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무엇인가 – 김원기 목사

본 세미나는 김원기 목사가 KOSTA/USA 2002에서 복음 입문을 강의한 내용을 녹취한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도 살펴보고 개인적으로 복음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내 삶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 간증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Gospel이 헬라어에서 나왔는데,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소식이 나에게 어떤 상관이 있는가? What does Gospel mean to me? 아무리 좋은 사상, 이론이라고 해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복음은 십자가의 도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The message of Cross입니다. 1세기에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요즘 우리에게는 electric chair라고 할 수 있어요. 사형 집행 도구입니다. 아주 극악한 범죄를 한 사람, 특히 국가에 위협을 가져왔던 사람들에게 다시는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공포심을 일으키는 사형입니다.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죽기까지 사흘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저렇게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데, 그리고 부활을 했다는데, 교회에서 그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 message of cross 그것이 인류의 혁명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의 영향이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어요. 어떤 종교가 시작되었는데, 그 교주가 법을 어겨서 전기 의자에서 죽었습니다. 혹은 가스실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범죄자가 죽었는데 거기에 어떤 파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같이 다니던 사람이 그 메시지를 막 전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세상에 존경할 사람이 없어서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존경해야 하느냐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교주가 죽었는데, electric chair에서 죽었는데, 그것을 찬양하고 electric chair를 그려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보면 십자가에 대한 메시지 때문에 사람들이 두 가지 부류로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한쪽에서는 그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다 이렇게 말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에 대한 메시지를 들을 때 한쪽은 그런 미련한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관 중에 하나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의지가 없으니, 의지가 약하고 자기 혼자 인생을 개척하기 힘든 사람이 무언가 의지하고 싶으니까 교회에 다니면서 신을 의지한다 이런 것이죠. 들어가서 보면 별게 없다는 거에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부활했다, 그리고 창조했다 뭐 이런 것이고요. 교양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들은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느냐. 종교는 마약이다, 무식한 사람들이 먹고 한번 마약에 중독되면 계속 먹어야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 대한 영향력을 체험한 사람들,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십자가 사건에 수제자인 베드로도 새벽이 오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다음에 사도행전 처음에 나오는 베드로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있습니다. 다시는 예수에 대해서 말하면 십자가에 대해서 전하면 너를 죽이겠다는 협박 앞에서 그는 나는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배신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가 죽었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순교하는 사람으로 변했냐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종교는 교리가 아니고, 이론이 아니고, 신학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선하게 살면 갈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하면 갈 수 있지 않으냐, 고행을 하면 갈 수 있지 않느냐, 내가 나를 벗어나면 갈 수 있지 않느냐 이렇게 접근을 합니다.


전기에 대한 비유를 들어보면 전기 이론을 공부한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전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기등을 설명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론은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이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들어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제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어떤 사람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전기가 뭔지 몰라요. 설명을 합니다. 전기라는 것이 있는데, 전구를 끼고 스위치를 켜면 불이 들어온다고 말하면 수긍을 안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이 power of God 그런 것이죠.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사실 그렇죠. 가장 쉽게 말씀 드리면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의 그룹을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율법주의자였어요.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이라는 사람 밑에서 공부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살다 보니 갑자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말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인 거 전혀 쓸모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런 알아 들을 수 이야기나 하니까 뭐 모르는 사람들, 여자들, 어린이들 따라 다니는 겁니다. 사울이 보기에 이것은 사회를 좋지 않는 쪽으로 끌고 가는 독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죠. 교회를 없애는 것에 헌신하니까 다메섹이라고 하는 도시에 가서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올라가다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그 신앙을 자신이 소유하면서 자기가 핍박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갖고 추종자가 되니까 그 사람의 친구들이 얼마나 눈꼴 사납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야기 할 수 있고 제가 잠깐 소개는 하겠지만, 복음의 핵심은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탄생할 때도 천사들이 전한 메시지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말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데, 그것을 만졌고 느꼈고 체험했고 그것을 증거할 수 있다.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체험했습니다. 복음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personality입니다. 그분하고 내가 만나는 거에요, 그 만남을 통해서 reality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1954년 제가 태어나기 전에는 김원기라고 하는 person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난 다음 죽기까지 김원기라는 인격이 존재합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는 제 인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거듭난다라는 말을 써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질문 했는데,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문이 막히는 거에요, 거듭나다니, 당시에 공부를 많이 한 니고데모라는 분인데, 이해하기 힘든 거에요.


