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13,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25주년을 맞이한 KOSTA/USA이지만, ‘KOSTA가 도대체 무엇을하는 모임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어떤 이들은 KOSTA를 일년에 한번 열리는 부흥 집회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유학생 선교단체라고도 한다. 이제 KOSTA/USA 25주년 2010 연차수양회를 마무리하면서 코스타는 어떤 운동인지,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간략하게 나누어보자.
KOSTA/USA 웹사이트 (http://www.kostausa.org)에서 ‘코스타 소개’를 클릭해 보면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 하나님 나라 백성(Kingdom of God within Korean Student Diaspora)’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KOSTA/USA의 mission statement이다. KOSTA/USA가 어떤 운동을 하는 모임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한 문구인 셈이다. 이 mission statement에 의하면, 첫째, KOSTA/USA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다. 미국에서 KOSTA/USA가 열리지만, 언어가 한국어인 이유도 바로 그 대상이 ‘한인 청년’이기 때문이다. 또한 KOSTA/USA는 더이상 고국으로 돌아갈 한인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한다기 보다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게 될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 둘째, KOSTA/USA는 전세계에 흩어지게 될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운동이다.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여 풀어 놓은 것이 바로 vision statement이다. KOSTA/USA의 vision statement에는 세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다. 첫째,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운동’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만이 왕이 되셨다는 기쁜 소식을, 한인청년 디아스포라에게 선포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말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대 가운데, 또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마저 대담하게 이용하는 세대 가운데, 하나님만이 왕이 되심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애쓰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지금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연차수양회이다. 둘째,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운동’이다. 세상을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이미 소유한 선지식으로부터 자유롭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 하지만, 완전히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더라도,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성경적이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돕는 운동이 바로 KOSTA/USA이다.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미 성경적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시는 선배들의 삶을 책이나 직접적 만남을 통해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또 함께 한다. 셋째, KOSTA/USA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살게 하는 운동’이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저 멀리있는 어떤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완성될 샬롬이며, 예수님을 통해 이미 이 땅에 들어와 우리가 맛보고 사는 현실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아직 미치지 못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선포하는 삶을 살도록 돕는다. 그곳이 직장이 될 수도 있고, 가정이 될 수도 있으며, 교회가 될 수 있고, 또 해외 선교지가 될 수도 있겠다. 코스타에 자주 오시는 한 강사님은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신다: “예배자가 사는 삶이 예배다”. 그렇다. 예배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하심을 받는 사람들이 사는 모든 삶의 모습이다. 특정한 장소에 모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예배도 참 소중하지만, 진정한 예배는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될 때, 바로 그 예배자된 우리가 숨쉬고 사는 모든 삶이 예배가 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KOSTA/USA는 미국에 있는 한인 청년 학생들로 하여금 진정한 예배자가 되도록 돕는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25년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어온 KOSTA/USA는 앞으로 어떤 모습을 견지하면서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나라의 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 모습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KOSTA/USA는 스스로 하나님나라를 건설해 가려는 오류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어떤 특별한 계획을 짜고, 효과적으로 그 계획을 추진함으로 앞당길 수 있는 것이 하나님나라가 절대 아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묵묵히 한걸음 한걸음을 떼어 놓기를 원할 뿐이다. 그래서 몇가지를 염두에 두고, 세상의 가치에 거슬러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살아가는 KOSTA/USA가 될 것을 기대하며 다음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KOSTA/USA는 성과와 결과를 추구하지 않고, 소외된 한사람에게로 다
가갈 것이다. 예수님도 때로는 많은 군중과 함께하시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결국 소외받는 한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사역을 하셨다. 세상에 버려진 자들 – 가난한 자, 병든자, 창녀, 어린아이, 과부 등 – 을 찾아 가셔서 그들과 함께 있어 주시고, 그들의 아픔을 회복시켜주셨다. KOSTA/USA도 그럴 것이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많은 군중 가운데 있겠지만, 이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있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 그들을 만나고 함께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당장의 성과와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그런 성과와 결과의 책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그저 그들에게 다가가 머물 것이다. 때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게 될지라도, 우리의 이런 ‘끙~’하는 신음조차 기도로 받아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조금씩 움직여 나아갈 것이다.
