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영]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 : 비극의 자리에서 다시 부르는 희망가

영화 속의 숨은 그림 찾기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
비극의 자리에서 다시 부르는 희망가


 

















개봉연도 2000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감독 박찬욱
원작 소설 DMZ (박상연 작, 민음사 1997년)
각색 박상연, 김현석, 정성산, 이무영, 박찬욱

주요 등장 인물

오경필 중사
이수혁 병장
정진우 전사
남성식 일병
소피장 (Sophie E. Jean)
최만수 상위
표장군
장소령


송강호
이병헌
신하균
김태우
이영애
김명수
기주봉
이한위


지난 3월 초순 드디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이하 JSA)를 보았습니다. 미시간대학 한국유학생회에서 주관한 ‘한국영화의 밤’ 덕분이었지요. 2000년 9월경에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를 1년 반이나 지나서야 처음으로 보게된 것입니다.


더 이상 깨지지 않으리라던 <쉬리>의 관중동원기록을 역사에 묻는 성공을 거두었던<JSA> . 당시 대부분의 보도내용은 이 영화를 <쉬리>와 동급으로 비교하는 분위기였는데, 개인적으로 <쉬리>란 영화를 ‘로맨스가 적당히 사탕발림된 어설픈 블락버스터(blockbuster)’ (특히 미국영화 을 꽤나 ‘참조’한 듯한 분위기의)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던 터라 동네 한국상점에 비디오가 나왔다는 입소문에도 초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집에 사는 외국인 하우스메이트들에게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려야한다는 한민족으로서의 사명감이 불끈불끈 솟는 바람에 뒤늦은 밤나들이를 감행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난 느낌은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유신정권의 아스라한 끝자락과 80년대의 아수라들을 기억하는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더군요. “그곳에도 사람이 있었네 그려” “승냥이들이 아니더만” 식의 북한 다시보기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우리 민족 모두를 향한 깊은 외침. 뭔가 묵직한 것이 심장을 내리누르는 듯한 부담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 삼개월이 지난 지금, 또다른 부담감으로 태평양 건너의 조국을 바라보며 이 글을 씁니다. (<JSA> 줄거리 보기)




<JSA>는 ‘현재-과거-현재-과거-현재’로 짜여진 미스테리 형식의 영화입니다. 플래시백(flashback) 효과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수사관 소피와 함께 미궁의 사건을 해결하는 재미를 즐기는 동안, 관객은 그들이 풀어야할 수수께끼는 사라진 총알 하나의 행방도 아니요, 이수혁과 오경필 둘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중립국감독위원회(이하 중감위)의 보타장군이 처음 소피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지요.


 





보타 우리 임무는 누가 그랬는지를 찾아내는게 아니라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 내는 거네. 또한 수사 결과가 아니라 어떻게 수사를 해나가느냐가 중요하지. (Our job is to find out not who but why. Also what’s important is not the outcome but the procedure.)


제 1 부: AREA



<JSA>는 또한 ‘Area-Security-Joint’의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영화 제목을 거꾸로 해놓은 듯한 배열인데, 제1부 ‘Area’는 이름 그대로 ‘구역’, 즉 ‘남과 북’, ‘아군과 적군’, ‘양키괴뢰군과 빨갱이괴뢰군’으로 나뉘어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대치하고 있는 긴장된 분단상황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1부 Area는 이런 분단상황에 의한 편견과 허상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를 소피가 만나는 남북한 군인들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기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JSA에 파견된 한국계 스위스인인 소피소령은 보타장군으로부터 남과 북 어디도 자극하지 말고 철저히 중립을 지키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하지만 수사본부에서 만난 한국군의 표장군은 그녀에게 처음부터 선택을 요구합니다.


 





표장군 “중립국감독위원회? (코웃음치며)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어. 빨갱이, 그리구 빨갱이들의 적…. 여기 ‘중립’ 설 자리 없어, 선택만 있을 뿐이야…. 법대 나왔대며? 현명한 선택하리라 믿네.”


반공이데올로기로 철두철미하게 무장된 표장군에게 북한군은 한’마리’라도 더 쏴 죽여야 속시원한 야수들에 불과합니다.


 














표장군 (이수혁구출조의 책임자를 문책하며) “그래서? 그래서 중화기들도 일부러 엉터리로 쐈니? 나무나 부러뜨리라고 명령했어?”
대령 “그냥 구출조 엄호용으로 겁만 주라고 그랬습니다.”
표장군 “뭐? 야! 야! 니가 겁먹은게 아니구?”
표장군 (소피와 페르손더러 들으라는 듯이 강소령에게) “… 이 사건은 뭐 뻔한 거 아냐? 빨 갱이 놈들이 납치해놓구 자진월북으루 조작하려 한거. (강소령에게) 안그래? …우리 애…. (수혁의 곁에 앉으며) ….이름이 뭐랬지? … 그래 수혁이…. 우리 수혁이 포상휴 가 좀 보내주게 빨리 좀 끝냅시다. 대단한 놈이야, 이놈… (수혁의 두볼을 쥐고 흔들 어대며) 두마리나 사살하다니…. 아주, 영웅이야, 영웅! (수혁의 등을 두드리며 소피 에게) 안 그래, 장소령?”


북한군의 리상좌 또한 표장군에 뒤지지 않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위에 수혁에 쓰러져 있던 자리의 윤곽선을 들여다보는 소피에게 그는 “정확히 군사분계선 위에 쓰러지다니 어케 좀 연극같디 않소?” 라고 말하며 사건의 모든 책임을 남쪽으로 돌리며, 마치 남쪽의 뻔뻔스런 악선전에 대항하기 위해 오경필이 살아남아 준 것인양 그의 생존을 다행스러워 합니다.


빨갱이 아니면 빨갱이의 적. 적군 아니면 아군. 이처럼 단순명료한 이분법이 통하는 곳에서는 상대방을 바보로 만들거나 곤경에 빠뜨리는 등의 작은 일로도 쉽게 ‘장한’ 일을 한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북쪽을 살짝 묻거나 팔아 꾸며낸 거짓말 몇마디로 이수혁은 상급자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미화됩니다.


 








황중사 (소피에게) 수색을 나갔다가 혼자 낙오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대가 아주 발칵 뒤집 혔죠. 근데, 4시간만에 귀대를 해갔구 한다는 소리가 지뢰를 밟아갔구 그거를 해체 하구 왔다는 겁니다. 나참! 좌우간 난 그때 알았습니다. 야, 이 , 보통놈 아니구 나. 아, 독한 놈이구나 이거, 응?
대령 이수혁이, 그놈 남잡니다… 한번은 근무를 서는데 말입니다, 저쪽 애들이 우리 대통 령 욕을 막 하더랍니다. 이수혁이 그걸 듣고는 옆에 있는 돌멩일 집어서 쟤네 초소 유리창을 박살을 냈다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아이들 모아 놓구 한마디 했습니다. All right! 자알 했다 말이지.


나중에 이 진술들은 자기가 밟은 지뢰를 제거해준 북한군, 생명의 은인 오경필과 교신하다가 잘못 던진 돌멩이가 북쪽 초소 유리창을 깬 것으로 (관객에게만) 역전되어 진실이 밝혀집니다. 하지만 남쪽의 장군에게 대령에게 중사에게, 그리고 북쪽의 상좌에게 진실은 가리워진채 위장된 평화 속에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보타장군이 소피에게 “여긴 진실을 감춤으로써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네. 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는 거라구”(Here the peace is preserved by hiding the truth. What they really want is that this investigation proves nothing after all) 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영화를 함께 봤던 일본인 친구 사야코가 나중에 한가지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다며 설명을 부탁해왔습니다. 북한군인(오경필)이 그 Pretty boy(이수혁을 말함)에게는 납치된 것으로 말하라면서 왜 자기는 그렇게 증언하지 않았는지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오경필이 이수혁과 형제 이상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도 사랑하는 조국이 있다. 그 조국이 비록 가난에 겨운 독재국가라도 사랑하는 내 나라가 대외적으로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 대답에 사야코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남북 각각의 장군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냐고. 그들이 진실을 알았건 몰랐건 남북한 각각의 국민/인민들에게 전해지는 뉴스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쪽에는 이수혁의 증언이, 북쪽에는 오경필의 증언이 진실인 것으로 보도되었을 것이다. 이런 저의 설명을 사야코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엔 함께 먹고 있던 피스타치오 여섯알을 동원해야만 했습니다. 함께 먹는 피스타치오는 고소했지만 내 나라의 슬픈 아이러니를 설명하는 입맛은 쓰디 썼습니다.)


 









남북이 이토록 첨예하게 대립하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 평화가 무엇을 위한 것이든) 감추고자 노력하던 진실은 스위스 출신의 중감위 여자 소령이 개입함으로써 드러나게 됩니다. (왼쪽 두 개의 포스터를 비교해 보십시오.)


