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호] 고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또다른 줄기, 열린 신론(Open Theism)이 주는 도전

고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또다른 줄기, 열린 신론(Open Theism)이 주는 도전

 

90년대 말을 기점으로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복음주의 진영 안에 수년에 걸쳐 뜨거운 감자와도 같이 논의가 되고 있는 신학적인 논쟁을 소개한다. Open Theism, 이른바 열린 신론으로 불리우는 신학적인 주장이다. Facebook에 존재하는 열린 신론을 논의하는 이들의 페이지에 가보면(http://www.facebook.com/group.php?gid=2257680371&v=wall) 다음과 같이 열린 신론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1) God and creatures enjoy mutually-influencing relations
2) the future is partly open and God does not fully know or settle it
3) love is uniquely exemplified by God and is the human ethical imperative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많은 이에게 논쟁의 물꼬를 터준 것은 2번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일상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

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하시고 미래의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인간사의 미래를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 미래의 결과가 결정될 수 있도록 미래의 결과를 아시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주장은, 이제껏 이해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하나님의 성품과는 맞지 않는 새로운 주장이었기에 많은 신학자들의 반론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시카고 트리니티신학교의 D.A. Carson 교수가 쓴 What does God know and When does He know it?이란 책이 대표적일 것이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시각으로 보면 아직까지 열린 신론은 우리가 미처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어쩌면 지나치게 인간적인 각도에서 편의를 따라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않은지 주의와 경계를 띄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전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신학자들의 논쟁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각기 나름의 성경적 밑바탕을 제시하면서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지면에 각각의 주장과 성경적인 예시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양쪽의 주장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인 견해로 이전까지는 그저 막연하게 교리적인 틀에 갇힌 하나님에 대해 암기하는 수준으로 살다가, 이제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저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말할 수 있겠다.

 

여전히 저는 열린 신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지난 311일에 일본 동부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의 피해현장을 지켜 보면서, 하나님은 거대한 재난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고로 죽음에 이르고 고통을 당하는 인간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들이 열린 신론이 말하고 있는 주장들을 깊이 살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 중에 그렉 보이드라는 사람이 쓴 어느 무신론자의 편지라는 책이 있다. 저에게는 복음 전도의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이제는 신학자이면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아들이 29번 동안 서신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마침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감동적인 책이다.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에게 선물할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것이다.

(http://www.yes24.com/24/goods/2142711?scode=032&OzSrank=1)

 

오늘은 그 책에서 한 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무신론자인 아버지가 갖고 있는 질문을 접근하는 아들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

하나님은 왜 지진과 기근을 일어나게 하시는 게냐?

 

그렉에게

 

너와 무슬림 학자와의 토론회가 잘 끝났다니 매우 기쁘구나. 할 수 있으면 테입을 하나 구해 보내주렴. 비디오테입을 보내주면 더 좋겠다. 꼭 보고 싶구나.

 

너의 지난번 편지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아주 여러번 읽어야 했단다. 네가 말하는 것은 내가 가톨릭교회에 다니던 시절에 하나님에 대해 배운 많은 것과 반대되더구나.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견해는 내가 늘 생각해왔던 것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는 성경의 권위자가 전혀 아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미래를 아는 분으로 나와 있지 않느냐? 네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훨씬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단 인정하마. 그 전통적 견해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너의 견해가 그저 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궁금하구나.

 

어쨌든 너는 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하지 않도록 미리 보장할 수 없는지 상당히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에는 자유에 대한 너의 견해로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견해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또다른 심각한 난점이 있다. 어떤 악들은 사람들의 자유스러운 결정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나님이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직접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인데 왜 기근, 지진, 산사태, 에이즈, 기형아 등등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시지? 분명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자유의지에도하나님의 자유의지를 제외하고는 비난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오직 사랑이시라면, 자신의 피조물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꾸나.

