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5, 2010 | 유학생 사역/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계획은 빨리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사과정도 M.Div가 아닌 MA를 먼저 시작했다.
기독교 교육학으로 석사를 하기에 아무래도 사역 경험들이 필요할 것 같아 지역의 이민교회에서
파트타임 사역자로 사역을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좌충우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따라와준 교사들이나 아이들, 그리고 배려해 준 교회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러던 중 한 지역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기 시작하면서 한 영혼을 바라보는 나의 영적 시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린 한 영혼, 한 영혼을 말씀으로, 인내로 섬긴다고 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나는 M.Div를 고려하고 현장에서의 사역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은 자연히 대학생들을 품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힘든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당시만 해도 “캠퍼스”에 있는 대학생들에게는 당시 이민 교회들의 관심이 그리 많지 않던 때였다. 모든 사역이 그렇겠지만 캠퍼스 사역 역시 자신의 은사나 적성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일단은 자신의 은사나 적성을 바탕으로 그에 적절한 교회/단체등에서 사역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열정적이기 보다는 좀 차분하고 사색적이기를 바라는 성향이 많기에 그런 색깔(?)을 가지고 사역하는 단체에 마음이 끌렸고 그래서 직접적으로 접하게 된 학생선교단체가 바로 IVF였다. 당시에 남가주에는 한국기독학생회의 남가주 지방회라는 이름으로 UCI, El Camino collge, Cal State in Long Beach, 그리고 UCLA에서 KIVF가 활동하고 있었다.
S 목사님으로 부터 접하게 된 존 스토트의 많은 책들이 내 신학적인 밭을 일구는데 일조했다면, 그 존 스토트가 활동했던 IVF와의 만남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요, 만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같은 대학원을 다니던 1.5세 가운데 T 형제와의 만남은 본격적으로 캠퍼스 사역에 연결된 계기였다. 그러나 캠퍼스 사역에 관심이 있다는 나의 말에 보인 T 형제의 첫 반응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데(단 한 마디였다. “쉽지 않아요!”) 지금 돌아보면 어떤 의미를 담은 것이었는지 충분히 수긍이 간다.
캠퍼스 사역은 쉽사리 덤빌 수(?)있는 현장은 아니다. 너무 겁을 내고 두려워 뒤로 물러설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덥석 발을 담글 수 있는 곳도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나 ‘지속성’의 주제와 관련하여는 더욱 그렇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승부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오랜 인내와 겸손이 필요한 사역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T 형제의 소개로 만난 지역대표간사님이었던 H 간사님과의 만남은 그 후로도 내가 캠퍼스 사역이 무엇인지를 배워 나가는데 있어서 좋은 토대를 놓기에 충분했다. 베테랑 간사님이었던 그 분의 경험과 간사 회의때마나 나누어 주던, 그리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아주 오래된, 직접 수리하시면서 타시던 빨간 니산 센트라 안에서 나눠 주시던 귀한 말씀들이 생생하다.
지금 돌아보면 바로 그 세사람, S 목사님, T 형제, 그리고 H 간사님과의 만남은 큰 축복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캠퍼스를 마음에 품으며 기도하는 수많은 미래의 동역자들, 혹은 캠퍼스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동역자들, 특히나 한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속에서 캠퍼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동역자들에게는 먼저 자신의 부족함과 훈련받아야 할 부분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채워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눈을 부릅뜨고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간청하고 도움을 요청해 보기를 바란다.
그것이 맨땅에 헤딩하지 않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처럼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등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첫걸음이 됨을 믿는다.
Oct 2, 2010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2) – 김현회

[2] 성령 세례
중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점은 무엇이냐면 그 결과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점을 강조하냐면, 다음 주제가 성령 세례인데, 성령 세례와 중생을 다르게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믿고 중생했지만 아직 성령을 못 받을 수 있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오류입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모두 성령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도 하고 예수님의 영이시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는 것은, 즉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로 믿고 주로 시인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가능한 것이고, 내가 영적으로 거듭나서 내 안에 성령님을 모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 ‘다’, ‘우리가’가 반복되는데 이 말은 성령 세례를 말하는데, 바울이 이 성령 세례를 말할 때 바울의 의도, 요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하나임을 강조하는 일이 오히려 교회를 둘로 나누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고, 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뉩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을 하였어도,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중생과 또 다른 사건으로 보는데, 어떤 신비적인 체험, 대표적으로 방언을 염두에 둡니다. 성령의 뜨거운 진동이 왔고 방언을 받았고 이런 체험을 받으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이렇게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분을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중생을 했지만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 거듭났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지체가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마셨다는 말은 내가 성령을 소유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믿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이지, 일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접근할 수 있겠습니다. 신약에 세례에 대한 본문이 7군데 있습니다. 모두 종합해 보면 세례에는 4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주는 자, 세례받는 자, 세례의 매개체, 그리고 세례의 목적. 이것을 요한의 물 세례에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의 물 세례에 있어서 주는 자는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받는 자는 요한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 세례의 매개체는 물, 세례의 목적은 죄사함. 그래서 죄사함을 받기위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령 세례입니다. 종종 우리는 성령 세례를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배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에서 주시는 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받는 이는 믿는 우리 모두이며, 세례의 매개체는 성령, 그리고 세례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이며 성령 세례와 중생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적어도 동시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은 성삼위 하나님이 다 함께하시는 일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어떤 측면에선 예수님이, 어떤 측면에서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부르심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 함께하시는 일인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일하거나 동시적 사건이고 같은 사건을 다르게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마치 성령세례가 중생과 별개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로 오순절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분명히 이 제자들은 성령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 제자이기에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오순절까지는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중생과 성령 세계가 두 단계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후에 성령을 받았다는 오순절 성령사건은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한 번만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성령이 아직까지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강림이 있자 술취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합니다. ‘때가 제 삼 시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선지자 요엘로 약속한 것을 성취한 것이다 – 말일에 내가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다.’ 남종과 여종이란 말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란 뜻입니다. 남녀 차별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그 예언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앉으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너희가 보는대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이것이 너희가 보는 현상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성령을 보내주신 사건입니다. 그전에는 성령이 임재하셔서 사역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에는 모든 믿는 자는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을 하자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는 어찌할꼬’하며 마음에 찔림을 느낍니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에 대한 찔림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날 오순절날 3000명이 예수를 믿고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인 것을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즉 예수를 영접하면 성령을 받으리라”고 선포합니다. 그 중간에 어떤 다른 것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날 3000명이 세례를 받고 나서 오전에 있었던 사도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을 받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성경엔 그 기록이 없습니다. 그 3000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join을 합니다 – 오순절이 교회의 출발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증거는 무엇이냐면 기쁨의 충만이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다 함께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떡을 떼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 받은 그룹은 2그룹입니다. 첫째로 사도들, 그리고 3000명. 그런데 두 그룹의 모습은 다릅니다. 하지만 똑같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님이 오셨으니깐 우리는 3000명에 해당되면 생각하면 됩니다.
성령강림과 중생이 다르게 보이는 듯한 다른 본문은 사도행전 8장, 10장, 그리고 19장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고 많은 사람이 믿자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거기에 세례를 받았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그들이 정말 예수 믿은 것을 확인 하고 나서 사도들이 안수하매 성령이 저들에게 임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도 분명히 오순절과 비슷하게 두 단계죠. 빌립이 전하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사도들이 안수했을때 성령이 임하고 방언도 하고 그런 여러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보는것이 옳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는 같습니다, 다 유대인들이기에. 이 유대를 넘어서 제일 먼저 복음이 전파된 곳이 사마리아입니다. 먼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다는 원수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사마리아까지 전파되면 사마리아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받아드려야 하는데, 그러면 어떤 현상이 있어야 하면, 오순절이 한번 반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행 8장에서 나오는 사마리아판 오순절입니다. 그런 현상이 똑같이 일어나야만 ‘이들도 똑같이 성령을 받았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비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경건한 자’라고 했습니다.특별한 용어로써 Godly man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받지 않고 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넬료가 기도하는 가운데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불러 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어 그곳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가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엔 부정한 짐승이 잔뜩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그랬더니 베드로는 그럴수 없다고 대답하였고, 하나님께서 ‘내가 정케한 짐승을 네가 부정타 하지 말라’ 라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을 하여, 그들을 따라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듣는 중에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임하는데 오순절 사건과 같은 형태로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과 이들도 똑같이 받았으니 누가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도 오순절의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이 유대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사마리아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이방인에게 넘어갈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유대인들이 너무나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민족적인 장벽, 유대인과 사마리아 관계에 장벽을 무너뜨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때 거기 몇 명의 제자들을 만나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에 제자들의 반응이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몰랐다’였습니다. 바울이 조금 의아해하여 ‘그러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물세례만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하고 예언도 합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인데 아직 성령을 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잘 보면 2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1. 믿을 때 성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2.믿을 때 당연히 성령을 받는다. 저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볼 때 이상했던 건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지 않았던 제자들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이전 18장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 있는 아볼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볼로는 열심히 말씀을 전했지만 요한의 물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 하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 주의 도를 자세히 일러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냐면, 오실 메시아를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요한이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있는데 그가 메시아며 구세주라고 해던 것까지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이 오셨던 것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고 세례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이 문제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성령의 인치심.
(엡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주시는데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실때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나님의 소유라고 도장을 찍으신 것이며,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앞으로 우리가 장차 얻을 기업 – 상속 –하나님의 상속자, 얻을 기업의 보증이 되셨다라는 뜻입니다. Deposit/보증금으로 성령님을 모셨다는 뜻입니다. 인치심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인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예수 믿는 자 안에 불꽃이 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자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거듭난 사람, 성령 세례를 받은사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령님이 무슨 의미냐면, 마치 자동차를 살때 downpay를 하고 사는 것처럼 앞으로 나머지 것을 주겠다는 약속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그 새로운 세상을 상속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속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증하기 위해 우리안에 세로운 세대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성령이 지배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3가지 – 중생, 성령 세례, 인치심– 모두는 예수를 믿는 출발점에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출발점 사건의 공통점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사신다, 곧 내주하신다고 말, 즉 In dwelling Holy Spirit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요즘 성령세례에 관하여 그릇됨들이 있어서 자꾸 예수를 믿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고 second class Christian인것처럼 그렇게 구분하는 건강하지 못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때 체험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맛보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모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장차 올 세상을 미리 맛볼 수 있는것입니다. (계속)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Sep 30, 2010 | 교회와 공동체/백은실의 보석을 캐는 리더]
목사님이시면서도 농사를
좋아하시던 아버님께서는 어릴적 살던
양옥집 옥상에 흙을 퍼다 올리셔서
밭을 만드셨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옥상부터 올라가서 딸기와 참외, 토마토를
따서 먹고, 저녁 반찬거리로 고추와
가지 등을 따서 내려오곤 했다. 뿐만
아니라 식구들이 겨우내 먹을 김장배추까지
옥상 농장에서 재배했다. 교인들이 키우다가
병이 들어 가져온 각종 실내 화초와 나무들이 입원해
있는 공간도 있었다.