이제까지 우리가 진실이라고 들어왔고 그렇게 믿고있는 것 중에 정말 진실인 것이 얼마나 될까요? 갈라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남북의 독재자들은 각각의 국민과 인민들에게 얼마나 수없는 거짓을 말해왔으며, 오히려 그렇게 의도적으로 유지되는 긴장상태를 얼마나 즐거워했을까요?

아니, 애당초 결단코 각자가 추구하는 이념의 차이 때문에 남북이 갈라졌을까요? 아니, 6.25 전쟁에서 정말 무엇이 자유주의이고 무엇이 공산주의인지를 알고 싸우다 전사한 사람의 수는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이 영화는 이미 원죄처럼 되어버린 우리의 편견과 그 위험에 대해 끊임없는 화두를 던집니다.


제 2 부: SECURITY


 








이수혁에게 죽은 두구의 북한군 시체에 난 총상을 보고 소피는 수혁의 증언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정진우를 죽게한 것은 정조준되어 정확하게 발사된 첫번째 총알인데, 단순히 탈출만을 위한 총격이라면 왜 죽은 시체에 대고 일곱발이나 더 쏜 것일까? 최만수 상위를 죽게한 두번째 총알은 왜 ‘처형타입’으로 발사된 것일까? 도대체 이수혁의 어떤 복수심이 쓰러진 사람을 내려다 보면서 또 쏘게 만든 것일까?
게다가 수혁이 약실에 총알하나를 더 장전하는 습관이 없다는 사실과 사라진 한알의 총알에 근거하여 소피는 범행장소에 남성식 일병이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 둘을 심문하는데, 그만 겁을 먹어 투신한 남성식의 회상을 통해 관객은 그들만의 비밀한 안전지대(security)로 함께 들어가게 됩니다.








수혁의 소대는 밤중에 수색을 나갔다가 길을 잘못 들어 북쪽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수혁이 볼일보는 사이에 황급히 남쪽으로 되돌아갑니다. 본의 아니게 낙오한 수혁은 돌아서다 지뢰를 밟게 되고,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으러 나온 북한군 정진우와 오경필과 조우합니다. 지뢰를 밟은데다 북한군까지 맞닥뜨리게 된 사면초가의 수혁은 당황하여 지뢰운운하며 진우와 경필을 쫓고, 지뢰라는 말에 도망가려는 그들에게 마구 욕을 해대다 결국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수혁의 말 한마디로 긴장상황은 맥없이 풀어집니다. 그런 수혁을 마주하고 선 경필과 진우. 그들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며 갈대밭을 뒤흔듭니다. 마치 앞으로 있을 그들 간의 해빙을 암시하듯. (영화 마지막의 스틸사진 장면과 함께 개인적으로 상당히 인상깊은 장면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눈이 쌓인 비무장지대에서 다시 한번 마주치게 됩니다. 소대원들을 뒤로 하고 중앙에 선 오경필과 황중사. 경필은 황중사와 남북의 담배를 서로 바꿔 피우다가 수혁을 알아보고 경필과 우진을 알아본 수혁은 그들에 대해 궁금해하게 됩니다. 이후 JSA에서 경필과 거울처럼 마주보고 꼿꼿이 서있던 수혁은 “그림자 넘어왔어, 조심하라”는 경필의 장난에 결심을 굳히고 결국 그에게 편지를 던져 보냅니다. 이렇게 유희처럼 시작된 둘의 우정은 정우진의 장난편지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게 됩니다. (실제로 다리를 건너는 수혁의 모습을 담지 않은채 이를 능란하게 표현해내는 카메라워크에 경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광석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지포라이터를, 누드잡지를 선물하며 비밀스럽게 키득대던 셋의 운명은 남성식이라는 공범을 끌어들이면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성식이 듣던 카세트가 정방향에서 역방향으로 바뀌는 장면으로 암시됩니다.) 얼떨결에 수혁의 뒤를 따르던 성식의 순진한 두 발은 군사분계선 바로 앞에서 화들짝 놀라 멈춰 섭니다. 그것은 ‘넘을 수도 없고’, ‘넘어서도 안되는’ 금단의 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54년 유엔과 북한의 협정에 따라 처음 만들어진 JSA는 1976년의 미류나무 도끼만행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남북의 왕래가 자유롭던 곳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은 그 이후 만들어진 것입니다. 양측 군인들간 충돌 방지를 위해 표시된 선이 어느새 “넘으면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는 선,” “넘으면 이적행위가 되는 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편견의 선”을 마주한 순간 성식의 두 발은 자동적으로 뒤로 당겨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2부 Security의 도입부분, 남측의 서양인 관광단 쪽에서 북축으로 날아간 빨간 야구모자를 경필로부터 넘겨 받은 미군안내장교가 관광단에게 하던 대사가 인상적입니다.



“만일 제가 한국군이었다면 제 팔은 지금 막 북한과의 어떠한 교류도 금지하고 있는 남한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셈입니다. 저는 잠입, 탈출, 명령위반, 무단이탈 등의 죄로 중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 제가 고맙다는 말까지 건넸었지요. 이런 경우, 남한은 북한과의 어떠한 통 신도 금지하고 있지요. 과장을 좀 하자면, 이 단순한 행위로 저는 교수형을 당할 수 있단 얘 기입니다.” (If I were a South Korean soldier, my arm just violated the National Preservation Law which prohibits any contact with North Korea whatsoever. I could be severely punished for infiltration, extrication, disobeying orders, and secession without permission. And ah…. I also said “Thank you”. In this case, South Korean law prohibits any type of communication with North Koreans. To exaggerate, I could be hanged for this mere action.)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사분계선이란 무시무시한 용어에 비해 너무나도 시시한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무작정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젊은이들. 그들이 무료함에 지쳐 서로 농담을 주고 받고 어쩌다가 초코파이를 나누어 먹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람 사는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일로 국보법 위반이네 뭐네 해서 감옥에 가는 현실이야말로 우습도록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수혁과 성식은 단순히 한쪽 팔이, 그림자가 넘어가는 것,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농지거리와 초코파이를 주고 받는 것 이상의 모험을 감행하며 “편견의 선”을 넘나듭니다. 그들이 분단의 반세기, 그 오욕과 고통의 세월을 뛰어넘어 통일의 물꼬를 트러 북으로 건너간 “통일의 꽃돌이”가 되기에는,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에는 그 동기가 너무 단순합니다. “따뜻하구만!” 오경필의 말처럼 서로의 품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입니다. 막막하기만한 군생활에 서로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틈에서는 어떤 정치적 수사도, 이념도, 지도자도 너무 거창하기만 할 뿐입니다. 경필과 수혁, 우진 사이에 낄 자격이 없덨던 김일성 부자의 사진처럼 말입니다.


총알로 공기놀이를 하고 닭싸움을 하며 아이들 같이 즐거워하는 남북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놀이에 함께 빠져 듭니다. “그래 저렇게 쉬운 것을….” 이 생명 다해서, 꿈에도 소원이던 통일이 결코 어려운 일인 것만은 아니라고 잠시 생각하며…. 웃었다 울었다 하며…. 하지만 그럴까요? 아이들 놀이마냥 통일이 그렇게 쉬운 걸까요? 그들의 금지된 장난은 최만수 상위의 등장으로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제 3 부: JOINT


초소 안에 가득 너울대던 방귀냄새와 웃음들은 성식이 문을 여는 순간 공중에 얼어붙습니다. 최만수 상위가 문 밖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성식은 다리에 힘이 빠져 무너지고, 최상위와 수혁은 어느새 총을 빼들고 서로 겨누고 있습니다. 경필은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한 모두를 진정시키려 애쓰지만, 최상위의 명령에 어쩔 수없이 우진은 수혁과 성식을 향해 총을 빼듭니다. 이에 수혁과 성식은 경악하고, 최상위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며, 경필은 체념합니다.


 



































경필 “….수혁아, 총 내려놔라. 이제 어쩔 수 없지 않갔어.”
수혁 “싫어!”
경필 “내가 잘 말해줄 테니까…. 자진 월북한 걸루 하구 우리 공화국에서 살자우, 응? (최 상위를 돌아보며) 그렇디요?”
(조금 멈칫거리며) “먼저 총 내리면 얘기해 보자.”
수혁 (버티며) “저 말 못 믿는 거 형이 더 잘 알잖아? 형두 그랬잖아, 공 세울려구 혈안된 라구. 우리 둘 다 죽여놓구, 잠입한 놈들 사살했다구 구라칠 게 뻔해.”
경필 “내가 책임지구 너희 살려주갔어, 기래두 이 형 못 믿니? (시선을 돌려) 성식아, 넌 믿지? 니가 좀 말해보라우.”
성식 (덜덜 떨면서 수혁에게 귀엣말로) “….저거…. 다 짜구 하는 거 아닐까요?”
우진 (총 쥔 손을 덜덜 떨면서 애원하듯) “수혁이 형, 기때, 우리 중사동지가 지뢰 끊어준 거 기억하죠? 길치 않아요? 총 내리라요, 예?”
수혁 “형이구 뭐구 다 필요 없어. 결국 우린 적이야. 나보구 겁쟁이라 그랬지? 봐봐, 내가 저 죽이는지 못 죽이는지 한번 봐봐.”
경필 “야, 이수혁이 이딴 식으로 나가다가는 전부 다 죽는기야. 야,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최 상위와 수혁을 번갈아 보며) 동시에 내리는 기야요, 우진이 너두! 내리시라요. 내리라.”
성식 (귀엣말로) “….아무래두 이상해요.”


