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현] 유학생 사역: 첫걸음이 중요하다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계획은 빨리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사과정도 M.Div가 아닌 MA를 먼저 시작했다.

기독교 교육학으로 석사를 하기에 아무래도 사역 경험들이 필요할 것 같아 지역의 이민교회에서
파트타임 사역자로 사역을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좌충우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따라와준 교사들이나 아이들, 그리고 배려해 준 교회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러던 중 한 지역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기 시작하면서 한 영혼을 바라보는 나의 영적 시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린 한 영혼, 한 영혼을 말씀으로, 인내로 섬긴다고 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나는 M.Div를 고려하고 현장에서의 사역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은 자연히 대학생들을 품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힘든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당시만 해도 “캠퍼스”에 있는 대학생들에게는 당시 이민 교회들의 관심이 그리 많지 않던 때였다. 모든 사역이 그렇겠지만 캠퍼스 사역 역시 자신의 은사나 적성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일단은 자신의 은사나 적성을 바탕으로 그에 적절한 교회/단체등에서 사역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열정적이기 보다는 좀 차분하고 사색적이기를 바라는 성향이 많기에 그런 색깔(?)을 가지고 사역하는 단체에 마음이 끌렸고 그래서 직접적으로 접하게 된 학생선교단체가 바로 IVF였다. 당시에 남가주에는 한국기독학생회의 남가주 지방회라는 이름으로 UCI, El Camino collge, Cal State in Long Beach, 그리고 UCLA에서 KIVF가 활동하고 있었다.

S 목사님으로 부터 접하게 된 존 스토트의 많은 책들이 내 신학적인 밭을 일구는데 일조했다면, 그 존 스토트가 활동했던 IVF와의 만남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요, 만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같은 대학원을 다니던 1.5세 가운데 T 형제와의 만남은 본격적으로 캠퍼스 사역에 연결된 계기였다. 그러나 캠퍼스 사역에 관심이 있다는 나의 말에 보인 T 형제의 첫 반응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데(단 한 마디였다. “쉽지 않아요!”) 지금 돌아보면 어떤 의미를 담은 것이었는지 충분히 수긍이 간다.

캠퍼스 사역은 쉽사리 덤빌 수(?)있는 현장은 아니다. 너무 겁을 내고 두려워 뒤로 물러설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덥석 발을 담글 수 있는 곳도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나 ‘지속성’의 주제와 관련하여는 더욱 그렇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승부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오랜 인내와 겸손이 필요한 사역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T 형제의 소개로 만난 지역대표간사님이었던 H 간사님과의 만남은 그 후로도 내가 캠퍼스 사역이 무엇인지를 배워 나가는데 있어서 좋은 토대를 놓기에 충분했다. 베테랑 간사님이었던 그 분의 경험과 간사 회의때마나 나누어 주던, 그리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아주 오래된, 직접 수리하시면서 타시던 빨간 니산 센트라 안에서 나눠 주시던 귀한 말씀들이 생생하다.

지금 돌아보면 바로 그 세사람, S 목사님, T 형제, 그리고 H 간사님과의 만남은 큰 축복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캠퍼스를 마음에 품으며 기도하는 수많은 미래의 동역자들, 혹은 캠퍼스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동역자들, 특히나 한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속에서 캠퍼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동역자들에게는 먼저 자신의 부족함과 훈련받아야 할 부분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채워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눈을 부릅뜨고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간청하고 도움을 요청해 보기를 바란다. 

그것이 맨땅에 헤딩하지 않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처럼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등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첫걸음이 됨을 믿는다.  

[이주옥]유학생 사역을 돌아보며

이코스타 2004년 10월호

저는 미국에서 9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두 달 전에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곳도 미국이었고 또 거기서 제 짧은 인생의 가장 긴 시간을 살았기 때문에 애착이 많이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거기서 유학생으로서 또 유학생들을 섬기며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부족하지만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 부족함들은 그분이 채우시리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우선 저는 고등학교 때는 동네 교회 출석으로 제 “크리스천 임무”를 다한다고 생각했었고 대학교 때는 영어로 하는 성경공부를 나갔습니다. 그때도 소그룹 리더이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섬겼다기 보다는 이미 모임을 잘 나오는 친구들을 끼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때문에 워싱턴 디씨를 오게 되면서 KBS (Korean Bible Studies)라고 하는 한국인 성경공부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주어졌던 한국인 유학생 사역은 KBS란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이 글에서는 KBS란 성경공부보다는 제가 경험하고 느낀 유학생 사역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글을 읽고 계신 많은 분들이 유학 경험이 있으시거나 유학생들이셔서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유학생 사역의 가장 핵심 부분을 꼽으라면 저는 관심과 사랑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관심, 사랑, 신뢰는 떨어져서 하나하나씩 단계적으로 쌓아지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가지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이기에 함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 익숙한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어떠한 목표를 갖고 미국이라는 땅덩어리에 오셨습니까? 언어, 문화, 음식, 사고방식이 다른 나라에서 그 목표만 바라보고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많이 들 생각하지만 제가 만났던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극복하고 있다기 보다는 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고, 교우 관계도 좋고, 성적도 잘 나왔지만 미국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외로움을 표출할 수도 해소할 수도 없는 그런 공적인 상태에 있는 친구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런 친구들을 온전히 채워주시는 분은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저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로새서 1장 9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4절)