새벽 등산길에서 “농사를
지으며 목회를 배운다”며 농부의 마음과 수고에 대해 설명해
주시던 아버님의 말씀을 그때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굳은 땅에 식물과 과실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땅을 경작해야 한다. 굳은 땅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물을 뿌려가며 개경(改耕)해야 할 뿐 아니라, 거름을
주어 마르고 굳은 땅을 옥토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긴 시간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아름다운 푸른 싹을 보게 된다.
이런 생명의 경이로움에 박수를 보내며 기뻐하는 농부의
심정, 그 수고와 사랑이 곧 영혼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함을 열심히 설명해 주시던 아버님의 말씀을
이제는 그림자만큼이나마 깨달아 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변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설교말씀을 들을 때도, 성경공부를 할
때도 이 말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생각난다. 어떤 분은
큐티를 할 때도 오늘 하신 말씀이 꼭
필요한 사람이 생각나면, 그 날은 그 사람이 이 말씀을
받고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조금 일찍 큐티를
끝내고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큐티를 하라고 당부하고 오후에
다시 전화해 큐티를 했는지 확인하고 무슨 감동을 받았는지
물어보기까지 한다고 한다. 가정의 리더인 부모님이나
교회의 영적 리더들도 따르는 이들의 변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사역을 하신다.
목사님과 소그룹 리더들을
만나면 많은 분이 “사람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도 해보고 저런 말도 해보고, 얼러도
보고 협박도 해보지만, 사람들을 변화시키기가 너무도
힘들다고 하신다.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해 삶이 변화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결론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인 듯하다. 내 경우에는 늘 내가
변화시키려고 애쓴 사람들보다 나를 먼저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자주 경험했다.
가정과 교회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힘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영적 리더들은 많은
시간과 수고를 투자한 후에 지치고
절박한 심정으로 심각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왜
사람들은 변화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누구의 역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 얻을 수 있는 답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역할과 다른 이의 역할을 구분하지 못할
때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고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배소서 2장 말씀과
로마서 12장 말씀을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은혜로 살리시고,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여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지만, 육신도 영혼도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 그리고 영혼이 변화하고 새로워지게
하는 힘도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부드러운 땅으로 만들기
위해 사랑과 이해로 후원해 주고 따뜻이 대해주어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 함께 학습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안내하는 일이다. 말씀의 씨앗에
물을 주고 햇볕과 폭우를 막아주는 그런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신다. 이런 역할은 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모두 골고루 행할 수 없는 일이기에
소그룹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그룹에만 존재하는
네 가지 기능이 있다. 그것은 함께
있기, 함께 배우기, 함께 돌보기, 함께 일하기이다.
소그룹의 아름다움은 함께하는 것이다.
함께
있기를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은 우리들에게 올
유익함을 계산하는 마음과 우리가 정해둔 타이밍(timing)이라고
생각한다. 김혜자 님이 쓰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
두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기자들이 준 사과 하나조차
들고 갈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 형이 배고픔에 쓰러져
있는 동생에게 사과 반쪽을 들고 간다. 죽은 듯 누워
있던 동생은 형이 씹어서 넣어주는 사과를 받아먹는다.
그들은 이렇게 연명해 온 것이다. 두 소년을 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형이 늘 자신과 함께 있음을 믿고 지내온
동생은 기력을 회복한 반면, 형은 끝내 살릴 수 없었다고
한다.
또 도종환 시인의
산문집에 나오는 「그 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에 등장하는
도마뱀은 3년 전 목수들의 실수로 몸에
못이 박힌 채 죽어가는 친구 도마뱀을
위해 끼니 때마다 먹이를 물고 나타난다.
그리고 해가 지면 함께 얼굴을 맞대고 함께 두려움을
견뎌낸다. 그 도마뱀의 사랑으로 못이 박힌 도마뱀은
3년의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난다. 그 도마뱀들이 어떤
관계인지 무척 궁금했다. 단순한 친구인지, 모자간인지,
부부인지……. 아줌마들에게 물어보면 남편은 절대로
아니라고 확신하셨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어쩌면 어느 부분엔가
못이 박힌 채 살아가는 것 같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재물이, 병약한 사람에게는
아픈 몸이 못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공부 자체가 순순한 배움으로 여겨지기보다
자신을 꼼짝 못하게 억누르고 있는 못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죄의 못이 그들을
늘 누르고 있을 수 있다. 가정에서나 소그룹에서 우리는
모두 못박혀 사는 서로를 위해 필요를 채워주고, 두렵고
힘든 기다림의 시간에 함께 있어 주어야 한다. 서로가
그 못에서 자유롭게 될 때까지 격려해 주고, 서로의
존재를 늘 느끼게 해주며, 위로와 기쁨을 주어 소망을
주는 것이 함께 있기이다. 이때 이미 박혀 있는 못을
더욱 두들겨서 더 깊이 박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시간을
독촉하며 협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해둔 타이밍에
그들의 못이 떨어지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타이밍은 그들의 시간과,
아니 하나님의 타이밍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빨리빨리
못에서 나와서 살아나고 변화되어서 우리의 계획대로
진행하고 싶은 욕심이 모든 리더에게 있는데, 많은
경우 그것이 못을 더욱 깊이 박아버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함께
배우기를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은 sins of power 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강의식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열어주고, 발견한 것을
스스로 삶에 적용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가장 효과적인 배움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배움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소그룹을 인도하는 리더나
구성원들이 나눔을 가능하게 하는 태도로 함께 배울
수 있도록 진행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런데다가
리더라는 위치가 주어지면 그 욕구에
힘이 실리게 되어 열심히 강의하고
주입하게 되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시간보다 자신이 말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항상 진리인
것처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빈 공간을 자신이
채워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sins of power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나눔을 위해서는
일단 리더가 힘을 빼고 본문에 근거한 개방식 질문을
통해 그룹원들에게 발견의 창을 열어주어야 한다.
5년 전, 교회에서 유년
주일학교 사역을 맡았다. 미국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발견학습법으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설교도 되도록이면 각자가 관찰하고
해석하고 발견하도록 준비했다. 어느 주일,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며 대학생들에게 간단한
연극을 하게 하여 읽은 본문의 내용을
눈으로 보며 관찰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한 그룹은 작은아들 그룹, 한 그룹은
큰아들 그룹, 나머지는 아버지 그룹이었다. 각 그룹들에게
만약 그 사람이라면 어떤 감정을 느끼겠냐고 질문했다.
작은아들 그룹의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하고, 목욕을
안 해서 몸이 가려울 거라고 하고, 부끄러울 것 같다고
했다. 큰아들 그룹 아이들은 질투와 분노와 억울함을
얘기했다. 아버지 그룹은 용서의 기쁨과 아들들에 대한
사랑을 얘기했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니?” 그러자 아버지 그룹에 있던 3학년
남자아이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나님께 늘 거짓말하는 우리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하세요.” 어떤 여자아이는 “하나님께 늘 고함을 질러대는 우리
엄마를 용서하라고 하세요.” 몇 가지 질문들을 더 던져보니 아이들
집안 사정이 다 쏟아져 나왔다. 내가 만약 그 본문으로
강의식 설교를 준비했다면 감히 부모님께 품은 마음을
쏟아 놓게 하고, 그 아이들의 가장 아픈 부분이 부모들이라는
사실을 과연 알 수 있었을까? 그 아이들은 그날 자신들에게
실망과 아픔을 준 부모님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아주
진지하게 드리고 돌아갔다.
질문으로 그룹을 인도하는
것은 성령님께 각 사람의 마음을
열고 역사하실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드리는 것이다. 질문은 마음의
밭을 경작하는 마지막 단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함께
돌보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한 관계 형성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어린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과
소망을 소유하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다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 잘 심겨진 씨앗과 새싹들이 된서리를
맞고 폭우를 맞아 다시 긴 시간이 흐르도록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몇 년 전, 세미나
인도를 위해 하와이를 방문한 적이
있다. 행사가 끝나면 바로 돌아와야
하는 일정이라 몇 시간 정도 빨리
도착해서 택시로 하와이 섬의 힐로(Hilo)를
혼자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만난 택시 운전사는 하와이에서 태어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내가 미국
장로교단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절박한
삶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린 아내가 도박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주 가산을 탕진하고도
헤어나오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 아내를 데리고 교회를
찾아 말씀으로 희망을 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도움을 바라고 나눈 얘기들이 온 동네에 돌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상처를 받아 이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눈시울을 적시며 내게 부탁했다. 병원처럼
자신들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좋은 교회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빌 하이버스(Bill Hybus) 목사님은
『진정한 크리스천(Authentic Christian)』이라는
책을 통해 관계 형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품성으로 진실함(Authenticity)과 긍휼(Compassionate),
희생(Sacrifice)을 꼽았다. 많은 사람이 진실치
못한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하찮아 보이는 사람도 주님께서 그러하듯
긍휼한 마음으로 돌보고, 다른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며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변화될 수 있도록 그들을 따뜻이 돌보는
힘은 정죄하고 교육하는 말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에,
깊이 안아주는 넓은 팔에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일하기의 단계는 말씀의 씨앗이 새싹이 되어 돋아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의미 있는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주어 더욱 깊은 변화와 성장을 줄 수 있는 단계인데,
이 작업을 위해서는 기존 리더들이 리더십 개발을 위한
열린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도록 기회를
주고,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상관없이 칭찬해 주어
자신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동참하게 하면, 건강하고
유능한 새로운 리더를 개발할 수 있다. 많은 리더가
이 단계에서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거나 경쟁하려고
하여 새로운 리더들을 개발할 기회를 잃곤 하는데,
무척 슬픈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하려는
리더보다 연약함을 나누고, 도움을 구하고,
함께 일을 하자고 초대하는 리더들을
따르게 마련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나누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모든 소그룹은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유기체이다. 모든 유기체가
그렇듯 소그룹도 생명주기를 거치게 된다. 탄생하고,
성장하며, 침체되기도 하고, 병이 들기도 하고, 때가
되면 분리되기도 한다. 위에서 소개한 소그룹의 아름다운
네 가지 기능들이 소그룹이 생명주기를 지날 때마다
지혜로운 리더십으로 인해 잘 활용되었을 때,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소그룹
가운데 고요하지만 확실하게 일어나리라고 믿는다.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을
빌어 돌 같은 마음의 땅을 부드럽게
개경시키시고, 때에 맞춰 사랑의 비로 적셔주고, 햇볕이
너무 셀 때는 그늘도 만들어 주고, 잡초도 뽑아주게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짓는 농사는 늘 풍년가를 부르게
한다.