둘째, KOSTA/USA는 우리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정말 성경적이며,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전달되고 있는지를 점검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받아들인다고 진리는 아니다. 현대 교회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많은 사람이 진리라고 외친다고 해서 그 진실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KOSTA/USA는 우리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진정 성경적인지를 늘 겸허하게 점검할 것이다. 현대의 흐름에 편승한 어떤 거짓된 가르침에도 단호하게 No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 가름침이 비록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고 받아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성경적 진리는 현대를 사는 한인 청년 디아스포라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하지만 그 ‘적절한 방법’은 ‘효과적인 방법’은 아닐 것이다. 어느 누군가 소외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을 인격이 아닌 도구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점검을 스스로 계속해 나갈 것이다.
셋째, KOSTA/USA는 외부의 어떠한 위협과 어려움에도 절대로 힘으로 대항
하거나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강산이 두번 하고도 반이 더 돈 세월을 지내온 KOSTA/USA. 이제 제법 유명해졌다는 사실이 반갑지만은 않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KOSTA/USA는 내부 혹은 외부로부터 적잖은 위험과 어려움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KOSTA/USA는 그 어떤 역경에도 절대 힘으로 대항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어려움 가운데 굴복하거나 타협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힘으로 대항하지도 않고 타협도 하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택할 것이다. 즉 KOSTA/USA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질 것이며, 언젠가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다릴 것이다.
이제 KOSTA/USA-2010 연차수양회를 뒤로하고, 예배자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땅끝이기도 한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나아간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Jul 14,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작년 KOSTA/USA 집회 후 layoff 통보를 받고 맘 고생하던 A 형제는, 고민 끝에 한국의 한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접한 한국의 현실은, 어떤 이의 말처럼 ‘신앙의 진검 승부처’였다. A 형제가 몸담게 된 회사가 대기업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업무 자체보다는 인간 관계에서 갈등에 처하기 일쑤였다. 경력사원으로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 탓에, A형제는 주위 동료로부터 환영보다는 견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다른 사람을 밟아야만 앞으로 갈 수 있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했다. A 형제가 신앙의 진검 승부를 해야하는 또 다른 곳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교육 현실이었다. 승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정글이 한국의 학교이다. 가정, 직장, 교회, 문화, 학교 등 모든 곳이 어그러저만 보이는 곳,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어떻게 이루어질까하는 의문이 드는 이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곳이 ‘하늘’이며,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곳이‘땅’이다. 하지만, 이‘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버림받은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그러진 이 땅을 회복시키시겠다고 계속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그 약속의 신실하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가 이 곳에 들어오게 되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모든 곳이 하나님나라이며,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곳(그곳이 어디던 간에)이‘하나님의 나라’인 반면,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모든 곳(그 곳이 어디던 간에)이‘땅 끝’이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오게하신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종족을 우리가‘땅끝’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땅 끝’은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모든 곳이‘땅 끝’이라면, 그‘땅 끝’은 우리 주위에서 참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다.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도구만으로 여기고 기능적으로만 취급하는 직업의 현장이 바로‘땅 끝’이다. 아이들에게 숨쉴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어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돌게하는 한국의 교육 현실이‘땅 끝’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집중하기 보다는, 각종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게 하는 교회가 바로‘땅 끝’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도록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는 분명 ‘땅 끝’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다시 말해, 아직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창조세계 곳곳에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복음을 선포하고,”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고후 10:5)”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땅 끝’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떤 이처럼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 하에 전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무참히 죽이는 일을 우리가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세상의 논리로 ‘땅 끝’을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땅 끝’으로 나아가야 할까?
