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18, 2011 | 코스타 사역/gpKOSTA
홍진성
2011년 3월 24일부터 26일까지 애틀란타에서 gpKOSTA가 열렸습니다. 2박3일간 30여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하나님 나라와 제자의 삶에 대해서 배우고, 소화하고, 고민하면서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작년 시카고 코스타 엑스포에서 gpKOSTA 개최를 희망하며 애틀란타 지역에 압정을 꽃아던게 엊그제 같은데 그 작은 바램이 이렇게 현실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몇몇 지체들과 이 모임을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큰 기대와 동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각자의 삶 때문에 간간히 모임을 준비하면서 점점 처음 원동력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에 시작은 기쁘게 했지만 점점 어떻게 해야될지 잘 모르겠고, 기도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gpKOSTA 시작하는 날 큰 기대가 없었던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준비도 부족하고, 인원도 적고, 심지어 어떤 모임인지 오해하고 온 지체들도 있었지만 첫 시간부터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큰 은혜였습니다. 찬양, 강의, 예배, 조모임, 식사 등 모든 시간이 너무 자연스럽고 문제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점점 참석한 지체들이 기쁨으로 하나가 되어 예배하고 배우고 나누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그것을 진행하셨습니다.
강의로 하나님의 나라와 제자도를 배우고, 조별 모임을 통해 각자의 가치관과 생각들을 나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실제적인 배움은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과 각자 현실에서 맡고 있는 제자의 삶을 옆에서 볼수 있는 것이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확신하신다는 한 믿음의 선배의 고백과 삶의 이야기는 제 기억에 앞으로 여운으로 계속 남을 것 같습니다.
gpKOSTA를 마치고도 계속 만났던 분들과 연락을 하면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부분이 사람들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 정신없이 강의 듣고, 예배하고, 조모임하면서 친해져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마 우리는 각 지체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이루어갈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강사님들과 간사님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만난 형제자매들 모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Jul 28,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탄 간증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지 못하고, 부모님 또한 나를 부르지 못하신다. 부모님은 선천적 청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셨고, 아버지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특수 목회를 하신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온전치 못하고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고,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나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것은 내 마음 속의 쓴 뿌리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해 심한 열등감을 자주 느꼈고, 누군가가 나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전혀 오고 싶지 않았던 미국에 오고 나서 나의 고통은 더 깊어졌다. 고난은 각자에게 그 크기 이상의 절대 값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하필이면 이런 집안의 아이로 태어났을까? 나는 왜 미국에 왔을까?” 그때 당시에는 잘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께 항의했고, 분노와 원망을 쏟아냈다. 나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도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애타게 불러봐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다. 결국에 내가 스스로 내린 결론은 성공하는 것이었다. 더 강해지고 싶었고, 더 좋은 것을 찾아 나섰고, 성공을 향해 방황했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고, 그래야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거라 착각했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왜 사는지도 모른 체 상처만 더 깊어져 가고 있을 때,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다. 코스타에서만큼은 그토록 내가 원했던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랬고, 참석하기 전부터 기도로 준비했다. 코스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특별히 저녁집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교만함을 보이셨고,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릎 꿇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안아주시는 것 같은 마음의 평화를 느꼈고, 그 동안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아파할 때 하나님도 나와 함께 아파하셨고, 내가 울고 있을 때 하나님도 나와 함께 울고 계셨기에 그분은 침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르짖음에 대답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나와 항상 함께 계심으로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제 내 삶의 의문은 하나님이 어디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디에 있는가로 바뀌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의 한인 이민자로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관점으로 다른 이웃의 심정을 이해하기를 원하셨다. 모두와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소망을 가졌고,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른 이웃은 단지 같은 민족인 한국인으로 국한되어있지 않고 다른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제 나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존재하고 생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와 선한 이웃으로서 존재하고, 이 세상과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생존하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실패하셨지만 진정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성공과 실패의 개념은 무의미하다. 성공이 실패가 될 수도 있고, 실패가 성공이 될 수가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좇는 인생을 꿈꾼다. 물론 앞으로의 길에도 고난과 아픔이 많겠지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승리를 기대하고 기뻐하련다.