가질 수 있는 건 다 갖은 것 같은데도 자꾸 허전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저희들에게 완전함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직접 보여주셨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유학생 시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 것도 이 혼란의 시기는 저희가 가장 vulnerable한 상태에 있는 바로 그때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성경에서 만난 예수님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습니다. 가장 가깝게 지내셨던 가난한 자, 병든 자, 창기들…이들은 사회적으로 위기에 처한 이들이었습니다. 유학생의 처지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에 저희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접하게 하고 그 분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도와주는 것이 아주 효과적이라는 결론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일단 유학생들은 관심을 갈망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거나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관심이 아닌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는 관심이어야 합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관심과 사랑 그리고 신뢰가 연관되어있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호감을 사기 위한 관심은 몇 번의 연락과 만남, 단순히 인간적인 표면적인 만남으로 그칩니다. 인간적인 만남이 목표가 아니라 한 영혼이 예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사용되는 것이 저희의 목표인데 거기에 사랑이 결여된 것은 바로 실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을 알게 해주겠다고 접근하면서 사랑을 보여주고, 느끼게끔 도와주지 못한다면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낫다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사랑도 하지 못했던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의 저희를 향하신 사랑을 알았고, 인정했고, 그분이 저희를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들 또 그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창조해주셨는데, 사랑을 먼저 깨달은 자들로서 사랑이 듬뿍 담긴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신뢰는 어떻게 쌓아지는 걸까요? 꾸준한 관심과 사랑으로 키운 영혼이 인간적으로 저희를 신뢰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목표는 예수님을 믿게 도와주는 것이지 저희를 좋아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인정 받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나는 죄인이었고 예수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서 없애주셨고 내 목숨을 다시 살리셨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신 나의 구세주 이심을 믿는 것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너 믿어라”로 해결되는 문제는 절대로 아닙니다. 일단은 저희 삶에서 그 믿음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갖아주고 사랑을 보여주게끔 하는 원동력이 예수님이다라는 느낌은 반드시 전달되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은 성령님이시기에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저희 삶에서 예수님이 드러나시는지 점검하는 것 어찌 보면 이것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제가 너무 두서 없이 달려온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신뢰는 제가 경험한 사역 가운데 중요하다고 느낀 몇 가지에 불과합니다. 그 세가지 요소만 있으면 성공적으로 영혼들이 낚인다는 말은 망언입니다. 저희를 쓰시는 것도 주님이시고 사람을 낚으시는 것도 주님이십니다. 저희는 단순히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저희가 할 수 있는 최고입니다.

[김문희]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지난 6년간의 미국 생활을 돌아보니 많은 생각과 추억들이 지나간다. 그러나 가장 소중하게 남는 것은 익숙한 환경에서 떠나 보낸 시간이 신앙적으로 나를 좀더 정직하게 바라보고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더욱 진지해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으며, 몇몇 소중한 신앙의 선배들과 친구들을 통해 신앙적으로 자라남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6년의 시간동안 나는 유학생 사역에 헌신한 선배들의 돌봄을 받던 때도 있었고, 또 내가 후배들을 섬기는 것도 직접 해보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도 계속해서 다른 분들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고, 또 동시에 그 받은 돌봄을 나눠주는 것이 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글을 쓰신 분들이 충분히 왜 청년 사역이 중요한가에 대해 이야기 하셨으므로, 나는 조금 더 실질적인 내용을 다뤄보려 한다. 사역의 방법이야 개인적인 성향마다 독특하게 다를 수 있으나, 내 개인적인 체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유학생 사역 – 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1. What To do



(1)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자.



너무나도 기본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역을 하다보면 자칫 무시되기 쉬운 것 같다. 자칫 캠퍼스나 교회에서 다른 영혼들을 섬기는 것에 치중하다보니 내가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타협해야 할 때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내가 개인적으로 보내는 시간을 타협하는 것은 사역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타협된 채 지속되는 사역은 자칫 뜻하지 않는 실수를 하게 되거나 다른 영혼들에게도 상처를 줄수도 있고 나를 곧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한때 열성을 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쉽다. 내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매일 만나는 것이 없이 전g해지는 말씀은 내 개똥 철학이 된다. 또, 말씀을 전하면서도 내가 직접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직접 깨달은 내용과 내 삶에 적용되는 부분을 나누지 않고, 말씀을 정해진 틀 안에서 혹은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이런것이겠지 하는 식으로 지식을 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묵상하는 시간동안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없이 말씀을 전하는 것은 내 사고와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력있고 날센 검같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기만 하고 나의 삶과는 크게 상관없는 지식을 전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역을 하면서 개인적인 지식과 경험이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을 통한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를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면서 하나님과 가까이 대면하여 대화했다는 것이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유학생 사역을 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과,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율법과 계명을 받는 것이 지속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여기에서 기다려 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희에게 주겠다.’ 모세가 일어나서, 자기의 부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 다. (출 24:12-13).


