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10, 2011 | 코스타 사역/tmKOSTA
2011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있었던, 신자은 교수의 “Justice: What Can Christianity Do About It?” 세미나를 두 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Justice: What Can Christianity Do About It?
과학기술의 발전, 물질문명의 고도화, 범세계적 가치로서의 민주주의로 특징되는 이 시대는 ‘인류 역사의 한계없는 진화’라는 신화로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과 국면에서 심화되고 있는 ‘injustice’의 문제로 인해, 도덕과 윤리의 창조적인 재정립의 노력과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의 제시가 시급하다.
본 TM세미나는, 크게는 21세기, 좁게는 일상의 삶이라는 context에서 (1) ‘정의’의 시대적 relevance를 먼저 타진해보고, (2)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의’는 무엇인지를 규명한 뒤, (3) 어떻게 ‘정의’를 구현해낼 것인지를 함께 고민할 것이다. ‘정의’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조명해주는지, 우리의 신앙과 학문/전공영역에서의 활동은 이를 위해 어떻게 헌신되어야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정해보기 원한다.
포스트모던시대의 Justice: 시대적 적실성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철학 교수인 Michael J. Sandel의 책 ‘Justice’는 미국을 물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인문사회서적이다. 좀처럼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기 어려운 인문사회서가, 그것도 ‘정의’라는 딱딱하고 고전적인 주제를 다룬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출판계의 화제거리였다. 이 묵직한 주제를, 빌 게이츠와 마이클 타이슨의 부wealth, 장기organs 거래, 대리모, 안락사, 동성결혼의 문제등 일상 생활에서 경험되고 논의되는 친숙한 사례들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접근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임마누엘 칸트,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민하고 논했던 정의, 도덕, 자유의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이 시대의 삶의 모습을 빚어내는 수많은 의사결정의 근거가 되는 핵심가치임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정의’와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안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정의’의 문제의 중요성,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가까운지를 환기하고 함께 고민하기를 ‘초청’하는 이 책에 대한 열정적인 반응은, 첨단 과학과 경제적 풍요로 특징되는 이 시대에도 ‘what i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질문이 역사 어느 때보다도 적실하고 긴요함을 반증해준다.
이성과 과학적 증거, 합리적인 사고와 논증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본질적인 가치 판단, 즉 what is right, what is the right thing to do의 답을 찾는 일에 우리는 매우 익숙하고 또 그것이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의사결정에 적용하는 ‘정의’의 기준은 종종 주관적이고 직관적이며 다원적이다. [인문학 콘서트]라는 책에서, 서울대 철학과의 황경식교수는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에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다원주의를 살아가는 지혜이자 윤리라고 말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그의 상황극이다:
1841년 미국 리버풀에서 필라델피아로 항해하던 윌리엄 브라운 호가 난파의 위기에 처한다. 승객들은 모두 구명보트에 올라 탔다. 그런데 인원이 초과되어 또다시 구명보트가 침몰할 상황이 되었다. 몇 명이 희생하여 나머지 승객들이 살아남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함께 전멸할 것인지. 선장의 도덕적 딜레마다.
생명이 귀하다는 가치를 적용할 때, 전멸보다는 일부라도 생존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누가 희생해야 하는가? 승객 전체의 이익(전멸하지 않고 일부라도 생환하는)을 위해서 개인(희생된)의 이익이 포기되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승객 개개인의 ‘생명’의 가치와 ‘생존’의 권리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는 ‘형평’의 가치를 적용할 때, 답은 안타깝게도 전멸이다. 무엇이 ‘옳은’ 결정인가? ‘생명’이라는 가치와, ‘형평’이라는 가치사이의 최선의 중간지점은 어디인가?
최근 한국에서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고있는 무상복지 문제를 생각해보자.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라는 두 가지 관점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다음 대선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 변수가 되고 있다. 무상복지라는 문제에 개입되어 있는 도덕적 가치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금 ‘what i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질문으로 돌아간다. ‘성장과 분배’, ‘개인과 사회’, ‘시장과 규제’, ‘효율과 형평’, ‘자유와 평등’ ‘개발과 보존’ ‘사유와 공유’ ‘경쟁과 협동’. 모두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다원화된 사회,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이렇게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가를 물어온다.
2011년 코스타의 본 TM세미나에 참석한 코스탄들은 자신의 일상과 친밀한 친구와 이웃간의 관계로부터 국제질서와 같은 거시적 구조의 측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면에서 제기되는 무엇이 옳은 것인가의 질문, 왜 불의가 이렇듯 prevalent한가, 또 불의라고 판단되는 사안에 대해서 어떤 태도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 정의라고 말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나누었다. 한진 중공업 사태, 동성애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을 지지하는 서명을 요청하는 친구를 대할 때, 힘으로 지배되는 국제정치사회에 과연 하나님의 법이 정의로운 규칙으로 작용할 수있을 것인가, 또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큰 수익을 올릴 수있는 업계의 용인된 영업방식에 대한 고민, 저개발국을 지원하는 정의로운 접근 방식은 무엇일지, 불투명한 교회재정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이슈들을 나누었다. 이러한 나눔을 통해서, 옳고 그름의 판단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우리의 삶을 align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소명이지만, 또한 우리 힘과 지혜, 능력, 의로움으로 감당할 수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들의 key는 무엇일까? (다음편에 계속)
Jul 18, 2011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전편에서 계속)
세상의 진리에서 하나님 마음으로
세상은 이야기 한다. 공부해서 남 주냐고. 하나님은 이야기한다. 공부해서 남 주라고. 어느 것이 더 감동을 주는 삶인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성경 속의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하는 이유는 일군들에게 월급 주기 위함이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포도원의 일군은 포도 생산의 수단일 뿐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포도원의 일군은 내가 껴 앉고 사랑으로 섬겨야 할 인격체이다. 누가 왜 공부하냐고, 왜 일하냐고, 묻거든, 남 주기 위해 한다고 대답하자.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까, 나의 공부와 나의 재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하자.