* 김상수 형제는 7월 말부터 아프리카의 G국으로 missionKOSTA 를 통해 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건강과 안전을 위해 그리고 현지인들과 좋은 관계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Jun 1, 2003 | 이달의 초점
이코스타 2003년 6/7월호
간증을 시작하며
제가 7년 반만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올 봄에 제주대학에 정착하기까지의 기간을 돌아볼 때, 코스타를 언급하지 않고는 저의 미국에서의 삶을 얘기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코스타가 제 삶의 가장 귀하고 큰 중심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 중에 코스타를 한번이라도 참석 할 기회가 주어지는 사람들이 단 몇 퍼센트도 안 되는 소수라는 생각과, 그런 특권과 복의 기회가 내 인생에서 몇 년 동안이나 주어질까 하는 생각에 기회가 되는대로 참석하다 보니, 7년의 재미기간 중 한해를 빼놓고 6년 동안 코스타를 갈 수 있었습니다. 그 한번 한번의 코스타가 저에게는 너무나 큰 도전과 복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실제로 저는 영적인 복 뿐만 아니라 학업과 삶에 있어서도 코스타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큰 복을 받았습니다. 코스타 기간동안과 코스타 이후에 받은 복들을 연도별로 간략하게 헤아려 보면, 96년 첫 코스타 이후 저는 연구 조교 자리를 거의 기적적으로 얻을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 해 여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그 이듬해 봄에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97년 수련회에는 아내와 함께 코스타를 참석하였고, 그 이후 참으로 어려운 상황들이 닥쳐왔었는데,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98년에는 등록까지 했었는데, 아내의 임신을 코스타 바로 직전에 알게 되어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아쉽게도 포기해야만 했었습니다. 99년에는 태어난 지 4개월 된 쌍둥이 딸들과 함께 12시간동안 운전을 해서 코스타 참석을 할 수 있었으며, 그 이후 어려웠던 교회의 문제들을 잘 지혜롭게 대처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2000년 코스타 이후에는 그 동안 안 되던 실험 장치와 방법들의 문제점들을 파악해서 해결할 수 있었으며 실험 결과가 좋아서 첫 논문을 쓰게 되었고, 2001년 코스타를 통해서는 오랫동안 정리가 되지 않고 답을 찾던 학문과 신앙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며 마음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는 은혜가 있었으며, 코스타 이후에 예상치 않던 값비싼 장비를 빌릴 기회가 주어졌으며 실험결과가 잘 나와서 졸업을 할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2002년 코스타에서는 간사로 섬길 수 있는 특권과, 박사 후 과정을 위해 옮길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귀한 교회와 삶의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반드시 코스타의 직접적인 결과나 코스타를 참석했기 때문에만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코스타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코스타를 중심으로 일들이 전개되었습니다. 너무나 큰 은혜를 받으며 살아왔던 저의 유학생활 동안의 간증들을 코스타를 중심으로 몇 회에 나누어서 여러분들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96년 코스타를 참석하기까지
저는 이미 유학을 가기 전에 코스타에 대한 얘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왔었기에, 미국을 가기만 하면 꼭 한번은 코스타를 참석해 보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유학 첫 일년을 마칠 때쯤에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거의 탈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영어실력도 안되고 기초실력도 모자라는데 전폭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오게 된 유학인데다가, 전공도 바뀌었으니 수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수업시간에 아무리 졸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눈이 감기고는 했던 첫 학기와, 숙제를 아무리 읽어봐도 문제 자체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고, 심지어 선배들이 풀었던 답을 봐도 왜 그런 과정을 거쳐서 그런 답이 나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막막해 하며 한 해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으며, 더불어 연구조교 자리를 찾기는 더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국가에서 받은 장학금과 온 가족이 모아준 돈을 합쳐도 겨우 1년을 버틸 만큼이었으며, 여름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가을학기에 등록을 못하게 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는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절망감도 절망감이거니와, 설사 어떻게 경제적으로 해결이 된다고 하더라도 무능력 감 때문에 이렇게 몇 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사방이 막혀있는 감옥처럼 느껴져 밀폐 공포증까지 있었던 다시 생각하기조차 싫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96년 4월초에 코스타 등록원서를 보게 되었고, 등록원서를 보자마자 눈 딱 감고 그냥 등록을 했습니다. 육적으로 영적으로 너무 지쳐있던 상황에서 자포자기식으로, 또한 어디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어보자(?)는 생각이 있었기에 등록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 전에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수련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셨기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마음도 컸었습니다. 레위기 23장 말씀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번제나 화목제 등의 제사를 지내고, 매주 안식일을 지켰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일년에 세 번을 따로 모여 여호와 목전에서 거룩한 성회를 하라고 하셨으며, 그 중에서도 유월절과 초막절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모아서, 일주일씩 여호와 앞에 함께 모여서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가지고 매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여름과 겨울에 수련회를 가서 몇 일씩 세상과 분리되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교제하면서 쉬는 거룩한 모임이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정하신 절기의 원리 속에 있다는 것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미 그런 말씀에서 깨달은 영적 원리들이라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그때 처음으로 깨닫게 되어 수련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되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저 개인적으로는 또 하나의 커다란 기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 해의 코스타 주제였습니다. 