바쁜 유학생활 가운데 캠퍼스 모임이나 교회 청년부를 통해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 시간을 양보해도 당장 표가 나지 않는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타협하기가 쉬워진다. 공부하는 시간을 조금만 양보하면 당장 리딩이 밀리고 페이퍼가 날짜를 넘기지만, 말씀 묵상하는 시간과 기도 시간은 조금씩 양보해도 당장은 크게 내가 사는데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조금씩 타협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회복하는데 고생해본 사람이라면 내 말을 잘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바쁜 유학 생활일수록 시간관리를 잘 하고, 덜 중요한 것을 하지 않거나 미루기 위해 삶에 우선 순위를 메기고 가지치기를 수시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모임에 나갈것인가, 점심 시간은 얼마나 쓸 것인가, 인턴쉽에서 시간을 넘겨 일을 하게 될 때 얼마나 일을 더 할 것인가 하는등에서 선을 그어야 할 시점을 분명히 해두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일에도 욕심을 내다보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2) 나의 문제나 어려움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라.



위에서 이야기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하는 내용이지만 중요한 내용이라서 따로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나 내면의 문제 혹은 삶의 어려움이 있기 마련인 것 같다. 또 그 문제를 다 해결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려면 어쩌면 삶을 끝내고 하나님 앞으로 가기전까지 아마 아무에게고 말씀을 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중에 내면적인 문제 혹은 생활의 어려움이 전혀 없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고 보면 그리 많은 것 같지도 않다. 말씀은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한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다른이들을 섬기는 사역에 헌신한다고 해서, 내 문제를 묻어두는것만이 다는 아닌 것 같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도 자신의 어려움과 문제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직면할 것을 권고한다.



사역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어려움에 관심을 갖다보면, 또 그들의 필요만을 생각하다보면, 나의 문제는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아니, 사실은 잊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방치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내 내면의 문제 혹은 삶의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보고 먼저 가지고 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혼자 문제를 가지고 있을때는 그 문제가 나의 개인의 것이지만, 그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소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때에는 나의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도 어려움을 주거나 상처가 되어 결국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역에도 지장을 주게된다. 내 상처가 남에게도 상처가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길수 있다. 똑같은 어려움과 문제가 있더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정직하게 직면하고 있는 사람과, 어려움을 방치해두거나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간에는 그 문제로 인한 부작용이 표현되는데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쉽게 볼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유학생 사역을 하다보면 학력, 성격, 가정 환경, 라이프 스타일등에서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때로는 내 열등감을 자극하는 사람을 섬겨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내 상처를 애써 바득바득 건드리는 사람을 만나게도 된다. 그런때 해결되지 않는 내 안의 상처나 열등감은 사역에 큰 장애물이 된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일로 나타나거나 내 열등감이나 상처 때문에 비롯된 나의 차가운 태도나 교만함이 뜻하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실제로 캠퍼스나 교회에서 유학생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막상 자신의 내적인 문제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또 내 문제가 굳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내면의 문제를 없는 셈치고 방치할 경우 내 안에서 그것이 썩게 되고, 악취를 풍기게 된다.



결론적으로, 학생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면이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정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고 그분의 치유를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는 신실한 사람이기도 하고, 또, 매우 지적이고 날카로워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정 환경이 어렵다는 일종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해 자신보다 편안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다른 사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혹은 적당히 어울려 지내더라도 늘 마음속에 벽을 쌓아두고 지내는 경우를 보았다. 이런 부분은 유학생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깨어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 사람은 계속해서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을 극복하지 못해 어느새 사역이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아내는 통로가 되어가는 것을 본적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본인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두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하나님께서 각자의 어려움을 만지실 것이다. 그런데도, 먼저, 그분들이 자기의 모습을 하나님앞에서 정직하게 볼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본인의 영적 건강에나 사역에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을 명령하였을 때 모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왔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시작한다. 모세의 경우처럼 때론 우리의 약점이 당장 치유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어떤 대안을 주시든지, 해결을 주시든지, 나의 어떤 어려움이 더 이상 irrelevant한 것이 되도록 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하나하나 아뢰고 그분의 치유나 해결을 직접 구하는 것이다. 있는 문제를 없는척하고 묻어 두어서 썩히는 대신 말이다. 모세는 말주변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상처, 욕심, 열등감, 증오감등을 먼저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사역을 하기에 앞서 말이다.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의 입 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이를 만들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 거나 앞 못보는 사람이 되게 하느냐?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 그러니 가거라.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 네가 할말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가르쳐주겠다.’ 모세가 머뭇거리며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모세에게 크게 노하시어 말씀하셨다. ‘레위 사람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 네가 할말을 그에게 일러주어라. 네가 말을 할 때나 그 나 말을 할 때에, 내가 너희를 둘 다 돕겠다. 너희가 하여야 할 말을 가르쳐 주겠 다…’ (출 4:10-15)


(3) 목적 의식을 분명히 가지라.



나는 흔히 “A Type”이라고 하는 편에 속한다. 말하자면, 적극적이고 일에 열심이고 모든 일에 관심도 욕심도 많은 편이다. 일의 과정도 과정이지만 결과도 중시하는 편이고, 말하자면 어설픈 완벽주의자 같은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다보니, 일을 하면 남들보다 빨리 하고 보통 이상은 하는 편이다. 그런 나의 성향이 사역에서도 드러난다. 일이 착착 진행되지 않거나, 느린 사람을 보면 이해가 안되고, 당연히 나의 그런 시선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조금 다른 관점이지만, 아무리 상대방이 선배라고 해도, 그 사람의 인격적인 약점을 보게되면 은연중에 상대방에게 거리를 두게 되는 모습도 사실은 비슷한 이유, 즉, 내 기준에 다른 사람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좌절-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남을 좌절시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남이 나를 절망시키는 것만 생각하다보니 그렇다. 그런데, 사역을 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때로는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될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여러분이 사랑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 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엡 3: 18)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 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 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엡4: 11-14)



우리는 여러분을 경고하고 권면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 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 기대대로 사람들이 착착 따라주지 않을 때, 혹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때, 그래서 본의 아니게 절망할 때마다 사역의 목적을 생각하고 그에 맞게 나를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 열심이고 능력있는 찬양 인도자가 찬양팀 멤버의 목소리나 악기 소리가 자기 기대에 조금 못 미칠 때 좌절할수 있다. 그러나, 찬양팀이 얼마나 훌륭한 악기 소리의 조화로 찬양을 드리는 것보다도 결국 이 모든 것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 함께 준비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조금은 다른 태도를 가질수 있을 것이다. 