세상은 돌 다리도 두드려보라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한다. 발등 찍히더라도 믿고 품으라고 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고 말한다.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이 사랑이다. 세상은 ‘때문에의 사랑(love because)’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love nevertheless)’을 말한다. 세상은 가치 있는 것을 찾으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가치가 보이지 않는 곳에 우리가 먼저 가치를 부여하라고 말한다. 자식이 아무리 버릇 없고, 탈선 하고, 집을 나가도 믿고 끝까지 기다리며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에서 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의 법칙에서 하나님의 법칙으로
세상에서는 ‘기브 앤 테이크 (give & take)’를 이야기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위주로 social network를 만들라고 조언한다. 수 많은 self-help book들이 대인관계의 기술을 이야기한다. 꾸준히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놓으라 말한다. 언제 어떤 도움이 필요하게 될 지 모르는 것이 오늘날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 관계에 과감히 투자하라고 한다. 인생 최고의 투자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라고 최고의 경영서들이 말한다. 이 투자의 리턴은 물론 내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될 인맥이다. 하지만, 성경은 보물을 이 땅 썩어질 창고에 쌓지 말고 썪지 않을 천국에 쌓아 두라고 말한다. 선행을 베풀되, 절대로 나에게 되갚을 수 없을 것 같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외국인 나그네 같은 사람들에게 정성으로 베풀라고 말한다. 세상의 지혜로 보기에는 매우 미련한 일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지혜가 모르는 것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기억한 바 되시고, 우리에게 다시 넘치게 채우신다는 진리이다. 내 친구 중에 서울 구로구 외국인 노동자 진료소에서 3년간 그들을 돌보며 진료한 정형외과 의사가 있다. 중국어도 잘 하는 그 친구는 중국 노동자들에게는 중국말로 친절히 그들을 돌봐주곤 했다. 나는 지금도 내 친구가 그 때 천국에 쌓았을 보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디즈니 영화 알라딘의 주제곡처럼, 정말 a whole new world가 펼쳐질 것이다. 이 세상의 것들에 투자하기 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자하자.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위해 노력하는 Kingdom Builder가 되자. 인간 관계를 보면,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나 복음을 전해,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나와 이 세상뿐 만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 할 수도 영원(eternity)이란 시간을 함께 할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highway의 rest area 같은 곳이다. Rest area에 더 좋은 가구와 장식품을 사려고 돈을 쓰지 않는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들을 우리의 이웃들을 섬기는데 사용하자. 이 땅에 재물을 쌓기 보다, 하나님 나라에 보화를 쌓자. 영원히 남을 것에 투자하자. 영원의 인간관계에 투자하자. 우리의 섬김으로 한 영혼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누리게 하자.
하나님의 마음을 가짐이 하나님의 꿈이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 전에 내 삶에 목적은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좋은 학교에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몰고, 내가 하는 일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 딱 거기까지였다. 세상이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내 자신을 보니, 나는 회개할 것이 수없이 많은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거저 주신 인생이었다. 예전에는 내 자랑이자 목표였던 좋은 학교, 좋은 직장도, 주님이 주시면 감사, 아니어도 감사였다. 좋은 집도 차도 주시면 감사, 없어도 감사였다. 고난을 통해 연단을 주심을, 연단을 통해 나를 성숙하게 하심을, 기도의 자리로 더욱 이끌어주심을, 그 은혜를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무엇이기에, 나를 미국 땅까지 보내시어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는지 당신의 그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따름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내 안에 품게 하신 하나님이 참 감사했다. 이제 깨달았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 곧 하나님의 꿈이구나.
하나님의 꿈을 내 꿈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하나님의 가슴 아파하실 것들을 보면서 같이 슬퍼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 일들을 주님과 함께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 가족부터 시작해서, 직장 동료, 환자, 보호자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내 관심이 지금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닌, 하나님 나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꿈꾸었던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드렸다. 미국에 오기 전 대학부 수련회 때 눈물로 드린 기도와 같은 찬양 ‘I offer my life’에 주님이 응답하고 계셨다. 찬양 중에 나는 가사 그대로 ‘내 모든 소망, 계획도 주님께 드립니다, 나의 생명을 주님께 드리니 주 영광을 위해 사용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다. 그러자 내 꿈이 하나님의 꿈으로 바뀌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하리라’는 말씀이 믿어졌다. 내게 필요한 것이면 주님이 공급하신다는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생기자 지금 당장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다. 오히려, 내가 품고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주께서 이 자격 없는 사람을 존스 홉킨스 보건 대학원 크리스천 펠우쉽(Public Health Christian Fellowship) 회장으로 들어 쓰시고, 시카고 코스타 의료 세미나 코디(coordinator)로 사용하여 주셨다. 절대 내게 능력(ability)이 있어서 섬긴 것이 아니요, 모두 자원(availability)으로 섬긴 것이었다. 섬길 능력은 오직 주께서 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의 꿈이 내 꿈이 되어 갔다. 이제 내가 더 이상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악으로 깡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정진할 때, 내가 아닌 주께서 일하심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려 하고 저 사람과 친분을 두텁게 하려고 노력하고, 이 부탁하고 저 부탁하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었다. 하나님께 만남의 축복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사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주께서 친히 내 인간 관계도 주장해주시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내가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불러가며 기도하고 있다. 내가 받은 이 사랑과 기쁨을 그들도 누리게 해달라고. 주께서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약속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의 꿈, 하나님의 꿈이 내 꿈이 될 때,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주신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붙들자. 이미 승리가 예정되어 있는, 응답이 약속되어 있는 이 꿈에 우리의 인생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결론
우리가 서 있는 이 곳, 땅끝에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복음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대사(ambassador)로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자. 그런데 과연 ‘땅 끝’은 어디일까? ‘예루살렘’이 우리의 가족이고 ‘유대’가 우리의 친척과 친지라면 ‘사마리아’는 한 때 우리의 일부였던 우리 원수이다. 하지만 ‘땅 끝’은 말 그대로 땅 끝이다.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다. 가지 않으면 평생 모르고 죽을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다니지 않았으면 평생 우리와 아무 상관 없을 사람들을 만나고 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캠퍼스, 직장은 분명 우리의 땅 끝이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오면,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곧 땅 끝이다. 특별히 이 미국 땅은 전세계 민족과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다. 우리가 밖으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수많은 나라의 학생들이 이 곳으로 공부를 하러, 직장을 구하러 모여든다.