 

1989 511

너를 매우 사랑하는 아버지가

++++++++++++++++++++

사랑하는 아버지께

 

지난번 편지에 늦게 답장을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이곳 베델대학에서 학기말을 지내느라 정말로 정신이 없었답니다. 먼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그 다음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악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려 볼께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에 따라 결정하는 미래의 일과 행동에 대해 모르신다는 견해는 저만의 생각이 아니며, 상당히 많은 신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사람들이 내릴 자유로운 결정들에 대해 미리 알지는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들에 의해서건 하나님 자신의 뜻에 의해서건 미래의 어떤 일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리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자유로운 행동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하나님에게도 완전히 공개된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만 공개되어 있는 셈이지요. 심지어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창조에는 감수해야 할 모험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견해가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신학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하기로는 이 견해는 매우 성경적이에요. 세세한 것들을 이야기하여 아버지를 따분하게 해드리지는 않겠지만 저는 성경속에서 하나님이 미래를 어느 정도 개방적인 것으로 여기시면서 사람들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보게 되지요. 미래는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심지어는 새로운 상황들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을 바꾸시기까지 합니다(32:14; 삼상 15:11;  18:7-10; 26:19를 보세요). 하나님이 미리 모든 사건들에 대한 고정된 청사진을 가지고 계셨다면 물론 이런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방적인 견해는 보다 인간적인 것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그것이 보다 성경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더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미래 전체를 알고 통제하는 하나님이라는 견해는 제가 판단하기로는 성경적인 것이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의 산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자연재해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재앙들에 대해 직접 책임이 있다는 의미일까요? 저는 하나님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세가지를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첫째로, 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고통과 고난은 자연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로 인한 결과이며, 심지어 대부분의 자연 재해들로 인해 일어난 고통조차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모습을 유지했더라면 최소화되거나 제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기근에 대해 생각해 보지요.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면 굶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만한 식량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들이 필요한 양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한 이상의 많은 식량을 쌓아놓고 있는 것뿐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인들은 세계 인구의 7%밖에 안되지만 세계 자원의 절반 이상을 소비합니다. 평균적으로 후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덜 소비하는 반면, 선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더 소비한다고 합니다.

 

또 정치적 전쟁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자연적 악이 예방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세요(이디오피아의 비극은 분명 예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군비 경쟁이 없었다면, 세계 자원이 평등하게 분배되었다면, 돈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투자할 만큼 충분히 마음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심지어 방글라데시의 홍수들조차 환경과 복지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저는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중 많은 것이 언제나 자연적인 악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악한 마음들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둘째로, 우리가 이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 모두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보다 못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여러가지 한계와 불완전함이 있어 보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를 받쳐주는 바위는 발끝이 채여 넘어질 정도로 단단하고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우리가 그것을 뚫고 떨어질 정도로 얇아야 하고,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물은 그 안에서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아져야 합니다. 세상은 이처럼 각각의 특성에 의존하여 유지되게끔 되어있기에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존재들이 그 안에서 살 수 있지만 어떤 환경에서는 그러한 긍정적인 특성들이 우리에게 나쁘게 작용합니다. 실로, 어떤 피조물의 긍정적인 특징이 다른 환경에서는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특징이 되는 거지요.

따라서 실재가 지니는 한계들은 실재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것을 본래적인 악으로 간주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저 매사가 그렇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을 뿐이지요. 저는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만물의 제한되고 독특한 특성과도 아주 조화롭게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피조된 세상의 제한적인 특징 때문도 아니고 사람들이 원래 창조된 대로 완벽하게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닌 듯이 보이는 몇몇 자연적 악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요. 예를 들어, 기형아들은 어느 것으로도 설명이 안됩니다. 유신론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제 세번째 사항을 살펴볼께요.

 

아버지! 성경대로라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진 것만은 아닙니다. 우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영적인 존재들은 사실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는 관점으로 보면 말이지요. 이런 생각이 아버지에게는 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라는 것은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셔야 될 거에요.