96년의 코스타의 주제는 ‘부흥의 불길을 온 땅 위에’ 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93년, 94년도 여름 수련회를 통해서 차갑고 강철 같던 저와 제가 속해있던 청년부에 하나님의 열정을 보여주셨고 성령의 탄식하는 영을 저와 저희 청년부들의 심령 속에 심어주셨던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때의 주제와 말씀도 역시 ‘부흥’ 이었고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개교회의 부흥 집회와는 구별되는, 개인이나 집단의 거룩한 회심을 통한 사회와 민족과 족속들 까지도 변화되는 미국의 1차 2차의 대각성 시기 같은 이 영광스러운 시대로의 부흥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부흥을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기도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95년에는 개인적인 여러 사정상 수련회를 못 갔었고, 이제 개인적으로는 2년 만에 맞는 수련회인 그 코스타가 역시 동일한 주제로 계속되었으니, 거기에다 코스타가 열리는 장소는 시카고 부근의 위튼 대학(Wheaton College)으로서 94년도에 미국 크리스천 대학생들의 집회 중에 집단적으로 ‘부흥의 조짐'(주:부흥과 개혁사의 <캠퍼스를 태운 하나님의 부흥을 말한다> 참조)이 있었던 것을 미국 오면서 막 알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두 대학생의 간증을 들으면서 시작된 저녁 집회가 그 다음날 아침까지 밤을 새우며 회개와 기도 찬양으로 계속 되어졌으며, 천 여명의 대학생들이 그렇게 며칠을 회심과 회개와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은혜를 경험했으며 그 결과로 담배와 음란잡지, 그리고 마약 등을 자발적으로 모아 소각하게 된 양만도 엄청 났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주제처럼 저에게도 또한 우리 한국 유학생에게도 그러한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게 되는 소망을 더욱 크게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큰 잔치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기도와 금식으로 준비하며 지역 교회에서 렌트해 준 미니밴에 대략 여덟 명 정도의 학생들이 1박 2일로 보스톤에서 시카고까지 20시간을 운전해서 가게 되었던 첫 코스타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잔치라는 것을 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시작예배 때 처음으로 에드만 채플로 들어가는데, 이미 시작된 찬양 팀의 찬양과 강당을 꽉 메운 사람들이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 속에서 성령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을 이십사 장로들과 천사들이 찬양하는 천국의 모습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코스타는 순서 하나하나 진행될 때마다 얼마나 그 말씀들이 저를 도전하고 심령을 뒤흔들어 놓았던지요. 저녁시간마다 부흥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던 하용조 목사님, 오전 시간마다 다니엘서로 유학생에게 필요한 말씀을 해 주시던 이 승장 목사님, 그리고 코스타 출신들의 삶의 현장에서의 간증을 통한 도전과 비전들, 오후 시간마다 20여 개의 주옥 같은 선택식 강의들, 그래서 각자의 관심이나 기대, 그리고 신앙의 단계에 맞춰 이삼십 명씩 나눠서 듣는 강의 하나하나들, 그 속에서 저는 저희 앞에 차려진 큰 잔칫상이 떠올랐습니다. 여러 좋은 경건서적의 저자들, 방송이나 신문 등에서만 접하거나 소문만 들었던 분들, 그 중 한 분만 오셔도 큰 은혜의 수련회가 될 법한데, 그런 분들이 이삼십 명이나 오셔서 필요한 영적 양분을 다양하게 공급해 주시는 모습 속에서(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코스타에서 이것을 ‘국력낭비’라고 하더군요), 최고의 요리들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가득 채운 상 앞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조별로 모여서 요나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경건의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정리하면서 함께 모여서 그날 받았던 은혜들을 나누던 조별 모임, 이 모임을 통해서 대형집회에서 간과 되어질 수 있는 깊이 있는 개인적인 교제가 가능했고 기도제목 들을 나누고 함께 중보기도하며, 이미 코스타 기간 중에 응답을 받은 기도들로 인해 감사하며 함께 기뻐하며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저희 조원 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기억 나는 분이 두 분이 있는데, 한 분은 텍사스에서 오신 자매인데 코스타를 너무 오고 싶었는데 기말고사가 겹쳐서 포기할까 하다가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각 과목 교수님들께 양해를 받고 오신 분이 있었고, 또 한 분은 한국 모 대학 도서실에서 사서관련 일을 하시는 분인데, 전혀 올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인도하셔서 캐나다를 거쳐 이 코스타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분이었으니, 그 분들과 함께 받은 은혜는 더불어 클 수 밖에 없었지요. 그 외에도 많은 조원들이 코스타를 사모하고 준비해서 왔었고, 또 몇 분은 억지로 끌려오신 분들이 있었는데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그분들의 얼굴표정이 바뀌고 말과 생각이 바뀌어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했던 분들도 있었으며 그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답니다. 너무 좋아서 그 해가 다 가기까지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함께 말씀을 묵상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했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코스타에서 좋았던 점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좋은 양서를 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언어의 마술사’ 이 동원 목사님의 양서 소개 시간과 한국의 여러 좋은 양서와 찬양테이프 및 CD를 할인해서 살수 있었다는 것과 그 책들을 코스타 이후에도 읽으며 영적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백 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예수님을 개인적인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는 역사와 또 다른 백 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2년 이상의 단기, 장기 선교사로 헌신하는 모습은 참으로 그 감격을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을 백 명 가까이 얻은 이 때에 하늘에서 열리는 잔치의 기쁨을 생각하면 코스타가 여기서 끝나도 원 없이 좋지만,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에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구원 받을 때까지 코스타는 앞으로도 계속 되어져야 한다’ 던 한 간사의 말과, 자신의 바쁘고 힘든 유학생활에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코스타에 자원 봉사하여 수 십일을 밤잠을 설치며 준비하고 현장에서도 코스타 진행을 도우려고 바쁘게 움직이던 간사들이, 힘든 육체의 고단함에도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한 미소와 얼굴로 우리들을 위해 섬기시던 모습들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실패한 코스타 (?)
