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24, 2007 | 교회와 공동체/미주지역 학생사역
이코스타 2007년 6월
A는 한국에서 고등학교 때 성당에 다니면서 막연히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힘든 유학생활 중에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요즘들어 가요대신 찬양 CD를 귀에 꽂고 다니며 찬양하기도 하고, 길을 걸으면서는 하나님과 대화하며, 말씀이 자꾸 읽고 싶어져 성경책을 책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닌다고 하면서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니 너무 좋다고 인도자인 내가 좋아하는(?) 말만 골라하는 것이었다. 성경공부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도 큐티지의 말씀을 읽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불쑥 전화를 해서 이 말씀은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며 설명을 해달라고 하곤 했다. 그러면서 다음 주에 할 큐티지는 언제 나오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던 A가 박사학위를 위해 지원했던 학교가 되지 않아 속상해하더니 진로가 막히는 것 같다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를 안 도와주시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슬슬 성경공부에 나오는 횟수가 줄어들게 되더니 얼마 안되서 들려오는 소문은 어느 형제와 사귀기 시작했다며 요즘 연애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A가 미국에서의 醍?것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갈 때까지 A를 다시 볼 일이 많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도 A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긴 얘기는 하지 않았다. A의 신앙이 한참 성장하는 순간에 만나서 함께 나누고 기뻐하였던 때가 아스라이 느껴지면서 마음 한 구석이 참 많이 아파왔다.
B는 이미 교회에서 지도자로 섬기는 자매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매우 신실하고 늘 말씀과 기도로 사는 것 같았다. 단지 조금 유별나게 보였던 것은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아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좀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나이 또래 사람들이 결혼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를 가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B는 종종 결혼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면서 키크고 잘생긴 형제가 이상형이라고 말하곤 했다.
B를 알고 지낸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밤에 B가 불쑥 나에게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맥주 한 팩이 들려있었다. 나는 그동안 전혀 B가 술을 마시는 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놀랐다. 아무말 없이 혼자 맥주를 마신 B는 갑자기 나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더니 지난 몇년간 아무도 모르게 사귄 남자친구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모든 스토리를 적으면 소설 한편이 나올 정도로 기가 막힌 이야기를 다 털어놓더니 B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왜 내가 이렇게 될 줄 아셨으면서 그 X와 만나게 하셨냐’고…… 그리고, 얼마 전부터 피우기 시작했다며 담배를 꺼내더니 거실에 내가 틀어놓은 찬양을 듣기가 괴롭다며 “저거 끄면 안되니?” 라고 물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의 괴로움을 상상할 수 있었다.
A와 B를 만나고 헤어지면서 가장 먼저 내 자신에게 했던 질문은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였다. A를 보면서는 ‘내가 말씀을 전한다, 그 영혼을 사랑한다, 기도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의 신앙이 저렇게 식어버리도록 방관하고 있었단 말인가’ 라는 자책과 함께, 매주 말씀을 보고 그 말씀에 능력이 있다고 선포했는데, 그 말씀을 들은 A는 정작 변화되지 않은 것 같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라는 회의가 내 안에서 맴돌았다. 또, B를 보면서는 ‘B가 수년동안 교회에서 말했던 신앙고백과 전했던 말씀들(B는 성경공부를 인도했었다)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무언가 크게 속고 살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론 가까이 살고 있었음에도 그 지경이 되도록 나에게 아무말도 못할 정도로 내가 부담스런 존재였나 싶어 B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제 2, 제 3의 A, B들을 캠퍼스와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하나같이 신앙이 한창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었고 열심도 있었으나, 앞서말한 A와 B처럼 진로나 이성교제, 결혼의 문제에 걸려 결국에는 실망하거나 상처를 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거나 원망하곤 했다. 나는 그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단순히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권면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단순히 ‘하나님의 연단이니 견디라’며 달래거나, ‘당신의 죄때문이니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은 별로 소용도 없고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언가 좀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을 한 뒤 얼마 안되어 성경공부 수련회에서 이성교제에 관한 세미나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이 왔다. 이제 갓 결혼한 내가 나와 나이 터울도 별로 안지는 이들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싶어 주제넘게 느껴졌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말씀을 전하고 싶은 열망(?)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결혼하기까지 조금 긴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면서 나름대로 말씀을 붙잡고 고민했던 것들, 남편과 교제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에 체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룻기, 에베소서 말씀 등등 결혼과 이성교제에 관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성령님께서 로마서 12장 2절 말씀을 떠오르게 해 주셨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바로 이 말씀이야 말로 내가 전하려는 메세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내가 고민하던 그 “근본적”인 해결의 열쇠도 이 말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한다 하고 또 듣는다 해도, 그 마음이 말씀의 능력으로 깨어져 새롭게 되지 않는다면 결국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 입으로만 “주님”을 찾는 연약한 종교인이 되고야 마는 것임을 많은 A와 B들을 만나면서, 또한 나 자신의 연약함을 접하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서말한 A와 B의 경우를 이 말씀에 비춰 다시 살펴보면 A의 경우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싶은 열심은 있었지만, A는 세상의 가치, 즉, 유학을 나와서 이름있는 학교에서 번듯한 학위를 따고 한국에 들어가 좋은 곳에 취직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성공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성공관에 손실이 왔을 때 그만 견디지 못하고 좌절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의 벽이 쌓이게 되어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B의 경우 역시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같았지만 세상의 것과 섞여 있던 그의 결혼관, 이성교제관은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사귀면서 그의 영혼을 보고, 그의 신앙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외모와 능력에 매료되어 결혼도 하기 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준 댓가는 B의 인생에 지울 수 없이 큰 상처만 남기게 되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한다해도 말씀 앞에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지 않은 바로 그 부분이 도리어 나에게 큰 걸림돌이 되어 삶에 적잖은 고통을 더하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문제들이 나를 괴롭히고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걸 막는 것 같지만, 사실 가만 생각해 보면 가장 큰 장애물은 그 말씀으로 수술을 받지 않은 나의 가치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씀이 나의 전인격을 다스리고,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뒤흔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접하는 나에게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과연 내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고 진지하게 그 분의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지 돌아봐야할 일이 아니겠는가?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내가 해야하는 일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요즘이다. 솔직히 조금 많이 지쳐있는 게 사실이다. 내가 지난 수년간 선포했던 말씀들이 과연 말씀을 전하는 나와 내가 마음에 품고 사랑했던 그 영혼들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괴롭기도 하다. 한 사람의 영혼이 말씀으로 변화되고 그 삶이 온전히 주님께 드려지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괜시리 하나님 앞에 서럽기도 하다. 그리고 갈증이 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 그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이 나의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고, 내가 선포하는 말씀가운데 임하기를, 말씀을 보는 나의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진정으로 임하기를 갈망하며 보기원하는 그 갈증이다.
하지만, 이러한 회의나 아픔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을 계속해야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것은 캠퍼스나 교회에서 만나는 젊은 영혼들—아무리 그들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 같고, 기가막힌 행동을 한다해도—에게는 아직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으로 깨어지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화될 여지가 분명 70대 노인보다는 크다는 것이다.
이번 코스타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는 주제로 열린다. 얼마나 시기적절하고 중요한 주제인가 공감을 하면서, 코스타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이 참석하는 모든 이들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고 그 깊은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까지 뒤흔들어서 온전히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회복되는 역사가 임하기를 사모하게 된다. 그래서 나를 비롯하여 A와 B같은 지체들의 성공관, 결혼관, 이성교제관, 물질관등의 가치관들이 세상의 것과 분리되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는 역사가 가득하게 되길 기도해 본다.