선교적인 삶
내가 만나는 친구들과 선후배, 선생님과 제자, 동료들에게 내가 아는 하나님을 소개해주고 싶은가? 한번이라도 예수님을 소개해준 적이 있는가? 말로 소개한 적이 없더라도, 교회에 같이 나가자고 한 적이 있는가? 아니, 아직 말을 꺼낸 적은 없더라도, 마음 속에 품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선교적 삶’을 살고 있다. 아프리카로 떠나야만 선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환자 중에 심한 심장병과 말기 신부전증 (end stage renal disease)로 지금은 돌아 가신 분이 계시다. 환자가 호스피스 기관으로 퇴원하기로 되어 있을 즈음 내가 그 환자를 주치의로서 돌보고 있었다. 퇴원은 해야 하는데, 거의 일주일이 다 지나도록 호스피스 시설에 자리가 나지 않아서 계속 병실에 있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병동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그 환자와 나는 격리 핼액 투석실에서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주셨다. 간호사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내 인턴은 호출을 받고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이 이 환자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통해서라도 기도를 받기를 원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난 환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지금 정말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이 내가 병동에서 환자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말씀 드렸다. 환자도 괜찮다고 했다. 난 하나님이 환자 분을 너무 사랑하신다고 말했고, 환자분을 알게 되고 환자 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어 내가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지금은 주께서 허락하신 육체의 고난으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평강으로 승리하길 소원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다 같이 이 일시적인 육체를 벗고 새 육체로 천국에서 함께 예수님 안에서 함께 멋지게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그 기도를 드리면서 나도 울고 환자도 울었다. 참 불평도 많고 정말 힘들어했던 흑인 아저씨 환자였는데, 어느새 그의 두 눈에 고인 눈물이 두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님의 마음이 내게 부어졌다. 내가 오늘 너의 기도를, 내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기다렸다고.
하나님의 도구됨
나는 늘 기도 드린다. 부족한 저를 오늘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소서 하고. 한번은 밤 근무 중에 호흡 곤란으로 응급실로 내원하신 폐암 말기 환자를 입원시킨 적이 있었다. 매우 야윈 백인 할아버지이셨는데, 문진(history taking)과 검진(physical exam)을 마치고 나서도 계속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에게 종종 찾아가 증세에 차도는 있으신지 물으며, 근무 중에 짬이 날 때마다 찾아가 할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드리려 노력했다. 할아버지께 먼저 나는 모든 사람은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라고 믿는다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도 그 말에 동의하신단다. 본인은 교회는 가보지 않았지만, 불교 서적은 많이 보았다고 했다. 밤새 여러 번 할아버지 병실을 찾아갔다. 이 할아버지가 말기 암으로 앞으로 몇 달 사시지 못할 생각을 하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내 안에 부어졌다. 할아버지, 이 세상 다음에 영원한 삶이 있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그 영원한 삶을 천국에서 누릴 수 있답니다 하며 용기를 가지고 우리 예수님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시한부 자기 인생을 잘 알고 있는 듯 내가 이야기하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경청해 주셨다. 복음에 대해 설명해드리고, 할아버지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할아버지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께서 놀랍게도 그렇게 하시겠다고, 어떻게 하면 영접할 수 있냐고 물으셨다.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으신 하나님의 기쁨이 내 마음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가 할아버지께 제가 하는 영접 기도를 따라 하시면 됩니다 하며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함께 기도를 드렸다. 어찌나 기쁘던지.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할아버지, 지금 천국에서는 할아버지 때문에 큰 잔치가 벌어졌어요.
지금 이 때를 위함
에스더 4장 14절에서 모르드개가 딸처럼 기른 자신의 사촌 에스더 왕후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네가 왕후의 位(status)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에 에스더는 16절에서 ‘죽으면 죽으리로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지금 하필 이 곳 미국 땅에서 특정 동네에서 사고 있으며, 특정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특정 직장을 다니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 속의 작은 만남 하나 하나를 위함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두신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한번은 응급실에서 두 명의 환자를 내과로 입원시키고 있는데, 두 환자 모두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었고, 환자와 보호자 모두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나님이 이 분들을 참 사랑하시는구나.’ ‘나에게 미국의사고시 시험을 보게 하시고 어쩌면 이 미국 땅 필라델피아로 부르셔서 이 분들을 모국어로 돌볼 수 있게끔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나는 내가 되기 원하는 의사상을 그리며 정진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우리 주님이 나를 들어 쓰심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오히려 생각이 참 단순해졌다.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제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도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하면 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오직 바라옵기는 오직 한가지 우리 주님께 쓰임 받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기도했다. 내 꿈은 단 한가지,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이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Living out His Dream
쇼 야노군이 한 말 “I am living out my dream.”을 기억하는가? 나에게는 그가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살고, 자기가 꿈꾸는 그런 삶을 살아도, 하나도 부럽지 않은 놀라운 비밀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꿈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I am living out His Dream).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 안에 강물처럼 흘러 넘칠 때, My Dream은 God’s Dream으로 바뀐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감사와 기쁨이 그 꿈 안에 있다. 그 어떤 사람도 줄 수 없는 위로와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은혜가 그 꿈 안에 있다. 내 꿈이 하나님 꿈이 될 때, 구하는 대로 주시는 놀라운 응답의 약속이 그 꿈 안에 있다. 내가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살아 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실 것이다. 우리가 낮은 곳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한 영혼 한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며 섬기며 겸손히 주님의 사랑을 전할 때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랑’으로 온 세상 위에 높이실 것이다. 당신이 모르던 달란트와 은사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영역에서 십분 발휘하게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고백해보자. “I am living out His Dream now.”