나1976년 8월 13일, 저는 기억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김원기는 옛사람입니다. 이후의 김원기는 그전의 내가 아니에요. 내가 태어나자 마자 울자마자 처음 본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이었겠죠. 인격을 가진 어머니를 만났어요. 제가 거듭난 후에는 인격을 가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 있어요? 어머니가 없으면 제가 없겠죠. 그런데 제가 거듭났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믿지 못해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을 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셨죠. 성령이 하시는 일도 그렇다. 성령이 지나고 나면 성령의 바람이 분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네가 어떻게 그것을 믿냐, 하나님을 보았냐, 그러나 세상에서 보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와요.


목사들은 말만 하면 하나님 만났다고 하더라. 그것이 사실이냐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알고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압니다. 마치 그렇게 비겁했던 제자들이 목숨 걸고 순교했던 것처럼,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건 아니건 something happened 이건 인정할 수 있겠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기쁜 소식이냐? 복음이라고 하느냐? 그전에는 나쁜 소식이 있었다는 거지요. 우리는 범죄했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나누는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다리가 없습니다.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거리입니다. 골짜기가 우리의 죄악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아서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배드뉴스라는 것입니다.


굿뉴스는 뭐냐. 내가 범죄 했고 그 범죄의 대가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죽고 난 후에 영원한 멸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값입니다. 내가 살인을 하는데 한명을 죽였던 열명을 죽였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니님이 보실 때 나를 구원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구원하려면 나를 대신해서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 생명을 바칠 사람이 의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의인이 있으면 대신 죽어줄 수 있는데 그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 누군가 속죄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을 찾아보아도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죄짓지 않은 사람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되어 있던 식민지 총독도 그랬습니다. 왜 너희들이 이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구속하시고 나를 속량하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redeem,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신문, 잡지 이런 거 보면 쿠폰이 있죠. 갖고 상품 살 수 있습니다. redeem한다고 하죠? 그거 가져가면 돈 깎아줍니다. 그걸 할 때 redeem,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죽으시고 우리들에게 쿠폰을 준 것입니다. 그 쿠폰에 영생, 죄사함 이렇게 써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시고 나에게 그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예수님이 주신 영생을 하나님께 드리면 redemption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구원 salvation, 영생 eternal life, 죄사함 forgiveness of sin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이고, 기독교에서 가장 어리석은 소리, 그러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쿠폰을 받으면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쿠폰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속량해주마, 구원을 주마, 죄사함을 주마 이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펄쩍 뛰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려면 순서대로 해야지, 착한 사람에게 먼저 영생을 주고 상을 많이 줘야지,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벌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죠. 기독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저꼴이 아니냐고 그렇게 비난을 합니다. 조금 지각이 있는 사람이 교회를 보면 비난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너무 당연해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당연합니다.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고 복 받는다 이렇게 가르쳐야지 이렇게 말하는 거지요. 쿠폰을 바꾸는 과정을 믿는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뭘 믿는다는 거에요? 나는 쿠폰에 적혀있는 대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애들을 갖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애들 키우면서 보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아요. 여기 있는 형제는 아주 못됐다고 합시다 근데 제 아들이에요, 그리고 옆에 있는 자매님은 아주 착하다고 합니다. 비하면 30배는 더 착해요. 그런데 둘다 문제를 저질렀어요. 누구에게 더 관대할 것 같아요. 제 아들에게 입니다. 자식하고 사이가 좀 안 좋잖아요? 누가 더 잘 것 같습니까? 아버지가 더 잘못 잡니다. 자식을 야단친 게 더 속상합니다. 너희들이 잘 살아서 오면 내가 주는 게 아니고 너는 내 자식이기 때문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는 순간 뭔가 신비로운 것이 발생합니다. 이론이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체험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하나 더 봅시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람들이 말하는 말 중에 어디를 가든 꼭대기만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똑 같은 산을 오른다는 가정이 있지요. 만약 다른 산을 오르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정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복음이 유일한 길이냐 이런 논쟁을 할 수 있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체험한 것을 증거할 때는 내가 아는 것을 말할 수 있겠죠. 다른 종교에는 그 종교가 추구하는 결론에 다다를 수는 있겠죠. 그런데 제가 아는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지는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굉장히 중요한 바울의 고백 이에요.