May 2, 2007 | 교회와 공동체/미주지역 학생사역
이코스타 2007년 5월호
머리말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에서 선생님들께서 예습과 복습을 참 많이 강조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기 전까지 예습이라는 것은 여전히 생소한 단어로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대학원 수업은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참고로 저는 ‘문과생’입니다) 주로 reading과 발제, 그리고 거기에 기반한 토론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반강제 혹은 강제적으로 예습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학교 밖에서 먼저 예습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교회 대학부에서 참여했던 성경공부 모임은 숙제 시스템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일주일에 한 번 성경공부를 하면서, 다음 주 본문을 미리 읽고, 요약하고,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정리하기 위한 숙제 용지를 미리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만 해도 ‘선배’는 어느 정도(?) 무서운 존재였던 분위기였고, 또한 숙제를 안 해 오면 기도제목 나눔 금지 등의 벌칙이 가해졌기 때문에 다들 나름대로 열심히 숙제를 해왔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인도자로 또 때로는 참여자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어떠한 형태로든 또 어떠한 깊이로든 성경 본문을 미리 예습하고 온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모임의 성격, 참여하는 지체들의 영적 상황 등에 따라 조절할 수도 있겠지만, 그룹 성경공부(GBS)라는 것이 함께 모임을 갖는 그 몇 시간에 제한되지 않고 예습을 통해 더욱 확장된다면 지체들이 말씀을 좀 더 깊게 묵상을 하고 삶에 적용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여자가 성경 본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없이 성경공부에 온다면 인도자의 본문 이해를 따라가는 정도에 그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궁금함과 질문이 없다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인도자에 의해 설정되는 인식의 틀 안에서만 성경 본문을 바라볼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생각과 나눔과 적용을 위해 제기되는 질문들 중에는 단 수 십 초 만의 생각으로 대답하기에는 너무 아쉬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적인 의미에서) 짧은 생각으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교과서적인 대답에 그칠 가능성도 많은 것 같습니다. (‘교과서적인’ 대답이라는 것이 ‘정답’이라는 측면에서는 굳이 부정적일 이유는 없지만, 자신 스스로의 생각에서 나온 대답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주입을 통해 주어진 대답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공부를 예습하는 것은 참여자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를 좀 더 자극하고, 그 의지가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를 위해 지혜를 모으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러한 예습을 유도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QT를 통한 예습
성경공부 모임을 갖기 이전에 성경공부 본문을 갖고 QT를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기초적인 내용 이해와 묵상을 미리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속해 있는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에서는 자체적으로 사용하는 QT 일정이 있는데, 성경공부 본문을 성경공부 당일과 그 전날에 배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성경공부 모임이 자체적으로 사용하는 QT 일정이 없어도,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성경공부 본문을 주중에 QT 하시도록 권면할 수 있겠습니다.
이 방법의 장점은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자연스럽게 예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QT와 성경공부 예습을 굳이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예습에 대한 부담감을 줄일 수 있습니다. 또한 거꾸로 QT를 독려하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같이 성경공부를 했던 어떤 지체도 QT를 안 하다가 성경공부 본문 QT부터 조금씩 시작한 적이 있습니다. (본인의 말로는 ‘어차피’ 공부하게 될 본문이니 QT를 했다고 하더군요.)
2. 질문을 통한 예습
제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성경공부가 귀납적 성경공부 방식을 따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또한 어떠한 ‘전달’의 방법을 취하든, 대부분 몇 가지 ‘질문들’ 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는 진행됩니다. 때로는 성경 본문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들도 있고, 때로는 묵상을 통해 적용점을 이끌어내는 질문들도 있습니다.
사실 어떠한 질문들은 대답하는 데에 있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묵상이나 고민을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을 모임에서 처음 접하고 또 그 자리에서 나누어야 하는 경우에는 아주 피상적인 묵상과 나눔 밖에는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혹은 결국에는 진행자의 이야기에 너무 많은 비중이 실려버리게 됩니다. 만약 참여자들이 이 질문들을 미리 알고 성경공부 모임에 올 수 있다면 나눔과 적용이 더욱 구체적이고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금요일 저녁에 모임을 갖는데, 저는 늦어도 목요일 밤까지는 이 질문들을 참여자들에게 이메일로 미리 전달합니다. 그리 대단한 예습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성경공부 모임을 위해 캠퍼스를 걸어오면서 단 몇 분 만이라도 질문의 내용에 비추어 본문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질문들을 미리 읽고 생각해 오시지는 않지만, 가끔씩 성경공부 시간에 “간사님께서 보내주신 질문을 생각해 보았는데..” 라며 나눔을 시작하시는 지체들을 볼 때 마다 또 다른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는 데에는 어려움과 위험도 있습니다. 첫째는 이 방법 역시, 그 질문들을 접하고 생각하기 이전에 성경 본문을 읽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QT를 통한 예습 등과 같이, 주중에 본문을 미리 읽게 하는 것과 병행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특히 귀납적 성경공부의 경우에는, 그 질문들이 참여자들에게 있어서는 성경 본문을 바라보는 데에 ‘색안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앞서 이야기한 대로, 그 질문들을 접하기 이전에 먼저 본문을 읽고 기초적인 개인 묵상을 하는 과정이 없다면 이러한 위험은 더 커질 것입니다.
3. 숙제를 통한 예습
앞서 언급한 방법의 연속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숙제’라는 말을 통해 조금은 더 책임감을 지워준다는 측면에서, 또한 준비하는 시간이나 분량에 있어 더 확장 되었다는 측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숙제’라는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참여자 모두에게 똑같은 과제를 줄 수 있습니다. 내용을 정리할 수도 있고, 문단을 나누어 올 수도 있고, 핵심 단어들을 뽑아 올 수도 있고, 아니면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 오거나 생각해 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각자에게 다른 과제를 줄 수도 있습니다. 누구는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과 지역에 대해 조사를 해오고, 누구는 관찰 질문들을 뽑아보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숙제’라는 방법을 사용하면 참여자들의 예습의 깊이를 깊게 할 수 있고, 또한 성경공부 모임에서의 참여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 역시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특히 인도자나 참여자가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의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은 모임이라면 성경공부를 필요 이상으로 부담스럽게 여길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숙제는 계속 나가는데 숙제를 해 오는 사람은 계속 없다면 오히려 서로에 대한 민망함만 커져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모임이, 또한 자신 스스로와 참여자들이 이 정도의 책임 의식을 갖고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라면 이에 대한 욕심을 너무 내세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꼬리말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은 우리의 ‘being’과 ‘doing’이 하나님의 ‘옳으심’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입니다(딤후3:16). 마치 구약 율법의 정신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며 (레19:2),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참 정신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해야 한다고 (마5:48)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단순히 말씀을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과는 다르고, 따라서 내가 말씀을 붙들고 어떻게 한다기보다는 말씀이 나를 붙들고 어떻게 하시도록 나를 말씀 앞에 스스로 노출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룹 성경공부가 이를 위한 중요한 기회와 동기부여를 제공하게 되지만, 예습을 통해 좀 더 개인적으로 같은 말씀 앞에 다가서는 과정이 병행된다면 그룹 성경공부가, 그리고 그를 통한 참여자들의 삶이 좀 더 하나님 앞에 풍성하여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또한 저의 작은 경험들을 통해 확신을 갖게 됩니다.
저의 부족한 경험과 생각으로 ‘예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또 다른 경험, 조금은 다른 생각이 있다면 그것들이 함께 나누어져서, 말씀을 통해 제자를 삼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의 여정에 밑거름으로 쓰이기를 기대합니다.