Mar 5, 2011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전편에서 계속)
외적 비교를 거부하자.
이제 ‘외적 비교’를 이야기해보자. 이는 남을 나의 기준에 비교하여 내가 남을 정죄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잣대를 남들에게 들이대는 것이다. 학생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하는데, 저 친구는 완전 불량하구나. 절대 상종해서는 안될 부류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적어도 예배와 봉사는 필수 인데, 저 사람은 어떻게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자기만 알고 변하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깃들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이미 교만해진 것이다. 이러한 비교는 나니아 연대기(Chronicles of Narnia) 저자 C.S. Lewis가 지적했듯이, 사단의 최고급 전략이다. 이러한 비교는 가장 효과적으로 은혜를 빼앗아 간다. 천사를 타락하게 하여 사단이 되게 끔 한 원인이 바로 교만이다. 내 기준이 정답이고, 나의 길이 왕도가 되면, 그 때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액세서리가 된다.
나는 내가 대학교 다닐 때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을 많이 괴롭혔다. 나는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획도 열심히 세우고, 시험 전에는 나름대로 계획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여동생을 위해, 손수 공부 시간표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동생이 공부하는 것은 내 눈에 안찼다. 나의 줄기찬 지적 때문에 동생과 사이도 안 좋아졌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학부 겨울 연합수련회를 다녀오고, 내 눈의 들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태도 때문에, 동생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동생에게 말을 하기 전에, 기도부터 하게 되었다. 내 기준으로 동생을 평가하지 않게 된 것이 내가 받은 그 겨울 수련회의 가장 구체적인 은혜였다. 물론 동생과의 사이도 더 좋아지게 되었다. 예배에서 받은 은혜를 쏟아 버리는 가장 빠른 길은 말씀을 내가 아닌 남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누구보다 우리 아빠가 들어야 하는데, 내 친구 누구누구가 들어서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먼저 든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의 영에게 묶여 있는 것이다. 나는 괜찮으니 이 말씀은 내 양심을 비껴가도 좋다는 자만은 더 이상 은혜를 구하지 못하게 만든다. 또, 우리가 우리 주변 사람들을 정죄하는 만큼, 우리의 은혜는 줄어든다. 언행일치가 부족한 장로, 권사, 목사 부모님을 보면서 실망한 자녀들이 있다. 그런데 기억하자. 주님께서 판단은 내 몫이 아니라 하신다. 우리의 몫은 오직 긍휼히 여김과 기도뿐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우리를 판단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내가 변화되어야 한다. 내 주위 사람들은 변화된 나를 보고 변화될 것이다. 나의 기도를 통해 변화될 것이다.
교만의 위력
교만이 있다면, 사실 어떠한 희생도 가능하다. 사랑장이라고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이런 표현이 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는데, 내 물질을 다 팔아 구제하고, 또 어떻게 내 몸을 다 내어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간단하다. 교만이 있으면 된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이 한 몸 희생해서 한 사람을, 아니 세상을 살린다는 신념이 있으면 된다. 내 것을 다 내어줄 때, 돌아올 남들의 존경 어린 눈빛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대수롭지 않다. 나의 헌신으로 내 진가를 사람들이 알아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손해볼 수 있다. ‘내’가 받을 영광이 내 삶의 원동력이 될 때, 우리 주님이 거할 곳이 없어진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도, 구제와 봉사가 가능한 까닭이 여기 있다. CSR (Cooperate Social Responsibility)라는 말이 유행이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말이다. 긍정적인 측면이 많지만, 이윤이 존재의 근간이 되는 기업은 CSR이 기업 이미지 홍보 전략의 하나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소리 없이 사회 봉사를 하는 기업을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
은혜로 교만을 넘어서자.
기억하자. 우리 주님은 우리 중심을 보신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쁘게 하랴 주님께 기쁘게 하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임을 잊지 말자.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흘려 보내는 생명의 통로, ‘Life Line’이다. 그 사랑을 공급받아, 하나님 주신 힘으로, 그 사랑으로, 우리는 온전히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당신의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앞에서 나는 내 안에 선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내 안에는 나를 높일 것이 없다. 은혜의 토양에서는 교만이 싹틀 수 없다. 은혜의 십자가 앞에서는 판단과 정죄가 없다.
비교의 영의 배후, 자기 사랑
지금까지 이 두 가지 비교의 영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 비교의 배후에는 ‘자기 사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나를 비교하여 열등감과 좌절감에 빠질 때, 나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여 우월감과 교만함을 느낄 때 공통적으로 우리의 초첨은 ‘나’에게 있다. 내 기준에 의해 남이 나보다 잘났고, 나보다 못난 것이기에 그렇다.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조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의해 내가 나를,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내가 우울한 것은 내가 이 정도는 대접받아야 하는데, 적어도 이 정도는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 기대치가 충족되지 못해서 그렇다. 내가 우쭐한 것은 내 기준으로 볼 때, 내가 남보다 특정한 부분에서 낫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것이 스스로 대견해서 그렇다. 내가 남을 부러워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내 기준으로 나보다 낫고, 내 기준으로 나보다 못하기에 그렇다. 이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세운 기준은 내 안의 ‘자기 사랑’, ‘자기애(自己愛)’에서 나온다. 나 정도 되면, 아무리 못해도 이 정도는 누려야 한다는 생각, 세상은 나를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나는 남들에게 이 정도 사랑은 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내가 고생한 것을 남들이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 등등, 우리는 우리가 설정한 자기애적인 틀 안에서 살고 있다. 사실 친구들끼리의 다툼, 부부싸움도 내 ‘자기애’가 상처 입고 느끼는 서운함에서 생길 경우가 많다. 내가 너에게 잘 해준 게 얼마인데, 나보고 더 이상 어쩌라고, 너는 내가 어떨지 생각해보았냐고, 그렇게 외치면서 우리는 싸운다. 이 문장들 속에서 ‘나’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나’만 중요하다. 주님이 없다. 내가 상처 입으면, 내가 운다. 내가 치켜져 올라가면, 내가 웃는다. 내가 짓밟히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손해보고 살 수가 없다. 나를 알아주고,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우리 삶에 이러한 ‘자기 사랑’이 내 삶을 이끌고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보자.