(4) 마땅히 해도 되는 일도 복음을 위해 두 번 생각하라.



비교적 덜 유교적이고 덜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능력이 모자라는 경우가 아니고 다른 이유로는 내 활동이자 사고 영역에 큰 제한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내게 이 부분이 가장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나 문제가 될만한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어느 정도 자유 분방한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그런 내게 신앙적으로 진지해지면서, 특히 성경공부 인도하게 되면서 때로는 숨막히고 답답한 것으로 다가왔던 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것은 신앙의 공동체내에서 나타나기도 했지만, 직장 생활이나 학교생활 등 나의 다른 삶의 영역에서도 나타난 점 같다. 예를 들면, 단순히 누군가 연장자라고 해서 특별히 어려워하는 것이 없는 나의 태도가 대화중에 무례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에 대해 이전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면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면서는 조금씩 그런것에도 신경을 쓰게 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고 나를 오해하게 되는 것이 내가 전하는 말씀에 권위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한마디로 ‘너나 잘해’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한 예를 들자면, 관심을 끌만한 형제가 나타났을 때 예전같으면 조금씩 간접적으로라도 찔러보거나 나도 모르게 더 친절하게 대하는 등 관심을 표현했을텐데, 사역을 직접 하게 되면서는 훨씬 달라져서 형제들에게는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면 대화와 접촉을 줄이는 극단적인 경우로까지 치닫기도 했다. 같은 이유에서다. 내가 아는 신앙의 선배중에는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형편으로 따지면 더 큰 차를 탈수 있는데도 절제하는 것을 본적이 있고, 한 후배의 경우에는 원래 매우 매너가 좋고 자매들에게 잘 대해주는 편인데 그것을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본적도 있다. 이 후배의 경우에는 말씀을 위해 자기의 인기를 포기했다고 할 수 있다.



순수한 열정으로 사역을 할 때는 이런 것들이 별 희생같이 느껴지지 않는데, 조금씩 지나면서 열정이 식고, 머리는 커지면서 때로는 이런 것들이 가식으로 느껴지거나 답답한 굴레로 느껴진 때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말씀에 비춰볼 때, 우리 신앙의 선배님 사도 바울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일도 복음이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흠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맡아서 봉사하고 있는 이 많은 헌금을 두고,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하 게 하려고, 우리는 조심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좋 은 일을 바르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또 형제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후 8: 20-22).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 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고후 6: 3-4)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고전 10: 23)


(5) 섬김의 대상을 전적으로 존중하라.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자라게 하는 것은 전인격적인 관심과 돌봄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고 말씀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학교 생활과 진로문제, 이성 교제 가족 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다보면 상대방의 영적/정서적 필요를 파악할수 있게 된다. 이때 상대방의 속도에 나를 맞춰야 한다. 때론 사역자들이 상대방이 빨리 빨리 자라고 빨리 빨리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싶어서 서두르다가 실수를 하거나 상처를 남긴다. 대화하다보면 상대방이 나에게 어느 정도의 권위를 인정하는지, 또 어느 정도 내가 open up 해도 상처를 받지 않을지, 부담이 되지 않을지 알게 된다. 상대방이 받아들일수 있는 만큼씩 나를 열고 상대방이 나를 인정하는 만큼의 권위를 행사해야만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 않는다. 분명한 잘못을 해서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더라도 지적해야 할 때를 빼놓고는 대부분 상대방의 속도와 거리를 존중해주길 바란다. 나의 경우에는 상대방이 너무 큰 잘못을 해서 내가 반드시 당장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경우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물론 상대방이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고, 내가 그사람을 신뢰하고 있을때야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때론 사역을 하면서 사랑과 열정이 앞서서 상대방이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의 인생 전반에 관여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 그렇게 극단적이 경우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사역자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만큼 상대방에게서 당연히 기대하는 사소한 것들이 있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성경 공부 멤버가 당연히 내 전화에 리턴콜을 해야한다고 기대한다든지 하는 경우 말이다.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사람이 기대에 따라주지 못했을 때, 막무가내로 실망한 모습을 직접 표현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만큼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생각하다보니 더 실망될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상대방을 인내로 기다리고 존중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물론 사역자의 동기가 순수한 경우 받아들이는 사람은 조금 상처가 있더라고 대부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반복되면 상대방은 사역자에게 신뢰를 잃거나 두려움을 갖게 되고 앞으로는 자신을 열어보이지 못하게 되고 만다. 유학생 사역을 하면서 한가지 꺠달은 것은 우리의 죄성 때문에 모든 사람이 상처를 매우 잘 받는다는 점이다. 성경공부 리더가 생각없이 한 한마디 때문에, 눈초리 때문에, 목소리 톤 때문에 영혼들은 상처를 받는다. 사역자 입장이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장이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섬김을 통해 영향력이 행사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섬김의 도구는 오직 말씀이다. 나의 기대치나 나의 기준이 절대로 섬김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리더가 별 생각없이 던진 한마디나 부정적인 말투가 영혼들에게는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 What Not To Do



(1) 소유하려 하지 말라.