Sep 29, 2010 | 책이야기
올 봄에 내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과 소명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고민하며 여러 책들을 읽던 중에 <하나님의 뜻: 오늘 여기서 그분을 위해> 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소명에 대한 책을 더 구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10년 전에 씌여진 책인데, 왜 이제서야 내 손에 들어왔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문제에 대해 속시원하게 답해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좀 찬찬히,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했지만, 구체적인 답을 주시지 않아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저자는 책의 2부에서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른 책들에 비해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한 내용들이 많아서 구체적으로 와 닿는 점이 좋았다. 저자는 소명이라는 화두를 꺼내면서 가장 먼저 직업과 소명을 구분하고 있다.
첫째, 소명은 직업을 초월한다. …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차적 소명은 능력과 지위와 기회와 배경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모든 존재와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그분을 섬기는 삶이며 특별한 헌신과 에너지와 방향으로 투자되는 것이다.”…
둘째, 소명이 결코 직업으로 격하돼서는 안되지만 종종 소명에는 직업이 사용된다. 인근 의대 레지던트 프로그램에서 병리학을 가르치는 친구가 있다. 그는 직업 의사지만 그의 소명은 직업보다 크다. 의사라는 직업을 사용해 그는 세상 의사들이 대부분 간과하는 목표들을 이루고 있다. …
셋째, 소명은 전통적 직업이 가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를 보낼 수 있다. 최근 나는 친자녀 여섯에 입양 자녀 열 네명, 도합 스무 명의 자녀를 둔 분을 만났다. 집안이 난장판이 돼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기는 커녕 그녀의 말에는 침착함과 기쁨과 활력이 배어있다. 무대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무희처럼 말이다. 스무 자녀의 어머니 노릇은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그녀에겐 전통적 의미의 직업은 없었음에도 자신의 소명을 이루고 있었다.
끝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소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그 단어의 사용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의 소명은 단일 직무인 경우가 드물다. 그 직무가 수사의 직분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의 소명-경우에 따라 단수든 복수든-을 발견하는 길과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이루는 길은 깔끔하고 질서정연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 여정이 시작부터 끝까지 일직선으로 쭉 뻗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pp. 90-92)
그리고나서도 부족함이 느껴졌던지, 저자는 다시 독자들이 소명과 직업을 분명히 구분하도록 돕기 위해 직업에 대해서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모든 소명이 다 구체적 직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자신의 가장 깊은 관심이나 동기와 별 상관없는데도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일하는 경우가 있다. … 보람이나 소명의식을 별로 못 느끼는 일을 평생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먹여 살릴 가족들과 다달이 갚아야 할 돈이 있기 때문이다. …
둘째, 때로는 직업이 오히려 소명의 발견이나 추구를 방해할 수 있다. … 직업은 협력보다는 경쟁을, 나눔보다는 부를, 봉사보다는 권력을, 진실보다는 이념을 강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직업은 사리사욕의 수단이 될 수 있다. …
셋째, 어떤 소명은 결코 공식적 직업이 될 수 없다. 여기에 해당되는 이들은 때로 자신이 ‘한지로 밀려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현대 사회가 직업 특히 그 직업이 가져다주는 권력과 지위와 수입에 집착하다 보니 무직을 택하는 이들은 그만 주변으로 밀려나고 만다. (pp.98-101)
저자는 소명이 직업 이상이며 우리의 존재와 세계관과 인생 목표의 연장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명과 직업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인간은 직업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소명도 직업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을 규정하고 그 인간에게 소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럴 때 인간은 자유로이 직업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룰 수 있다. (p. 104)
저자가 말하는 소명은 이런 것이다.
소명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뭔가 긍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그분을 높인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구원하려 일하고 계시고, 언젠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에 그 나라를 세우실 때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 소명이란 유독 종교적 직업을 가진 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 이 원리는 그리스도인, 불신자 할 것 없이 의, 진, 선, 미를 창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분은 세상을 위해 세상 속에서 유익한 일을 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심으로써 그 사랑을 표현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일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 – 미를 창출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의미있는 일을 제공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깨어진 세상을 고치는 것-을 이루어 가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는 소명의 자리는 독특하다. 소명이 있는 이들은 더 높은 목표 의식을 갖고 더 큰 그림을 본다. (pp.102-103)
저자가 제안하는 대로 직업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세상의 필요를 보는 내 마음의 눈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갈 때 나의 소명이 발견되어지리라 기대한다. 소명에 이르는 여정 자체가 소명의 필수 부분이라고 강조한 저자 덕분에 나는 용기와 위로를 많이 얻었다.
5장에서 소명을 직업으로부터 구별해내는 데 애썼던 저자는 6장에서 소명을 발견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소명을 발견하는 것을 여정에 비유한다.
길가며 만나는 경험들의 효과가 누적되어 우리를 장래 일에 준비시켜 준다. .. 우리가 삶의 소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경험 자체를 통해서다. … 시도와 실험과 실행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 경험은 우리를 가르치고 준비시키고 단련시켜 다가올 미래를 잘 맞이하게 해준다. 이 현 순간에 하나님께 귀기울일 때 그 영광스런 발견의 과정은 시작된다. 우리는 여정 중에 배워서 미래를 맞을 준비가 되어 간다. 성품과 신앙이 자라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며, 전체적으로 성숙해진다. 그러다 때가 되면 소명의식이 싹튼다. (p. 110)
…우리는 10년 전에 미리 인생을 계획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순간 당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소명을 발견해 간다. 산길을 오르는 등산객에게 점차 경치가 펼쳐지듯, 시간이 가면서 우리의 소명의식은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앞에 뻗은 등산로를 단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로는 다음 발을 내딛을 만큼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 틀림없이 도중에 아리송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런 상황에 부딪칠 것이다. 그러나 계속 가야한다. 계속 가면서 계속 찾아야 한다. (pp.114-117)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 중에 많은 시도와 숱한 실험들을 해보면서 실패도 하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상황에도 처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런 소명찾기의 일부이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라고, 소명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해주는 저자의 격려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저자는 그 다음엔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소명을 분별함에 있어 우리가 귀기울여할 하나님의 음성이 내면의 동기, 재능, 삶의 경험, 기회, 공동체, 마음의 기쁨을 통해 들려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종의 신호들이지 공식처럼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요히 앉아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길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소명에 대해 또 다른 별개의 장을 할애하여 우리 인생에 단 하나의 소명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명이 있기 때문에 그 소명들 간의 충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얘기해주고 있다. 저자는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이 장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단 하나뿐이고, 그것은 그의 직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아이를 돌보는 책임은 아내에게 있다고 여겼고 아내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세 아이와 함께 남겨진 그는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야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야심이 많았던 자신이 차츰 변하여 이젠 하루종일 아이들과 가정을 마음에 품고 다니며 아이들 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아버지가 되기까지 그 바탕에는 실패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했던 기도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발견하면서 그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그는 현재 교수이면서 작가이기 때문에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정주부의 소명까지 감당하는 것이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분주함과 압박 속에서도 소명의 복수성에 잘 대처하기 위해 단순성, 균형, 유연성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래서, 그는 첫째 것을 첫째로 삼고 인생에 하나의 최고의 관심사-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를 잃지 말고 그 하나의 초점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면서 내면의 단순성을 연습하고 실천할 것을 권하고 있다. 또,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느껴질 때, 가장 중요한 일을 구분해내고 자신이 가장 전념하는 것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는 연습에 힘씀으로써 선한 우선순위에 바탕을 둔 삶의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균형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끝으로, 자신의 통제권 밖의 상황에 대해 유연하고 홀가분한 자세로 임할 것을 충고하고 있다. 인생이 우리가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 실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바라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이다.
그가 소명의 복수성으로 인한 어느 정도의 긴장과 충돌이 오히려 건강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인상깊었다. 그때 야기되는 불안이 우리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겸손한 종과 청지기의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끝)
[하늘에 닿은 사다리] 하나님의 뜻 (1)
[하늘에 닿은 사다리] 하나님의 뜻 (2)
Sep 28, 2010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 김현회
서론 :
‘그리스도인’의 삶은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삶을 계속 사실 때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일은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 진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성령님의 바른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다락방 설교’ 혹은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가지신 장소가 다락방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요14:16).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인데, ‘우리 옆에 계시는 분’, ‘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comforter(위로자)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original 보혜사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original 보혜사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상에 오셨을 때 육체를 입고 오셨기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으셨고, 그 때문에 오직 제자들과만 함께 있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영’이시기 언제, 어디서나 계실 수 있고 모든 믿는 자 옆에 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을 생각할 때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는, 우리가 성령님이 없이는 살 수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1)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며, (2)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 지를 알고, (3)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역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체험입니다. 성경과 체험은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를 보면, ‘오직 성경’을 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령파’ 교회는 체험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과 체험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그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성경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관해 배울 때 일단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체험 속에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체험은 매우 다양하며,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방언, 입신, 신유 등의 체험이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체험을 보고 “이것이 진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읽은 힌두교 신자의 글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명상’, ‘참선’의 기쁨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명상을 깊이 하다보면 내면 깊이 샘 솟듯이 기쁨이 끊임없이 솟아 오른다.’ 제가 성령님으로 충만해서 은혜 받을 때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가 힌두교 신자라는 이유로, 우리가 ‘당신의 체험은 가짜야’라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체험은 진짜일 것입니다. 그 사람도 기쁨이나, 내적인 평화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은 성령님으로부터 온 체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준이고, 체험은 기준이 아닙니다. 체험은 성경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하고, 분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그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성경이 어떤 체험이 있다고 가르치면 우리는 그 체험을 우리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체험에 관계를 여러분이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오늘 강의를 진행해보겠습니다. 체험으로 인해서 가지고 있는 질문이 있다면 성경에 비추어서 그 체험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 중생, 성령세례, 인치심
[1] 첫째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사역은 중생입니다.
중생, 거듭남, 영어로는 re-generation인데 무슨 의미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요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사람과의 대화 중에 나온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선생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모습을 유심히 보니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니고데모가 만일 오늘날 교회에 찾아온다면 교회에서 굉장히 환영할 것 같습니다. 당신같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니고데모 정도의 background를 가졌다면 교회에서 금방 장로도 되고 높은 직책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네가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있구나’. 또는 ‘네가 나를 알아보는 눈이 있구나’. 이렇게 칭찬하시는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다.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볼 수 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하고 율법에 통달했다. 하지만 너는 영적인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너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도, 예수님의 평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질문을 합니다: “나처럼 늙은 사람이 어찌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까?” 니고데모의 말 자체가 영적인 것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는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거듭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과거에 사람들이 이 말을 오해하여 물은 물 세례, 성령은 성령 세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고, ‘물 즉 성령’ 물과 성령은 같은 것으로 혹은 물은 말씀, 성령은 성령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에스겔서 36:25-27에 있습니다.