 

이런 존재들을 성경에서는 천사들 혹은 마귀들이라고 부른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흰옷을 입고 하프를 연주하는 날개 달린 존재나 붉은 뿔이 달리고 쇠스랑을 들고 있는 괴물을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성경에는 그런 바보같은 개념들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답니다. 그들은 또한 정사권세라고도 불리지요. 그 말은 구체적인 실체이기 보다는 영적인 세력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줍니다.

 

어쨌든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 이해는 이러한 실체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이고 자유로우며, 또한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자유를 악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영적 세력들, 굳이 말한다면 마귀들은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선한 것에 대적하는 전쟁 상태에 있으며, 지구는(아마 다른 곳에서도 역시) 그들의 전쟁터입니다. 성경에는 이들의 사랑할 수 있었던 잠재력이 인간의 잠재력을 훨씬 능가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뚜렷한 증거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여 그들이 악을 행할 수 있는 잠재력 역시 훨씬 더 컸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들어 보셨겠지만 사단은 한 때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루시퍼였습니다. 그 말은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희석되지 않은 악입니다. 그는 우주적인 규모의 히틀러입니다! 그의 영향과 또다른 마귀들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견해로 보면, 세상은 외부의 세력에 의해 문자 그대로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는 셈이죠. 오늘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순전한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더이상 창조주만이 유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은 한 편으로는 그처럼 아름답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점차 더 악몽과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선과 악의 충돌 한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란 무관심한 채 내버려 둔다고 해서 그냥 아름다워지지는 않지만 우리가 선한 계획을 좇는 한 악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악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저의 주장은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노르망디작전처럼 사탄의 일제공세를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전쟁터에서는 온갖 종류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요.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은 잠재적인 무기가 되고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희생자가 됩니다. 그래서 전체 우주는 혼란 상태에 빠져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8).

 

저는 이러한 마귀적 세력들이 자연을 어떤 식으로 왜곡시키고 압박하는지를 다 알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 진상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필연적인 한계들 또한 사람들이 악한 의지에 호소함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악은 이와 같은 존재들의 의지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확신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인 셈이지요.

 

아마 이 마지막 주장은 소화하기 다소 어렵다고 생각하셨을 줄로 압니다. 저도 분명 한 때 그런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에게는 성경이 참이라고 생각할만한 무수한 이유들이 있거든요. 하나님과 대적하는 악한 영의 세력만 봐도 오직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자연적 악이 함께 양립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저에게는 또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이 있답니다. 언젠가 아버지의 질문들에 대답할 뿐 아니라 이러한 긍정적인 사항들 역시 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반응을 기대할께요.

 

1989 529

소망을 가지고, 그렉 올림

++++++++++++++++++++

 


[박성호] 어이, 젊은이! 찬송가 좀 부르고 사소!

이코스타 2006년 3월


교역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 거나하게 만나 진중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화요일 아침 교역자회의 시간. 나에게는 일주일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시간이다. 함께 동역하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어린 2세 고등부 전도사님이 진지한 표정과 어투로 내게 질문해 온다.


‘요 즘, 주일 영어고등부 예배에 성가대 가운을 입은 성가대의 찬양시간이 뭔가 어색해서 예배에서 어떻게 순서를 배치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나의 조언을 구하는 눈치이다. 내심 충격적인 말이다. 예배에서 성가대의 위치가 위협을 받는 시대가 드디어 찾아온 것인가?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냐고 물어보는 그의 진지한 질문 앞에서, 말은 안하고 표정을 애써서 잠재우고 있었지만 나의 뇌리에서는 쉴 새 없는 질문의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예배담당 목사라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 착각인데… ‘음, 일단 성가대의 역할이 예배에서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나의 질문에 본인도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였는지 쉽게 답변하지 못하는 우리 전도사님… 성가대의 역할이 축소되고 찬송가가 사라진 예배에 이미 익숙해진 세대와 직접 대면하는 일은 무척이나 생경하다.