유학생 사역, 즉 성경공부를 하고 영혼을 돌보는 것은 나와는 다른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면, 영적으로뿐 아니라 그 영혼의 생활면에서도 깊이 애착을 느끼게되고, 때론 그것이 지나쳐 소유하려는 성향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해서 내가 섬기려고 하는 영혼을 마치 내 것으로 착각하고자 하는 경향 말이다. 하나님 것인데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바로 죄가 아닌가 싶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말하는 ‘소유하려는 성향’이란 ‘내가 이 영혼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누구도 나보다는 이 사람을 잘 이해할수 없고 돌볼수 없다’고 은연중에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한 영혼이 진정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역을 하면서 ‘나’의 자리는 무색한 것이어야한다. 그럼에도 때로 누가 교회를 옮긴다거나, 성경 공부 모임을 바꾼다거나, 또는 내가 아닌 다른 리더를 더 존중하고 따른다거나 할 때 괜한 질투심이 생기거나 경쟁심을 느끼는 경우, 혹은 위기의식까지도 느끼는 경우를 본다. 세상에서 경쟁하고 앞다투고 실적을 올려 인정받아야 하는 문화에 이미 익숙한 우리들은 사역을 하면서도 그 문화 속에서 때론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게된다.



물론 내가 한 영혼을 끝까지 돌보고 싶은 마음이 매우 귀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영혼이 나에게 느끼는 부담이 되거나, 함께 동역하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초래한다면 아마도 다시 내 모습을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사역의 포커스는 위에서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자고 하면서 이야기했듯이, 한 영혼이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지, 한 영혼이 ‘내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안에서만 자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역자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또 내가 없이는 공동체가 지속될수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내가 한 공동체나 그곳의 영혼들을 소유하려 하고 있다는 신호일지 모른다. 그때쯤이면 이미 포커스는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섬기는 영혼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물론, 내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그룹에서 갑자기 한 자매가 다른 그룹으로 옮기겠다고 하거나 성경공부를 나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때로는 참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나도 내가 열심히 공들여 일대일로 성경공부를 한 자매가 더 이상 성경 공부에 나오지 않고 다른 모임으로 나가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남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선언하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었다.



그만큼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은 그만큼 한 영혼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내가 힘들어하는 동기를 적나라하게 점검해보면서 다른 리더 혹은 모임에 대한 질투심이나 경쟁심, 거절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속성,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인간적인 욕심이 때로는 작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섬기는 영혼들은 우리것이 아니라 하나님것임을 늘 기억하고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한다.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모세는 자기를 따라 출애굽에 나선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백성이 아니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백성으로 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수 있다. 우리가 섬기는 영혼은 우리것,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늘 기억하자.




모세가 주님께 …호소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 움을 겪게 하십니까? 정말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 님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는, 그가 이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 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 (출 5:22-2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바로가 너희말을 듣지 않을 때에, 나는 손을 들어 큰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나의 군대요 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 에서 인도하여 내겠다. (출 7:4-5)


(2)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말라.



위에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다. 사실, 신앙의 공동체에서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후배들로부터 존중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 나를 신앙의 선후배들에게 열어놓고 공개해 그들의 충고와 격려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경계해야 할 일은, 때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기대하기 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될 때가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성경 말씀을 전하거나 소모임을 인도하는 사람은 ‘위험한 안전지대- dangerous safety zone’에 속하게 되는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그런 위험한 안전지대에서 허덕여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일까? 신앙 생활을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 비해 성경공부 모임까지 인도할 정도가 되면, 기본적으로 기도도 하고, 하나님도 두려워하고, 또 말씀을 보는 생활도 어느정도 익숙해 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도 나를 어느정도 존중해주고, 인정해주고, 어느새 나는 내 영혼의 상태보다는 다른 영혼들과 그들의 신앙 생활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버린다.



내가 이런 상태를 ‘위험한 안전지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느정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때로는 우리들에게 위험한 독이 될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 대신 받아들이고, 어느순간부턴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큰 관심이 없어질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까지 갈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내가 어떤 최소 기준- 큐티, 말씀, 전도, 도덕적인 생활-을 만족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교만하게 하는 위험한 사태로 이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내가 그런 위험한 안전지대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나의 죄된 모습은 작고 단단한 검은 차돌의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죄라고 알수 있는 커다란 바위도 아니었고 아주 자그마한 돌맹이였는데, 너무 작아서 깰수가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느정도는 내 “선의식
-  self righteousness”와 또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습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새까맣게 되어버린, 너무 단단하고 크기도 작아서 오히려 레이저를 사용하지 않고는 깰수도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



작년 언젠가 선물 받은 책중에 ‘영적인 가면을 벗어라- inside out’였는데, 어쩌면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가면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봐주는 모습이 마치 하나님 앞에서 내 진짜 모습인양 착각하게 되는 것 말이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딱딱한 돌멩이일 뿐인데, 사역을 한다는 이유로 주변의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기대가 달라지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들의 시선이 진짜 내모습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께 오는 영광을 구하라는 것이, 위에서 내 모습을 하나님앞에서 정직하게 직면하라고 한 내용과도 연결될수 있을 것 같다. 순수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 사역이 어느 순간 일이 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동기가 내 안에 혹시나 있는지 점검하자.