(겔 36:25-27)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 상태에 있는데, 이들을 본토로 돌려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주신 약속입니다. 이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본토로 돌아와도 포로가 되기 전의 영적 상태,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우상 숭배하고 타락한 그대로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본토로 돌아가는 외적인 회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물이 나옵니다. “내가 물로 모든 더러운 것을 씻겠다. 그리고 새 영을 주고, 나의 신을 –성령님을-주겠다.” 다시 말하면 속에서부터 새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 너희가 성령님에 의하여 내면으로 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변화되어야 한다,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기 전 영으로 죽었었기에, 죽은 영을 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인해서 하나님과 영으로 분리되어있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말씀이며,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맞지 않습니까? 이제 니고데모의 현대판 인물을 생각해봅시다. Richard Dawkins을 아십니까?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진화론자입니다. ‘God Delusion’이란 책에서 얼마나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지,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책이 best seller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 책을 부분적으로 읽어봤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도덕이 어디서 오는지, 인간에게 있는 옳고 그름의 의식이 어디서 오는지 그런 부분을 관심있게 봤는데, 제가 보기엔 너무 논리적으로 헛점이 많고, first class 책이 아니라 삼류 책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학자, 지식인들은 그 책이 무신론에 복음이나 되는 것처럼 환영합니다. 그것을 보고 깨달은 점은 역시 영적인 것은 육신의 눈으로 분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적이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살리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며,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계속)
Sep 22, 2010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브라질에서 음악으로 복음을 전하는 김민주 선교사가 최근 내 페이스북(facebook.com/moreahead) 남긴 글을 소개한다.
“한국에 사역 갔을 때 느꼈던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비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존중과 섬김, 그들의 얘기를 듣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그들이 앉을만한 의자는 없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에 열심인 한국 교회. ‘우리 안에 들어오고 싶어? 그러면 우리가 주는 옷을 입고, 우리가 하는 말을 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면서 들어와’ 이런 식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정말 전도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자신들의 “문화(복음이 아닌)”를 지키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도는 강조하지만 실재로 비교인들이 앉을만한 의자를 마련하지 않는 자만… 부끄럽지만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실체가 아닐까? 불과 90년 전 한국 사회는 인구의 5%도 안 되는 기독교인들이 존경받는 리더십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인구 25%가 넘는 사회에서 오히려 그 리더십이 땅에 떨어졌다. 기독교도서 베스트셀러는 당연히 크리스천들끼리만 이해하고, 크리스천 저자들도 천만 크리스천을 타깃으로 책을 쓰는 것이 당연한 문화이다.
우리끼리 만든 게토 속에서 영적 슈퍼맨을 세워놓고 우리끼리 존경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끼리 축적한 재산으로 거대한 교회 건축물들을 구축하고 있다.
건강한 대형교회들을 무조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중산층이 무너진 한국사회의 기저인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종교적인 부, 그 안에서 간간이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결과물들은 세상의 도덕기준보다 못하며, 차마 코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위선의 악취가 진동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결국 세상은 우리들만의 언어와 우리 끼리만의 은혜로 만들어진 교회라는 도그마를 점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어하는 경향이 짙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일이 아니다. 가장 최근 종교기관의 여론조사에서 미국 성인의 3분의 2가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가지 않는 미국 성인들의 72%가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답변한 반면, “교회는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답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참 모습이 결코 아니다. 그저 일그러진 교회의 일면일 뿐이다.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고, 창피스럽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직면하려고 한다. 왜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고 ‘이곳이 좋사오니’(누가복음 9:33) 의식 속에 게토 화 되었다. 기독교의 본질인 희생적인 사랑이 그 게토 안에 갇혀 썩어 문드러져 고름이 흐르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가 트렌드가 되면서 한 사람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배출하기보다 처치고어(church goer)만 양산하고 있다.
《개독교를 위한 변명》이란 책을 쓴 숭실대 기독교학과 동문들은 말한다. “한국교회는 세상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습니다. 교단끼리도 서로 귀를 막고 삽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사랑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꼬집기 위해 개독교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개독교를 열린 개(開)독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오늘 한국의 수많은 석학들도 감히 다루지 못하는 교회의 치부에 대해 저 변방의 이름 없는 젊은이들이 솔직한 고백을 토해냈다. 세속화, 대형화, 물량주의, 권력욕, 파벌, 고속성장, 성 스캔들의 유혹에 무릎 꿇은 한국교회는 다음세대의 주역인 이 젊은이들의 정직한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개(開)독교가 되기 위해 자성하고 사회의 질타소리를 겸허하게 들어야 한다.
무릎 꿇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운동을 시작하자.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운동을 시작하자. 무너진 교회성벽을 다시 일으키는 재건운동을 시작하자. 훼파된 예배를 살리는 예배회복운동을 일으키자. 한국교계는 물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십자가 정신으로 희생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진정한 부흥운동을 시작할 때이다.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Sep 20, 2010 | 삶과 신앙/최주희의 사랑이야기
이혼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이혼 사유로는 많은 사람들이 ‘성격 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 이유는 따로 있다. 배우자의 부정행위, 경제적인 문제, 성격차이로 표현되는 대화단절 및 거짓말 등 이다. 사실 우리 주변을 돌아다보면 이혼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외도, 낭비벽, 너무나 많은 부채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이 많이 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다. 믿는 가정이나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성가대원 끼리 눈이 맞아서, 혹은 목사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시중들다시피 하는 여성도와 목회자가, 대학부 담당 장로와 대학생이 불륜관계에 있기도 하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규모가 없이 새로 나온 기계는 일단 사고 보고, 타고 다니는 차가 고장 나지 않았음에도 몇 년 되면 다른 차로 바꾼다. 자녀 사교육비 과다 지출, 분수에 넘는 비싼 옷, 습관적인 외식도 사소한 것 같지만 가정 경제를 뒤흔드는 요인들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사랑과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행복을 깨뜨리는 요인들을 살펴보고 그러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남편과 아내가 아닌 다른 이성과 불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도덕성을 지키며 오해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성(性) 관리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성과 단 둘이 있는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직장에서 야근 한다며 이성과 단 둘이 있거나, ride 를 준다고 이성끼리 차 안에 단 둘이 있지 않는다.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 가 반문할지 모르나 이는 회색지대여서, 종이 한 장 차이로 ‘죄’가운데 빠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빌미가 된다. 실제로 이성끼리 단 둘이 있는 환경에 자주 접하게 되면 정들게 되어 있다. 실례로, B 집사님이 새벽에 교통사고 났는데 그 옆에 여직원이 타고 있음이 발견되었고 불륜이 들통 나 회사를 사직하였다. 반면 미국에서 훌륭하게 목회하고 계시는 A 목사님은 “혹 비가 올 때 내가 빈차로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우리 교회 여자 성도를 만나도 태워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단에서 선포하셨다고 한다.
둘째, 이성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 성도의 교제 혹은 친밀감이라는 명분하에 이루어지는 도에 넘는 개인적인 친절이나 관심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위에 언급된 교회 안에서의 다양한 불륜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여성들이 과다한 노출패션을 삼가야 한다. 패션은 자신의 취향과 유행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 특히 남성들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성충동을 느끼게 하여 어려움을 준다면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몸가짐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가슴이 많이 드러나도록 패인 옷, 엉덩이가 보일 듯 말 듯 한 짧은 치마, 진한 향수, 야한 눈짓과 몸짓은 남성들이 유혹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 아동성폭력은 범죄자들에게 전자 팔찌와 발찌를 채움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동성범죄를 일으키는 사회적 요인 중 중요한 것이 바로 여성들의 노출패션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다. 과다 노출 패션으로 인해 받은 성적 자극을 해소할 길이 없을 때 연약하고 힘없는 아이들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장과 거리 그리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취향과 만족만 생각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여성으로 인해 유혹을 느끼는 남성들이 불륜행각을 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편과 아내는 반려자의 성적 필요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적극적인 태도로 아름답고 즐거운 성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기 기분에 따라서, 반려자가 잘해줄 때만 상 주듯이, 귀찮지만 할 수 없이 해야 하니까 반응해서는 안 된다. 부부 안에서야 말로 최대한 야하고 매력적으로 꾸며야 한다. 은은한 향수와 sexy한 속옷, 다양한 방법, 구체적이고도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은 부부간의 사랑과 성의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도울 것이다.
성 관리 뿐 아니라 돈 관리도 부부의 사랑과 가정을 지키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돈 관리를 위해서는 다음의 원칙을 가지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자족과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딤전6:6-10). 안타깝게도 수입이 적은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주어진 재정에 대해 감사하고 자족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좀 더’라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끝도 없는 욕심 때문이 아닐까? 자족과 감사의 마음은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
둘째, 분수에 맞는 생활 규모를 가진다. 수입이 적으면 우선순위에 따라 알뜰하게 절약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원하는 것을 구입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필요하지만 덜 좋은 것을 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중고차면 어떻고, 냉장고가 좀 적은 용량의 크기면 어떤가? 비싼 옷이 아니어도 내 스타일에 맞는 깔끔한 것이면 어떤가?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셋째, 만약 지금의 수입이 생활하는데 어려울 만큼 부족하면 일을 더 해야 한다. 계속 불평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속상해 하는 것보다는 일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고 생산적이다. 시간 당 액수가 적다고 우습게 봐서도 안 된다. 적은 액수라도 노력하고 땀 흘려 번 돈은 가장 신성하고 보람 있는 일이다.
넷째, 한 단계 낮추는 삶을 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자신들만 돈 문제 안 일으키고 잘 살면 되는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우리는 물질을 사람들과 나누며 사랑의 섬김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십일조만 했다고 우리의 몫을 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구약에 나타난 여러 종류의 십일조를 합치면 결국 십의 3조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다. 가난하고 어려움을 겪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려면 돈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수준대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 단계 낮추는 삶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 우리 부부는 한심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바로 우리가 가장 잘 살게 될 때의 상한선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 상한선은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수준으로 볼 때 충분히 그렇게 살아도 되는 수준에서 한 단계 낮추는 것으로 했다. 결론은 30여 평의 아파트, 중고차로 소형, 수입의 30%는 헌금을 비롯해 선교 및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에 온지 18년째 되었다. 집은 32평 아파트, 차는 중고 소형차이었는데 3년 전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서 대전에서 고속도로를 오가는 기회가 많아 중고 중형차를 사용한다. 수입의 30%는 아직은 지켜지고 있으나 아들이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학비와 생활 및 주거비가 만만치 않아 힘이 든다. 용돈은 아들이 아르바이트하며 스스로 번다고 해도 버겁다. 어쩌면 아들이 공부하는 동안에는 잘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삶의 절제를 가져다주는 돈에 대한 우리의 원칙이고, 그 원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대로 순종하며 살고픈 우리의 마음이다. 어떤 분들은 ‘당신들은 돈을 잘 버니까?’라고 하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연습을 가난할 때부터 해왔다. 2만원 있을 때 만원을 어려운 형제 성경책에 몰래 넣기도 하고, 유학 시 한 달에 식생활비로 120$ 지출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위해 매달 60$을 지출했다. 돈이 없을 때, 가난할 때가 나눔의 연습을 할 절호의 기회이다.