Mar 16, 2007 | 교회와 공동체/미주지역 학생사역
이코스타 2007년 3월호
저는 미국에 온 후 계속 필라델피아 근교에 살면서 음악을 공부 했습니다. 한 학교에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부도 했고 일도 하면서 몇 년 전부터는 후배들과 음대 안에서 작은 말씀 나눔 모임을 만들어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제가 섬기고 있는 캠퍼스 사역을 통해 배우고 있는 일들에 대해 짧은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앞에서 언급 했듯이 짧지 않은 시간을 한 학교에서만 있다보니 어느새 새로온 유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학교생활에 도움을 줄 얘기를 해 줄만한 여유도 생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늘 식사시간에 모여 앉으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화거리들이 있습니다. 연습, 숙제, 시험, 진로, competition, audition 등 음악과 학문에 관한 얘기들을 주로 나누게 되고 그러면서 마음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교회와 신앙 생활에 대한 얘기들도 자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가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이기 때문에 한인교회도 많다 보니 20명이 넘는 음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얘기를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각기 다른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예배를 위해 필요한 반주자와 지휘자, 악기 연주자와 soloist 들이 크고 작은 교회로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 입니다. 음대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이 크고 작은 한인 교회에서 음악쪽 사역을 돕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우리 학교 음대생들은 매주일 교회에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대생들은 교회에 가면 음악의 전문성을 통해 실질적으로 예배를 돕는 자리에서 섬기게 됩니다(대부분의 교회들은 사례비를 지급하지요). 이들 중에는 신앙생활을 우선순위에 두기 보다는 교회의 음악을 도우면서 자신의 경제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교회를 나가는 학생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많은 학생들은 어릴때부터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며 자라와서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후배들과 많은 얘기를 하다보니 신앙이 있다 하는 학생들 중에서도 (청년부나 또래 그룹 모임이 없는 작은 교회에서 반주/지휘/솔로이스트로 섬기기 때문에) 예배 외에는 말씀을 공부하며 나눌만한 적절한 모임이 없어 영적으로 열악한 환경가운데 있는 것이 음대 많은 학생들의 현실임을 알수 있었습니다.
후배들과 몇번의 이런 대화들을 통해 내 마음 가운데 내가 음대 안에서 이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하게 되었고 기도하면서 마음으로 준비를 하다가 몇 년 전 처음으로 몇 명의 후배들과 함께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몇 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지역 교회와 kosta 등의 모임에서 소그룹 리더로 섬겨왔었기 때문에 그 당시만 해도 학교 안에서 후배들과 모임을 시작 하는것에 대한 큰 부담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이 아닌 음악을 공부한 사람이 교회를 벗어나 학교 안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이 학교 사람들 눈에 이상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모임을 시작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사람들을 모임에 오게 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함께 말씀공부 하자고 말 해야겠다.. 하는 생각에 학기 초에 연습실 에서 마주친 성악하는 후배에게 성경공부 함께 하자 했더니 돌아 오는 말은 “저는 전도사님이나 목사님 아니면 함께 성경공부 할 맘이 없습니다” 하는것 입니다. 그날 그 후배의 대답이 속된말로 “언니.. 언니가 하는거 그거 ‘야매’로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는 소그룹 인도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지만 교회 건물을 나와서도 같은 일을 하려는 제가 그 후배의 눈에는 새삼 자격 미달자로 미덥지 않게 보였던가 봅니다. 함께 하겠다는 사람도 없고 바라보는 시선도 야릇하던 처음 모임을 시작하던 그때, 가끔 이렇듯 라이센스 없이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취급을 받으면 꼭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 하고 있는 것 맞나요?” 그러나 이런 생각이 늘 오래가지 않았던 것은 지난 수년간 소그룹 나눔 안에서 제자 삼는 일로 나를 훈련 하시고 인도해 오신 하나님께서 (어쩌면 내가 해야할 숙제같이) 이 캠퍼스에서도 나에게 제자삼는 일을 계속 하시길 원하시고 인도하실 것 이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졸업을 앞둔 세명의 후배들과 함께 이렇게 나는 음대 안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마음을 먹게 되고 모임을 시작 할때는 이 일이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게 되었지만 어쩐지 내 마음은 추운 겨울에 코트도 한 벌 없이 길거리로 나가는 사람의 심정 이었습니다. 역시‘라이센스’ 없는 사람 인지라 유년 주일학교 때부터 성경공부 해 왔어도 신학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지식도 없었고 그렇다고 누구를 사랑으로 품을 자신도 없었기 때문 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아보면 음대 안에서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하던 그 해 내 마음은 참으로 궁핍하고 외로웠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몇 명의 후배와 둘러 앉아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기를 시작한지 어느덧 일년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궁색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모임을 인도했던 것 같지만 일년이 지나다 보니 그런 느낌마저도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방학이 되어서 여름 코스타를 참석해서 처음으로 학원사역에 관한 세미나를 신청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 세미나를 가면 나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미나를 인도하시던 집사님께서도 본인이 실제로 현재 캠퍼스 사역을 하고 계신 분 이었고 power point presentation 을 하시면서 자신이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겪었던 은혜와 노하우를 나눠주셨는데 참 많은 위로와 은혜를 받은 시간 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세미나를 생각하면 생생하게 생각나는 집사님의 간증 같은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내용을 짧게 옮겨보자면, 그 집사님께서 어느날 말씀 공부 모임을 생각 하시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캠퍼스를 걷다보니 한국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답니다. 그 집사님 마음에 저 학생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살다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학생들의 영혼이 불쌍하고 그 캠퍼스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견딜수 없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런 마음으로 캠퍼스에서 말씀을 나누었고 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학원 사역자들이 이렇듯 영혼을 바라보며 마음 아프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 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 말씀이 다른 사람들에겐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간증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씀이 내겐 음대 안에서 처음 모임을 시작하고 지난 일년동안 왜 내 마음이 그렇게 궁핍하고 추웠는지 말해 주는 것 만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안타까와 하시는 그 마음을 알지 못했기에.. 한 영혼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성경공부는 내가 해야할‘일’이라는 의무감이 내 맘을 더 많이 채우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공들여 말씀공부를 준비하고 모임을 위해 노력했던 지난 일년 이었지만 내 마음은 늘 춥고 궁핍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정말이지 그 후배의 말처럼‘야매’로 말씀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학기에 함께 말씀을 나누던 후배들이 졸업과 함께 대학원 진학, 한국으로의 귀국을 하면서 모두 흩어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성경공부 모임은 다시 텅 비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함께 성경공부 할 지체들을 찾아 모임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제 내겐 더 이상 자신이 없었습니다. 소그룹 모임을 인도해본 지난 몇 년의 경험도, 다른 사람보다 학교 생활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상황도 별로 내 마음에 힘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난 아직 캠퍼스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은데.. 이렇게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되면 내 맘이 또 춥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모임을 내 맘대로 없앨수 없었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지요. “ 하나님, 이제 우리 성경공부 모임에 아무도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연습실에서 만나는 새로운 후배들은 나이가 많이 어리고 아직 그들과 개인적인 교제도 제대로 나눠본적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아직도 캠퍼스를 보면 눈물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직도 제가 이 모임을 계속 하길 원하시면 한 명의 동역할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래 주신다면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줄로 알고 계속 모임을 이끌어 가겠습니다.” 아직도 잃어버린 영혼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신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데는 자신이 없었지만 그날은 그렇게 기도 드렸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못남과 부족한 모습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마치 내가 낙심 할까 걱정이라도 되셨다는듯이 기도를 한 그 날로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날 오후 다른 학교에서 transfer를 해온 새로온 후배에게 말씀 공부 얘기를 했더니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눈을 반짝 거리면서 “언니, 우리 교회에는 청년부도 없고 저는 교회가서 그냥 반주만 하는데, 저 누구랑 말씀 공부하고 그런거 너무 해보고 싶었어요” 하는게 아닙니까.. 제 기도 응답이 된 그 후배와는 지금도 2년째 한 주도 빠짐 없이 말씀을 공부하고 나누는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 학기에 말씀공부와 나눔을 통해.. 참 귀한 배움과 은혜를 경험 했습니다. 더 이상의 인원은 없이 그 후배와 단 둘이 말씀을 나눴지만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 묵상과 그 후배와의 교제를 통해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후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제 마음에 알게 해 주심으로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갈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나의 귀한 동역자이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후배와 한 학기의 말씀 공부를 통해 나의 메말랐던 마음에 주님의 은혜의 샘물이 다시 흐르게 되었습니다. 몇 학기를 더 지나면서 말씀 공부 고정 멤버가 조금 더 늘어났고 기도와 나눔은 더욱 풍성해 졌습니다.