자기 사랑의 죄와 내 안의 그리스도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말한다. Self-Idolatry 이다. 주 앞에서 나아가 이 죄를 내려 놓아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만 내가 온전한 크리스천이 된다. 작은 예수가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첫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다른 이들이 나를 비방할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래서 내 자아가 살아서 꿈틀거릴 때, 이 구절을 떠올리자. 시체는 흥분하지 않는다. 시체는 상처받지 않는다. 성경은 앞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자기를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멀리한다고 증거한다. 내가 중요해질수록 예수님의 자리가 없어진다. 예수님이 초라해진다. 질그릇 안에 보화, 그리스도의 빛이 사라진다.
‘나’에서 ‘그리스도’로의 초점 이동
이제는 ‘나’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I- centered Life가 아닌 Christ-centered Life로 돌아가자. Is it all about me? Is there a place for Jesus? 내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의 꿈이 설 자리는 없다. 내 상처를 묵상하면, 남는 것은 우울증과 홧병이다. 나의 문제에 골몰하지 말고, 그럴수록 남의 문제 풀기에 앞장 서자. 내가 코가 석자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남을 배려할 여유가 없다. 내가 공부할 것 다하고, 돈 벌 것 다 벌고, 봉사하겠다는 사람치고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는 삶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속한 가정, 학교, 직장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내 상처를 확대에서 보기 시작하면, 우울증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 자매, ‘Hug: Life without limits’의 저자 닉 부이치치도 각자 전신 화상과, 선천성 사지말단증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쁨 하나로 감사히 오늘을 살고 있음을 또한 고백하고 있다. 내가 받은 고난이 나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계획이심을 알게 되는 순간, 고난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상처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된다. 헨리 나우엔은 우리 모두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했다.
더 이상 자기연민(self-pity)을 거부하자. 냉소주의 (cynicism)도 거부하자. 깨어진 마음을 붙잡고 일어나자 (Stand up with a broken heart). 사람을 의지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자. 사람에게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자. 빛 공해(light pollution)이라는 말이 있다. 도시에 건물들에서 나오는 빛이 너무 많아서 밤하늘의 별을 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내 마음 안에, spot light들이 내가 받은 여러 가지 모양의 상처들을 비추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spotlight없이도 빛 나아야 할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포도원 이야기에서 얻은 깨달음
해답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다. 내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비유가 있다. 바로 천국을 포도원에 비유한 예화이다. 마가복음 6장 9-10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있었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군을 찾으러 다녔다. 주인은 일군들을 계속 찾으면서 데려와서는 하루 종일 일한 자와 한 시간 일한 자 모두 같은 하루 품삯 돈을 주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천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써있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는가?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성경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수긍할 수 없었다. 그런 곳이 천국이라면, 가기 꺼림직하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자격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나서부터, 하루 종일 일한 자 역시 주인의 은혜가 아니면, 일할 기회도, 품삯도 주어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은혜인데, 나 같이 부족한 인간은 또 비교를 통해 은혜를 불만으로 순식간에 바꾸어 버리는구나 생각했다.
다시 한번 생각하니, 나 스스로를 하루 종일 일한 자와 당연시 하고 있었다. 내가 막판에 한 시간 일한 자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영적 교만’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가? 내 친구가 나보다 공부를 잘하고 성공하면 속이 쓰린가? 예수님은 자기 옆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의 회개를 듣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거하리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평생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과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같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불편한가? 인육을 먹고 살인의지를 다졌다는 지존파가 감옥에서 예수 믿고 천국에 갔다고 하면 그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나의 마음이 돌아온 탕자 이야기 속의 형의 마음과 같다. 아버지 재산을 미리 챙겨 집을 나가 버린 둘째 불효자식이 다 망하여 집에 돌아오자 얼싸 앉고 춤을 추며 기뻐하는 아버지를 첫째 형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형은 아버지 옆을 지키며 집안 일을 다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아버지가 둘째 때문에 오버하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형에게는 첫째, 아버지에 대한 감사가 없었고 둘째,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했기에 쉽게 비교의 덫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동생의 귀환을 기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내 영적 상태가 이 형의 상황과 같지는 않은지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해답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런데 또 한번의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닮은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부모님의 자녀 사랑이라고 했다. 만약,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아버지이고, 한 시간 일한 사람이 아들이거나 딸이었다면, 불평이 나올 수 없다. 오히려 주인에게 한 없이 감사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마음이구나. 아버지의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긍휼히 여기게 되고 감사히 여기게 되겠구나. 비교의 영이 스며들 틈이 없겠구나. 바울은 우리 안에, 이 아버지의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말한다. 이 깨달음은 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큰 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포도원의 이야기를 주인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 보았다. 하루는 지나가는데, 일군을 한 명이라도 더 부르기 위해, 거리로 급히 뛰어나가신 그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났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셔서 해가지지 전에 동일한 품삯을 줄 테니 포도원으로 같이 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졌다. 포도원은 포도를 생산해서 팔 아서 이윤을 얻기 위한 곳이 아니구나.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기 위한 곳, 당신의 자녀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기 위한 곳이구나.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 일터에서, 이웃을 동일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포도원 주인의 마음으로 섬겨야겠구나.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다음편에서 계속)
Feb 28, 2011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그리스도로부터