마지막으로 재산 증식을 위해 불법이나 무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주변을 보면 남들 다 하기에, 아니면 법을 지키다가는 너무 세금이 많아서 편법과 불법을 자행한다고들 말한다. 또한 욕심을 내어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 오히려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이 본다. 특별히 부동산이나 주식거래가 그렇다. 이것은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가정 경제의 뿌리를 크게 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본능과 욕구를 철저히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이는 가정을 지키기 어렵다. 그래서 성 관리와 돈 관리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의 성 관리와 돈 관리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Sep 15, 2010 | 삶과 신앙/코스탄의 소리
미국내 한인 유학생 통계에 따르면 학부생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는, 전체 한인 유학생 중 학부생이 69.4%, 대학원생은 15.0%인 것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2008/9학년도 기준)
반면, 미국 코스타에 참가한 코스탄의 구성에서는 평균 연령의 증가, 기혼참석자 비율의 증가 (50% 상회, 2010 Chicago Conference), 그리고 직장인/일반 참석자 비율 증가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eKOSTA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이 한인 청년학생운동을 지향하는 KOSTA와, 넓게는 청년학생운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도전을 주는지 고민해보고자 하며,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아래와 같이 의견을 주실 분들은 eKOSTA@kostausa.org로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eKOSTA 편집부)

“청년학생”운동, 그 이후
올해로 KOSTA 25주년을 맞이하였다. 25년동안 KOSTA의 섬김의 대상은 KOrean STudents in America(북미 유학생) 에서KOrean STudents Abroad로, 이제는KOrean STudents All nations으로 확장되어왔고, 대학원 유학생중심에서 1.5세를 포괄하는 학부와 청소년 사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조국과 민족을 향한 복음적 소명의 영역을 모든 나라와 족속을 향한 한인 디아스포라의 선교적 사명으로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복음주의 청년학생운동으로서의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역사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대한 기대는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뜨거운 열정가운데 살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발전과 변화가운데에서도 한가지 변화되지 않은 KOTSA의 핵심가치는, 바로 KOSTA는 한인 “청년학생” 운동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학생”는 현재 학생인 사람들에 국한 하지않고, “학생”일 때에 KOSTA에 동참했던 사람들, 졸업을 하고 사회인으로서 KOSTA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구체적인 사역의 영역에서도 이들 KOSTA “선배”들의 지속적인 헌신과 섬김 – 멘토와 강사님들의 background를 주목해보자 – 을 통해서 후배 “학생” KOSTA가 가능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전 “청년학생”일 때 KOSTA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멘토, 간사, 강사, 교사등의 한정된 영역이외에 KOSTA에 설 자리는 어디인지, 그들에게 KOSTA는 무엇을 기대하고 또 제시하는가. 일보 확장해서, “청년학생”의 때에 KOSTA를 만나지 못하고 “청년 이후 사회인”의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KOSTA가 reach out할 수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복음주의 청년 학생운동으로 태동되고 발전해온 KOSTA에게 복음주의 “청년 이후” “부부-부모” “사회인” 운동의 역할까지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
위의 질문들은, KOSTA의 미래에 대한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솔직히 그럴 여유도 자격도 없다), 다분히 개인적인 고민과 갈증, 경험과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98년, 유학생으로서의 힘겨운 첫 1년을 마치고 처음 KOSTA 시카고 conference에 참석했을 때, 나는 누가 뭐래도 “청년학생”, 한인 유학생이었다. 2002년 결혼을 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학생”이었고, 서른이 채 못 된 나이었기에 아직은 “청년”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직장인이며 두 아이의 엄마로 서른 중반이 된 시점에 다시 KOSTA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인구학적/사회경제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 조별모임을 하면서, ‘펄펄 뛰면서 부르는 엇박자의 찬양’을 잘 따라가기 어려운 부모된 우리들은 KOSTA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이제 ‘학생’ 아니고, 또 ‘청년’의 일반적인 특징들이 많이 희석되어있어서, 진정한 “청년학생”들을 위한 자리에 minority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조별모임의 귀한 것과, 오전 QT의 풍성함을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부부가 함께 하는 말씀 묵상의 그 깊음과 아름다움을 왜 우리가 사모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졸리고 배고프고 떠들고 우는 아이들이 있다면 앞서 열거한 것들을 부부 중 한 사람, 혹은 한 가정으로서의 부부는 포기하게 된다. 아이들이나 배우자의 희생이 없이는 온전히 감당하기 어렵고, 또 KOSTA가 기대하는 분량의 섬김을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수있는 여러 변수때문에 기혼 참석자들은 조장 지원에 주저하게 된다. KOSTA의 통계에는 이 현상이 ‘기혼조 조장 부족’으로 잡힌다. KOSTA의 사역가운데서 발견되는 기혼부부의 非청년적 특징은 어린 자녀가 있을 때 발현되기는 하지만, 자녀가 아직 없는 젊은 부부에게서도 “청년”적인 역동성의 저하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어느 정도 발생, 진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작년에도 올해에도 KOSTA 연차 수양회에 당당하게(?) 참석하였다. 그리고 40대의 동료 기혼가정 참석자들과 교제하였다. 우리들 “청년 이후”세대에게 KOSTA는 무엇일까? 영적 재충전, 지역교회에서 공급받지 못했던 좋은 말씀들을 통한 도전, 비젼의 (재)발견, 관계의 회복, 그리고 좋은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 혹자는 이것을 family retrea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KOSTA에서 제공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프로그램을 초월(?)하는 가족 휴가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과연 KOSTA가 해야될 역할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득담고서.
현상에 대한 description을 잠시 뒤고 하고, 보다 실질적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이제 마흔이 그리 멀리 보이지만은 않는 이 시점에 나는 복음주의 “청년”학생운동이라는 KOSTA를 “졸업”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졸업”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KOSTA는 집회나 조직이 아니고 ‘운동’이기에, “졸업”이라는 개념자체가 성립할 수없지만, KOSTA의 모든 사역과 집회에 참여하는, 혹은 그러한 사역과 집회가 초점을 두고 있는 대상자라는 협의에서 생각해볼 때, 더욱 좁게는 매년 연차수양회에서 제공되는 세미나의 주제들을 접할 때마다, 장성한 분량으로 가지 못하고 KOSTA가 떠먹여주는 이유식에 매달려 있는 영적 어른 아이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KOSTA의 “청년”정신을 노쇠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두렵고 죄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솔직히, KOSTA같은 곳을 원하는 우리들, 非청년 부부 사회인에게는 KOSTA외에 갈 곳이 없다!!
KOSTA의 노령화, new vision to serve or challenge to overcome?
대부분의 한인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사회인이 되면 조국으로 돌아가던 때와 달리, 최근에는 많은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친 후에 결혼을 통해서, 취업을 통해서 미국에 정착을 한다. 이러한 추세는, KOSTA시카고 conference의 참석자 통계에 분명하게 반영되고 있으며, 확장일로에 있는 kids KOSTA, youth KOSTA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KOSTA의 영역이 학부생과 조기유학생 혹은 1.5세 학생으로 확대되는 것은 “청년학생”운동이라는 이름에 맞는 방향성이다. 그러나, “청년학생” 이후에 대하여 KOSTA는 어떤 방향성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참석자의 연령분포와 미혼-기혼비율변화가 KOSTA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이며, KOSTA는 이 현상을 새로운 vision으로 바라보는가, 아니면 위기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가.
매년 더 많은 아이들과 기혼 가정이 참석함으로 인해서 운영상의 어려움이나 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없다. 자봉은 부족하고 기혼 조의 조별모임은 ‘아빠’모임 혹은 ‘아무나 한 사람’모임이 되버리기도 한다. 아이들과 관련된 안전사고와 식단 문제, 숙소의 확보 및 배정 문제, kids KOSTA와 youth KOSTA 의 부담이 더욱 커진다.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부부상담이나 자녀 교육과 같은 가정사역 영역에서 확장되고 있는 현상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내 안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소즉적인 접근을 뛰어넘어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치고 나가는 “청년학생”운동으로의 KOSTA의 방향성에 맞지 않다는것이다. KOSTA가 “청년학생”운동이라는 점에서 위의 현상들은 희망적이고 이상적이기보다는 ‘위기’라는 말로 요약될 만 하다. 그렇다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차례이다. ‘위기’를 ‘기회opportunity to explore’로 볼 것인가, 아니면 ‘도전challenge to fight’로 볼 것 인가가 key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모든 사람은 “청년학생”의 때를 거쳐서 “청년 이후”의 삶을 맞이하게 된다. “학생”이었던 사람은 “직장인”이 될 것이며, 그저 한 사람의 독립된 “adult”이었던 사람은 “부부”가 또 “parent”가 된다. 이 시기를 지나가는 혹을 맞이하게 될 모든 KOSTAN들에게 KOSTA는 무엇인가? “청년”이후의 삶을 준비시켜주는 운동인가? “청년”의 때에 KOSTA에 동참하고 도전받고 헌신한 후에는 당당히 KOSTAN의 삶, 즉 “복음을 선포하고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하며, 이것은 KOSTAN 스스로가 지어야 할 짐이며 소명이다라고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KOSTA 를 “졸업”해야만 한다. 그러나, “청년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KOSTA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KOSTA의 책임과 비젼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주기를 원한다. 만약 “청년 이후”의 삶이 “청년”때 KOSTA를 통해서 훈련되고 도전받고 헌신한 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면, 이는 “청년학생”운동의 한계인가, 아니면 “청년학생” 자신의 문제인가?
다시 부끄러운 나의 경험과 나의 동료 젊은 부부들의 삶에 대한 간접 경험으로 돌아가본다면, “청년”의 때를 KOSTA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각자 나름대로) 뜨겁게 보냈던 두 사람이 만나서 이룬 우리 가정이 “청년 이후”의 삶, 하나된 두 사람의 삶, 두 아이를 책임지는 부모의 삶, 그리고 사회인으로의 삶을 살면서, “청년학생”때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과 도전에 대하여 전적 무지함과 지혜없음의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더욱 답답한 것은, 이 문제들에 대하여 무언가 분명하게 대답해 줄 수있는 어떤 source도 없으며 모두가 그저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후배 “청년학생”들에게 제시해줄 무언가를 배워가고 있기는 한 것인가 좌절하는 한편, 지금의 “청년학생”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섭리를 따라 곧 맞이하게 될 “청년 이후”의 삶에 대하여 잘 준비되고 있는지, 과연 “청년 이후”의 나는 무엇을 miss해왔고 이제 무엇을 pursue해야 되는지 의문에 의문을 더해갈 뿐이다.