예수님과 바울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보자.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8~9a) 고린도 후서에는, 바울이 하나님께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번씩이나 간청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셨다는 유명한 고백이 나온다. 너무도 익숙한 내용이고, 또 자주 듣고 보는 구절이지만, 그 때마다 이 내용에 대해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든다. 고린도후서가 쓰여진 배경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바울이 과연 사도냐’는 것이었다.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자이여야 하는데, 바울은 뒤늦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기에, 그에게는 늘 그의 사도권의 진위에 대한 논쟁이 따라다녔다. 고린도후서에서는, 바울이 글은 잘 쓰지만 말이 어눌하고 큰 이적도 보이지 않는 것을 트집잡아 바울의 사도권을 공략하는 거짓 사도들이 등장하고, 바울은 이에 대해 절규하듯이 고린도교회에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황 가운데서 나라면 어떤 논리를 전개할까? 아마도, 12장 초반에 나오는 바울이 세번째 하늘에 올라갔었다는 이야기를 좀 더 크게 이야기할 것 같고,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여러 병고침의 사건들을 증거로 제시할 것 같다. 그리고 ‘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크게 부풀릴 유혹을 이겨내야만 할 것이다. 아니, 나는 적어도 ‘내가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만하면 됐다’고 하시더라’는 경험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냥 말하지 않고 넘어가겠지, 그걸 떠벌릴만큼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말 바보다.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에 가시가 있다고, 그래서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고 대놓고 떠드는 이가 바로 바울이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내용을 내어놓으면서 바울이 스스로 바보가 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며, 자신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된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문제삼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땅 끝’에 대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다. 자신의 지위를 능력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약할 때 일하시는 하나님의 참 능력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애썼다. 바울은, ‘강해야 효율적이다’ 혹은 ‘로마를 정복해야 하나님나라가 온다’고 생각했던 세상에 대해 무기력하게 죽으심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신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한 자일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바보같은 삶’을 몸으로 살아낸 자가 바로 바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의 약함이 드러나는 대상이 다름아닌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그 유명한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비유에서의‘왕’)과의 관계성은 다름아닌 보잘 것없는 한 사람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고는 말이다. 이 세상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그나마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도, 그 사람 자체로 대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기능으로 대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기능을 잘 활용하는 사람을 유능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늘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가셨고 그들과 함께하셨다. 한 사람을 그 자체로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20세기 유대 랍비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예배다”. 우리는, 하나님이 왕으로 인정되지 않는 세상의 곳곳에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해야한다. 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서도 철저하게 예배자여야 한다. 세상의 논리인‘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는 없다.만일 힘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려 한다면, 비록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세운 ‘인간의 나라’이지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철저히 십자가로 대표되는 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 가신다.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그의 강함을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는 말이다. KOSTA/USA-2010을 통해, 우리의 약함을 자랑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고, 이를 통해 세상의 모든‘땅 끝’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Jul 14,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A형제는 초등학생 두 아들이 있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가끔 성경을 펴고 이야기를 나눈다. 우선 아이들에게 성경본문을 읽고 ‘본문에서 하나님을 누구라고 하나?’,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나?’, 그리고 ‘본문은 우리 자신들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나?’ 등의 질문에 미리 답하게 하고, 그 후에 함께 앉아 본문을 살피며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주부터 로마서를 보기 시작했다. 로마서 1장 5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이방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서 순종하게 하려고, 그를 통하여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 구절을 설명하면서 ‘이거 어디서 보던 구절 아니니?’라고 물었지만, 아이들은 두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이사야에 나오는 구절과 비슷하지 않니?’ 그리고는 이사야 60장 3절을 펴서 읽어 주었다. –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 아이들의 반응은, 아니나 다를까 ‘정말 비슷하네’였다. ‘근데 아빠. 유대인들이 그렇게 특별해요?’ 큰 아이가 A형제에게 물었다.