저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외가는 불교를 열심히 믿었고 아버지는 무신론자셨어요. 내가 중학교 시험을 칠 때, 당시 불교에서 제일 유명한 성철스님이란 분을 찾아가서 절을 3만번도 하시고 그랬어요. 나이가 들면서 종교 생활이 없어졌죠. 중학교 2학년 중간에 여러 가지 이유로,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인생의 밑바닥에 빠져버렸습니다. 마치 열차가 고속도로 달리다가 부딪혀서 산산조각 난 것처럼, 그런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어요. 아마 그 당시에 갑자기 우울증이 심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냥 삶이 무너져버렸어요. 빛 가운데 있다가 아주 삭막한 어둠 속에 들어간 것처럼.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심각하게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학교 생활 잘 했었지만, 완전히 그만 두었고, 술독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학교에는 형식적으로 가고 학교 끝나면 곧장 술집으로 가는 게 삶이었습니다. 술 마시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더 심해지니까, 점점 방황이 심해지는 것이지요. 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삶이 깊은 염세주의로 빠져들게 되었어요. 사춘기의 방황보다 훨씬 심하게. 내가 누구냐, 나는 어디서 왔나,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런 문제죠. 일반적인 사춘기에 하는 고민이 아니라 완전히 염세주의에 빠져서 술 마시고 약도 손을 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왔는데요. 그때 미국은 한참 반전운동이 많고 히피가 많았는데, 제가 그냥 자연스럽게 히피가 되 버렸어요. 히피가 생각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고민과 아주 비슷했거든요. 히피라는 게 전쟁 이후에 배부르다 보니까 나온 갈등들이었지요. 부유하게 살던 젊은이들이 정신적인 방황을 하는 거지요. 세월이 갈수록 방황이 더 커지는 거지요. 마약을 하면서. 아무리 생각을 할수록 대답이 안됩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책도 그런 것만 보고 결국 세월이 갈수록 나는 자살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언제 하느냐 이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대학교 3,4년 때 그렇게 생각했죠. 어느 날인가 나는 자살하고 죽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보다 1년 먼저 신앙생활을 하던 동생이 나에게 찾아와서 전도를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내 삶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는데, 이번에 내가 부서지는데 이때는 좋은 부서짐이었어요. 나를 뒤집어 싸고 있었던 껍질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염세주의에 빠져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것은 좋은 부서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빛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었어요. 조그만 성경 공부 시간이었는데, 성경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설교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도 안 나요. 다만 어떤 예화였고 지금 생각하면 그 예화는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것인 것, 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느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제 마음 속에 아주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원기야 너를 위해서 내가 죽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너를 위해서다.’ 이런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 정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요 이런 마음이 들며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이때 한 5분 사이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한 8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문제가 해결되어버렸어요. 어둠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이 흐르는데 주체할 수가 없어요. 내가 얼마나 소중하면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내가 어디서 왔나, 어디로 가나,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이제는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위해서 산다. 1976년 8월 13일 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러나 저는 알지요. 제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지요. 주위에 보는 사람들이 다 내가 변했다고 하지요. 체험한 것이 뭐요 하면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요. 내 마음 속에 있지요.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요. 어떻게 아나요, 제 마음에 알지요.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요. 내가 목사이지만 교인들을 위해서 죽을 자신은 사실 없지요. 그러나 내 자식을 위해서 죽을 자신은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내 마음 속에 있지요.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느냐, 영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영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세요.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눈으로 봐야만 실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한 번도 바람을 보지 않지만 바람을 부인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영혼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붙잡고 바울을 붙잡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복음이 뭔가요. It’s the power of God.