“청년 이후”세대가 맞는 새로운 도전
미혼 청년학생(99-01), 기혼 청년학생(02-04), 그리고 기혼 非청년非학생(?)(08-10)으로 KOSTA와 함께 하면서, 나는 “청년”의 때에 도전받고 헌신했던 열정을 실제의 삶으로 지속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기본명제의 굳건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천양식에 있어서 “청년”의 때에는 고려할 필요 없었던 새로운 조건들이 개입되는 것을 실감하였다. 바울과 같이 자신의 소명을 위해서 미혼으로 남기를 선택하는 것이 귀한 부르심인 것을 사실이지만, 결혼과 가정, 그리고 자녀라는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안하신 틀이며 축복이다. 하지만 헌신된 미혼 청년일 수록, 헌신된 청년 부부일수록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부모의 자리에 설 때에 자신이 얼마나 준비되지 못했는지를 깨달으며, 자신이 소망하고 계획했던 모든 사역을 이전과 같은 우선순위와 효율성으로 감당하지 못하게 됨에서 오는 좌절과 답답함을 절실히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부부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마저 발생한다. 또한 “청년학생”의 시절의 순수함을 마음이 품고 세상가운데 하나님 백성으로 살고자 할 때, 직장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부딪히게 되는 현실은 캠퍼스안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더욱 치열하고 더욱 거센 물결로 우리를 압도함을 경험하게 된다.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아주 헌신되고 열정적인 “청년”의 때를 지냈던30-40대 가정들의 “영적인 끼인 상태”는 비단 KOSTA내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아이들 때문에, 아직은 불안정하기만 한 사회생활가운데 struggle해야만 하는 이 시기의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은 종종 현상유지이상이 되기 어렵다. 대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자모실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과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하는 아내를 혼자 두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봉사와 섬김을 감당할 수있는 – 마치 “청년”처럼 – 남편은 많지 않다.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며 부부가 함께 손 잡고 중보할 수있었던, 그리고 하나님앞에서의 비젼과 결단을 밤새 이야기 나누었던 그 시간은, 종종 10분도 넘기기 어려운 주1회의 약식 가정예배로 대체되어버린다. 부부가 나란히 차를 나누며 각자의 비젼과 소명을 나눈 때가 언제인지를 회상하는 현상을, 정기적금과 선교헌금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뜨거운 “청년”의 때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헌신된 마음이 없기 때문에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너무 섵부르지 않을까.
복음주의 운동에 동참한 “청년학생”에게 적용되는 성경적 원칙은 “청년 이후”의 세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만약 한 사람이 “청년학생”으로서 이러한 성경적 원칙위에 잘 서 있고 훈련되어 있고 헌신되어 있다면 그가 “청년 이후”의 시기를 지날 때에도 그 삶에서 실현되어야 할 본질적인 가치는 동일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앞에 두고 이 가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하는 부분에서 “청년학생”이 내놓게 될 해법과 “청년 이후”의 해법에는 차이가 있을 수있다. “미혼 청년 학생”이 자신의 젊음과 자신의 career를 헌신하는 것과, “청년 이후 기혼 사회인”이 동일한 헌신을 하는 것은 “청년학생”의 그것을 단순연장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의 접근을 요구한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사이에는 삶의 목적과 방향과 방식에 있어서 존중과 침범의 tension이 존재한다. 이로 인한 갈등과 오해는 신실하게 “청년학생”때에 복음안에서 구축한 원칙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남편 혹은 아내일 수록, 부모일 수록 오히려 더 처절하게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이 되기도 한다.
가난했던 “청년학생”의 때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재정관리, 이제 부부이므로 또 부모이므로 새롭게 발견하게 된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인격의 문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 성실하고 productive한 employee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직장생활과 복잡해진 인간관계, 자녀양육과 가사 때문에 좌절된 career등은, “청년학생”의 단계에서 획득한 복음적 원칙으로 쉽게 그 답이 찾아지지 않으며 또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하나의 답을 찾기 어려운 여러가지 삶의 도전들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고민들이 모든 “청년 이후” 사람들에게 해당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을 만한 정도의 사람들에게 절박하고 절실한 삶과 신앙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부부관계의 문제도, 자녀 양육의 문제도 모두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과연 최선의 해결책일까. 이 ‘시간’동안 긴장감없이 “청년 직후”의 시기를 보내는 사이, 나와 우리 가정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무방비상태로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간다는 것이며, 그래서 정말 “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그 “청년학생”의 길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무도 우리가 “청년학생”의 때에 KOSTAN이었음을 절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런 형태의 삶에 고착되는 것이다. 과연 “청년학생”의 때를 이제 막 지나온 “젊은 부부”는 기다림 혹은 일시적 쉼의 시기를 지나야만 하는 것일까? 부부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사회인이기 때문에 “청년학생”보다 더 역동적이고 더 powerful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상속으로 나아가고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우주적인 사역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나는 부부관계 상담, 내적 치유, 부모학교, 자녀 양육과 같은 전통적인 가정사역의 틀을 뛰어넘는, 북음주의 운동으로서의 “젊은 부부 KOSTA”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 “젊은 부부”에의 reach out은 청년학생 사역에 비해서 더 많은 인적 물리적 투자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생업과 양육에 잠식되어 있는 “젊은 부부”들의 정신과 마음을 새롭게 일깨우고 일어나서 뛰게 만들 수 있다면, “청년학생”때의 향수에 의지않고 오늘 세상속 한가운데서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되게 살아갈 수있도록 empower할 수 있다면, “청년학생”운동을 뛰어넘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을 기대할 수있다. 왜냐면, “청년학생”때의 헌신과 서원이 실질적으로 삶에서 세상가운데서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roll model이 없다고 탄식하기를 멈추고 수많은 roll model들이 사회 각 영역에서 배출되도록 과감히 투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이를 먹고 사회인이 되고 부모가 되면 세상의 가치와 타협한다, 헌신이 사라진다라고 어떤 “청년학생”이 꾸짖는다면,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그“청년학생”앞에 사죄할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사회인이 되고 부모가 된다고 해서 저절로 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으며, 어느 누구도 과거의 열정과 헌신에만 의존해서 오늘의 영적전투를 감당할 수는 없다는 일반론적인 진실을 이해해주기를, 그리고 피를 토하며 기도하는 “청년학생”들 앞에 떳떳한 “청년 이후”의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서서 그들이 맞이하게 될, 우리가 지나왔던 그 길을 함께 손잡고 힘을 보태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선배, “청년 이후”들을 위해 지원사격해주기를 간청한다.
Sep 14, 2010 | 찬양과 예배/이유정의 예배를 이야기하자
아내가 디렉터로 있는 어린이 청소년 미니스트리인 갓스이미지 디렉터들의 연례모임 참석차 LA를 방문했다. 마침 시간이 되어 주일오전에 가든 글로브에 위치한 수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TV설교가 로버트 슐러 목사로 유명한 교회이다.
주차장이 만차일 것을 예상하고 15분 전에 도착했는데 예상외로 너무 한산했다. 드라이브인 예배를 드리는 자동차로 가득했어야 할 곳이다. 예배 시작 10분전 본당의 텅 빈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일 2회의 예배 때마다 4천 석을 가득 메웠던 곳인데 예배 시작 후에도 곳곳이 텅 비어 있다.
자리에 앉아 예배실을 둘러보았다. 20세기 대표적인 현대 건축가 중 한사람인 필립 존슨의 작품답게 건물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벽과 천장을 구성하는 만장이 넘는 은빛유리, 입체 트러스트로 연결된 가로 125m, 세로 62.5m, 높이 39m의 거대한 본당 공간, 전동장치로 외부공기를 유입하고 더운 내부공기를 외부로 내보내는 자연 환기방식, 4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 좌석, 설교단 뒤에 있는 27미터짜리 거대한 전동 유리문, 12사도들을 상징하는 중앙 통로의 12분수, 2만여 개의 관으로 연결된 세계 최대 규모의 파이프 오르간 등이 그 자태를 뽐냈다. 하지만 그 첨단의 위용도 이날은 왠지 외소해보였다.
로버트 슐러는 꿈의 사람이었다. 1955년 개척할 당시 그의 손에는 500불이 전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위대한 교회를 세우는 원대한 비전이 있었고, 그 꿈은 이루어졌다. 그의 “아워 오브 파워” 방송은 매주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시청했다. 그는 수정교회 사역을 천국을 맛보게 하는 관광지라고 강조한다. 마침 인근 5분 거리에 있는 디즈니랜드 덕에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는 ‘적극적 사고방식’, ‘성공의 복음’을 강조하고, 드라이브인 예배를 처음 도입했으며, 교회를 기업, 전도와 선교를 판매, 불신자를 고객으로 비유하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목회스타일로 세계적인 메가처치를 이룩한 첫 번째 목회자이다. 최근에는 타임지의 언급처럼 그의 80년대 ‘번영의 신학’이 또 다시 부활했고, 부활 정도가 아니라 붐을 이루고 있다.
세간의 기준으로 성공한 이 교회가 요즘 헌금, 기부금, 교인수가 줄어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20에이커 규모의 수양관 폐쇄와 50명 직원해고, 유명한 뮤지컬 행사인 ‘글로리 오브 이스터’ 공연에 이어 ‘글로리 오브 크리스마스’ 공연마저 취소되었고, 부동산 매각 등으로 긴축 정책을 단행하고 있다.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리더십 교체의 실패에 있지만 필자는 보다 근본적 이유를 번영신학의 한계와 예배신학의 부재로 본다. 그의 성공의 복음은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를 소개했지만 다른 한 편 교회의 세속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비난만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특정 시대에 특정한 지도자를 일으키신다. 로버트 슐러가 목회를 시작할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입은 경제적, 정신적 타격에서 막 일어나고 있을 시점이었다. 그때 미국인들에겐 하나님 안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로버트 슐러 목사를 사용하신 것이다. 물론 그를 비난하는 많은 입장이 있다. 인정도 한다.