유대인들이 정말 그렇게 특별할까? 특별하다면 어떤 면에서 그럴까? 구약의 유대인들은 잠시 제쳐두더라도, 신약시대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민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보면,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동료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유대인의 정체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할례를 강요하고 정결의식을 치룰 것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정말로 할례 등의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의에 기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애굽 땅에서 벽돌을 구우며 바로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찾아오셔서,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그들의 왕이 되셨음을 하나님께서 확인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 오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땅을 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삶의 모습이 어떠함을 알리시려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가? 자신들의 공로와 관계없이, 그들을 먼저 찾아와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도 잘 아는 유대인들이기에, 그들이 몇가지 율법의 조항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고 했다고 결론짓기는 다소 성급해 보인다. 어쩌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시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그 증거로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율법’을 차라리 ‘은혜’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그렇게 은혜로 이르게 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아니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켜 나갔을는지 모르겠다.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이방인에 대해 철저하게 배타적인 본문들이 있는가 하면, 요나서나 이사야같이, 유대인들의 존재 목적이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이방인에게 빛이 되어 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는 본문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관점이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언약백성인 유대인을 통해 이 세상을 회복하신다’는 점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유대인들은 자기 유대민족만이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반면, 다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유대인이 됨”으로써 회복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신약의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적어도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후자의 의견, 즉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는데, 단 그 조건은 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믿은 듯 하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왕이심을 고백하면서도,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인 유대인이 되라고 권유할 수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이 되는 길이 할례요 정결의식이기에, 초대교회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라고 강요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지만, 그 길에 들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바울은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불러 백성 삼으신 이유는 다름아닌 ‘세상의 빛’이 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통로가 되기를 기대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첫 내용도 ‘너로 인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창조 세계 전체를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의 증표였다. 좀 쉽게 풀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은 내가 회복할 땅이야’라고 약속하시면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심으로써 ‘찜’하신 것이다. “지금은 비록 어그러져 있지만, 난 반드시 이 세상을 회복 시킬꺼야”라는 증거로 유대인들을 자신의 백성삼으셨다는 말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세상의 빛’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오해하고, 이방인에게 유대인으로의 개종을 요구했던 것이 참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톰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제 해결을 위해 불러낸 유대인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문제 자체가 되어 버린’ 형국인 셈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 인류와 맺은 언약에 끝까지 신실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그 약속을 완성하신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완전한 순종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셨다. 바로 유대인들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셨던 그 약속을 친히 성취하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유대민족에게 하신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겠다’는 약속이 이제는 교회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하심으로써,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하신 약속을 갱신하신 것이다.
한민족 디아스포라로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청년학생인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가지가 있다면, 우리를 어그러진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된 교회를 세우신 이유일 것이다. 한민족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와지는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한민족 교회의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청년 학생 디아스포라를 통해 이 땅에 진정한 교회를 세우시고, 어두운 이 땅에 빛이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KOSTA/USA-2010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Jul 13, 2010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2009년 KOSTA/USA 집회를 마친 직후, A 형제는 지난 몇년을 다니던 회사로부터 layoff 통보를 받았다.