내가 알기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기 위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가 부모 밑에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었어요. 내 자식이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에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redemption coupon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는 선물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정리해서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나쁜 소식이 있었어요.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Eternal condemnation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 생명이 멸망에서 생명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다음 질문은 Did you receive it? 생각 중에 있습니다. 아직은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영생이 있다, 아들이 없는 사람은 영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하나님을 만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감사합니다. 참석한 형제 자매들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접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찾아가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명수] 사형제도와 기독교인

복음과 법


사형제도와 기독교인


여야의원 155명이 사형폐지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형제 존폐 논쟁이 다시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존폐론자들이 주장하는 논거가 모두 일리가 있어 법조계 만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도 그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다. 사형폐지운동을 벌이는 사람들 중에는 특히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모두 사형폐지에 찬성하는 것처럼 보여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사형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법학자 중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형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형제도 존폐론에 관한 논쟁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사형존폐에 관한 이유들은 무엇인가. 이에 가세하여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다수의 종교인들도 저마다의 종교적 교리를 내세우며 사형제도의 존폐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사형제도에 관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의 논거를 살펴보고 사형제도 존폐에 관한 결론은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자 한다.


사형제도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형벌이다. 현재 각국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사형제도를 두고 있는 나라가 더 많다. 각국의 현황을 살펴 보도록 하자. 유럽은 35개국 중 27개국 정도가 사형제도를 폐지하였다. 이에는 영국, 독일, 오스르리아등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는 사형제도를 폐지한 주는 약 14개 주에 이르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의 경우는 호주, 뉴질랜드 등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형제도를 두고 있다. 이스라엘은 사형제도가 있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사형이 집행되는 예는 거의 없다. 사형집행 방법으로는 총살, 참살, 전기살, 교살 등의 방법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일반인에 대해서는 교살의 방법을 택하고 있다.


18세기에 접어 들면서, 사형집행 방법의 잔혹성, 오판 가능성 등을 이유로 사형폐지론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베까리아인데 그는 ‘범죄와 형벌’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사형제도는 법률적으로나 효과적으로도 불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후 이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는데, 사형폐지론자들의 중요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사형은 야만적이고 잔혹하므로 인도주의의 견지에서 허용할 수 없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므로 사형제도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악이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여 그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 없는 국가가 이러한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 사형집행이 오판의 결과로 기인한다면 영구히 구제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형은 일반사회인이 기대하는 것처럼 위협적인 효과를 가지지 못한다. 사형은 형벌의 주된 기능인 교육 및 개선기능을 전혀 갖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사형 존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거를 보면, 대개 사형제도가 가지는 위하력, 즉 범죄예방 효과로서의 범죄억제력을 강조한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그 자신의 생명도 박탈 당할 수 있다는 것은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법적 확신이다. “흉악범 등 중대범죄에 대해서 사형으로 위하하지 않으면 흉악범을 예방할 수 없다” 등이 사형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거들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사형제도 존폐에 관한 논거들은 무엇인가. 물론 기독교인들 모두 성경을 인용하여 어떤 사람들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사형존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명은 생명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것이 성경의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형벌권을 국가에 위임하였으므로 사형제도는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또 실제도 성경 어느 곳을 보더라도 사형제도를 폐지하라는 말씀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사형제도는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에 의하면 구약성경에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으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악을 제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 법을 어긴 자들을 반드시 죽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형폐지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존치론자들을 향해 구약성경에 따른다면 안식일을 어긴 자, 부모을 공경하지 않는 자, 간음한 자를 죽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런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지 않는 가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사형폐지론자들은 구약의 율법에서 그 논거를 찾는 대신 예수님의 정신에서 찾는다. 율법이 법을 어긴 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이유는 악을 없이 하고자 함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죄악을 제하는 길을 여셨다. 이제는 인간의 죄악이 그에 대한 응보형으로 제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제하여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존치론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는 그 근거를 잃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들이건 비기독교인들이건 우리나라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하여야 하는 가에 대하여 그들 간에 논쟁이 어느 때보다 뜨거워질 전망이다. 여러분은 사형 존치론자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사형 폐지론자들 편에 서 있는가?