그러나 그렇게 순서순서 마다 은혜가 가득했고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렇게 기대하고 소망하던 개인적인 ‘부흥’이나 공동체 전체에게 허락하신 ‘부흥’을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부흥’은 너무나 명백히 ‘아주 좋다’ 거나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는 것과는 다른 것임을 알고 있었던 저로서는,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서 금요일 점심시간에 마지막으로 모인 조 모임에서 그것을 얘기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각자 받은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참된 ‘부흥’은 이것과는 명백히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재와 역사이며, 우리가 경험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 분을 아는 지식과 우리의 죄인 됨의 인식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머리와 가슴과 삶과 우리의 모든 말과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인쳐지는 것이고, 그 결과는 본인이나 공동체 전체가 뚜렷이 알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나 사회, 심지어 한 나라 혹은 세계 전역에 까지 그 영향력이 크게 나타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 해의 코스타 주제가 바로 ‘부흥의 불길을 온 땅 위에’라는 면에서, 이번 코스타가 실패인 것을 인정해야 하며 그래야 사람들이 ‘부흥’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되어 이런 것이 바로 ‘부흥’인 것으로 착각함으로써 참된 ‘부흥’을 기대하거나 소망하지 않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 조원 들만이라도 깨어서 계속해서 기도하자고 감히 주장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나 하나님은 일 년이나 지난 뒤에 저에게 다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계속)
마무리하면서 사족
저는 코스타만이 모든 것이고 코스타를 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된다거나 누구나 다 물질적 혹은 영적 복을 받는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처럼 코스타를 통해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많지만 또한 코스타를 참석했으면서도 은혜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기에 이것을 꼭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매년 코스타를 참석하면서 어쩌면 이번 코스타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만큼 각박한 유학생활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하게 저는 한국으로 돌아온 올해에도 코스타를 참석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저에게 마지막 코스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참 기대가 큽니다. 한국에 돌아오면서 어찌 보면 가장 필요한 것이 ‘순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되 세상을 떠나거나 등지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서 고귀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에는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이 순결함일 것 같습니다. 세상의 소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세상의 방법을 너무 쉽게 쫓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이제는 진실로 순수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고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며 그분 앞에서 그 분만을 청중자로 두고 살아갈 때 인 것 같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에 선포되어, 주위에 거룩한 흰옷을 입은 청년들이 자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날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다에 물이 가득할 그 날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이번 2003년 코스타를 통해서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Mar 2, 2002 | 코스타 사역/코스탄 간증
eKOSTA 간증
‘연변총각’ K 형제
오늘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어렵게 생각 하던 대로 부터 믿게 되었는지에 거기에 대해서 잠깐 얘기 드리도록 할께요.
저는 사실 대학 가기 전에도 저보고 뭐 하느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저보고 교회에 가자는 사람도 없었어요. 주위에 극소수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전혀 나하고 관계없는 이상한 사람들이 다니는가 했어요. 그랬댔는데…
이해의 편리를 위해서 저희 학교에 대해서 잠깐 소개 하겠어요. 제가 다니는 연변 과학기술대학은요 미국에 원래 계시던 김 진경 총장님께서 중국에 있던 조선족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그런 대학 이예요. 그래서 대부분은 한국이나 혹은 미국에 계시던 교수님들이고요, 학생들이 저와 같은 중국에 있는 조선족 학생들 한 80%와 한족들 20%로 그래서 한 130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곳 이예요. 그래서 저는 사실 대학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줄 모르고 갔는데 대학가서 그런걸 알게 되었고요. 그래서 대학을 거기 지원하게 된 것은 사실 그 학교에 가면 영어 잘 배울 수 있대서 그래서 지원했습니다.(웃음)
제일처음 대학가서 학부에서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교수님이 식사전에 기도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 이 교수님 예수 믿나 보다 하고 저녁에 침실에 와서 침실에 선배에게 이런 얘기를 했댔어요. “이재용 교수님은 예수 믿나봐요.”그랬더니 선배가 막 웃더니만 “예수 안믿는 사람이 어딨어” 그러더라구요.(웃음) 그래서 너무 당연한걸 물었나 싶어서 ‘ 아 한국사람은 다 예수 믿나부다’ 그래 생각했댔어요 (웃음).