아직도 저는 마음이 차갑고 부족해서 캠퍼스를 바라보며 더욱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갖길 갈망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으로 옷 입혀주시고 내 안에 채워주시는 은혜로 지금은 더 이상 마음의 추운 겨울 안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보여드렸더니 빈 마음을 보시고 그곳을 은혜로 채워주셨습니다. 나의‘일’을 내려놓게 하시고 주님의‘은혜’가운데로 불러주셔서 나를 생명을 살리며 제자 삼는 곳에 함께 동참 시켜주셨습니다. 오늘도 저는 주님께서 불러주신 말씀 공부라는 모임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주님을 배워가며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Mar 16, 2007 | 교회와 공동체/미주지역 학생사역
이코스타 2007년 3월호
일단 감사합니다. 참 감사합니다. 생활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를 허락하시고, 그 안에서 잘못된 부분, 작지만 소중한 부분, 들려 주시려는 하나님의 음성, 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을 보게 하시고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들을 생각해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지난 달인 12월 말 즈음에 시작하여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깊은 생각을 하며 한 해를 정리하고 새 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심에 감사합니다.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글을 부탁하시는 말씀을 들었을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내 평소 생활을 생각하면서 써보면 어떨까’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깊은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득, 하지만 선명하게 들었던 생각은 ‘제자가 자신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써야지 ‘제자로서의 삶’이지, 제자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생활을 적어보면 그건 ‘제자의 삶’에 대한 글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직도 자신있게 ‘나, 제자입니다’ 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빡세게’ 기도 한번 하고 잘 써보자’라는 생각도 들고,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한 달㈏?시간이었습니다. ‘제자의 삶’이라는 것을 ‘제자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내지는 ‘제자의 삶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라는 글이 아닌, 제 생활을 돌아보면서 어떤 삶이 제자의 삶인지 생각해 본 것을 짧게 나눠보고 싶습니다. 제자의 삶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은 이미 eKOSTA게시판에도 여러 좋은 글들이 있고, 많은 신앙의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이 많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저기에서 인용해서 다시 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제자의 ‘삶’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긴 시간과 많은 분량으로 다가와 부담이 든 나머지, 부끄럽지만 저는 제자로서의 일상의 생활이 어떤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생활하는가, 제 생활을 생각해 보면서 나누겠습니다.
약 3년 반 전에 결혼을 하고, 저의 하루하루의 생활은 어느 정도 단조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보통 우리들이 살면서 겪어보지 않을 수 있는, 그리고 그렇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는, 그런 힘든 일들도 그 짧은 기간에 여러 차례있었습니다만…) 저의 생활에서의 주 활동 반경을 생각해 보면 크게 가정, 직장, 그리고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캠퍼스 정도가 되더군요. (사실, 교회가 집에서 좀 멀어서 거의 주일에만 교회를 가고, 유치부 교사로 섬기는 일 외에는 여러 주 중의 다른 활동에 참여가 많지 않아 주 활동 반경에 포함하기는 조금 힘듭니다. 요즘 들어서 많이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골3:23)
제가 늘 마음에 두는 말씀들 중의 한 구절입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California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Thousand Oaks라는 곳에 있는 Amgen이라는 한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학부 때 전공이 Biochemistry여서 동부에 살 때는 주로 Lab안에서 조용히 일을 했는데요, 이 회사에서 IT쪽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그것도 management쪽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환경 가운데에 있습니다. 지금은 IT Project Management Consultant로 일하고 있구요. 사는 곳이 Southern California이고 다니는 직장이 Biotech에 IT라 그런지, 회사안에서의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이 꽤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도인 인도인들인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꽤 있어서 가끔 성경의 한 부분들을 나눠보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주로 금요일 성경공부를 위해 준비하는 본문의 말씀들을 금요일 성경공부 전에 또는 후에 주변 사람들과 나눠보기도 합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성경공부 준비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씀을 들여다 보는 시간도 있고, 본문 말씀이나 다른 자료들을 프린트해서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옆에서 그걸 본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고 물어보기도 하고 (한국말로 써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말씀을 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참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다가가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말씀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생각해 보게 되고, 또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그러면서 함께 일하는 부분들이 좀 더 자연스러워지더군요. 문득, 어느 날 제 마음 한 켠에 두려움이 급습을 한 날이 있었는데요, 이제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제가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크리스챤으로서,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생각하는, ‘잘 할 것’을 저한테 기대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사실, 그것을 알게 된 후에 더욱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조심하게 되고 하는 일에도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더군요. 저는 솔직히, 너무 제 안의 교만함이 많아서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잘 될 때, 많은 주변의 사람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좋게 평가하며 함께 나누었으면 할 때, 너무나도 무서운, 평소에 늘 있으나 제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제 안의 무서운 점을 보게 됩니다. 그 때 마다 늘 골로새서 3장23절의 말씀을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 그리고 저에게 주어진 일 을 할 때 조심합니다. 저는 또한 개인적으로 제 일에서 만족을 누리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지금하고 있는 일이 나한테 정말 맞는 일인가 묻는 경우도 꽤 있기는 한데요, 그러면서도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이유는이제는 제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이 직장에서의 제 생활이 제 자신안에 형성된 하나님의 디자인을 발견하는 의미있는 사역의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떤 자리로 어떤 모양으로 인도하실지는 모르지만 이런 직장과 이런 일에 저를 허락하실 때에는 그 위에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심을 확신합니다. 만족이라는 것이 일을 성취할 때의 희열이라던지, 나의 시간과 노력과 노동을 투자한 후에 얻는 금전적 또는 정신적 보상 등의 것으로도 물론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심으로 헌신과 정열을 다해 할 때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그런 작은 일이지만 그 일을 하고 있는 나와 하나님께서는 함께 해 주신다는 감사함이 들 때 꽤 깊은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눅17:10)
California에서 살게되면서 UCLA에서 UCLA학생들, 또는 말씀을 함께 공부하고 싶어하는 UCLA주변의 자매님들, 형제님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3년여가 지난 지금은 LA서쪽의 Santa Monica에 있는 Santa Monica College(SMC)라는 Community College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시는 많은 지체들과 각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열정과 계획을 갖고 참여하는 지체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도전을 받습니다. 성경공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성경공부를 통해서 만나게 된 여러 자매님들, 형제님들과 교제를 나누며 삶의 많은 부분들을 배우기도 하구요. 성경공부를 함께 하다보면,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지체들의 숫자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고, 저를 포함해서 성경공부 식구들이 나름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듯 하다가 멀어지는 듯 하기도 하고, 멀어지는 듯 하다가 가까이 나아가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서, 믿음이 잘 성장하는 경우도 있고, 안타깝게도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아서 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구요. 함께 성경공부를 통해 섬기시는 간사들 가운데에 저는 딱히 UCLA에 소속을 두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서, 지금은 옆 동네 학교인 SMC에서 섬길 수 있는 특권도 누리고 있는데요, 이 성경공부 모임은 이제 막 (2006년 가을 학기부터 시작) 시작한 모임이라, 서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나누기를 소망하며, 그런 날이 올 것을 믿으며, 서로 ‘모이기에 힘쓰는’ 모임입니다. 