뒤늦게라도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으면 효자, 효녀가 되지 않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놀라운 아가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 자녀의 신분에 맞게, 천국 시민답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학교에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우리의 존경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그 분께 감사함을 표시하고 그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음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 분께 찬양과 감사와 예배, 그리고 말씀의 순종으로 드러난다. 크리스천이란 뜻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작은 예수들이란 말이다.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행한 일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 가운데 흘려 보내는 그 동일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인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형제 자매가 있는 분들은 부모님이 늘 하시는 말씀을 안다. 형제 간에, 자매 간에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는 것이다.부모님의 마음은 여유 있게 사는 첫째에게도 있지만, 어렵게 생활하는 둘째에게도 있다. 첫째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둘째의 일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챙겨주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다. 이 하나님 사랑을 이해하면 수직의 하나님 사랑이 수평의 이웃 사랑과 만나 온전한 십자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함과 동시에 이 지구 상의 모든 민족과 족속을 위하여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주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이야기한 뜻이 여기에 있다. 복음은 로마서 1장16장 말씀처럼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장16절에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He who has begun a good work in you will perform it till the day of Jesus Christ)’는 말씀이 있다. 우리 마음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내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는 예수님이시다. 이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받아 들였을 때부터, 이미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현재 진행형이면서 완성형인 꿈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며, 그 고귀한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하는 삶,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지 않은가? 우리들의 꿈은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꿈으로 가는 길의 장애물
그리스도의 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 하기 전에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꿈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다. 예수 안에서 누리는 행복과 평안을 빼앗아 가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방탕, 성적 타락, 미디어 중독, 마약 중독, 게으름, 무력감, 시기, 질투, 성냄, 그리고 수군거림(gossip) 등등 열거하자면 수없이 많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비교의 영’이다. 그 파괴력과 파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비교의 영이 우리를 사로 잡으면, 영적으로 더 이상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 할 수 없게 된다. 비교의 영을 ‘내적 비교 (Internal comparison)’와 ‘외적 비교 (external comparison)’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내적 비교는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나를 자꾸 남과 비교하면, 내가 위축된다. 주님이 부어 주셨던 은혜를 감사할 수 없게 되고, 앞으로 부어주실 은혜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외적 비교는 ‘나와의 비교’를 통해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내 기준으로 남을 자꾸 판단하다 남의 단점을 지적하다 보면, 우월감에 빠지고 곧 교만해진다. 은혜를 더 이상 갈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이제, 이 두 가지 비교의 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내적 비교를 거부하자.
먼저 내적 비교를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비교 당하는 것에 익숙해진 세대들이다. 부모님,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나 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비교 당하는 것에 익숙하다.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과 비교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꾸 비교 당하다 보면, 누구나 열등감 속에서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외부의 비교에 익숙해지다 보면, 내 자신을 스스로 남과 비교한다. 우리 집은 가난한데, 우리 집은 부모님이 이혼하셨는데, 저 친구는 집도 크고, 좋은 차도 타고 다니고, 집도 정말 화목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나는 환경도 좋지 않고 능력도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우울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것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효과적인 사단의 전략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미국에 유학 오기 전에, 내 스스로 두려워했던 것이 앞으로 내가 나의 동기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미국에서 암을 연구하고, 또 암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종양 내과 임상 트레이닝을 받으러 한국을 떠나 있는데, 10년, 20년 후 한국에서 개업하여,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 있게 살고 있을 내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비교가 내 행복을 얼마나 빠르게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른들의 후회 어린 말씀을 우리는 기억한다. 학교 다닐 때 저 친구는 나보다 훨씬 공부도 못했는데, 지금은 나보다 잘 살아. 우리 동기 중에 저 친구는 강남에 빌딩이 몇 개라더군. 제일 성공했어. 나는 왜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과를 선택하지 않았나 모르겠어. 이런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실 나도 세상에서 꼭 성공해야 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해답은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함
그런데, 언어 사용부터 정확하고 볼 일이다. 잘 사는 것, 성공한 것과 부자인 것과는 별 개라는 것을 명심하자. 가난하면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부자이면서도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하루하루 자살을 생각하는 극도의 불안과 우울 속에서 살아 갈 수 있다. 언어는 생각의 체계이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에서 잘 사는 것과 부자인 것을 똑같이 표현 할 때, 우리 스스로의 사고를 세상의 틀 안에 국한시키게 된다. 이 세상은 성공을 연봉이 얼마인 직장에 들어가는가, 또 의사로서 얼마의 연봉을 받고 살아가는가로 평가한다. 연봉은 액수이기 때문에, 참으로 비교하기 수월하다. 연봉 액수로, 회사 지분으로, 세상의 성공을 평가하고, 경제 잡지 Fortune은 전세계 부자 순위를 발표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비교를 통해 야금야금 앗아가려는 것임을 깨닫자. 나는 미국에 오기 전에 만났던 내 신앙의 동역자 친구들에게 내가 비교의 영을 거부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에 감사와 기쁨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부탁을 했다. 목사님들께도 찾아가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를 부탁 드렸다. 나 역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외에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미국 볼티모어(Baltimore)에서 공부하면서, 으리으리한 집에 사시는 한 교수님 댁에 방문하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하게 된 일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의 반응은 언제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아보나 하는 한숨이거나 나도 열심히 돈을 벌어 꼭 이런 집에 살아야 겠다는 야망, 둘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만약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없다면, 아무 소용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면, 내가 막 고생하며 노력하지 않아도, 언젠가 나도 이런 집에서 살 수도 있겠구나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나는 우리 주님이 있으니까, 찬송가 가사처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다 하늘 나라’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는 내 유학 전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았다.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될 때 비교의 영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 내가 영적으로 무디어 질 때, 사단이 나를 이 무기로 공격할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의 친구들이, 후배들이 그렇게 성공할 때, 너는 무얼 하고 산 거니?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사니? 여태까지, 인생을 허비했구나, 이런 속삭임이 들린다면, 그 때가 곧 다시 주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할 때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바로 이 말씀을 붙잡을 때다.