그런데 지상에 완벽한 지도자는 없다. 흠 잡으려면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사람을 품으시고 그를 사용하셨고 앞으로도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또 그분의 거룩한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딤후 1:9) (현대인의성경)
세례요한처럼 이제 그의 역할은 지나가고 있다. 그것을 실패로 봐선 안 된다. 그 사역의 장단을 분별하여 다음 세대가 더 온전한 사역을 하기 위한 토대로 삼을 일이다. 한 예로 슐러의 비신자를 향한 열정에 직접 영향 받은 목회자가 빌 하이벨스이다. 그가 시작한 윌로우크릭교회의 구도자예배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가 탄생했고 그 결과 전 세계 수십, 수백만 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벌써 83세의 고령인 슐러 목사, 625전쟁 때부터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으로 미국 다음으로 한국을 사랑한다는 그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서 메시지를 전했다. “왜 교회는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까? 예수님이 교회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피 쏟듯 토해낸 메시지가 가슴에 남는다. 슐러는 은퇴해도, 수정교회는 기울어도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음 시대에 필요한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실 것이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Sep 10,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타 컨퍼런스
2010 코스타 스크랜튼 컨퍼런스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열린지 벌써 두달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 있는 코스탄들은 지난 코스타를(들을) 돌아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요? eKOSTA 가 네분의 코스탄을 모시고 진솔한 생각들을 들어보았습니다. 코스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해 주신 여러 격려와 충고의 말씀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봅니다.
|

eKOSTA: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운학: 저는 김운학 입니다. 현재 North Carolina 에 살고 있고, 코스타는 6번 참석했고 GP 코스타를 North Carolina 에서 2번 했는데 모두 참석했습니다.
김영정: 저는 김영정 입니다. Maryland 에 살고 있습니다. 코스타에 4번째 이번에 참석했고요, 4번 다 조장으로 참여했습니다.
허수진: 저는 허수진입니다. 지금 DC 에 있고, 코스타는 작년 인디와 이번 스크랜튼 이렇게 2번 참석했습니다. 조장은 올해 처음으로 섬겼습니다.
기드온: 저는 기드온입니다. Wyoming 에 살고 있고 2007년 부터 올해까지 4번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eKOSTA: 참석하신지 한달 반 정도가 지났습니다. 2010 코스타를 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떤 반응을 주로 볼수 있나요?
기드온: 저는 사실 코스타 집회 때 보다는 코스타에 갔다온 이후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집회에 갔다 온 후부터 코스타가 시작된 것 같았습니다. 집회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전체 집회 말씀이 었던 것 같은데 주제가 잘 전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4년째 주 대표로 참석을 해서요, 주위 친구들의 반응은 잘 모르겠습니다.
허수진: 기드온 형제님이 잘 말씀해 주셨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체 집회 말씀들이 기억에 제일 남습니다. 작년과 비교해 보았을 때 올해가 특히 더 좋았던 것 같고, 제가 섬겼던 조에서는 김철수 선교사님의 저녁 말씀에 대한 은혜를 가장 활발하게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성경 강해 시간도 본문을 잘 선택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분들도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처음 시작할 때 마음은 어땠던 간에 떠날때에는 좋았다고 말씀하신 분들이 저의 경험으로는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영정: 전체 집회 때 김철수 선교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우리가 선교적인 존재들이다’ 고 말씀하셨던 것이 계속 생각이 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끼리 이런 얘기를 별로 안해서 친구들의 반응은 잘 모르겠습니다.
김운학: 여러분들이 잘 말씀해 주셨지만 저도 오전 성경강해와 저녁 설교가 보완이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같은 경우 오전 오후 스타일이 많이 달라서 힘들어 하던 학생도 많이 보였는데, 이번에는 눈높이와 내용 모두 일관성있고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의 반응으로 보자면 일단 스페인을 응원하는 친구들에게 참 기억에 많이 남는 코스타였던 것 같고, 코스타를 잘 모르는 참석자에게는 내용이 조금 딱딱했다 라는 말도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eKOSTA: 온라인 묵상훈련과 JJ 수양회 대한 평가 부탁드립니다. 좋았던 점이나 개선할 점에 대해서 나누어 주세요.
김영정: 코스타 집회 기간 중 나누어 지는 것을 미리 준비하는 과정으로 볼때 묵상훈련은 유익했던 것 같습니다. 조장으로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말씀 묵상 질문들에 있어서 아쉬웠던 점은 적용에 대한 비중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점인데요,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동기와 묵상 자체를 충분히 다루기 보다는 적용점을 찾기에 서두른 질문들이 간혹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큐티중 본문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적용이 있었는데 그 적용이 성경 저자의 주 의도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했습니다.
허수진: 저도 동의하고 묵상 훈련 질문들을 접하면서 힘들었던 점들 중 하나가 질문들의 일관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출제하신 분들이 한 분이 아니시기에 스타일의 차이는 어쩔수 없겠지만 그것을 넘어서 어떤 날에는 한가지 유형의 답을 의도하는 식의 질문도 있었고 또 어떤 날에는 본문의 범위를 넘어서서 너무 큰 질문을 접하며 당황하던 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타일 까지 맞출 수는 없겠지만 훈련 내용에 있어서는 일관성이 부족해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기드온: 올해에는 JJ 준비팀을 도왔는데요, 시간이 촉박했던 것 같습니다. 조장을 선정하고 조원 배정하고 큐티 리뷰하고 하는 일이 많은데 비해서 스크랜튼 웹사이트 업데이트와 등록이 늦어지는 일 및 몇가지 일들로 인해 준비팀과 코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팀웍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었습니다. 시간이 없다보니 일 중심으로 하는 것 같은 기분도 종종 들었고 준비팀과 코디 사이에서 충분한 소통이 안되어 조장들에게도 목적의식이 잘 전해지지 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JJ 수양회 기간에서도 역시 바쁜 스케줄에 비해 한 지역에 속해 있는 조장들이 서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만한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JJ 말씀과 강의에 있어서는 주제에 잘 맞았다고 생각하고 참 만족스러웠습니다.
김운학: 조장 사역의 딜레마는 조장들이 잘 섬길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는 것과 동시에 그분들이 집회 기간 전달될 주제 또한 잘 이해할 수 있게 훈련 한다는 점 인데요, 두가지를 동시에 이루기에는 좀 힘들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할 수도 없는 것 같고요, 참 큰 고민거리 같습니다.
기드온: 이런 고민들과 훈련 시간에 대한 고민들이 팔로업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타 이후 충분한 팔로업을 통해 코디와 조장들이 잘 키워진다면 그 다음해에 많은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eKOSTA: 이번 코스타에서 다루어 졌던“복음”이라는 주제가 JJ 수양회와 전체
프로그램을 통해 잘 전해졌다고 생각하시나요? 조원들과 복음에 대한 얘기가 활발하게 나누어 졌나요? 이어서 “민족, 땅끝”은
참가자들에게 어떻게 전해졌는지 궁금합니다.
김운학: 매년 코스타 할 때마다 느끼는 건 일반적으로 참가자들이 ‘복음’ 이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기초적이라고 여기고 관심을 많이 가지지 않는다 인것 같습니다. 여러해를 참석하는 분들은 특히 ‘복음’에 대한 관심 보다는 소위 advanced 되었다는 토픽들을 많이 찾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사님들이 앞에서 열심히 전해 주셨지만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복음’이 많이 나누어 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민족’에 대해서도 참가자들이 나누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고 ‘땅끝’에 대해서는 반면에 참가자들의 반응을 볼수 있었습니다. ‘땅끝이 지리적인 뜻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에 반응하여 땅끝을 ‘과거의 상처나 자신의 약점’ 으로 받아들인 참가자들을 많이 볼수 있었습니다.
허수진: 저도 계속해서 나누자면, 주제를 세가지 단어를 사용해 밸런스를 맞춘 것은 개인적으로 좋았지만, 일주일 동안 다루기에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복음’ 이라는 주제가 General 하고 많은 것을 포함하다 보니 전체집회에서 말씀해 주신 강사님들도 ‘복음’에 대해 많은 비중을 두셨습니다. 예를 들어 첫날 특별강의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복음’을 설명하는데 쓰였고 마지막에 잠깐 ‘민족’과 ‘땅끝’에 대해 언급되었습니다. 아쉽게도 ‘복음’이 이렇게 많이 선포된 것에 비해 막상 조모임 안에서는 본질적인 ‘복음’에 대해 깊이 나누어 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운학 형제님이 말씀해 주신 것과 비슷하게 저의 주변에도 ‘땅끝’을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어려운 주변관계’ 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민족’ 이라는 개념을 inclusive 한 민족성에서 폭을 넓혀 ‘하나님 나라’로 해석해 주신 것은 좋았으나,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익히 들어온 개념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사는 한국인과 디아스포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은 다루어지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 대한 문제도 ‘한민족이니 품어야 한다’ 라는 전제 하나로 ‘어떻게’에 대한 문제는 나누어 지지 않았던 것던 것 같은데 이런 부분들이 조금 실망이 되었습니다.
김영정: 복음이 참 기쁜 소식이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감격스러운 소식이 막상 조 모임에서 나누어 질 때에는 지식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감격 또한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복음’에 대해 생각할 때 내가 이미 알고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 문제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강사님들께서 복음을 아주 잘 설명해 주셨지만 이런 부분들을 깨트려 주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 세미나 들도 주제가 복음이었던 만큼 ‘복음’ 에 밀접한 강의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민족과 땅끝에 대해서도, 지리적이고 국가적인 정의를 벗아나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것은 좋았지만 오히려 마지막 날 해외선교 초청으로 마무리 된 것을 보았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한 조원이 ‘기도 중 선교사로 부름받은 것 같다’ 는 말을 들었을 때 말씀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초청과 Tradition 이 참 아쉬웠습니다.
기드온: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주제를 참 잘 연결해 주시고 전해주신 것 같습니다. 복음 안에서 민족, 땅끝을 볼수 있었던 것이 개인적으로 좋았고 처음으로 복음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민족, 땅끝을 신앙과 이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eKOSTA: 그럼 전체적으로 복음이 잘 선포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시나요?
김운학: 강사님들이 필요한 말씀을 앞에서 잘 하신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는데, 그것이 참가자들에게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eKOSTA: 올해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세미나는 있으셨나요? 코스타에 여러번 오시면 선택신 세미나의 제목들과 강사진에 익숙해 지게 되는데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영정: 강사님들이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세미나를 준비하시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의 친구들에 의하면 이번 세미나에서 신학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말씀 (예: 연옥에 대해)도 전하신 강사님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고 합니다. 또 좀전에 얘기했듯이 주제 (복음) 에 맞는 세미나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도 생각했습니다.