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라는 주제로 열렸던 KOSTA/USA-2009를 통해 깨닫고 확인한 감격이 너무도 컸기에 layoff의 충격 또한 클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비록 지금 우리의 죄로 인해 어그러진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그럴지어다’의 상태, 즉 ‘샬롬’을 회복하실 것임을 이야기했던 집회였다. 더 나아가, 비록 지금 세상은 실직, 질병 등 각종 어려운 일들을 통해 우리를 집어 삼킬 듯 달려들지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으시고 그 육신을 다시 입고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음을 나누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완성인 샬롬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음을 깨달으며 참 많이 울면서 감사했던 A 형제였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 몸을 입고 이 땅에 회복된 하나님나라를 살아갈 수 있기에, 실직이나 질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고 외쳤었다. 하지만, layoff의 통보를 받은 A형제가 기도 가운데 외친 한마디는 ‘하나님, 살려주세요.’였다. 세상의 힘은 여전히 강하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세상의 논리가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 같더라도, 이 세상의 왕은 예수님이시다. 이토록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서도 ‘예수는 왕이시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이다. 유대인들이 인류 역사에서 상상하기 조차 힘든 민족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희망 가운데 감사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시며 왕이시다’라는 <복음>이었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왕이라고 외치는 자들이 늘 있고, 그 힘이 너무도 커 보여 두렵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가 유일한 왕이시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모든 만물의 왕이신 한분 하나님의 백성임을 잘 알았기에, 언젠가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회복될 것임을 믿고 감사할 수 있었다. 그런 힘이 바로 다니엘에 사자굴에서도 꿋꿋할 수있는 이유였으며, 예레미야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이 기쁨의 소식은, 예수님이 오시면서 그 의미가 더욱 확실해졌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 세상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지배력은 너무도 강대해서, 로마의 가이사만이 유일한 왕처럼 보였다. 하지만,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인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셨다. 그것도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강한 힘을 통한 정복이 아닌,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돌아가심으로 이루셨다. 세상의 논리를 뒤짚는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으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진정한 승리를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는 이렇게 외쳤다. “예수는 왕이시다” 초대교회의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외침은, 지금처럼 종교적인 용어가 아니었다. 그 고백은 “가이사가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주인이시다”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외침이었다. 초대교회는 이 고백에 목숨을 바쳤고, 그에 대한 엄청난 댓가를 치루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세상 지배자들의 힘이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왕이신 예수님께서 어그러진 세상을 회복하실 것을 신뢰하고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어그러진 이 세상을 회복시키 시기로 작정하시고, 여전히 딴길로 가는 우리를 믿어 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믿음에 반응하여, 감사함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하나님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만이 왕이 되셔서 어그러진 이 땅을 회복시키실 것임을 선언한다. ‘나’라는 한 개인이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간다는 단순한 고백을 넘어,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회복시키시고 예수님만이 왕이 되신다는 <복음>이 이번 KOSTA/USA-2010을 통해 선포되고, 우리는 그 고백에 내 모든 것을 걸게 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Jul 11, 2009 | 코스타 사역/코스타 보이스
Brueggemann, Walter, Peace (Understanding Biblical Themes), Chalice Press, 2001
기독교의 핵심어를 선택하라고 할 때 ‘평화‘를 제시하는 신학자의 설명을 듣고 싶다면 Brueggemann의 Peace (Understanding Biblical Themes)을 권한다. 그에 따르면 샬롬은 창조의 의도, 질서이며, 하나님과 백성의 언약이며, 메시아의 통치의 핵심이며, 교회의 메세지,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새로움 (newness)이다. 그리고, 샬롬은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세계의 깨어진 관계가 원상태로 회복되는 근본 질서를 핵심적으로 정의하는 단어이다. 성서적인 평화는 인간의 내적인 평안을 넘어 모든 관계에서 화평케 하는 의도적인 과정인 것이다.
평화에 대한 설명은 신약성경에서 다양하게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이땅에 회복되는 것, 평화가목적으로서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과정으로, 수단으로서도, 그리고 목적으로서 의미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평화를 이뤄나가는 과정, 그 자체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고 평화의 태도를 유지해나갈 것을 강조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Shalom Church는 구약의 비젼, 예수님의 평화에 대한 가르침, 구약의 선지자들이 제시하는 비젼을 평화의 방법으로 이땅에 적극적으로 구현해가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비젼을 갖고 산다. 기독교인들의 비젼의 핵심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이 가졌던 샬롬의 비젼, 성경이 증거하는 샬롬의 질서, 그 비젼을 향해 사는 삶 (Living Toward A Vision, 책의 원제목)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하겠다. 그 삶을 결정한 사람들, 그 비젼의 의미를 더 깊이 알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삶의 참된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적극 권한다.
Swartley, Willard, Covenant Of Peace: The Missing Peace In New Testament Theology And Ethics, Wm Edermans, 2006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 윤리에서 평화라는 주제가 그 중요성에 비해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 학문적 주제로서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윤리규범으로서도, 또 그 의미의 깊이와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경시되어왔다. 그러나 이 주제는 4복음서뿐 아니라, 바울의 서신들, 요한의 서신들, 그리고 일반서신들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어오는 성경의 핵심 메시지이다.