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래도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우리는 언제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일이 없 습니다. (살 2:5-6) 


(3) 율법(나의 기준, 다른 사람의 시선, 혹은 self- righteousness)에 대하여 죽으라.



사역이 지속되다 보면, 어느 정도 타성에 젖게 되거나 더 이상의 내 믿음의 성장이 없어 힘들어지는 시기가 종종 어떤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 같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물론 있었다. 그 원인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어느새 말씀을 전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들 수 있다. 계속 말씀을 보고 전하는데도 이상하게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깊어지는 것 같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만 전하게 되는 경우이다. 그러다보면, 죄책감에 시달리게도 되고, 나만 잘못 하고 있는 것 같아 하나님의 눈치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제는 더욱 깊이 있는 묵상과 기도 생활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고비를 넘지 못해 나타나는 것일수도 있을테고, 어쩌면 바쁜 유학 생활 가운데 허둥대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전해야하는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내가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날마다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에 둔해져 있기 때문일수도 있다. 그러다가 마치 모임에 나와야 할 사람이 나오지 않거나, 내가 말씀을 전하면서 좀 버벅대기라도 했다치면 스스로에게 드는 죄책감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옆에서 다른 사람은 열정적으로 지치는 것 없이 사역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더욱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고, 때로는 나는 이렇게 지쳐있는데 후배들이 열심을 내는 것을 보면 미안하기까지 하다.



바로 이런 것이 율법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사역을 하면서 반드시 해야할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e.g.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 돌리기, 일주일에 한번씩 이메일 돌리기, 일주일에 열시간 말씀묵상하기, 등등) 최선을 다해 사역을 하지만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가 있을수 있다. 이런때, 나의 신앙 생활, 또 나의 사역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어느 순간에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설정한 기대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겠다는 헌신), 주변의 다른 신앙의 선배들이나 혹은 후배들을 의식하게 되는 것, 또한 말씀을 전하면서 갖게 되는 나 스스로의 의(self-righteousness)등이 어느새 나에게 율법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율법은 나를 죽이고 있었다. 율법에 얽매여 사역을 하다보니 내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설정한 리스트를 지켜가면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그 율법아래서 허덕이며, 내 영혼이 지쳐가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리스트를 마음속에 두고 최선을 다해 사역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순수함과 열성으로 작성한 리스트가 어느새 나를 죽이는 율법이 되어버렸다면, 그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할 것이다. 이런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라고 권유하고 싶다. 이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과의 관계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갈2:19)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 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 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 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 르고 싶습니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 행합시다. (빌 3:9-16)


3. 결론



나는 늘 헌신된 사역자 (제자)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 열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잃은양 한 마리가 더 중요하니까, 그렇다면 나랑 하나님이랑 생각이 다른걸까? 어쨌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 사람의 건강하고 (영적으로), 헌신된 제자가 잃은양 열마리를 살릴 수 있다는 산수적 계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한명의 헌신된 제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것 같다. 때로는 당장 양 한 마리도 못건지기도 하고, 양 살리러 갔다가 이리한테 얻어터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헌신되어 사역하는 제자는 하나님을 향해 자라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나와 여러분에게 힘을 내자고 ‘화이팅’을 외친다.



[김중안] 한국 유학생 사역의 컨텍스트(Context)

유학생 사역


한국 유학생 사역의 컨텍스트(Context)


1. 들어가는 말


2001년 코스타 수련회 이후로, 캠퍼스 현장과 지역 교회 내에서의 유학생 사역의 현황을 파악하고 지원하는 사역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호부터 시리즈로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유학생 사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글은 한국 유학생 사역의 컨텍스트(context, 배경)가 되는 미국 내의 ‘외국인 학생 사역'(international student ministry)의 중요성에 대해 고찰해 보자 한다. 우리 사역의 장(場)인 미국 캠퍼스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 이를 선교학적, 전략적 관점에서 재조명해 봄으로써, 한국 유학생 사역을 자리 매김하고 이 사역의 중요성을 되새김해 보고자 한다.


코스타 사역이나 지역 교회 내에서의 유학생 사역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 ‘외국인 학생 사역’의 일부이다. 현재 미국 내에 있는 50만 명이 넘는 유학생들을 위해 ISI (International Student Inc.)와 IVF(Inter Varsity Christian Fellowship), CCC(Christian Campus Crusade), Navigators 등에서 수 백 명의 간사들이 전적으로 유학생 선교를 위해 전임(full-time)으로 캠퍼스(campus)와 지역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고 중국 학생들과 교수들 선교를 위한 전문 연구 기관이 있는데, 중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은 (코스타와 비슷한 형태의) 자국 학생들을 위한 수련회를 매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시대적 조류와 필요에 맞게 이 사역들이 효과적으로 되어지고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네트워킹(networking)을 하는 ACMI(Association of Christian Ministry among Internationals)라는 사역도 있다.


