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성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 최영기 목사

이코스타 2004년 2월호

1. 목사님의 소개와, 하시고 계신 사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원래 목사였던 사람은 아니고,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Silicon Valley에 있는 회사에서 1977 85년까지 근무하다가, 41살에 신학교에 가서, 44살에 늦은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93년에 지금의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고요. 저는 예수님을 대학원 때 영접했는데, 그 때 성경을 읽어가면서 갖게 된 갈등 중의 하나는 현재의 교회와 성경에 나타난 교회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가정 같았는데, 현재의 교회는 왜 그렇지 못할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그 이유가 초대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루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에 부임하여 23 개의 목장(개별 가정 교회의 명칭)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목장 숫자가 약 130개 됩니다. 분가가 자주 있어서 정확한 숫자는 잘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증가가 기신자의 수평 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신자 전도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작년도 저희 교회에서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 영어 장년부와 중고등부를 합쳐서 약 280명입니다. 한 주에 약 5명 꼴로 침례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2000년도 인구 조사 통계에 의하면, 이곳 휴스턴의 한인 인구가 10,300명이라는 데 한국 사람이 가주나 뉴욕처럼 많이 않은 곳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라고 주위 목회자님들이 말씀해 주십니다.



가정교회에 관해서 배우고 싶으신 목회자들을 위해서,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5박 6일 간의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은 공부를 가르쳐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보여주고 나눔으로써 제자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제자를 만드는 일이 2 3년간은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가정교회에서는, 부부 싸움했던 얘기, 화났던 얘기들을 솔직히 나누고,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갔는지는 함께 나누면서 제자가 되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세미나에서도 보고 배우는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목자의 집에서 민박을 하면서 보고 배울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처음 예수님을 믿는 분들을 위한 성경 공부인 ‘생명의 삶’을 속성으로 가르쳐 드리고요, 목자들의 간증을 들려드림으로써 이론이 아닌, 살아 있는 현장을 소개하려 하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 사역에 있어서, 예배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세미나에 참석하시 분들이 주일 예배에 꼭 참석하고 가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2. 가정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 양육이 아닌, 삶을 통한 양육을 지향하신다면, 성경공부 교육은 따로 진행이 되는지요?



그렇습니다. 매주 화요일에 “삶 공부”라고 이름을 붙여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은 분들을 위한 ‘생명의 삶, 다음 과정인 13주‘새로운 삶’, 다음 과정 13주‘경건의 삶’이 같은 날 동시에 제공됩니다. 이 밖에도, ‘부부의 삶’, ‘부모의 삶’, ‘교사의 삶’등 실제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코스가 제공됩니다. 이 모든 과정들은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평신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고요. 그리고 ‘쎌 교회 지침서’를 저술하신 랄프 네이버 목사님이 쓰신 6주 짜리 “매일 영적 성장 가이드’를 우리가 번역해서 사용했었는데 최근에 정식으로 NCD에서 출판했습니다. 이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교재로 해서 가정 교회 차원에서 1대 1로 교육시킵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가정 교회 모임인 목장모임이 있고요, 주일에는 목장의 리더인 목자들의 모임인 ‘초원모임’이 있습니다. 초원모임도 원칙적으로는 목장모임과 동일하게 진행되지만, 목장모임이 나눔과 교제가 주제라면, 초원모임은 목양이 주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삶을 나누고 보이면서 제자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장모임의 목표이기 때문에, 12명이 넘으면 반드시 분가하도록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규모가 너무 커져서 진정한 삶을 나눈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저희 교회에서 목자가 수료해야 할 삶 공부 5 과목을 다 수료하지 못한 사람을 대행 목자라고 불러서 목장을 책임지도록 하는데 이들 중에는, 빠른 경우엔, 예수를 영접한지 7개월 만에 대행목자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좀 빠르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목자는 가르치는 리더가 아니라 섬기는 리더이기 때문에 가능하고요, 또 삶을 보여주면서 양육하는 것이기에, ‘전에 본 대로만 하라’로 권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그러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초원모임’을 통해 묻고 함께 기도할 수 있기에, 7개월이라는 신앙경력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귀납법적인 성경공부는, 주일 예배 설교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인 전체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이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습니다. 주일 예배에서도 새로 믿은 분들이 적응하기 쉽게 배려하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성경은 표준 새번역을 사용함으로써 개역성경의 어려움으로 인해 오는 거리감을 없애려고 하고있고요, 찬송도 같은 것을 반복해서 부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로 오신 분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고요, 설교도 가능한대로 교회용어가 아닌 평상어를 사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믿는 분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면 다른 교회에 가서 섬기시라고 하고 등록을 허락지 않는데요, 이것 또한 새로 오시는 분들이 더 쉽게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3. 왜 현대교회가 이토록 공동체성이 상실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교회에 공동체성이 상실되었다고 하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이 흐려졌다고 하는 편이 나을 듯 싶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3위 하나님께서 공동체셨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아담-하와의 셋이서 하나되는 가정을 공동체로 세우셨고,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셨지요.