복음서와 서신, 계시록 각권을 샬롬 (Shalom)과 에이레네(eirene)라는 관점에서 개괄한 후, 저자는 본격적으로 평화의 신학(Theology Of Peace)의 의미를 탐구한다. 평화의 윤리를 실천한 예수님을 본받는 삶, 그리고 도덕적 기준의 근본으로서 윤리적 의미를 제시한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평화에 대한 메시지에 대한 신약 전체의 통일된 관점에 관심이 있는 경우 책의 전반부를, 근래에 많이 회자되고 있는 평화주의 전통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경우 책의 후반부를 추천한다.
N. T. Wright, Surprised by Hope, 2008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IVP, 2009
Surprise by Hope은 톰 라이트의 하나님의 나라, 부활, 교회의 미션에 대한 설명이자, 새로운 접근이 제시해주는 신약성서의 전체에 대한 의미에 대한 설명이다. 전통적인 입장의 기독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이지만, 좀더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둔 신학적인 논증으로 설득력이 더해진 설명을 제시한다. Part 2의 6장부터 11장은 저자의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설명이고, Part 3의 12장부터 15장은 결론이자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한 함의에 대한 설명이다. 기존의 기독교 변증에 비해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한 기독교에 대한 설명은 역사적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이원론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고, 교회의 역할도 기존의 이원론적인 태도와 활동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미션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개인주의적 구원관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 교회에 대해서 거시적인 전창조질서 차원의 구원을 강조함으로써 전인류적인 교회의 미션을 제시한다.
이런 설명은 그리스도인의 용기의 근거 중 전통적인 신앙의 근거, 즉 삶과 죽음의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 삶의 무의미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한편 책의 내용이 코스타의 핵심가치와 잘 공명하고 있다는 점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코스타가 강조하는 삶의 현장에서의 예배, 신앙의 요체로서의 삶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역사적인, 신학적인 연구로서 그 근거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더 깊이 알수록, 우리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인으로, 통합적으로 살아가야한다는 점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해주며, 목회적으로 방향을 지도해준다.
Dawn, Marva, Powers, Weakness, And The Tabernacling Of God, Wm Edermans, 2001 마르바 던,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 복있는사람, 2008
마르바 던은 성경의 연구를 통해 현실 윤리 문제를 선구적으로 다룬 “예수의 정치학”의 존 하워드 요더의 제자이며, 프랑스의 개혁주의자인 자크 엘룰을 사상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는 이 세상의 권세들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가 약함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교회가 세상의 권세를 십자가와 부활로 이기신 그리스도의 약함의 자리가 될 때 그 약함 위에 하나님의 권세가 내주(tabernacling)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약해 보이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에 비관적인 생각을 하기 쉽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순종할수록 약해보이는 우리들의 모습에 회의와 절망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세상의 질서 속에서 나약한 모습 속에 하나님이 내주하시며 (tabernacling),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진전시키신다는 성경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그런 절망을 버릴 수 있게 한다. 오히려,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약함이 죽음의 표시가 아닌 부활의 예증임을 알고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진리의 약함에 회의를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추천한다.
Stackhouse, John G., Jr., Can God Be Trusted: Faith And The Challenge Of Evil, IVP, 2009
세상의 무질서 속에, 악이 선을 이기는 모습 속에, 선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한 계획,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기 쉽다. 그리고 그 신뢰에 바탕을 둔 용기를 잃기 쉽다. 피조세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부정하는 악(evil)과 고통(suffering)의 존재 앞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세상에 나아갈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용기에 대한 도전을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전지전능하시며,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시며 동시에 악의 승리를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악의 문제 (problem of evil) 또는 신정론 (theodicy)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해답이 주어져왔다. 그러나 그만큼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대한 회의도 제기되어왔다. 이런 생각의 프레임 속에서 대답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저자는 시각을 돌려 ‘하나님이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질문을 ‘예수님이 악을 어떻게 이기셨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직접적으로 신정론에 대해 대답을 하기 보다 악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지 직접 볼 것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은 고통 당하시는 하나님,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며,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악을 이길 하나님의 승리 속에서 현재의 무질서와 악의 승리, 고통에 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가질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