2. 미국의 캠퍼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1) 증가하는 유학생들


지난 44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56년의 약 30,000명에서 1999-2000년도 학기에는 190개 나라의 514,723명으로 증가했다. 한국 유학생은 중국 (54,000명), 일본(46,000명), 인도(42,000명)이어 4번째인, 41,191명으로 파악되어 있다(자료: 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환 교수들, 정부 관료들, 해외 파견 근무자(지상사), 전문인들(J, H비자 소지자)이 미국에서 수 개월에서 수 년까지 머무르고 있다.


IMF 이후 한국 유학생 숫자가 줄다가 최근에 와서 다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던 전형적인 유학의 패턴에서 벗어나 단기 언어 연수와, 조기 유학, 만학 유학이 붐을 이루고 있고, 학부 유학생도 꾸준히 늘고 있다. 이 외에도 박사후 과정(Post-Doc)과 교환 교수, 그리고 정부와 기업에서 파견된 유학생과 연수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 유학생의 경우 졸업 이후 미국에서 직장(job)을 잡고 정착하는 비율이 증가하고 있으며, 교환 교수나 연수로 왔다가 자녀 교육 문제로 엄마와 애들은 미국에 남고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돈을 벌어 송금하는 일명 ‘펭귄족'(다른 말로는 ‘기러기족’, ‘한총련'(한시적 총각들의 연합))들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2) 외면 당하고 있는 선교의 장


미국 내 외국인 학생 사역(international student ministry)은 세계 선교에 있어서 가장 외면 당하고 있는 영역중의 하나이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0.5%만이 유학생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학생들의 0.5% 정도에게만 효과적으로 복음이 전하여지고 있다. 외국에 나가서 선교 사역을 하는 것만 선교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미국 교회 내에 편만해 있는 것이다. 이는 90년 초반에 한국에 밀려 들었던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외면하고 외국으로만 선교사를 보내려고 했던 한국 교회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 교회에가 복음을 전도한 외국인 유학생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외국인 유학생에게 지속적인 접근하는 그리스도인의 숫자도 극소수이다. 평범한 미국 가정에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못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유학생도 허다하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민 교회에서 유학생들을 위한 사역은 항상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 담임 목사님은 주로 1세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교회의 역량이 될 때 1세 이민자의 자녀들을 위한 2세 영어권 사역을 시작한다. 유학생을 위한 전문 사역자나 전임 사역자는 아주 드물고, 유학생의 삶의 장인 캠퍼스를 무시하고 지역 교회 안으로만 학생들을 끌어 들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학생 사역이나 선교의 개념이 부재하고 유학생들은 한국어권 청년부나 청장년부로 편성되어 자체로 운영되거나, 주변에 신학교가 있으면 파트타임(part-time) 사역자를 배치하는 정도이다. 유학생은 있다가 떠날 사람이라는 심리가 팽배하여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을 위한 전도와 양육의 사역은 부재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운영을 위한 봉사나 열심히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민 교회에서 한국 유학생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적 대상이 아니라 개 교회를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많은 유학생들이 감히 내뱉는 한탄이다.


3. 유학생 사역의 중요성


1) 선교학적 고찰



  • 잘못된 선교의 개념 –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선교를 지정학적 개념으로 생각하여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 선교 개념은 지정학적 개념이 아닌 ‘사람'(people) 중심의, 사람을 향한 개념이다. 오늘 날의 미개척지 선교(Frontier Mission)는 티벳, 몽고, 사우디 아라비아, 파푸아 뉴기니에 제한되지 않는다. 세계 각국에서 유학생들이 몰려 있는 미국의 캠퍼스와 도시들도 미개척 선교지역이다.


  • 선교 메카니즘(Mechanism) – 선교학자들은 선교의 메카니즘을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로 구분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로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참 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구심적 선교이고 포로기에 이방인 가운데 흩어져서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증거한 것은 원심적 선교에 해당된다. 이 메카니즘은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병행하여 이어져 왔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모으기도 하시고 흩으시기도 하신다. 구심적 선교에 의해 약 190개국에서 50만 명이 넘는 유학생들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 내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타문화 선교에 직접 동참하게 되었다.


  • 선교 유형(Type) – 선교학자 Ralph Winter는 선교의 유형을 HM(home mission)과 FM(foreign mission)으로 나눈다. 그리고 각 유형을 다음과 같이 3개의 그룹으로 나눈다.

    Home Mission
    (1) HM1 – 본국에서 동일한 문화와 언어 집단 전도 (미국 학생→미국 학생)
    (2) HM2 – 본국에서 유사한 문화와 언어 집단 (미국 학생→아일랜드 학생)
    (3) HM3 – 본국에서 완전히 다른 문화 언어 집단 (미국학생→중국 학생)


    Foreign Mission
    (1) FM1 – 외국에서 동일한 문화 언어 집단 (미국에서 한국 학생→한국 학생)
    (2) FM2 – 외국에서 유사한 문화 언어 집단 (미국에서 대만·홍콩 학생→중국 학생)
    (3) FM3 – 외국에서 전혀 문화와 언어가 다른 집단(미국에서 한국 학생→중국 학생)


이를 통해 보면 미국 내 한인 교회에서의 유학생 사역과 코스타 사역은 FM1 유형에 해당되고, ISI 사역은 HM3 유형에 해당되며, 한국 유학생 중 중국 유학생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은 FM3 유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2) 미국 내 복음 전도의 장점들