수혁과 최상위의 가운데 서서 경필은 양팔을 벌려 둘의 총구를 아래로 누르고 결국 두정의 권총이 홀스터로 되들어갑니다. 수혁과 최상위의 안도의 한숨 속에. 긴장이 풀리면서 우진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데, 순간 카세트가 정방향에서 역방향으로 바뀌면서 그들 모두의 운명은 다시 역류를 타게 됩니다. 그때까지 잔잔하게 흐르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끝나고 갑자기 시끄러운 노래로 바뀌는 순간 그들은 모두 흐트러지며, 연이어 (최상위가 갖고있던) 무전기 잡음이 들리자 이에 당황한 최상위는 저도 모르게 무전기로 손이 갑니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초소의 창에 구멍이 뚫리고 성식의 총구에서는 연기가 오릅니다. 최상위가 쓰러지자 우진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권총 손잡이를 잡지만, 순간 성식과 수혁이 발사한 총에 의해 이마가 뻥 뚫리면서 피가 튀고, 거의 동시에 손의 일부가 떨어져 나갑니다. 수혁은 우진에게서 총구를 돌려 경필에게 총을 겨눕니다. 한번. 두번. 그때마다 움찔 움찔하는 경필. 고장난 총은 격발되지 않고 경필의 얼굴은 충격으로 가득합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성식은 이미 숨진 우진에게 총을 쏘아대다가 이제 경필에게 총을 겨눕니다. 멍청히 선 성식에게서 경필은 총을 빼앗아 살려달라는 최상위를 가차없이 사살합니다. 복수하듯이.


경필은 손수건으로 (성식의) 총을 깨끗하게 닦은 다음 수혁에게 건네주고, 우진의 다리께에 떨어진 피묻은 수혁의 (고장난) 총을 주워 수동으로 슬라이드를 원위치시킨 다음 역시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성식에게 건넵니다. 수혁은 납치됐다가 탈출한거라고. 성식은 여기 없었던 거라고 말하며. 총성을 듣고 출동한 한국군의 총소리에 겁을 먹은 성식은 쓰러지면서 우진이 발사한 총에 다리를 맞아 잘 걷지 못하는 수혁을 버려두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고, 군사분계선 위에 쓰러진 수혁 위로 탄환들이 난무합니다.



“상호몰이해”와 “상호불신”. 최만수 상위는 남쪽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남성식은 결국 북쪽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자에게 오경필들은 반동들에 불과했고, 믿지 못하는 자에게 위기상황은 “다 짜고하는 쇼”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남성식 일병을 보면서, 처음 유학왔을 때 한국상점에서 마주친 12살 정도의 한 흑인소년이 생각나더군요. 후드가 달린 스웨트셔츠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두리번거리던 그 아이를 구석에서 물건을 고르다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툭 불거져나와 보이는 오른쪽 주머니가 꼭 총 같아 보였고, 그것은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서 매우 낯이 익은 모양이었습니다. 너무 놀라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저를 의아해하던 아이는 순간 상황을 알아차린 듯 가뜩이나 큰 눈이 더 둥그레지며 주먹 쥔 오른손을 빼더군요.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Yeah, I get that a lot”하는 것 같았습니다. 미안했습니다. 그 아이가 흑인이 아니었더래도 제가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거창하게 인종주의를 비판하던 저도 지독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순이지요.







마찬가지로 남성식은 북에 대해 모순된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음악교과서에 실린 “우리의 소원”을 부르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을 기억하며, 통일을 부러워 하지만, 그 열망은 지극히 감상주의적입니다. 더 이상 넘어가지 말자는 수혁을 마지막이라며 북으로 데려간 사람은 바로 남성식입니다. 동생처럼 아끼며 구두를 닦아주고 생일까지 챙겨주던 정우진인데, 그는 마지막 순간 모든 신뢰를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소원을 부르는 한편으로 주입된 반공교육 덕분으로, 북에 대한 공포와 의구심은 그의 동경보다 더 뿌리가 깊고 강했기 때문입니다. 왜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지,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나약한 감상주의자가 극도의 긴장상황을 맞았을 때 바로 남성식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극도의 공포상황에서 남성식은 무전기를 뽑으려는 최상위를 오해하여 무의식적으로 총을 뽑아 발사합니다.


편견의 선을 넘어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이던 이수혁도 결국엔 “형이구 뭐구 다 필요 없어. 결국 우린 적이야!”라며 다시 편견의 선 안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형의 머리에 대고 총을 쏩니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표장군은 전쟁은 그렇게 쉽게 터지는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JSA와 같은 곳에 여러명의 남성식과 이수혁이 있을 때, “어!”하는 순간 일이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남성식과 이수혁은 바로 대부분의 전후세대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호주의”. “먼저 총 내리면 얘기해 보자”던 최만수 상위.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입니다. “햇볕정책”을 “퍼주기”로 매도하며 레드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전쟁세대와 전후세대 개개인의 북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더욱 부추기는 최만수들이 남쪽에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최만수 상위는 북에도 수없이 많겠지요. 최만수로 상징되는 이들은 크게 보면 두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첫번째가 제 하우스메이트 안드레아 같은 사람들. 안드레아는 소련 공산당을 이를 갈며 증오하는 루마니아인입니다. 그 친구는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이런 영화 만든 너희 나라 사람들 정말 나이브(naive)하다”며 흥분하더군요. 공산당이 어떤지 몰라서 그렇다고. 겪어봐야 안다고. 그런 놈들 잘 해줘 봤자 이용만 실컷 당하다 말거라고. 이북에서 종교박해를 받고 남하한 우리 조·부모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입니다. 두번째는 상호주의를 역설하며 분단상태를 고착화함으로써 그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세력들. 이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조성된 여론은 통일을 위한 키워드인 “상호신뢰회복”이나 “상호이해”보다는 “상호주의”를 복음으로 전파하고, 그 영향으로 편견에 싸인 남성식과 이수혁들은 주고 나서도 “다 필요없어!”라고 쉽게 포기하고마는 조급증에 걸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악순환(Vicious circle)입니다. 오경필이 최만수를 처형한 것처럼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질 수 있을까요?


“상호이해,” “상호신뢰,” “반상호주의”. 영화에서 오경필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피가 튀는 장면들이 끔찍하고 무서워서 거의 눈을 감고 있다보니 수혁이 경필에게 두번이나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비디오로 다시 보면서 그 장면을 처음 본 순간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수혁이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고장난 총이 철컥 철컥 빈 소리를 낼 때마다 움찔거리던 오경필의 두눈과 경련이 일던 그의 뺨. 충격이었을 겁니다. 배신감이 들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수혁을 보호합니다. 죽여도 시원치 않았을 수혁을 보호하기 위해 대질심문에서도 그를 공격하며 “인민공화국 만세!” “김정일 만세!”를 목이 쉬도록 외친 것입니다 .









소피 “남성식하고 이수혁을 용서할 수 있겠어요?”
경필 “우리가 남초소에서 기런 일 당했대면, 내가 먼저 쐈을 겁니다.”

“그래, 나라도 그랬을 거야.” 성식과 수혁에 대한 증오 대신 경필은 이해를 택합니다. “혹시 지금 이 총을 건네주면 나를 쏘지 않을까?” 이렇게 의심하는 대신 성식과 수혁을 믿고 총을 잘 닦아 그들에게 건넵니다. 이미 신뢰는 깨지고도 남았을 그런 판에 말입니다. “네가 준 만큼 갚는다”는 상호주의는 “네가 지금 내게 준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라고 이해하고 신뢰하는 경필에게 힘을 쓰지 못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신뢰함으로, 양보하고 참아주자고 이 영화는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역할이 북한군에게 간 것 때문에 불편한 분들이 혹시 계신가요? 하지만 우리 그동안 좋은 역할 많이 먹지 않았습니까? 남성식, 이수혁, 최만수 (또는 표장군), 오경필, 그리고 정진우는 남과 북 양쪽에 공존하는 인간 군상의 전형일 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극중 수사관으로 여성이 등장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입니다. 남성적 특성이 강한 ‘전쟁, 증오, 불신’의 코드가 지배적이던 지난 1953년 휴전 이후의 한반도에 이제는 여성적 코드인 ‘이해, 신뢰, 수용’이 들어설 차례라는 암시인 것입니다.


 





페르손 “중감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소령님은 53년이래 판문점에 부임한 최초의 여군 이십니다.” (Welcome to the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 You’re the first female posted here since ’53.)