그 사이에 나의 생각은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샛별성가대’에서 자줏빛 가운을 입고 솔리스트로 어린이 예배에서 활약하던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양떼들아 양떼들아 바람 타고 들려온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내 주는 반석이시니…’ 목청껏 힘껏 부르며 친구들과 어울리며 교회당을 누비던 어린 시절. 어린이 찬송가는 우리들에게 학교 음악시간에 부르는 동요가 줄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장르였다. 동요보다 조금 더 세련된 듯 한 화성에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 어린 시절 주일학교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런데 어린이 딱지를 떼고 중고등부로 올라가면 이야기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린이 찬송가는 그야말로 ‘초딩’들이나 부르는 동요 수준의 찬송가이지 머리 큰 사람이 동요 찬송가를 부를 수 있나? 드디어 부모님이 끼고 다니시는 바로 그 찬송가가 우리 예배의 주요 찬양 목록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558곡의 통일찬송가를 살펴보면 그 많던 어린이 찬송가의 익숙한 멜로디는 다 사라지고 어린이 관련 찬송가는 달랑 4개. 청년에 관한 주제의 찬송가는 더해서 달랑 2개뿐이다. 그나마 청년 헌신예배 같은 때나 부를 수 있는 그런 찬송이다.


아 직은 경배와 찬양 운동이 활성화되기 전에 교회 중고등부 시절을 보냈던 내게 주일예배 시간의 이러한 찬송가들은 그야말로 어색함 그 자체였다. 이제 어른의 세계에 입문하는 듯 그런 마음으로 찬송가를 배우고 부르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복음성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런 찬양들로 주일예배 이외의 다른 예배모임에서 기타 들고 엄청나게 부르면서 위안을 삼던 그런 시절이었다. 최덕신이라는 이름이 세인에게 알려진 ‘주찬양 1집’ 테이프를 물리도록 들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 래서인지 몰라도 이젠 중고등부를 비롯한 모든 젊은 세대의 예배에서 찬송가의 위치는 그야말로 옹색하기가 그지없다. 우후죽순처럼 밀려든 새로운 찬양들이 이젠 ‘복음성가’라는 이름이 아니라 어엿한 예배음악으로 자리를 잡은 지 이미 오래인지라 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너무나 자연스럽고 호흡하기에 편안한 그런 새 찬양들이 이들의 예배를 가득 채우고 있다. 힐송, 호산나, 패션 등등의 외국의 찬양음악들이 나오기가 무섭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서 음반과 악보로 시장에 등장하고 곧바로 교회의 예배음악에도 진입해 오는 시대이다.


그 래서인가?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오 놀라운 구세주 내 주 예수…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여…’ 같은 찬송가들이 완전히 잊혀지는 일을 예감하는 것은 매우 두렵다. 우리 속담에 있는 말이던가?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일이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본인도 이미 기성세대에 진입하기 시작한다는 그런 징조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우 리가 잘 알다시피, 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558곡의 찬송가에는 수준이 좀 떨어지는 그런 찬송가들도 꽤 있다. 그래서인지 새롭게 준비되는 찬송가에는 대대적인 찬송가의 개편이 있을 거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21세기 찬송가’를 찬송가편찬위원회에서 준비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된 이야기인데 20세기가 훌쩍 지나버린 지금에도 이 새로운 찬송가는 나올 줄을 모른다. 출판에 관한 독점권으로 인한 정치적인 입김이 세서라고는 하는데… 하여간 걱정이다. 어쨌거나 이 찬송가… 그 안에는 1800년대 말의 부흥집회에서 사용된 전형적인 미국식 찬송들도 많지만 교회사의 보석처럼 빛나는 간증과 역사를 가진 그런 고결한 찬양들도 수없이 존재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작사한 시적인 찬양의 가사들과 함께 아름다운 멜로디들로 끝없는 영성의 신선한 자극을 제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찬양들이 있다. 이런 찬양들은 포기하면 안 될 것이다. 모든 새로운 것이 모두 탁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Chris Tomlin이라는 걸출한 예배자가 후렴만 따로 만들어서 편곡한 The Wonderful Cross라는 찬양이 여전히 이 새로운 세대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큰 증거가 아닐까?