미국 내에서 유학생 사역은 복음 전도상 여러 면에서 장점들을 갖고 있다. 첫째로, 유학생들은 본국에서보다 훨씬 더 복음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다. 그들은 언어적·문화적 장벽과 경제적 압박, 학업의 스트레스로 인해 정서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들이 필요하고, 영적으로 갈급한 상태에 있다. 둘째로, 미국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학생들과 학생이라는 공통된 신분과 관심사가 있고 많은 시간을 강의실과 기숙사, 도서관과 식당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기 때문에,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전인격적으로 ‘특유의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복음주의 사역'(Lifestyle Evangelism)에 동참할 수 있다. 셋째로, 구심적 선교지에서는 언어나 비자나 음식과 기후에 적응할 필요가 없다. 넷째로, 유학생들은 2-5년 정도의 기간 동안 미국에 머무르기 때문에, 복음 전도와 양육을 위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


한국 유학생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유학생 중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학생들이 전체 유학생 출석자의 25% 이상이 된다. 실제적으로 믿지 않는 한국 유학생들의 상당수가 실제적, 정서적, 영적인 필요로 갈급해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보다 복음에 대해 열려 있다. 많은 수의 한국 유학생 구도자(seeker)들이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 한국 교회 문을 넘나 들고 있다.


3) 전략적 중요성


미국에서의 유학생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 유학생들이 갖고 있는 영향력 – 유학생들은 본국이나 미국, 혹은 다른 나라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미래의 지도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3세계에서 온 유학생의 경우에 더 확실하다. 전통적으로 선교사들은 제3세계로 파송되어, 그곳에서 의료나 기술, 또는 교육의 도움이 필요한 중하층을 상대로 많은 사역을 하였다. 그러므로 제3세계의 유학생들은 본국에서는 복음에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집단 출신인 셈인 반면, 가까운 미래에 정치 경제와 교육과 문화 등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칠 인물들이다. 매년 12월 콜로라도에서 미국 IVF가 주최하는 외국인 학생 수양회(International Students Conference)에 참여한 한 아프리카 학생은 유학 후 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이어 차기 대통령이 될 학생이었다. 내가 지금 교제하고 있는 이디오피아 유학생 아저씨는 그 나라에서 도시 개발을 책임지고 있던 장관급 인물이다. 내가 대학 3학년이었을 때 나에게 학생 사역과 유학생 선교에 헌신하도록 도전을 준 IFES의 Eli Lau 간사의 말이 떠오른다. “등소평이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였다면 중국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 평생의 유일한 기회 – 수많은 유학생들이 복음에 문을 닫고 있는 10/40 Window 나라들에서 왔다. 실제로 많은 유학생들에게 있어서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평생 의 유일한 기회가 된다. 미국의 전체 유학생 중 14%가 회교권에서 온 학생이다. 이들이 본국에서 복음에 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학교 아파트 왼쪽 옆집은 이란에서 온 유학생 부부인데, 출석하는 미국 교회에서 작년에 세례를 받았다. 몇 달 전에 이사 온 위층 오른쪽 집은 이라크에서 유학 온 부부이다. 말 그대로 “The world is at your door step”인 것이다. 10/40 Window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들을 본다는 것,은 수십 년에 걸친 그들의 사역 동안 정말 드문 일이다. 이것에 비하면 미국에서의 유학생 사역은 바로 선교의 ‘노다지’라 말할 수 있다. 일례로, 아이오와 대학교(University of Iowa) 중국 학생들의 캠퍼스 성경 공부 모임에는 매주 100명 이상의 본토 중국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매년 20명 정도가 세례를 받고 있다.

많은 수의 한국 학생들이 유학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복음을 듣고 있다. 주일 학교나 중고등부에 다녔던 경험이 있거나, 성탄절에 친구 따라 교회 갔던 일이 있거나, 군대에서 의무 종교 행사의 일부로 세례를 받은 적이 있는 유학생들은, 유학 시절에야 비로소 진지한 마음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거나 유학생 성경 공부 모임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이들에게도 이러한 기회가 복음을 듣고 말씀으로 양육될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이들은 가까운 장래에 한국 사회와 미국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지역 교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서, 제3세계에서 선교사로 섬기게 될 잠재된 일군들이다. 또한 정부 관료로서, 대학 교수로서, 대기업 간부로서, 의사로서,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오던 사람들도 있다. 고지론이든, 저지론이든, 미답지론이든, 그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들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대단한 것이다.


4. 나가는 말


현장과 컨텍스트를 무시하는 사역이자 성경적 전략이 없는 사역은 실제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제 한국 유학생 사역을 지역 교회나 코스타 수련회의 좁은 관점에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미국 전역과 더 나아가 전세계에서 열방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유학생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적 안목을 가지고 전략을 짜고 구조를 만들고 내용을 담아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절실히 요구되는 바는 지역 교회와 코스타가 동역자의 관계로서 현장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 내 외국 학생을 위한 목회(International Students Ministry)를 하는 기관들과 Jama, Urbana 선교 대회, 해외 선교 기관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학원복음화 협의회나 선교 한국과 같은 단체들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효과적인 사역 방안들을 모색하고 협력 사역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코스타 사역도 일회성 부흥회의 성격에서 벗어나 지역 교회와 현장의 유학생 사역을 지원하고 실제적으로 섬기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헌신과 순종을 통해 이 일을 이루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