[주명수] 상담과 법률

복음과 법


상담과 법률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상담한다. 그 내담자들 중에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내담자들을 상대로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그 내담자들이 자살 등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하였을 경우, 교회와 목회자들은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국에서는 이미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례를 중심으로 상담에 얽힌 법률 문제들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사례는 이렇다. 1970년 초에 UCLA에 다니던 넬리(Nally)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원래 천주고 신자였는데 기독교로 개종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맥아더 목사님이 시무하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교회 대학생부에도 참여하였으며 그 교회 부목사로부터 제자 훈련을 받기도 하였고 상담을 받기도 하였다. 그 부목사님은 넬리가 가끔 삶의 부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1978년 후반 넬리는 그의 여자 친구와 교제를 끊은 후 더욱 의기소침해졌고 또 다른 부목사와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 목사님은 넬리에게 자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넬리는 1979년 3월경 엘라빌이라는 약을 과도하게 복용하여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목숨은 건지게 되었고 퇴원 후 다시 담임 목사인 존 맥아더 목사와 상담을 하였으며 그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담임 목사는 넬리로 하여금 정신과 치료를 받아 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았다. 넬리는 다시 부목사와 상담을 하면서 자살하는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 부목사는 그리스도인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빙자한 자살은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후 넬리는 그의 새로운 여자 친구에게 결혼하자고 하였으나 거절 당한 후 자기 친구의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였다. 넬리의 부모는 그의 아들이 다녔던 그레이스 교회와 그 교회 목사 4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소장에서 성직자들이 그들의 아들이 자살하는 것을 방지해야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긴 과오로 말미암아 그 아들이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대해 손해를 배상하라고 하였다. 이 사건이 소위 캘리포니아 법정을 10여년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유명한 넬리 대(對) 그레이스 커뮤니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목회 상담자들의 역할·의무·한계 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케 하는 사건이었다.