그런데 첨 지내면서 알고보니까 교수님들이 학생들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요. 다 큰 학생들이 학교와서 다니는데 어린애들처럼 돌보고 너무 극진하게, 전에 받지 못했던 그런 관심들을 주더라구요. 그리고 저희 학교는요 총장님을 비롯해서 모든 교수님들이 학생들하고 한식당에서 줄서서 함께 식사를 해요. 그게 참 너무 이상하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참 너무 그분들이 전에 있었던 그런 학생과 교수관계를 뛰어 넘어서 너무 친한 사이로 그렇게 지내게 되었어요. 모든 교수님들이 다 따뜻하게 대해줬고요, 그래서 참 감사하게 생각하면서도 예수믿는 사람들은 원래 남을 위해서 봉사하기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그분들이 왔나부다 하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학교에서 학생들 중에서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그리고 주위에 안 믿던 사람들도 교수님한테 전도받아서 가게 되는데 참 너무 이상하게 생각했댔어요. 그분들이 미국이나 한국 혹은 더 좋은 환경 속에서 돈 잘벌고 잘 살 수 있는데, 여기와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좋은 것 다 버리고 일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어요. 너무 우러러 보이구요. 그렇지만 그분들처럼 그렇게 예수믿고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는 예수 믿으면 돈도 많이 못 버는가 했어요 그분들이 너무 소박하게 살기때문에(웃음). 돈도 많이 못벌고 뭐 나쁜짓 조금만해도 자꾸 가슴이 찔리고(웃음), 좋은 것이라고는 모르겠더라고요. 뭐 옷도 좋은거 입으면 남들 자꾸 눈치 보이고 ‘예수믿는 사람이 뭐 옷도 저래 사치하게 하고 다니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친구들도 가끔 교회 나가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하고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나도 한번 교회 가봐야 겠어” 하더라고요. “뭐 교회가 니 가는데냐. 그런델 왜가”했는데, 그 친구는 아침에 못 일어나면 저녁에도 가고 뭐 하여튼 예배는 다니더라고요. 건달처럼 그렇게 다니면서 교회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교수님들도 차츰 지나면서 한 1년쯤 지나면서 교수님들하고 만나서 얘기도 하는 중에 자꾸 하나님 얘기가 나와요. 얘기하다 보면 마지막으로 가면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해. 사람이 믿음이 없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데”하는 얘기를, 좀처럼 저한텐 이해되지 않는 그런 말씀을 자꾸 하시더라구요. 첨엔 왠지 그게 되게 싫었어요. 그래도 교수님 얘기하는데 딴 대꾸는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어요. 듣고 말끝나면 돌아오곤 했는데 그런 과정 중에 저와 친한 친구들도 교수님 그렇게 말하니까 “교회 한번 안 가볼래 한번 가보자” 하는데 딱히 가기가 싫었어요. 그런 데를 왜가나 싶었어요. 이상한 사람들이 가나 싶었어요. 뭐가 그분들이 잘못 착각하고 있지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런 생각 하면서 있었는데 한 2학년 땐지 학교 다닌 지 한 1년쯤 되었어요. 침실 선배가 ‘대학부 모임이 있는 데 같이 한번 안 갈래?” 그러더라구요. 친한 선배가 하도 얘기 하길래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한번 가봤어요. 대학부 모임이었는데 뭐 찬송 부르고 그런 모임이었어요. 저는 뭐 그런것도 모르고 갔댔는데요. 근데 딱 시작했는데 막 난리가 났어요. 기도하는데 뭐 울고 불고, 학교에서 말도 조용하게 하는 그런 친구들이 정신 나간 것 처럼 막 그러더라구요.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한 절반 하다 나왔어요(웃음). 뭐 이상한 사람 다 버리는 곳이라고 해서. 그래서 선배도 따라 나오고, 원래 제 성격을 원래 아니까 뭐 딴 얘기는 안하고 그저 웃더라고요. 첨 이니까 혹시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고 나서는, 그담부터는 누가 교회 가자고 해도 안 갔어요. 이상하더라구요. 저는 저는 교수님들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 되었드랬어요. 성경에 대해서, 뭐 딴거는 모르지만 그래도 공부 적게 하신분은 아니잖아요. 다 박사까지 공부하시고 했는데 아니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훅 부니까 생기가 들어가서 사람이 됐대요. 아니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어요. 너무 이상하게 생각 되었어요. 뭐 모르는 사람은 모르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교회를 따라간다고 그러지만, 그분들이 모르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보니 너무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 했댔는데…