캠퍼스를 섬기며 갖게되는 작은 소망은 이런 저런 작은 모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일꾼들이 길러지는 하나님의 귀한 캠퍼스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살에 미국에 와서, 처음에 영어에 익숙하지 않고,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아 적응이 쉽지 않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에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신앙의 선배님들의 보살피심이 있어서, 쉽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고생스럽지 않게 적응할 수 있는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캠퍼스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함께 발견하고, 또 발견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바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이 정말 쓸모 없는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조용히 사라져 또 어느 곳으로 옮기실 지는 모르지만 그 준비를 겸손하게 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곳을 향하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거룩함과 겸손함과 순종함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여러 곳에 여러 모양으로 흩어져서 곳곳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한 마음을 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계속하여 세우시고 성령의 끈으로 연결시켜 주시는 그 일에 계속 동참하고 싶습니다.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전9:9)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신 6:5-7)
저는 제 아내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UCLA에서 공부를 하는 중이어서, UCLA학생 아파트에서 약 3년 정도 살다가 지금은 LA에서 약 30마일 정도 떨어져있는, 제가 다니는 회사로는 좀 더 가까운 곳에 있는 Calabasas라는 꽤 시골 분위기가 나는 조용한 곳에 살고 있는데요, 제 아내가 공부를 해서 그런지, 아직 아이가 없어서인지 집안 분위기는 꽤 조용하고 차분한 편입니다. 항상 서로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고 하고요. 매일 금요일에 있는 성경공부를 서로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경공부가 있는 금요일 전 후로 그 주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도 하구요. 제가 좀 TV를 오래 보거나 잠깐 졸려고 하면 가차없이 지적을 (꽤 부드러운 표현입니다만) 하기도 하구요. 사실 결혼을 하면서 전도서 9장 9절의 말씀이 새삼 감사하게 받아들여 졌습니다 –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사는 동안에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라는 말씀. 이 구절, 사실은 저희들의 주례설교를 해 주셨던 목사님께서 주신 칼라 성경책에 빨간색 밑줄이 쫙 그어져 있는 구절이거든요. 꽤 오랜 기간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해서 그런지, 전 제 아내를 많이 사랑합니다. 제 아내도 저를 많이 사랑하구요. 저의 생활의 다른 주된 공간인 직장에서나, 성경공부를 하는 캠퍼스에서 힘든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내와 함께 있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쉼을 허락하실 때에 참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들을 함께 나눌 때도 물론 그렇구요. 그런데, 전도서 9장 9절의 말씀이 전도서라는 책의 본문의 위치나 앞 뒤의 내용 구조를 볼 때, 그리고 또 그 때에는 아내와 더불어 즐기는 것이 아닌 다른 첩들 내지는 다른 방법으로 즐기는 것들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에서 나오는 잠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내가 원하는대로, 이 한 구절 말씀만으로 ‘가정에 대한 의미를 ‘힘든 삶 속에서의 쉼터’, 내지는 ‘아내와 즐기는 곳’으로 한정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는 믿는 사람의 가정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당연하게 매우 기본적이며 또한 당연히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서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다른 부분들을 생각할 때,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바로 그 도를 전수하는 터이며 (신4:9-10, 신 6:5-9),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행10:2), 바로 ‘부부’라는 두 사람이 동역하며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사역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7)
제 생활의 주된 부분의 단면들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며 제가 하고 있는 생각들입니다. 이런 생활을, 이런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많은 것들을 제 삶에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별 큰 어려움이 없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원하시고 바라시는 점들이 있음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들 마저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제가 ‘잘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 표현임을 깨닫게 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그 사랑의 바탕위에서, 직장에서 진실되게 충성하기를 원하시고, 저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에서 거룩하고, 겸손하고,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시고, 제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며, 헌신하는 사역의 출발점이 되도록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를 데려가실 때에 디모데후서 4장7절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늘 원합니다. 그리고 밑에는 제가 참 좋아하는 찬송, 434장입니다. 1, 2, 3절 다 감사하고 좋은 데요, 1절 만 적습니다. 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중간 중간의 말 뜻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던 때 부터 좋아하던 찬송이라, 어른들께서도 이상해 하셨던 기억이 있는데요…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항상 인도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Aug 5, 2005 | 교회와 공동체/미주지역 학생사역
이코스타 2005년 8월호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눅1:1-2)”
2000여 년 전 예수께서 이 땅으로 내려 오심으로써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은 오늘 우리의 교회 공동체와 캠퍼스 안에서도 동일한 은혜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그 어느 곳보다도 우리 마음 안에서 가장 또렷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붓을 들었던 누가의 열의를 흠모하며, 오늘 여기에서 함께 하고 있는 친구들을 대신하여 우리 중에 이루어진 일들 (the things that have been fulfilled among us)에 관해 나누어보고자 한다.[i] 우리가 배운 바, 즉 복음의 능력이 다른 여러 곳에서도 귀한 열매 맺게 하시리라 기대한다.
한 어부가 내어드린 고깃배
요즘 두 명의 자매들과 함께 공부하는 누가 복음을 보면서 흥미롭게 지난 시간들을 자주 돌아보게 된다. 누가 복음 5장을 펴면 주님이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장면이 나온다 (눅5:1-11). 주님이 게네사렛 호수가 물 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 곧 제자가 될 어부들에게 말씀의 능력을 체험케 하실 터인데, 먼저 하셔야 했던 일은 작은 요청이었다. 누군가의 배에 오르시는 것이 그것이다. 배 두 척 중 한 척을 택하사 청하셨다. “선택”이라는 단어와 만나면 늘 궁금증이 돋는다. 선택 된 배의 임자는 어떤 이유로 택함 받았을까? 하지만, 많은 경우 주님의 부르심을 우리의 단순한 방식으로 해석하려 할 때 항상 문제가 생기는 듯 하다. 차라리 주목하고자 하는 사실은, 주님께서 청하실 때 ‘어쨌거나 먼저 배를 내어 줄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 ‘작은 순종이 가져온 결과는 귀하다’는 것이다.
주님이 보여주신 기적은 순종한 첫 번째 어부 한 사람만을 향하신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이웃의 다른 배까지 물고기가 넘치도록 채워졌고, 그러한 ‘말씀의 능력’은 함께 하고 있던 호숫가 어부들 모두에게 목격되었다. 말씀의 능력 앞에서 어부는 뿌리 깊이 자리했던 믿음 없음의 죄를 주님께 자백했고, 배를 뭍에 대자마자 세 어부–시몬, 야고보, 요한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주님을 따랐다. 십자가의 길 앞에서 주님을 외면한 뼈아픈 실수들도 범했지만, 종국적으로 그들의 삶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이 훌륭한 제자의 삶으로 변화 되어 오늘날까지 믿음의 후학들에게 주님을 따른 순례자의 본을 보여준다. 그들처럼 우리도 그물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쫓았노라고, 그 첫 마음으로 끝까지 살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걸릴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작은 순종의 시작은 너무나 소중하며, 우리는 그러한 ‘작은 시작들’을 계속할 수 있길 소망한다.
작지만 소중한 시작
필자는 개인적으로 2001년 뉴욕/뉴저지 지역 KOSTA (gpKosta) 기간에 주신 말씀이 처음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구체적인 힘이 되어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15:10-11)
선명하게 남았던 것은 마지막 구절 ‘이같이 전파하매 이같이 믿었느니라’ 이다. 누구에게든 전하기만 하면 믿을 것만 같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강한 확신’을 주셨다. 그 확신으로 소그룹 리더 초보의 첫 걸음을 디뎠다. 집회가 끝난 후, 본 교회 전도사님의 도움으로 청년부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NAV Press에서 출판된 Richard Peace 의 Learning to Love God, Learning to Love Ourselves, Learning to Love Others 세 권의 씨리즈로 각 권이 7개 단원으로 구성된 영문판 교재를 선택하게 되었다. 당시 교회 안 청년 중 일부는 유학 초년생 혹은 어학 연수생이었던 터라 영어공부에 대한 불타는 열의 때문에 한국어로 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수렴하면서 말씀을 공부하는 자리로 한 사람이라도 더 유도하기 위해 결국 성경공부를 영문판 교재로 정하게 된 것이다. 뒤섞인 동기를 하나님께서 친히 정화시켜나가셨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들이 ‘영어’보다는 말씀에서 받는 ‘은혜’를 사모하기 시작했다. 소그룹에서 첫 번째 목격한 복음의 힘이었다.