The Wonderful Cross (Chris Tomlin 편곡)


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


On which the Prince of Glory died


My richest gain I count but loss


And pour contempt on all my pride


See from his head, his hands, his feet


Sorrow and love flow mingled down


Did ever such love and sorrow meet


Or thorns compose so rich a crown


“O the wonderful cross, O the wonderful cross


Bids me come and die and find that I may truly live


O the wonderful cross, O the wonderful cross

[박성호] 포스트모던 예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코스타 2004년 5월

미 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교회의 예배 흐름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어느날 한 신문 기사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다. 그 기사의 제목은 “젊은층 중심의 미국교회에서 유행하는 포스트모던식 예배.” 포스트모던 이라는 단어와 예배라는 단어가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 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는 대신 관자놀이나 가슴에 손을 갖다대는 중세의 명상적 기도를 한다. 이른바 ‘떠오르는(emerging) 교회’로 불리는 포스트모던 세대의 교회들 일각에서 전통적 방식과는 다른 명상적 형태의 기도와 예배방식이 유행하고 있다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교회들은 비제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기성교회로부터 ‘젊은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는 찬사와 함께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지 금껏 미국 교회가 윌로우 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의 모델을 따라 교회가 주는 구세대적인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80년대 이후 계속해서 추구했던 모델, 그것을 편의상 구도자 중심의 예배(Seeker-sensitive worship)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런 흐름에서 무엇인가 다른 하나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2,30대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겨우 교회에 데리고 간다고 치면 이들에게서 나오는 첫 반응은 ‘교회가 교회처럼 생기지 않았다. 무슨 교회가 마치 월마트 같다’고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세대가 형식화된 교회의 예배와 종교적인 형상들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가지고 극도로 제도화된 것(established religion)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떠오르는 새로운 세대는 오히려 종교적이고, 영적이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교회로부터 기대하고 나아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7,8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세대에 비해 2000년대에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세대들이 영적인 문제, 초현실적인 문제에 관해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갤럽 조사는 이러한 현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2004년 2월25일 크리스찬 투데이에 실렸던 이 기사를 좀 더 인용해 보면 어떤 미국 교회의 예배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의 젊은 교회 ‘블루어’에서 열린 최근 토요예배. 대부분 20,30대인 교우들은 의자와 촛불로 채워진 공간 주위에 둥글게 둘러앉아 있고 한가운데는 존 뮤직 목사(37) 가 드럼세트 곁에서 3명의 음악목회팀과 함께 앉아 예배를 이끈다. 여기저기 각종 파이프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등불 아래의 벽들엔 옛 돌십자가와 석상들을 담은 슬라이드와 비디오 등이 비쳐진다. 탈색한 티셔츠와 블루진 차림에다 무스를 바른 머리 모양의 뮤직 목사는 설교 대신 회중들을 3대의 ‘임시제단’으로 초청한다. 제단 위엔 기도제목을 적은 카드뭉치가 놓여 있다… 이들의 일부는 교단에 소속돼 있고 전통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복음적이지만, 동방정교회나 중세교회, 수도원 등의 고풍을 답습, 중세기도문, 기도 미로, 렉티오 디비나, 고대 성시, 명상문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브라이언 매클러렌 목사(48세, 시 더리지 커뮤니티 처치)는 아메리카의 광대한 젊은층 인구를 겨냥한 선교적 목회를 “모국어와 모국문화를 사용하는 외국선교”에 비유한다.”