전문가들이 그들의 전문적 지식을 사용함에 있어 과오를 저지른 경우 그 전문가들의 과오를 소위 전문직 과오(malpractice)라고 한다. 예컨데, 의사들이 과오로 환자를 오진하여 손해를 입혔을 경우라든지, 또는 변호사들이 소송을 잘못 진행하여 손해를 끼쳤을 경우가 바로 전형적인 전문직 과오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상담 전문가들도 미국의 경우 국가로부터 상담 전문 자격을 받기 때문에 상담가들이 상담을 잘못하였을 경우에도 바로 이 전문직 과오(malpractice)에 해당된다. 넬리의 가족이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목회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주장하였던 법 이론이 바로 이 전문직 과오였다. 즉, 넬리의 가족은 상담자를 선출하고 훈련하는데 있어서 교회가 과실을 범하였으며 나아가 교회 상담자들은 자기 아들인 넬리로 하여금 더 전문가적 보호를 받으라고 격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의 종교적 교리 교육이 넬리의 천주교적 양육을 무시하였고, 넬리의 선재하는 죄의식, 염려 그리고 우울증을 악화시켰으며, 넬리에게 자살을 한다 하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넣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에서 주요한 쟁점은 “내담자인 넬리로 하여금 자살을 피하도록 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과연 교회에게 있는가”였다. 만약 교회에게 그런 법적인 의무가 있다면 그런 법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과실에 대해 책임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그런 법적인 의무가 없다고 하면 윤리적인 책임은 별론으로 하고 법적 책임은 면한다 할 것이다. 법원은 어떻게 판결을 하였는가? 1심 판결은 교회의 편을 들어주며 교회에는 그런 법적인 의무가 존재치 아니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넬리 가족이 항소를 제기하였고 2심에서도 같은 쟁점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2심에서는 원고인 넬리 부모의 편을 들어주며 교회에 법적인 의무가 있고 교회는 그 의무를 다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항소 법원은 교회에 법적주의 의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넬리의 교회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심리적 의존도는 전문 상담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교회내 비전문 상담가에게도 인정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교회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대법원은 다시 교회의 편을 들어 주며 교회에는 책임이 없다고 항소심 판결을 뒤엎었다. 즉 교회 내 비전문 상담자와 그의 내담자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교회 내에서의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는 비상업적이고, 보호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자발적 성질의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 판결로 교회는 상담자 과오에 대한 짐을 덜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교회의 편을 들어주며 자살 위험성이 있는 교인들을 평가하여 병원에 가도록 하여야 할 법적 의무를 목회 상담자들에게 부여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독교 상담 사역을 보호하여 주었다. 대법원은 만약 교회에 그런 법적 의무를 부여한다면 목회 상담자는 자살할 위험성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사역을 하기보다는 소송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역을 기피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소수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그레이스 교회는 넬리에게 법적인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소수 의견도 경청하여야만 한다. 이유는 그 교회가 자기 자신들을 우울증과 자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유능한 전문가라고 넬리에게 소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자신들의 능력을 과장하여 넬리로 하여금 믿게 만들었다면 교회도 법적인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10여년의 송사 끝에 결국 교회의 승소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교회는 많은 고통을 감수하여야 했다. 이 사건은 또한 교회로 하여금 배워야 할 많은 교훈을 남겨 주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그레이스 교회는 스스로를 과대하여 자신들이 정신 심리를 다루는데 있어 유능하다고 광고를 하였다. 이것이 잘못이었다. 교회는 자신들의 능력을 솔직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떤 간질병 환자가 어느 교회를 찾아 갔다. 그는 간질병이 너무 심하여 가족들조차도 이제는 지쳐 관심을 갖지 않는 환자였다. 이 환자의 가족은 그를 교회로 안내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를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만 개척 교회로 안내를 하였다. 그 교회의 목사 부부는 그를 환영하였고 열심히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를 교회에 기거하게 하면서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때로는 잠을 자지 못하면서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목사 부부만 그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다 시시때때로 온 교인이 그 환자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목사 부부 뿐만이 아니라 교인들도 이제는 그로 인해 지치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 상황에 이르도록 교회에 속한 누구도 치료를 위해 그 환자를 전문 기관에 보내라는 말을 한 사실이 없었다. 오직 기도로 이 환자를 고칠 수 있다고 온 교인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새벽 그 환자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그 개척 교회의 목사는 그를 가볍게 때리면서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 날 그 환자는 죽고 말았다. 그런데 사체 부검 결과 직접 사인은 외부의 충격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그 목사는 구속이 되었고 법의 심판을 받았다. 선한 일을 하다 구속까지 된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상담하는 도중 왜 그 환자를 전문 기관으로 보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 때는 우리가 어리석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예수님조차도 베데스타 연못가에 있는 많은 병자들 가운데 오직 38년된 병자만을 고치셨다. 그것도 그 치유라는 행동을 통해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치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교회나 교회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주명수] 주 5일 근무제와 교회

복음과 법


주 5일 근무제와 교회


정부가 주 5일 근무제 시행을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다. 믿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 문제는 예외가 아니다. 최근 한국기독교 총연합회는 공식적으로 주 5일 근무제에 대한 반대입장을 표명하였다. 물론 한기총의 공식적 견해라 하더라도 이것이 한국 교회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교회 일각에서는 한기총의 의견을 반대하는 소리도 높다. 이런 문제에 대한 공식적 의견을 발표하려면 한국 교회의 의견들을 다각도로 수렴해 보았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한기총이 주 5일 근무제에 반대하는 근거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이것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고, 주 5일 근무제의 시행이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주 5일 근무제를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이것을 이용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한번 살펴 보도록 하자.