그런데 더욱 의미있는 것은 그녀가 스위스 출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 인민군 장교였습니다.


 





보타 “한국전 당시 거제도에는 인민군 포로 수용소가 있었지. 거기엔 공산주의자와 강제 로 군대에 끌려온 반공주의자, 두 종류의 포로가 있었는데, 이렇게 서로 갈려서 수 도 없는 살육이 계속됐다네. ‘내전 속의 내전’이었지. 종전이 되자 포로들에게 선택 의 자유가 주어졌지. 자본주의 남으로의 귀순이냐, 사회주의 북으로의 귀환이냐…. 그러나 그 17만 명중 76명은 둘 다를 거부했는데, 이른바 ‘제3국행 포로’들이라네. 결국 세계 각지로 흩어진 그들 중 일부는 아직까지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네. 바 로 소령의 아버지 장연우 같은 사람이지. 자네 아버지는 그래도 운이 좋아 아르헨티 나로가서 스위스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던거고…” (During the Korean War, there was a concentration camp for North Korean POWs in Goje Island. The North Korean POW’s were divided into two groups, communists, and anti-communists who were brought to war against their wishes. So many killings were committed on each side. It was a kind of ‘a civil war within a civil war’. After the war, the prisoners were ready for freedom to choose which side to go to: South Korea’s capitalist society, or back to communism in North Korea. But 76 prisoners out of 170,000 refused both. They were scattered all over the world, and some of their whereabouts are still unknown, like your father, Yon-Woo Jean. He was fortunate enough to go to Argentina to marry a Swiss lady.)


휴전이 성립되자 수용소의 포로들에게는 북한이냐 남한이야 아니면 제3국이냐라는 세갈래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피의 아버지를 포함한 일부는 중립국으로의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북으로 간 사람들의 자식 오경필과, 그렇게 남으로 간 사람들의 자식 이수혁과, 그렇게 중립국으로 간 사람들의 자식 소피가 다시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고 분단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제 다시 시작이다” 라고 말하며 다시 선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판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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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경유해 여기로부터 제네바까지 2015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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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를 경유해 여기로부터 제네바까지 1976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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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을 경유해 여기로부터 제네바까지 1284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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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를 경유해 여기로부터 제네바까지 11100km


위는 소피가 군사분계선에서 빗속을 서성댈 때 보이던 표지판들입니다. 모두 소피의 고향인 스위스 제네바를 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남과 북 모두를 부정하고 “중도의 길”을 선택할 것을 남북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의 이유도 방법도 모르는 남성식 같은 감상주의자들에게 그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념을 구실로 한 강대국들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조국을 아파하며, 명실상부한 자주국가로 우뚝 설 조국을 꿈꾸며…. 통일 후 미국과 같은 체제를 택하건, 스웨덴/스위스 같은 체제를 택하건 (이 영화는 이것을 선호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로 당당히 서는 것”. 바로 이를 위해 우리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어 했던 오경필의 ‘초코파이’ 대사가 있습니다.


 




















경필 (초코파이를 들고서 기쁘게) “거저 공화국에선 왜 이런 거 못 만드나 몰라? 웅?”
(경필, 봉지를 까서 초코파이를 한입에 넣는다.)
수혁 (경필에게) “형! 저, 아니 뭐 딴거는 아니고…. 안 내려올래?”
(경필, 씹던 동작을 멈추고, 우진과 성식 놀라 수혁을 바라본다.)
수혁 “초코파이, 배 찢어지게 먹을 수 있잖아. 어휴, 아니면 말구.”
(경필, 정색을 하고 씹던 초코파이를 그대로 손바닥에 뱉어낸다.)
경필 “거 이수혁이, 내 딱 한 번만 얘기할테니까 잘 들어드라우. 내 꿈은 말이야, 언젠가 우리 공화국이 남조선보다 훨씬 더 맛있는 과자를 만드는기야. 알갔어? 그때까진 어 쩔 수 없이 이 초코파이를 그리워할 수 밖에 없어.”


아무리 못난 부모라도 저버릴 수 없는 자식의 심정. 내 한 몸 잘 먹고 잘 입겠다고 조국을 버리기 보다는 그 조국이 언젠가는 잘 살게 될 거라는 꿈을 품고 살아가겠다는 경필의 말은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 북한은 자기가 태어나 자란 조국,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사랑하는 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조국을 생각 만해도 가슴이 벅차듯이. 우리가 초콜렛 줄테니 조국을 저버리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나기 때문에, 초코파이 줄테니 조국을 저버리란 말을 그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북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려하지 말고 서로의 체제와 사상을 인정하고, 화해와 교류를 하자는 6.15 남북 공동선언문의 취지와 상통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흥행에 있어 때마침 나온 6.15 남북 공동선언문의 탄력을 상당히 받은 듯합니다. 한마디로 타이밍이 절묘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보다 가난하게 사는 연변동포들이나 중국인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심지어 그들을 착취하는 어글리코리안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마다, 과연 우리는 북을 인정하고 화해, 교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의심이 들곤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바라는 통일이란 북을 흡수통일해서 우리 맘대로 쥐고 흔드는 그런 “헐리우드 블락버스터류”의 통일은 아닌가요. 얼마전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6.15 선언의 2항을 문제 삼으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북한까지 그 체제로 가야 한다고, 초코파이 줄테니 항복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만약 북한이 자기 식대로 가자고 우기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남과 북을 갈라놓으려는 사고. 거창하게 통일을 운운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런 “냉전적 사고”와 “편견의 선”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6.15 남북 공동선언문은 “우리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직 실제적인 통일 논의가 시작된 것이 하나도 없는 백지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던 경필은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할 것 같다’며 수혁에게 지포라이터를 돌려 줍니다. 과연 이런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까?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고 합의하는데만 50년이 걸렸는데, 다시 이를 뒤로 미루어야만 합니까? 통일의 첫삽을 아직 떠보지도 못했는데, 남침에 대한 사과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통일 논의는 가능하다며 언제까지 버틸 작정인지요.


 





소피 “하지만 일 초 먼저 쏘구, 늦게 쏘구, 그런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중요하지 않다면서 굳이 소피는 수혁에게 비밀을 알려주고, 사랑하던 동생이 죽은 책임을 어디에도 물을 수 없었던 수혁은 결국 방아쇠를 당긴 스스로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포스터는 “여덟발의 총성! 진실은 그곳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극의 날 울려퍼진 열한발의 총성 중에서 여덟발의 총성. 그림을 좋아하고 강아지를 좋아하던, 어머니와 여동생 하나뿐인 집안의 가장인 어린 소년병 정진우를 죽게 한 이수혁의 첫발. 그리고 그 주검위에 난무하던 남성식의 나머지 일곱발. 그렇게 정들어했던 동생을 두번 죽게한 그 여덟발의 총성에 바로 우리 조국의 비극이라는 진실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남성식과 이수혁으로 하여금 정우진에 대고 총을 쏘게 만든 ‘편견’이라는 진실을, 그 편견이 낳는 비극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하는 진실을, 이 영화는 보여주려한 것입니다. 이런 한반도의 비극이 언제까지 대물림되어야 할까요.


오경필. 정진우. 남성식. 이수혁. 남북의 인간군상들을 대표하는 이 네 사람을 함께 담고 있는 영화 맨 마지막의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며 바로 분단된 우리 조국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하지만 남북을 갈라놓는 군사분계선, 그 비극의 자리에 서서 우리의 소원, 우리의 희망가를 다시 한번 불러보고 싶은 것은 오경필에게도 정진우에게도 남성식에게도 이수혁에게도 최만수에게도…. 모두에게 한결같은 바램일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待接)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律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미국의 911 참사 이후 아랍국가들에 대한 한국교계의 반응들에 의아해하며, 월드컵 경기장 응원석에 따로 앉아 열심히 한국을 응원하는 “하얀 천사들”을 바라보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연 북한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지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복음”과 “학문” 이외에 “조국과 민족”을 비전으로 하는 코스타를 한달여 앞두고 있는 지금,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우리 기독학생들은 우리 조국과 민족에 대해 얼마나 무거운 부담을 마음에 두고 있는 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 나온 모 대통령 후보의 관훈토론회를 보면서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내용은 100% 제 개인적 시각임을 알려 드립니다.


사족: 이 영화는 실력있는 배우들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합니다. 주연인 오경필 중사역의 송강호, 정진우 전사역의 신하균, 남성식 일병역의 김태우 뿐만 아니라, 지난 20여년간 한국 연극무대를 지켜온 표장군역의 기주봉이나 (이름은 모르겠지만) 황중사역을 맡은 조연배우들의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고 착각할 만큼 정말 감칠 맛이 났습니다. <JSA>를 통해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수혁 병장역의 이병헌의 연기도 뛰어 났으나, 소피장(Sophie E. Jean)역의 이영애와 더불어 (우리나라 젊은 배우들의 공통된 문제점인) 발성미숙으로 인한 대사전달의 문제가 남아 있었던 것이 아쉽습니다.