이 를테면 기존 극장 스타일에서 밝은 조명과 현란한 무대장치를 곁들여 현대식 록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젊은이 예배 스타일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신에 우리는 촛불과 향내음을 풍기며 고풍스러운 기도문을 청바지 입은 목사와 함께 명상하며 교회의 주위를 돌며 기도에 열중하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세대가 구세대와 어떻게 다른가, 무엇이 이들을 다르게 하는가 묻는다면 쉽지 않은 답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 예를 들자면 구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극복하고 타도해야 할 정치적 인물의 표상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표되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었다면 이 새로운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허황된 패권주의로 똘똘 뭉친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 상징된다고 하는 차이라고나 할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모던주의로 대표되는 모델이라고 한다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포스트모던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차이 정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로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 그리고 록음악과 댄스뮤직에 열광하며 머리에 무스를 바른 젊은이들에서 ‘싸이질’에 열중하며 개인홈페이지 파도타기에 매우 익숙한, 그러면서도 정치인들의 모습을 희화화한 시사합성 갤러리에 들락날락 하면서 낡아빠진 정치를 개탄하는 새로운 젊은이들의 출현을 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 런데 과연 붉은 악마와 함께 ‘대 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의 신화를 이루어낸 이 포스트모던 세대의 모습은 한국 교회 어디에 서 있을까? 이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IT 산업의 활황으로 대단히 발달된 문명의 이기를 즐기는 최고의 IT 강국 대한민국의 N세대들이지만 우리의 예배를 볼 때 아직 포스트모던 예배를 논하는 것은 좀 이른 감이 든다. 미국과 서구의 이 새로운 젊은이들처럼 촛불을 켜고 향내음을 맡으며 오래된 기도문을 따라하며 명상하는 예배를 즐기는 세대의 출현은 아직 우리의 현실에서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최선의 방어책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부활주일 예배,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색다른 시도를 해보았다. 기존의 전통적인 부활주일 성가대 칸타타를 하되 젊은이 중심의 열린 예배 현실에 맞도록 예배를 디자인해서 칸타타 중간에 다양한 차원의 시도를 선보였었다. 이른바 다감각적인 예배(multi-sensory worship)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장면을 성가대가 부르는 사이, 영화 Jesus Film의 한 부분을 편집해서 회중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200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한다. 동시에 음악이 끝날 무렵, 피가 잔뜩 묻은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쓴 예수가 채찍에 맞으며 뒤에서부터 앞으로 십자가를 질질 끌고 나아간다. 살을 에이는 채찍 소리와 함께 회중들은 강렬한 피의 색깔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가슴 아파하는 경험을 한다. 조용한 배경음악과 함께 예수를 군인들에게 넘겨주던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가롯 유다의 처절한 간증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가 들고 있는 오랏줄 하나, 그 줄을 가지고 곧이어 그는 자살하는 비운의 결말을 택하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가롯 유다의 말 한마디에 회중은 동질감을 느끼며 눈물을 적신다. 동시에 새롭게 성가대의 찬양은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뭐 그런 진행으로 예배를 구성해 보았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예배를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그런 예배의 자그마한 효시(曉示)가 되었다.



앞 으로 우리 이민 교회와 한국 교회의 예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며 단순히 듣는 예배에서 다양한 차원의 감각적인 예배로 변해갈 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 밖으로만 나가면 이 새로운 세대들은 이러한 다양한 다감각적인 문화에 너무나도 익숙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도 사실상 냄새 맡는 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플래시를 보면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 한잔을 바라보며 조용한 피아노의 배경음악과 함께 순차적으로 아름다운 시 한줄이 모니터를 가득 채우면서 그와 함께 나지막한 성우의 음성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종합적인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본다. 단순히 종이에 쓰여진 시 한편을 보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 시대를 준비하며 새로운 세대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요한 일서의 말씀은 말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이 외친 세대와도 같이 우리 역시이 말씀대로 우리가 받은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기를 꿈꾸는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박성호] 이승연 파문에서 보는 21세기 영성 관리와 찬양하는 삶