그런과정에 제가 금년 4월에 몸이 자꾸 아프던 차 병원에 가서 진단을 했는데요 대장암이라는 그런 진단을 받았어요. 지금은 제가 너무 담담하게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되게 힘들었거든요 그때요. 제가 사는 집에 갔다가 집에서 수술 받고 북경으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갔댔어요. 항암치료 받으러 북경 가서 제가 교수님한테 알렸어요. ‘결장암이라는 진단 나왔습니다. 잠시는 학교 못가게 될 것 같으니까 교수님 그렇게 알고 계십시요.’ 하고 간단하게 메일 보냈어요. 그러고 한 멏시간 지나니까 제가 집에 있는데 교수님한테 전화가 왔더라구요. 교수님께서 메일을 받아봤더라고 그러시면서 교수님도 아주 괴로워 하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뭐 위안하는 말로 “뭐 거기 어디 교회 없냐”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교회 있으면 교회나가봐라 하시더라구요.” 남은 막 아파서 속이 불편한데 막 그런 얘기를 하니까 왠 얘기냐고 아픈데 교회가서 뭐 병이 나아요 그런 얘기 하고 싶었지마는 그런 얘기는 못하고 전화 끊었어요. 그날이 수요일인지 그랬는데요 주말에 절 보러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연길에 학교하고 제가 있는 북경하고 비행기로 두시간 거리예요. 그런데 교수님이 오셨어요. 전 교수님이 오기전에 대략 교수님이 왜 오시는 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교수님하고 저하고 이틀동안 호텔에 같이 묵었덨거든요. 오시자 마자 성경책을 꺼내 드시더니만 거의 밥먹고, 잠자는 시간 빼 놓고 밤늦게까지 계속 성경 얘기만 하시는 거예요. 요한복음에는 무슨말이 있고, 하나님이 너네 아버지고, 하나님이 너한테 뜻이 있길래 너한테 병을 주고 … 그게 무슨 말인지 당체 이해가 안갔어요. “하나님이 너에 대한 귀한 뜻이 있기 때문에 너한테 병을 주는거다. 그러니까 하나님 영접하면 꼭 낫고..” 이런 얘길 하더라구요. 저는 그게 되게 싫었지만 참 너무 멀리서 오신 분한테 뭐라고 얘기는 못하고요 그래서 그냥 듣고만 있었어요. 이틀동안 꼬박 저한테 전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어요. 그런데 실컷 설명하시다가 하나님이 나를 만든 아버지래요, 저보고 영접기도 하라고 하는데 저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저희 아버지 성함이 김**이거든요 한참 얘기 하시다가 “너는 김**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 아들이야 하면서 저보고 승인하래요. 그래서 한참 얘기하시다가 “그래도 너 김** 아들이야?” 하면 저는 “예” 라고밖에 대답 할 수 없었어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거 도저히 승인하기가 싫었어요. 무슨 얘긴지도 몰랐고요. 그래서 이틀만에 주일날 교수님이 돌아 가시게 되었어요 학교에 일도 있고 하시니까 해서 왔댔거든요. 그런데 그때까지 제가 뭐 돌아가는 교수님한테 미안하긴 했지만 하는 수 없었어요. 안믿어 지는 거 믿어진다고 거짓말 할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가는 교수님한테 “교수님 제가 생각이 못 바뀌어서 그런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교수님도. 그렇겠지요 기분 되게 서운해 하시고 성나신 것 같아서 “그건 의지로 하는게 아니야” 하시면서 되게 안타까워 하시면서 가시더라구요.
그런 후 한 며칠 지나서 우리 선밴데, 원래 저하고 한 침실에서 지냈고 3학년 위 선배지만 거의 친구처럼 친하게 지낸 선배가 있었어요. 그분도 학교 와서 예수믿었고 북경에서 일하고 계셨어요. 그래 제가 아프다는 소식을 어떻게 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한번 만나자고 해서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뭐 그분도 제성격 아니까요 곧바로 대놓고 교회가자 그런 얘긴 안했지만 와서는 이런 얘길 하더라구요. 그때 막 제 얼굴 보니까 힘들어 하는 거 보이겠지요. 그래서 저보고 “니가 지금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좋다면 뭔들 못하겠느냐. 너는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는데 왜 너는 믿어 보지도 않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반대를 하느냐. 한번 믿기나 해 보고 안 믿어지면 그만둬라.” 그래서 생각한 결과 한번 나가보기로 했어요. 한번 나가보기는 나가보자. 근데 뭐 교회 가서도 뭐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목사님 앞에서 “하나님 은혜가 풍성하십니다” 하는데 그게 무슨말인지 뭐.. 그래서 형식적으로 그저.. 정말 가기가 싫었어요. 믿는사람들이 하나도 더 좋아 보이는 것이 없었어요. 뭐 친구들 절 전도 했지만 전 “넌 뭐 예수 믿어 봤자 나보다 좋은게 뭐가 있느냐”라고 얘기해 가면서 정말 쪼금 만치도 거기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그랬댔는데 제가 북경에서 교회 두 번 가보고 셋째주에 여기 미국 오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감리교회 원 박사님(원종수 박사님)께서는 우리 학교에 한번 방문 하시고 교수님들하고 연락이 되어서, 교수님들의 도움받아서 여기서 치료 받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여기 오기 전부터 아마 대략 교회 다니는 분들하고 만날 거라고 생각 했었어요. 그런데 여기 와보니까 웬걸.. 만나는 사람들이라고는 다 교회 다니는 분들이더라고요. 그러고 보 금방와서 저한테 너는 교회 다니나 뭐 그런 얘기 묻지도 않고 “주일날이니까 교회 나와, 마중갈께” 뭐 이러고 해서 교회를 가기 시작 했어요. 그렇지요 뭐, 저는 아는 사람도 한사람도 없고 그저 이런 사람 있다는 주소만 들고 왔거든요. 그래 거절하기가 딱해서 교회 나왔어요. 뭐 가고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할수없이 나왔어요. 그런데 두주째 지나도 뭐 교회가서도 들리는 말도 없었고 그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어요. 참말 가기 싫었지만 그저 겨우 따라 다녔어요.