가장 높은 은사, 사랑을 사모하는 공동체
서툰 시작을 격려 받으면서 열 달 가량이 지날 무렵 세 권의 성경공부 소책자가 모두 마쳐졌다. 그 사이 주님께 내어드린 시간들이 하나님 손으로 채워져 가면서 생명이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영혼으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가슴 벅차게 바라보다가 배웠다. 복음 전할 사명이란 것이 사실은 믿는 자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고 기쁨이라는 것을. 말씀을 나눌수록 우리가 열매 맺기 원하시는 성령께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게 하셨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님을 알고 주님을 닮고 싶은 열망을 허락하셨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2:31-13:1)”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4-8)”
사랑이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인해 작은 공동체의 나눔이 풍성해져 갔다. 속 사람이 열매 맺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 회복되어갔다. 사랑을 실천하려는 열심에 이따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영락 없이 무모한 일들도 했다. 새벽기도의 마음을 주셔서 서서히 새벽을 깨우는 지체들이 늘었다. 그러던 중, 두 시간 떨어진 어느 학교에서 어학 연수 중이던 한 지체가 새벽기도에 동참하고 싶어했다. 결국 새벽 세 시부터 일어나 제일 먼 곳부터 차례로 서너 군데를 돌아 모두 모여 교회에 갈 수 있었다. 새벽 성전을 향해 함께 가던 그 발걸음들이 얼마나 즐거웠는지는 지금도 생생하다. 이 일은 한 번으로 그쳤지만 그 여파는 교회 안에서 상당 시간 지속되었다.
“너희들은 가라 저 캠퍼스로!”
교회 안 성경공부가 막바지에 이른 이듬 해 초 여름 우연한 여행의 기회를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도전을 주셨다. ‘기다리다 지쳐 사슴목이 된다’는 캠퍼스 소그룹 성경공부 리더로 헌신 중인 지체들의 삶을 보여 주셨다. 학교로 돌아오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하기 시작한 교회 안의 성경공부가 어느덧 익숙해져 온실 안처럼 여겨졌다. 친절하게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인 인도 방법들을 제시해준 공과 책에 감사했지만, 다음 단계에 대한 새 소망에 갈증이 났다.
가을 문턱 자연스레 교회 안의 성경공부는 일단락 되었고, 학교 안은 개강예배 (캠퍼스 안에서 학기 초마다 각기 다른 지역 교회를 섬기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모여서 연합으로 드리는 예배) 준비로 분주해졌다. 그 무렵 교통 사고와 함께 차를 폐차하면서 캠퍼스 안에 발이 묶였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악도 선용하시는 섭리. 마음 안에 먼저 소망을 두시고 행하시는 섭리.
두 번째의 시작
2002년 가을 학기 대학원생 연합 개강예배. 말씀 전해 주신 멘토님께서 힘주어 전하셨다.
“하나님의 시계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의 깊이를 측정하고 계십니다. 기억하십시오. […] 복음의 능력은 이미 여러분에게 와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말씀이 전해지지 않고 내 안에 쌓이게 되면, 우리는 교만으로 죽습니다!”
‘주님!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만드신 분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게 알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전하지 못하는 무능함과 주님을 더 잘 알아간다는 착각 사이에서 교만이 싸여 죽게 되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그들도 살고 나도 산다는데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살 수 있다는 생존본능으로 인해 빨리 결단했다. 때마침 교통 사고를 계기로 이사 들어가게 된 아파트에 한국인 신입생이 둘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앞서 행하시는 분이심을 또 보았다. 이미 모아두신 이들과 캠퍼스 안에서 목요일 밤마다 성경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예배가 있은 바로 다음날로 구체화 시켜 나갔다. 공과 책이 아니라 성경책을 붙들고 시작했다. 이후 성경공부 모임은 다른 학생 기숙사 아파트들로 서서히 옮겨 다니면서 계속되었다.
결단 후 실천은 신속할수록 좋다. 우리 머리 속에서 짜내어 나오는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구실만 그럴싸해지고 그다지 신통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믿을만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오늘 생명의 양식을 받고 마음이 따뜻해졌다면 해가 지기 전, 그 마음이 식기 전에 어서 베푸신 자의 뜻대로 속히 행하길 권한다.
처음 배를 내어드리기로 작정하는 어부가 할 일은 매우 간단하다. 하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다’고 믿는다. 둘! 하나님이 운영하고 계시는 환경을 잘 살펴본다. 당신보다 앞서 행해 놓으신 것이 분명히 있다. 눈을 크게 뜨고 그 뜻이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 주위 깊게 둘러 본다. 셋! 계획이 섰다면 반드시 말씀으로 확인 받는다. 그리고, 잘 모르겠다 싶을 때는 ‘안 한다’ 보다는 ‘한다’ 쪽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넷! 부딪쳐 실패를 경험하게 하셨다면 자성의 시간을 허락하신 아버지께 감사 드린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실패했다면, 다음 기회가 왔을 때 더 낮은 포복 자세로 또 시작한
그 뜻대로 부르신 사람을 낚는 어부들
두 세 명을 기대했던 애초의 짧은 생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공부 반 첫 날부터 일곱 명의 지체들을 불러 모으셨다. 잘은 모르지만, 마지못해 온듯한 얼굴도 보였다. 첫 만남에서 간단한 자기 소개와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했다. 다음 주 같은 시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다시 모였다. 그들 각자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성령님께서 친히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셨다. 그 때에 우리 중 누구도 자신들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위대한 기회들은 때때로 아주 작은 일인 것처럼 위장 되어있다고 한 워렌 목사님의 말처럼[ii], 이들은 지금 유학생 중심 개척교회의 일군들로, 또 캠퍼스 안에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영혼들을 섬기는 자들로 세워져 가고 있다. 어려운 시간들도 지나고 있지만, 말씀과 씨름하며 부심하는 삶의 모습들이 귀하다.
교재 준비하기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참 믿음으로 인도한 책. 로마서! 그들과 같은 감동으로 아니 더욱 진한 감동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하며 로마서를 공부하기로 정했다. 로마서 공부를 위해서 필요한 자료들을 이것 저것 모았다. 친구가 권해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강해집 총 11권을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년 전에 지역교회 목사님 한 분과 함께 공부하고 보관해 두었던 유인물들을 복습했다. 교회의 전도사님이 주신 IVP ‘말씀과 삶’성경공부 시리즈 소책자를 문제 출제의 뼈대로 삼고 가급적 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성경공부 인도 경험 이제 겨우 두 번 째, 문제 출제에는 더더욱 초보인지라 결국 많은 핵심적인 문제들은 그대로 빌어다가 쓰기에 그쳤다. 그 밖의 상세한 부분들은 소그룹 인도의 경험이 많은 한 친구와 또 한 집사님을 멘토 삼아 조언을 받았다.
하나님의 복음은 자랑스러운 것!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가장 놀라운 것은 공부해 나가면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스러워하게 된 일이다. 능력은 사람의 말에 있지 아니하였고 참으로 말씀에 있었다. 복음의 능력을 확신 시켜준 코 끝이 찡한 감동의 현장도 경험하게 하셨다. 연변에서 온 한 형제 이야기이다. 두 분의 멘토님들께서 방문해 주신 자리에 이 형제가 초대를 받아 함께 하게 되었다. 초대해 두고서도 올 것을 기대하지 못했던 시간. 그 자리에 와서 복음을 듣고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형제의 모습을 지켜본 우리 모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은혜를 체험했다. 믿음은 복음을 들음에서 난다는 것,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됨을 눈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모든 영혼들이 다 그렇게 쉽게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쉬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장기 기도 제목이 되어버리는 지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때에 우리가 배울 것은 지치지 말고 그 영혼을 끝까지 품는 인내심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적인 사랑이 바로 그러하셨다. 포기하고 싶은가? 그럼 한 번 포기해보길 권한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실 것이다.“나는 너를 포기한 적이 없단다.”[iii]
항해의 바람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 뜻에 따라 영혼을 섬겨보려고 시작한 지체들이 부쩍 ‘나는 받기만 했노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에게서 조원들에게서. 바쁜 학기 중에도 더 바쁜 학기 말에도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게 하신 것은 때마다 우리의 도움되신 하나님의 신실한 인도하심이었다. 헌신하겠다고 발버둥치는 자녀들을 가장 먼 곳의 별과 지구상의 마지막 모래 한 알갱이 (the remotest star and the last grain of sand) 까지도 동원하여 도와주시는 하나님 은혜였다.[iv] 은혜를 아는 자들이 되어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렇게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니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다. 우리의 이름을 하나씩 친히 불러 한 자리에 모으시고, 모인 중에 서로를 세우게 하신 아버지의 경륜으로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우리의 약함을 쓰기 기뻐하시는 하나님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때와 비교하여, 성경공부 중 영혼들을 섬기며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자각과 ‘기도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일 것이다. 리더에게는 모임에 앞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할 사명이 있다. 또 먼저 준비된 자세로 은혜 받게 해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이러한 사명감은 어찌 보면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위대한 일로 보일 수 있다. 열심은 있는데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가? 그럼 당신은 잘 준비되어 있다. 의심치 말자.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쓰시는 분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지체들과 함께 공부하는 동안 마음 속에서 ‘리더라면서 내가 왜 이렇게 어눌하지? 이것 하나 똑 부러지게 설명을 못 하다니…’등의 생각들을 수시로 했던 것 같다. 또 어떤 날은 기도마저 너무 서툴고 어린 아이 같아서 스스로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서툰 말솜씨와 다듬어 지지 않은 대표 기도는 다른 지체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준다. 모범을 보여야 하는 부분에서는 그에 합당한 노력이 필요하고, 감당할 능력도 공급하시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는 것은 리더의 연약함과 다듬어지지 않은 소박함이라고 생각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준비는 물론 중요하지만 애써 완벽한 체 할 필요는 없다. 배를 움직이는 바람은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며, 실수와 좌절감으로 범벅된 눈물을 연료로 쓰신다.