현대 교회는 너무도 개인 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식이 상실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문제를 ‘기독교가 불교화 한다’고 하곤 하지요.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너무도 중요합니다만, 그것만을 강조함으로써 함께 하는 신앙을 무시하면 문제가 됩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경우에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공동체성의 상실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현재 가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 중에서도, 가정교회를 또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생각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기존 교회에서의 구역은 교회 내의 하나의 조직이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가정교회는 그 자체가 local church이고, 그 가정교회가 모인 것이 휴스턴 서울 침례교회인데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성이 상실된 교회는 원론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4. 공동체성이 회복된 ideal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세상에 ideal한 교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도 벌써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형태의 모습이 이상적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교회의 바른 모습의 기준은 형태라기 보다는 spirit입니다.



첫째는, ‘영혼을 구원해서 제자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영혼 구원에 집중하여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의 Great commission이라고 할 수 있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에서, 실제로 명령형은 ‘제자를 삼아라’뿐 입니다. 다시 말해, 영혼 구원해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둘째는, ‘기쁨’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기쁨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 가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저희 교회라고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만은, 많은 경우에 ‘이 교회에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5. 그렇다면, 그런 spirit을 가진 교회가 되기 위해, 현재 애쓰시고 계신 일들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희 교회가 지난 10년간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지역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일해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간은 세계선교를 향해가고, 그 다음 10년은 지역사회 봉사를 위해 가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느낌이라고 말씀 드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늘 Vision과 leadership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어 왔습니다. 교회의 미래 계획이라던가, 비젼이 뭐냐고 물어오면, 별로 할 말이 없었고, 리더십에 관해서도 내게 특별한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전이 아니라, ‘순종’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들은 음성에 순종하다 보니 가정 교회가 성공적으로 정착이 되었고, 가정 교회를 통하여 지역 사회 영혼 구원에 집중하다보니, 타지역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도 신경이 쓰여서, 작년에는 12팀이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에는 장기 기획위원회같은 모임도 없습니다.



6.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정말 힘든 문제 혹은 장애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요?



(1) 목회자의 의식구조가 문제입니다. 가정교회 세미나를 들으러 오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가정교회를 교회를 부흥시키는 테크닉정도로 생각하거나, 조직의 일부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가정교회 사역이 실패하게 됩니다. 가정교회를 도입해서 성공하시는 분들의 경우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나도 예전부터 같은 생각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몰라서, 혹은 기회가 없어서 못했다’고 하시는 분들이고, 둘째는, ‘이것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렇게 의식 구조가, 기존 교회가 가진 틀을 깨야만 진정한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공동체를 향해 가다 보면, 목회자들 스스로가 포기해야 할 부분이 참 많거든요.



(2) 교회 지도자들의 저항입니다. 장로나 안수집사님 같은 분들이, 가정교회를 받아들이다 보면, 다스리는 위치에서 섬기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 받아들이기에 힘드신 경우가 꽤 있습니다.