[은지영] (American Psycho) 우리들 안의 Matrix

영화 속의 숨은 그림 찾기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우리들 안의 Matrix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독 Mary Harron

개봉연도 2000년
MPAA 등급 R 등급
 

주요 등장 인물

Patrick Bateman
형사 Donald Kimball
Paul Allen
약혼녀 Evelyn
정부 Courtney
비서 Jean


Christian Bale
Willem Dafoe
Jared Leto
Reese Witherspoon
Samantha Mathis
Chloe Sevigny


얼마 전 우연하게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으로 유력했던 Leonardo DiCaprio의 비싼 몸값 덕분에 대타로 뽑힌 Christian Bale. 평소 ‘연기 잘 하고 잘 생긴’ Bale의 팬임을 자처하던 터라, 그리고 Willem Dafoe나 Samantha Mathis, Reese Witherspoon이나 Chloe Sevigny 같은 연기파 배우들의 호화 캐스팅에 일단 관심이 생긴 터라 여타 매체의 평론에 귀가 솔깃하면서도, 감히 영화관 가까이에 갈 수 없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이 영화의 장르가 ‘Gore/Slasher’라는 것이었습니다. Bret Easton Ellis의 원작 소설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는 문자 그대로 ‘피가 낭자하게 사람을 난도질해 죽이는’ 잔혹하고 불쾌한 묘사로 가득합니다. 영화 시사회에서의 인터뷰를 봐도 “우째, Christian Bale이…,” “저 사람이 내가 아는 Christian Bale 맞아요?”,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년 여가 흐른 뒤, 어쩌다 채널을 고정하게 된 HBO에서 이 영화가 나오자 더는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매력 만점, 연기력 만점의 Christian Bale에 대한 궁금함과 호기심 때문이었지요. (영화의 배경이 미국이어서, 그의 매력적인 영국식 영어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시선을 뗄 수 없었던 두 번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마치 영화의 주제를 반영하듯) 아름답고 고급스런 영상이었습니다. 백색의 화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붉디 붉은 핏방울과, 섬뜩하게 번쩍거리는 은빛 칼. 역시 영화가 영화라서 그런지 시작부터 다르군. 그래도 빛깔 한 번 곱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칼은 고깃덩이를 무지막지하게 내려치고, 이어지는 화면은 손님에게 내갈 고급 요리가 담겨 있는 접시…. 핏방울인 줄 알았던 것은 케첩이었고 번뜩이던 칼은 요리용이었습니다. 이 첫 장면이 시사하듯, 영화의 시종일관 화면은 매우 아름답고 선명하며 스타일은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Gore/Slasher 영화에 웬 영상미에 코미디 타령이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화려한 겉포장에 연연하는 등장 인물(들)의 끝갈 데 없는 허영을 조롱하는 영화의 주제를 생각해 본다면 Harron 감독의 이러한 연출 기법은 오히려 박수감이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시간 30 여분 동안 진행되는 영화 앞에 끝까지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원거리로 잡은 행려자(homelss) 살해 장면 등 몇몇을 제외하면 직접적인 살인은 대부분 화면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고난도의 연출 기법으로 인해 장면 하나 하나가 그대로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질 뿐만 아니라 비릿한 피냄새가 코 끝에 질퍽하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을 참을 수 없어 왔다 갔다 채널을 돌리던 끝에, 다음 번 방송분을 찾아 일단 녹화를 해 놓고 끔찍한 장면은 Fast-forward로 지나가기로 했습니다. (“봐야 한다면 비디오로” – 이것은 <사이코>나 <양들의 침묵>같이 세간에 자자한 입방아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공포 영화들을 보는 제 나름대로의 방법인데, 이렇게 끔찍한 장면들을 Fast-forward를 해서 보면 전혀 무섭지 않고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만 합니다. 그게 무슨 맛이냐고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영화를 끝내고 나니, 애초에 NC-17 등급 판정을 받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하기 위해) R 등급을 받으려고 여러 문제 장면을 삭제했다고는 하지만, 영화 전편에 담겨 있는 폭력적이고 잔학한, 상상을 초월하는 살인 방법과 엽기적인 살인 도구들, 불쾌할 정도로 여성을 비하하는 성적 묘사와 장면 등등…. 영화를 보고 도덕적으로 저속하다거나 역하다는 느낌을 받은 관객이 상당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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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난 개인적인 느낌은 먼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Christian Bale의 연기가 빛난다는 점입니다. 자신만만한 듯하나 위태롭고, 오만한 듯하나 열등감 덩어리고, 꽉 차 있는 듯하나 공허하고, 다 가진 듯하나 아무 것도 쥔 것이 없고, 함께 있는 듯하나 항상 혼자인 인물. 모순 투성이의 그 Patrick Bateman을 다른 누가 그렇게 연기할 수 있었을까요? (What’s Eating Gilbert Grape(1993년), This Boy’s Life(1993년), Total Eclipse(1995년) 등의 영화에서 볼 수 있듯) DiCaprio도 연기파 배우임을 인정하지만, 이 영화의 Patrick은 오로지 Bale을 위해 만들어진 역할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를 위해 상당한 감량을 한 듯 보이는 그의 마른 얼굴과 그에 걸맞는 분장은 메마르고 잔인하며 야비한 주인공의 성격 묘사에 맛을 더해 줍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세간에서 이야기 하듯, ‘헛된 세상 것을 추구하는 까닭에,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탐욕’, 특별히 ‘남성들의 (드러나는) 허세·허욕과 (감춰진) 폭력성’을, 1980년대의 미국 Wall Street를 무대로 그린 영화가 바로 <아메리칸 사이코>인 것입니다. 특히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심도 깊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지막 반전이야말로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백미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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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Gore/Slasher 영화의 하나로 그저 단순하게 넘겨 버리기에는 아까운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다고는 해도, “그렇다면 이 영화를 기꺼이 추천하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요”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끔찍한 장면에 선천적으로 앨러지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나 심약(心弱)하신 분들, 또는 영화의 숨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청소년들은 아예 처음부터 보시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평소 전쟁 영화도 제대로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아직껏 <라이언 이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도 보지 못했습니다) 입장에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기왕이면 생각할 만한 주제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영화를, 그게 어려우면 그 표현 방법이나 수단이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지 않은 영화를 골라보는게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좋은 (숨은) 영화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비슷한 교훈을 얻자고 굳이 비위가 상할 정도로 엽기적인 영화나 선정적인 영화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실제로 캐나다의 한 연쇄 강간살인범이 Ellis의 원작 소설을 읽고 그런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품게 됐노라고 자백했듯이, 담고 있는 내용보다는 그 그릇을 먼저 보고 그것을 모방하는데 발 빠른 것이 죄인된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요 –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파트에 틀어박혀 보는 비디오란 것이 모두 Porn이나 Gore/Slasher 영화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런 영화를 골라 글을 쓰는가?”라고 물으신다면, “특별히 Gore/Slasher 영화를 즐기시는 분들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또 저같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이런 영화를 보게 된 분들이 계시다면, 그냥 심심풀이로 넘겨버리기보다는 영화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라고 대답을 할 수 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Patrick Bateman은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넘치도록 갖춘 것만 같습니다. Harvard 졸업에 Wall Street에서 내노라 하는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합병·매수(mergers & acquisitions)를 맡아하고 있는 그는, 회사의 절친한 다른 부사장 친구들 사이에서 “이성의 목소리”(He’s the voice of reason), “(이웃처럼) 친근한 놈”(the boy nextdoor)라고 불리울 정도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일단 자신의 겉모습 꾸미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그의 아침 독백을 듣다 보면, 여자인 저도 알지 못하는 심오한 미용 비법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니까요. 날마다 이대로 하려면 참 부지런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예뻐지고 싶은 분들은 다음을 읽어 보시고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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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ame is Patrick Bateman. I’m 27 years old. I believe in taking care of myself, in a balanced diet, in a rigorous exercise routine. In the morning, if my face is a little puffy, I’ll put on an ice pack while doing my stomach crunches. I can do a thousand now…. After I remove the ice pack, I use a deep pore cleanser lotion. In the shower, I use a water activated gel cleanser. Then a honey almond body scrub. And on the face, an exfoliating gel scrub. Then I apply an herb mint facial masque, which I leave on for 10 minutes while I prepare the rest of my routine. I always use an aftershave lotion with little or no alcohol, because alcohol dries your face out and makes you look older. Then moisturizer, then an anti-aging eye balm, followed by a final moisturizing protective l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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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는 피부 마사지와 손톱 가꾸기, 살갗 곱게 태우기에도 열심을 내며 미용 살론에 드나듭니다. 그리고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우할까에 불안해 하며 전전긍긍하고는 합니다. 약혼자 Evelyn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서며 Patrick은 걱정을 합니다 – “I’m on the verge of tears by the time we arrive at Espace, since I’m positive we won’t have a decent table. But we do, and relief washes over me in an awesome wave.” 그리고는 “메뉴가 메탈에 점자(點字)로 새겨져 있네”(The menu’s in braille)하고 Evelyn의 사촌이 건네 주는 메뉴판에 자신을 비춰 보는 것을 물론(!)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겉모습 치장에 연연하기는 그의 다른 친구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Valentino Couture 양복과, 부티나는 Oliver Peoples 안경, 최신 스타일의 헤어컷, 고급스런 명함 등으로 경쟁하듯 자신을 두르고, 서너 명이 먹은 식사가 한 번에 570불이나 (그것도 80년대에) 하는 최고급 식당을 “거, 나쁘지 않구만”(Speaking of reasonable, only 570 dollars. That’s not bad)하고 다니는 허세를 부립니다 – 당시 최고의 식당으로 여겨지는 Dorsia란 곳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치 자신의 능력을 반영하는 것처럼, 모두 다 거기에 자리를 예약하는데 목숨을 걸고 있는 듯 보입니다. 80년대 댄스 클럽 복장과 전혀 안 어울리게 튀는 고급 양복을 입은 채로, 클럽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무시하고 돈으로 새치기를 하며 특권층인양 으시댑니다.