어디에서보다 누구와 함께
내가 미국에서 의사생활을 하기 전에, 한국에서는 시험장이 없어서 하와이로서 미국의사고시 시험 스텝 3 시험을 봤다. 이틀 동안 하루에 8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험이었다. 혼자 와이키키 해변 앞의 한 호텔에서 시험 전날 공부를 하면서 이틀간 시험을 봤다. 바로 한국에 가기에는 비행기 표가 아깝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험 친 후 하루 관광할 수 있는 날을 만들어 놓았다. 와이키키 비치에서 혼자 일광욕도 하고,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에서 스노클링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즐겁지가 않았다. 날씨는 좋고, 경치도 좋고, 스노클링하기에도 최적의 환경이었는데, 그렇게 기쁘지가 않았다. 좋은 것을 보고 좋다고 할 사람이 곁에 없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놀러 와서 재미있게 노는 그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외로움이 엄습했다. 그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어디에 가느냐’ 보다 중요한 것이 ‘누구와 함께 가느냐’이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당신과의 ‘동행의 기쁨’을 주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다. 정말 주 예수와 동행하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된다. 두려움도, 외로움도, 슬픔도, 분노도, 절망도 눈 녹듯 사라진다. 지구 상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내 사랑하는 아내와 딸 린아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그 땅에서 살고 싶다. 날씨가 좋든 나쁘든, 경제적으로 부유하든 어렵든 상관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 주 예수님과 동행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모르는 기쁨이 함께할 것을 믿는다. (다음편에 계속)
Feb 19, 2011 | 코스타 사역/KOSTA 세미나
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공고히 해야 할 우리의 정체성
그런데, 사람의 정체성은 자신이 받은 사랑만큼 뚜렷해진다. 어릴 적에 누구의 지극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아본 적이 있는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끔찍히 예뻐해주시고, 사랑해주셨는가? 내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셨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은 받은 사랑만큼 공고하다. 나도 어렸을 때 시골에 갔을 때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께 이것 저것 사달라 조르고, 늘 할머니 할아버지와 즐겁게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나의 사랑스러운 딸 린아가 우리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다. 부모인 나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흐뭇하다. 가족들의 사랑 안에 흠뻑 젖는 만큼 린아의 기억 속에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각인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가 안에 사랑이 충만할 때, 그 사랑이 린아로부터 또 다른 이들에게 흘러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이 인생이 파국으로 치닫을 때,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내가 죽으면 가장 슬퍼할 사람들의 얼굴들을 떠올려보자. 나의 외삼촌은 힘들 때, 우리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실망하시고, 슬퍼하실까 하는 그 생각 하나로 험난한 인생 여정을 걸어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너무나 힘들면, 자살 충동이 생기게 되어 있다. 그 때, 어릴 때 우리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그 할머니의 사랑이 나를 살릴 것이다. 할머니가 부어 주신 사랑만큼 내가 나의 가치를 인정한 셈이다. 자살을 통해 할머니의 사랑을 헛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할머니가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준 것처럼, 나 역시 그 사랑을 나의 자녀, 손자, 손녀에게 전할 수 있게 된다.
거꾸로 사랑이 없다면, 정체성은 흔들린다. 나에게 가치를 부여해준 사람이 없다면, 내가 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때, 내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어 있다. 내가 대한민국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국가로부터 받은 것보다 빼앗긴 것이, 당한 것이 많다고 느낀다면, 나도 대한민국을 사랑할 수 없다.
정체성에서 꿈으로
내 안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 내가 가장 존경하는 우리 부모님의 귀한 아들과 딸이라는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의 관심은 자연히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부모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귀결된다. 그런데 조국을 사랑하면 현재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 고민하게 되고,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조국을 위해 조그마한 것이라도 할 일이 없는지 찾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사랑하면, 지금 부모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실지 생각하고, 또 여쭈어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된다.
아내와 내가 우리 딸 린아를 기르면서 가지게 된 것이 ‘부모’라는 정체성이다.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린아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아이가 아프면, 내 맘이 찢어지고, 아이가 아빠 하고 내 품에 앉기면, 아무리 피곤한 날이어도 모든 피로가 다 한 순간에 사라진다. 부모의 입장에서, 나는 내 딸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필요한지에 가장 관심이 가고, 그 것들을 해주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 것은 지극 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나를 똑같이 고생하시면서 키우셨을 나의 부모님을 생각하니, 부모님께 앞으로 더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렇듯, 우리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우리가 해야 할 일들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의 정체성
그런데, 성경에 놀라운 말씀이 쓰여져 있다는 것을 아는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아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창조주 하나님 당신을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라고 허락해주셨다. 우리의 친구 되겠다고 하셨다. 우리가 어머니 뱃 속에서 잉태되기 이전부터, 아니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다고 말씀하신다. 믿겨지는가? 우리의 이름을 아시며, 머리카락 수까지 아신단다. 그 뿐 만이 아니다.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신다. 깜짝 놀랄 말이다. 가장 신기한 일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서 증거하듯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화목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로써 우리를 사망으로 이끄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잘 믿겨지지 않는 말씀이다. 그런데, 단순히 믿기만 하면, 이 복음을 내 삶의 진리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과 죄의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질 것이라 하신다. 이 복음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값을 지불할 것은 하나도 없다. 예수님께서 대신 모든 대가를 지불하셨기에 우리는 공짜로 받는 선물이다.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되는, 말 그대로 free gift이다. 무언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복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
자, 이제 정체성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들의 정체성(Identity)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신다. 그 분은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셨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가치 없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만큼의 가치를 부여해주신 분이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은 아무리 우리를 사랑해주신다고 해도, 나와 평생 매 순간 함께 하실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기에 실수가 있고,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다. 또한 사랑이 잘못된 방향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실수가 없으시고, 약속을 식언치 않으시며, 우리에게 조건 없이 사랑해주시는 분이시다. 항상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God is good all the time).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없으신 분이다. 우리와 늘 동행해주시며, 보호해주시는 분이시다. 그 우리가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실감이 가는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우리가 유업으로 물려 받을 것을 믿는가?
