

[KOSTA 2018 D2] Youth 아이들 (게임 풍경)

유쓰라 해서 아주 큰 아이들일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부담스럽게 크지는 않습니다. 고등학교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유쓰 사역을 하려면 목소리가 커야합니다. 아이들이의 지방 방송을 뚫고 방을 크게 울릴 수 있는 낭낭한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게임에 임하는 아이들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뛰면 안되요~”.

그룹별로 UCC 를 만드는 게임입니다. 아이들의 에너지가 폭발합니다. 뛰고 구르고 쌓고 눕고.. 싱그럽고 사랑스럽고 …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홧팅!

[KOSTA 2018 D2] 점심 식사 풍경

[KOSTA 2018 D2] 점심 식사 풍경

식당 가는 길 조별 사진 한장~.

식당은 만남의 장소입니다.

미혼 조는 식사가 마냥 즐겁습니다. 기혼조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지…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뭐니뭐니해도 ‘아이스크림’입니다. 아이 어른 할 것 긴 줄을 이루어서 서있습니다. 식사 줄은 세네줄이 있는데, 왜 아이스크림 줄은 하나밖에 없을까요? 참 궁금합니다.

어른에게도 아이스크림을 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아이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아이스크림을 퍼는 모습이 귀엽습니다.

 

 

[KOSTA 2018 D2] 오전 집회 스케치

[KOSTA 2018 D2] 오전 집회 스케치

오전 집회는 손태환 목사님께서 요한복음 5:1-9의 말씀으로 “은혜, 자리를 내어주다”라는 제목으로 전해주셨습니다. 설교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올렸습니다.

가끔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은혜입니다. 은혜의 사전적 정의는  고맙게 베풀어주는 신세나 혜택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먼저 물에만 들어가는 자의 병이 치유된다는 그 곳은 사실 선착순의 신화가 만들어낸 무한 경쟁의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곳에 모인 병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것이 아니라 그저 걷고 싶고 낫고 싶기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이방 신 ‘아스클레페이온’의 신전이기도 한 베데스다에서 의미하는 은혜란, 결국 이방신의 치유의 은혜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절박하게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양문 안 여호와의 성전에서는 병자들에게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병자들을 향한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 은혜없음이 병자들을 이방신의 신전으로 밀어낸 것입니다. 오늘날 graceless의 세상, 자격이 있어야 자리를 내어주는 세상이 이와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외면 받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교회, 설 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그렇게 베다스다로 향했던 그 병자들처럼 또다른 미신과 우상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없는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설 곳없는 자들에게 문을 열 때, 교회는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인류학자 김현경은<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은혜가 없는 것은 곧 장소 없음을 의미합니다. 은혜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늘 장소 없음에 스트레스 받습니다. 나를 위한 자리가 확보되지 않을 때,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에덴이라는 장소를 잃은 인간에게 직접 내려오신 예수님, 직접 그 삶을 살아가며, 머리 둘 곳 없는 땅을 빼앗긴 이들에게 찾아가서 천국을 주시겠다 약속하신 그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데스다에 자리를 깔고 누운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가십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세상은 시선을 두지 않는 그 병자를 바라보신 것에서 부터 그 은혜는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물으실 때 그 병자는 ‘낫게 해주십시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갑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낫고자 하는가 아님 누군가보다 앞서나가기 원하는 것인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사람되게 하는 것이지 사람을 넘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라’ 말씀하십니다. 이 것이 진짜 은혜, 진짜 베데스다 입니다. 이 병자에게 가장 큰 은혜는 일어나 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께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문은, 흠없는 양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힘들고 망가져 자리없는 양들, 바로 우리를 위해 열린 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누구에게도 문을 닫지 않습니다.

은혜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된 사건, 아무 자격없는 우리가 예수의 양문을 열고 감히 그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설 자리가 없는 자들에게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은혜 받은 자인 우리가 갈 곳 없는 자들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받은 자가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이후 리플렉션 (반추)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시간입니다. 생각해 볼 이슈나 질문들을 화면에 보여주고, 자신의 생각과 묵상 또는 결단을 노트에 적습니다.

적은 것을 옆에 있는 조원들과 간단하게 나눕니다. 이제는 조원들과 많이 친해져서 나눔이 활발합니다.

책 소개가 빠질 수 없지요. 4권의 책이 소개되었습니다.

  1. 필립 얀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2. 도날드 밀러 “재즈처럼 하나님은”
  3. 브래넌 메닝, “아바의 자녀”
  4. 폴 밀러, “사랑하다, 살아가다”

책 소개가 효과적이었던 것일까요? 식당으로 가는 길에 책방에 들러책을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KOSTA 2018 D2] LGS (Learning God’s Story) 포토 스케치

[KOSTA 2018 D2] LGS (Learning God’s Story) 포토 스케치

LGS (Learning God’s Story) 은 중그룹으로 모여 하나님 말씀을 함께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기혼 참석자들로 한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아이들이 보이네요.

시험을 보는 듯 타이머까지 동원하는 창조성이 보입니다. 그룹 디스커션을 주어진 시간에 제한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각 그룹마다 다양한 본문,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합니다.

LGS 를 마치고 오전 전체 집회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가벼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