(3) 성도들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을 꺼려 하는 경우입니다. 가정교회를 하다 보면, 삶을 서로 오픈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삶이 노출 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있고요, 또 기존의 교회 전통이 편해서 변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4) 기존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두고, 가정교회 같은 공동체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려는 하는 경우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공동체성은 본질의 문제이지,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7. 성경적인 공동체를 가꾸어 가고픈, 유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소속된 교회에서 목사님만 이해해 주신다면, 청년부는 가정교회로 전환하기에 참 좋은 모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는데 주의하실 부분은, 청년들이 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지적인 성향때문에 모임이 자꾸만 지성화만 추구하게 되기 쉬운데, 이런 성향을 극복해서, 섬김의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고, 가르쳐서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줌으로써 제자를 만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듣는 것보다는 말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고, 사고보다는 느낌 중심으로 살며, dogma보다는 관계성 중심으로 산다고 들 하는데, 이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가정교회에 더 잘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commitment가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어른들 기준의 그런 헌신의 모습이 없을 뿐, ‘이거다’싶으면 더 없는 commitment가 나오기 마련이죠. 기존 교회 내에 가정교회의 모임이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양해만 있다면, 청년부 내에서 그런 공동체를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최영기] 2세를 살립시다

이민 교회가 이민 2세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보다 이민 역사가 긴 중국과 일본의 예를 볼 때에 지금 관심을 쏟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뻔합니다.
후대들을 신앙적으로 다 잃습니다. 중국과 일본 교회를 보면 2세들이 1세들의 신앙을 전승하지 못해서 1세 교회가 노인들만 남는
쇠락한 교회로 전락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부모님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2세들이 1세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해를 한다 해도 기초적인 용어나 알기 때문에 재미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미국 교회를 나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2세들은 미국에서 태어났으니까 미국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미국교회에서는 이들이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민 2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문화를 존중해주고 이들이 더 잘 이해하는 언어가 통용되는 교회를, “내 교회다”라는 소유의식을 가질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많은 한국교회들이 2세 목회에 실패하는 이유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주지 아니하고 부모들의 순
한국적인 문화를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간섭과 통제로 인하여 “나의 교회”라는 의식을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약 6년 전에 2세들을 위하여 성인
영어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재정적으로는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금전적으로는 100 퍼센트 지원을 하되 완전 자치권을 인정해주기로
했습니다. 교회 헌법도 바꾸어서 영어부가 한어부에 종속되어있지 않고 대등한 위치로 만들었습니다. 서울침례교회라는 우산 하에
한어부와 영어부가 존재하여 둘 중에서 주일 출석 인원과 예산이 더 많은 쪽 목사가 담임 목사가 되도록 했습니다. 현재로서는
한어부가 크니까 제가 서울침례교회 담임목사입니다. 그러나 한인 이민 숫자가 줄어들어 한어부가 성장을 멈추고 2세 교회가 1세
교회보다 더 커진다면 영어부 목사님이 담임목사가 될 것입니다.

영어부는 처음부터 다민족 교회로 시작하였습니다.
2000년도 인구 조사에서 한인이 1만 341명으로 집계된 휴스턴에서 전도 대상자를 한인 2세로 제한한다면 전도를 하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현재 영어부원의 30퍼센트가 백인을 포함한 타민족이고 교회 리더십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영어부가 한어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영어부 주일 출석 인원이 현재 약 250명입니다. 한어부와 대등한
입장에서 상호 협력하는 체제도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 학교에서는 한어부가 영어부 자녀들을 돌보아주고 있고, 중고등부
주일학교에서는 영어부가 한어부 자녀들을 지도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들이 고려해 볼만한 모델입니다.

[최영기] 공개하여 마귀를 물리치자

행복한 교회생활


공개하여 마귀를 물리치자


한인 교회에 분열이 잦습니다. 분열로 인한 상처로 교회를 외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 분열의 원인을 사람에게 두고 있습니다. 목회자와 지도자간의 갈등을 원인으로 생각합니다.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악한 영의 역사 때문에 교회가 분열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한 영들에 대함이라고 말했습니다(엡 6:12).


마귀의 주무기는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44). 악령은 거짓말을 통하여 교인들의 마음에 목회자에 대한 오해가 생기게 만들고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관계에 쐐기를 박습니다.


악한 영이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에 이를 물리치는 방법은 공개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음성적으로, 속삭임으로, 어두움 가운데에서 불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령의 궤계를 깨기 위하여서는 노출시켜야 합니다. 빛이 비추면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진리와 사실이 밝혀질 때에 거짓말은 힘을 잃습니다.