낙심하는 순간은 여전히 온다. 아마도 가장 힘든 일은 부족한 스스로의 인격과 싸우는 일이 될 것이다. 리더로서 늘 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두려움도 많을 수 밖에 없다. 탄식 가운데 토로하는 바울 사도의 고백(롬7:24)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맛보게 될 것이다. 나의 경우, 사람들에게 얻는 호의로 높은 마음을 품을라치면 아버지께서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들을 지체들로 하여금 보게 하셨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도 있었지만, 이로써 모두에게 우리가 바라 볼 자는 오직 예수뿐임을 확인시키셨다.
많은 경우, 리더의 자존심을 생각하기 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정직하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 때에 형제 자매들은 오히려 하나가 되어 중보기도를 해주었다. 공동체 안에서 솔직하게 나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절대로 나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가장 취약한 자리에 가기로 자청하는 일을 기뻐하신다.[v] 내가 직면한 위기의 상황은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절호의 기회였고, 또 한편 더불어 먹고 자고 씨름하며 쌓인 우정의 중심에 주님이 자리하심으로 인해 견고한 삼겹줄이 되는 원리가 드러나는 계기였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4:12)”
공동체가 단단한 삼겹줄이 되려면 첫째, 주님이 함께 하셔야 하고, 둘째, 연약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셋째, 기도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감히 제안하고 싶다.[vi]
빈틈을 채우시는 하나님
본문을 공부하는 사이 사이로 언약, 예표, 성막 등에 대한 보충 수업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때는 중간에 진도를 멈추고 짚어 나갈 부분을 짚고 지나갔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채워주셨다. 한 번은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단숨에 멘토님 한 분을 직접 학교로 보내주셔서 성막에 관한 보충 수업을 해주시기도 했다. 또한 모임 중에서 우리의 이해가 온전치 못하게 남겨진 성경구절들은 그 주(week) 안에 각자 다른 곳에서 때로는 설교 말씀으로 때로는 묵상과 독서로 한 번 더 깨우치시고 채워주셨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빈틈을 완벽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성경공부 진행 중반쯤이었다. 몸도 맘도 힘든 일로 지쳐가던 중 jjKosta의 어느 지역 웹 보드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다. 성경공부 인도자들의 후기를 모아 만든 어느 잡지에서 발췌한 글이라 했다.
아들을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어하던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피아니스트 연주회를 데려 갔어요. 그런데 공연 시작 전 엄마 몰래 그 조그만 아들이 무대 위 피아노에 올라 앉아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twinkle twinkle little star. …’ 사람들은 ‘저 아인 뭐야..’하면서 웅성댔지요. 그 때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나오더니 그 아이를 뒤에서 안고 같이 연주를 했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로 그 노래의 빈 부분을 채워가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아이의 귀에 속삭였대요.“Keep playing. Don’t quit. Keep playing. Don’t quit.”
서투르게 연주하고 있는 어린아이 뒤에서 빈 멜로디를 틈틈이 채워주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을 통해‘그만두지 말고 계속하라’고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격려를 읽었다고 말하는 자매의 고백에 나도 눈물이 글썽했다. 우리가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성경공부도 사실은 그렇게 하나님 품 안에서 그 분의 도우심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한대로 빈틈을 친히 채우시고 격려하시면서 부르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셨다.
모임이 거듭되면서 형제 자매들이 떨리는 기대감으로 전도를 계속했고, 성경 읽기 모임과 일대일 양육 등이 파생적으로 이어졌다. 성경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의 문제가 물론 중요하지만, 이 당시 상황에서 우리에게 터득하게 하신 것은 ‘듣고 안 만큼 어디까지 행동으로 옮기느냐’의 중요성이었다. 성숙을 위해 실천은 꼭 병행되어야 한다.
여름 방학과 함께, 두 학기에 걸쳐 목요일마다 모이던 로마서 공부 모임은 일단락 지어졌다. 받은 은혜를 실천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자고 결단했다. 이후 모으셨던 자들을 통해 하신 일들은 첫 어부가 한 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주안에서 그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흩어지기 위해 모인 자들’이라는 디아스포라의 비젼을 지속적으로 나누었고 이제 흩어질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계속 된 사도행전 29장
이어진 사도행전 공부 모임에 대해 증거하려면, 2003년 코스타 집회를 통해 하나님이 각 사람들의 마음 안에 행하신 일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주일 예배를 통해 지속적으로 은혜를 공급 하신 한편, 계기가 될만한 도전을 받게 하심으로 뒤따른 실천을 용이하게 하셨다. 우리의 믿음은 실천해야 굳건하게 다져질 수 있다. ‘세상의 유혹을 소그룹으로 이겨야 한다’는 마지막 날 파송 예배의 메시지가 지체들의 마음에 강하게 남았던 모양이다. 받은 은혜와 도전이 원동력이 되어서 지체들이 학교로 돌아가자마자 사도행전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여름 내 다른 주(state)에서 summer program에 참가 중이었던 나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한편 너무나 당연하게 이 모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멀리서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인간인 내 마음이 이렇게 기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즐거우실까 생각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지체들의 깨달음이 너무 귀했다.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오직 성령이다. 성령이 없으면 복음을 전할 사명도 겁나고 부담스러운 과제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았노라고 한다. 한 여름을 지내면서 또 한번 부쩍 커버린 모습들을 마주 대하던 날,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보았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3:6-7)”
이들의 모임은 프리셉트 성경 연구원의 GBS(Group Bible Study)용 교재로 시작했다. 사도행전 공부의 구성원은 로마서를 함께 했던 멤버 중 세 사람과 그 기간 새로이 주님을 영접한 두 사람, 그리고 새로이 함께 하게 된 두어 명의 학생들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기대처럼 로마서 멤버가 완전히 흩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새로운 그룹의 핵심 멤버가 되어 공동의 리더쉽을 가지게 되었다. 서너 명의 핵심 멤버들이 한 주씩 돌아가면서 준비하여 그룹을 인도했다.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허락하신 리더쉽의 연습시간이었다. 가끔씩 참석할 기회를 얻어서 함께 할 때마다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지체들의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고 도전과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난감하리만큼 내가 할 일은 너무나 없었지만, 이제 지면을 통해 이들이 써나간 사도행전 29장을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나에게는 큰 감사의 제목이다.