그랬댔는데. 두주 지나서 제가 코스타를 가게 되었어요. 여러분의 도움으로 또 하나님이 인도하셨는지 등록비도 안내고 등록도 안했는데도 그저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코스타 가서 여러 교수님들 세미나도 듣고 이러는 과정에 제가 이런말을 한마디 들었어요. 제가 예전에 교수님들이 왜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하다 했잖아요? 근데 어느목사님이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이런 얘길 하시더라구요. “게으른 사람은 자기가 안해서 그렇지 하면 아무거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최선을 다 해 본 사람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안다”는 그런 말씀을 들었어요. 저는 그 얘기가 정말 제 머릿속에 와 닿는 것 같았어요. 사흘날 저녁에 김동호 목사님 저녁설교에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여기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온 자가 있다면 일어서라고 했어요. 일어 서면 당신께서 영접기도 해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한마디 턱 하고 나니까 드문 드문 일어서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저는 다 믿는 사람만 코스타를 가는 줄 알았는데 저같은 사람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세번 이야기 하셨어요. 세 번 이야기 하실 때 제가 마지막에 일어 났어요. 저는 전에도 그랬다 시피 안 믿어지는 걸, 뭐 어떤 사람들은 안 믿어 지는데 친구가 가자고 해서 일단 믿어 보자고 했다는데 저는 그런게 도무지 이해가 안갔어요. 생각이 없지 않으면, 왜 남이 일단 믿어 보란다고 믿자고 가는지 몰랐어요. 안믿어 져도 억지로 영접기도 해서 믿는다 하는데 그렇게 믿기는 싫었어요. 제가 일단 교회다니는 것도 아파서 다니잖아요. 그저 바라는게 있으니까 교회 가는거잖아요. 저는 시작은 일단 그렇게 했지만 아픈것을 고치는 그런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신앙은 가지기가 싫었어요, 그런 신앙으로 기도해봐야 하나님이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어요. 그렇지만 코스타가서 제가 일어 났을때 이런 결단이 생겼어요. 이제부터 좀 주인다운 그런 태도로 한번 믿어 보자구요. 그래서 일어나서 하느님 앞에 이렇게 기도 했어요. “하느님 아버지 이제부터는 하느님 믿고 따르겠습니다.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저에게 믿음을 주십시요”라고 기도 했어요. 그런데 기도하고 나니까 한가지 발견되는게 있었어요. 제가 처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 봤어요. 저는 뭐 하나님 아버지, 형제 자매, 그런게 되게 싫었거든요. 그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학교에 가면 막 등쳐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 되게 싫어했거든요, 사람들 유혹할라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 했거든요(웃음).
제가 막 전에 한번 대학부 모임을 갔었드랬는데 모 어느 선배가 와서 ‘네가 드디어 나왔구나, 내가 니를 위해 얼마나 기도 했는데’ 하는데 ‘아 난 안믿어요, 안믿는데 그저 한번 나와 봤어요’ 그러면 ‘니가 지금은 싫어 하지만 이담에는 꼭 믿게 될거라’고 모 ‘하나님이 너를 부르신다’니 뭐 이런 얘길 하시더라구요. 그게 되게 싫었댔어요 그런게요.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 봤어요 그때. 그리고 예배끝나고 나오니까 밖에서 막 뭐 ‘born again’ 했느니 ‘happy birthday’니 하면서 막 축하한다고 사람들이 막 그러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영접기도 하고 나왔지만 별 다른게 없었어요. 우리 교수님은 뭐 예수님 영접하고 막 실컷 울고 나왔더니 풀이 파릇파릇 하고 하늘이 파랗고 막 그렇다는데 저는 그런것도 없었어요.(웃음) 그래서 이제 태도만 하나 고치고 한번 믿어보자는 그런마음으로 돌아와서 그리고 교회 다니는 과정에 성경공부도 참가하고 앤아버에 있는 한인교회의 모임이란 모임은 다 갔어요. 뭐 다 여러분들이 막 저한테 열심히 잘 알려주고 그랬어요. 그러는 과정중에 차츰 정말 뭐라고 말을 못하는 그런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뭐 성경도 가끔씩 한번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요.