개인의 삶에서 악령의 역사를 물리치려면 공개해야 합니다. 중독증의 예를 들어도 그렇습니다. 중독증이 깊어지면 악령이 개입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중독의 사실을 노출시켜야 합니다. 남부끄럽다고 감추어서는 안 됩니다. 감추면 감출수록 악령이 점점 더 역사하여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숨기기 말고 공개하여 악령이 역사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앤 후에 주위 분들의 기도와 도움을 청하여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악령이 거짓말로 인하여 오해가 생겨서 관계가 깨지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피하거나, 뒤에서 불평하지 말고 얼굴을 맞대고 오해가 있으면 풀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악령이 역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저는 담임 목사로서 가능하면 투명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회자 코너라는 칼럼을 매주일 주보에 실어서 제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성도님들에게 노출시킵니다. 설교 시에도 제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합니다. 교회예산도 누구나 원하면 열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담임 목사의 목회 방침에 의문이 있을 때에는 직접 물을 수 있는 통로도 열어놓고 있습니다. 공개된 곳에 악령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영기] 교회에 나와서 기도합시다

행복한 교회생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합시다


한국 교회 자랑거리 중의 하나가 새벽 기도입니다. 성도들이 아침 일찍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예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새벽 기도에 문제가 노출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회라고 하지만 참석하신 분들이 기도에는 별로 시간을 드리지 않는 것을 봅니다. 기도 아닌 다른 순서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석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교통 수단의 발달로 근처에 있는 교회가 아닌 먼 곳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분들이 새벽마다 교회를 찾아 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감안하여서 저희 교회에서는 새벽 기도 시간을 갖되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시간도 제가 본당에 나와서 기도 드리는 시간인5시부터 8시 사이 아무때나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 기도하도록 하는 이유는 교회에 나와야 기도가 더 잘 되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집에서 기도하면 교회 오가는 시간을 절약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집에서 새벽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기도한다는 것이 여느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정해서 교회당에 나와 기도할 때에 규칙적으로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할 때에는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웬만큼 기도훈련이 되어 있는 분이 아니면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 장시간 기도한다는 것이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졸든지 잡념과 싸우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수요 저녁과 토요 새벽 기도회 시간에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 후에 중보 기도 시간과 개인 기도 시간을 갖는데 이때에는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도록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면 기도에 집중도 되고, 응답에 대한 확신도 생기고 영적으로 눌렸던 것이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 내용을 옆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배경 음악을 크게 틀어줍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를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더 큰 소리로 기도해서 옆 사람 기도가 귀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한 가지 형태만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묵상 기도, 대화식의 기도, 부르짖는 기도 등, 골고루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영기] “부부는 같이 잡시다”

행복한 교회생활


“부부는 같이 잡시다”


이 컬럼의 주제는 교회 생활이지만 이번에 결혼한 젊은 학생 부부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젊은 부부들 가운데에 각 방을 쓰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말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부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서로 편하기 때문이랍니다. 아빠가 공부에 몰두하느라고 각 방을 쓰기도 하지만 보통은 엄마가 아기를 떼어 놓지 못하기 때문에 아빠가 다른 방에 가서 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안될 일입니다. 비성서적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십시오. 아내는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이 주장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편도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주장합니다. 서로 물리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에 전념하려고 하여, 얼마동안 떨어져 있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다시 합하십시오. 여러분이 절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3∼5).”


요점은 부부는 성 관계를 요구해 올 때에 서로가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각 방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동안 기도하기 위하여 잠시 각 방을 쓸 수는 있지만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잠자리를 합치라는 것입니다.


젊은 부부 가운데에 아기를 같이 데리고 자는 부부도 꽤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도 건강한 부부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됩니다. 환경이 절대적으로 허락하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부부가 한 몸이 되기 위하여서는 둘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엄마가 남편보다 자녀에게 더 관심을 쏟는 것은 건강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기들을 데리고 자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기는 많고 주거 환경을 좁기 때문에 부득이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한국 남성들이 외도를 쉽게 했던 것은 아내가 자녀들과 같이 자면서 남편의 성적인 욕구를 외면했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분방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분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부부들은 같은 침대를 써야 하겠습니다. 자녀들은 가능하면 딴 방에서 재우고 부부끼리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같은 침대를 쓴다는 사실이 부부간의 친밀감을 보장해 주고 다투었을 때에 화해를 쉽게 만들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