이런 무리들과 어울려 한 몫을 하고자 Patrick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는, Robert Palmer의 신곡 “Simply Irresistible”이 들리는 헤드폰 속 자기 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그에게 앵앵거리는 약혼자를 귀찮아하며 그가 내뱉는 한 마디, “Because I want to fit in!”에서 알 수 있습니다. Christian Bale은 인터뷰에서, (앞서 말한) Patrick의 아침마다의 정성어린 자기 가꾸기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배우가 연기를 위해 촬영 직전 분장을 하듯, 세상과 어울리기 위한 연기를 하기 위해 Patrick도 분장을 하는 것이라고. 피부 Masque를 벗기면서 Patrick은 말합니다 – “There is an idea of ‘a Patrick Bateman’. Some kind of abstraction, but there is no real me. Only an entity – something illusory. And though I can hide my cold gaze, and you can shake my hand and feel flesh gripping yours, and maybe you can even sense our lifestyles are probably comparable, I simply am not there.”

그러나 그런 가상한 노력은 왠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영화의 맨 처음 장면에서 우리는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쟤 Paul Allen 아냐? 아니, 그건 Reed Robinson이구, Paul Allen은 저기 있잖아…. 같은 회사에서 몇 년을 부사장으로 함께 있으면서 그들은 아직까지 얼굴을 헷갈려합니다. 그런데 같은 부사장이긴 하지만 남들 눈에 유난히 더 별 볼 일 없는 인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주인공 Patrick입니다. 특히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부사장으로 묘사되고 있는 Paul Allen은 언제나 Patrick을 다른 부사장인 Marcus Halberstram이라고 생각하는데, Patrick은 그것을 당연하다(logical)고 합리화합니다 – “Allen has mistaken me for this d***head, Marcus Halberstram. It seems logical because Marcus also works at Pierce & Pierce, and in fact does the same exact thing I do. He also has a penchant for Valentino suits and Oliver Peoples glasses. Marcus and I even go to the same barber, although I have a slightly better haircut.” Evelyn의 말로 미루어 보아(Your father practically owns the company. You can do anything you like, Silly.), Patrick은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자란 인물처럼 보이며 어쩌면 Harvard도 집안 배경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낙하산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유부단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교적이지 못한 그의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능력있는 (Yale 출신의) Paul Allen에게 항상 무시를 당하는 Patrick은 마음 속에 울분을 품고 있습니다. Paul에 대한 불같은 경쟁심은 (그 유명한) 명함 장면에서 잘 나타납니다. 자기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예약도 못하고 조롱만 당한 Dorsia에 (그것도) 금요일 밤 자리를 얻었다는 Paul의 자랑에 열이 받을 대로 받아있는 터에, 어제 새로 뽑아 자부심이 대단하던 자기 명함을 무색하게 하는 Paul의 점잖고 품위있는 명함을 보고 Patrick은 이성을 잃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거리의 행려자를 죽입니다. 그 장면에 놀라는 옆의 강아지까지도.

그리고 얼마 안 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여전히 자기를 Marcus로 생각하는 Paul과 저녁 약속을 한 Patrick은, 역시 Dorsia에 갔었어야 했다는 둥, 자기라면 거기 예약을 할 수 있었다는 둥 불평을 하는 Paul에게 슬슬 비위가 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동료의 불편한 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오만을 드러내던 Paul은 결국, 자기가 Marcus라고 알고 있는 상대에게 결정적인 실수를 합니다.

 














Paul 그런데 (네 애인) Cecilia는 어때? 지금 어딨는데? (And uh- Cecilia. How is she? where is she tonight?)
Patrick Cecilia! 어…, 음…., 내 생각엔, 음……, Evelyn Williams하고 저녁 먹고 있을걸. (Cecilia! Uh…, well…, I think she’s having dinner with, ummmm, Evelyn Williams.)
Paul 엉덩이 이쁜 Evelyn 말야? 그 멍청이 Patrick Bateman의 애인이지. 그런 얼간이 놈! (Evelyn? Great ass. Goes out with that loser Patrick Bateman. What a dork!)
Patrick (열 받아서) 마티니 한 잔 더 할래, Paul? (Another Martini,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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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이 오를 대로 오른 Patrick은 만취한 Paul을 자기 아파트로 끌어들여 결국 살해하고 맙니다. 값비싼 양복을 보호하기 위해 우비를 두르고 Huey Lewis and the News의 노래에 맞춰 Moonwalking을 하는 등 코믹한 모습으로 묘사되고는 있지만, 그간 마음에 품어왔던 온갖 분노를 한꺼번에 용솟음치듯 내뿜으며 잔인한 “도끼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는 소리칩니다 – “Try getting a reservation at Dorsia now, you f****** stupid bastard!” 앉아서 cigar를 피우며 처참해진 Paul을 바라보던 그는 곧 시신을 Jean-Paul Gaultier 슬리핑 백에 담아 끌고 나갑니다. Paul의 사망 사실을 당분간 위장하기 위해 그의 아파트에 들른 Patrick은 여행 가방을 챙겨 그가 영국으로 여행을 떠난 것처럼 꾸밉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는 Paul과 자기 아파트의 전망을 비교하며 시기심을 거두지 못합니다 – “When I get to Paul Allen’s place, I use the keys I took from his pocket before disposing of the body. There is a moment of sheer panic when I realize that Paul’s apartment overlooks the park, and is obviously more expensive than 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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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에서 암시되는 바로, Patrick이 이런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은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주 훨씬 이전부터임을 알 수 있지만, 어쨌든 화면상으로는 이렇게 Paul을 살해한 이후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살인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살인 도구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상천외하고 다양하며 그 방법 또한 매우 잔인한데,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 대상이 주로 여자라는 점입니다. Paul과, 우스꽝스런 이유로 살인에 실패한 Luis를 제외하고는, 행려자나 여자들과 같은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분노와 좌절감을 터뜨리며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도입 부분, 여러 사람들과 어울린 식당 테이블에서 행려자나 여성, 황금만능주의 등에 대한 그의 현학적인 일장연설을 기억한다면, Patrick이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입으로는 인권이니 여권(女權)이니, 평등이니 정의니 하면서, 그리고 자기보다 힘센 사람들에게는 힘도 못 쓰면서, 그 울분이나 스트레스를 약자를 상대로 풀고, 그들을 상대로 잘난 체를 하는 이중인격자를(다른 평론에서는 ‘남자들’이랍니다. 형제님들, 죄송합니다.) 대표하는 것입니다. Patrick은 순진한 비서 Jean의 외모를 놓고 함부로 말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여자를 비하하는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하며, 클럽에서 만난 여자 모델을 대놓고 무시하고 약혼녀 Evelyn에게 절교를 선언할 때도 냉혈한이긴 매 한가지입니다. 거리의 여자들을 아파트에 데려다 놓고는, 스스로를 능력있는 Paul로 위장하여 으시대며 평소에 받지 못하던 인정을 얻고자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Patrick 내가 뭐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 (Don’t you wanna know what I do?)
여자들 아뇨. 아니 별로요. (No. No, not really.)
Patrick (무시하고) 거 뭐냐, 난 Wall Street의 Pierce & Pierce란 회사에서 일하는데, 들어본 적 있나? (Well, I work on Wall Street for Pierce & Pierce. Have you heard of it?)
여자들 (전혀 관심없다는 반응)
Patrick (실망한다)
여자들 (집안을 두리번거린다)
Christie 와, 집 좋네요, Paul. 얼마나 주고 산 거에요? (You have a really nice place here, Paul. How much did you pay for it?)
Patrick 사실, 니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싸지는 않았다고 말해줄 순 있지. (Well, actually, that’s none of your business, Christie. But I can assure you, it certainly wasn’t cheap.)