그런 과정에 9월달에 제가 여기와서 처음으로 CT scan했거든요. 그래서 첨에는 병 증세가 되게 안 좋았댔어요. 그런데 9월달에 scan해 보고 난 결과가 아주 좋아서 원래 퍼져 있던 암세포도 하나도 안보이고, 원 박사님도 아주 기적이라면 기적이라는 그런 현상이라면서 ‘하나님이 정말로 너를 사랑해서 그러신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저는 그러면서 참 딱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참 감사했어요 하나님한테요. 저는 교수님들이 전한테 하나님이 널 써주시려고 너에게 병을 주신다 하는 얘기가 너무 이해 안갔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쓰면 고이 쓰지 병은 왜 줘요. 병도 주면 왜 암 같은거 줘요. 그랬댔는데 제가 여기 와서 얼마 안되서 한국에 있던 같은과 친구한테 이런 메일을 받았어요. ‘…전에도 교수님들이 너무 존경스럽고 우러러 보였지만 너(김 *)를 통해서 정말 그렇게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주는 그 교수님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어. 도대체 무슨힘이 그분들로 하여금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게 하는지, 성경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싶어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저는 그 메일을 보고 참 많은 걸 느꼈어요. ‘아 하나님이 정말 나를 통해서 많은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참 저는 전에도 그랬다시피 내 머리속에 기적이 안 일어나고 난 절대로 그걸 믿을 수 없다고 생각 했었어요. 그걸 어떻게 믿을수가 있어요? 그랬댔는데 차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그러던 데로부터 설마 그럴까, 아 정말 그럴수가 있을까, 설마 그럴수도 있겠다 하는 데로 부터. (웃음) 지금은 아.. 맞아 딱 맞았어. 내가 승인해 이렇게 되었어요. 저는 결코 그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정말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자에게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가운데 많은 치료 받는 가운데서 정말 진전도 너무 빨리 됐고요, 병치료도 너무 빨리 회복 되었어요. 그래서 치료해주신 의사님도 아주 기뻐 하셨고요,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도다 하시면서 참 기뻐 해 주셨어요. 그럴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참 감사했어요. 아직 뭐 채 믿어지지 않았지만 정말 확실히 하나님이 제게 뭐가 보여주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래서 그때부터 한 몇 달 지나서 이제 원래 계획했던대로 치료 곧 끝나가게 되거든요.
참 그동안… 너무… 저는 원래 참 예수믿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보였어요. 왜냐면 아 한번 사는 인생에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도대체 몰랐어요. 있는걸 다 즐기고 살아야지 저는 항상 사람은 즐겁게 살아야지 하면서 학교 다닐때 술담배 적지 않게 하고 다녔어요. 공부도 별로 열심히 안했고요. 저는 예수믿는 것이 금욕주의라고 생각했어요. 예수 믿으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그런게 너무 싫었거든요. 그랬댔는데, 저는 기도 하면서 저한테 있는 병치료 해줄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깨끗하게 씻음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제가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정말 마음속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정말 전에 그런 유혹을 가졌던…제가 그렇게 완고하게 고집하던 것으로부터, 정말 마치 기도하다가 눈물흘려 본적있고요, 찬송가 부르다가 기뻐서 웃어본 적도 있어요. 아까전에 우리 불렀지만 ‘형제의 모습속에’ 라는 노래 제가 되게 좋아 하거든요. 왜냐면 제가 언제 8월달인지 언제 한번 성경공부 하는데 그 찬송가를 보게 되었어요. 찬송가 가사가 이렇잖아요.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와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저는 그 찬송가 가사를 볼 때 우리 학교 교수님들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참 그분들 속에 보이는 하나님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래서 몇 달 6개월째 지나는 가운데 이제는 그렇게 가기 싫던 교회가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이젠 주일 되면 ‘아 주일날 원래 교회 가는 가보다’ 그렇게 생각되고 가끔은 주중에 주일이 기다려 지기도 해요. 가서사람들도 만나보고 싶고, 예배도 보고 싶고, 찬송가도 같이 부르고 싶고 그런 마음도 생기곤 해요. 그래서 그동안 하나님 믿는 가운데서 치료받으면서 참 마음속에 많은 평안함도 얻었고요, 하나님이 꼭 고쳐 주실 거라는 그런 확신도 가졌어요. 참 요즘은요 ‘내가 왜 암에 걸렸지’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요 이유가 딱 하나라고 생각되요. 암이 아니고서는 저하고 하나님하고 붙여놓을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확신이 들어요. 이제는 여기서 단련도 받고, 제가 중국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하나님께서 미국에 이런 환경속에 하나님 믿는 사람만 만나게 해주시고 이런 환경속에서 억지로라도 끌어 주시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원래는 가기 싫던 교회도 이제는 습관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 6개월이라는 시간이 하나님 절 단련시켜서 돌아가서 영적으로도 굶지 않게끔 하시는 거 같아요.
제가 원래 간증을 해 달라고 했을때 되게 주저 했댔거든요. 왜냐면 저는 간증을 안해본것도 있지만 예전에 누가 저한테 와서 하나님 얘기를 하면 되게 싫어 했댔어요. 그런데 내가 그런 얘길 한다니까 감이 안왔어요. 그래서 주저 했댔는데요, 집에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느님 자랑해야 될 것 같아요,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자랑해야 기도도 잘 들어 주실 것 같고, 기뻐 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어떻게 자랑 잘 했는지 모르지만 들어 주셔서 감사하고요, 여기 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K 형제
연변 과학 기술대학 3학년 K모군이 직장암 판정을 받은 후 미국에 치료차 체류하면서 그 기간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치료 후 중국으로 돌아 가기 전(12/16/01)에 나눈 간증문 입니다. 인터뷰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거의 수정 없이 녹음 내용을 글로 옮겼습니다. 본인의 간곡한 요청에의해 본명을 밝히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