이와 동시에 뉴욕으로 파송된 예수전도단(YWAM)의 한 선교사님과 함께 하는 별도의 제자훈련 반이 캠퍼스 안에서 두 학기에 걸쳐 진행되었다.[vii] 선교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훈련 시켜 주신 것은 우리의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알기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하나님의 품성은 짧은 글 속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룩과 순결, 그리고 친밀감의 아름다움이었다. 이렇게 학교 안의 수요일 사도행전과 금요일 제자훈련 반은 해가 바뀔 때까지 계속 되었고, 각 사람들의 믿음의 나무에 하나 둘씩 나이테를 둘러 주었다.
순종으로 맺어지는 열매, 그 첫 열매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자로서의 부르심에 한번 순종했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인격이 linear relation으로 계속 향상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계속 넘어지고 일어났다가 또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자란다. 각자의 부족한 인격들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넘어지는 위기상황을 자주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소한 이유로 서로를 의심하게 하고 미워하게 하고 화합하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전략도 한 쪽에서는 계속 진행된다. 우리가 사명에 대해 진지해지려 할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고 할 때, 사단은 별의 별 종류의 방해물들을 늘어 놓는다.[viii] 다행히 이것은 아주 낮은 술수여서 조금만 정신 차리면 이겨낼 수 있는 시험들이지만, 그 상황에 몰입되어버리면 헤어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ix] ‘믿으므로 선 자’들이 할 일은 두려운 마음으로 낮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 11:20)”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2-3)”
지난 학기 초부터 리더들이 한 번 더 흩어져서 다섯 개의 조로 재구성되었다. 유학생 중심 지역 교회 담임 목사님의 도움으로 빌립보서 공부가 시작되었다.
“아무 일에나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자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3-5)”
또 한번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양육과 성장의 기회를 맞고 있다. 각 그룹에는 신입생들이 많이 수용되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서로를 알아가면서 좌충우돌 부산한 모습도 가끔 드러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서 ‘사랑할 이유만 찾자’고 결심하자. 그 때에 복음의 문이 열린다.[x]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그룹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 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분이었지 않은가! 만일 나를 바꾸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기 불가능한 갈등의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바꾸실 때까지 조용히 인내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 (pray God to grant you His support that you may quietly bear them) 하자는 아 켐피스의 조언에 귀 기울여보자.[xi] 성경공부 모임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서로의 모난 부분을 조용히 끌어 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배운다.
롬 8:28로 마치며!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우리는 고백한다. 육신의 소욕을 위해 바친 시간은 너무나 헛되었지만 주님을 알기 위해 바친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알게 하신 것을 실천하기 위해 바친 시간은 자연스레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배웠다. 성령의 열매와 구원의 열매! 조금 더 애쓰고 조금 더 헌신해서 아버지께 열매를 드리고 싶지 않은가? 제자 삼기는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같이 넘어지는 사람이지만 그분을 의지하는 자를 아버지는 쓰시기 기뻐하신다. 기억하자. 오직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을! 아직 준비되지 않았노라고 한없이 기다린다면 어느덧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꾸중하실지 모른다.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실수를 범하지 말자.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를 통해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모두가 협력하고 짐을 나누어 지도록 하셨다는 점이다. 지난 4년간 여러 지역 교회들과 선교단체, 목사님들과 선교사님 또 평신도 사역자님들, 캠퍼스 소그룹과 캠퍼스 연합 예배, 복음주의 운동의 여름 수양회, 지역 지도자 훈련 학교 등 각자가 제 몫을 다했다. 재미있는 것은, 소그룹으로 먼저 초청되었다가 주일 성수와 십일조 신앙으로 자라는 지체가 있는가 하면, 주일 예배만 나오다가 소그룹으로 인도 되면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지체도 있었다. 실제로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리더쉽을 양육 받고 지역 교회에서 더 헌신하기도 했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벽마다 성전에서 무릎을 꿇다가 선교 헌신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마음을 열어두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주어진 몫을 감당하겠다는 각오만 하자. 신실하신 아버지께서 친히 때에 따라 필요한 힘과 은혜를 공급하신다. 가장 선한 열매가 우리 안팎에서 풍성히 맺어지도록 다만 그 분 안에 거하자. 함께 거하자. 주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혼자서 무엇을 이루라고 하신 적이 없다. 리더에게는 특별한 어려움이 올 때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세워진 지체들 중에도 오늘 하루를 살기가 버거우리 만큼 힘든 시간 속에서 여전히 헌신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이도 있다. 공동체의 기도가 참으로 절실한 때 이리라. 고난이 육체를 뚫고 들어간 깊이만큼 영혼의 깊은 곳에 주님이 들어가실 수 있음을 배웠다. 형제의 고난이 썩어진 밀알이 되어 하나님이 맺게 하실 공동체 안의 선한 열매를 기대하며 함께 기도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지금 당신의 빈 고깃배를 주님께 내어 드리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채워주실 만선의 기쁨이 당신과 당신이 속할 작은 공동체를 위해 예비되어 있습니다.
[i]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 이젠 참으로 내 피붙이 같이 느껴지는 귀여운 동생들,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 길목에 섰을 때마다 옳은 선택을 위해 도와주신 멘토님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묶인 귀한 이들에게 전하고픈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밑 그림 삼아 부족한 글 솜씨로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ii]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340 쪽.
[iii] 행여 내가 포기하더라도 그 분은 그 지체의 영혼을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그 사실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때로는 그 분께만 완전히 맡겨 버려야 할 때도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영혼을 위해 내게 맡기신 역할이 ‘장차 올 주인공의 길을 평탄케 하는 조연’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변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이제 뒤에서 기도하는 자리로 가자.
짧은 지면을 빌어 잠시 사족을 붙여본다. 이성친구를 전도하려다가 겪는 심한 갈등상황으로 인해 본인의 신앙생활 마저 힘들어지게 되는 것을 종종 본다. 현상을 타파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책하는 마음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대체로 ‘1)내가 주게 될 상처로 인해 예수님까지도 영원히 미워하게 될까 두려워서, 2)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심정으로 더 큰 죄를 짓지 않으려고 정리하지 않고 쳇바퀴를 도는 경우’의 두 가지인 것 같다. 불신자 이성친구를 무조건 사귀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내게 주어진 역할 이상의 것을 위해 분투하면서, 위의 두 가지 예와 같은 이유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놓길 권한다. 당신이 포기하더라도, 당신이 실수하더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도 실수하지도 않으신다.
[iv] Oswald Chambers, My Utmost for His Highest, Dec 1.
[v] 이것에 대해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을 조금 덧붙이고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저술가 중 한 분인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많은 저서를 관통하는 가르침에는 ‘무기력함과 겸손의 리더쉽’이 피력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종의 모습, 어린 양의 모습으로 “사랑 때문에 힘을 사용하기를 끊임없이 포기하시는” 진정한 영적 리더쉽을 가지셨기 때문이며, 우리가 바로 그 모습을 배워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powerlessness”의 리더쉽은 단순한 심약함과는 다르다. 지나고 난 후 되돌아 보니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나의 ‘심약함’과 실수가 ‘자발적 포기’와도 같은 효과를 내도록 사용하여 주셨음에 감사 드린다.
[vi] 예수님의 이름으로 (헨리 나우웬)를 보면 “기도하는 지도자, 연약한 지도자, 신뢰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새 세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크리스쳔 리더쉽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특히나 소그룹 안에서 연약한 지도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vii] 교재는 YWAM (Youth With A Mission)의 제자훈련 성경공부 시리즈로 진행되었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에는 하나님의 품성을 깊이 알아가고, 배경 지식을 적절히 삽입하여 본문 이해를 도우며, 선교 사명과 중보기도의 동기를 부여하도록 짜여진 좋은 교재라 생각된다. 새 신자가 섞인 그룹에서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을 듯 하다.
[viii]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373-4 쪽.
[ix] 사단의 전략에 대해 궁금하거나 아직까지 사단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속히 읽어보기 권한다.
[xi] Thomas a Kempis, The Imitation of Christ, chapter 16. Bearing with One Another’s Fail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