어쨌든 계속되는 엽기적 살인행각으로 완전히 이성을 잃게 된 Patrick은 길에서 고양이를 죽이고, 그걸 보고 뭐라고 하는 할머니를 죽이고, 그걸 보고 추격하는 경찰들을 죽이고, 아파트 수위와 청소부까지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장면 장면의 묘사가 어쩐지 현실감이 떨어지고 만화 같기만 한데, 그것이 다 이유가 있는 연출임을 나중에 알 수 있게 됩니다.) 회사 자기 사무실에 쫓기듯 들어온 그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관객도 몰랐던) 살인행각 모두를 고백하고 도움을 구하는 메시지를 자동응답기에 남깁니다.

다음날 깨끗하게 ‘목욕재계’를 하고 찾아간 Paul Allen의 아파트. 사용자 삽입 이미지그런데 그곳은 알고 보니 남의 집이었습니다. 혼란함에 휩싸인 Patrick은 평소 그를 연모하던 자기의 비서 Jean에게 전화를 겁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다시 변호사를 찾아 Harry’s Bar로 나서지만 슬프게도 자기 변호사조차 그를 Davis라는 다른 인물로 착각하는게 아닙니까. 어제 응답기의 메시지를 기막힌 농담으로 받아들인 변호사는 그에게 말합니다 – “Davis, 내가 누굴 험담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말야, 뭐, 농담이 끝내 주긴 했지만, 그래도 … 자넨 한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했어. 그런 얼간이 Bateman을 두고 그런 농담을 하다니. 얼마나 따분하고 줏대없고 시시한 인간인데….” (Davis, I’m not one to bad-mouth anyone. Your joke was amusing. But … you had one fatal flaw. Bateman is such a dork. Such a boring, spineless lightweight….) 그게 아니라고, 자기가 바로 Bateman이고 Allen을 죽인게 사실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Patrick에게 변호사는 급기야 화를 내며 말합니다 – “하지만 그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이런 농담 더 이상 유쾌하지도 않군…. 그건 불과 10일전 내가 Paul Allen과 런던에서 두 번이나 저녁을 먹었기 때문이야.” (But that’s simply not possible, and I don’t find this funny anymore…. Because I had dinner with Paul Allen twice in London just 10 days ago.)

이제까지의 엽기적인 모든 살인 행각이 사실은 그의 머릿 속, 그만의 Matrix에서 일어난 환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Patrick이 Paul Allen의 피가 배어 나오는 슬리핑 백을 질질 끌고 나가도 아파트 수위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며, 다음에 이어지는 아파트 밖의 장면에서 이제까지 보이던 바닥의 핏자국이 깜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대로) 충격적인 길거리의 연쇄 살인(특히 경찰차가 권총 한발에 폭발하는 장면)이 너무나 만화처럼 그려진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재미있는 열쇠는 영화의 도입 부분에 나타납니다. 댄스 클럽의 바에서 크레딧카드를 내미는 Patrick에게 여자 바텐더가 여기선 현찰만 받는다고 면박을 주자, 그녀의 등에다 대고 그는 소리를 지릅니다 – “You’re f****** ugly b*t*h! I wanna stab you to death and play around with your blood!” 하지만 바텐더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 그에게 술잔을 건네고, 그는 태연히 미소를 짓습니다. 그의 무시무시한 독설을 그녀가 듣지 못한 것은 클럽 안이 너무 시끄러워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망신을 당한 그 순간 바텐더에 대해 품은 Patrick의 악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런 결말을 두고 ‘비겁하다’고 혹평을 하기도 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5장 21-22절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머릿 속에 품는 형제에 대한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살의 등을 이 영화의 실제적인 살인 장면과 다른 것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는 머리로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명하시는데, 어떤 사람더러 바보라고 생각만 해도 그것은 살인이라 말씀하시는데, 이 영화의 끔찍한 장면만을 살인이라고 말할 사람이 감히 있겠는지요? 우리들 머릿 속, 우리들 안의 Matrix 속에서 우리는 오늘 또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지요? –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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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Patrick 안의 또 다른 Matrix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Paul Allen의 행방을 추적하던 형사 Kimball 또한 실제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실제 인물이 아니라면, Kimball이란 인물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또한 관객에게 안쓰러운 느낌을 줄 정도로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영혼, 설레는 마음으로 Patrick을 연모하고, 그의 살인 일기를 읽으며 눈물을 떨구던 비서 Jean. 흉악한 Patrick 조차 죽일 수 없었던 인물 Jean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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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Kimball은 이미 죽은 듯한 그의 ‘양심’을, Jean은 참된 ‘사랑’에 대한 그의 갈구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영화에서 행려자를 죽이고 난 후, Patrick은 다음과 같이 독백을 합니다 – “살과 피, 피부와 머리카락, 인간임을 나타내 주는 모든 특질들을 나는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하고 확실한 단 하나의 (인간의) 감정도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과 혐오 밖에는.” (I have all the characteristics of a human being – flesh, blood, skin, hair, but not a single, clear, identifiable emotion, except for greed and disgust.) 비록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도 양심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기에, Kimball의 집요한 추적에 식은 땀을 흘린 것이었을 겁니다. 혐오감 밖에 남은 건 없다고 아무리 우겨대도 그 역시 참된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기에 그 사랑을 차마 죽여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Patrick은 탐욕과 혐오가 넘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약한 육신의 슬픈 자화상,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우리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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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지영] (羅生門, Rashomon) 승려와 나무꾼

영화 속의 숨은 그림 찾기


<라쇼몽>(羅生門, Rashomon)
승려와 나무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독 쿠로사와 아키라(黑澤 明, Akira Kurosawa)

개봉연도 1950년(일본)/1951년(미국)
등급 등급무(無) – 폭력, 성인용 주제
원작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각본 쿠로사와 아키라, 하시모토 시노부
촬영 미야카와 카주오

주요 등장 인물

산적 타조마루
무사 남편 타케히로
아내 마사고
나무꾼
승려
행인
무당




미후네 토시로
모시 마사유키
마치코 교
타카시 시무라
미노루 치아키
키치지로 우에다
후미코 혼마


사용자 삽입 이미지지난 1998년, 88세의 나이로 타계한 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Rashomon)은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서구에 일본의 영화을 알리는 전기를 마련한 작품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일본의 국가대표 감독, 쿠로사와의 절제된 영상과 언어는 관객으로 하여금 한 폭의 수묵화나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쓸데 없는 대사나 군더더기 장면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른한 오후, 나무 아래 산적 하나가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 위로 흔들리는 그림자 몇 조각. 한 줄기 바람이 나뭇잎을 흔듭니다. 산적의 얼굴 위에 살랑댑니다. 그 바람은, 지나가는 말 위의 신부가 쓰고 있던 베일 한 끝을 살짝 제칩니다. 순간 스쳐 지나는 신부의 얼굴. 아까까지 늘쩡거리던 사내의 눈에 반짝 기운이 돕니다. 그후, 남편이 산적과 사라진 후, 물가를 찾아 살포시 내려서는 여인의 발. 물과 희롱하는 여인의 조용한 흰 손. 서로 주고 받는 대사 몇 마디 없이, 이렇게 이야기는 그림을 따라 흐릅니다.

이처럼 아련한 여백의 미와 시적인 언어로 옷을 입힌 쿠로사와의 이야기가 서양 세계의 찬사를 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독특하게 아름다운 영상도 영상이지만, 당대의 서양 지성들에게 “진리는 없다”며 진리의 상대성을 제기하는 동양의 ‘신선한'(?) 철학이 효과를 본 것입니다. 참고로 <라쇼몽>은 일본 내의 흥행에서 실패했을 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비평가들은 이 영화의 베니스 그랑프리 수상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국내 흥행에 실패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작년 칸느 영화제 경쟁 부분에 초청된 임권택 감독의 <춘향>의 기록과 어쩐지 비슷합니다. 서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면, 하나는 수상을 했고, 다른 하나는 못 했다는 점. 상을 받은 후에도 <라쇼몽>은 자국 비평가들에게 여전히 찬밥 신세였지만, 초청을 받은 후 <춘향>은 국내 비평가들의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는 명작으로 갑자기 승격됐다는 점. 일본의 정서에 거의 무지하기 때문에 두 번째의 이유를 논한다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이지만, 쿠로사와가 수상한 이유는 알 것도 같습니다.