내 딸 린아가 아빠를 부르면, 나는 내 방에서 아무리 바쁜 일을 하고 있더라도 린아에게 달려간다. 또 우리 집과 집안의 물건 모두 다 린아 것이 된다. 교회에서 우리 가정을 부를 때, ‘린아 엄마 아빠네 ‘라고 하지 않는다. ‘린아네 가정’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자녀된 권세로 언제든지 아버지 하나님과 친밀히 소통할 수 있으며, 천국을 기업으로 물려 받을 정당한 법적 상속자들이다. 가슴으로 느껴지는가? 하나님 자녀됨의 권세,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두 다 가진 자이다. 이 조건 없는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거하자.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히 샘솟는 샘물과 같다. 그 생명수가 나를 적시고 흘러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부어 주시는 그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가? 이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힘이고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깨닫고 온전히 누려야 한다. 먼저 진정한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꿈을, 사명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의 하나님 자녀됨을 묵상하자. To do보다 to be가 먼저 이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무조건적 사랑 안에 흠뻑 젖어야 한다. 그 사랑에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듯이 ‘사랑 절임’을 당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하나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해준다.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어머니가 있었다. 아들은 괴물처럼 꺼멓고 흉측하게 생긴 자기 어머니가 참 부끄러웠다. 되도록이면 그런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어머니가 시키는 것은 다 하기 싫었고, 엄마를 무시하면서 반항적인 아이로 커갔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 얼굴의 비밀을 이웃 사람들에게서 듣게 되었다. 어릴 때 자신이 몰래 부엌에 들어가 이것 저것 만지다 끊는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가 어린 아들에게 쏟아지는 것을 보고 엄마가 달려들어 그 뜨거운 물을 주전자째 받아서 얼굴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아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엄마 얼굴만 보면 눈물이 났다. 아들은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했다. 엄마가 심부름 시켜주시길 기다리는 아이로 변하게 되었다. 먼저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눈이 바뀐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위 이야기 속 어머니 얼굴의 화상이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요, 그 분 손과 발의 못자국이다. 그 당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인 십자가, 그 고통과 수치, 모욕을 나의 죄 때문에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을 묵상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 안에 거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너를 죽기까지 사랑하여 구원하신 너의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건강, 물질, 직업은 우리의 정체성과 무관하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내 딸 린아를 보면서, 아프지 않고 잘 크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린아가 자기가 즐거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린아가 가난하게 살던지, 부자로 살든지 그 마음에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모로서 가장 기쁠 때는 그냥 아빠, 엄마를 아빠, 엄마로 불러주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린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뱃 속의 아기와 이야기하며, 기도해주고, 아기 옷을, 장난감을, 우유 병을 사며 기다리다, 드디어 분만실에서 응애 소리를 들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 하나님이 그러셨구나. 세상을 열심히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 아담에게, 너를 위해 이렇게 준비했다라고 하시며 기쁨과 감격으로 아담과 교통하셨을 우리 하나님이 떠올랐다. 린아가 나를 아빠라 불러주며 내 품에 앉길 때, 그렇구나, 우리 하나님도 내가 하나님을 찾을 때, 주님의 품 안으로 나아갈 때 가장 기뻐하시겠구나 생각했다. 린아가 다른 아이보다 걷는 것을, 말하는 것을, 한글책과 영어책을 늦게 읽게 되더라도, 내가 린아를 사랑하는 정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 가운데, 내가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학문적으로 얼마나 성공하든지에 무관하게 우리 주님은 나를 변함 없이 사랑하시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가 건강하든지 장애가 있든지, 돈이 있든지 없든지, 화려한 직업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내 가치는 내 소유에 있지 않고, 내가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신분에서 나온다. 내 가치는 내 능력과 배경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내 가치는 현재 내 상황이 어렵다고, 힘들다고 바뀌지 않는다. 만 원짜리 지폐를 발로 밟아 더럽게 한다고 해서, 만 원 지폐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자, 이제 자유하자. 내가 만든 기준, 주변의 기대가 충족될 때, 내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유하자. 더 많은 이들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줄 때, 내게 인기가 더 생길 때, 더 좋은 성적을 얻을 때, 더 전도유망한 직업을 가지게 될 때, 내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나의 가치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나를 지금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온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 미국 시민이 된 사람이 있다. 신체 장애자라고, 세금을 더 많이 낸다고, 특정 직업을 가졌다고 미국 시민이라는 그의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그는 시민권을 받기 위해, 여러 가지 사전 절차를 거친 후 미국 시민권 선서를 하면 된다. 복음은 사실 더 간단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받게 된다.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의 높고 낮음이 천국 시민이라는 우리의 신분에 결코 영향을 줄 수 없다. 항상 찬송을 부르고 기쁘게 살아가는 한 파출부 아줌마에게는 그녀가 일하는 저택에 사는 재벌가 가족이 부럽지 않다. 자신이 파출부라는 자격지심도 없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직도 모르고, 가족 경영권 다툼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가족들을 불쌍히 여길 뿐이다. 김우현 감독의 ‘팔복: 최춘선 할아버지’ 동영상을 보면, 할아버지께서 이 세상 최고의 권세는 ‘부러운 자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하나님 자녀인데,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이 배짱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 시편 23편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음편에 계속)