기드온: 저도 전체집회에서 들은 말씀과 세미나에서 들은 말씀이 많이 다르다 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던 것 같고 영정 형제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또 세미나를 처음 등록하시는 분도 참 많은 것 같은데 강의를 고르시기 많이 힘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시카고 컨퍼런스와 같이 연관있는 주제를 묶어서 강의 트랙을 만들면 참 도움이 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세미나는 IBS 실습 세미나 였는데 이렇게 실제로 참여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중요하고 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여러 친구들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것 같습니다. 꼭 세미나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조원들이 모여 함께 체험하고 프로덕트를 만들어 볼수 있는 시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허수진: 시카고 컨퍼런스만 보아도 유학생들이 많으신 것 같지만 스크랜튼은 1.5세가 대부분이고 유학생이 Minority 인것 같습니다. 강사님들이 말씀을 전하시는 것을 볼때 강의를 하는 대상이 ‘어린 학생’ 이라고만 define 이 되어 있고 정확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거나 잘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오신 강사님들에게 이런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었는데 사전에 Clarification 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 운영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건 판매되는 CD 가 리뷰되고 복사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인데요. 한 강의는 강사님이 ‘오늘은 디스커션 위주이니 다른 시간을 녹음해 달라’ 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 강의가 판매되어 신경이 쓰였습니다. 운영측에서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기드온: 동의합니다. 1.5세나 이민세대 그리고 87년도 위의 세대에게 잘 맞추어진 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운학: 폐회예배를 노진산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데 1.5세 목회자이셔서 잘 클릭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분들을 많이 세미나에 초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6년동안 세미나를 참석하면서 관찰한 것은 강사님들이 비슷한 주제로 타이틀을 바꾸거나 혹은 레파토리를 조금 수정해서 그대로 강의를 하시는 모습인데요 이런 점이 개선되었으면 합니다. 김종필 멘토님 같은 분은 매년 주제와 내용도 바꾸어 가시면서 준비해 주시는데 올해 참 기억에 남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교육관, 올해에는 세계관을 말씀해 주셨는데 스타일이 비록 똑같더라도 새로운 내용을 준비해 주셨기 때문에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강사님들 마다 전문분야가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것에서 조금 벗어나시는 것도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KOSTA: 평가 설문지에 가장 많이 나온 피드백은 프로그램이 너무 빽빽하다는
것인데 (세미나 여섯번, 오전/오후 집회, 큐티, 조모임, 새벽기도회) 어떠 셨나요? 코스타가 매해 마다 반복되는 틀보다 더
Engaging 해 질수 있다면 어떤 점들이 있을까요? 참석자 세대 (85,86,87) 들에게 내용, 눈높이나 전달방법과 연관시켜서 말씀해 주셔도 좋습니다.
김운학: 하 목사님과 김 선교사님은 눈높이를 잘 맞추어 주신 것 같습니다. 오전 오후 집회로서 빽빽함에 대해서는 그리 달리 개선할 부분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간사님들도 고민들이 많으시겠지만 답이 나오기 힘든 문제인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참가자들이 5시반 정도에 일어나는데 1시 2시에 취침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요, 세미나 여섯번, 새벽기도, 큐티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모습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선택식으로 만들거나 횟수를 줄이는 방법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간사님들이 도전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포맷을 여러가지로 시도해 보셨으면 합니다.
김영정: 저는 오히려 어린 세대 (88년도생 이상)에게는 눈높이가 잘 맞추어지고 쉽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참석자들에게는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는 앞서가는 것을 듣고 싶은 바램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전체집회에서 웃을 수 있고 눈높이를 맞추어 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오히려 그런쪽으로 너무 치우치치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저는 작년에 비해서 올해가 더 힘들었는데요, 빽빽하다 라는 점에 대해서는 말씀이 어려워서 였기 보다는 캠퍼스 이동거리가 조금 멀어진 것과 기후가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허수진: 저도 개인적으로 올해가 더 힘들게 느껴졌는데 그저 우리가 한살을 더 먹어서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눈높이에 관해서는 영정형제님과 대부분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는 분들이 기억에 남는 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첫날 김현회 목사님께서 전반부터 ‘말씀을 재미있게 하지 않을 것이고, 강의식으로 할거다’ 라고 도전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 그런 진지한 부분 또한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받아들일 때 덜 기억에 남을 수도 있겠지만, 재미있으신 분들과 깊이있는 내용을 다루시는 분들이 밸런스를 갖추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언급하신 85, 86, 87 같은 세대들에게는 조금 더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어 주셔도 좋지 않았을 까 생각해 봅니다.
빽빽함에 대해서는 참석자에게 선택할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쉬고 싶은 지체들도 있는 반면에 코스타에서 이것은 꼭 얻어가고 싶다 하며 오랜기간 준비해 오는 참석자도 있기 때문에 세미나나 프로그램의 숫자를 줄이기 보다는 선택을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드온: 너무 맞추는 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 것 같고요. 저는 이번 코스타가 완벽히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열악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수고해 주신 것도 정말 감사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든 일정인데도 참석자들도 열정으로 잘 참여해 주신 것 같습니다. 네번째 오다 보니까 새내기 때 아무것도 모르고 참여할 때와 동생들을 바라보면서 참석하는 것과 다른 것 같습니다. 어린 학부생들이나 이민 세대 학생들이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다른 코스타와 다르게 훨씬 덜 놀았는데요, 오히려 빽빽한 스케줄이 더 제 시간에 휴식하고 취침할 수 있게 한 효과를 보여 좋았습니다. 힘들었던 스케줄이 그런면에서는 좋을 수도 있겠네요.
eKOSTA: 코스타를 통해서 삶에서 가지게 된 고민이나 변화가 있었으면 나누어 주세요. 혹은 그런 고민을 던져줄 수 없었다면 왜 그런지 알려주세요.
김운학: 저같은 경우는 코스타에 가서 고민이 생겼다고 말할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들과 같이 지내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의 단점을 보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저렇게 하면 안되겠다 하는 생각도 들고요.
코스타가 고민을 던져줄 수 없었던 부분도 있는데요, 대체적으로 코스타가 저의 삶과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코스타가 집회가 아니고 학생운동이라는 말도 많이 있지만 확실히 수양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 돌아왔을 때 돌아온 삶이 여행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동떨어 졌다고 느끼는 것 처럼 내 삶과 코스타의 Gap 이 크다고 할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코스타에서 고민이나 도전을 받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김영정: 저도 코스타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된 고민이 있었다고 얘기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말씀을 삶의 영역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힘든 문제이기도 하지만 말씀과 강의들이 삶에 대해 예리한 질문을 던져주었는 가에 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허수진: 비슷한 입장인데요, 코스타 집회 기간 만큼은 세속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고, 믿는 사람들과 편하게 교제하는 부분이 신앙 생활에 활력소와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요, 과연 정말 좋은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적용 부분이 힘들었고, 삶으로 돌아왔을 때 천국에 있다가 지옥으로 오게 된것 같은 Gap 이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주일만 크리스찬인 것처럼 행동하는 Sunday Christian 의 모습도 1년동안 아무렇게나 살다가 코스타에서만 가장 은혜받는 모습으로 비슷하게 나올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아서 개인적으로 그런 차이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기드온: 리모트한 지역에 살다보니까 처음 코스타 갔던 체험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미국에 코스타라는 모임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같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도전이 되고 위로가 되었거든요. 그 이후로도 코스타에 매년 올때 마다 저의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더욱 겸손해 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코스타에서 체험하게 되는 역동적인 일들과 깨달음은 저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석자였다가 조장과 코디도 하게 되고 준비팀에서 섬기게 되니까 여러가지를 볼수 있게 되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불편하고 잘 안맞는 부분이 때로는 있다해도 공동체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코스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지역을 넘어 범위가 넓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코스타 후 리모트 지역의 삶으로 돌아와도 나름대로 고민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저만의 서포트 그룹이 만들어 지고 관계를 가질수 있는 그것이 저에게는 변화인 것 같습니다.
eKOSTA: 그밖에 하고 싶은 말씀들 부탁드립니다.
기드온: 저는 코스타가 끝나고 돌아와서 롤러코스터가 시작된 것 같아요. 항상 코스타 끝나고 삶의 문제들이 더 많이 표출이 되곤합니다. 그런 문제들을 안으면서 코스타는 정말 집회 후에 시작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코스타 이후에도 코스타 기간처럼 함께 삶을 나눌만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앞으로 그런 커뮤니티를 만들려고 노력할 건데요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코스타라는 ‘항상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허수진: 영혼을 섬기는 헌신을 하신 조장들을 팔로업하고 케어하시는 것은 이해가 되고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조장이 아닌 다른 참가자들에게 코스타 이후에 돌아오는 것이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조원으로 참석하면 코스타가 끝남과 함께 거기까지 이고 그러면 조장들은 어디까지 케어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도 나왔던 것 같습니다. ‘억울하면 JJ 해라’ 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조원들에게도 코스타 이후에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혹은 조장의 코스타 후의 임무에 대해 강조하는 것도 필요하다면 해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영정: 저희 조에 커플이 있었는데 두분이 함께 신앙으로 서포트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어 함께 배정된 것 같은데, 실제로 조를 운영하는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경서주셔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예배 시간에 멀티미디어 팀이 사진촬영과 비디오 촬영을 너무 적극적으로 해주셔서 방해가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기록을 남기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은데 찬양할 때 앞에 까지 나가서 찍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필요한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것 같습니다.
김운학: 장소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컵라면도 커피도 끓여 먹지 못하는 것도 있고 장소가 엄격해서 힘들었습니다. 인디애나에서 스크랜튼으로 왔는데 왜 코스타에서 그렇게 옮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메리우드가 앤더슨에 비교했을 때 숙소와 식당은 좋았지만, 그 밖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예배 장소가 천장이 낮아서 답답하고 넓은 공간이 없어서 좁았고 화장실 사용도 불편했습니다.
김영정: 조원들이 간사님들 라면 끓여 드시는 장면 목격했는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런것들이 비춰지고 드러났을 때 따라가야 하는 입장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운학: ‘먹다가 들키면 5천불 벌금’ 이라는 말씀하시고 그렇게 하시면 간사님들을 신뢰하기 조금 힘들어 질수도 있죠. 간사님들이 만들어 주신 규칙이니까 지켜주셔야죠.
기드온: 대규모 운영 하기 힘들어서 만들어진 규칙인데, 간사님도 사람인데 라면 드실수도 있죠.
허수진: 간사님들의 롤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운영만 하시는 건가요? 집회 기간동안 하실 일이 많으시고 일에 집중하셔야 하는 것은 이해하는데요. 조금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참석자들과의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거기는 참석자고 우리는 운영자다’ 라는 태도들이 괴리감을 만들기도 했던 것 같아요. 마치 다가가면 안될것 같은 존재처럼 느껴질 때도 가끔 있었고요. 그렇습니다.
기드온: 충분이 그런 목소리를 내실수 있지만, 비판하기에 앞서서 그분들의 입장도 생각해야죠.
허수진: 간사님들의 롤을 참석자들에게 잘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얼마나 바쁘신지, 어쩔 수 없이 선을 그을 수 밖에 없다는 부분도. 그렇지 않다면 함께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너무 남처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김운학: 건의사항이 있는데요, 다음에는 코스타에서 질문을 만들어서 묻지 마시고 저희들이 하고 싶은 말을 더 할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영정: 다음에는 웹캠으로 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네요.
eKOSTA: 좋은 말씀들 감사합니다. 이런 듣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할것 같네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수고해 주신 형제/자매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스크랜튼 코스타 여러분의 생각들을 듣는 시간을 앞으로 정기적으로 가져보려고 합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ekosta@kostausa.org 으로 연락을 주세요. 댓글도 환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