(지난 5월호 ‘사족’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국(異國)만의 전통성을 내세워 국제 무대에 선 영화는 일단 ‘독창적’이라는 점에서 유리할 수는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 ‘보편성’을 결여한 주제를 강요한다면 그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모으는 것으로 그치기가 쉽습니다. ‘빈틈 없고 계산 빠른’ 쿠로사와는 시각적으로 일본의 전통을 수용한 그림에다 보편성을 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선천적인 죄성, 자기 중심적 본성, 이기심 등, 인간 본연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한편으로, 동양 (불교)의 ‘자비’를 통해 휴머니티의 문제에 접근하는 시도를 했을 뿐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등 크고 작은 전쟁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변모한 여성의 위상을 재조명하였던 것입니다. 즉, 일본 중세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로사와가 그리고 있는 여성상은 전후 20세기의 여성입니다. 영화의 처음, 나약하고 순종적이던 ‘안개꽃’ 신부는 산적에게 육체를 유린 당한 후, (은장도를 꺼내 할복자살을 시도하리라는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결국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산적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까지 복수를 할 만큼 당돌하고 능동적인 ‘억새풀’ 여성으로 변모합니다. 영화의 주제가 1950년대 당시의 시대 흐름과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1980년대 베니스 영화제에서 강수연씨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적으로 ‘대리모’ 논쟁이 한창이던 당시의 상황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 배경 음악에 있어서도 국제적인 감각에 일본의 고유한 맛을 곁들일 것을 이미 계산에 넣은 쿠로사와는, 라벨(Ravel)의 (그 유명한) <볼레로>(Bolero)를 일본풍으로 변주하여 중세 일본을 담은 그림을 따라 리듬감 있게 흐르게 함으로써, ‘친숙’하면서도 왠지 ‘낯선’듯한, 독특한 느낌의 스타일로 세계의 관객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요절한 일본의 대표적 근대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1915년 문단 데뷔작 <라쇼몽>에서 영화의 제목과 소재, 그리고 배경을 따오고 그의 1921년작 <숲속>의 내용을 함께 엮어 쿠로사와 아키라와 하시모토 시노부가 각색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나무꾼은 원래 류노스케의 <숲속>에는 없던 인물인데, 극적 효과를 위해 쿠로사와가 새로 만들어 넣었다고 합니다. 비록 나중에 첨가된 인물이긴 하지만 영화의 나무꾼은 ‘목격자’ 및 ‘문제 제기자’, 그리고 ‘제4의 진술자’로 ‘맹활약’을 하며, ‘자비’,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영화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비 내리는 라쇼몽에 쭈그리고 앉아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를 되뇌는 나무꾼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의 곁에는 똑같이 심각하고 혼란스런 표정의 승려가 앉아있고 지나가던 행인이 여기에 가세하는데, 나무꾼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 화창한 오후, 한 무사와 그의 신부가 숲을 지나다 산적을 만나게 되고, 나무꾼이 무사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얼마 후 말에서 팽개쳐져 바닷가에 기절해 있던 산적이 잡혀 오게 되고, 절에 숨어 있던 신부가 끌려 나오고, 이어서 무당을 통해 죽은 무사 남편의 영혼까지 불려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산적이 무사의 아내를 강간했다는 것과 무사가 죽었다는 두 가지 명백한 사실만 빼놓고는, 이들 세 사람의 진술이 모두 엇갈립니다. 게다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는 것입니다. 산적과 신부는 자기가 무사를 죽였다고 하고, 무사는 자살이라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부분 예상되는 살인 사건 용의자들의 증언이란 것이 “난 안 죽였다”일텐데, 서로 자기가 죽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잡힌 이상, 어쨌든 곧 죽게 될 산적의 몸인데 사나이 기개나 세우고 죽자….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지켜야지. 게다가 저 가증스런 남편을 한껏 욕되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내가 명색이 무사인데 명예롭지 못한, 비굴한 내 죽음이 밝혀지면 이 무슨 망신인가…. 이 모든 진술들이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감추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안 죽였다’고 하며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보다 더 수준 높은, 아니 아주 무서운 거짓말입니다. 그런 수준 있는 엇갈린 증언들을 놓고, 승려는 “더 이상 인간을 믿을 수 없단 말인가!”하며 또한 수준 있는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꾼의 증언은 이와는 또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이미 시체가 된 무사를 발견한 것 뿐이라고 진술했지만, 사실은 신부가 강간을 당한 직후부터의 사건을 전부 목격했다는 것입니다.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자를 ‘서로 안 갖겠다고’ 미루는 남편과 산적의 비굴함에 기가 막혀 하던 아내는, 남자의 허세를 교묘히 이용해 둘이 칼로 승부를 겨루도록 몰아 갑니다. 결국 산적의 칼에 남편이 죽고, 여자는 도망가고, 여자를 놓친 산적은 무사의 말을 타고 가다 말등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미스테리의 진상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그다지 별 볼일이 없어 보입니다. 법정에서는 왜 그렇게 진술하지 않았느냐는 행인의 추궁에 나무꾼은 “괜히 사건에 말려들기 싫어서” 라며 말끝을 흐립니다. 그리고 처음 시작처럼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를 다시 되뇌는 나무꾼. 인간성의 상실을 한탄하며 고뇌하는 승려. 둘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비가 그칠 때만 기다리고 있는 행인. 이 셋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비 내리는 라쇼몽에 갑자기 버려진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낼름 아이의 입은 것을 벗겨내고 지닌 것을 취하려는 행인의 파렴치한 행동에 나무꾼은 분노하지만, 행인은 ‘아이를 버린 부모나 또 나무꾼 너나, 다 나와 마찬가지로 파렴치한이 아닌가’라며 나무꾼을 조롱합니다. 약삭빠른 행인은 여인이 떨어뜨린 값진 은장도를 슬쩍한 것이 나무꾼이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입니다. 괜히 사건에 말려들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무꾼은 그 은장도 때문에 시치미를 떼었던 것입니다. 이기주의는 인간의 타고난 죄성이라고 믿고 있던 쿠로사와는, 이처럼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4명의 인물들의 입으로 4번 반복해서 듣게 된 ‘서로 엇갈리는 강간과 살인의 진술’을 통해 진실의 상대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진실이란 인간들 각각의 이기적인 시각이나 소욕에 의해 왜곡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낭패감과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무꾼을 한껏 조롱하고 행인이 유유히 사라진 후,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어느새 빗줄기는 잦아 들고 나무꾼이 아이를 안으려고 하는데,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승려는 화들짝 놀라 그를 책망합니다. 애를 들어다 버리려는 줄로 안 것입니다. 하지만 승려는 아이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우겠다는 나무꾼의 말에 감격을 금치 못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맙소. 당신 덕분에 인간에 대한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됐소.” 이미 폐허가 된 라쇼몽이 상징하듯, 타고난 이기심에 의해 무너져 버린 인간의 도덕성이 아이에게 자비를 베푼 나무꾼을 통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흔히들 말하기를 영화 <라쇼몽>의 이야기는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세상에 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해자인 산적의 말도, 피해자인 신부의 말도, 그 남편인 죽은 무사의 말도, 심지어는 나무꾼의 말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이기심과 욕심에 의해 왜곡된 거짓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거짓 뿐인 세상에서도 각 개인의 의지(意志)만 꿋꿋하다면 인간의 존재는 가치있다고, 믿을 만하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명성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바로 그 <라쇼몽>을 미국에 유학 와서 드디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영화를 보면서 내내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꽤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터라, 그때까지만 해도 Humanism과 Christianity의 차이가 뭔지 분간 못할 만큼 제대로 알지도 못했었고, 그저 무조건 예수 믿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면 다 되는 줄 알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 개과천선을 했다는 생각에 내심 흐뭇하던 그때, 제가 감정이입을 했던 대상은 바로 한탄하던 ‘승려’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무꾼’의 심정이 되어 이 영화를 봅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지킬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승려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이를 받아 안고 서 있던.

적어도 나무꾼은 자기의 죄성을 절절히 깨달은 자입니다. 그랬기에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성에 대한 신뢰나 휴머니즘을 운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스로는 의로운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를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봅니다. 나도 이 정도로 쓸 만한데 설마 나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더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더 나아가 ‘자기 의’라는 것까지 갖추고 있다면 영화의 승려처럼 세상을 한탄하겠지요. “(나만 빼고) 이 세상은 왜 이런가?” 의아해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교만한 죄성이나 이기적인 소욕에 따라 왜곡된다는 이 영화의 주제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해서 달라 보이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구나!” 라는 절절한 깨달음으로 바라보는 세상. 각 개인의 의지(意志)가 아무리 꿋꿋하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존재는 무가치하다는, 인간이란 존재는 스스로는 믿을 수 없는 악한 존재라는 깨달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라보는 세상. 그것은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므로 진리는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진리는 있으며 진리는 오직 하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우리는 다 양(羊)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1-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며칠 전 한겨레 신문에 실린 어떤 가수의 인터뷰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고 웃음이 난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노래 잘하는 줄 알던 아마추어였는데, 지금은 노래 못하는 프로이다.” 나의 죄인됨을 철저히 회개하지 못하고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스스로를 착각하던, 그리고 여전히 (너무 자주) 그렇게 착각하는, 저를 가리키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가수도 크리스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승려보다는 나무꾼이 좋습니다. 어설픈 아마추어보다는 성실한 프로가 되고 싶습니다. 죄인된 내 모습에 날마다 절망하지만,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