이코스타 2004년 3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이 승연과 네티앙엔터테인먼트의 기획 작품이었던 이른바 위안부 누드 파문이 기획사 본인들에 의해 원본 필름과 동영상이 불태워 지면서 일단 가라앉은 듯 하다. 네티앙엔터테인먼트 측에서 가졌던 지난 몇주 전의 기자회견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일들을 돌이켜 보면 눈앞에서 전쟁이라도 한 판 치루어 졌던 것 같은 느낌이다. 공연히 우리 아픔 많은 할머니들 가슴에만 대못을 박을 일들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론 네티앙 가입 탈퇴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던 네티즌들의 들끓은 반란으로 인해 영문도 모르고 고생도 많이 한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다.


갑자기 자다가 두들기는 봉창소리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를 찬양을 이야기하자 칼럼에 쓰는 이유는?


이 번 이승연 파문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 자신의 내면 세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한가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네티즌이라는 존재를 가볍게 여겼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교훈이고, 다른 한가지는 줏대 없이 이른바 여론의 물결에 휩쓸리다가는 정말 나의 내면 세계에 더 큰 코를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자 본주의와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가 빚어낸 불행한 만남이었던 이번 사건에 대해 나는 조금이라도 옹호하거나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사태가 해결되고 마무리 된 지금, 이 사건을 지켜보는 입장에 있었던 나의 삶을 돌이켜 보니, 거기에는 깊은 공허만 남고 있음을 본다. 왜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왜 공허함만 남는 것일까? 정의를 실현시키고 옳은 일을 행했다고 하는 의협심이 깃드는 것이 아니라 괜한 훔쳐보기와 엿보기를 했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나 는 클릭으로만 정의를 행하고 있었다! 웹 서핑을 즐기며 클릭하면서 보았던 모든 기사들이 나의 정의로움과 연결된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게시판에 올라온 다양한 사람들의 분노와 질책과 야유와 독려를 보면서 나는 잠시라도 깊이 그렇다면 내가 살아가는 나의 삶에는 어떤 일들이 나타나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저 웹 서핑을 즐기고만 있었던 것이다.


인 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나의 삶에 줄어든 결과가 있다면 바로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나는 정보와 지식과 교양과 심지어는 영성마저도 인터넷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고 그 결과는 공허함이었다. 그것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웹 서핑이 왜 책읽기를 대체할 수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나는 이렇게 내렸다. 웹 서핑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자기 기호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클릭 한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단번에 Backspace를 눌러 버린다. 깊이 있는 사고와 되새김질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책읽기에는 깊이 있는 생각과 되새김질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책을 한번 잡았으면 어느 정도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나는 웹 서핑을 하면서 오락 정도로 즐기고 있었지 삶의 깊은 공부와 생각하기는 하고 있지를 못했던 것이다.


내 마음을 관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마음 상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서 생각하는 이른바 큐티일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우리의 영성은? 정답은 오프 라인에 있다.


예 배를 인터넷으로 드리면 안 되는 것일까? 정답은 오프 라인에 있다. 삶의 현장에서 회중과 함께 드리는 예배의 현장성을 경험하고 함께 교제하며 그 안에서 함께 호흡한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예배할 장소가 없는 고립된 곳에 있다든지 하는) 예배와 찬양하는 삶에 관한 한 온라인에서 영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사역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라는 뜻의 논지를 독자들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어 쨌든 중요한 것은 이승연 파문 이 마녀사냥이었던, 공의를 행했던 네티즌들의 운동이었던 간에 이 사건을 멀리서 지켜보는 나의 내면의 삶에는 씁쓸한 오락으로 남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의로운 일을 행할 때는 오프 라인에서 행해야 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