한기총이 주 5일 근무제를 반대하는 이유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주 5일 근무제가 10계명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 중에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이레되는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에 의하여 주 5일 근무제는 엿새 동안 일하라는 계명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신앙인들에게까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차라리 제4계명인 안식일 명령보다는 창세기에 나오는 노동명령을 이곳에 적용하였더라면 더 설득력이 있지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제4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지 엿새 동안은 반드시 노동을 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인간에게 노동명령을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인 주일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노동하여야 한다. 왜 주 5일만 노동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설득하였으면 – 사실 이것도 그리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 더 좋았을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는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면 향락산업을 부추기고 소비성향을 크게 자극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에 부가하여 산업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한 후 단기간 동안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만간 이 제도가 정착이 되면 지금보다 크게 향락산업이 기승을 부릴 것 같지는 않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이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지 않더라도 어차피 향락산업은 발전될 수 밖에 없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이 되고 기존의 공휴일도 쉬게 되면 쉬는 날이 너무 많아 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것 같다는 견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점은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면서 기존의 공휴일 제도를 개선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연휴의 기분이 월요일까지도 계속이 되고 결국 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주 5일 근무제로 인하여 오히려 산업 경쟁력이 강화될 것이라는 연구조사 보고도 있다. 이와 같은 이유도 그렇게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와 관련이 있는 이유로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는데 주 5일 근무제가 시행이 되면 교회에 신도수가 줄어들 것이고 신앙을 갖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가장 설득력이 있고 경청하여야 할 주장 같아 보인다. 특히 교회 안의 젊은 부부들은 토요일을 이용하여 양일 간 멀리 휴가를 떠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주일예배를 걸르게 될 경우가 많을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휴가를 가느라 교회에 갈 정신이 없을 것이므로 전도가 잘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가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더라도 그 제도로 인하여 사람들이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일을 게을리하게 된다면 결코 그것은 바람직한 제도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제도가 영적인 가치를 더욱 증진시키 위해 존재하여야지 영적 가치를 오히려 퇴보시키는 제도라면 결코 그 제도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도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라면 주 5일 근무 할 때건 주 6일 근무할 때건 예배를 걸르는 일은 없을 것이고, 신앙이 약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편의에 따라 주 5일 근무할 때건 주 6일 근무할 때건 예배를 걸르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 5일 근무를 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유익된 점이 있고, 그 유익한 점이 위와 같은 우려를 능가한다면 굳이 교회가 주 5일 근무제를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유익된 점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하여 보자. 공무원 시험등 각종 시험을 이제는 토요일에 치르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이제 우리는 주일시험 반대운동을 펼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주일날 시험을 치른다는 이유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험을 거부하는 고통을 안고 산다. 또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 온종일 교회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니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적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는 토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고 주일날 교회에서 헌신할 수 있다는 점도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교회에서 특별집회를 열 경우 평일날 집회를 하기 때문에 낮에 일터에 나가는 사람들은 낮집회에 참석할 수도 없었는데 토요일을 휴일로 하면 이제 금요일 저녁, 토요일 온종일, 주일 온종일 특별집회를 열 수 있을 것이고 이 경우 직장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핑계도 없어질 것이다. 이 점도 유익이 될 수 있다. 주 5일 근무제의 시행은 이제 대세인 것 같다.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장점을 잘 살펴서 긍정적으로 성도들을, 나아가 국민들을 계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명수]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행동 한계

복음과 법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행동 한계


대법원은 지난 7월 13일 시민 단체 등의 공익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의 한계를 정하는 판결(98다51091)을 하나 내렸다. 그 판결 요지는 시민 단체 등의 공익목적수행을 위한 활동은 바람직하고 장려되어야 할 것이나 그러한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이라 하더라도 법령에 의한 제한이나 그러한 활동의 자유에 내재하는 제한을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판결은 곧 비록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시민 단체등의 활동에는 일정한 제한이 있다는 내용인 것이다. 지난 1996년 10월 당시 미국인 팝 가수 마이클 잭슨이 내한하여 공연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를 반대하던 시민 단체가 내한 공연을 개최한 공연 기획사와 공연입장권 판매 계약을 맺은 은행들에 대해 공연 협력을 중지하지 않으면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대법원은 이 시민 운동을 입장권 판매 대행 계약과 관련한 공연 기획사(원고)의 채권등을 침해한 것으로 위법하며 그 목적에 공공성이 있다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시민 단체들의 활동을 약간 살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마이클 잭슨의 내한 공연을 반대하던 시민 단체들은 위 공연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다수의 시민 단체 회원을 동원하여 문화 체육부 장관실, 문화 체육부 공연 예술과, 한국 관광공사 사장실 및 업계 지원부 국장실, 서울방송 문화 사업부 등을 상대로 위 공연 개최에 대한 항의 전화 걸기를 하고, 주식회사 금강기획과 현대그룹 본사 앞으로 위 회사가 공연 기획사와 위 공연에 공동 주관사로 참여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에 항의하여 위 공연에 대한 후원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면 위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문화 체육부는 조건을 붙여 공연을 허가하였고 시민 단체들은 계속하여 공연 허가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위 공연의 중계가 예상되는 방송사에 대해 항의하고 시청 거부 운동을 벌이겠다는 취지의 서한을 보냈으며, 위와 같이 입장권 판매 대행 계약을 체결한 은행들에 대해 입장권 판매를 즉각 취하할 것을 요청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장권 판매를 계속할 경우 전 국민 차원에서 은행의 전 상품 불매 운동에 들어갈 것이라는 서한을 은행 측에 보냈다. 이와 같은 시민 단체들의 서한을 받은 은행 측에서는 입장권 판매 대행 계약을 취소하였고 공연 기획사는 임시 직원을 직접 고용하는 등으로 입장권을 판매함으로써 공연은 예정 대로 개최되었다. 그리고 공연 이후 기획사는 시민 단체의 위와 같은 행위로 손해를 보았다며 소송을 제기하였다.


원래 이 사건에 대하여 고등법원은 원고 패소의 판결을 내려 시민 단체의 그러한 운동이 위법성을 띠지 않았다고 판결하였다. 즉, 시민 단체들의 이와 같은 행위는 통상 시민 단체가 취할 수 있는 전형적인 운동 방법의 하나로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불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그러한 행위로 인하여 위 각 은행의 의사 결정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침해 당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일반적으로 허용될 수 있으며, 이는 시민 단체의 행위 범위 안에 속하거나 적어도 상대방의 수인 범위 안에 속하므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고등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위 각 은행이 공연 기획사와의 계약을 취소하기로 한 것은 시민 단체들이 보낸 서한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내린 결정이었다기 보다는 독자적인 영업 판단에 따라 선택했다는 것에 근거한다. 즉, 스스로 입장권 판매 대행에 의한 이익과 시민 단체의 불매 운동으로 인한 영업 손실을 비교 교량하여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이를 뒤엎고 위 각 은행이 독자적으로 영업적 판단을 한 것인지 시민 단체로부터 서한을 받고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한 것인지 심리를 더 하라며 고동법원으로 돌려 보낸 것이다. 대법원 판결의 취지는 위 각 은행이 시민 단체가 보낸 서한에 따라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내렸다면 시민 단체의 행위는 위법하다는 판단이다. 생각컨대, 대법원은 각 은행이 시민 단체로부터 불매 운동을 할 것이라는 서한을 받은 후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것 같다. 위 각 은행들이 불가피하게 취소 결정을 내렸건 자발적으로 내렸던 간에,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공익을 위한 것이라도 시민 단체의 행동에서 위법성이 인정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판결로 말미암아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활동도 상당히 위축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통상 시민 단체들의 공익적 행동은 불매 운동, 시청 거부 운동, 항의 서한 발송, 항의 전화걸기, 항의 이메일 보내기 등 비폭력, 불복종의 방법으로 전개되는 것이 보통이고 이와 같은 행위는 일반적으로 위법하지 않은 행동으로 용인되어 왔다. 기독교인들도 이 정도의 행동은 불의에 대해 항의하는 최소한의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판시한 바와 같이 위와 같은 행동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위법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시민 단체등의 공익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면 건전한 공익 목적 수행의 운동이 위축될 수 밖에는 없다. 하지만 근래에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는 건전한 시민 단체들의 공익 활동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시민 단체들의 활동이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자 악한 의도를 가지고 건전치 못한 시민 단체를 만들어 선량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런 경우까지 그들의 활동을 보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건전한 시민 단체로 보편적으로 평가받은 단체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법적인 보장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번 판결로 인해 건전한 시민 단체들의 공익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들이 크게 위축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더구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사회 참여의 방법으로 시민 단체에 참여하여 공익적 활동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이 판결을 주의 깊게 숙지하여 공익적 활동을 하면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지 아니 하도록 지혜롭게 행동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